#151. 염병하내(鹽昞下內)
인시(寅時).
이른 새벽부터 궁에서 나온 병사들이 별채를 동서남북으로 둘러쌌다.
곧이어 왕의 교서를 전하는 사자(使者)가 안국동 홍봉한 대감의 고택으로 들어섰다.
형운의 복권(復權)과 한시바삐 환궁하여 동궁의 위를 이으라는 왕의 명령이 사자의 입을 통해 전해졌다.
<왕이 이르노니, 우리 집안의 재앙으로 3백 년 종사가 흔들리게 되었으니. 아아, 슬프고 슬프도다. 아침이 온다고 한들, 뿌옇게 흐린 시야가 맑아질 것인가. 계절이 바뀐다 하여, 임오년 여름의 상사(喪事)가 잊힐 것인가.
그저 다행인 건, 세손이 총명 영특하고, 슬기로운 상지(上智)의 자질을 갖추었으니, 이 나라의 복이다. 이에 세손을 효장세자(孝章世子)의 후사로 삼아 종통(宗統)을 이어받도록 할 것이다.
7월 명나라에서 있었던 일처럼 세손을 동궁(東宮)으로 삼을 것이며, 세자궁에 춘방과 계방을 둔다. 세손은 서둘러 환궁하여 빈대(賓對)와 강연, 경론에 참여하여 대소 신료의 의견을 듣도록 하며 국정에 참여토록 한다.
그러므로 이에 교시(敎示)하니, 마땅히 모두 알아야 할 것이다.>
사자가 읽은 교지를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맞은편에 서 있던 형운은 임금께서 계시는 궐을 향해 예를 올렸다.
지엄한 예법의 시간이 느리고 엄숙하게 흘러갔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검푸른 새벽빛이 연한 물색으로 흐려졌다.
동궁이 된 형운과 그의 가족을 궁으로 모셔갈 의식이 끝이 났다.
***
“저하.”
이레가 입을 열었다.
입궁을 위해 옷을 갈아입은 뒤, 그녀는 곁방으로 몸을 옮겼다.
온전히 두 사람만 있는 방 안으로 햇발이 스며들었다.
그녀의 앞.
의관을 정제한 형운은 가부좌한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저하…….”
재차 부르는 목소리.
형운은 눈을 떴다.
그의 눈동자에 물기에 젖은 이레의 얼굴이 들어왔다.
“어인 눈물이오?”
“기뻐 그럽니다.”
“기쁘면 웃어야지. 어찌 눈물을 흘린단 말이오?”
“저도 모르겠습니다. 웃어야 할 날에 청승맞게 눈물이 나오는지. 부디 오늘만 못 본 척해주십시오.”
“그대의 눈물을 내 어찌 못 본 척할 수 있겠소.”
형운은 이레의 이마를 덮은 잔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넘겨주었다.
“울고 싶으면 울어도 좋소.”
“저하…….”
“하나, 오늘만이오. 이후론 더는 우는 날 없을 것이오.”
눈물로 얼룩진 그녀의 모습을 형운은 애잔한 눈길로 더듬었다.
“더는 빈궁의 슬픈 모습은 보지 않을 거요.”
그는 조심스러운 손길로 이레를 어루만졌다.
뺨을 감싸고, 엄지로 쓰다듬듯 눈가를 훔쳐주었다.
“더는 그대가 아픈 일 없게 할 거요.”
따스한 물기가 그의 손끝으로 스며들었다.
내 여인의 눈물.
절실함과 애틋한 진심이 담긴 한 방울의 옥루(玉淚).
그녀의 진심을 닦아내며 형운은 다짐하였다.
다시는 아프게 하지 않으리라.
더는 울게 하지 않으리.
이곳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궁이라는 단단한 고치 속에선 절대 알 수 없었던 것들.
힘이 없다는 것이…….
각박한 현실이 무언지…….
나락 속에서 무기력해진 뒤에야 알게 되었다.
잃어봐야 비로소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 하였던가.
그 누구보다 고귀했던 존재였기에, 세상의 밑바닥으로 나동그라졌을 때 그를 향한 사람들의 시선은 매섭고 날카로웠다.
그리하여 결심하였다.
내 것을 지킬 힘을…….
상실의 고통으로 흔들리지 않을 굳건한 의지를…….
내 소중한 사람들을 보듬어 안을 수 있는 수 있는 온정을…….
가질 것이다.
어떻게든 갖고 말리라.
“이제 되었습니다.”
어느 사이, 눈물을 지운 이레가 말끔한 얼굴로 말했다.
“이리 오시오.”
형운은 이레를 곁으로 인도했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문 앞에 나란히 섰다.
“저하, 이러시면 아니 되옵니다.”
당황한 이레의 속삭임이 형운의 귓불에 닿았다.
“어찌 제가 저하와 나란히 있을 수 있단 말입니까. 이는 법도에 어긋난 행동이옵니다.”
형운은 대답 대신 그녀의 손을 단단히 잡았다.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그녀가 버둥거렸다.
그러나 형운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다.
“저하. 예법에 어긋나옵니다.”
걱정하는 이레에게 형운은 청량한 웃음을 보였다.
“누가 정한 예법이오? 누굴 위한 법도란 말이오?”
“궁의 가르침이옵니다. 궐의 법도와 규범이 그러하옵니다.”
“그런 것이라면…… 지금부터 바꿀 것이오.”
형운이 굳게 맞잡은 이레의 손을 보며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것이 나의 법도요. 내가 정한 격식으로 그대를 대할 것이오.”
이레의 뺨이 붉게 물들었다.
“분명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내릴 겁니다.”
“말하고 싶은 자들은 말하라 하시오. 비방하고 싶으면 그러라 하오. 그러나 그들도 언젠가 따르게 되겠지. 나의 법도, 그대를 위한 격식이 자신에게, 그리고 자신의 정인에게 얼마나 좋은 위로가 되는지 알게 될 터이니.”
말을 끝낸 형운은 문을 열었다.
그는 당당히 걸음을 옮겼다.
여전히 이레의 손을 단단히 움켜쥔 채로 형운이 속삭였다.
“이제, 그만 돌아갑시다.”
궁으로.
본디 우리가 있어야 할 곳으로.
“……네.”
이레도 어느새 움츠렸던 어깨를 펴고 형운의 손을 당당히 마주 잡았다.
그의 온기가 그녀의 손끝으로, 손마디로, 가지처럼 세세하게 뻗은 손금 사이사이로 뜨겁게 전해졌다.
***
“감축하옵니다.”
별채 마당으로 나온 형운과 이레에게 노마님이 다가왔다.
주름진 노파의 얼굴엔 온화함이 가득했다.
이레는 노마님의 손을 꼭 잡았다.
“그간의 보살핌, 잊지 못할 겁니다.”
“이 사람의 보살핌이 무에 큰 보탬이 되었을까요. 그저 이곳에서의 일들은 모두 잊으십시오.”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이곳에 할머님이 계시는데, 할머님의 보살핌을 제가 어찌 잊겠습니까. 종종 문안 서신 전하겠습니다. 날이 좋을 때, 궁으로 걸음 하여 주세요.”
“늙은이의 내일을 어찌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비루한 목숨 붙어 있는 한 빈궁의 부름엔 득달같이 달려갈 것이오니. 언제든 불러 주옵소서. 마마, 부디 궁에서도 무탈하셔야 합니다.”
“네, 할머님.”
노마님의 당부에 이레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노파가 뒤로 물러나자 집안의 며느리들과 짧은 눈인사가 이어졌다.
맏며느리 한 씨의 얼굴에 겸연쩍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 옆으로 고개를 숙인 며느리들의 모습이 이어졌다.
막내며느리는 곁눈질로 이레의 눈치를 살피다 살랑살랑 버들가지처럼 몸을 꼬았다.
“그간의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아직 세상 물정에 어두워 귀한 분을 모시지 못했습니다.”
“아닙니다.”
“빈궁마마, 이제 와 이렇게 말하면 어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이런 날이 올 줄 진즉 알았습니다. 주상 전하께서 우리 세손 전하를 얼마나 귀히 여겼습니까. 궁으로 다시 부르시는 건 당연한 처사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친근하게 구는 막내를 지나쳐 형운과 이레는 각자의 연과 가마로 걸음을 옮겼다.
“궁에서 봅시다.”
먼저 연에 오른 형운이 이레에게 말했다.
이레는 고개를 끄덕이며 가마 안으로 몸을 들였다.
문득 느껴지는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
본채로 이어진 중문.
홍인한의 며느리 이 씨가 창백한 낯빛으로 서 있었다.
잘근잘근 입술을 뜯는 모양새에 불편한 기색이 가득했다.
불안한 기색을 보이던 이씨가 우연히 이레와 시선이 마주쳤다.
이 씨의 눈가가 표독스럽게 변했다.
그 야멸찬 모습을 이레의 곁에 선 금정도 보았다.
“저, 저 못된 마님을 보았나.”
별채에 있는 동안 내내 굽었던 그녀의 어깨는 금의환향한 벼슬아치처럼 곧게 펴져 있었다.
파르르한 반응을 보이는 금정을 이레가 다독였다.
“좋은 날이니, 소란 떨 것 없다.”
“……네, 마마.”
금정을 물린 이레는 이 씨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이레를 향한 이 씨의 눈빛엔 증오가 가득했다.
노골적인 적의와 분노가 일렁이고 있었다.
하찮고 비루하게 내려다보던 이레가 하루아침에 다른 신분이 되었으니, 들끓는 투기를 참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최근 여러 사건으로 말미암아 집안에서는 물론 시아버지인 홍인한의 눈 밖에 난 처지인지라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이레는 담담한 눈으로 이 씨의 적의(敵意)를 받아내었다.
한참을 노려보던 이 씨는 결국 홱 찬 바람을 일으키며 돌아섰다.
이레를 태운 가마가 궁으로 떠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녀는 끝내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
형운과 이레를 태운 화려한 행차는 북촌을 떠나 궁궐로 향했다.
어디서 소문을 듣고 왔는지, 거리엔 환궁하는 왕세손을 보기 위한 사람들로 가득했다.
수많은 시선을 담담히 받아내며 동궁과 동궁빈의 행차는 대궐을 향해 나아갔다.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북촌을 지나 대광통교를 건너 운종가의 길고 너른 대로에 이르렀다.
너무나 평온한 시간인지라.
무언가 할 일을 하지 않은 듯한 느낌마저 들 지경이었다.
그때였다.
“웬 놈들이냐?”
동궁의 연을 호위하던 최치성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말하는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무슨 일이냐?”
형운은 가림막을 걷어 올렸다.
까맣게 탄 얼굴의 사내가 형운의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감히 뉘의 행차를 방해하는 것이냐?”
최치성의 으름장에도 사내는 동요하지 않았다.
“소인은 경기도 안양에서 올라온 송 아무개라 하옵니다.”
그것이 신호였을까?
“소인은 충청도에서 올라온 김 아무개이옵니다.”
“소인은…….”
좌우에서 사람들이 하나둘 나타나 행차의 앞을 가로막았다.
얼핏, 그 숫자를 헤아려도 기십은 족히 넘었다.
“이게 뭐하는 짓인가? 이게 대체…….”
최치성과 홍인모의 얼굴에 핏기가 사라졌다.
대궐이 코앞이었다.
그러나 앞을 가로막은 사람들로 인해 왕세손의 행렬은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
“하하하.”
홍인한의 수염이 웃음소리에 따라 출렁거렸다.
그는 느긋한 손길로 수염 쓸어내렸다.
“그래, 유생들은 몇이나 모였는가?”
홍인한의 물음에 승지 홍지해가 흠흠 헛기침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뜻을 품은 유생은 모두 모이라 연통을 돌렸으니. 그 수가 어마어마할 것 같습니다.”
“수백은 될까?”
“족히 수천은 넘을 겁니다.”
“하하하, 그 많은 수가 왕세손의 환궁을 막으며 한목소리로 반대를 외칠 터이니, 장관이 따로 없겠군.”
왕에게서 교서가 내려졌으나, 여전히 홍인한은 형운을 세손으로 칭했다.
그가 동궁이 되었음을 인정하지 않았던 까닭이다.
“아무렴요. 아무리 전하라 하시더라도 유생들의 바람을 꺾을 순 없을 겁니다.”
“학업에 충실한 유생들이 이토록 나랏일에 앞장서니. 앞으로 이 조선의 앞날이 환할 것이야.”
“아무렴요, 지당한 말씀입니다.”
맞장구치는 홍지해를 보며 홍인한은 입가에 흐뭇한 미소를 떠올렸다.
민심은 천심이라.
왕은 언제나 백성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런 연유로 어린 유생들이 올리는 상소는 곧잘 왕의 마음을 움직이곤 하였다.
홍인한은 왕의 그런 여린 마음을 이용하였다.
이날을 위해 그간 유생들의 생활을 돌봐주기도 했다.
도성 안은 물론이고, 지방의 영향력 있는 자들을 선별하여 특별히 공을 들였다.
그들의 곳간에 쌀을 채워주고, 계절마다 비단이며, 음식이며, 일손까지 아낌없이 내어주었다.
이제 그간 베푼 은혜를 받아낼 때였다.
죄인의 아들이 궁으로 돌아온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십학사가 사(死)를 결정한 세자의 아들이 동궁이 되는 꼴을 마냥 지켜볼 수는 없었다.
왕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면 민심을 직접 보여주는 수밖에.
본디 백성이란 어리석고 무지하여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니. 조금 번거롭지만, 공맹의 도리를 아는 자들을 동원하여 그들의 뜻을 보여야 한다.
‘폐세손의 환궁은 있을 수 없는 일이옵니다.’
오늘 유생들은 한목소리로 외칠 것이다.
‘죄인지자불위군왕. 죄인의 아들이 왕이 되는 일은 절대 일어나선 안 될 일이옵니다.’
그들은 이 나라에 드리운 암운을 예감하며 비통에 찬 눈물을 흘리리라.
그 앞에 선 형운은 무슨 표정을 지을까.
틀림없이 비참할 것이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벌써 마음 뿌듯하니.
홍인한의 얼굴엔 웃음꽃이 가득하였다.
그러나 잠시 후.
웃음으로 가득한 그곳의 문이 돌연 벌컥 열렸다.
“대감!”
홍인한의 미간이 구겨졌다.
한창 즐거운 기분을 만끽하던 참이건만.
“병판이 아니오. 무슨 일로 그리 놀란 표정이시오?”
“육조 거리에…… 아니, 대광통교 넘어서까지 사람들로…….”
병조판서는 흥분한 표정으로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아, 그 일 말이구려.”
아무래도 유생들의 소식을 접하고 놀라 달려온 모양이다.
홍지해의 말처럼 전국 팔도에서 뜻있는 유생들이 모조리 달려온 모양이다.
그 많은 사람이 한데 몰려와 소란을 피우니, 병조판서가 놀라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마침 나도 막 그 일을 전해 들은 참이오. 크게 신경 쓸 일은 아니니, 걱정하지 마시오.”
“별일이 아니라뇨?”
“왕께서 덜컥 어이없는 결단을 내리시니, 어린 유생들이 얼마나 걱정이 많았겠소. 앞날을 근심하여 상소를 올리고 한목소리로 결단을 내려주십사 읍소하려 모인 것이니. 그야말로 진정 이 나라를 걱정하는 충정에서 나온 일이 아니겠소? 허허허, 그러니 걱정하지 않아도 되오.”
홍인한의 웃음 섞인 설명에도 병조판서의 불안은 펴지지 않았다.
“그게 아닙니다. 육조거리가 사람들로 넘쳐나고 있단 말입니다.”
“내 지금껏 설명하지 않았소. 우리와 뜻을 함께하는 유생들이 모인 것이라고.”
“그게 아니란 말입니다.”
갑갑증에 가슴만 쳐대던 병조판서는 급기야 홍인한을 잡아끌었다.
“대감께서 직접 보셔야 합니다. 어서요, 어서 서두르세요.”
“어허, 대체 무슨 일이관데…….”
등 떠밀린 홍인한은 병조판서와 함께 관청 밖으로 향했다.
과연 육조거리는 사람으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홍인한의 흐뭇한 표정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이게 어찌 된 일인가!”
***
승지 홍지해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의 부름을 받고 전국에서 유생들이 몰려들었다.
하지만 그들은 본래의 계획대로 형운의 앞을 가로막지 못했다. 그 수가 애당초 예상보다 적기도 하였지만, 그보다…….
“동궁 저하, 경하드리옵니다.”
“이런 날이 오기만을 바라옵고 바랐나이다.”
“감축하옵니다, 저하!”
“어긋난 것이 이제야 제자리를 찾는 듯합니다.”
수없이 많은 인파와 목소리가 육조거리를 넘어 대궐까지 메아리쳤다.
그들은 유생들이 아니었다.
행상으로 보이는 자.
초립을 쓴 노인.
난전 상인.
거간꾼.
어린 소동(小童)부터 아낙에 이르기까지.
나이도 복색도 다양한 사람들이었다.
홍지해가 동원한 유생들도 ‘죄인의 아들’ 운운하며 목소리를 높였으나, 형운을 반기는 거대한 인파에 밀려 한구석에서 힘없는 저항을 할 뿐이었다.
“이것이 대체 어찌 된 일인가?”
“아침 일찍부터 사방에서 몰려든 사람들이옵니다.”
“아침부터? 그렇다면 세손이 불러모은 사람들이란 말이냐?”
병조판서의 대답에 홍인한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대체 무슨 수로.
이 많은 수를 모으려면 천문학적인 자금이 필요할 터.
성 밖으로 밀려난 폐세손에게 그런 여유가 있을 리 없었다.
“유생들의 수는 어찌 저리 적은가?”
뒤늦게 사정을 살피고 돌아온 홍지해가 고개를 푹 숙이며 답했다.
“참석의 뜻을 보인 자는 많으나, 여비를 구할 방도가 마땅치 않아 참석하지 못하였다 합니다.”
“여비가 부족해? 지금까지 그들에게 몰래 쥐여준 것이 얼마나 많은데?”
“이번 달 들어 무슨 이유에선지 지원이 딱 끊겼다 합니다. 아마도 오늘 인원이 적은 것은 그 때문이 아닌지…….”
“항의의 뜻으로 불참하였다, 이 말인가.”
홍인한은 이를 갈았다.
나라의 명운이 걸린 일인데, 그깟 여비가 문제일까.
“여비? 그렇다면 저들은 어떻게 된 일인가? 어느 미친 작자가 저 많은 사람을 동원하여 세손을 돕는단 말이냐?”
그는 알지 못했다.
육조거리를 가득 메운 사람들.
그들 모두가 누군가의 명이 아닌 자발적으로 모인 사람들임을.
“이들 모두가 나를 위해 나왔단 말인가?”
자신을 반기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형운은 심장이 뛰었다.
울컥, 뜨거운 것이 입안에 고였다.
그는 고개를 돌렸다.
마침 가마 밖을 살피던 이레와 시선이 마주쳤다.
형운이 눈으로 물었다.
‘이 역시도 그대가 부린 조화요?’
이레는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저들은, 저 사람들은 모두 저하를 진심으로 믿고 따르는 것이옵니다.’
별채로 밀려나고도 백성들의 삶 속에 주저 없이 뛰어든 형운의 정성과 진심이 맺은 결실이었다.
수많은 이들의 부르짖음.
잠시 생각하던 형운은 뜻밖의 결단을 내렸다.
“여기서부턴 걸어가겠다.”
“하오나…….”
최치성이 말렸으나, 형운은 손을 들어 자신의 의지를 전달하였다.
“이 많은 백성이 천 리 길도 마다치 않고 찾아왔는데, 내 어찌 지켜만 볼 수 있겠느냐. 걷겠다. 이들과 함께 궐까지 가겠다.”
가마에서 내린 형운은 마중 나온 사람들과 눈을 맞추며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느릿느릿 움직이다 보니 대궐 문 앞에 다다랐을 때엔 이미 해가 중천이었다.
궐문 앞.
홍인한과 신료들이 황망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무심한 시선으로 조정 대신들을 훑던 형운은 가장자리에 있는 홍인한의 곁으로 다가갔다.
뻣뻣하게 서 있던 홍인한이 고개를 숙였다.
그의 목덜미로 형운의 음성이 내려앉았다.
“경의 노고가 많았다 들었소.”
“아니옵니다.”
“오면서 보니 몇몇 유생들이 보이던데. 경이 날 위해 준비한 것이오?”
“저, 저는 알지 못하는 일이옵니다.”
“그렇겠지. 경이 준비하였으면 그처럼 조촐하였을 리 없지.”
“……그렇사옵니다.”
“아무튼, 고맙소. 이렇게 성대한 환대를 준비하였을 줄은 짐작도 하지 못하였소.”
형운은 진실로 기뻐하는 표정으로 홍인한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을 향해 흐뭇한 시선들이 집중되었다.
홍인한은 불편한 기색을 감추기 위해 더욱 깊이 머리를 숙였다.
“경하…… 드리옵니다, 저하. 소신, 저하의 환궁을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사옵니다.”
마지못해 빈말을 건네는 홍인한의 귓가로 형운의 얼굴이 바싹 다가왔다.
얼굴 가득 평온한 웃음을 머금은 채.
작금의 상황이 참으로 행복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형운이 입을 열었다.
홍인한에게만 들릴 작은 속삭임.
“염병하내(鹽昞下內).”
“……네?”
홍인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고개를 드는 그의 시야에 내려다보는 형운의 시선이 닿았다.
형운이 무얼 그리 놀라느냐는 듯 말끔한 표정으로 말했다.
“경이야말로 세상의 소금(鹽)이며 빛(昞) 같은 존재요. 아니 그렇소? 하하.”
툭툭, 홍인한의 어깨를 다독거린 형운은 걸음을 옮겼다.
얼떨떨한 얼굴로 그의 뒤를 쫓는 홍인한은 머릿속이 복잡했다.
이게 욕이야? 칭찬이야?
그런 홍인한의 속내를 알 리 없다는 듯.
앞서 걷는 형운의 뒷모습은 참으로 크고 위엄이 가득하였다.
궁을 떠날 때, 잔뜩 움츠렸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진실로 한 나라의 군주다운 당당한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