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 은인(恩人)
별채의 대문 앞이 소란스러웠다.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더니.
대궐에서 일어난 기변(奇變)은 날이 밝기도 전에 도성 곳곳으로 퍼져 나갔다.
셈속 빠른 사람들은 재게 움직였다.
세손이 동궁으로 확실시되었으니, 장차 이 나라의 주인이 뉘가 될지 분명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새벽 이른 시각부터 형운과 이레가 머무는 별채로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그중엔 세손이 궁에서 쫓겨날 때 죄인의 아들이라며 수군대던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아니, 그런 사람들일수록 상황이 바뀌면 낯빛을 바꾸며 눈도장이라도 찍어두려 안달하기 마련이었다.
느닷없이 밀려든 손님들로 인해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본채의 노복들이 별채로 달려와 손님맞이를 서둘렀다.
밖에선 집안의 청지기가 손님의 이름과 선물목록을 적고 순번을 정하는 일로 시끄러웠다.
형운을 찾는 사람들만큼 이레와의 독대를 원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녀가 세자빈이 되면 장차 내명부의 큰 축이 될 터.
그러나 정작 이레는 별채에 없었다.
소란 중에 뒷문을 통해 몰래 빠져나간 까닭이었다.
지금 이레에겐 다른 무엇보다 우선해서 확인해야 할 일이 있었다.
가마를 타고 바쁘게 이동한 그녀가 찾은 곳은 다름 아닌 수월이었다.
“이곳엔 어인 일이십니까?”
한서로가 놀란 표정으로 달려 나왔다.
이레는 그런 한서로의 손부터 덥석 잡았다.
“괜찮습니까?”
한서로를 살피는 눈엔 걱정이 가득하였다.
“빈궁마마를 찾는 사람이 많았을 터인데. 제 안부를 확인하러 일부러 걸음 하신 것입니까? 그런 일이라면 다른 사람을 시켜도 될 터인데요.”
“직접 확인해야지요. 다른 일은 몰라도 이 일만은 내 두 눈으로 직접 하여야지요.”
그동안 이레는 한서로가 걱정되어 한시도 마음 편하지 않았다.
지켜보는 눈이 없었다면 진작 이곳을 찾았으리라.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한서로는 대수롭지 않은 일인 양 태연하게 대꾸했다.
하지만 당시의 상황을 돌이켜보면 절대로 가볍게 생각할 일이 아니었다.
주상 전하의 행차.
그 중차대한 일이 벌어진 당일.
갑자기 십학사의 모임을 알리는 통보가 날아들었다.
심혈을 기울인 계획을 실행에 옮기려던 이레에겐 마른하늘에 떨어진 날벼락 같은 사건이었다.
주상 전하에게 형운의 뜻을 전하는 역할은 이레가 아닌 다른 사람은 절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레가 아닌 다른 이가 왕과 독대하였다간 자칫 뜻이 곡해될 여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레였기에.
세자빈이었던 그녀가 직접 만나야만 전해질 수 있는 진심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정후겸의 느닷없는 호출은 그야말로 허점을 제대로 짚인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때 한서로가 나섰다.
그녀는 주저하지 않고 이레를 대신하여 십학사 모임에 나섰다.
면사로 얼굴을 가렸고, 고뿔을 핑계로 말 대신 필사를 한다는 나름의 대책이 있긴 하였지만, 들킬 가능성이 높은 위험한 도박이었다.
“다행히 그곳에 해 혼자 있더군요. 더구나 그는 만취한 상태라, 안심할 수 있었습니다.”
“정말 괜찮은 겁니까? 어디 다친 곳은 없습니까?”
“걱정하지 마시어요. 빈궁마마가 아니었다면 이미 죽었을 목숨입니다. 덤으로 얻은 삶이라 생각하면 두려울 것이 없답니다.”
“덤으로 얻은 삶이 어디 있겠어요. 누구에게나 삶은 소중한 겁니다.”
“안심하십시오. 저는 이렇게 무사합니다.”
간신히 이레를 안심시킨 한서로는 그녀를 수월의 내실로 안내했다.
“별채 소식은 들었습니다. 대문 앞이 사람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더군요. 참으로 염치도, 체면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한서로는 따뜻한 찻물을 이레에게 건네며 말을 이었다.
“어려울 땐 더 모진 이야기로 사람을 벼랑 끝으로 내몰더니, 지금은 언제 그랬냐는 듯 입안의 혀처럼 구니…….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이 다 민망할 지경입니다.”
이레는 찻잔을 들었다.
“그게 그들이 사는 방식인 걸, 어쩌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이 잘 먹고 잘사는 게 싫습니다. 그래야만 잘살 수 있다는 것도 참으로 싫습니다.”
“어디 사람의 문제이겠습니까. 그래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이 세상의 방식이 문제겠지요.”
이레의 말에 묵묵히 끄덕이던 한서로가 서랍에서 장부를 꺼냈다.
“무엇입니까?”
“이번에 십학사들이 요구한 물목과 건넨 돈의 액수입니다.”
정확하게는 해가 만사여의에게 바란 것이었다.
장부를 펼쳐 내용을 살피던 이레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십학사가 원한 물품과 금전의 액수는 그녀의 상상을 아득히 초월하였다.
“맙소사, 이렇게나 많이 요구했단 말입니까? 무리가 되지 않습니까?”
한서로는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정도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분명 해가 원한 금전은 엄청난 금액이었다.
하지만 목숨값에 비하면 저렴한 축이었다.
한서로는 시퍼런 살기를 번뜩이던 정후겸의 눈빛을 지금도 잊을 수 없었다.
‘물’이 바뀌었음을 눈치채고 그가 보인 살기는 산전수전을 다 겪은 그녀로서도 간담이 서늘할 정도였다.
다행히 정후겸은 지극히 냉정하고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한서로를 죽여 분을 푸는 대신 철저하게 이득을 챙겼다.
장부에 적힌 상상을 초월하는 요구가 바로 그것이었다.
“매번 고맙고, 미안합니다.”
“그리 말씀하지 마시어요, 빈궁마마.”
“만사여의를 만난 건 제겐 큰 행운입니다. 만사여의가 없었다면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겁니다.”
“빈궁마마 덕분에 죽을 고비를 넘긴 저입니다. 이번 일로 받은 은혜를 조금이나마 갚을 수 있어 다행입니다.”
한서로의 해사한 미소에 이레의 눈빛이 더욱 짙어졌다.
그녀에게 만사여의는 참으로 고마운 사람이다.
돌아가신 할아버지께서 벗이 없는 그녀에게 보낸 사람이 아닐까, 착각이 들 만큼 든든했다.
이레가 한서로에게 물었다.
“앞으로 어떻게 하실 생각이십니까?”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할 생각입니다. 아니, 원하는 이상으로 풍족하게 물품과 자금을 보낼 생각입니다. 십학사가 만들어진 이래로 가장 넉넉한 시기를 보낼 수 있도록. 그리하여 절 든든한 물주(物主)로, 자기 곳간의 돈 항아리로 여기도록 만들 작정입니다.”
“계속 그렇게 당해줄 생각은 아니겠지요?”
“당연히 당하기만 할 생각은 없습니다. 저는 상인입니다. 때가 되면 투자한 만큼 철저하게 이문을 붙여 받아낼 생각입니다.”
한서로는 이레에게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냈다.
“빈궁마마께서 오래전에 예측한 그때가 되면, 비로소 그들도 알게 되겠지요. 진정 목줄을 쥔 쪽이 어느 쪽인지 말입니다.”
다부진 다짐.
비록 약관도 되지 않은 어린 소녀지만, 시전 상가의 3할 이상을 차지한 당당한 여장부의 다짐이었다.
이레는 머지않아 한서로의 다짐대로 될 것임을 확신하였다.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빈궁마마를 믿습니다.”
미소를 나눈 두 여인은 앞으로의 일을 논의했다.
오후가 되어서야 비로소 대화가 끝났다.
“빈궁마마.”
이야기를 마치고 방을 나서는 이레를 한서로가 불렀다.
이레가 의문 어린 눈빛으로 돌아보자 한서로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도 그때의 마음 변하지 않으셨습니까?”
“어떤 마음 말입니까?”
“십학사가 되고자 마음먹었을 때 하셨던 그 다짐 말입니다.”
이레는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부쩍 높아진 구름.
청명한 푸른 하늘을 지켜보던 이레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 글자 한 글자 새기듯 답했다.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이레는 수월을 떠났다.
한서로는 이레를 태운 가마가 사라진 후에도 오랫동안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오래전, 별채로 물러난 이레가 자신을 찾아왔을 때 하였던 말이 귓가를 떠돌았다.
십학사에 무리하여 들어가려는 이유를 물었을 때, 이레는 형운을 지키고 싶다는 말과 함께 다소 황당한 말을 했다.
‘십학사, 그곳을 차지하려 합니다.’
형운이 장차 이 나라를 다스리는 데 도움이 되고 싶다 하였다.
그를 위해 십학사를 집어삼키고야 말겠다고 했다.
한서로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미소 지었다.
“세상 사람들은 저더러 여장부라 하지만, 정말 대단하신 분은 빈궁마마이시옵니다.”
천하를 꿈꾸는 여인.
그 여인이 곧 궁으로 돌아간다.
***
폐세손의 별채가 때아닌 손님으로 몸살을 앓고 있을 무렵.
궁의 한적한 후원에서도 조용한 움직임이 있었다.
“장 집의.”
발밑에서 바스락거리는 낙엽 소리가 들려왔다.
적당히 거리를 두고 앞서 걷던 화완옹주는 뒤를 돌아보았다.
“집의는 지금의 상황을 어찌 생각하오?”
화완의 물음에 장무열은 침묵했다.
그 침묵이 답답하였던가.
화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바마마께서 세손을 다시 궁으로 부르셨소. 어디 그뿐일까. 동궁의 주인으로 삼으셨으니. 한동안 궁 안팎이 분주할 것이오. 곧 궁은 새로운 동궁을 두고 두 편으로 나뉘어 거세게 충돌할 것이오. 이를 어찌 생각하시오?”
장무열은 이번에도 그저 조용히 화완을 바라보기만 하였다.
그 무거운 침묵에 화완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장 집의. 그대는 어느 편에 설 것이오? 세손의 편에 설 것이오? 아니면…….”
멈췄던 걸음을 다시 옮기며 화완이 말을 이었다.
“세손을 반대하는 자들의 편에 설 것이오?”
바스락바스락.
가을 낙엽 부서지는 소리가 후원의 고요를 깨트렸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맥없이 흩어지는 계절 사이로 장무열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저는…….”
후원으로 산책 나온 이후, 내내 침묵하던 사내가 입이 열렸다.
모처럼 들려온 목소리에 화완은 다시 멈춰 섰다.
낮게 내쉬던 숨도 참은 채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윽고 장무열의 음성이 들려왔다.
“옹주마마의 편에 설 것이옵니다.”
화완의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도홧빛이 깃들었다.
그러나 이내 붉은색을 지워낸 여인은 속눈썹을 한껏 아래로 내리깔았다.
“못 본 사이 사람 눙치는 재주가 부쩍 늘었소.”
“…….”
“진심이오? 진심으로 내 편에 서겠단 말이오?”
“진심입니다.”
“어찌하여?”
“저와 옹주마마의 목표가 같기 때문입니다.”
“목표라. 내 목표가 무엇이관데?”
“이 나라, 조선을 위함이 아닙니까?”
장무열의 대답에 화완은 짤랑짤랑 방울 소리 같은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래도 그대는 내가 무얼 원하는지 잘못 아는 듯하오.”
“그럼, 무엇입니까? 옹주께서 원하시는 목표가.”
성큼, 화완의 바로 곁으로 다가간 장무열은 고개를 숙였다.
그 무람없는 접근에 화완은 기분 좋은 소름을 느꼈다.
오소소 솜털이 쭈뼛 선 화완의 귓불에 장무열의 입술이 다가왔다.
이윽고 미풍과 함께 속삭이는 음성이 들려왔다.
“대체 그것이 무엇입니까? 당신께서 원하시는 것이.”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면?”
“따르겠습니다.”
“진심으로?”
“진심으로, 따르겠습니다.”
화완은 고개를 돌렸다.
장무열의 검은 눈동자가 보았다.
서로의 숨결을 느낄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
“그 말, 믿어도 되겠소?”
“제가 허튼 말을 할 사람으로 보이십니까?”
화완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옹주께선 제게 천하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입니다.”
“……!”
다소 멍해진 표정의 화완을 뒤로하고 장무열은 걸음을 옮겼다.
후원을 나서는 그의 발밑으로 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 그림자의 한쪽 끝에 위태롭게 매달린 침통이 찰랑거렸다.
***
어둑한 어둠이 내려앉는 사헌부로 장무열이 들어섰다.
중문을 지키는 문군사는 서둘러 자세를 바로 했다.
새로운 집의께서 얼마나 깐깐한지 이미 충분히 경험한 까닭이다.
장무열은 무표정한 얼굴로 경직된 군졸들을 지나쳐 집의처로 들어섰다.
직무실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열두 폭 병풍을 배경으로 가로로 긴 탁자와 의자.
그리고 탁자에 수북하게 쌓인 문서들.
옹주의 부름으로 후원 산책을 나섰을 때와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장무열의 눈동자에 이채가 떠올랐다.
공기 중에 희미하게 섞인 낯선 냄새.
장무열은 조용히 허리춤의 검집에서 검을 뽑았다.
“누구냐?”
서늘한 그의 물음에 문서가 수북하게 쌓인 탁자 아래에서 늘어지는 하품 소리가 돌아왔다.
“아하함, 사람 잠도 못 자게 하는구나.”
눈가에 달라붙은 잠을 떼며 일어난 사내, 김기대였다.
“김기대.”
장무열의 미간이 한데로 모였다.
“잠시 잠든 사이에 이 나라의 예법이 크게 바뀐 모양이군.”
“무슨 소리냐?”
눈가를 손등으로 비비던 기대는 저를 향해 겨눠진 장무열의 검 끝을 손가락으로 무심하게 밀어냈다.
“은인에게 무시무시한 날붙이부터 내미는 무례한 인사를 방금 보았거든.”
“언제부터 네놈이 내 은인이 되었단 말이냐?”
“어허, 이거 큰일 날 사람이군. 그날 밤의 일을 벌써 잊었단 말인가?”
기대는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비 내리는 밤이었지. 그대는 지치고 피곤하여 곤궁한 처지였지. 그때 그곳에 내가 나타났지. 지금도 날 보던 그때의 자네 눈빛이 잊히지 않는군. 그 뜨거운 눈빛이란…….”
“헛소리는 그쯤 해라.”
“부정할 생각인가? 그래도 소용없어. 자네는 잊었을지 몰라도, 난 절대 잊을 수 없으니까. 혼절한 그대를 부둥켜안고 밤새도록 흙탕물 속을 함께 뒹굴던 그 뜨겁고도 아슬아슬하면서도 위험천만하고 짜릿한 경험을 내 어찌 잊을 수…….”
“남이 들으면 오해하겠구나. 그보다 여기서 뭐 하는 것이냐?”
“보면 모르는가? 밀린 잠을 보충하고 있었다네.”
“언제부터 사헌부의 집의처가 그대의 잠자는 장소가 되었느냐?”
“그래서는 안 된다는 규범이라도 있는가? 거참, 생명의 은인을 대하는 태도가 참으로 야박하군.”
장무열은 더는 상대하고 싶지 않다는 듯 검을 수습하고 자리에 앉았다.
밀린 업무를 보려는 그의 곁으로 기대가 슬그머니 다가와 코를 킁킁댔다.
“이게 무슨 냄새지?”
“또 무얼 하는 짓이냐?”
“어디에서 무척 친숙한 냄새가 솔솔 풍겨서 하는 말이라네.”
“그만두라 하였다.”
“아! 이곳이었군.”
서늘한 눈빛에도 끈질기게 달라붙던 기대는 기어코 장무열의 오른팔을 잡아당겼다.
“으음!”
장무열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낮은 비명이 흘러나왔다.
“그럼 그렇지.”
의기양양해진 기대가 그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힘없이 찢겨나간 소맷자락 사이로 핏물이 흥건하게 배인 붕대가 보였다.
“아까부터 비릿한 혈향이 진동을 하더니. 여기서 나는 것이었군.”
“신경 꺼라.”
장무열은 상처를 숨기며 서둘러 돌아섰다.
그러나 기대의 손이 그보다 더 빨랐다.
순식간에 피 묻은 붕대의 매듭이 끌러지고 벌겋게 벌어진 상처가 드러났다.
깊이 베인 상처를 보며 기대는 무열을 빤히 응시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건가?”
“종종 있는 일이다. 별거 아닌 상처야.”
괜스레 변명하던 장무열은 아차 하며 얼굴을 찡그렸다.
내가 왜 이놈에게 변명하는 거지?
예상하지 못했던 자신의 반응에 정색하자니, 상처 끝으로 기대의 손끝이 다가왔다.
한참을 요리조리 상처를 살피던 김기대가 장무열에게 물었다.
“날카롭게 갈라진 것이. 영락없는 검상(劍傷)인데. 어떤 놈의 짓거리냐?”
“알면?”
복수라도 해주려고?
“제대로 검 쓰는 법부터 다시 알려주려고.”
“뭐라? 그걸 지금 농이라고…….”
“그래, 농일세. 어디 가서 칼침까지 맞고 와서 제대로 치료도 안 했는가? 한 치만 오른쪽으로 비껴 맞았어도 치료고 뭐고 내 얼굴도 못 보고 이승 하직할 뻔하였네.”
“내 몸은 내가 알아서 한다.”
“그래. 다음부터는 꼭 그렇게 하게. 귀찮게 내 손 쓰지 않게 말이야.”
기대는 거부하는 장무열의 가슴팍을 밀어 반강제로 의자에 앉혔다.
그러곤 품 안에서 침통을 꺼냈다.
단침을 꺼내 바늘귀에 실을 매는 그에게 장무열이 물었다.
“무얼 하려고?”
“보면 모르겠나? 이대로 버려두면 곪아.”
“놔둬라. 약초나 바르면…….”
“그렇게 대충 살다, 대충 죽어서, 대충 저세상 구경도 가는 게야.”
기대는 등잔불에 소독한 바늘을 어느새 상처에 들이댔다.
“하지 마라.”
장무열이 잔뜩 경계한 눈빛으로 말했다.
“이제 시작하겠네.”
“내 몸에 손대지 마라. 차라리 의원에게 보이겠다.”
“그래. 나중에 꼭 보이게. 조금 아플 것이야.”
“하지 마!”
“곧 적응될 게야. 정 힘들면, 이거라도 물고 있던가.”
기대는 저항하는 장무열의 입에 명주 수건을 물렸다.
그런 다음 다짜고짜 시술에 들어갔다.
곧 장무열의 입에서 억눌린 신음이 흘러나왔다.
***
“으읍…….”
보고할 문서를 들고 막 집의처로 들려던 허상익은 굳어버리고 말았다.
집의처 안에서 괴이한 신음이 들려온 까닭이다.
“으으으!”
설마…….
의구심과 당혹감이 그의 뇌리를 동시에 스치고 지나갔다.
때마침 흐릿하게 불빛을 밝힌 직무실 안에서 나지막한 사내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조금만 참아라, 조금만.”
다독이는 음성.
“으으으읍.”
억눌린 신음 사이사이로 다시 사내가 속삭인다.
“거의 다 되었다. 한 번만…… 한 번만 더하면…….”
“으읏! 헉헉헉.”
“하아, 드디어…… 끝났군. 이런 건 처음이었을 텐데. 잘 참았네.”
“허헉…… 네놈이 감히 내게 이런 짓을. 죽여버릴 거다.”
“하하하. 처음엔 다들 그렇게 말하지. 나중에 더해 달라고 조르지나 마라.”
안에서 들려오는 은밀한 대화에 허상익은 숨조차 쉴 수 없었다.
그때 뒤이어 온 권문이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자네, 여기서 뭐 하는가? 집의께 올릴 문서는…….”
“쉿!”
“뭐야? 왜 그러는가?”
“집의께선 이곳에 아니 계신 듯합니다.”
“아니 계신다고? 그럼, 저 문지방에 비치는 그림자들은…….”
허상익은 눈치 없는 권문의 입을 급히 손으로 막았다.
“아니라니까요. 우선 이쪽으로 오십시오.”
허상익은 서둘러 권문을 끌고 집의처를 나섰다.
그는 장무열을 떠올렸다.
검을 휘두르던 아름다운 사내의 모습.
그 든든한 사내가 알고 보니 뜻밖에도 말 못 할 비밀을 가진 모양이다.
‘나라도 지켜주어야지. 그 비밀.’
당당한 사내의 소소한 비밀.
허상익은 자신이 선망하는 사내인 장무열의 비밀을 지켜주기로 마음먹었다.
자신이라도 그를 지켜주지 않으면 누가 또 그를 지킬 것인가.
“어허! 대체 무슨 일인데 그러는가?”
“그럴 일이 있습니다. 지금은 집의 어르신을 뵙기 마땅한 때가 아닌 듯하니, 다음을 기약하는 게 좋겠습니다.”
권문을 간신히 말린 허상익은 우선 중문부터 단속했다.
오늘의 일은 절대 새어나가선 아니 된다.
이 사헌부의 명예가, 장 집의의 운명이 자신에게 달려 있었다.
사뭇 비장한 눈빛의 허상익은 자청하고 중문 앞을 지키고 섰다.
오늘, 그 누구도 집의처로 들어갈 수 없었다.
절대…….
그 누구도…….
***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흔들리는 등잔불 아래.
두 사내가 땀으로 젖은 얼굴을 한 채 마주 앉아 있었다.
장무열과 김기대였다.
기대의 바늘 끝에 무열의 벌어진 상처는 곱게 봉합되었다.
기대는 깨끗한 천으로 피고름이 묻은 바늘을 닦았다.
침통에 바늘을 갈무리하는 그에게 장무열이 물었다.
“이런 건 어디서 배운 것이냐?”
“험한 길을 오가는 팽례에겐 필수적으로 배우고 익혀야 할 기술이라네.”
“팽례……?”
“그건 그렇고, 어디서 당한 겐가?”
“알 필요 없다.”
“누가 괴롭히는 것이면 참지 말고 내게 말하게.”
“그 사람에게 제대로 검 쓰는 법을 알려주려고?”
“잘 알고 있군.”
“허튼소리는 됐다.”
옷깃을 여미고 고개마저 돌린 장무열의 귓가로 기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며칠 전, 이곳에서 멀지 않은 산 중턱에서 한 무리의 불한당끼리 칼부림이 있었던 모양이더군. 검은 두건을 쓴 괴한들이 쓰러져 있었는데, 그들을 상대한 자가 누군지는 몰라도 상당한 실력의 소유자인 것 같다더라고.”
“…….”
“어쩌다 어사들이 하는 말을 들어보니, 아무래도 왈짜들 싸움 같지는 않았다고……. 그들을 발견한 약초꾼의 말을 들어보니 괴한들이 발견되기 직전, 화려한 가마 한 대가 산 아래로 내려갔다지? 정황으로 보아 괴한들은 아마도 가마의 뒤를 밟았던 모양이네. 그러다 가마를 지키는 누군가에게 당한 것일 테지.”
“그 말을 내게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
“그냥…… 그냥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어서.”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그런데 그 가마 말이야, 정작 가마 주인은 그곳에 있지 않았던 모양일세.”
“……!”
“대신 다른 사람이 타고 있었던 것 같던데. 누군지는 몰라도 가마를 지키러 갔던 사람 덕에 화를 피할 수 있었던 모양일세.”
“그럼 그 가마엔 대체 누가……?”
저도 모르게 질문하던 장무열은 서둘러 입을 닫았다.
이내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나는 도무지 모르겠구나.”
기대의 얼굴에 피식, 장난기 뒤섞인 미소가 떠올랐다.
“나도 잘 모르겠네. 누가 그 가마를 지켰는지. 가마를 노린 복면인의 정체가 무엇인지. 다만, 간신히 숨이 붙은 자가 구름이 어쩌고 하는 말을 한 걸로 아는데, 자세한 사정은 나로서는 알 길이 없지.”
“…….”
“결론은 다행이라는 걸세. 가마의 주인도 무사하고, 누군가의 도움으로 가마에 탄 사람도 무사하였으니. 참으로 다행이지 않겠는가?”
“…….”
“그럼 볼일 끝났으니 난 이만 가겠네. 공짜로 해주는 건 이번이 마지막일세. 다음부턴 확실히 값을 받을 테니. 그렇게 알게.”
“그럴 일 없을 것이다.”
“부디 그렇게 되길 바라네. 아, 혹여 나중에라도 그 사람이 누군지 알게 되면 내가 고맙다는 말을 했다고 꼭 전해주게.”
기대는 손을 흔들며 집의처를 나섰다.
그의 뒷모습을 노려보던 장무열이 한숨을 흘렸다.
“밉살스러운……놈.”
불퉁한 한마디가 튀어나왔다.
그의 입가에 흐릿한 미소가 떠올랐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