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택-왕들의 향연-149화 (149/215)

#149. 통촉하옵소서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것이냐? 누가 어찌 되었다고?”

홍인한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보고하는 수하를 응시했다.

평소 대나무를 그림자처럼 따르던 무인이었다.

수하는 황망한 표정으로 홍인한의 귀에 쐐기를 박았다.

“그분께서…… 절명하시었습니다.”

“터무니없는 소리. 그는 조선 최고의 무사다. 그런 사람이 절명이라니. 그 누가 그를 해칠 수 있단 말이냐?”

“폐세손과 그를 지키는 호위들의 협공에…….”

“너희는 무얼 하고 있었느냐? 일이 그 지경이 되도록 지켜보고만 있었느냐?”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갑자기 어사대가 나타나 주위를 에워싸는 바람에…….”

“사헌부의 어사대 말이냐? 그자들이 난데없이 그곳에 어찌 나타났단 말이냐?”

“불온한 자가 병사로 위장하여 숨어 있다는 정보를 받았다 하였나이다.”

“그런 말도 안 되는…….”

홍인한은 주먹을 으스러지라 움켜쥐었다.

“폐세손의 소행이란 말인가? 격쟁으로 시선을 돌리고도 모자라 자신이 들킬 가능성조차 생각했단 말이더냐?”

“아무래도 그런 모양입니다. 어사들이 들이닥쳤을 때, 폐세손은 가장 먼저 자진하여 포승줄에 묶였다 하옵니다.”

쾅!

홍인한은 더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앞에 놓인 탁자를 내리쳤다.

“그러니까 나, 홍인한이…… 고작 풋내기의 계략에 놀아났다는 말인가.”

어금니를 사려 무는 그의 눈동자에 붉은 핏줄이 섰다.

“대감, 흥분을 가라앉히십시오.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닙니다.”

홍인한의 곁에 있던 소나무가 냉정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폐세손의 능력이 우리가 생각한 이상으로 대단한 모양입니다.”

“답답한 꽁생원 같은 폐세손이 재주를 부려봐야 얼마나 대단하겠소?”

“그렇다면 곁에서 그를 돕는 자 중에 뛰어난 자가 있는 모양이겠지요.”

“흥, 기껏해야 떨거지 같은 자들이요. 제깟 것들이 발버둥을 쳐 봐야 무얼 할 수 있단 말이오?”

소나무는 비통한 음성으로 말했다.

“대나무를 잃었습니다. 이는 곧 우리를 지키던 창과 방패가 사라진 것과 진배없습니다. 폐세손을 상대할 방법을 고심해야 합니다.”

“제례가 코앞이거늘. 이제 와 판을 다시 그리자는 말이오?”

“아무리 총기 출중한 세손이라고 하지만, 이처럼 완벽한 판을 흔들어 버린다는 건 말도 안 됩니다. 본디 수 싸움이란 머리로 생각하는 것과 몸으로 직접 겪은 것을 적당히 섞어 판을 짜는 것인데. 누군가 있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누군가가 있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형운의 곁엔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책사들이 있었다.

무궁한 지혜를 가진 선왕들과 특별한 제왕학을 받은 여인까지.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들만이 아는 은밀한 비밀이었다.

홍인한은 지나치게 근심하는 소나무가 한심스럽게 느껴졌다.

“사내의 간담이 그리 작아서 어찌 큰일을 도모할 수 있겠소. 비록 예상과 다른 실책이 조금 있었다 하나, 결국 폐세손은 주상을 만나지 못했소. 계획대로 되었단 말이오.”

“하오나…….”

“그만 되었소. 본래 큰 그림을 그릴 땐 사소한 흠결은 무시할 줄도 알아야 하는 법이오. 이런 작은 일에 번번이 흔들리기엔 너무 먼 길을 왔소.”

홍인한은 서둘러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대감, 무얼 하시려 그러십니까?”

소나무의 물음에 홍인한이 입을 열었다.

“전하께 가봐야겠소.”

“이렇게 이른 시각에 말입니까?”

아직 하늘이 어두웠다.

궁 문이 열리려면 한 시진은 족히 더 기다려야 했다.

그러나 홍인한은 걸음을 재촉했다.

“오늘 궁 문이 열리는 즉시 하엽생과 함께 전하의 침소로 향할 것이다. 서둘러 차비하라 기별하거라.”

수하에게 명을 내린 홍인한은 담벼락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본가의 별채.

단잠에 빠진 듯 깊은 어둠과 고요만이 가득했다.

달콤하렷다.

왕은 만나지 못하였어도, 대나무를 쓰러트렸으니.

작은 승전의 기쁨 정도는 만끽하고 있을 터.

그러나 일장춘몽에 불과하니.

꿈에서 깨면 참담한 현실을 깨닫게 될 테지.

지금 꾸고 있는 꿈이 얼마나 허무한 모래성인지, 단단히 알려주마.

결의를 다진 홍인한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콧속을 파고드는 바람끝에 비릿한 혈향이 느껴졌다.

***

파루의 북이 울렸다.

굳게 닫힌 대궐 문이 열리기 무섭게 홍인한이 안으로 들어섰다.

“어허, 이 사람. 어찌 이리 걸음을 더딘가?”

그는 자신의 뒤에서 종종걸음치는 노(老) 상궁을 매섭게 쏘아보았다.

“송구합니다, 대감.”

노 상궁의 주름진 얼굴에 당혹함이 가득했다.

그녀는 제 등에 업힌 채 졸고 있는 하엽생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갑작스레 입궁 차비를 하라는 전언에 서둘러 준비한다고 하였건만.

미처 잠을 깨지 못한 하엽생의 입성을 제대로 갖추기도 전에 홍인한이 모습을 드러냈다.

노 상궁이 하엽생을 업고 목까지 차오른 숨을 겨우 헉헉 내쉬고 있자니, 앞서 걷던 홍인한이 걸음을 멈췄다.

“잠시 멈추시게.”

어느새 왕의 침전 앞에 다다른 홍인한이 손을 들어 노 상궁을 세웠다.

그는 침전 앞을 지키는 수문장에게로 다가섰다.

“전하께선 기침하셨느냐?”

닫힌 문 안을 가리키며 홍인한이 물었다.

그때였다.

“언제부터 한성부우윤이 내 잠자리까지 살피게 되었느냐?”

돌연, 닫혀 있던 침전의 대문이 벌컥 열렸다.

바위를 쇠 끌로 긁어내는 듯한 음성의 주인공이 홍인한의 앞으로 다가왔다.

깊은 주름과 하얗게 흰 서리가 내린 머리카락.

앙상한 겨울나무 같은 얼굴에 드문드문 피어 있는 저승 꽃.

검붉은 빛깔의 곤룡포가 버거워 보이는 노인을 향해 홍인한은 서둘러 허리를 접었다.

“전하, 어찌하여 이리 이른 시각에 깨어 계시나이까?”

“외려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그대는 어찌하여 이 이른 시각에 대궐로 든 것이냐?”

오랜 지병으로 인해 왕의 말소리엔 밭은 숨이 절반이었다.

그러나 홍인한을 향한 임금의 형형한 눈빛.

내내 병석에 누워있던 노인이라고 결코 생각할 수 없는 임금의 안광에 홍인한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조용히 닦으며 홍인한은 어렵사리 목소리를 냈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지난밤 하엽생이 소신에게 달려와 전하의 안위를 걱정하시었나이다.”

“하엽생이?”

왕은 노 상궁의 등에 업힌 하엽생을 응시했다.

홍인한이 노 상궁에게 눈짓을 보내자, 노파는 반쯤 졸고 있는 하엽생을 대신하여 목소리를 높였다.

“어린 군께서 매일같이 악몽을 꾸시니. 할바마마, 할바마마, 가엾은 우리 할바마마, 행여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근심하는 한숨에 땅이 꺼질 듯하였나이다. 그러다 급기야 어젯밤에는 발작까지 하시니.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던 터라. 이 천한 것이 기어이 우윤 대감을 찾아가 청했나이다.”

“그러했느냐…….”

어린 것이 그렇게나 할아비를 염려했단 말이냐.

서릿발 성성했던 왕의 눈가에 돌연 습기가 들어찼다.

본디 감정의 기복이 심했던 임금이었다.

작은 일에 감복하고, 아무것도 아닌 일로 분노하는 일이 잦았던 탓에.

곁을 지키는 이들은 늘 조심스럽고 어려웠다.

그러나 이처럼 자신을 염려하고 걱정한다는 말에는 쉬이 눈물짓는 일이 많으시니.

홍인한은 행여 흔들릴지도 모를 왕의 마음을 묶어 두기 위해 하엽생을 앞세웠다.

아니나 다를까.

할아버지를 걱정하여 밤잠도 설쳤다는 말에 왕은 노 상궁의 등에 매달린 하엽생을 토닥였다.

“네가 이 할아비를 그리 걱정했더냐?”

때마침 잠에서 깨어난 하엽생이 동글동글한 눈을 뜨고 왕을 응시했다.

“주상 전하…….”

“그래, 나다. 할아비니라.”

노 상궁은 하엽생을 조심스레 바닥에 내려놓았다.

잠 끝이 남아있는지, 하엽생은 연신 어색한 표정으로 소맷자락만 빙빙 꼬집었다.

“이러 오련?”

왕께서 손을 내밀었다.

힐끔, 눈치를 살피는 하엽생의 등을 홍인한이 떠밀었다.

“할아버지께서 부르시면 네, 하고 달려가셔야지요.”

하엽생이 마지 못해 왕의 손을 잡았다.

“너, 이 할아비와 함께 산책하려느냐?”

임금의 물음에 하엽생은 다시 노 상궁의 눈치를 살폈다.

“네, 대답하십시오.”

노 상궁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할바마마.”

“오냐오냐.”

인자한 표정의 왕이 하엽생의 손을 꽉 맞잡았다.

“밤마다 악몽을 꾸었다고?”

“…….”

“아직 어리거늘, 무슨 꿈을 그리 험악하게 꾸는 것이냐?”

왕의 물음에 하엽생은 힐끔힐끔 노 상궁을 돌아보았다.

“말씀하시어요. 밤마다 무서운 귀(鬼)가 나타나 주상 전하를 잡아먹으려 하였다지요. 그때마다 군께서 주상 전하를 지키려 안간힘을 쓰셨다고 쇤네에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하엽생을 대신하여 노 상궁이 대답했다.

노 상궁을 멀거니 바라보던 왕이 하엽생에게 확인했다.

“네가 정녕 그런 꿈을 꾸었더냐?”

말똥말똥 왕을 올려다보던 하엽생이 노 상궁을 돌아보았다.

“뭐라고 해?”

아이의 천진한 물음에 왕은 풀썩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무어냐? 네가 꾼 꿈을 어찌 저 늙은이에게 묻는 것이야?”

“하지만…… 왕께서 하문하시면 대답하기 전에 꼭 물어보라고. 그래야 혼나지 않는다고……. 그랬지, 노 상궁?”

하엽생의 말에 노 상궁의 얼굴이 벌게졌다.

“쇤, 쇤네가 언제…….”

“그랬잖아, 노 상궁이 저번에 나한테 그랬잖아.”

울상을 짓던 노 상궁은 왕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송구하옵니다, 전하. 소인을 죽여 주십시오.”

“괜찮다. 어린아이가 하는 말 마디마디에 어찌 족족 마음 쓸 것이냐.”

“…….”

“오랜만에 내 손주와 함께 아침 산책이나 할 것이다.”

왕은 하엽생과 함께 걸음을 옮겼다.

그때였다.

“전하, 아이고, 전하.”

내반원에서 밤을 보낸 상선이 뒤늦게 모습을 보였다.

“새벽바람이 차갑사옵니다.”

“모처럼 좋은 바람이다. 걷고 싶구나.”

“하오나…… 어의가 조심, 또 조심하라 하였나이다.”

“그래도 내 손주가 이리 찾아왔는데, 갑갑한 방안에만 어찌 있을 것인가.”

천천히, 느리게 걸음을 옮기던 왕이 문득 멈춰 섰다.

“그런데 상선…….”

그림자처럼 자신의 뒤를 좇는 상선을 향해 왕이 물었다.

“세손은…… 오늘도 아니 왔느냐?”

폐세손이 궁을 나간 뒤로 종종 듣는 물음인지라.

상선은 언제나처럼 대답했다.

“아뢰옵기 망극하오나, 전하. 세손께선 오늘도 궁으론 걸음 하지 않으셨나이다.”

차마 민망하여 왕과 얼굴 마주할 수 없다는 듯 상선은 연신 외로 얼굴을 틀었다.

“정녕 아니 온 것이 틀림없느냐?”

여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한 듯 왕이 다시 묻는다.

“전하…….”

“상선, 그 아이…… 정녕 나를 찾아 궁에 온 적이 없느냐?”

“망극하옵니다, 전하. 하오나 어찌 전하께 거짓을 고하리까. 세손 저하께선 지금까지 한 번도 궁엔 오지 않으셨나이다…….”

왕에게 고하는 상선의 목소리에 안타까운 울음이 뒤섞였다.

물끄러미 상선을 응시하던 왕이 입을 열었다.

“참으로…… 고약하구나.”

상선의 목덜미를 내려다보던 왕은 침전의 담벼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침 햇살이 담벼락을 포근하게 감싸 안았다.

미처 마르지 못한 새벽이슬이 햇발에 반짝거렸다.

왕은 시린 눈매를 여몄다.

하여, 사람들은 미처 알지 못했다.

왕께서 바라보는 시선의 끝자락.

담벼락의 그늘 진 곳, 사람들의 눈길이 닿지 않는 그곳에 쌓인 작은 돌탑을…….

‘하루도 빠짐없이 할바마마를 찾아갔었습니다. 비록 얼굴을 뵙고 문안을 여쭐 처지가 아님에도 감히 걸음 하였사옵니다. 행여 지나치는 시선으로나마 뵐 수 있을까, 바라고 바라며. 오직 할바마마의 강건함을 소원하고 다시 뵈올 수 있길 간절히 염원하였나이다.’

형운의 목소리가 늙은 귓가에 쟁쟁하였다.

폐위된 세손의 간절한 염원이 그늘 속에서 저리 탑을 쌓는 동안.

왕은 아무것도 모른 채 무정한 손자를 원망만 하였더랬다.

두 눈 감고, 두 귀 막은 채 그저 자신을 에둘러 싸고 있는 간사한 세 치 혀에 현혹되어 서운하고 서글퍼하였더랬다.

“고약한 자로다. 참으로…… 나쁜 놈이로다.”

중얼거리는 왕의 목소리에 시퍼런 기운이 들어찼다.

그것이 폐세손을 향한 미움이라 단정한 홍인한은 내내 들쑤시던 불안을 겨우 잠재웠다.

이것이면 되었다.

안온한 표정으로 그는 상선과 눈빛을 주고받았다.

지난밤, 내반원에서 새로 들어온 의녀와 은밀한 밤을 보낸 상선 역시 흐뭇한 미소를 입가에 지었다.

푸른 새벽이 서서히 물러갔다.

여느 날과 다름없는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었다.

***

열매 달.

사나운 여름의 열기를 이겨낸 열매가 낙과를 기다리는 계절.

예조에서 종묘대제를 포고(布告)하였다.

이어 엄격한 제의 의식이 시작되었다.

꼬박 7일의 낮과 밤 동안 왕과 신하들은 제를 위해 정성을 쏟았다.

특히 친제(親祭)를 주관하는 임금은 제사를 올릴 때까지 몸과 마음을 조심하고 또 조심하였다.

음력 8월하고 보름.

두웅!

거대한 북소리가 궁을 가득 채웠다.

축시(丑時)가 멀지 않은 시각.

궁궐은 제사를 위해 재궁으로 떠날 왕을 위한 준비로 분주하였다.

왕을 모실 군졸과 문, 무 백관, 궁인과 시종관들이 대전 마당에 좌우로 나뉘어 시립하였다.

그들 중엔 홍인한과 그를 따르는 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 말이 사실입니까, 대감.”

좀처럼 대전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왕을 기다리노라니, 은근한 목소리가 홍인한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십학사의 일원인 소나무였다.

“무슨 말이오?”

“전하께서 하엽생과 함께 재계를 올린다는 소문이 자자합니다.”

“험험, 어찌 소문이 그리 빠른 것인지.”

괜한 헛기침을 흘렸지만, 홍인한의 얼굴에는 은근한 기쁨이 서려 있었다.

이레 전.

왕의 부름을 받은 하엽생이 궁으로 들어갔다.

느닷없는 어명에 어인 영문일까, 어리둥절하였건만.

왕께서 하엽생과 함께 제사 전 정성을 올리는 재계의 예를 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것이 무슨 뜻이랴.

분명 보위를 하엽생에게 넘기겠다는 뜻이 아니고 무엇일까.

은연중에 드러난 왕의 속내에 홍인한은 쾌재를 불렀다.

홍인한은 들끓는 흥분을 애써 억누르며 대전의 반석을 디디고 섰다.

“드디어 새로운 하늘이 열리는 겝니까.”

소나무가 나지막한 음성을 홍인한이 무심히 받아쳤다.

“어린 군께서 긴 행사에 지치지나 않을지, 걱정이오.”

“지고한 자리가 아닙니까. 그 자리에 앉는 것이거늘, 하루의 고생이 무에 대수겠습니까.”

“그리 생각하오?”

“그럼요, 아무리 어린 철부지라 하여도 능히 감당할 겁니다.”

만족스러운 미소가 홍인한의 입가에 안개처럼 번져나갔다.

그와 동시에 대전의 문이 열리고 드디어 임금께서 모습을 드러냈다.

면복에 면류관을 쓴 왕은 노구를 느릿느릿 움직여 대전의 대청마루로 나섰다.

그의 곁에는 하엽생도 함께였다.

기다리던 자들의 고개가 일제히 바닥으로 향했다.

“전하, 차비를 모두 마치었사옵니다.”

상선이 대전 마당에 놓인 연을 가리켰다.

“알았다.”

조금만 움직여도 숨이 차는지, 왕은 연신 가쁘게 숨을 뱉었다.

숨결을 가다듬던 임금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 전에, 내 그대들에게 할 말이 있노라.”

대전의 사람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주군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대들도 알겠지만, 내가 보위에 오른 것은 오직 한 가지 이유였다. 병약했던 내 형님을 대신하여 잠시 이 나라의 종사를 도운 것뿐이니. 나는 언제라도 임금의 자리를 훌훌 털어내고 범부의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허나…….”

잠시 말끝을 흐리던 왕은 질끈 두 눈을 감았다.

“내 뒤를 든든하고 지키던 세자가 갑작스러운 변고로 세상을 떠났으니. 부덕한 나는 죽어서도 선왕들을 뵐 면목이 없구나.”

“전하, 그 어인 말씀이옵니까? 지난 일이 어찌 전하의 부덕일 수 있겠나이까.”

누군가의 부르짖음을 선창으로 모두가 한 소리를 냈다.

“전하, 성심을 강건하게 하셔야 하옵니다.”

“전하의 안위가 곧 이 나라의 안위임을 잊으시면 아니 되옵니다.”

신하들의 충심이 왕에게 닿은 것일까?

어두웠던 임금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그대들이 옳다. 나의 안위가 곧 나라의 안위이고, 또한 왕실의 강건함이 조선의 강건함이니. 때마침 종묘에 사직의 안녕을 고하기 전에 나는 비어 있는 동궁의 자리를 채우려 한다.”

“그것이…….”

왕의 선언에 모두가 어리둥절하였다.

하지만 홍인한만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예상대로구나.’

하엽생과 함께 모습을 드러낸 자리에서 동궁을 언급하니.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자명하였다.

‘틀림없이 하엽생을 동궁으로…….’

“이 시각부터 세손을 동궁으로 부를 것이니. 경들은 그리들 알라.”

왕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대전의 문이 열리고 한 사내가 모습을 보였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다니…….”

놀란 대신들의 입에선 경악 섞인 신음이 흘러나왔다.

홍인한도 그를 보고 놀람을 금치 못했다.

“저, 저 사람이 어째서 이곳에…….”

왕의 부름으로 모습을 드러낸 인물.

이곳에 있으면 안 될 천만뜻밖의 사람이었던 것이다.

폐서인된 왕세손.

형운이 왕의 곁으로 다가왔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전하.”

뒤늦게 정신을 수습한 대신들이 앞다퉈 대전 마당에 머리를 박았다.

“어찌 죄인의 아들을 궁으로 다시 부를 수 있나이까?”

“그의 아비가 역모를 도모하였나이다. 동궁을 역적의 아들에게 내어줄 순 없나이다.”

“전하, 연산군 시절의 참담했던 역사를 잊으셨나이까? 그와 같은 실수를 되풀이해서는 아니 될 것이옵니다.”

“통촉하옵소서.”

“부디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울부짖는 신하들을 왕은 덤덤한 시선으로 응시했다.

“그만들 하라.”

“하오나…….”

“세손은 죄인의 아들이 아니다.”

왕은 단호한 음성으로 다음 말을 이었다.

“폐위되었던 세손의 위(位)를 복원한다. 또한, 세손을 나의 장자 효장의 양자로 입적하였으니. 모두 그리 알라.”

“……!”

왕의 장자라면 열 살의 나이에 단명한 효장 세자가 아니던가.

폐서인된 사도 세자의 형.

“아니 될 말씀이옵니다. 부디 하명을 거둬주옵소서.”

홍인한의 피 끓는 음성으로 소리쳤다.

“이 모든 것이 나의 장자, 효장의 바람이다.”

“그 어인 말씀이시옵니까?”

“하엽생, 네가 말해보려무나. 밤마다 악몽에 시달린다 하였더냐?”

“네, 전하.”

“꿈에 귀가 나타나 나를 잡아먹으려 하였다고?”

“그렇사옵니다.”

홍인한이 끼어들었다.

“감히 아뢰나이다. 군 마마의 악몽과 지금의 상황이 무슨 연관이 있나이까.”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왕은 손을 들어 홍인한의 입을 막았다.

“기다려라. 곧 설명할 참이었느니.”

이내 임금은 어린 손주를 바라보았다.

“하엽생은 대답하라. 네 꿈에 나타난 귀가 뉘더냐?”

왕의 물음에 어린 군의 명쾌한 대답이 들려왔다.

“승하하신 효장 세자이십니다.”

“그가 무어라 하더냐?”

“이른 나이에 죽어 천명을 누리지 못하였으니. 그 원한이 사무친다 하였사옵니다. 비어 있는 동궁의 주인을 찾지 못한다면 차마 부끄러워 이승을 떠날 수 없다고 하셨사옵니다.”

왕에게 여러 날 교육을 받은 탓에.

하엽생의 대답에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홍인한은 망연한 표정으로 왕을 응시했다.

며칠 전 하엽생을 궁으로 불러 함께 시간을 보낸다 하였더니.

동궁으로 삼기 위함이 아니라, 오늘 저 말을 하게 만들기 위함이었던가?

자신이 놓은 올무에 자신이 걸려들고 말았다.

황망하여 넋을 놓은 그를 힐끗 곁눈질하던 왕이 말을 이었다.

“세손이야말로 끊어질 위기에 놓인 삼종의 맥을 잇는 유일한 혈통임은 나도 알고 그대들 역시 잘 알고 있음이다. 그러니 경들은 나의 선택을 허물치 마라. 또한, 동궁…….”

형운이 왕의 앞으로 나섰다.

“오늘은 종묘와 사직에 나아가 제를 올리는 뜻깊은 날이니. 동궁이 나를 대신하여 제를 주관하라.”

어명이 떨어짐과 동시에…….

둥둥.

종묘대제의 시작을 알리는 북소리가 대전을 가득 채웠다.

일순, 거대한 대전에 정적이 흘렀다.

엄숙한 침묵의 뒷자락.

형운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따르겠나이다.”

낮지만 단호한 음성.

감히 거부할 수 없는 위엄 가득한 한 마디는 참으로 맑고 청아했다.

대나무 숲을 뒤흔드는 바람처럼 대전에 조용한 소란이 일었다.

그러나 그 소란은 곧 신을 접하는 대제의 북소리에 묻혀 사라졌다.

동궁을 태운 긴 행렬이 본궁을 나와 재궁으로 향했다.

행렬의 맨 끝엔 불안한 표정의 홍인한과 그 무리들이 따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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