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 약조하오?
이레는 붓을 들었다.
-할아버지들, 거기 계십니까?
그녀가 쓴 글은 이내 안개처럼 흩어졌다. 곧이어 거칠고 힘 있는 필체가 흰 공간을 급하게 메워갔다.
-어찌 되었느냐?
상이었다.
인사조차 없이 다짜고짜 던져진 물음.
평소 같으면 상 이외의 다른 할아버지들이 그의 성급함을 나무랐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상황이 달랐다.
화, 악, 예가 차례로 상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아이야. 무사한 게냐?
-일은 잘 마무리되었고?
-다치지는 않았느냐?
할아버지들의 진심이 느껴졌다.
이레의 눈에 이슬이 맺혔다.
-할아버지들께서 걱정해주신 덕분에 무사히 해결되었습니다.
상이 껄껄 웃었다.
-푸하하. 당연히 그럴 줄 알았다.
그의 웃음이 지나가자 이번엔 악이 물었다.
-계획된 대로 잘 되었느냐? 달리 신경 쓸 만한 일은 없었고?
-처음엔 계획대로 되었습니다. 아침 일찍 행차가 시작되고…….
이레는 할아버지들에게 어제 있었던 일들을 하나하나 설명했다.
-계획대로 된 모양이로구나. 떠들썩한 격쟁으로 적의 시선을 돌리고, 정작 불손은 겸사복으로 위장해 왕을 기다린다.
-푸하하하하.
화가 이레의 말을 정리하자, 상은 큰 웃음을 터트렸다.
서탁 위 종이를 가득 채울 만큼 통쾌한 웃음이었다.
-멍청한 녀석들. 나중에 속은 것을 알고 얼마나 당황했을까. 그 꼴을 내가 직접 못 본 것이 아쉽구나, 하하하.
상의 웃음이 사라지길 기다린 악이 이번에도 차분하게 물었다.
-적의 시선을 끌 정도로 요란한 격쟁을 준비하려면 적지 않은 사람이 동원되었어야 할 터인데. 지금 너희의 상황이 예전 같지 않으니. 그 많은 인원을 동원하는 게 쉽지 않았겠구나.
“네.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왕세손 형운은 폐서인되었다.
죄인이 아들이 되어 궁을 떠나야 했다.
그런 형운에게 남을 부릴 수 있는 권력이 남아 있을 리 없었다.
폐서인된 세손에겐 아무것도 없었다.
힘도 권력도.
싸늘하고 냉정한 세상의 시선만이 그림자처럼 주위를 떠돌게 되었을 뿐.
이레는 붓을 들었다.
-가진 것 모두를 잃었지만, 단 한 가지만은 거친 세파에도 모질게 버텨주었습니다.
이레의 글에 상이 물었다.
-그게 무어냐?
-인덕(人德)이옵니다.
신분과 나이를 떠나 한 잔 술과 호탕한 웃음으로 두루 많은 이를 사귀었던 세자의 덕.
그 덕만은 모든 것을 잃은 후에도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들은 중신들도 아니고, 대단한 권력이나 큰 힘을 가진 자들도 아니었다. 그러나 신의만큼은 세상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세상 모두가 세자를 오인했지만, 여전히 그를 따르고 그리워한 이들.
그런 사람 중 하나가 하월네였다.
팽례들의 어머니이자, 난전 상인들을 휘하에 둔 노파.
이레와 연이 있는 강현보의 모친이기도 한 그녀.
형운의 어려움을 들은 하월네는 그를 돕기 위해 발 벗고 나섰다. 마침 금난전권의 횡행으로 어려움을 겪던 난전 상인들도 왕에게 어려움을 호소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다.
-민심이 천심이라 하였으니. 먼저 간 사람이 뿌린 인연의 씨앗이 뒤늦게 꽃을 피웠구나.
예의 말에 이레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세자가 만든 인연이 결국 아들인 형운을 도와준 셈이었다.
악이 불쑥 물었다.
-그래서? 그 후엔 어떻게 되었느냐? 예정대로 은백은 그곳에서 그리운 이를 만났더냐?
-아쉽게도 그렇지 못했습니다.
-저런…….
악의 혀 차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망할 놈들에게도 머리가 있는 자가 있었던 모양이구나.
예도 한 자락을 걸쳤다.
-필시 왕의 마음을 돌릴 수 있을 만큼 가까운 자의 소행이었겠구나.
“네. 그런 자의 소행이었습니다.”
상선.
언제나 왕의 곁에서 보필하는 환관.
뒤늦게 형운의 의도를 눈치챈 그는 환궁 경로를 변경하였다.
상선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왕은 결코 정해진 절차를 수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참으로 고얀 놈들이로고.
-결실을 이루기 직전이었는데, 참으로 안타깝게 되었구나.
화와 악은 탄식했다.
-그래서? 어찌 되었느냐. 그 간악한 자들이 단순히 환궁 절차만 변경하는 것으로 끝내진 않았을 터인데. 불손, 그 아이는 무사하냐?
이레는 다급한 상의 물음에 미소를 지었다.
상은 언제나 형운을 야박하게 대한다.
하지만 그것은 본심이 아니었다. 지금도 형운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 가장 근심하는 사람이 바로 상이었다.
-다행히 무사합니다.
이레는 이후의 이야기도 전했다.
형운의 계획은 철두철미하였다.
잘못되었을 때의 대비책마저 세워두었다.
홍국영으로 하여금 어사대를 움직이게 하고, 왕의 팽례인 기대를 최후의 비책으로 삼았다.
그녀의 이야기를 전해 들은 화와 예는 칭찬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조금도 방심하지 않은 치밀한 계획이로구나. 훌륭하도다.
-치밀한 자는 성공하였을 때만이 아니라 실패하였을 때도 고민하여야 하는 법. 분골쇄신(粉骨碎身)하고 절차탁마(切磋琢磨)하였으니, 능히 산을 옮길 수 있으리라.
상은 제 일인 양 껄껄 웃었다.
-암, 누가 키운 아이인데. 그 정도는 당연히 하여야지.
악은 침착했다.
-그 이후엔? 다른 일은 없었느냐?
“불행하게도…… 있었습니다.”
이레는 한숨을 쉬었다.
모든 상황은 형운의 예상대로 흘러갔다.
구름은 격쟁의 소란에 정신이 팔렸고, 형운을 상대하러 온 대나무는 홍국영이 이끌고 온 어사대에 발목이 잡혔다. 기대 또한 무사히 궁으로 숨어 들어갔다.
여기까지는 분명 형운의 계획대로였다.
하지만 성공을 목전에 둔 계획은 마지막에 이르러 변수가 발생하고 말았다.
대나무의 사나운 성정.
대나무는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무지막지한 위인이었다.
그는 어사들이 포진한 상황에서도 형운을 죽이려 하였다.
심지어 현장의 모든 목격자를 단 한 명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죽여버린다는 무모한 계획을 실행에 옮겼다.
만약, 기대가 임무를 포기하고 나타나지 않았다면 형운은 흉적의 기습으로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까지 하면 분명 할아버지들께선 걱정하시겠지.”
-다행히 무탈하게 끝났습니다.
-불손, 그 아이는? 만나고자 하는 사람은 만났느냐?
-네. 직접 대면하고 그간 못 나눴던 이야기를 나누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악과 이레의 대화를 들은 화, 상, 예도 비로소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허허, 천만다행이로다.
-잘되었다. 정말 잘되었어.
-너희의 노력이 하늘마저 움직였구나.
껄껄 웃던 상이 힘찬 필체로 물었다.
-그런데 불손은 어디에 있느냐? 이 좋은 날, 함께 기뻐해야지.
-이번 일을 도와준 사람들을 만나러 갔습니다. 돌아오는 대로 할아버지들께 인사 올린다 하였습니다.
-잘하였다. 어려울 때 함께 한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친구라 하였지. 마땅히 그들의 공과 노고를 위로하여야지.
서탁 위에 즐거운 웃음이 가득 쌓였다.
“모두 할아버지들 덕분입니다.”
이레는 자신과 형운의 일을 제 일처럼 생각하고 걱정해주는 할아버지들이 너무도 고마웠다.
할아버지들이 함께 고민하고 의논해주지 않았다면, 오늘의 기쁨은 결단코 없었을 것이다.톡톡.
창가에서 새가 부리로 쪼는 듯한 작은 소음이 들려왔다.
-누가 온 것 같습니다.
-손님이 온 모양이구나.
-본래 큰 경사엔 사람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법이다. 여긴 개의치 말고 그만 가거라.
-잠시 후에 다시 오겠습니다.
-아니다. 오늘은 지금까지 네게 들은 것만으로도 배가 부르구나.
이레는 붓을 내려놓았다.
종이 위에 새겨진 글들이 녹아들 듯 사라졌다.
마지막 작별 인사까지 모조리 사라진 후에야 비로소 이레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문밖엔 그리운 사람이 있었다.
***
“오라버니.”
기대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래. 네 오라비다.”
“이 야심한 시각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어서 안으로 드시지요.”
“아니다. 잠시 네 얼굴이 보고 싶어 온 것이니.”
“무슨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일이라면 내가 아니라 네게 있었겠지.”
“제가요?”
“어찌 그랬느냐?”
“…….”
“왜 그리 무모한 일을 하였어?”
이레는 기대가 묻는 말이 무엇인지 이내 깨달았다.
궁녀로 변복하여 은밀히 전하를 만난 일을 말하는 것이었다.
“네가 한 일을 뒤늦게 듣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느냐?”
기대는 이레를 내려다보며 짐짓 엄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리 무모한 짓을 하였느냐?”
이레는 기대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일그러진 그의 미간과 잔뜩 휘어진 눈썹에서 누이에 대한 걱정과 진심을 읽을 수 있었다.
“제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면, 오라버니께서 무모한 일을 하실 테니까요.”
기대의 눈이 커졌다.
“무모한 일이라니. 넌 내가 누구인지 잊은 모양이구나.”
“잊지 않았습니다. 왕의 팽례.”
“그걸 알면서도 그런 말을 하느냐?”
기대는 소맷자락에서 패를 꺼냈다.
구름을 밟고 천공을 노니는 용맹한 기린이 그려진 패였다.
“이 패만 있으면 세상 어디라도 내 집 드나들듯 오갈 수 있다. 궁도 마찬가지니라.”
“기린의 패는 분명 대단한 신물이지요. 하지만 오라버니. 이젠 그 패도 효력을 다하지 않았습니까?”
“효력을 다하다니? 어디 망가진 곳이라도 있단 말이냐?”
“패는 변하지 않았으나, 그 패를 보증할 분이 아니 계십니다.”
“…….”
기대는 말문이 턱 막혔다.
이레의 말은 사실이었다.
기린의 패가 특별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 패가 통용되었을 때의 이야기.
세자께서 억울하게 돌아가신 순간부터 그의 패는 힘을 잃었다.
궁으로 몰래 들어가는 것조차 꼼수를 동원하여야 할 정도였다.
“중요한 순간, 오라버니께서 임무보다 세손 저하의 목숨을 택하였음을 알고 있습니다.”
기대는 한숨을 쉬었다.
“어쩔 수 없었다. 세손 저하의 목숨과 임무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세손 저하를 선택하신 오라버니의 결정은 옳았습니다.”
“그래. 그랬구나. 하지만 그 때문에 임무는 실패하고 말았지. 모두의 기대가 내 두 어깨에 걸려있었는데 말이다. 그런 기대를 저버리고 말았어. 내 이름답지 못한 선택이었다.”
기대의 푸념에 이레는 고개를 저었다.
“오라버니께선 임무를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무슨 말이냐?”
“제가 아는 오라버니라면 틀림없이 궁으로 다시 돌아가셨겠지요. 임무를 달성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무모한 도전을 하셨을 것입니다.”
기대는 그런 사람이다.
실없고 쓸데없는 농담도 많지만, 정작 해야 할 일을 할 때만큼은 무서울 정도로 집중하고 집착한다.
어떤 일이 있어도 반드시 해내고야 마는 사내.
그런 사람이 바로 오라버니 기대였다.
그가 이러한 사람이었기에 세자께서도 서강율과 함께 그를 중임하고 기린의 패까지 하사하셨다.
“네가 뭔가 오해를 한 모양이구나. 난 그럴 생각이 없었다. 아무렴, 도전해봐야 헛되게 죽을 짓을 내가 왜 한단 말이냐?”
“…….”
“안 믿는 눈치로구나.”
“오라버니보다 오라버니를 더 잘 아니까요.”
속을 훤히 읽는 듯한 이레의 눈빛에 기대는 어색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어찌 되었건. 다시는 그러지 마라. 비록 네 덕에 일이 잘 해결되었다 하더라도. 더는 무리하여서는 아니 된다.”
“네. 그렇겠습니다.”
이레의 시원한 대답에도 기대의 찌푸려진 표정은 펴지지 않았다.
“네 웃음을 보니 왠지 모르게 꺼림칙하구나. 또 무언가 속이는 게 있느냐? 있으면 지금 당장 말하거라. 더는 놀라고 싶지 않으니.”
“없습니다.”
“진심이냐? 너의 그 순진한 얼굴에 속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 도무지 믿을 수 없구나.”
“다 오라버니께 배운 것입니다.”
“내게 배운 거라니?”
“수년 동안 정체도 숨기셨고, 무사하셨으면서도 소식 한번 전하지 않으셔서 걱정하게 하시고 또…….”
쉴 새 없이 터져 나오는 이레의 분노에 기대는 화들짝 놀라며 급히 그녀의 입을 막았다.
“되었다. 그것으로 충분해.”
“이제 아셨습니까?”
“그래. 충분히 알았다. 듣다 보니, 내 죄가 작지 않구나.”
한숨을 푸욱 내쉰 기대가 이레에게 말했다.
“앞으로는 그러지 않으마. 그러니 너도 약조해다오. 더는 위험한 일. 무모한 일 하지 않겠다고.”
이레는 환한 미소로 화답했다.
“약조하겠습니다.”
그때였다.
“그 약조, 나도 받아야겠다.”
어느 사이, 두 사람의 머리 위로 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고개를 든 이레의 눈동자에 낯익은 얼굴이 들어왔다.
“저하…….”
이레는 예의 입가를 늘이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러다 이내 딱딱하게 굳은 형운의 낯빛을 보며 미소를 지웠다.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안 좋은 일이라면 내가 아니라 그대에게 생길 뻔했던 것 같은데.”
“아하…….”
이레는 저도 모르게 탄성을 흘렸다.
형운도 안 것이 틀림없다.
왕에게 서찰을 전하러 궁으로 들어간 이레의 행적을.
어찌할까.
고민하는 찰나.
“그럼 나는 이만 가 봐야겠구나.”
심상찮은 분위기를 읽은 기대가 슬그머니 뒷걸음질 쳤다.
“오라버니…….”
이대로 가시면 어떻게 해요?
“수인해야 할 문서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걸 깜빡했다.”
미안하다, 누이야.
저 눈빛 좀 봐라. 내가 나설 일이 아닌 듯하구나.
“이 야밤에 갑자기 일은 무슨 일입니까?”
“나라의 녹봉을 받는 관원이, 어찌 밤낮이 따로 있으랴.”
“그리 부지런한 분도 아니질 않습니까. 날 밝은 뒤에 하십시오.”
“내, 원래 한밤중에 집중이 잘되는 편인지라.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하마.”
힐끔, 형운을 곁눈질하던 기대는 그대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오라버니…….”
허탈하게 중얼거리는 이레의 코앞으로 불쑥 익숙한 향기가 다가왔다.
은은한 사향내와 함께 뜨겁고 거친 사내의 숨결이 이레의 이마를 화악 뒤덮었다.
***
“저하…….”
이레는 어색한 웃음을 입가에 물었다.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불편한 고요를 깨기 위해 그녀는 서둘러 입을 열었다.
“하, 하, 하. 달이 밝습니다.”
“달이라면 이미 졌소.”
“좀 전까지 분명 있었는데…….”
이레는 손 그늘을 이마 위에 세우고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괜스레 딴청을 피우는 그녀의 얼굴을 형운이 양손으로 감싸 쥐었다.
꼼짝없이 그에게 잡힌 이레는 하는 수 없이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나한테 할 말 없소?”
“그분은 잘 뵈었습니까?”
“덕분에 잘 만났소.”
“……그런데 어찌 그런 표정이신지요?”
“몰라 묻는 건 아닐 터.”
“…….”
“정말 내게 할 말 없소?”
속내를 꿰뚫어 보는 듯한 검은 눈동자.
그 속에 담긴 처연한 빛.
그것을 어찌 모를까.
알기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니, 할 수 없었다.
“……송구합니다.”
“…….”
“제가 잘못하였습니다.”
“어찌 송구하오? 내게 무얼 잘못하였소?”
“그리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미리 저하와 상의한 뒤에 움직였어야 했는데. 시간이 촉박하였습니다. 행여 저로 인해 다른 계획이 어그러질까 저어되어…….”
이레가 설명하였다.
그때.
무겁게 닫혔던 형운의 입술이 열렸다.
“숨이…….”
꽉 억눌린 목소리가 그에게서 흘러나왔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소.”
“저하…….”
“그대에게 행여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가 하여, 숨을 쉴 수 없었소.”
“…….”
“나는…… 혹여 그대에게 무슨 일이 생겼을까…….”
이제야 휴우, 긴 한숨을 토하며 형운은 고개를 숙였다.
잔뜩 굳었던 그의 어깨가 부드러워졌다.
이레를 얼굴을 붙잡고 있던 형운의 양 손아귀에서 스르륵 힘이 빠져나갔다.
형운은 화가 난 게 아니었다.
두려웠던 것이다.
자신을 향해야 할 불행의 불길이 애먼 그녀에게로 향할까 봐.
그는 한마디 의논 없이 일을 감행한 그녀에게 섭섭한 것이 아니다.
그저 겁이 났다.
자신의 지난한 운명에 휩쓸려 그녀가 낯선 곳에 표류할까 싶어서.
다시는 그녀를 찾을 수 없을까 봐 걱정되었다.
“그러지 마오.”
“…….”
“아직은 아무것도 하지 마오. 내가 무언가를 할 수 있을 때까지 그대는 아무것도 하지 마시오. 내가 맞서 싸울 수 있을 때까지 내 뒤에만 있으시오. 앞으로 나서지 마오. 누구도 그대를 채어가지 못하게 그저 내 곁에만 있으시오.”
형운의 진심에 이레는 묵묵히 고갯짓하였다.
“그리하겠습니다.”
“약조하오?”
“약조합니다.”
단단한 맹세.
형운은 눈을 들어 이레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새카만 눈동자.
그 속에 담긴 아름답고 신비한 우주.
그리고 그 우주의 일부분이 되길 원하는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의 약조를 믿는다.
아니, 믿는 것 외엔 다른 도리가 없다.
그럼에도 일렁이는 불안함.
그 불안함을 읽은 것일까?
“약조합니다, 약조해요. 이리하면 믿으시겠습니까?”
다시금 맹세하며 이레는 형운의 입술에 제 입술을 가져갔다.
그녀의 나른한 숨결이 밭게 치솟은 그의 열기를 다독거렸다.
달콤한 그녀의 향내가 밤의 차가운 바람에 경직된 그를 달래었다.
치열을 더듬는 부드러운 감촉이.
벌꿀처럼 아릿하게 녹아내리는 감각이 형운의 입안을 통해 전신으로 번져나갔다.
“이제 믿으시겠습니까?”
가쁜 숨을 몰아쉬며 이레가 물었다.
“부족하오. 아직 한참 멀었소.”
형운은 잠시 떨어졌던 그녀의 입술을 다시 맞물었다.
그녀의 향기.
그녀의 감촉.
그녀의 체온.
형운은 스르륵 눈을 감은 채 그 모든 것을 기억하려 하였다.
윤회에 윤회를 거듭하여도 잊을 수 없도록.
죽어도 지워지지 않을 징표를 제 영혼에 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