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 나를 원망하였느냐?
왕의 침소는 농도 짙은 어둠과 고요에 먹히었다.
아슴푸레, 제 그림자를 일렁이던 불빛도 묵직한 공기에 옥죄여 낮게 가라앉았다.
숨통을 조이는 침묵.
그 무거운 정적을 깨트리며 처소 문이 열렸다.
그리고 궁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뉘더냐?”
처소 문 앞을 지키던 안 상궁은 해연한 눈빛으로 궁녀를 바라보았다.
아무도 없는 줄 알았다.
아무도 없는 것이 옳았다.
오직 임금 홀로 있는 줄 알았던 침소에서 돌연 낯선 궁녀가 나왔으니.
안 상궁이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대체 뉘이기에……?”
그녀가 미처 물음을 끝마치기도 전.
침소 안에서 쇳소리 섞인 왕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안 상궁.”
“네, 전하.”
“자네가 길잡이 노릇을 해야겠다, 조용히.”
은밀함이 담긴 왕의 명에 안 상궁은 궁녀의 어깨너머를 응시했다.
어둠에 파묻힌 터라.
임금의 표정을 읽을 순 없었다.
하지만 목소리에 실린 준엄함.
안 상궁은 고개를 숙였다.
“명 받잡나이다.”
접었던 허리를 일으키며 안 상궁은 궁녀를 돌아보았다.
“이리로…….”
그녀는 주군의 뜻에 따라 은밀히, 그리고 조용하게 궁녀를 왕의 침전 밖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얼마 후.
침전에서 적당히 떨어진 곳에 다다르자, 안 상궁은 비로소 고개를 들고 궁녀를 바로 보았다.
“어느 전각의 궁녀더냐?”
주상 전하께서 자신에게 길잡이 노릇을 하라 명한 궁녀.
혹여…….
존귀한 성심이 닿은 궁녀려나?
호기심과 경계의 빛이 반반 섞인 시선으로 그녀는 상대를 몰아붙였다.
“이상하게 낯이 익구나. 네 이름이 무엇이냐? 소속이 어디더냐? 어떻게 전하의 침소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냐?”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물음들.
하지만 정작 질문을 받은 이레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복잡한 표정으로 우두커니 서 있을 뿐.
“어찌 말이 없느냐?”
추궁하듯 재차 물을 때였다.
“네가 그걸 알아 무엇 할 것이냐?”
안 상궁의 다그침에 엉뚱한 곳에서 목소리가 돌아왔다.
“누구냐?”
목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휙, 몸을 돌리며 안 상궁이 소리쳤다.
“누구냐고? 네가 토막 난 낟알만 먹는 게로구나. 상대에 상관없이 다짜고짜 반말부터 튀어나오니. 못 본 사이에 참으로 오만방자해졌구나.”
“무에 그리 궁금한 게 많을꼬.”
훈계의 말과 함께 세 명의 노파가 안 상궁의 눈앞에 나타났다.
“그, 그대들은…….”
노파들의 주름진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안 상궁의 얼굴에 핏기가 사라졌다.
***
궁에 들어온 궁녀라면 누구나 할 것 없이 한 번쯤은 거쳐 가야 할 세 명의 노파.
늘 웃고 있지만, 그 속에 백여우 수십 마리가 들어 있다고 하여 매구 상궁이라 불리는 정 상궁과 전설의 나찰녀보다 더 심하게 궁녀를 괴롭혀 나찰 상궁이라는 별호를 얻은 이 상궁, 마지막으로 지옥의 야차보다 더 무섭다는 모 상궁까지.
“별궁 삼파(三婆)!”
안 상궁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삼파? 네가 우릴 그렇게 부르는구나.”
웃고 있지만, 안 상궁을 향한 정 상궁의 음성엔 은근한 겁박이 실려 있었다.
“처음 궁에 들어와서도 저 입단속 못 하더니. 상궁이 되어도 나쁜 버릇은 여전하구나.”
이 상궁의 지청구에 안 상궁은 다급히 제 입을 두 손으로 막았다.
“송, 송구합니다.”
“순서가 잘못되었다. 어른을 만나면 무엇부터 하여야 한다 가르쳤더냐?”
모 상궁의 깐깐한 음성이 들려왔다.
안 상궁은 서둘러 예를 취했다.
“세 분께 인사 올립니다.”
“어깨가 너무 높구나. 두 손은 가지런히. 움직임은 너무 빨라서도 느려서도 아니 된다 하였느니. 대체 이 아이의 예법을 누가 가르쳤소?”
모 상궁의 물음에 정 상궁이 대답했다.
“내가 가르쳤소. 당시엔 서툴러도 제법 열심인지라. 시간이 흐르면 그럭저럭 흉내라도 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내 가르침이 부족하였던 모양이오.”
“수고롭지만 공을 들여 더 가르치셔야겠습니다. 대전의 지밀상궁이 이렇게 예법에 서툴러서야…….”
“일간 불러들이도록 하지요.”
곧 다시 불러들인다는 정 상궁의 한 마디에 안 상궁은 꼴깍 마른침을 삼켰다.
대전의 지밀상궁.
궁녀라면 누구나 동경하는 자리의 주인.
그러기에 궐의 궁인이라면 누구나 할 것 없이 안 상궁을 어려워했다.
어디 궁인들뿐일까.
조정의 관원들조차도 함부로 대하기 어려운 위치가 아니던가.
그러기에 허리 꼿꼿하게 세우고, 내려다보는 것에 익숙해졌다.
그런 안 상궁이건만.
눈앞의 세 노파 앞에만 서면 간이 콩알만큼 오그라들었다.
무에, 잘못한 일이 없어도 별궁 삼파를 보면 왈칵 두려움부터 밀려들었다.
“예법이 이리 엉망이니, 내훈은 제대로 외고 있는지 모르겠군.”
모 상궁의 말을 정 상궁이 받았다.
“아무래도 안 되겠소. 안 상궁.”
“네.”
“너와 널 따르는 궁녀 모두를 별궁으로 불러오너라.”
“지, 지금 당장 말이옵니까?”
“가장 본을 보여야 할 네 행동이 이처럼 엉망인데, 아랫사람은 얼마나 엉터리일까. 사람들이 너희를 보고 우리 욕을 얼마나 하겠느냐?”
“하오나 이미 밤이 깊었습니다. 날이 밝은 후에 부르심이…….”
모 상궁과 정 상궁, 그리고 이 상궁은 어느새 어두워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 저녁별이 하나둘 뜨기 시작했다.
모 상궁은 특유의 꼬짱꼬짱한 표정으로 안 상궁을 응시했다.
“이 늙은이들의 나이 적지 않으니…….”
“오늘은 귀하고, 내일은 확신할 수 없게 되었구나.”
“한 치 앞도 짐작할 수 없으니, 내일 아침 무사히 눈뜨리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나중으로 미루다 어쩌면 영영 못 볼 수도 있겠구나. 기력이 남았을 때, 조금이라도 더 넘겨주어야겠다. 그러니 잔말 말고 부르거라.”
별궁 삼파의 명에 등 떠밀린 안 상궁은 울상을 한 채 대전으로 돌아갔다.
정말 궁녀들을 다 모여라 해야 하나?
아니면, 지금쯤 단잠을 자고 있을 최고 상궁께 이 상황을 알려야 하나?
이런저런 궁리를 하는 안 상궁의 뇌리엔 왕의 침소에서 나온 낯선 궁녀에게 관한 의구심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안 상궁이 자취를 감추자, 얼음처럼 굳어 있던 별궁 삼파의 표정이 봄 햇살처럼 따스해졌다.
그들은 곁의 소란 중에도 조용히 제자리를 지키던 궁녀에게 고개를 조아렸다.
“어리석은 상궁 때문에 고초가 심하였사옵니다.”
“아니오.”
“궐 밖까진 저희가 모시겠습니다.”
별궁 삼파는 호위하듯 궁녀를 감쌌다.
궁녀와 별궁의 세 상궁은 나란히 길을 걸었다.
중문을 넘을 때마다 지키는 자들과 마주쳤지만, 별궁 삼파를 본 병사들은 말없이 길을 열어주었다.
“뜻하신 바는 잘 이루셨습니까?”
정 상궁의 물음에 궁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다 하였소.”
고아한 목소리의 주인, 이레였다.
폐서인된 세손과 함께 궁 밖으로 쫓겨난 세손빈.
그녀는 형운의 바람을 이루기 위해, 왕에게 그의 마음을 전하기 위해 궁녀 복색을 한 채 이곳을 찾았다.
“세손빈께서 이런 일을 하실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하였습니다. 별궁에 계실 때도 그러하시더니, 여전히 무모하십니다.”
정 상궁은 고개를 내저었다.
별궁에서도 오라버니를 구하겠다며 무리한 계획을 실행하더니, 이번에도 터무니없는 일을 벌였다.
“어쩔 수 없는 고육책이었소. 다만, 내 선택으로 인해 세 분을 어렵게 하고 말았소.”
“아닙니다.”
“그런 말씀 마시옵소서.”
“죽은 고목처럼 늙어가던 사람들이 세손빈 마마 덕분에 잠시나마 바깥바람을 쐴 수 있어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세 노파의 입가에 시원한 미소가 걸렸다.
“오늘 아침 세손빈 마마를 뵈었을 때는 정말 깜짝 놀랐지만 말입니다.”
정 상궁은 이른 아침, 별궁을 찾아왔던 이레를 떠올렸다.
불쑥 나타난 그녀는 대뜸 주상 전하를 만나야겠다고 말했다.
더구나 정식적인 절차도 아닌, 몰래 만나야 한다며 터무니없는 계획을 설명하고 협조를 부탁하였다.
세손빈이 궁녀로 변복하여 주상 전하의 침소로 숨어들겠다니.
처음 이레의 계획을 들었을 때, 차마 어이없고 놀라 숨소리도 흘리지 못했다.
당연히 노파들은 이레를 말렸다.
계획에 동참할 수 없다며 거부의 뜻도 보였다.
하지만 이레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반드시 전해야 하는 진심이 있소.’
결국, 마음을 돌린 건 별궁 삼파였다.
“세 분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주상 전하를 뵐 수 없었을 것이오.”
별궁 삼파의 도움으로 이레는 자연스레 대전의 궁녀들 틈바구니에 섞일 수 있었다.
“이제 와 여쭙나이다. 어찌하여 이처럼 무리한 계획을 세우신 것입니까?”
정 상궁의 물음에 이레가 대답했다.
“이 방도 외에는 주상 전하의 곁으로 다가갈 방도가 없었으니까요.”
형운의 계획은 완벽했다.
다양한 수와 대책을 세우고, 마지막 비책까지 놓치지 않았다.
하지만 이레의 가슴 깊숙한 곳엔 차마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던 일말의 불안이 자리했다.
왕의 팽례인 오라버니.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팽례.
하지만 기린의 패를 지녔다 하여 하늘을 나는 재주를 지닌 것은 아니었다.
구름과 그를 따르는 무리는 임금의 주위를 철옹성같이 에워싸고 있을 터이니.
그곳을 뚫고 들어간다는 것은 목숨을 걸어도 쉽지 않은 일이리라.
형운의 계획대로 환궁 중 쉬어가는 장원에서 임금을 만날 수 있다면 다행이지만.
만약…….
만에 하나…….
일이 잘못되어 오라버니가 직접 움직여야 하는 상황이 된다면……?
‘하늘을 도움으로 오라버니께서 주상 전하께 소식을 전한다 하여도, 그 서찰의 내용을 믿으실지도 의문이다.’
만사 불여튼튼.
화 할아버지가 입버릇처럼 말씀하시곤 했다.
최악의 경우까지 고민한 이레는 마침내 스스로 움직일 결심을 하였다.
그리하여 만사여의의 도움을 받아 별궁 삼파를 찾아간 것이었다.
“참으로 대단한 일을 해내셨습니다.”
“나는 그저 할 수 있는 일을 하였을 뿐…….”
이레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남은 건 하늘의 뜻이오.”
정 상궁과 이 상궁, 그리고 모 상궁이 덩달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하였습니다. 세손빈 마마의 정성이 이처럼 극진하니, 틀림없이 무정한 하늘도 감복할 것이옵니다.”
***
“세손빈이 궁녀로 위장하여 직접 주상 전하를 찾아갈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할 터이니. 외부의 적만 경계하던 구름으로서는 막을 방도가 없었겠군.”
정후겸은 이레의 기지에 연신 감탄했다.
“범상치 않은 사람이라는 것은 내 진작 짐작하고 있었으나, 이처럼 허를 찌르는 계책까지 능수능란하게 세울 줄은 몰랐소.”
“하필 오늘 그분을 이곳으로 부른 것은 그분의 수를 막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까?”
“그렇소. 솔직히 내 계획이 틀어진다면, 그 원인은 세손빈에게 있으리라 짐작하였으니까.”
“세손이 아니라 세손빈이 원인이라 하셨습니까?”
만사여의의 물음에 정후겸은 고개를 끄덕였다.
“세손은 지나치게 뛰어나지만, 올곧은 사람이오. 늘 변함없는 사람이니, 변수가 적을 수밖에. 그러니 세손빈을 이곳에 잡아두면, 모든 일은 내 예측대로 흘러갈 거로 생각했소. 그런데 설마, 처음부터 엉뚱한 사람이 대신 왔을 줄은 짐작도 못 했군.”
정후겸은 너울을 벗고 민낯을 드러낸 만사여의를 응시했다.
“한 가지 의문이 있소. 그대는 엉뚱한 사람이라는 것을 남에게 들키지 않을 자신이라도 있었던 게요? 모양새는 어찌어찌 비슷하게 갖추고 너울로 가렸으니. 그렇다고 칩시다. 하나, 목소리가 다른 것은 어찌 감추려 하였소?”
“자신은 없었습니다. 그저 최선을 다할 뿐이었지요. 목소리는 다쳤다는 핑계로 글로 대신하려 하였습니다.”
“내 잘못이로군. 괜한 감성에 젖어 술을 마신 탓에……. 취하지 않았으면 그대를 좀 더 일찍 알아챘을 터인데. 하여간 세손빈이나 그대나 대단한 배포가 아닐 수 없소. 그런데 말이오…….”
정후겸의 목소리가 한껏 낮아졌다.
“두렵지 않소?”
“…….”
“정체를 들키면 결국 죽게 될 터인데. 그게 조금도 두렵지 않았소?”
“두렵습니다.”
정후겸은 피식 웃었다.
“거짓말.”
“…….”
“그대의 두 눈엔 두려워하는 빛이 조금도 없소. 왜? 무엇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오?”
“글쎄요. 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해를 본 순간 저를 해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어째서 내가 그대를 해하지 않을까?”
“아직 제가 쓸모 있을 테니까요. 아니 그렇습니까?”
한동안 차가운 시선으로 만사여의를 노려보던 정후겸은 결국 미소를 흘렸다.
“그대도 세손빈 못지 않군.”
정후겸은 빈 술잔에 술을 부었다.
만사여의가 입을 열었다.
“한 가지, 이제 질문을 해도 되겠습니까?”
“얼마든지. 그대에겐 자격이 있으니.”
두 사람의 내기.
온종일 공방을 주고받듯 엎치락뒤치락 한 내기의 승자는 만사여의였다.
내기의 대가로 만사여의가 원한 것은 고작 질문 한 가지.
패할 경우, 모든 것을 잃는 것에 비하면 상당히 사소한 조건이었다.
“왜 이번 일에 나서지 않은 겁니까?”
만사여의의 질문이 벼려진 검처럼 정후겸을 향해 날아갔다.
침묵이 흘렀다.
얼마 후.
정후겸은 씁쓸하게 웃었다.
“터무니없이 유리한 내기라 생각하였는데, 지금 보니 내 밑천을 모두 걸었던 판이로군.”
정후겸은 술잔을 기울였다.
붉은 입술 사이로 스며든 맑은 술이 텁텁한 입안을 말끔하게 씻어주었다.
술잔을 비운 그가 입을 열었다.
“공통의 목적을 달성한 조직이 어떤 결말을 맞게 되는지 아시오?”
“어떻게 됩니까?”
“이합집산(離合集散). 저마다의 이득을 위해 반목하고 흩어지다 결국엔 충돌하고, 쪼개지며, 허무한 결말에 다다르게 된다오.”
십학사도 다르지 않았다.
세자라는 공통의 적이 사라지자, 구름을 비롯한 십학사 일부가 불온한 움직임을 보였다.
밤의 그늘에 숨어 세상을 움직인다는 원칙에서 벗어나 권력을 직접 탐하려 나섰다.
“그래서 그들의 이반(離叛)을 알면서도 막지 않았단 말이로군요.”
“막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부추겼소.”
“어째서 그리하셨습니까?”
“썩고 곪은 상처는 아프더라도 도려내야 하는 법. 지금 당장 아프다고 내버려뒀다간 몸 전체를 상하게 만드는 법이라오.”
정후겸은 구름의 야욕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무기력하게 보이는 해의 모습에 실망하거나 불만을 가진 자들은 자연스럽게 구름에게로 자리를 옮겼다.
그렇게 십학사는 분열의 징후를 보였고, 정후겸은 그저 그 모습을 관망하였다.
판세를 저울질하며 망설이던 자들이 모두 나설 때까지…….
그리하여 불온한 세력을 뿌리째 색출할 때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하루, 참으로 많은 일이 있었소. 그리고 아마도 오늘 밤늦게까지 이 뜨거운 불길이 가라앉지 않을 것 같소. 부디…….”
정후겸은 마지막 술잔을 털었다.
좀 전까지는 쓰기만 하던 술이 왠지 모르게 달게 느껴졌다.
그는 술잔을 내려놓고 한서로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본디 저곳에 있어야 할 여인을 대신하여…….
“부디 엉뚱한 사람이 이 불길에 희생되지 않아야 할 터인데…….”
***
별궁 삼파와 헤어진 이레는 집을 향해 바쁜 걸음을 옮겼다.
복잡한 대로를 지나 막 으슥한 골목으로 접어들었을 때였다.
“이게 누구시래유?”
어두운 구석에서 낯익은 물음이 들려왔다.
이레는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온몸의 신경이 바싹 곤두섰다.
곧이어 그녀의 시야 속으로 더벅머리 사내 하나가 터벅터벅 걸어들어왔다.
“나가 이런 곳에서 요래 귀한 분을 만날 줄은 몰랐슈.”
흉험한 살기를 일으키며 나타난 사내, 십학사의 거북이었다.
박진봉을 본 이레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설마, 이런 곳에서 이자를 만나게 될 줄이야.
“그대가 이곳엔 무슨 일인가?”
“놀랐슈? 나도 놀랐슈. 워떡케 이런 곳에서 만난대유? 암만 봐도 우리 인연이 보통 인연이 아닌 모양이네유.”
입꼬리를 좌우로 길게 늘이며 씩 하고 웃은 박진봉이 품에서 구겨진 종이를 꺼냈다.
부옇게 번진 먹물과 검붉은 피로 지저분한 종이엔 열 명가량의 사람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박진봉은 종이에 그려진 얼굴들과 이레를 번갈아 가며 보았다.
“그렇게 귀신이라도 본 얼굴 하지 말아유. 비교할 수가 없잖유. 희한하쥬. 나가 아무리 봐도 그 짝 닮은 얼굴은 이짝에 없는 거 같은디유.”
살생부를 확인한 박진봉은 이레를 향해 누런 이를 드러냈다.
“워쩐대유. 오늘은 닥치는 대로 잡아 죽이는 날인디. 명부에 없는 양반을 잡아도 될런가 모르겠네유.”
“우리의 약조를 잊었는가?”
“약조? 뭔 약조 말이래유? 아! 맞다. 당분간 서로의 형편 봐준다 했지유? 워쩐대유. 그짝이 내 사정을 봐줄 날이 과연 있기는 할지 모르겠네유. 자꾸 눈에 띄는 게 귀찮으니, 이참에 그냥 치워버리고 싶은 마음도 있구.”
“남아일언중천금이라 하였네.”
“됐슈. 천금이니 어쩌니 하며 강요당하는 거라면 차라리 사내 안 하고 말겠슈. 그깟 사내대장부가 뭐라고. 죽으면 사내나 계집이나 어리나 늙으나 하나 다르지 않아유.”
어둠 속에서도 박진봉의 두 눈이 붉게 번들거렸다.
이레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런 곳에서 허무하게 죽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까지 숱한 역경을 지나왔다.
간신히 형운의 마지막 바람마저 이루었다.
이레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분의 얼굴을 보기 전까지는 죽을 수 없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아남으리라.
하지만 저 미치광이 살인마의 손에서 어떻게 벗어나야 한단 말인가.
그때, 저울에 매달린 고깃덩이 보듯 이레를 훑던 박진봉이 한걸음 옆으로 물러섰다.
“뭐해유. 내 맘 바뀌기 전에 어서 가유.”
“나를 보내주는 것인가?”
“약조했잖유. 사내가 중천금이 되니 마니 하는 건 관심 없지만서도, 그래도 아직은 그짝에게 볼일이 없네유.”
이레는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박진봉의 곁을 지날 때였다.
이레는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그에게 물었다.
“그대가 가진 명부. 그곳에 내 얼굴이 있었다면, 그래도 날 보내줄 생각인가?”
박진봉은 코밑을 훑으며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말했잖유. 사내가 중천금 어쩌고 하는 말은 무식혀서 모른다고유. 그래도 나가 일 하나는 아직까지 기가 맥히게 해유.”
명부에 얼굴이 있으면, 틀림없이 죽였을 것이라는 말이었다.
“……알겠네.”
이레는 스산한 박진봉의 눈빛을 흘려보내며 걸음을 옮겼다.
“참 야무진 사람이네.”
멀어지는 이레의 뒷모습을 차갑게 바라보던 박진봉이 허리에 걸린 낫을 집어 들었다.
“언제까지 히죽대고 있을겨.”
어두운 골목에서 음침한 분위기의 사내들이 어슬렁어슬렁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같이 봉두난발에 궁색한 옷차림을 한 사내들이었다.
“부지런히 움직여유. 해뜨기 전에 떨굴 목이 적지 않아유.”
박진봉은 굶주린 늑대 같은 사내들을 이끌고 어둠 속을 걸었다.
그들의 손에 들린 낫과 칼이 핏물에라도 담근 것처럼 붉게 번뜩이고 있었다.
***
좁은 골목을 빠져나가니, 마침내 긴 담벼락이 나타났다.
이 담을 따라 오른쪽으로 꺾어서 오십 보쯤 걸어가면, 별채가 나온다.
집이다.
그리운 그분께서 계신 집.
그 사람을 떠올리다 보니 저도 모르게 걸음이 빨라졌다.
걷던 걸음이 어느새 뛰고 있었다.
그렇게 골목을 꺾었다.
밤이 그린 그늘 속에 익숙한 풍경이 너울져 있었다.
그리고 그 풍경 속을 불안한 표정으로 서성이는 한 사람의 모습이 있었다.
그의 모습을 발견한 순간, 이레는 저도 모르게 두 눈에 눈물이 왈칵 솟았다.
그도 그녀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우뚝.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바라보더니, 다음 순간 나는 듯이 달려왔다.
“이레야.”
평소와 전혀 다른 차림.
다른 모습임에도 그는 이레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무섭게 달려온 그가 이레를 거칠게 안았다.
“이레야.”
그녀를 생각하는 마음이 얼마나 간절하였는지, 그녀의 이름을 거침없이 부르짖었다.
“어디 갔다 이제 오는 게요. 어딜 가는 것이면, 말이라도 할 것이지. 내가 얼마나 걱정하였는지 아시오. 옷차림은 또 왜 이렇고.”
“저하.”
“아니오. 됐소. 아무 말 마시오. 이렇게 온전히, 무사히 돌아온 것만으로도 충분하오. 그러니 아무 말 하지 않아도 되오.”
형운은 그녀를 안은 채,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레도 그의 품에 잠겨 숨을 고르게 쉬었다.
두근두근.
힘차게 박동하는 심장 소리.
코끝으로 스며드는 그의 체취.
전신을 녹일 것만 같은 뜨거운 열기와 숨결까지.
그가 그녀를 얼마나 간절히 기다렸는지 알 수 있었다.
그 간절함과 조바심을 짐작할 수 있었다.
“다행이오. 정말…… 다행이오.”
“네, 다행입니다.”
이레는 그의 가슴에 고개를 묻으며 따스한 미소를 지었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아무런 근심도 걱정도 들지 않았다.
계획에 실패하고 말았다는 낙심도, 행여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가 하는 두려움도.
이제는 무사하였다는 안도감도.
오가는 두 사람의 체온 속에 모든 시름이 눈 녹듯 사라져버렸다.
***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오?”
형운이 뒤늦게 이레에게 물었다.
“옷차림은 또 왜 그렇소?”
이레는 궁녀의 차림이었다.
급히 오다 보니 미처 옷을 갈아입지 못한 까닭이다.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보다 무사하십니까? 어디 다치신 곳은 없습니까?”
“다행히 무사하다오. 다만…….”
형운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끝내 실패하고 말았다는 말을 어찌 전해야 할지 난감하기만 하였다.
이레와 함께 노력한 그 수많은 시간.
서탁에 매달려 함께 계획하고 고심했던 기억들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할 말이 참으로 많다오.”
“저도 드릴 말이 있습니다.”
“우선 들어갑시다.”
형운은 이레와 손을 맞잡고 별채를 향해 걸었다.
그때, 별채 안에서 누군가가 헐레벌떡 뛰어 나왔다.
최치성이었다.
“저, 저하.”
최치성의 말끝이 물결쳤다.
“왜 그러느냐? 무슨 일이 생겼느냐?”
“그런 것이 아니오라…….”
“허면, 무슨 일인데…….”
“오셨습니다, 저하.”
“응?”
“오셨단 말입니다.”
답답하다는 듯 발을 동동 구르던 최치성은 급기야 형운의 등을 떠밀었다.
“어서 들어가 보십시오, 어서.”
최치성의 채근에 형운은 의아한 표정으로 별채 안으로 발을 들였다.
별채 들마루.
한 사내가 등을 보인 채 서 있었다.
몸피가 유난히 얇고 가늘어 작은 미풍에도 날아가 버릴 듯 위태로워 보였다.
하지만 기세만큼은 크고 단단하였다.
천 년을 버틴 노송과 같은 깊은 역사가 사내의 등에서 느껴졌다.
“……!”
사내를 본 순간, 형운은 발을 멈췄다.
“설마…….”
형운의 놀람과 설렘, 긴장과 흥분이 맞잡은 손을 통해 이레에게 전해졌다.
그가 이레를 보며 물었다.
“그대요?”
계획은 실패했다.
마지막 비책마저 임무보다 형운의 목숨을 우선한 기대의 선택으로 말미암아 뜻을 이루지 못했다.
차라리 잘되었다 생각하였다.
제아무리 왕의 팽례라 하여도 그 삼엄한 경비를 뚫고 들어가려 하였다간 결코 무사하지 못하였으리라.
그렇게 생각하였음에도 한 자락 아쉬움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런데…….
완전히 실패하여 다시는 없으리라 생각한 기회가.
두 번 다시 뵐 수 없을 거로 생각한 그분을.
전혀 뜻하지 않은 장소에서 다시 마주하게 되었다.
“그대가 부린 조화요?”
형운의 물음에 이레는 대답 대신 가볍게 그를 떠밀었다.
“가보십시오.”
얼떨떨한 마음으로 형운은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마침내.
형운이 가까이 다가가자 내내 등을 보인 채 서 있던 사내가 고개를 돌렸다.
때마침, 하늘을 덮었던 구름이 물러가고 밝은 달이 얼굴을 보였다.
달빛에 어둠에 잠겼던 세상이 희붐하게 형체를 드러냈다.
형운을 기다리던 사내의 얼굴 위에도 교교한 달빛이 쏟아졌다.
“이제야 오는구나.”
잔뜩 갈라진 음성.
형운은 사내를 향해 머리를 숙였다.
“고개를 들어라.”
그를 내려다보며 사내가 말했다.
머리를 조아린 채 엎드린 형운의 너른 등을 사내가 토닥토닥 토닥였다.
“얼굴 좀 보자꾸나.”
형운은 천천히 머리를 들었다.
그의 눈동자에 참으로 고되어 보이는 노인의 모습이 보였다.
노인의 눈에도 형운의 얼굴이 또렷하게 맺혔다.
하얗게 서리 내린 노인의 수염이 흔들린다.
유난히 길고 고된 하루를 보낸 왕이 물었다.
“나를…… 원망하였느냐? 그리하여 그토록 무심하였느냐?”
“네, 원망하였습니다.”
망설이지 않고 나온 대답에 왕은 고개를 숙였다.
미안함과 서글픔, 그리고 원망과 어쩔 수 없는 숙명에 괴로웠다.
그러나 곧이어 들려온 청아한 목소리가 왕의 무거운 어깨를 흔들었다.
“하지만…….”
왕이 고개를 들어 형운을 응시하였다.
“그리웠습니다.”
“…….”
“매일. 매 순간. 그립고, 보고 싶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