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 천기를 읽는 팽례
붉은빛과 자줏빛이 하늘을 뒤덮었다.
선연한 노을을 머리에 인 채 거대한 왕의 행차가 궁으로 돌아왔다.
활짝 열린 궁 문이 고된 일정에 지친 왕을 맞이하였다.
행차를 호위하는 전사대의 뒤로 왕을 태운 가마가 들어섰다.
후사대, 그리고 조정의 고위 관료와 상궁과 내시, 악대와 군뢰(軍牢)를 비롯하여 행차에 나섰던 인원이 모두 환궁하자 궁 문은 다시 굳게 닫혔다.
삼엄한 눈빛의 군사들이 궐문 앞을 단단히 지키고 섰다.
“불온한 자들이 침입하려 들지도 모른다. 경계를 늦추지 마라.”
수문장의 삼엄한 명령에 병사들은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평소보다 유독 심한 경계였다.
심지어 궁으로 공납물품을 나르던 상인까지도 발이 묶였다.
“내일 아침 수라를 위한 생선입니다. 오늘 들이지 못하면 큰 불호령이 떨어질 겁니다요.”
“오늘 저녁까지 조지서(造紙署)에 들어가야 할 물건입니다. 주상 전하께 올릴 표전지(表箋紙)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니 제발 사정 좀 봐주십시오.”
상인들은 애걸복걸했지만, 병사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이 시각 이후로 그 누구도 궁으로 들여선 안 된다는 엄명이 있었소. 볼일이 있는 사람은 내일 아침 다시 오라 하시오.”
“사정이 여의치 않으니 그런 것 아닙니까? 한 번만 사정 좀 봐주십시오.”
입궐이 제한된 것은 비단 상인만이 아니었다.
심지어 정사를 돌보는 관원들까지도 입궐할 수 없었다.
“어허! 내가 누구인지 알고 앞을 가로막느냐.”
“송구합니다. 하오나, 오늘은 입궐하실 수 없습니다.”
“내 급히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왔느니. 내가 가지 않으면 어떤 일이 있을지 아느냐? 네 목 하나로 끝나지 않을 것이야.”
승정원에 소속된 승지의 엄포에도 병사는 송구하다는 말만을 반복할 뿐이다.
“대체 입궐을 막는 연유가 무엇이냐? 저기 저 사람은 궁에서 태연히 나오고 않느냐?”
“주상 전하의 안위를 위해 신분 여하와 관계없이 입궐을 철저히 제한하라는 엄명이 있었습니다.”
“나가는 사람은 아니 막고, 들어가는 사람만 막는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명을 내린 사람이 대체 누구인가? 내 이번 일을 철저히 따져 물어야겠다.”
“삼정승과 한성부우윤께서 내리신 명이라 들었습니다.”
병사의 대답에 중년의 승지는 난감한 표정이 되었다.
삼정승과 한성부우윤이라면…….
지금의 조선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이 아니던가.
그들이 직접 명하였다 하니, 더는 따져 물을 수 없었다.
“이렇게 난감할 노릇이 있나…….”
그때, 봇짐을 멘 사내 하나가 실랑이하는 관원과 병사 사이로 불쑥 끼어들었다.
“고생들 많으십니다.”
태연하게 인사한 그는 앞을 가로막는 병사들을 태연하게 지나갔다.
“거기 서라.”
병사의 제지에 사내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왜 그러십니까요?”
“네놈은 궁 문 앞에서 기다리는 저 많은 사람이 보이지도 않는 것이냐?”
패랭이를 쓴 사내는 그제야 주위를 쓱 둘러봤다.
“사람 참 많네요. 여기서 장이라도 열린답니까?”
“어느 미친놈이 궐 앞에서 장을 연단 말이냐? 궁으로 들어가기 위해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저런. 줄이 꽤 기니 무척 오래 기다리셔야겠군요. 그럼 전 이만…….”
무턱대고 안으로 발을 들이려는 그의 뒷덜미를 병사가 잡았다.
“이놈이 어디서 허튼수작을.”
“아이쿠! 왜 자꾸 그러십니까요?”
“뭐하는 놈인지는 모르나, 오늘은 아무도 궐 내로 발을 들이지 말라는 엄명이 내려졌다. 그러니 네놈도 저줄 끝에 가서 차례를 기다려라.”
“저 끝에서 말입니까?”
패랭이 갓 사내가 뒤를 쭉 훑어봤다.
“그래.”
“줄이 새끼줄처럼 깁니다.”
“그래, 저 길고 긴 새끼줄 마지막에 서라. 거기가 네 자리다.”
사내가 이마를 긁었다.
그 손짓에 패랭이 갓이 들리며 왼쪽 뺨의 옅은 칼자국이 슬쩍 보였다.
“이거 참, 곤란하네요.”
“곤란해도 소용없다. 이쪽의 승지께서도 기다리시는 거 안 보이느냐? 승정원의 관원조차도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판국인데. 네까짓 것이 무어라고…….”
“승정원의 관원은 아니지만, 저도 나름대로 중한 일이 있습지요.”
당당한 대답에 병사가 비웃음을 입가에 지었다.
“네놈의 그 중한 일이 대체 무엇인데? 그보다 뭐하다 온 것이냐? 악취가 진동하는구나.”
병사의 말처럼 패랭이 사내가 나타난 이후로 역한 냄새가 진동했다.
근처에 있던 사람들은 이미 코를 잡고 멀찌감치 물러났고, 제법 떨어진 곳에 있는 사람들조차도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패랭이 사내는 등에 진 봇짐을 슬쩍 앞으로 보였다.
“이게 냄새는 좀 독해도 아주 귀한 물건입니다.”
악취는 봇짐에서 나는 것이었다.
사내가 봇짐을 슬쩍 들썩이자 냄새가 두 배는 더 진해졌다.
코를 막은 병사는 팔을 뻗어 사내에게 내저었다.
“그게 얼마나 귀한 물건인지는 몰라도, 궁에는 절대 들일 수 없는 물건 같구나. 억지 쓰지 말고 썩 물러가거라.”
“제가 지금 들어가지 않으면 상황이 심각해질 텐데요.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여기 있는 사람 중에 네놈만큼 특별한 사정 없는 사람이 없다.”
“그 정도가 아닐 텐데요.”
“잔말 말고 물러가라. 더 뭉그적댔다간 호된 맛을 보게 될 것이야.”
“알겠습니다. 그리 말씀하시니 저는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다만, 내의원에 한마디만 전해주십시오. 어렵게 구한 침향은 궐 문 앞에서 들어가지 못해 돌아간다고요.”
“이놈, 그런 어설픈 협박이 통할 줄 알았더냐? 썩 물러가거라.”
그때였다.
“자, 잠깐!”
궁 문 안쪽에서 의원 하나가 헐레벌떡 뛰어나왔다.
“방금 침향이라 하였느냐?”
패랭이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요.”
“보문 약재상에서 보낸 사람이로구나. 왜 이제야 오느냐? 이 앞에서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느냐.”
“대국에서 온 상선(商船)이 예정보다 늦었지 뭡니까.”
“이제라도 와서 다행이다. 서두르자꾸나.”
내의원의 내의가 패랭이 사내를 궐 문 안으로 끌었다.
눈치를 살피던 병사가 그들을 가로막았다.
“송구합니다만, 이 사내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런 미친 자들을 보았나. 이 자가 가져온 것이 무엇인지 아느냐? 침향이다. 주상 전하의 병환에 사용될 귀한 약재란 말이다. 너희가 감히 주상 전하의 치료를 방해하겠단 말이냐?”
“하지만 아무도 들이지 말란 명이 있었습니다. 차라리 내의원께서 이 자의 봇짐을 가져가시면 어떻겠습니까.”
“아! 그러면 되겠네요.”
패랭이 갓을 쓴 사내가 봇짐을 내의원에게 내밀었다.
그러나 워낙에 악취가 고약한지라.
의원은 코를 쥐며 헛구역질을 해댔다.
“무슨 놈의 침향 냄새가 이렇게 지독하냐. 보통은 은은한 향기가 나건만. 이게 대국에서 온 귀한 침향이 맞느냐?”
패랭이 사내가 가슴을 활짝 펴며 호언장담했다.
“예로부터 몸에 좋은 약은 입에 쓰다 하지 않았습니까. 침향 또한 최고로 뛰어난 물건은 오히려 악취를 풍긴다 합니다. 청국의 남만에서만 나는 물건중에서도 특상품을 따로 골라내어 적어도 수십 년은 푹 묵혀두고 만든 거라고 했습니다. 대국에서도 황실에만 소량으로 납품되는 물건으로…….”
“잡설은 됐다. 악취를 풍기는 침향이라니, 생전 처음 듣는 말이지만, 높은 분들께서 알아서 하시겠지. 아무튼, 그 냄새 나는 물건을 내가 나를 순 없다.”
“그럼, 다른 분께서…….”
패랭이 사내가 주위에 있는 병사들을 돌아보았다.
그의 시선이 닿은 병사들은 화들짝 놀라며 급히 시선을 피했다.
“다른 사람 볼 것 없다. 네가 가져온 물건이니, 마지막까지 책임져라.”
“하지만 엄명이 있어 아무도 들어갈 수 없다 합니다만…….”
“그 어떤 명이 전하의 안위에 비할 수 있단 말이냐.”
내의원은 궁 문 앞에 서 있는 병사들을 보았다.
“오호라, 이제 보니 너희가 주상 전하의 치료를 방해하겠다는 심산이로구나. 역적이라도 되겠단 말이냐?”
역적 운운하는 겁박에 병사들은 더는 앞을 막아설 수 없었다.
“물건만 내려놓고 바로 나와야 할 것이다.”
“그럼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패랭이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작 열어줄 것이지.”
헛기침을 흘리며 의원이 앞서 걸었다.
그 뒤를 패랭이 사내가 히죽 얄밉게 웃으며 따랐다.
“그럼, 고생들 하십시오.”
그들이 지나가자 승정원의 관원이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투덜거렸다.
“나도 들어가야겠네.”
“안 됩니다. 개미 새끼 한 마리 들이지 말라는 엄명이 있었습니다.”
“방금 저자는 들이지 않았는가?”
병사들은 턱을 추켜세우며 단호하게 말했다.
“전하의 안위와 관련된 일이 아니라면, 절대 궁으로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
‘드디어 들어왔구나.’
성안으로 발을 들인 패랭이 갓 사내, 김기대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예상보다 궐의 경계가 심해 들어오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무슨 일 있습니까? 궁의 경계가 여느 때보다 삼엄합니다.”
기대의 물음에 앞서 걷던 내의가 코웃음을 쳤다.
“이게 다 오늘 있었던 행차 때문이 아니겠느냐. 무슨 이유에선지 다들 신경이 곤두서 있으니. 임진년의 난리는 난리도 아니다.”
“그렇군요. 그래도 전 의원님 덕에 일을 마칠 수 있게 되어 다행입니다요.”
“사정이 워낙 급하니 어쩔 수 없지.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더니. 시중의 침향이란 침향은 온통 씨가 말라버렸을 줄 누가 상상이나 하였겠느냐.”
의원의 말에 기대는 보이지 않게 미소를 지었다.
시전의 침향이 씨가 마른 이유, 기대는 알고 있었다.
만사여의.
그녀가 한 달 전부터 성으로 들이는 약재들을 모두 매점(買占)하여 벌어진 일이다.
당연히 오늘을 위한 대비였다.
“행차라면 임금님께서 궐 밖으로 나가시는 것 말이지요? 장관이었겠습니다.”
“겉보기엔 그랬겠지. 하지만 전하의 병환이 깊은 중에 무리하셨으니, 어의 영감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러니 급하게 침향까지 찾은 게 아니더나. 그나저나, 그렇게 바싹 붙지 말고 좀 떨어져서 걸어라. 그 독한 냄새에 머리가 아플 지경이다.”
“……알겠습니다요.”
기대는 시무룩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하지만 그의 입가에 맺힌 미소는 사라지지 않았다.
내의원과의 거리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상황은 유리했다.
애초 그의 목적지는 내의원이 아닌 임금의 침전이 아니던가.
내의의 뒤를 따르다가 적당한 곳에서 슬쩍 빠져나갈 궁리를 하던 참이었다.
이쯤에서 슬슬 발길을 돌려 볼까.
기대는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았다.
그때였다.
“가뜩이나 주상 전하의 병증이 중하여 뒤숭숭한 판국에 폐세손까지 엉뚱한 짓거리를 해서 말썽이니, 원.”
쯧쯧, 혀를 차는 내의원의 음성이 기대의 귀에 꽂혔다.
폐세손이라면 형운을 뜻함이렷다.
그러잖아도 그의 안위가 궁금했던 기대가 슬며시 물었다.
“그분께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폐위되어 궁 밖으로 쫓겨났으면 얌전히 숨죽이고 지내는 것이 인지상정인 것을. 폐세손이 엉뚱한 곳에서 병졸놀이를 하다 들켰다지 뭐냐. 그 모습을 수상히 여긴 자들에게 발각되어 한바탕 난리가 난 모양이다. 다행히 사헌부의 어사들이 달려가 사태를 수습하였으니 망정이지. 자칫하였으면 큰일 날 뻔했다더구나.”
기대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행히 세손께선 무사하신 모양이다.
홍국영이 늦지 않게 일을 도모하였구나.
“저런, 상당히 시끄러웠던 모양입니다. 그럼 전하께서도 이 소식을 아시겠습니다요.”
“어림없는 소리. 전하의 건강이 위태로우니. 자칫 이 소식이 귀에 들어갔다간 정말로 큰일이 날 수도 있으니. 다들 쉬쉬하는 중이다.”
“……그렇군요.”
기대는 숨을 길게 들이마셨다.
역시나.
임금께서는 충신이라는 가면을 쓴 자들의 장벽에 둘러싸여 아무것도 보지도, 듣지도 못하고 계시구나.
결국, 이번 계획의 성패는 자신의 두 어깨에 달린 셈이다.
‘반드시 세손 저하의 뜻을 전하리라.’
설사, 그 때문에 목숨을 잃는 한이 있어도.
기대의 눈에 강한 의지가 떠올랐다.
그 와중에도 내의는 입을 멈추지 않았다.
“한데, 폐세손의 무위가 대단한 모양이더구나. 구종엽과 수십 합을 겨뤄도 전혀 밀리지 않았다고 하는구나. 높은 분들께서 이 사태를 엄중히 여기시고 철저하게 조사하실 모양이다.”
슬쩍 몸을 빼려던 기대가 다시 내의원의 뒤를 쫓았다.
“지금 누가 싸웠다고 하셨습니까?”
“젊은 사람이 벌써 가는 귀라도 먹었느냐? 폐세손이라고 몇 번이나 말하지 않았느냐.”
“그분 말고 폐세손과 수십 합을 겨뤘다는 사람, 누구라 하셨습니까?”
“구종엽이라고…….”
“무위는 뛰어나나 성격이 지랄 맞기로 유명한 그 구종엽 말입니까? 눈이 뒤집히면 물불 안 가리는 걸로 유명한…….”
“그 성정 때문에 실력만큼의 대접을 못 받는다는 사람이지. 그런데 네가 그 사람을 어찌 아느냐?”
기대는 대답 대신 갑자기 앓는 소리를 냈다.
“아이구, 배야.”
“갑자기 왜 그러느냐?”
“아침부터 배가 살살 아프더니. 아무래도 단단히 탈이 난 모양입니다. 뒷간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선 그 물건부터 가져다 놓고…….”
“송구합니다만, 가는 도중에 참담한 광경을 볼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참으로 가지가지 하는구나. 저쪽 구석으로 가 보거라.”
“알겠습니다.”
진실로 급한 듯 기대가 뛰어가려는 찰나.
“설만 뒷간에 그 귀한 물건을 들고 가려는 것이냐?”
“그러면 어찌합니까?”
“봇짐은 내려놓고 가거라. 예서 기다릴 것이니.”
“그럼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소인, 휑하니 다녀오겠습니다.”
허겁지겁 봇짐을 내려놓은 기대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의원이 가리킨 곳으로 허겁지겁 달려갔다.
“저런 변변찮은 놈을 보았나.”
못마땅한 표정으로 혀를 끌끌 차던 의원은 기대가 내려놓은 봇짐을 흘끔 보았다.
“청국의 황실에서도 아주 급할 때만 쓰는 귀한 물건이라 하였지? 어디 어떻게 생긴 물건인지 한번 보기만 할까…….”
주위를 살펴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의관은 조심스레 봇짐을 풀었다.
귀한 비단으로 몇 겹이나 감싼 것을 펼치니, 검고 동글동글한 환약 같은 것들이 나왔다.
“냄새 한번 지독하네. 그런데 이게 정녕 침향이란 말인가?”
의원은 물건을 들어 자세히 살폈다.
“생긴 것이 꼭…… 개똥 같은데.”
머뭇거리던 의관은 그것을 입가에 가져갔다.
“어디 쓸만한 물건인지 기미(氣味)나 해 볼까?”
의원은 침향의 끝을 살짝 맛봤다.
곧 그의 인상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이런 젠장! 냄새만이 아니라 맛도 지랄 맞는구나.”
***
“대체 이곳에서 무얼 하고 계신 겁니까?”
사헌지평 권문이 형운에게 물었다.
수상한 자들이 환궁하는 왕의 휴식처에 숨어들었다는 첩보를 듣고 급히 어사들을 이끌고 말을 달렸다.
그러나 정작 현장에서 발견한 사람은 다름 아닌 폐위된 왕세손이었다.
그야말로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만큼 놀랐다.
그런 권문과는 달리 형운은 태연하기만 하였다.
“내 이미 말하지 않았더냐. 심심파적으로 병졸놀이나 하는 중이었다.”
“지금 그 말씀을 제게 믿으라 하시는 겁니까? 그것이 가당키나 한 말씀이십니까? 대체 무슨 수로 여기까지 온 것입니까?”
“지나가다 우연히 들린 것이다.”
“그럼 그 겸사복 복색은 어디서 구한 겁니까?”
“이 또한 우연히 주웠다.”
“이거 참, 계속 그리 말씀을 하시면 조사가 아니 되지 않습니까.”
옆에서 잠자코 지켜보던 사헌부 감찰, 홍국영이 끼어들었다.
“지평 나리, 지켜보는 눈이 많습니다. 자세한 조사는 장소를 옮긴 다음에 하는 게 어떠신지요.”
“험험, 그렇군.”
권문을 구슬린 홍국영은 형운에게 은근한 눈빛을 주었다.
‘무사하여 천만다행입니다. 저하.’
형운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덕이다.’
사헌부에 은밀한 정보를 흘리고, 권문을 구슬려 어사들을 움직인 장본인, 바로 홍국영이었다.
계획한 시간에 맞춰 그가 도착한 덕분에 형운은 위태로운 상황을 모면할 수 있었다.
“좋다. 저분의 자세한 조사는 사헌부로 가서 하도록 하지. 하지만 이 자는…….”
권문은 도끼 눈으로 구종엽을 노려보았다.
“그대는 무슨 일로 저분과 혈전을 벌였소?”
“행차 경로에 거동이 수상한 자들이 보여 조사하려 하였소.”
“조사하려면 생포를 할 것이지. 어쩌자고 흉기부터 휘둘렀소? 그러다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저분이 어떤 분인지 알고는 있었소?”
“폐위된 세손이 저런 복색으로 병졸놀이를 할 줄 누가 알았겠소? 나는 정녕코 몰랐소.”
시침을 뚝 떼는 구종엽을 권문은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구종엽의 집안이 어떤 집안인 줄 권문은 잘 알고 있었다.
내놓으라 하는 무관들을 배출한 조선 최고의 무인 집안이 아니던가.
그러기에 조정의 어지간한 무관직은 저 집안의 사람들이 죄다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구씨 집안의 권세는 하루가 다르게 높아졌다.
하지만 높아지는 권세만큼 그들의 악행도 나날이 심해지니.
욕지거리는 기본이고, 툭하면 아랫것들을 때리고, 자기 심기 불편하다는 이유로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을 매질하여 거동도 못 하게 만든 경우가 허다했다.
구씨 집안에 이를 가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권문 역시 그중 하나였다.
얼마 전, 그의 사촌 중 하나가 저 집안사람에게 매를 맞았다.
쳐다보는 눈길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권문은 구종엽을 향해 고리눈을 치떴다.
“이런 미친 자를 보았나. 아무리 그렇다고 하여도 다른 분도 아니고. 지금까진 어땠을지 모르겠으나, 이번엔 순순히 넘어가지 못할 터이니. 각오해 두는 게 좋을 것이오.”
“…….”
구종엽은 이를 갈았다.
‘일이 이렇게 될 줄이야.’
계획대로라면 단숨에 형운을 죽이고 형체도 못 알아보게 시신을 훼손할 작정이었다.
그런 다음, 역모를 꾸민 불한당으로 처리하려 하였건만.
그러나 어사대들이 나타난 순간, 그의 계획은 송두리째 무산되고 말았다.
아니, 단지 계획만 무너진 것이 아니었다.
아무리 폐위되었다 하나 형운은 왕세손이었다.
왕의 혈육.
감히 왕족에게 창을 겨누었으니.
조사의 결과와는 상관없이 그와 이 일에 가담한 자들 모두가 참혹한 꼴을 면치 못하게 될 터였다.
‘이렇게 된 이상…….’
구종엽은 수하들과 시선을 주고받았다.
수하들도 독기어린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권문이 이끌고 온 사헌부 어사들의 수는 불과 십여 명.
겸사복 역시 그리 많은 숫자는 아니었다.
모조리 죽여 입막음만 한다면…….
‘내가 살려면 그 방법밖에 없다.’
결단을 내린 구종엽은 즉각 행동에 나섰다.
그는 바닥에 떨어진 창을 발끝으로 차올렸다.
순식간에 구종엽의 손아귀에 창이 들어왔다.
그는 그대로 형운의 등을 향해 창을 찔러넣었다.
불의의 기습.
누구도 감히 이런 상황에서 그가 형운의 등을 노릴 거라 예상하지 못하였다.
그러기에 이번의 공격은 치명적일 수밖에 없었다.
“안 돼!”
“멈춰라!”
최치성과 홍인모가 동시에 몸을 날렸다.
하지만 구종엽의 기습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죽이리라.’
구종엽의 입가에 승리의 미소가 그려졌다.
그의 수하들 역시 일제히 무기를 집어 들었다.
이대로 폐세손을 죽이고, 수하들이 우왕좌왕하는 적들의 목을 모조리 베어내면…….
오늘의 일은 영원히 묻히게 되리라.
하지만…….
“네 이놈!”
벼락같은 호통과 함께 지면을 스치고 날아온 단도 한 자루가 창을 쥔 구종엽의 손을 꿰뚫었다.
“끄아아악!”
타는 듯한 통증에 구종엽은 비명을 터트렸다.
비명과 동시에 형운이 몸을 낮추며 검을 뽑았다.
최치성과 홍인모의 검도 구종엽을 향해 짓쳐들어갔다.
세 사람의 검이 일제히 구종엽의 몸을 찌르고 베었다.
“컥!”
구종엽의 입에서 짓눌린 신음이 흘러나왔다.
핏대가 곤두선 그의 눈동자에 억울함이 깃들었다.
불과 한 뼘.
형운과 그의 창끝의 사이는 불과 한 뼘이었다.
조금만…… 손가락 한 마디만 더 뻗었어도.
하지만 그는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쓰러졌다.
피를 뿌리며 구종엽이 허무하게 쓰러지자 그의 수하들도 얼어붙고 말았다.
“무엇들 하는가. 당장 저놈들을 잡아들이지 않고서.”
홍국영이 칼 든 무인 하나를 때려눕히며 소리쳤다.
잠시 넋을 빼고 있던 어사들이 신형을 날렸다.
구종엽의 수하들은 맹렬히 저항했지만, 노련한 어사들과 겸사복들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소란은 순식간에 정리되었다.
한바탕 피바람이 불고 간 장원으로 말을 탄 사내가 들어왔다.
“저하, 무사하시어 정말 다행입니다.”
말에서 뛰어내린 사내가 형운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부복하였다.
패랭이 갓을 쓴 사내.
단도를 날려 구종엽의 기습을 막은 사내를 형운이 놀란 시선으로 응시했다.
“너는…….!”
패랭이 갓을 쓴 사내가 고개를 들었다.
“은마입니다.”
김기대가 싱긋, 미소를 보였다.
“그대가 어찌 이곳에 있단 말인가?”
지금쯤 궁에 있어야 할 사람이었다.
형운을 대신하여 주상 전하께 서찰을 전해야 할 사람.
그런 그가 이곳에 나타났다.
“구종엽이 이곳에 있다는 소리에 불길한 느낌이 들어 왔습니다. 늦지 않아 정말 다행입니다.”
기대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그가 아니었다면…….
그가 단도를 날려 구종엽의 기습을 막지 않았다면, 형운은 치명상을 면치 못했으리라.
하지만 정작 형운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그의 입에서 탄식 섞인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내 비록 목숨은 구하였지만, 뜻은 이루지 못하게 되었구나.”
***
“대나무는 죽고, 폐세손은 낙심하였다…….”
수하가 전한 서찰을 읽으며 정후겸은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서찰엔 주상의 휴식처로 정해졌던 장원의 소식이 소상하게 적혀 있었다.
그는 물의 자리에 앉은 만사여의를 응시했다.
“우리의 내기는 결국 나의 승리로 끝이 났소. 이제 그대의 모든 것이 내 것이 되었소.”
정후겸는 예의 나른하고 느긋한 표정으로 의자 깊숙히 등을 기댔다.
만사여의를 향한 그의 두 눈에 지금껏 볼 수 없었던 욕망이 번들거렸다.
그때, 찬물을 끼얹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송구하지만, 저는 아무것도 넘겨줄 수 없습니다.”
만사여의의 대답에 정후겸은 인상을 찡그렸다.
“이제 와 약조를 지키지 않겠다는 소리요?”
“상인에게 신용은 목숨과도 같은 것이지요.”
“하면?”
정후겸은 서찰을 만사여의에게 밀었다.
“설마 내 말을 못 믿는 것이오? 그대가 한번 보시오. 왕의 팽례는 왕이 아닌 폐세손의 목숨을 선택하였소. 최후의 비책마저 어긋나버리고 말았으니, 이제 폐세손의 뜻은 영영 이룰 수 없는 꿈이 되어버린 셈이오.”
냉정한 정후겸의 분석에도 만사여의는 여전히 굴복하지 않았다.
“전 세손의 뜻을 전할 팽례가 있다 하였을 뿐, 그 사람이 반드시 왕의 팽례라 한 적은 없습니다.”
“이 세상에 왕의 팽례에 버금가는 사람이 또 있단 말이오? 괜한 억지 쓰지 마시오.”
“비록 왕의 팽례만큼 길눈이 밝지는 않지만, 대신 하늘의 천기를 살피는 눈은 세상 그 누구보다 밝은 팽례가 하나 있습니다.”
“무어라?”
“그분이라면 필시 세손의 뜻을 왕께 전할 겁니다.”
“왕의 팽례보다 더 대단한 팽례가 있다?”
정후겸은 등을 다시 곧추세웠다.
탁자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괸 채 그가 다시 물었다.
“……진심으로 하는 소리요?”
만사여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분은 이미 왕의 팽례를 대신하여 철옹성과 같은 왕성을 드나들었지요. 그 누구도 하지 못할 위험한 일을 여러 차례 해내었습니다. 그러니 이번에도 필시 세손 저하의 간절한 소망을 전할 것이옵니다.”
정후겸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대의 말을 들으니 나도 짐작 가는 사람이 하나 있기는 하오. 하나, 그 사람은 절대 그 일을 할 수 없을 것이오.”
왜냐하면…….
그의 시선이 만사여의를 향했다.
그 사람은 지금 이곳에 있으니까.
왕세손을 위해, 정해진 천기와 운명마저 흔들어버릴 수 있는 사람.
아니, 여인.
그녀는 바로 이곳에 있다.
자신의 눈앞에.
물의 자리에.
한때는 왕세손빈이었던 여인.
폐위된 세손을 돕기 위해 제 발로 호랑이 굴로 들어온 겁 없는 여인.
만사여의.
‘당신은 이곳에 있소. 그런데 어떻게 왕성으로 갈 수 있단 말이오?’
작금의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억지가 분명했다.
정후겸은 만사여의의 얕은수에 웃음이 나왔다.
그런데…….
술기운 때문일까?
눈앞의 만사여의에게서 묘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검은 너울.
풍성한 치맛자락.
늘 코끝을 찔러오는 청아한 향내는 한결같건만.
이 낯설고 생경한 감각은 무어란 말인가.
“설마…….”
형언하지 못할 기묘한 느낌.
정후겸은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만사여의에게로 성큼성큼 다가간 그는 대뜸 그녀가 쓰고 있는 너울을 잡아챘다.
거친 손짓에 내내 만사여의를 가리고 있던 너울이 사라졌다.
이내 하얗고 앳된 얼굴이 드러났다.
뭇 사내의 시선을 사로잡을 만큼 아름다운 미모의 여인.
그러나 정후겸이 기억하는 그 여인은 아니었다.
정후겸의 두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그대는…… 너는 대체 누구냐?”
여인은 흔들리는 정후겸의 동공을 직시하며 당당하게 말했다.
“아시질 않습니까.”
한서로.
시전의 여장부.
“저는 만사여의입니다.”
아침부터 내내 물의 자리에 지키고 있던 여인.
그녀는 이레가 아닌 한서로.
진짜 만사여의였다.
***
“상선은 어딜 갔느냐?”
쇳소리가 섞인 왕의 음성이 침전을 가로질렀다.
문지방 앞에 앉았던 상궁이 머리를 조아린다.
“잠시 처리할 문제가 있어 내반원으로 드셨습니다.”
“그래? 알겠다.”
“곧 저녁 수라 올리겠나이다.”
“아니다. 내 오늘은 매우 곤하구나. 그러니 다들 물러가거라.”
“하오나…….”
“물러가라 하였다.”
왕은 자리에 누웠다.
감히 뒷말을 붙일 수 없을 만큼의 단호함인지라.
침전을 지키던 궁인들은 뒷걸음으로 하나둘 방을 나섰다.
그들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왕은 주름진 눈을 감았다.
무리한 까닭일까.
오늘은 유난히 곤하였다.
아니, 아니다.
이리 힘들고 곤한 것은 비단 행차로 인한 노고 탓만은 아니리라.
“……무정한 녀석.”
왕의 뇌리에 형운의 반듯한 모습이 떠올랐다.
죽어도 끊지 못하는 것이 천륜이라 하였던가.
비록 자신이 궁 밖으로 나가라 하였으나, 이리 발길 딱 끊을 줄 몰랐다.
혹여나 만날 수 있을까 하여, 무리하게 행차를 고집하였건만.
끝내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서운함에 가슴 끝이 묵직했다.
묵직한 마음에 어느 사이 원망의 가시가 돋아났다.
어쩌자고 이리 매정한 것이냐.
너는 참으로…… 차갑구나.
외롭고 시린 마음을 곱씹으며 왕은 짓무른 눈가를 문질렀다.
그러다 문득 느껴지는 시선에 눈을 떴다.
침소 한구석.
어둠으로 그늘진 곳에 다소곳이 앉아 있는 궁녀의 모습이 들어왔다.
“무엇이냐?”
“…….”
“내가 물러가라 명하였거늘. 너는 듣질 못하였느냐?”
사나운 음성이 칼날처럼 날아들었다.
그럼에도 궁녀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마치 뿌리를 내린 나무처럼 머리를 조아리고 있을 뿐이다.
늙은 왕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너는 누구냐?”
궁녀의 처신이 아무래도 범상치 않았다.
그러고 보니, 조아리고 있는 모양새도 낯설었다.
“감히 누군데 내 침소에 들어온 것이냐?”
왕의 음성이 높아졌다.
찰나.
“소인, 소식을 전하러 왔나이다.”
“소식을 전하러 왔다? 그럼…… 네가 팽례란 말이냐?”
“그렇사옵니다.”
“팽례 중에 여인이 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말하라. 너는 대체 누구냐?”
왕의 준엄한 명령에 궁녀가 고개를 들었다.
순간, 왕은 보료에 비스듬히 기대고 있던 몸을 바로 세웠다.
“너는…….”
흰 서린 내린 수염이 놀람으로 인해 파르르 떨렸다.
“세손빈이 아니더냐?”
궁녀의 정체, 다름 아닌 이레였다.
이레는 몸을 일으켜 왕에게 절을 올렸다.
“그간 강녕하시었나이까.”
“네가 어찌 이곳에 있느냐?”
“반드시 전해야 할 서신이 있사옵니다.”
“그것이 무엇이더냐?”
이레는 품에 안고 있던 서찰을 꺼내 왕에게 올렸다.
형운의 마음이 담긴 서찰.
그것이 기어코 왕에게 전해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