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 그 수상한 사람, 바로 나다!
붉은 노을이 어둠에 자리를 내주었다.
등잔불이 모옥을 노랗게 밝혔다.
“조선 팔도에서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무사(武事). 그리고 그가 훈련한 비범한 무인들.”
정후겸은 손가락으로 빈 술잔을 돌렸다.
언제부터인가, 그는 술을 마시지 않고 있었다.
눈빛도 전보단 차분하게 가라앉았고, 목소리 또한 낮아졌다.
“세손은 결코 대나무에게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오.”
“세손의 위기란 말입니까?”
“안타깝게도, 그렇소.”
“……제 생각은 다릅니다.”
만사여의는 따뜻하게 데운 차를 찻잔에 따랐다.
얼굴을 가린 너울 안으로 찻잔을 들이는 모습에서 정후겸이 기대한 긴장의 징후들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무언가 변수가 남아 있소?”
만사여의는 대답 대신 질문을 던졌다.
“해께선 대나무를 조선 팔도를 통틀어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강한 무인이라 말씀하시었지요?”
“그렇게 말했소.”
“그럼, 그중 최고는 누굽니까?”
“글쎄, 다들 용호상박의 실력자들이라. 우위를 구별하기 어렵소.”
“그렇습니까? 저와는 생각이 다르군요.”
“그게 무슨 말이오?”
“조선 최고의 무사가 누구인지, 저는 알고 있습니다.”
“조선 최고의 무사, 대체 그가 누구란 말이오?”
정후겸의 물음에 만사여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세자 저하십니다.”
반듯했던 정후겸의 미간이 한데로 모였다.
잠시 후, 다시 평정을 찾은 그가 입을 열었다.
“확실히 죽은 세자의 무위는 대단했소. 생전, 그가 사용했다던 청룡도는 범상한 사내는 들기조차 버거운 물건이라더군. 그런 무기를 마치 부지깽이처럼 다뤘다 하니. 살아 있었다면 당연히 그 사람을 첫손에 꼽았을 것이오. 하지만 이제는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 아니오. 무슨 연유로 망인(亡人)을 입에 올리는 것이오?”
정후겸은 만사여의를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설마, 그 사람이 귀신이라도 되어 폐세손을 돕는다 생각하는 것이오?”
“귀신은 모르지만, 그분의 분신이 있습니다.”
만사여의는 얼굴을 가린 너울 속으로 찻잔을 옮겼다.
그녀의 빨간 입술이 찰랑거리는 찻물에 파문을 일으켰다.
“그분과 똑닮은…… 분신 같은 분이 계십니다.”
***
피잉!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소음이 귓전을 울렸다.
곧 화살이 나무에 박히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누군가 기겁하는 비명이 연이어 들렸다.
데구르르.
불이 채 꺼지지 않은 횃불 하나가 대나무, 구종엽의 발치로 굴러왔다.
그 횃불에 화살 하나가 박혀 있었다.
방금 장원 안쪽에서 날아온 화살이었다.
“……횃불을 노린 것인가?”
구종엽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장원 앞마당은 그가 이끌고 온 병사들로 가득 들어차 있었다.
손바닥 하나 지나갈 틈 없이 빽빽하게 모인 병사들 무리에서 정확하게 횃불만을 쏘아 떨구었다.
“맥없이 당하지 않겠단 말이로군.”
일 다경 전.
십학사의 대나무, 구종엽은 병사들을 이끌고 장원으로 들이닥쳤다.
어쩌면 이곳에 폐세손이 있을지 모른다는 상선의 조언 때문이었다.
절대 그럴 리 없다 생각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걸음 한 것인데…….
형운이 있었다.
설마하니 폐세손이 겸사복으로 위장하고 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마지막 순간.
상선이 ‘만에 하나’라는 생각으로 환궁 경로를 변경하지 않았다면, 주상과 폐세손의 만남을 맥없이 지켜볼 뻔하였다.
허를 찌르는 훌륭한 계책이었다.
하지만 기발하고 뛰어난 책략일수록 발각될 경우 감당해야 할 위험의 수위는 높았다.
지금의 형운처럼…….
겸사복으로 위장한 형운의 측근은 고작 두 명뿐.
철저하게 신분을 속여야 했기에 많은 수를 동원할 수 없었던 까닭이다.
그렇기에 병사들로 장원을 포위한 순간, 구종엽은 승리를 장담할 수밖에 없었다.
오히려 일이 너무 허무하게 끝나는 것 같아 아쉬웠다.
고작 셋이라.
한 판 신명 나는 대결을 기대했건만.
아쉬운 마음마저 들었다.
그러나…….
이후에 벌어진 일은 구종엽의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적에게 포위된 형운은 절망하긴커녕 수하들을 이끌고 장원 안으로 물러났다.
“좁은 입구에서 대군을 상대하시겠다?”
적의 수가 이쪽보다 많을 때는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수세에 집중해야 한다.
“제법 병법을 아는구나. 하지만 그 수작에 순순히 어울려줄 생각은 없다.”
구종엽은 비릿한 조소를 머금었다.
굴 안으로 숨은 너구리를 잡는 방법은 간단했다.
동굴 입구에 불을 피우는 것이다.
“횃불을 가져와라.”
장원을 통째로 태워버리면 폐세손 역시 밖으로 기어 나올 수밖에 없으리라.
명이 떨어지기 무섭게 병사 몇이 횃불을 들고 달려왔다.
바로 그 순간, 화살이 날아왔다.
바람을 가르고 날아온 화살은 빽빽하게 모인 사람들의 머리통 사이를 피하며 정확하게 횃불에 박혔다.
구종엽은 횃불과 그 횃불에 박힌 화살을 내려다보았다.
이젠 불마저 꺼지고 싸늘하게 식어가는 횃불.
“우연인가 아니면…….”
쐐기라도 박듯 연거푸 화살이 날아들었다.
딱! 딱! 딱!
무서운 연사로 날아든 화살들은 정확하게 횃불에 명중했다.
대나무는 저도 모르게 감탄을 흘리고 말았다.
“기가 막힌 실력이로구나.”
누구인지 몰라도, 신궁이라 불리어도 전혀 부족하지 않을 실력자였다.
심지어 마지막으로 쏜 화살은 깃을 꺾어 쇠사슬처럼 얽힌 사람들 틈바구니를 통과하여 명중하였다.
만약, 저 화살이 횃불이 아니라 내 머리를 노린 것이라면.
생각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간담이 서늘해졌다.
그런 생각을 한 것은 비단 구종엽만이 아니었다.
사람들의 발소리와 고함으로 번잡하던 장원 앞마당에 느닷없는 고요가 번져나갔다.
화살을 쏜 자가 마음만 먹으면 누구의 목숨이라도 가져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긴장감 가득한 침묵이 흘렀다.
삐걱.
조용해진 대청 밖으로 세 사람이 걸어 나왔다.
형운과 그의 좌우 익위사였던 최치성 그리고 홍인모였다.
구종엽은 부리부리한 눈을 치켜뜨고 세 사람을 훑었다.
저들 중 화살을 쏜 사람이 누굴까?
놀랍게도 활을 든 사람은 형운이었다.
폐세손에게 저런 재주가 있었던가?
놀람과 의아함이 대나무의 눈에 들어찼다.
대답이라도 하듯 형운의 음성이 허공을 가로질렀다.
“누가 내 화살을 받겠느냐?”
위엄 서린 호통에 장내가 얼어붙었다.
아무도 선뜻 앞으로 나서지 못했다.
병사들은 폐세손의 당당한 신위에 압도당했다.
그 순간만큼은 어느 쪽이 불리한 것인지 의문이 생길 정도였다.
“허허허.”
그때, 웃음소리가 차갑게 얼어붙은 공기를 깨트렸다.
대나무였다.
“죽은 세자의 무위가 진정 대단하여 천하에 견줄 자가 드물다 하더니. 그 아들의 실력 또한 그에 못지않은 모양이구나.”
쿵!
구종엽은 자신의 키보다 큰 창을 곧게 세워 바닥을 내리찍었다.
“내 오래전부터 조선 최고라 소문난 사람과 직접 겨뤄보고 싶었으나, 끝내 대결이 성사되지 못하여 내내 아쉬워하였느니. 오늘 그의 분신을 통해 그때의 아쉬움을 달래리라.”
대나무는 창을 휘두르며 형운에게 달려들었다.
그의 뒤를 이어 병사들이 밀물처럼 몰려나갔다.
***
죽은 세자의 분신이라…….
정후겸은 만사여의에게로 상체를 기울였다.
“그의 실력이 정말로 먼저 간 그 사람만큼 대단하다면, 어쩌면 대나무와 한 번쯤 겨뤄볼 수도 있겠군. 하나, 그의 실력이 제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작금의 형세를 뒤집기엔 역부족일 것이오.”
“왜 그렇습니까?”
“전쟁은 혼자 하는 것이 아니오.”
“…….”
“그들이 싸워야 할 숫자가 압도적으로 많소.”
“…….”
“본디 절묘한 계책이란 남에게 들키지 않았을 때, 그 진가가 발휘되는 법. 그러나 사전에 들키면 허무하게 무너지는 법이라오.”
“……그렇군요.”
너울 속에선 덤덤한 대답이 들려왔다.
“놀라지 않는군. 지금쯤 그대의 세손은 싸늘한 시체가 되었을는지도 모르건만. 걱정되지 않소?”
“걱정되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그대는 나와의 내기를 잊은 모양이오. 폐세손이 뜻을 이루지 못하면 그대의 모든 것이 내 것이 되오.”
정후겸은 유독 ‘그대의 모든 것’이라는 대목에 힘을 줬다.
하지만 만사여의의 여유를 빼앗기엔 부족한 모양이다.
그녀는 평온한 자세를 잃지 않았다.
“내기는 잊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안하지 않다. 혹여…….”
정후겸은 눈가를 가늘게 여몄다.
“세손이 숨겨 둔 또 다른 한 수가 있는 것이오?”
만사여의의 단아한 대답이 들려왔다.
“제가 어찌 그분의 깊은 속내를 짐작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제가 풍문으로 들어 아는 그분이라면, 이런 상황도 짐작하지 않았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드는군요.”
***
검과 창이 요란하게 부딪히자 화려한 불꽃이 튀어 올랐다.
“궁술만 뛰어난 게 아니었군.”
형운과 수십 합을 겨룬 구종엽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위압적인 기세로 형운에게 달려든 구종엽은 승리를 자신했다.
사실, 조금 전 보았던 형운의 궁술(弓術)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제아무리 귀신 같은 궁술을 지닌 자라 하여도 근접 거리에서 짓쳐들어오는 싸움에는 약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든 가까이 붙기만 하면 우위를 점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놀랍게도 형운은 그의 짐작 두 가지를 모조리 부숴버렸다.
구종엽이 달려들자, 형운은 차분한 자세로 화살을 꺼내 활에 메겼다.
그 모습을 보며 구종엽은 미소를 지었다.
이미 형운과 그의 간격은 세 걸음 정도에 불과했다.
“늦었다!”
구종엽은 형운의 가슴을 향해 긴 창을 뻗었다.
그 찰나의 순간.
형운은 바람에 구르는 낙엽처럼 부드럽게 몸을 회전하여 창끝을 피했다. 그러곤 활짝 열린 구종엽의 가슴을 향해 한껏 시위를 당긴 화살을 쏘았다.
궁술은 근접전에 약하다라는 구종엽의 편견이 부서지는 순간이었다.
피하기엔 늦었다는 판단과 함께 대나무는 왼쪽 어깨를 내밀었다.
심장을 노린 형운의 화살은 그의 어깨에 박혔다.
상처 입은 구종엽은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그리고 무서운 기세로 창을 휘둘렀다.
감히 활에 화살을 메길 여유도 주지 않기 위함이었다.
다시 한 번 형운은 그의 예상을 벗어난 반응을 보였다.
활을 버리고 검을 뽑아든 것이다.
빠르고 과감한 판단.
더욱 놀라운 것은 그의 검술(劍術)이었다.
화려하고 정련된 형운의 검은 구종엽의 창과 비견하여 조금도 부족하지 않았다.
수십 합을 주고받았음도, 구종엽의 창은 형운을 스치지도 못했다.
그렇게 치열한 싸움이 얼마나 이어졌을까?
“그대가 누구에게 흉기를 겨누고 있는지 아느냐?”
형운의 물음에 구종엽은 고개를 저었다.
“알고 싶지 않소. 난 단지 주상전하를 위해 하려는 수상한 자를 추포하려는 것일 뿐.”
“추포하려는 자가 대뜸 흉기부터 들이댄단 말이냐?”
“주상 전하께서 쉬어가는 곳에 겸사복으로 위장한 자가 숨어들었소. 심지어 저항까지 심하게 하니, 어쩔 수 없는 행사였소.”
구종엽은 싸늘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대의 계획은 실패하였소. 그만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는 게 어떻겠소? 순순히 투항한다면 내 선처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 보겠소.”
“선처라…….”
캉.
형운은 날카롭게 찔러오는 구종엽의 창을 밀어냈다.
“말과 달리 그대의 눈빛엔 살기가 가득하군.”
“하하, 어차피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매 한 가지이니. 굳이 고통스럽게 갈 필요가 있겠소?”
“나는 죽지 않는다.”
“궁 밖으로 쫓겨나니, 정신도 나간 모양이오.”
공방을 멈춘 구종엽이 주위를 둘러보며 입술 끝을 비틀어 보였다.
“보시오. 이 많은 병사를 폐세손이 모조리 감당할 수 있단 말이오?”
“…….”
“폐세손의 수하들도 얼마 버티지 못할 것 같은데.”
구종엽의 말처럼 적에게 둘러싸인 최치성과 홍인모의 상황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다.
뛰어난 무위로 십여 명의 상대를 쓰러트리긴 했지만, 지칠 대로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이쯤에서 포기하는 게 저들에게도, 그리고 그대에게도 좋지 않겠소? 어차피 왕을 만나려던 계획도 실패하고 말았으니.”
“내 계획은 아직 실패하지 않았다.”
“다른 건 몰라도 허풍 하나만큼은 인정하겠소. 그러나 작금의 상황을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시오? 대체 무슨 수로 여기서 빠져나갈 수 있단 말이오?”
구종엽의 물음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와아아아아!
힘찬 함성과 함께 말을 탄 사헌부의 어사들이 장원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느닷없는 광경에 구종엽의 두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사헌부의 어사들이…… 여긴 어쩐 일인가?”
경악한 표정의 구종엽이 형운에게 고개를 돌렸다.
설마, 폐세손이 어사대를 불러들였단 말인가?
아니다.
불가능하다.
다른 곳이라면 몰라도 어사대가 아니던가.
그들은 특별한 사유 없이 움직이지 않는다.
아니나 다를까.
어사대를 이끌고 온 사헌부 지평, 권문이 크게 소리쳤다.
“이곳에 수상한 자들이 숨어 있다는 정보를 접하였다. 다들 멈춰라! 지금 당장 흉기를 내려놓지 않는 자는 국법으로 엄히 다스릴 것이다.”
기다렸다는 듯이 형운이 두 손을 번쩍 들었다.
“그 수상한 사람, 바로 나다. 당장 잡아가라!”
형운의 기행(奇行).
구종엽의 눈두덩에 경련이 일었다.
“이건…….”
마치 잘 짜인 놀이판 한가운데 서 있는 기분이다.
황망한 표정의 구종엽을 보며 형운이 씨익 미소 지었다.
“내가 말하지 않았느냐? 난 절대 죽지 않는다고.”
***
“스스로 사헌부를 불러들였단 말인가?”
수하가 전한 서찰을 살피던 정후겸은 탄성을 흘렸다.
“주상 전하께서 장원을 방문하여 그분을 뵙게 되면, 뒤늦게 사헌부가 몰려온다고 하여도 상관이 없을 터이고. 만약 일이 잘못되어 위태로운 지경이 된다면, 사헌부의 어사들에게 순순히 투항하여 보호받는다. 진정 퇴로까지 생각한 기가 막힌 묘수가 아닌가.”
정후겸은 형운의 계략에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폐세손의 총명함이야 익히 들어왔지만, 이처럼 대단한 줄은 미처 몰랐군. 그래서 더 아쉽소.”
“무엇이 아쉽단 말입니까?”
“어사대의 출현으로 간신히 목숨은 부지하였으나, 끝내 전하를 뵙지 못하였으니. 살아남은 것이 의미가 없게 되질 않았소.”
“과연 그럴까요?”
만사여의를 보며 정후겸은 머리를 갸우뚱했다.
“아직 다른 수가 남았단 말이오?”
“해께서는 내기에 너무 집중하셨나 봅니다. 세손께서 주상 전하를 뵈려는 목적, 그것이 무어라 생각하십니까?”
“전하와의 오해를 풀기 위함이 아니겠소.”
“그렇습니다. 오해를 풀기 위해 직접 주상 전하를 뵐 필요는 없지요.”
“다른 사람에게 대신 소식을 전한다? 그 또한 나쁘지 않은 선택이오. 하지만 이미 늦었소. 지금 이 시각이면 전하께선 이미 환궁하셨을 터. 누구를 대신하여 보냈는지 몰라도, 궁이라는 단단한 울타리 안으로 들어가신 그분을 뵙는 건 불가능하오.”
“그런 일이 가능한 사람이 있습니다.”
만사여의의 확신에 찬 대답에 정후겸이 물었다.
“누구요? 그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하는 사람이.”
짧은 한마디가 그의 귓불을 스치고 지나간다.
“팽례.”
“고작 서신이나 전하는 하찮은 팽례 따위가 어찌 궁을 들어간단 말이오?”
“세상엔 특별한 팽례도 있다 하더이다.”
“특별한 팽례라…….”
일순, 정후겸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제대로 뒤통수를 맞은 듯, 멍해진 그가 소리쳤다.
“왕의 팽례!”
끄덕이는 고갯짓에 따라 검은 너울이 물결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