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 신참례(新參禮)
측백나무 숲을 병풍처럼 두른 장원 앞.
스무 명가량의 사내들이 삼엄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하나같이 검과 창, 그리고 활 등의 무기로 무장하였고, 근처엔 잘 훈련된 군마들이 매여 있으니.
당장 전쟁이 일어난다고 하여도 아무 문제 없을 만큼 만반의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붉은 철릭에 전립을 쓴 사내들의 정체는 겸사복(兼司僕)이었다.
왕을 지키는 친위군.
그들의 목적은 하나였다.
왕의 신변을 안전하게 보호하는 것.
임금을 지키는 막중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금군청(禁軍廳)과 용호영의 군사 중에서도 가장 실력이 좋은 자들로 가려 뽑은 정예들.
그런 겸사복들이 무려 스물이나 장원과 그 인근을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사방을 훑어보는 겸사복 가운데, 남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사내가 있었다.
훤칠한 키에 서글서글한 눈매.
칼날처럼 반듯한 콧날과 선명하고 단호한 입매.
멀리서도 눈에 확연하게 띄는 잘난 사내.
놀랍게도 그는 폐위된 왕세손, 형운이었다.
임금을 만나기 위해 집을 나선 그는 겸사복이 되어 외딴 장원 앞을 지키고 있다.
“가을빛이 완연하구나.”
햇무리를 삼킨 숲은 붉은빛을 토해내고 있었다.
자색과 선홍색이 뒤섞인 선연한 붉은색은 하늘 끝을 물들였고, 급기야 낙화하는 여름꽃과 봉오리를 맺는 가을꽃마저 물들인다.
절경.
형운은 앞다퉈 피기 시작한 가을 국화를 좇아 눈길을 돌렸다.
이내 그의 시선에 연못이 맺혔다.
연못을 가로지르는 돌다리 너머엔 팔각지붕을 얹은 정자가 있었다.
“이제 곧 그분을 뵐 수 있겠구나.”
형운의 뇌리로 붉은 용포를 입은 한 사람의 모습이 강물처럼 흘러갔다.
할바마마.
그분을 뵙기 위해 그간 얼마나 애쓰고 노력했던가.
난전 상인들을 동원하여 적들에게 거짓 정보를 흘렸다.
격쟁하는 백성 무리에 끼어 왕을 만나려 한다는 정보와는 달리 형운은 행차의 목적지와 왕성 어느 곳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예상과 전혀 다른 그의 행보에 적들은 지금쯤 큰 혼란에 빠졌으리라.
‘내가 짐작하는 것은 남도 짐작할 수 있으니.’
이번 계략을 짜며 형운이 가장 고심한 부분이었다.
적의 허를 찌르고, 방심하게 하여 흔들어놓는다.
정작 제대로 된 공격은 팽팽하게 당겨진 긴장이 풀어질 때.
환궁하는 어가가 잠시 들러 쉬는 곳.
이곳에서 승부를 결정한다.
폐위되었다곤 하나 세손이었던 형운이 설마 겸사복으로 위장하고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할 것이다.
곧 그분을 만나게 되리라.
그간 간절히 바란 일임에도, 이상하게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반 시진.
기울어지는 해를 보니, 반 시진 내에 그분이 탄 연을 볼 수 있게 되리라.
형운은 상념에 빠진 채 먼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이봐.”
누군가 그의 시야를 가로막았다.
이마에 큰 사마귀가 있는 사내였다.
불량스러운 표정의 사내는 마뜩잖은 눈으로 형운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무슨 일이오?”
형운의 물음에 사마귀 사내는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무슨 일이오? 허, 이거 참. 아주 건방이 생활화되었구나.”
“……?”
사마귀의 비꼬는 말에 형운은 의문을 떠올렸다.
이 사내는 왜 갑자기 자신에게 다가와 시비를 거는 것일까?
그보다 건방이 생활화되었다니.
내 언행 어디에 건방이 있단 말인가?
자신은 할 수 있는 최대한 정중하고 예의를 갖춰 말하고 있건만.
“잡설은 됐고. 어느 쪽이냐?”
“어느 쪽?”
“허, 도대체 뒷배가 얼마나 대단한 양반이기에, 이렇게 막 나가시나 모르겠네.”
“……?”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지 말고. 이미 다 알고 있으니까.”
사마귀의 목소리가 은근해졌다.
일순, 형운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다 알고 있다 하였느냐?”
설마, 이들이 자신의 정체를 눈치챘단 말인가?
다행히 그건 아니었다.
사마귀의 건들거리는 음성이 이어졌다.
“그럼, 모를 리 있겠느냐? 어가 행차 전날, 갑자기 엉뚱한 녀석 셋이 신참으로 들어왔는데. 모르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지. 그러니 말해봐라. 너, 이곳에 들어온 이유가 무엇이냐? 운 좋게 주상전하의 눈에 띄어 출세하려는 수작 아니냐?”
형운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그런 말이었군.”
“이놈 표정 보소. 아직 분위기 파악이 안 되는 모양이네.”
사마귀 사내의 괜한 트집에 형운은 미간을 찌푸렸다.
일면식도 없는 자가 무슨 일로 이리 집요하게 치근덕대는 걸까?
그러다 멀지 않은 곳에 한 무리의 겸사복들이 이쪽을 보며 웃는 모습이 보였다.
구경거리라도 생긴 듯 흥미진진한 그들의 표정에 형운은 한 가지를 떠올렸다.
“설마, 신참례인가?”
신참례.
고려 말(末), 권문세족의 어린 자제들이 무분별하게 관직에 오르자, 그들의 거만한 행동과 기강을 바로잡기 위해 치렀던 행사였다.
그런 것이 이제는 새로이 관직에 오른 사람들을 괴롭히는 것으로 고약하게 바뀌었다.
선배들에게 며칠 동안 거하게 음식상을 대접하는 것은 기본이었고, 선배가 내리는 짓궂은 장난을 모두 완수해야 했다.
언젠가 신참례를 치르던 급제자가 정신적인 압박과 피로로 인해 기어이 죽음에 이르기도 하였다.
이후 신참례를 금지한다는 명이 내려졌지만,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
“이것이 말로만 듣던 신참례라는 것이로군.”
형운은 고개를 바로 세웠다.
“좋다.”
“뭐가 좋다는 것이냐?”
흥미로운 표정이 형운의 얼굴에 가득했다.
“신참례. 나는 준비가 되었으니, 어디 한번 해 보아라.”
평소라면 절대 접할 수 없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호기심이 생기는 건 당연하였다.
이번 기회에 충분히 경험하여, 좋은 것은 널리 장려하고, 폐단은 낱낱이 파악하여 없애리라.
하지만 형운의 그런 열의가 신참례를 하러 온 사마귀에겐 썩 달갑지 않았다.
세상의 어떤 미친놈이 신참례에 이리 반긴단 말인가.
“미치겠다. 도대체 누구야? 대체 누가 이렇게 참신한 별종을 구해왔어?”
“별종인지 모르겠으나, 종종 기발한 생각을 한다는 말은 듣곤 하였다.”
“기발하다 못해 기가 차 죽겠다.”
“저런, 건강이 안 좋은 것이냐? 전하를 지키는 막중한 책임을 짊어진 자리이니, 평소 몸 관리에 신경을 쓰도록 하여라.”
진지한 형운의 반응에 사마귀는 질리고 말았다.
이 녀석.
어딘가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됐다. 내 몸은 내가 관리하지. 쓸데없는 데 신경 쓸 필요 없다. 지금은 나보다 네 걱정부터 해야지.”
지금부터 나로 인해 네가 고달프게 될 거야. 그러니 각오해라.
……그런 뜻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형운은 그의 기대와는 다른 반응을 보였다.
“날 걱정해주는 것이냐? 고맙구나. 최선을 다하였으니, 남은 건 하늘의 성사뿐이로구나.”
“뭐? 하늘이 뭘 어떻게 해? 이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신참의 기막힌 반응에 사마귀는 어이가 없었다.
지켜보는 사내들도 배를 잡고 웃었다.
“하하하. 내 평생, 저렇게 엉뚱한 신참은 처음이다.”
“사마귀, 저놈 임자 제대로 만났구나.”
“꼴 좋다.”
한편, 껄껄 큰소리로 웃는 사내들의 행태에 형운은 눈매를 가늘게 여몄다.
‘겸사복들은 신분보다 실력을 위주로 뽑는다 하더니…….’
왕을 지키는 막중한 임무를 맡은 겸사복.
그렇기에 그들은 신분보다 실력 위주로 선발되었다.
서얼이나 천인, 심지어 향화인(向化人)이나 왜인까지 포함된 경우도 있었다. 그렇게 다양한 자들이 모여 있으니, 다른 금군들에 비해 분위기가 거칠었다.
‘아무리 실력이 중요하다 하나, 기본적인 질서마저 이리 엉망일 줄이야.’
눈앞의 사내가 자신의 운명을 거머쥔 사람이라는 것도 모른 채, 사마귀는 본격적인 신참 교육에 들어갔다.
“헛소리 그만하고. 말로 할 때 선배에게 예의부터 갖춰라.”
“어찌하면 되느냐?”
“말본새하고는.”
사마귀는 험악하게 눈을 부라렸다.
“시건방진 자식아. 일단 눈부터 깔아.”
“눈을 깔아?”
형운은 시선을 내렸다.
“이렇게 하면 되느냐?”
“그렇긴 한데…….”
분명 시선을 아래로 깔았는데, 묘하게도 신참의 기세는 전혀 겸손해지지 않았다.
이상하게 당당한 것이.
앞에 선 것만으로도 자꾸만 주눅이 들려 한다.
“너 말이야. 그 이상한 말투 좀 어떻게 안 되겠느냐?”
“내 말투가 그리 이상하더냐?”
“따라 해봐.”
거창하게 헛기침을 한 사마귀가 말했다.
“선배님, 알아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형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다. 실수는 누구나 하는 것이니. 내, 용서하마.”
“누가 용서하래? 따라 하라고!”
버럭 고함을 지른 사마귀는 두 손을 앞으로 모은 채 비굴한 모습까지 연기하며 열심히 시범을 보였다.
“선배님. 제가 무식해서 실례가 많았습니다. 뭐든 말씀만 하십시오. 충성하겠습니다.”
“충성하는 것은 마땅하다. 무식한 것 또한 불편할지언정 흠은 아니다. 그래도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절차탁마(切磋琢磨)하여라. 다만, 선배라는 호칭은 적합하지 않은 것 같구나.”
“훈계하지 마!”
여전히 말귀를 못 알아먹는 신참 때문에 사마귀는 현기증이 일 지경이었다.
“이 자식, 네놈 때문에 울화통이 치밀어서 심장이 벌렁벌렁…….”
“많이 불편하냐? 일단 그늘에 가서 쉬어라.”
“신경 써주지 마!”
“그래도.”
“그만해! 내 건강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젠장, 어디서 이런 멍청한 놈이 들어왔어?”
“내 지금까지 살면서 영특하다거나 대견하다는 말은 자주 들어봤지만, 멍청하다는 말은 처음 듣는구나. 내 어디가 그리 부족한지 말해줄 수 있겠느냐? 내 최선을 다해 고쳐보겠다.”
“싫어! 말해주기 싫어. 그보다 그 입부터 닥쳐.”
닥치라는 말에 형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비로소 형운이 겁을 먹었다 생각한 사마귀는 쾌재를 불렀다.
“얼쑤. 이놈 표정 보소. 곱게 자란 골샌님이라 이런 험악한 말은 처음 들어보는 모양일세.”
형운은 순순히 인정했다.
“처음이다.”
누가 감히 세손에게 멍청하다 할까.
눈을 깔라고 시키는 것 자체가 색다른 경험이었다.
순순한 형운의 인정에 사마귀는 다시 울화통이 터졌다.
그는 종주먹을 쥐고 제 가슴을 쿵쿵 쳤다.
“아무래도 넌 근본부터 글러 먹은 모양이다.”
“노력할 터이니 무엇이 그리 못마땅한지 알려다오.”
“노력하지 마! 그냥 안 되는 거야. 왜 안 되느냐고? 그냥 보면 알아. 그러니까 하지 마!”
“어찌 해보지도 않고 포기부터 한단 말이냐.”
“하아, 이 한없이 해맑은 영혼을 어찌할꼬.”
한숨을 푹 내쉰 사마귀가 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너도 앉아.”
“…….”
“넌 말이야. 기본이 안 되어 있어. 도대체 말투가 그게 뭐냐? 혼자 세상 진지해? 부모님이 소꿉놀이 대신 왕족 놀이 같은 거라도 시키디?”
“내 말투가 거슬렸느냐?”
“어디 말투뿐일까. 그 근엄한 표정도 거슬려. 그렇게 가식적인 거 말고, 좀 더 자연스럽고 덜 거북한 거 없어?”
“자연스러움이라…….”
“표정 보니 할 줄 아나 보네.”
“배우긴 하였다만.”
“뭘 그런 걸 배우고 앉아 있냐? 진짜 부모님 얼굴 뵙고 싶네. 어느 집안이 이렇게 자식교육을 엉망으로 시켜? 적어도 다른 사람하고 대화는 통하게 가르쳐야 할 거 아니야?”
“가풍이 남달리 엄한 편이긴 하다.”
“그럼 가풍이 엄하지 청순하겠냐? 잔말 말고 가식적인 말투 말고, 속에서 우러나오는……. 그래, 태어날 적부터 지닌. 그 뭐냐. 선천 뭐시기 같은 거. 자연스러운 성격을 툭 꺼낸다는 느낌으로 제대로 해봐.”
“본연의 성격을 말하는 것이냐?”
“그래, 그거. 기다리다 해지겠다. 너 말고도 교육할 신입이 둘이나 더 있으니 잔말 말고 해봐. 목에 힘 풀고. 좋네. 뭔가 나올 것 같네.”
심각한 표정을 짓던 형운이 한마디를 툭 꺼냈다.
“염병.”
***
사마귀는 제 귀를 의심했다.
이 천진난만한 신입이 지금 뭐라고 한 거지?
염병? 그거 혹시, 흔히 욕으로 쓰이는 그 염병은 아니겠지?
“지랄이 참으로 풍년이로구나.”
“어?”
잘못 들은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어진 말도 듣기 좋은 말은 아니었으니.
문제는 선배가 신참에게 들을 말이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한 번 열린 형운의 험악한 본성은 이내 봇물처럼 쏟아져나왔다.
“젖비린내 나는 놈이 육갑하는구나.”
“어? 어?”
“빌어먹을 호래자식. 오줌에 씻겨 나와 똥물에 헹굴 놈.”
“저기, 저기…….”
“해태 같은 그 눈깔을 쿡 찍어 먹어불라. 염통이 부었느냐? 감당조차 안 되느냐? 오라질로 끄집어서 새단장을 해주랴?”
“그, 그만. 그만해!”
“……어떠냐?”
“어? 뭐가?”
“한번 해봤다. 폐부에서 우러나오는 자연스러운 말투. 배우고 익혀 열심히 노력해서 입에 익었다 했더니, 알고 보니 난 이쪽이 더 어울리는 모양이구나. 이처럼 입에 딱딱 달라붙는 것을 보니 말이다.”
형운의 험악한 욕설에 얼이 빠져 있던 사마귀는 헛바람을 흘렸다.
“그게 자연스러운 말투야? 젠장할. 도대체 어느 집안이냐? 어느 집안인데 어물전에 갓 올라온 신참 놈의 정신 상태가 이렇게 삭았어?”
그의 험담에 대답한 사람은 형운이 아니었다.
“그러는 네놈은 어느 집안 놈팽이냐?”
“이건 또 어디서 굴러온 참신한 놈팽이야?”
고개를 돌려보니, 젊은 사내 하나가 부리나케 달려오고 있었다.
“너도 신입?”
아마도 이름이 최 아무개란 놈이었지.
문제는 그 최 아무개란 신참이 불구대천의 원수라도 만난 듯 험악한 표정이라는 점이었다.
“신참 받아라, 망할 자식아!”
뒤늦게 형운의 소식을 접한 최치성이 사마귀의 면상에 화려한 발길질을 날렸다.
얼굴에 가지런한 발자국 두 개를 찍은 사마귀는 허공을 날아 팽이처럼 바닥을 뒹굴었다.
얼마나 강하게 차였는지 정신을 제대로 차릴 수 없었다.
“너, 너 이놈! 감히…… 감히 날……. 내가 누군 줄 알고 이런 행패냐?”
“그러는 네놈은 이분이 뉘신 줄 알고 망발이냐?”
“그분이 뉘신데?”
“이분은……. 아니다. 일단 맞자.”
최치성은 대답 대신 주먹을 날렸다.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주먹질에 사마귀는 제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도, 도와줘…….”
동료들을 부르려던 그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적당히 떨어진 곳에서 낄낄거리며 웃던 그의 동료들.
놀랍게도 그들은 머리를 바닥에 심은 채 엎드려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들 앞에 또 한 명이 신참이 서 있었다.
‘이름이 홍……뭐라고 했는데?’
홍인모였다.
최치성이 고삐 풀린 황소라면 저쪽은 서슬 퍼런 날붙이였다.
말 한마디만 잘못해도 피바람을 부를 것 같은 기세였다.
비록, 보지 못했어도 동료들이 어쩌다 저런 꼴이 되었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미친놈처럼 날뛰는 최치성.
날 선 칼처럼 바짝 독이 오른 홍인모.
하지만 정작 사마귀가 가장 싫은 사람은 엉뚱하게도 형운이었다.
“어허, 적당히 해라.”
“…….”
“사람이니 실수도 할 수 있느니.”
“…….”
“무얼 그리 다부지게 패고 그러느냐. 얼굴이 성한 구석이 없구나.”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 하였던가.
형운이 딱 그러했다.
적극적으로 최치성을 말리지도 않으면서, 말로만 말리는 척한다.
특히, 기분 나쁜 것은 주먹이 떨어질 때마다 장단을 맞추듯 나오는 그의 발언들이었다.
“어허, 무얼 그리 심하게 하느냐, 아프겠네, 그만 좀 하지, 거길, 그렇게, 때리면, 아니 되지, 아무리, 몹쓸 짓, 하였어도, 그곳은, 너무 하구나, 그러다, 사내, 구실, 못하면, 어찌, 하려고, 다행히, 왼쪽 눈은, 멀쩡하구나. 아! 이젠, 아니구나. 참으로, 안타깝다.”
멀쩡한 왼쪽 눈은 왜 알려주는 걸까.
차라리 지화자, 얼씨구, 좋다라고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한참을 이어진 훈계는 기절하기 직전에서야 간신히 끝났다.
“다음에 또 그러면, 내 손에 죽을 줄 알아라. 알겠느냐?”
최치성의 협박에 사마귀는 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앞으로 다시 신참례를 하면 인간이 아니다.’
뜻하지 않게 전통을 빙자한 몹쓸 폐단 하나가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늦었사옵니다. 벌을 주시옵소서.”
“벌을 주시옵소서.”
사마귀과 그의 동료들을 처리한 최치성과 홍인모가 형운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아니다. 덕분에 좋은 경험을 하였구나.”
말뿐이 아니라 실제로 형운은 적잖게 만족한 표정이었다.
의도는 좋지 않았지만, 덕분에 순수한 자신의 본성을 자연스럽게 끄집어내는 법을 배웠다.
물론 악 할아버지의 철저한 교육 탓에 다소 격하게 발전한 구석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그조차도 속이 후련하니 나쁘지 않았다.
“가끔은 공연히 욕을 하여도 나쁘지 않을 것 같구나.”
가슴이 답답할 때, 근심 걱정이 많을 때.
욕으로 가슴의 울화를 풀 수 있다면, 외려 건강에 좋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형운은 욕의 긍정적인 측면을 정리했다.
“시간이 다 되어 갑니다.”
최치성의 말에 형운은 먼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래. 그렇구나.”
곧 그분을 만나게 될 것이다.
차갑게 식었던 가슴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
“중간에 쉬어가는 곳이로군.”
정후겸은 무릎을 치며 말했다.
“한 번뿐인 기회. 머리 나쁜 자라면 무턱대고 행차로 달려들 테고, 머리가 제법 굴러가는 자라면 목적지나 왕성은 얼굴이 알려진 폐세손으로서는 고를 수 없는 선택지였을 터이니. 남은 것은 격쟁하는 장소뿐인데. 그조차도 예상했으리라 판단하였다. 그리하면 남은 곳은 돌아가는 곳에 잠시 쉬었다 가는 장소.”
비로소 형운이 있을 장소를 예측한 정후겸은 만사여의에게 시선을 던졌다.
이번에도 그녀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계책을 예상하여 혼란을 유도하고, 또 다른 방도를 짜냈단 말이로군. 아마도 폐세손은 그곳을 관리하거나 방비하는 사람으로 위장하였겠지. 훌륭하군. 참으로 훌륭한 계략이야.”
정후겸은 형운이 선택한 비책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자신이라면 어찌했을까.
아마도 서너 번에 걸쳐 다양한 방법을 시도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와 같은 방법은 오히려 적의 경계심을 높일 뿐이다.
반면, 형운의 비책은 번번이 예상을 어긋나게 만들어 절로 경계심을 누그러뜨리게 된다.
“흐음. 하지만…… 과연 그게 뜻대로 될까?”
만면 가득 미소를 짓던 정후겸이 손등으로 코끝을 훑었다.
그의 돌변한 반응에 만사여의가 관심을 보였다.
정후겸이 그런 그녀에게 불쑥 물었다.
“궁궐에서 가장 무서운 게 무엇인지 아시오?”
“……글쎄요. 무엇입니까?”
“칼도 무섭고, 창도 무섭고, 험악한 분위기도 무섭지. 하지만 뭐니 뭐니해도 가장 무서운 것은 사람이 아니겠소? 그럼, 어떤 사람이 가장 무서울까?”
“…….”
“지략이 뛰어난 사람? 무력이 강한 사람? 아니면 정치력 영향력이 큰 사람이나 인품이 훌륭한 사람?”
“이 나라에서 가장 대단하고 훌륭하신 분은 주상 전하가 아니십니까?”
“안타깝지만 틀렸소. 가장 무서운 사람은…….”
정후겸은 손가락을 여인처럼 붉은 입술 위에 세웠다.
“바로 이것과 관련된 사람이오.”
“……말과 관련된 사람이란 말씀이로군요.”
“입이 아니라, 말이라 대답하다니. 과연 총명한 사람이오. 그렇소. 말.”
넉넉하게 웃은 정후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궁 안의 모든 일은 기실 누군가의 말로 시작된다오. 따지고 보면 우린 다른 사람을 평가할 때, 남의 말을 참고하지 않소? 궁 안의 질서도 그런 셈이오. 왕이 모든 신료를 일일이 만나 그들의 심성과 능력을 평가할 수는 없으니, 결국,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대신 물을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지.”
“그렇겠군요.”
“그럼, 궁 안에 떠도는 온갖 소문, 영향력, 평판. 그 모든 말을 전하고 퍼트리는 사람들이 누구일까?”
만사여의는 잠시 생각하다 대답했다.
“……내관이 아닐는지요?”
“그렇소. 말이 많은 것과 전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 실제로 말을 전하고 퍼트리는 일은 대부분 내관이 한다오. 그럼, 그 내관 중 임금에게 직접 말을 전하는 사람이 누구일까?”
정후겸은 빈 술잔에 술을 따르며 다시 물었다.
“다시 말해 궁에서 왕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이 누구일 것 같소?”
***
“경로를 바꾸잔 말이냐?”
하얗게 서리가 내린 두 눈썹을 들어 올리며 왕이 되물었다.
상선이 허리를 숙였다.
“그렇사옵니다. 전하.”
“이유가 무어냐?”
연유를 묻는 왕에게 상선이 다가가 속삭이듯 말했다.
“예정된 장원에 약간의 말썽이 생긴 모양이옵니다.”
“말썽?”
“시골에서 올라온 무지렁이 하나가 난동을 부린 모양이옵니다. 지키던 군사들에게 곧바로 진압되었습니다만…….”
“조심하자는 말이로구나.”
“차라리 곧바로 환궁하시는 것이 어떠시온지요?”
“…….”
잠시 생각에 잠겼던 왕은 피로가 덕지덕지 붙은 눈으로 상선의 제안에 응했다.
“그리하라.”
***
“만약, 교활한 여우 같은 상선이 좋지 않은 기운을 눈치채고 전면으로 나선다면, 아마도 폐세손은 곤란한 상황을 면치 어려울 것이오.”
정후겸의 말에 만사여의가 물었다.
“결국, 주상 전하를 만나지 못하게 될 거란 말입니까?”
“그쯤에서 끝나면 오히려 다행이겠지만……. 어쩌면 그보다 훨씬 심각한 상황을 직면하게 될지도 모르오.”
***
“지금 무어라 하였느냐?”
장원을 지키며 이제나저제나 할바마마를 만날 생각만 하던 형운에게 날벼락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행차의 환궁 경로가 변하였다고?”
홍인모가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그렇다 하옵니다.”
“이유가 무어라 하더냐?”
“자세한 사정은 밝혀지지 않았으나, 행차의 움직임이 달라진 것만은 분명히 확인되었습니다.”
“……!”
형운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반드시 만나리라.
만나고 말리라.
그렇게 다짐하고 또 다짐하였거늘.
마지막에 이르러 이런 변괴가 발생할 줄이야.
청명한 하늘이 노랗게 변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정후겸의 예측대로 형운의 불운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저하.”
장원 밖을 지키던 최치성이 달려와 급하게 고했다.
“무슨 일이냐?”
“수상한 자들이 장원으로 들어서고 있사옵니다.”
“수상한 자들이?”
최치성의 말을 확인이라도 하듯 말을 탄 무리들이 장원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들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내가 주위를 쓱 둘러보더니, 정확하게 형운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여기 있었군.”
사내는 형운을 보며 비릿하게 웃었다.
“여기, 이런 모습으로 있는 줄 모르고, 한참을 찾았군.”
사나운 기질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사내.
조선에서 세 손가락 안에 손꼽히는 무사.
십학사의 대나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