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 성동격서(聲東擊西)
무릇 왕의 행차는 크게 세 가지로 구별되었다.
첫 번째는 중국의 칙사와 종묘사직에 제사드릴 때의 행차인 대가(大駕).
대가 행차 때의 왕은 면류관과 구장복을 착용한다.
왕을 따르는 수행원과 호위의 수 역시 일만 명에 달하는 큰 행사였다.
그다음으론 대가보다 규모가 적은 법가(法駕)가 있다.
법가는 선농단, 성균관, 무과 전시 등에 임할 때 행차로 이때 왕은 원유관과 강사포를 입었다.
마지막으로 소가(小駕).
가장 규모가 작은 소가 행차는 주로 능에 참배하거나 평상시의 대궐 밖 행차, 또는 활쏘기를 관람할 때의 행차였다.
이때의 왕은 대체로 군사 훈련과 관련한 융복 차림이었다.
이렇듯 왕께서 잠행이 아닌 공식적인 행사로 궁을 나선다는 것은 그 규모에 상관없이 중차대한 일이니.
준비하고 경계할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러나 왕께선 행차를 감행하겠노라 결정하시었다.
비록 병세로 인해 종묘의 제를 주관하진 못하지만, 선왕의 능을 찾아가 살피는 일만은 해야겠노라 고집을 부린 것이다.
지엄한 어명에 조정은 한바탕 소란에 휩싸였다.
보통의 대가보다 행차의 규모를 작게 하라는 왕명이 있었으나, 그렇다고 지고한 존재의 행차이니. 너무 단출해서도 아니 될 것이다.
결국, 논의를 거듭하던 대신들은 대가 행차의 예법에 따르되 규모를 줄이자는 쪽으로 결정을 내렸다.
경기감사와 행사를 총괄 지휘하는 우의정 홍봉한이 행차의 선도를 맡았다. 훈련도감 소속의 별기대가 그 뒤를 따른다.
그다음으론 선두군사로 보병과 깃발 부대, 그리고 취타대가 행군을 장식했다.
왕의 옥새와 옥보를 실은 어보마가 지나가면 훈련대장과 중군, 그리고 금군의 별장이 위용을 자랑한다.
어영청 소속의 기병과 깃발부대, 그리고 의장구를 앞세운 왕의 가마가 자리했다. 가마의 뒤엔 왕을 상징하는 용기를 병사들이 들고 있었다.
가마 주변으론 무예청의 무사들과 근장군사들이 물새 틈 없는 경계로 왕을 호위했다.
후미군사와 수행원, 숙위소의 군사와 가후금군, 병조판서를 비롯한 문관과 무관의 행렬.
마지막으로 난후금군까지.
아무리 규모를 줄였다고 하지만 행차에 동원된 사람의 수는 족히 일천 명이 넘었다.
화려한 음악과 감히 근접하기 어려운 위엄으로 무장한 왕의 행차가 창덕궁을 나와 육조거리로 막 접어들던 그때.
뒷부분에서 행차를 따르던 홍인한이 홍계희와 대나무를 돌아보았다.
“이번 행차 중에 반드시 폐세손이 나타날 것이오.”
홍인한은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폐세손이 주상 전하를 알현하게 해선 아니 될 것이오. 명심, 또 명심해야 하오.”
홍계희가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그런 일이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의 여유에 홍인한의 굳은 표정도 조금은 느슨하게 풀렸다.
“내, 그대만 믿겠소.”
“오늘이 지나가기 전에 좋은 소식이 들릴 겁니다. 이제 폐세손의 일로 대감이 걱정할 일은 없을 것이니. 부디 마음 푹 놓으십시오.”
홍계희의 대답이 흡족한 듯 홍인한은 미소를 지었다.
“내 그대들만 믿으리라.”
취타대의 음악 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장엄하고도 흥겨운 가락에 홍인한의 발걸음도 전보다 훨씬 가뿐하였다.
***
둥둥.
멀리서 사시(巳時)를 알리는 북소리가 들려왔다.
“지금쯤이면 주상께서 궁을 떠나 육조거리를 지나고 계시겠구려.”
혼잣말을 중얼거린 정후겸은 장난스럽게 검지와 중지를 술병 앞 탁자 위에 세웠다.
그리고 사람이 걷듯 두 손가락을 장난스럽게 움직였다.
“궁을 나오신 주상께선 삼엄한 경호를 받으며 길고 장황하여 지루하기 짝이 없는 여정을 시작하시겠지요.”
타박타박 술병을 떠난 그의 두 손가락이 술잔에 닿았다.
“혼자 걷는 걸음이라면 한 시진이면 족히 도착하겠지만, 워낙에 인원이 많은 행렬이니. 아마도 미시초(未時初)는 되어야 목적지인 석관(石棺)에 도착할 것이오. 전하의 병환이 깊으니, 선왕을 참배하고 평소보다 일찍 환궁하실 터.”
정후겸의 손가락들이 술잔 주위를 빙글빙글 맴돌았다.
“평소라면 신시(申時)는 지나야 끝나겠지만, 이번엔 아마도 미시 말쯤 환궁 절차에 들어가겠지.”
술잔 근처를 서성이던 그의 손가락이 술병을 향해 다시 타박타박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중간쯤에 이르러 돌연 멈추었다.
“이쯤에서 행차는 잠시 멈출 터.”
환궁 중의 왕에겐 행차의 목적만큼이나 중요한 절차가 남아 있었다.
“격쟁.”
백성들이 북과 꽹과리, 징을 두드리며 억울함을 호소하면 왕은 행차를 멈추고 그들의 하소연에 귀를 기울인다.
“백성을 각별하게 생각하는 주상이시니. 아무리 몸이 불편하다 해도 이 절차를 생략하지 않으실 것이오. 길면 두 시진, 짧아도 한 시진은 족히 소요되겠지.”
한동안 제자리를 맴돌던 손가락이 다시 걸음을 움직여 마침내 술병에 도착했다.
“마침내 궁에 도착하면, 행차를 준비한 신료들을 치하하고 침전으로 돌아간다. 이 시각이 유(酉)시. 사시에서 시작하여 유시에 끝나는 행차. 여기서 궁금한 것은 과연 폐세손이 어느 때 움직일까인데…….”
왕의 행차를 제 손금 보듯 내려다본 정후겸이 불쑥 고개를 들었다.
“만사여의께선 폐세손이 언제 행동에 나설 것이라 보시오?”
“제가 어찌 그런 것을 예측할 수 있겠습니까?”
정후겸은 헛웃음을 흘렸다.
“알지 못하는 것이오? 아니면 말해주기 싫은 것이오?”
“…….”
“그대가 그리 숨긴다면, 하는 수 없지. 내가 한번 짚어낼 수밖에.”
그는 턱을 쓰다듬으며 술병과 술잔을 번갈아 가며 보았다.
“어디 보자. 내가 그 사람이면 어느 때를 노릴까. 성문 앞을 지키고 있을까? 아니면 주상께서 선왕의 능에 참배 올릴 때를 택할까. 그도 아니면…….”
자못 깊게 고민하는 척하던 그가 어느 순간, 팔을 뻗어 한 지점을 가리켰다.
“이곳일까?”
술병이 놓인 탁자엔 지도가 있었다.
한양의 곳곳을 빠짐없이, 상세히 그려놓은 지도.
그 지도 위에 선명한 손톱자국이 생겼다.
동시에 정후겸의 얼굴에 손톱자국만큼이나 선명한 자신감이 들어찼다.
***
선왕의 능을 참배하고 돌아가는 길.
“대체 언제 일을 벌이려는 것인지……..”
느긋했던 홍인한의 얼굴에 다시 긴장의 빛이 들어찼다.
시간이 제법 흘렀음에도 폐세손이 나타나지 않았던 까닭이다.
언제, 어디서 갑자기 어가 행차를 방해할지 모르니.
가시방석에 앉은 듯 좌불안석이었다.
힐끗, 곁눈질로 살피던 홍계희가 홍인한을 위로했다.
“염려 마십시오, 대감. 사방에 군사를 깔아두었으니, 폐세손이 아니라 죽은 세자가 다시 살아온다고 해도 불가능할 겁니다.”
“…….”
홍인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불안한 표정은 여전했다.
반면, 홍계희는 느긋하였다.
“대나무의 말대로 편히 계십시오.”
“어허, 언제 그가 나타날지 모르는데, 어찌 편히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이럴 줄 알았으면 애초에 별채로 군사를 보내어 꼼짝도 못 하게 해야 했는데.”
“지난번 저주 인형 사건으로 세간의 이목이 폐세손에게 쏠려 있습니다, 그렇게 노골적으로 움직일 수 없지 않습니까? 설사 어찌어찌 움직임을 막았다 한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앞으로도 폐세손을 내내 근심해야 하니…….”
“그래도 무슨 수를 써놓았어야 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직 때가 되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럼 곧 나타날 것이란 말인가?”
곧 홍계희의 자신만만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될 겁니다. 제 예측대로라면 곧 소식이 올 겁니다.”
그의 장담은 허언이 아니었다.
한식경쯤 지났을까.
군관이 전해온 소식을 대나무가 전했다.
“매복하고 있던 군사가 수상한 무리를 발견했다 합니다.”
“수상한 무리라니?”
“행차가 지나는 경로에 격쟁을 준비하는 한 떼의 무리들을 발견하였다 하는데, 그 수가 무려 스물에 이른다 합니다.”
“스물?”
홍인한과 홍계희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자로다.”
“폐세손이 틀림없습니다.”
격쟁을 준비하는 자들이 스물이나 무리를 이룰 리 없다.
만약 그런 무리가 있다면 격쟁이 아닌 다른 의도를 가진 자들이 분명하였다.
“예상대로 백성들 사이에 섞여 주상께 접근할 생각이었군.”
“가소로운 수작일 따름이지요.”
홍인한이 물었다.
“어찌 알았는가?”
홍계희가 염소수염을 쓸어내며 대답했다.
“폐세손의 사정이 절박하기 때문입니다.”
“절박하기에 예측할 수 있었다?”
“행차 중엔 군사들이 사방을 지키고 있고, 곳곳에 매복군사까지 깔렸으니, 접근하기 쉽지 않겠지요. 선왕의 능을 참배할 때는 이런 경계가 더더욱 삼엄하니,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겁니다.”
“옳거니. 폐세손에게 머리가 있다면 방비가 철저한 때를 노릴 턱이 없겠지. 그래서 격쟁의 시간을 노릴 거라 여긴 것이군.”
“행차 중에 주상 전하께 가까이 접근할 유일한 기회이지요.”
“억울함을 호소하는 백성들 틈에 끼어 주상 전하에게 접근할 생각이었군. 흥. 백성을 아끼시는 주상 전하의 심리를 노리다니.”
코웃음을 친 홍인한이 만면 가득 미소를 지었다.
“제법 머리를 굴렸지만, 결국엔 꼬리가 드러났구나. 이게 다 소나무 덕이오.”
추켜세우는 홍인한의 말에 홍계희가 겸손을 가장했다.
“폐세손이 제법 영특하다 하나 아직 풋내나는 애송이일 뿐입니다.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연륜을 어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하하. 목숨을 걸고 승부를 걸었으나 결국 우리 손바닥 위였던 셈이군. 아니 그렇소?”
“저를 만나지 않았다면 어쩌면 성공하였을지도 모르나. 천운이 폐세손을 따르지 못한 게지요.”
“자자, 이럴 게 아니라. 모두 함께 갑시다. 백성으로 변복한 폐세손의 모습을 놓칠 수 없지 않소. 얼마나 꼴사납게 무너지는지 모두 함께 봐 주어야 하질 않겠소이까, 하하하.”
***
기울어진 햇살이 지붕을 덮었다.
모옥 안에선 여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세손께선 자신의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는 백성들에 섞여 왕을 만나려 할 것이다, 그런 말씀이시군요.”
그녀는 찻잔을 손바닥 위에 단정히 올려놓았다.
“아니라고 보오?”
“이런 대단한 일을 도모하는데, 적들이 단박에 알아차릴 만큼 단순한 계획을 세우셨을까요? 그분께서?”
제 예상과 다른 대답에 정후겸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다른 수가 있을 것이란 말이오?”
딸깍.
만사여의는 찻잔을 탁자 위로 내렸다.
“글쎄요. 하지만…… 이번 일이 그리 쉽게 끝날 것 같지 않다는 느낌이 드는군요.”
***
“지금 무어라 하였느냐?”
홍계희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수상한 자가 없다고?”
발끈하는 상관의 모습에 수하는 고개를 깊게 숙였다.
“수상한 무리를 모조리 살펴보았으나, 특별히 불온한 기색을 풍기는 자는 없었습니다.”
“그럴 리 없다.”
자신의 예측은 단 한 번도 빗나간 적이 없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틀림없으리라.
자신이 잘못 예측한 것이 아니라면……..
홍계희는 미덥지 못한 눈으로 수하를 쏘아보았다.
“제대로 살핀 것이 확실하냐?”
“명하신 대로 한 사람, 한 사람, 철저하게 조사했습니다.”
“몸을 숨긴 자가 있을 수도 있다.”
“골목 구석까지 샅샅이 살펴보았습니다.”
수하의 답에도 홍계희는 믿으려 하지 않았다.
“안 되겠다. 너희에게만 맡겨두어선 죽도 밥도 아니 되겠구나. 그 수상한 자들을 당장 이리로 끌고 와라. 아니, 내가 가마. 내 두 눈으로 확인해야겠다.”
어가의 행렬에서 빠져나온 홍계희는 수하와 함께 걸음을 서둘렀다.
얼마 멀지 않은 곳에 군사들에게 잡혀있는 수상한 무리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직접 현장을 둘러보고 미심쩍은 자들을 직접 조사했다.
잠시 후.
다시 돌아온 홍계희에게 홍인한이 물었다.
“어찌 되었소?”
“아무래도 무언가…… 일이 꼬인 모양입니다.”
“일이 꼬이다니? 설마, 폐세손이 그곳에 없었단 말이오?”
“이럴 리가 없는데. 분명 폐세손은 그곳에 있어야만 하는데…….”
말끝을 흐리는 홍계희를 향해 홍인한의 눈빛이 사나워졌다.
“그리 얼버무리지 말고 똑바로 답하시오. 폐세손이 그곳에 있었소?”
추궁하는 물음에 홍계희는 힘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없었습니다.”
“그럼 수장한 자들은 다 무엇이오? 듣자하니 그 수가 스물이나 되었다 하던데. 그 많은 무리가 격쟁을 하러 나왔을 리 없지 않소?”
“시전 상인들의 횡포를 호소하러 나온 난전 상인들이었습니다.”
“강제로 동원된 자들은 아니고?”
“호패를 대조하며 직접 확인하였습니다. 난전 상인들이 틀림없었습니다.”
“망할 놈들! 길바닥에 앉아 잡동사니나 파는 천한 것들이 어디서 감히 격쟁을 꿈꾼단 말인가. 나라에 망조가 들어도 제대로 들었구나. 천하디 천한 것들이 감히 왕의 앞에 나서려 하다니. 조정을 우습게 봐도 정도가 있거늘.”
가슴에 일어난 성화에 험한 욕을 입에 올리던 홍인한이 이번엔 홍계희를 노려보았다.
“이게 어찌 된 일이오?”
“…….”
“그대가 분명 폐세손이 격쟁하는 무리에 있을 것이라 하지 않았소?”
“폐세손에게 생각이 있다면 분명 격쟁을 이용할 거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없었소. 그대의 예측이 빗나갔지.”
“어쩌면 폐세손은 주상 전하를 알현할 생각을 아예 포기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런 사람이 새벽 일찍 집을 나가?”
“어느 구석에서 신세 한탄을 하는 것일지도…….”
“아니라면? 만약,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할 것이오.”
“……!”
홍인한의 윽박에 홍계희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언제나 자신만만했던 그였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사태에 그의 높은 자존심은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한껏 숙인 홍계희의 머리 위로 홍인한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내리꽂혔다.
“언제까지 그리 꼴사납게 있을 작정이오? 당장 폐세손을 찾질 않고서!”
핏대를 세우던 홍인한이 홍계희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이내 홍계희의 귓가에 바싹 얼굴을 댄 채 그가 속삭였다.
“만약, 일이 잘못되면 이번 사태에 대한 책임을 그대에게 물을 것이니, 명심하시오.”
서슬 퍼런 협박에도 불구하고 홍계희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아니, 할 수 없었다.
결국, 홍계희는 슬그머니 어가 행렬에서 벗어났다.
골목에서 기다리던 수하들과 함께 급히 걸음을 옮기면서도 그는 생각을 멈추지 못했다.
대체 어디일까?
“폐세손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격쟁이 아니라면, 대체 무슨 수로 왕에게 접근할 수 있단 말인가.
***
“으음.”
정후겸은 탄성 섞인 신음을 흘렸다.
지금 막 수하로부터 한 장의 서찰을 받았다.
어가 행차를 살피던 염탐꾼이 보낸 전서구였다.
그 서찰엔 홍인한과 그를 따르는 학사들이 폐세손을 찾는 데 실패했다는 보고와 그 상세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아무래도 그대의 말대로 된 모양이오.”
정후겸이 말했다.
서찰은 보기 흉한 모습으로 구겨진 채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제 말대로라니요?”
“폐세손 말이오. 내 예측과 달리 그가 격쟁을 이용하지 않은 모양이니. 결국, 그대의 말대로 되었군.”
“운이 좋았던 모양입니다.”
“단지 운이 좋거나 감이 좋았다? 정녕…… 그런 것이오?”
의미심장한 물음.
그러나 들려온 대답은…….
“무지한 사람인지라. 지금 해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도통 종잡을 수 없군요.”
얼핏 듣기엔 진정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순진한 대답.
그러나 상대의 진면목을 아는지라.
정후겸은 어이없다는 듯 풀썩 웃음을 흘렸다.
그러다 잠시 후.
웃음기를 거둔 그가 다시 여인을 응시한다.
“가식 떨 것 없소. 아직 승부가 끝난 것도 아니니.”
정후겸은 톡톡, 검지로 자신의 관자를 두드렸다.
“격쟁이 아니라면 무얼까. 폐세손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는 그에게 만사여의가 말했다.
“제가 그분이라면 다음 수를 생각할 겁니다.”
“지금 다음 수라고 하였소?”
정후겸은 호기심을 보였다.
대답 대신 만사여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고갯짓에 따라 긴 너울이 위아래로 출렁거렸다.
심해의 바다를 떠올리는 너울의 일렁거림 사이로 단아한 음성이 새어 나왔다.
“성동격서(聲東擊西)라는 말이 있지요.”
“소란은 동쪽에서 일으키고 정작 공격은 서쪽으로 한다? 그렇다면…… 격쟁하는 백성들 사이에 섞여 왕을 만나려는 폐세손의 계획이 사실은 이목을 끌기 위한 편법이었다. 진짜 목표하는 다른 곳이라 짐작하는 것이오?”
“그럴 수도 있지요.”
“그럼 그곳이 어디란 말이오?”
“글쎄요…….”
만사여의는 정후겸의 어깨너머를 바라보았다.
열린 창으로 스며드는 햇살이 길게 늘어졌다.
긴 하루의 오후.
잠시 쉬며 풍경을 감상하기 적당한 시간이다.
그 시선을 좇던 정후겸이 무언가 알아차린 듯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군. 그게 있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