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 운명을 건 승부
미련 많은 달이 아직 하늘 끝을 배회하고 있었건만.
성급한 새벽이 용마루 끝에 걸렸다.
형운은 서탁 앞에 앉았다.
종이를 펼치고, 정성 들여 먹을 간다.
안개처럼 번져나간 묵향이 고요를 덮어갔다.
정적에 함몰된 형운은 눈을 감았다.
사방이 조용한 탓일까.
쿵쿵쿵.
거대한 북을 귓가에 바투 치듯 심장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이제 곧 결전의 아침이 밝아오리라.
숨을 크게 들이켰다.
다듬어지지 않은 마음이 서걱서걱 일어났다.
보풀처럼 일어난 잔재마저 털어내고서야 비로소 형운은 붓을 들었다.
-잘 지내십니까?
밤은 이미 지난 지 오래였다.
어느덧 새벽이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보아주는 이 아무도 없건만, 안부를 묻는 형운의 글귀엔 그리움이 가득했다.
-벌써 한 계절이 바뀌었습니다.
그날이 바로 어제만 같은데.
그때 입은 보이지 않은 상처는 계절이 지나도 여전히 선명했다.
마치 인두로 지진 듯 기억 깊이 각인되었으니.
절대 잊지 못하리라.
아니,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와중에도 시간은 무심히 흘러가고 있었다.
그분은 알고 계실까?
형운에게 여름은 늘 아픈 계절이 되었다는 것을.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은 저에게도 참으로 긴 시간이었습니다. 하나, 그 짧고도 길며 허무하면서도 긴박한 시간을 허투루 보내지 않았습니다. 오늘 마침내 긴 기다림을 마칠까 합니다. 하여…….
“각별한 오늘을…… 제 다짐을 당신께 전하고 싶었습니다.”
서탁 위.
그 좁은 공간 위로 그리운 마음이 파문처럼 번져갔다.
형운은 제 마음을 담아 쓴 글을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혹여.
만에 하나.
그분을…….
그 호방한 필체를 다시 한번 접할 수 있을까?
놀리는 말이라도 좋다.
그분과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그 무슨 소릴 한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하지만 간절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서탁은 무거운 침묵만 이어나갈 뿐이다.
그렇게 긴 침묵의 끝.
형운의 얼굴에 쓸쓸한 바람이 깃들었다.
그는 앙금처럼 남은 일말의 미련을 털어냈다.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다.
이제 움직여야 할 시간이다.
의관을 정제하고 일어선 그는 서탁에 절을 올렸다.
“다녀오겠습니다.”
꼭 돌아오겠습니다.
꾹꾹 눌러 담은 비장한 한 마디를 끝으로 형운은 방을 떠났다.
어둠이 아무도 없는 텅 빈 방을 끌어안았다.
***
“다녀오리다.”
방을 나온 형운은 제 뒤를 그림자처럼 따르는 이레를 돌아보았다.
“잠시만요.”
별채 대문을 나서려는 그를 이레가 잡았다.
“고름이 비뚤어졌습니다.”
이레는 형운의 도포 고름을 단정하게 매만지고, 너른 소맷자락의 주름을 바르게 폈다.
그러고도 무에 아쉬운 듯.
길이가 다르게 매진 갓끈을 다시 고쳐 매준 뒤에야 비로소 그를 놓아주었다.
“이제 되었습니다.”
해사한 눈웃음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형운 역시도 전에 없이 환하게 웃음을 보였다.
“다녀오리다.”
다시 한번 작별의 말을 건네며 대문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대문 밖을 지키고 선 익숙한 얼굴의 사내 둘이 넙죽 허리를 숙였다.
최치성과 홍인모였다.
“언제부터 기다렸느냐?”
“이제 막 왔습니다.”
홍인모의 대답과 달리 두 사람의 신발은 새벽 안개로 촉촉하게 젖어있었다.
한 시진 미리 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 속내를 형운이 어찌 모를까.
그럼에도 그저 묵묵히 고개만을 끄덕였다.
구태여 말을 할 필요가 없었던 까닭이다.
어린 시절엔 왕세손의 배동으로 형운과 함께 뛰어놀던 벗이었고 지금은 군주를 지키는 무사가 된 최치성과 홍인모가 아니던가.
굳이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형운을 향한 두 사람의 눈에는 저희가 지키는 군주를 향한 신념과 신뢰, 그리고 경이로 가득했다.
질투가 날 만큼 끈끈한 눈빛.
이레는 그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저분을 잘 부탁합니다.”
그녀의 당부에 홍인모는 이레보다 더 깊게 허리를 숙였다.
“심려 마시옵소서.”
최치성은 언제나처럼 가슴을 두드리며 큰소리쳤다.
“제가 뉘입니까. 저하의 왼쪽 칼이옵니다. 시퍼렇게 날을 세워놓았으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입술을 길게 늘이며 미소 짓는 이레에게 형운의 음성이 들려왔다.
“다녀오리다.”
이것으로 오늘만 세 번째 하는 작별 인사.
이레의 배웅을 받으며 형운은 두 사람과 함께 집을 나섰다.
평소보다 이른 시각이다.
또한, 장소도 궁이 아닌 다른 곳.
이레는 세 사람의 그림자가 사라질 때까지 오래도록 문 앞을 지키고 서 있었다.
부디 무사히 돌아오길 간절히 기도하며…….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무어가 그리 걱정되느냐?”
이레의 어깨너머에서 불쑥 목소리 하나가 튀어나왔다.
“오라버니!”
기대였다.
아무 기척 없이 모습을 드러낸 기대는 누이의 시선을 좇아 골목 끝으로 고개를 돌렸다.
“하도 꼼짝하지 않기에 망부석이라도 된 줄 알았다.”
“제가 그랬습니까?”
“그래. 네가 그랬느니.”
기대가 이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 걱정이 되느냐?”
“왜 걱정이 되지 않겠습니까?”
“허허, 걱정도 팔자로구나. 내가 있는데 무얼 근심할까.”
자신만만한 기대의 말에 이레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사실 오라버니가 제일 걱정입니다.”
“내가?”
“그럼, 아닙니까? 지금까지 몇 번이나 제 속을 태웠는지 벌써 잊으신 겁니까?”
“쓸데없이 속을 왜 태우는 것이야. 정작 본인은 모처럼 편히 쉬고 있는데, 괜히 네가 안달복달하여 사방팔방 돌아다닌 게 아니더냐.”
“그러게 약조를 지키셨어야지요. 며칠이면 돌아온다던 분이 한 달이 지나도 소식이 없으니…….”
이레의 말끝이 흐려졌다.
그때의 일을 떠올리니,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졌다.
돌아오지 않는 기대를 기다리는 하루가 얼마나 길고, 얼마나 고통스러웠던가.
이레의 낯빛을 살피던 기대가 그제야 한풀 수그러졌다.
“그래. 내가 무심하였구나.”
마치 어린아이에게 하듯 기대는 이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러지 마십시오. 오라버니는 제가 아직 아이로 보이십니까?”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이는구나.”
여전히 어려 보이기만 하는구나.
눈 오던 날의 첫 만남.
하얀 눈길을 아장아장 위태롭게 걷던 그 연약한 소녀.
그 작고 연약한 소녀가 어느덧 자신의 턱 위까지 자랐건만, 기대의 눈에 이레는 그때의 모습으로만 보였다.
자신이 감싸고 돌보지 않으면 길을 잃고 울던 그 어린 소녀로.
오라비의 등에 업혀 잠이 들던 귀여운 아이로.
“무사히 돌아오셔야 합니다.”
이레가 기대의 손을 잡았다.
“염려 마라. 다시는 네가 날 찾아 헤매지 않게 할 터이니.”
“약조하셨습니다. 이번엔 꼭 지키셔야 합니다.”
“아무렴. 다녀오마.”
유쾌한 대답과 함께 기대 역시 그녀의 곁을 떠났다.
사내들이 떠난 별채에는 정적만이 감돌았다.
텅 빈 별채를 서성거리던 이레는 표정을 단단히 했다.
마냥 기다리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 그녀는 수월로 갈 채비를 하였다.
이미 한서로와 말을 맞춰놓은 상태.
준비를 마치고 걸음을 옮기는 찰나.
이레는 우뚝 발길을 멈췄다.
별채의 작은 대청마루 위.
서찰이 놓여 있었다.
좀 전까지 보지 못했던 서찰이었다.
무엇일까?
-사시(巳時), 동녘정
시간과 장소만이 적힌 서찰.
말미에 십학사를 의미하는 낙인이 찍힌 것으로 보아, 회합을 통보하는 서찰이었다.
“그런데 이 서찰이 어찌 여기에…….”
일순, 뇌리를 스친 생각에 이레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
“어서 오시오.”
회합의 장소로 들어서자 잔잔한 음성이 만사여의를 반겼다.
정후겸이었다.
“급히 서두르셨나 보오.”
평소보다 만사여의의 차림이 가벼웠다.
서둘러 나온 모습이 전신에서 엿보였다.
정후겸은 입귀에 잔 미소를 머금었다.
“앉으시오.”
옆자리를 만사여의에게 권한 그는 앞에 놓인 빈 술잔에 술을 따랐다.
술잔은 하나였으나, 술병은 여럿이었다.
그렇다는 건 홀로 여러 병의 술을 마셨다는 뜻인데…….
만사여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른 학사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직 안 온 것인가?
활짝 열린 창문 밖으로 고개를 돌리자니, 정후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른 학사들은 안 올 것이오.”
“…….”
“오늘은 그대와 둘이서만 이야기를 하고 싶어 부른 것이니.”
정후겸은 가까운 자리를 다시 한번 눈짓했다.
“앉으시오.”
재차 권유하지만, 여인은 움직이지 않는다.
정후겸도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대신 술병을 흔들며 물었다.
“들겠소?”
불그스름한 볼.
충혈된 눈동자.
정후겸은 제법 취한 상태였다.
심지어 얼굴조차 가리지 않았다.
신기한 건 그렇게 느슨하게 풀어진 모습도 그의 자유분방한 기질과 썩 잘 어울린다는 점이었다.
“취하셨군요.”
“오늘같이 중요한 날, 어찌 술 한잔하지 않을 수 있겠소?”
평소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는 경우는 잦아도 오늘처럼 취한 모습은 처음이었다.
경계가 옅어진 모습에 안도의 한숨을 쉬자니, 정후겸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술, 한잔하겠소?”
“주도를 배울 기회가 없었습니다.”
“잘 되었군. 이 기회에 배우면 될 터이니.”
“지금은 그럴 기분이 아닙니다. 그나저나 절 부른 연유를 알고 싶습니다.”
“별일은 아니고…….”
정후겸은 빈 잔에 스스로 술을 따랐다.
“아까도 말했듯 그대와 단둘이 대화를 나눠보고 싶었소.”
“…….”
“어수선한 시국이라. 아쉽게도 속을 터놓고 말할 정도로 가까운 사람이 드물어서 말이오.”
“…….”
“설령 가깝다고 하여도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는 이가 태반이니. 이리 그대를 부른 것이오.”
술잔을 기울이는 정후겸을 만사여의는 물끄러미 응시했다.
잠시 후.
그녀는 몸을 돌렸다.
“특별한 볼일이 없다면 전 이만.”
서둘러 해야 할 일이 산더미와 같았다.
더구나 오늘은 그녀의 앞날을 가늠할 중요한 날이지 않은가.
하지만 그녀는 걸음을 옮길 수 없었다.
“오늘 말이오, 이곳을 지키는 자들에게 한 가지 특별한 명을 내렸다오.”
술에 취한 정후겸의 불콰한 음성이 들려왔다.
지금까지와 크게 다르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어째서인지 전해지는 느낌은 무언가 달랐다.
“무슨 명입니까?”
“명? 누가? 아! 내가 그랬었지. 무어라 했더라?”
턱을 괸 채 엉뚱한 소리만 하던 그가 고개를 들었다.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지만, 아마 이렇게 말했던 것 같소.”
“…….”
“내 허락 없이 이곳을 나가려 하는 자가 있으면, 지위 고하에 상관없이 목을 베어라.”
증명이라도 하듯, 사방에서 서늘한 살기가 느껴졌다.
“……!”
톡톡.
정후겸이 탁자를 두드렸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권했다.
“앉으시오.”
결국, 여인은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그가 권한 옆자리가 아닌, 물의 자리였다.
그녀가 자리에 앉자 사방에서 몰려든 살기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어딜 그리 급하게 가려 한 것이오? 누가 걱정이라도 된 것이오?”
“자칫하면 당장 제 목부터 달아날 상황이라, 다른 일에 신경 쓸 여유가 없군요.”
“하하. 그도 그렇군.”
털털하게 웃으며 술잔을 단숨에 털어낸 정후겸이 다시 물었다.
“어떻게 될 것 같소?”
“무엇이 말입니까?”
“오늘 벌어질 일의 결과.”
정후겸은 다시 빈 잔에 술을 따랐다.
술은 잔을 가득 채웠다. 그럼에도 한 방울도 흘러넘치지 않았다.
“구름. 그 사람도 이번 일에 사활을 걸었다오. 분명 폐세손을 막기 위해 전력을 기울일 것이오.”
“…….”
“본디 구름은 욕심이 많고, 속 좁은 구석도 있지만, 집요하고 날카로운 면모도 갖추고 있소. 무엇보다 시국을 읽는 매서운 눈을 가지고 있지.”
“…….”
“그의 곁을 지키는 자들의 면면도 범상치 않소이다.”
정후겸은 멀건 눈으로 비어있는 소나무 자리로 시선을 던졌다.
“소나무는 초지일관, 겨울 된서리 앞에서도 늘 푸르니. 그야말로 선비의 자세가 아니겠소?”
“그렇습니까?”
“저 자리에 더없이 적합한 인물이지. 뼈대 있는 가문 출신으로 학문은 물론이고 병법과 처세술에도 능하니. 실제로 지방의 유학자들 사이에 그의 깊은 학식에 감복하여 따르는 자들이 적지 않을 지경이라 하오. 그는 구름의 지장(智將) 역할로 충분할 테지.”
***
“폐세손은 이번 기회를 절대 놓치지 않을 것입니다.”
확신하는 듯한 홍계희의 말에 홍인한은 다시 물었다.
“확실하오?”
홍계희는 염소수염을 당기며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틀림없소이다. 이번이 무언가를 시도할 마지막 기회이니.”
“만약 폐세손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불안함이 당긴 홍인한의 물음에 홍계희는 입가에 한껏 비웃음을 담아냈다.
“그렇다면 더욱 반가운 일이겠지요.”
“반가운 일이다?”
“세손의 그릇이 고작 범부의 그것보다 못한다는 의미이니, 굳이 경계할 필요도 없지 않겠소이까?”
“과연 그렇군.”
홍인한과 홍계희는 서로 마주 보며 껄껄 웃었다.
“한데…….”
홍계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폐세손이 나타난다면 어떻게 대응하실 생각이십니까?”
홍인한은 대답 대신 우측에 앉은 사내에게 질문을 돌렸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은가?”
“흠.”
사내는 짐승의 목울음 소리와 같은 위협적인 소리를 흘렸다.
“폐서인되었다 하나 한때는 세손이었던 사내. 어찌 불경한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그저 연로하신 주상 전하의 행차를 안전하게 지키고 보호하려 노력하여야겠지요. 설혹…….”
사내가 감은 눈을 뜨며 말을 이었다.
“그 과정에서 작은 불상사가 발생한다 할지라도.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요.”
그의 눈빛이 섬뜩하게 번뜩였다.
형형한 독기가 가득 담긴 시선이었다.
***
잘 빚은 국화주가 향긋한 향내를 뿌렸다.
정후겸은 술잔에 담긴 맑은 액체를 들여다보았다.
“또 한 명, 구름을 따르는 사내 중에 썩 쓸만한 자가 있소.”
그는 그 쓸만한 사내가 누군지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정후겸의 시선은 대나무의 자리를 보고 있었다.
“대나무는 한결같이 하늘을 향해 곧게 뻗어, 부러질지언정 휘는 법이 없소. 그런 대나무가 상징하는 것은 불굴. 즉, 무력.”
“…….”
“그는 힘과 무력을 대변하기에 넘치도록 충분한 자격을 가졌소.”
“그의 실력이 그렇게 대단한가요?”
“어릴 적부터 기골이 남달라, 나이 열둘에 산돼지를 맨손으로 때려잡았다지? 열다섯이 되었을 땐, 근방에 대적할 사람이 없었다 하더군.”
“대단하군요.”
“조선 최고의 무인을 거론한다면 세 손가락 안에 반드시 들어갈 사람이오.”
“음.”
저도 모르게 탄식 섞인 신음이 흘러나왔다.
“폐세손의 곁에 얼마나 대단한 무장이 있는지 모르나, 그를 상대할 수 있는 자는 없을 것이오.”
“저는 돈에만 관심 있는 세속적인 사람이라, 사내들의 험악한 이야기엔 흥미가 일지 않는군요.”
곁눈으로 만사여의를 살피던 정후겸은 피식 웃었다.
“그럴 리가. 다른 사람도 아닌 그대의 소중한 사람과 관련한 이야기인데.”
“……무슨 뜻으로 하는 말입니까?”
“글쎄…… 무슨 소리일까. 어쩌면 주정꾼의 헛소리일 수도 있고. 또 달리 보면 의표를 찌르는 말이 될 수도 있겠지.”
그의 혼잣말에 숨이 턱 막혀왔다.
정후겸의 말이 마치 모든 걸 다 알고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져서였다.
“이제 곧 행차가 시작되겠군.”
남의 복잡한 심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정후겸은 취기 오른 눈으로 창밖을 보았다.
과연 지금 그는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일까?
왜 자신을 이곳으로 부른 것인지.
형운과 구름의 대치를 어째서 구경만 하는 걸까?
모든 것이 의문이었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형운이 운명의 향방을 가르는 한판 대결을 벌이는 동안, 이곳에서도 만만찮은 신경전이 벌어지게 되리라는 것을.
정말로 그런 것이라면 차라리…….
“저와 내기 한 번 하지 않겠습니까?”
뜻밖의 제안에 정후겸이 눈을 끔뻑거렸다.
“내기?”
“이번 싸움, 누가 이길지 예측하여 맞추는 내기.”
“허, 이 와중에 내기라…….”
정후겸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탁하게 가라앉은 그의 눈동자 깊은 곳에선 희미한 잔물결이 일고 있었다.
흥미가 동한 것이다.
“전 불리한 쪽이 기어코 이긴다에 걸겠습니다.”
“불리한 쪽이라면…… 폐세손 말이오? 그대는 지금까지 내가 한 말을 허투루 들은 모양이오. 폐세손이 맞서야 할 상대의 수와 질, 그리고 상황까지. 모든 면에서 폐세손은 절대적으로 불리하오.”
“그래도 그쪽에 걸고 싶군요.”
“애착인가?”
“상인의 감이지요.”
“……일부러 지려고 작정한 사람 같군.”
정후겸은 느른한 표정으로 의자에 등을 기댔다.
“좋소. 그럼 이번 내기에 무엇을 걸 생각이오?”
“저의 모든 것.”
정후겸의 움직임이 우뚝 멈췄다.
“모든 것?”
“만사여의. 그 이름으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이번 승부에 걸겠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폐세손은 절대로 뜻을 이루지 못할 것이오.”
“그럴지도 모르지요.”
“이해할 수 없군.”
고개를 흔들던 정후겸이 물었다.
“하면 나는? 나는 무엇을 걸어야 하오?”
“단 한 가지.”
“한 가지?”
“한 가지 질문에 대답해 주십시오.”
“고작 질문?”
“단, 그것이 무엇이 되었건 반드시 대답해 주어야 합니다.”
“반드시 대답해 주어야 한다라…….”
잠시 염두를 굴리던 정후겸은 상체를 바로 세웠다.
어느새 흐릿하던 그의 두 눈은 묘한 열기를 쏟아내고 있었다.
“그 내기, 받아들이지.”
***
천하와 운명을 건 숨 막히는 승부가 펼쳐지는 그때.
주인 없는 별채의 사랑.
그곳에 놓인 서탁에 기묘한 조화가 깃들었다.
스르르.
그리움과 각오를 새긴 형운의 글이 바람에 흩날리는 갓털처럼 날아갔다.
그렇게 본래의 흰빛으로 돌아간 종이 위.
-참으로 오랜만이구나, 은백.
힘있게 써 내려간 글씨가 한 자 한 자 새겨지듯 나타났다.
-그동안 잘 지냈느냐? 무얼 하느라 그 흔한 안부 인사 한 줄 없었더냐?
반가움이 가득 묻어난 물음.
하지만 주인 잃은 서탁이 대답할 리 만무했다.
-무어냐? 몇 년 만에 불쑥 나타나 뜻 모를 소리만 전하고는. 설마, 이게 끝인 게냐? 그러지 말고 대답 좀 해주어라. 그간 너희의 근황이 얼마나 궁금했는지 아느냐.
여전히 서탁 위엔 침묵이 감돌았다.
오랫동안 기다려도 대답이 없자, 결국 은룡은 은백이 그랬던 것처럼 넋두리하듯 혼잣말을 써 내려갔다.
-무심한 녀석, 끝내 답이 없구나.
-보아하니, 무언가 사정이 있는 모양이구나.
-걱정하지 마라. 다 잘될 것이다.
-내가 장담하마. 아무렴. 네가 누구냐? 이 몸, 은룡의 벗이거늘. 당연히 잘되고말고.
따스한 위로의 말이 서탁을 가득 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