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 부나방
묽은 달빛이 창으로 스며들었다.
희고 뽀얀 달 그림자를 어깨에 지고 이레는 서탁 앞에 앉았다.
-오늘 달빛이 유난히 수려합니다. 할아버지들, 잘 계신가요?
곧 이레의 글 아래로 하나둘 친숙한 필체들이 떠올랐다.
화, 악, 상, 예였다.
-무탈하였단다. 아이야, 너도 무탈하였느냐?
-그곳은 달빛이 고운 모양이구나. 이곳은 별빛이 유난하구나.
-뭔 소리냐? 구름만 가득하거늘. 하여, 오늘은 널 보지 못할까 걱정할 정도였다.
-달이면 어떻게 별이면 또 어떻겠소. 그저 이곳에서 반가운 이들을 만날 수 있으면 족한 것을.
이레의 눈꼬리가 부드럽게 여며졌다.
모처럼 모두와 함께 대화를 시작하니, 반가움이 더했다.
-맞습니다. 하늘의 맑고 흐림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이리 훌륭한 할아버지들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저는 더없이 행복한걸요.
상은 투덜거렸다.
-어허, 오늘은 시작부터 말치레가 유난스럽구나. 그만두어라. 낯 간지러운 소리만 계속할 생각이면 난 이만 가련다.
은근히 겁박하는 상에게 악의 지청구가 따라붙었다.
-고기도 먹어본 이가 더 먹고, 칭찬도 받아도 본 이가 받아들일 줄 아는 법. 상, 일평생 좋은 소리 한번 못 들어본 모양이구나.
-흥, 마음에도 없는 아첨 따윈 안 들어도 아쉬울 것 하나 없다.
-진정 마음에서 우러나온 말은 아첨이 아니라 칭송이라고 하느니.
악의 말에 상이 발끈했다.
-뭐라? 악, 너나 나나 별반 다를 것도 없는 듯한데. 어디서 칭송이니 칭찬이니. 거짓말을 하는 것이냐.
-상, 나를 너와 같은 수준이라고 보면 곤란하다. 내 곁에는 나를 따르고 칭송하는 신하들이 구름처럼 모여 있다.
-구름처럼 모여 네 칭찬을 하는지, 험담을 하는지, 알 게 무어냐.
-나 같은 성군을 누가 감히 험담할까?
-개가 웃을 소리다.
-뭐야? 이런 우라질 놈이.
-네가 성군이면 나는 성군 할아비다.
-이런 개족보를 보았나. 누가 네 할아버지냐?
악과 상이 만났다면 으레 벌어지는 다툼인지라.
이제는 그렇거니, 단념한 이레는 슬그머니 서탁 위의 종이를 내렸다.
서탁 위에 티끌 하나 없는 깨끗한 흰 종이를 올리기 무섭게 글이 떠올랐다.
예 할아버지의 글이었다.
-아이야, 내가 간밤에 꿈을 꾸었구나.
예의 글씨에 걱정이 가득했다.
-꿈? 무슨 꿈?
싸움도 구경꾼이 있어야 흥이 난다고.
더는 보는 사람이 없음을 눈치챈 상이 일찌감치 싸움을 접었다.
-아이와 은백, 두 아이가 구름처럼 일어난 안갯속을 헤매는 꿈이었소.
불길한 내용이었다.
상은 대뜸 예를 타박했다.
-하하. 이젠 하다 하다 꿈 이야기냐? 과연 백귀로다. 아이야, 설마 예의 말을 신경 쓰는 건 아니겠지? 귀담아듣지 마라. 옛말에도 그러지 않더냐. 꿈은 현실과 반대라고. 그러니 가볍게 흘려듣고 넘기거라.
상이 당부했다.
하지만 이레는 입가에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예 할아버지의 신통력은 못 당하겠구나.”
서탁 속 할아버지들은 각기 다른 독특한 성향을 갖고 있었다.
화 할아버지는 사람의 마음을 귀신처럼 잘 짚으셨다.
난해한 문제를 분석하고 해결하길 즐기시는 악 할아버지.
그리고…….
“예 할아버지께선 앞날을 곧잘 예견하셨지.”
할아버지들 가운데 가장 진중한 예는 이따금 엉뚱한 이야기를 할 때가 있었다.
꿈이나 불현듯 뇌리를 스치는 생각 같은 것이었다.
놀라운 것은 예의 말들이 실제로 벌어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상 할아버지께선…….”
상의 장점을 생각하던 이레는 짧게 결론을 맺었다.
“과감하시지.”
누구보다 과감하고 강한 결단력을 가진 분이 바로 상이었다.
칼처럼 자르는 성격 탓에 성급한 사람으로 오해받기도 하지만, 이레는 그 또한 상의 큰 장점으로 보았다.
-실은…….
이레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오늘 작은 소동이 있긴 하였습니다.
그녀의 붓이 아침의 소동을 되새김질하였다.
***
아직 동도 트지 않은 이른 아침.
안국동의 별채로 한 사내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홍국영이었다.
평소와 다름없이 일과를 준비하던 형운과 이레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맞이했다.
“무슨 일인가?”
형운의 묻는 말에 홍국영은 허겁지겁 사랑으로 들어섰다.
“결정되었습니다.”
버선도 신지 않은 맨발.
아무리 폐위된 세손이라지만, 기본적인 예조차 갖추지 않은 무례한 언행이었다.
그럼에도 형운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본디 사사로운 예절에 얽매이지 않는 홍국영의 성정을 익히 알고 있는 까닭이다.
더구나 형운을 바라보는 홍국영의 표정이 워낙에 다급해 보였다.
“결정되다? 혹여…… 그 일이더냐?”
형운의 물음이 떨어지기 무섭게 홍국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하. 바로 그 일입니다.”
“……자세히 고하라.”
“이른 새벽에 벌어진 일이옵니다.
홍국영은 오늘 새벽, 궐에서 벌어진 사건을 형운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
“예정대로 어가 행차를 하겠다 전하거라.”
상선에게 건넨 왕의 한마디에 궐 안팎이 들썩였다.
어가의 행차.
지금의 주상께서는 백성을 살피는 마음이 대단하였던지라.
종종 선왕의 능을 행행(行幸)하고, 군사의 훈련과 치료를 위한 온천행을 할 때마다 백성의 고충을 직접 듣는 격쟁의 시간을 따로 마련하였더랬다.
백성을 귀하게 여기고 그들의 삶에 관심을 보이는 선한 군주의 모습을 보여주길 원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 만은 행차를 하지 못하리라 여겼다.
왕의 병세가 생각보다 위중하니.
제례조차 주관하지 못하는 임금께서 비록 연(輦)을 타고 이동하는 것이라 하나, 흔들리는 연을 타고 도성을 통과하는 일정을 소화하기는 무리라 생각했다.
그런 모두의 예상을 비웃기라도 하듯 왕은 행차를 강행하겠노라 선언하였다.
당연히 문무백관은 한목소리로 반대의 뜻을 보였다.
행차로 인해 자칫 병이 깊어질까, 우려의 목소리가 가득했다.
왕은 고집을 꺾지 않았다.
“무릇 백성을 살피고 돌보는 것은 임금의 당연한 의무이다. 행차를 막는 것은 군주의 의무와 도리를 저버리란 말이 아니더냐? 그럼 내가 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이유가 대체 무어란 말이냐?”
추상같은 왕의 호통에 신료들은 더는 반론을 제기하지 못했다.
*
“할바마마께서 행차를 결심하셨구나.”
“그렇습니다.”
홍국영의 대답에 형운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마침내.
할바마마의 용안을 배알 할 있는 기회가 생겼다.
간절히 고대했던 희망의 문이 드디어 열린 것이다.
‘이번엔 기필코 그분을 뵙고 말겠다.’
어금니를 지그시 사려 무는 형운의 두 눈에 형형한 기운이 서렸다.
***
-행차?
상은 의문을 표했다.
-그게 무어라고 불손이 그리 흥분하였단 말이냐?
언제나처럼 악이 나섰다.
-아이와 그간 무수한 이야기를 하고도 아직 눈치채지 못했단 말이냐?
-모르니까 묻지. 하면 악, 너는 행차가 저 아이들과 무슨 상관인지 안단 말이냐?
-당연히 알고 있다.
-무언데?
두 사람의 대화에 예가 슬쩍 끼어들었다.
-아이들의 상황을 곰곰 생각해보면 답이 나올 것이오.
-무슨 사정? 빙빙 돌려 말하지 말고, 그냥 제대로 설명하면 안 되겠느냐?
곧 악의 글이 떠올랐다.
-아이들이 곤궁한 상황으로 궁 밖으로 나오게 된 건 알고 있느냐?
-나오긴. 사악한 놈들의 음모로 쫓겨난 게지.
-다행히 그 정도는 기억하고 있구나.
-그래서?
-그렇게 남의 집 더부살이를 하게 된 아이들이 왕을 만나고 싶어도 만나지 못하게 된 사정도 알고 있으렷다?
-불손 그 녀석이 매일 문안 인사를 가도 만나긴커녕 왔노라 소식조차 전하지 못한 상황 말이냐. 그것도 잡스러운 녀석들의 방해 때문이었지.
-그래, 잘 알고 있구나. 그럼 생각해봐라. 너라면 어떻게 생각하느냐? 네가 왕이라면 세손을 어찌 생각할까?
-글쎄. 처음에는 미안했겠지. 혈육이 아니더냐. 아비 잃고 궁에서 쫓겨난 피붙이이니. 마음이 짠하겠지. 허나, 손주가 큰일 이후에 한 번도 찾아오지 않으면 서운함과 더불어 괘씸함도 쌓이겠지.
-바로 그것이다. 오해가 생겨도 단단히 생길 상황이 아니더냐.
-옳거니. 손주가 자신을 미워하겠구나, 하고 오해할 만도 하구나.
-그 오해를 풀려면 어찌해야 할까?
-만나는 수밖에 더 있겠느냐? 직접 만나서 오해를 풀어야지.
-하지만 그럴 수 없다면? 그럼, 어찌해야 할까?
-당연히 쳐들어가야지. 앞을 가로막는 놈들을 죄다 박살 내고 조부 앞에 당당히 나아가 큰 소리로 억울하다 외쳐야겠지.
-할아버지, 전 사실 할아버지가 싫지 않습니다! 고작 그 말을 하러 궐로 쳐들어가라고?
악과 상의 대화 사이로 예가 다시 슬며시 끼어들었다.
-궁으로 쳐들어 간다라……. 자칫하면 역모로 몰릴 수도 있겠소.
악이 콧방귀를 끼며 말했다.
-역모로 오인하는 게 아니라, 그건 엄연한 역모다. 실패하면 오해를 풀긴커녕 반역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채 죽임을 당할지도 모르지. 억울한 원한을 해결할 수는 더더욱 없을 테고.
상이 물었다.
-그럼, 어쩌란 말이냐?
-그래서 이번 행차가 중요하단 말이다.
-행차가 무슨 상관…… 아! 그렇구나.
뒤늦게 무언가를 깨달은 듯, 상은 탄성을 흘렸다.
-궁으로 쳐들어가는 것은 무리니, 차라리 왕이 궁 밖으로 나올 때를 노린다는 말이로구나.
-이제라도 말귀를 알아먹어 다행이다.
-그렇군. 행차라면 가능하겠구나. 앞을 막는 높은 담벼락도 없고, 왕에게 접근하기도 한결 수월할 테지.
-그래서 유일한 기회라 한 것이다.
-과연, 그렇구나.
감탄하던 상이 돌연 근심을 보였다.
-한데…… 그런 사정을 적들이 과연 모를까?
***
같은 시간.
홍인한의 집으로 은밀한 그림자들이 하나둘 스며들었다.
구름을 따르는 십학사의 학사들이 찾아왔다.
“무슨 일이라도 있소?”
갑작스레 연통을 받은 홍인한이 물었다.
“제가 묘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소나무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대관절 무슨 이야기를 들었기에 이 밤에 걸음을 하였단 말이오.”
“이 집안의 며느리들이 수월을 드나들었다고 하던데…….”
홍인한을 향한 소나무의 눈빛에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다.
빙빙 둘러 말하는 것이 답답하다는 듯 대나무가 끼어들었다.
“혹여 만사여의에게서 무슨 기별이라도 받은 것인지요?”
그제야 학사들의 용건을 눈치챈 홍인한이 눈매를 가늘게 떴다.
자신을 향한 학사들의 눈동자에 서린 것은 의심이었다.
혹여 저희 모르게 구름 혼자서 만사여의와 거래를 튼 건 아닐지, 의심하는 것이었다.
‘그 한심한 것으로 인해 일이 번거롭게 되었구나.’
며느리 이 씨를 떠올리며 홍인한은 수염을 쓸어내렸다.
하라는 일은 제대로 처리 못 하고, 정작 엉뚱한 일만 저지르는 며느리가 영 못마땅했다.
그렇다고 저들의 앞에서 속사정을 드러낼 수 없으니.
“허허, 이것 참. 뭘 그런 일로 밤길을 오셨소.”
태연히 웃는 얼굴로 그는 학사들을 둘러보았다.
“가벼이 넘어갈 일은 아닌 듯하오만.”
“우리는 구름을 믿고 있습니다. 구름이 그리했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요. 허나, 그 이유라는 걸 우리도 좀 알아야…….”
소나무와 대나무가 차례로 목소리를 냈다.
말로는 믿고 있다고 하지만, 애초에 그들 사이에 믿음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목표가 같았을 뿐.
서로가 마음을 숨겼다.
홍인한은 한결 느긋해진 표정으로 학사들을 둘러보았다.
“조만간 하엽생을 궁으로 데려갈 작정이었소.”
“하엽생을 말입니까?”
소나무의 물음에 홍인한이 대답했다.
“전하의 의중에 여전히 폐세손의 그림자가 남아 있으니. 그 대안을 될 만한 존재가 있음을 알려 드려야 하지 않겠소이까.”
“그렇지요. 왕께선 여전히 명분과 정통성을 고집하시니. 한데, 하엽생이 입궁하는 일과 수월의 일은 무슨 상관이랍니까?”
대나무의 물음에 홍인한은 한숨을 쉬었다.
“어미도 없이 궁에서 쫓겨난 하엽생의 입성이 변변할 리 없질 않겠소. 귀한 자리에 오를 귀한 분이니. 그에 합당한 입성을 갖추는 것이 마땅하다 판단하였소.”
“이런, 그런 줄도 모르고…….”
“송구합니다.”
학사들이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괜찮소, 괜찮아요.”
홍인한은 사람 좋은 미소를 입가에 담았다.
“이 어리석은 사람들이 괜한 의심을 하였습니다.”
“대감께서 그리 깊은 뜻으로 움직이신 줄도 모르고…….”
“하하, 그럴 수도 있지요.”
“그럼 하엽생은 언제 입궁하게 되는 겁니까?”
“곧 적당한 시기에 주상전하께 데려갈 작정이오.”
“주상의 심신이 약해질 대로 약해져 있으니. 하엽생의 의젓한 모습을 본다면 분명 한시름 놓으실 겁니다.”
“아무렴요.”
오해를 푼 학사들은 홍인한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그토록 원하던 천하가 손가락 끄트머리까지 다가왔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기다리기면 된다.
인내심을 갖고, 손끝에 닿은 권세가 손아귀 안으로 들어서기만을 참고 기다리면 되리라.
그러다 맥없이 제 손아귀로 굴러떨어진 그것을 콱 움켜쥐면…….
곧 다가올 도홧빛 미래를 떠올리며 학사들은 웃음을 머금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홍인한의 얼굴에서 서서히 미소가 사라졌다.
그는 가라앉은 시선으로 학사들을 차례로 응시했다.
“아직 방심해서는 아니 될 것이오.”
“…….”
“상선이 전한 보고에 따르면 전하를 뵙기 위한 폐세손의 노력이 매일같이 이어진다고 하오.”
“우직하다고 해야 할지, 미련하다고 해야 할지, 쯧쯧.”
대나무가 혀를 찼다.
“분명 제례 전에 움직일 것이 틀림없소.”
“영민한 폐세손이 이번 제례의 의미를 모르지 않을 테지요. 마지막 발버둥이라도 쳐 볼 테지요.”
“그래 봤자 허무한 발악이 될 겁니다.”
대나무의 단정에 홍인한은 고개를 저었다.
“순순히 물러날 세손이 아니오.”
“그럼?”
“이참에 불안의 싹을 뿌리까지 도려내면 어떨까 하오.”
“……!”
대나무와 소나무의 눈에 놀람이 들어찼다.
소나무가 한껏 낮은 음성으로 홍인한에게 물었다.
“방도가 있소이까? 연이은 왕가의 불운을 누군가 의심하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폐세손이 은밀하게 어가 행차도를 가져갔다고 하오.”
“어가 행차도라면…….”
홍인한이 서랍에서 두루마리를 꺼냈다.
도르르르, 서탁 위로 몸통을 굴린 두루마리는 곧 훤히 속을 드러냈다.
제례를 위해 궁을 떠나는 어가를 호위하는 군사의 배치와 어가가 지나는 길과 각 길목을 통과하는 정확한 시간이 적힌 문서였다.
이윽고 홍인한은 문서의 한 지점을 검지로 짚었다.
“여기, 이곳이오. 폐세손이 격쟁(擊錚)하는 백성들 틈바귀에 왕을 만나려는 장소.”
학사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행차 때마다 주상께선 백성들을 만나 그들의 억울한 사연을 해결하질 않습니까. 그런 연유로 이번 행차에도 많은 백성이 자신들의 억울함을 호소하려 몰려들 것이외다. 폐세손이 그 무리에 끼어 있다면 우리로선 말릴 도리가 없을 겁니다.”
대나무가 걱정스레 말했다.
홍인한은 성성한 수염을 쓸었다.
“왕의 병세가 예사롭지 않으니, 이번 행차에는 격쟁하는 백성들이 없도록 단속하는 것이 좋다는 것이 조정의 중론이오. 중전마마 역시 우리의 뜻에 동참하시었으니. 아마 지금쯤 도성의 모든 관아에 이와 관련한 문서가 전달되었을 것이오. 허나…….”
그는 음험한 속내를 품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관아의 단속을 피해 어가를 막는 자들이 필시 있을 것이니. 그들에게 불온한 뜻이 없다고 그 누가 장담할 수 있겠소.”
두 학사의 긴장한 시선이 홍인한의 입술로 향했다.
잠시 뜸을 들이던 홍인한이 이야기를 매듭지었다.
“감히 어가의 행차를 막는 자는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그 자리에서 베어도 좋다는 명이오.”
“그, 그럼…….”
“안타깝게도 폐세손 역시 불행을 피해갈 수 없을 듯하오.”
홍인한을 비롯한 학사들의 입꼬리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걸렸다.
이로써 형운이 운명이 결정되었다.
죽음.
폐세손은 그의 아비와 같은 비극적인 운명을 면치 못하게 되리라.
***
-아마도 알 것입니다.
적들이 눈치채는 건 아닐까?
상의 우려에 이레는 담담한 필체로 답했다.
-눈치채고 있을 거라고?
-네.
당연히 눈치챘으리라.
그러라고 일부러 단서를 흘렸으니까.
이레가 미처 글을 쓰지 못하는 사이, 상의 걱정이 이어졌다.
-아이야, 적들이 어찌 나올지 알면서도 일을 강행하겠다는 말이냐? 그건 말 그대로 섶을 지고 불 속으로 뛰어드는 것과 같지 않으냐?
-그렇겠지요.
-그런데도 하겠단 말이냐?
-네. 하여야 합니다.
-어허,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나, 무리인 것 같구나. 차라리 은밀히 접촉할 수 있는 다른 방도를 찾는 게 어떠하냐?
-아니 됩니다.
-왜? 대체 무슨 사정인데, 은밀히 하여서는 아니 된다 하는 것이냐?
-왜냐하면…….
이레는 결연한 눈빛으로 글을 이었다.
-그래야 비로소 살길이 열리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