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 그러게요, 무슨 일일까요?
“가시지요.”
이레는 수월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마치 제집인 듯 걸음에 거침이 없었다.
홍씨 집안의 며느리들은 이 씨에게 눈길을 돌렸다.
“저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래요, 형님.”
“이곳이 그 유명한 수월, 확실합니까?”
“특별한 사람들만이 허락된다는…….”
“그런데 별채 새사람이 이곳을 어떻게 알까요?”
이 씨라고 연유를 알 리 만무했다.
오히려 그녀가 묻고 싶을 지경이었다.
‘저 사람이 어떻게 이곳을 아는 거지?’
세손빈에 오른 이후에 수월과 교류하게 된 걸까?
하지만 그렇다고 보기엔 궁에서의 시간이 턱없이 짧았다.
친정의 살림이 넉넉한 것도 아니니, 그쪽과의 인연은 더더욱 아니리라.
이레에게 직접 물어보면 될 일이지만,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입술을 깨물던 이 씨가 표독스런 눈으로 말했다.
“……따라가 봅시다.”
이 씨는 호기를 부렸다.
어떻게 수월을 아는지 몰라도 제까짓 게 얼마나 대단하겠는가.
‘예전엔 세손빈이었을는지 몰라도 이젠 끈 떨어진 연 신세이니.’
무언가 착오가 있어 대문을 열어준 것이 틀림없었다.
실상을 아는 높은 사람이 나타나면 사정이 달라지리라.
이 씨를 비롯한 홍가(洪家)의 여인들은 이레의 뒤를 쫓아 수월로 발을 들였다.
내심 호기심도 일었다.
제아무리 대단한 권세가라 하여도 출입명부에 오르지 못하면 한 발짝도 들어갈 수 없는 입전.
수월의 내부는 과연 어떨까.
하지만 기대 어린 그녀들의 눈빛이 실망으로 변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지상의 낙원, 여인들의 무릉도원처럼 알려진 수월.
하지만 실제 마주한 수월의 내부는 지극히 평범했다.
아니, 외려 이상했다.
너른 장원.
길을 따라 좌우로 길게 늘어진 전각.
그 어느 곳에서도 그들이 기대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고요하고 점잖은 장소.
학사들의 서고(書庫)라고 하여도 믿을 수 있을 정도였다.
“수월이라 하여 궁금히 여겼건만…….”
“평범한 곳입니다, 그려.”
“입전이라면서 그 흔한 비단 조각 하나 보이지 않는다니.”
실망한 며느리들의 혹평에 기다렸다는 듯, 이 씨가 나섰다.
“빈 수레가 요란하다는 말이 있잖은가. 남에게 공개되지 않을 때는 그만한 사정이 있는 법. 비밀스럽고 은밀한 공간은 으레 과장되기 마련이지.”
이 씨의 말에 다른 며느리들 역시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들의 눈으로 직접 본 수월의 내부는 소문으로 익히 듣고 상상한 모습과는 큰 차이가 있었기 까닭이다.
“어쩌면 이런 속사정으로 공개를 꺼린 게 아닌가 싶군.”
“형님 말씀이 맞는 듯합니다.”
막내며느리가 이 씨의 말에 맞장구쳤다.
“무릇 장사라 함은 물품을 팔아 이문을 남기는 활동인데. 소문 왕성한 수월의 본모습이 이런 줄 뉘가 알았겠습니까. 이런 형편이니, 선뜻 대문을 열기가 어렵기도 하겠습니다.”
“자네도 그리 생각하는구먼. 난 이들이 장물 같은 걸 취급하지 않나, 그런 의심마저 든다네.”
“장물이요?”
“그렇지 않고서야 이리 쉬쉬 물건을 거래할 이유가 없질 않은가.”
이 씨는 이레를 흘끔 보았다.
그녀의 입가에 얄팍한 미소가 어렸다.
“아하! 그렇게 된 것이로군요.”
“이제야 이해가 됩니다.”
다른 며느리들 역시 이레의 뒷모습을 보며 비웃음을 흘렸다.
그때였다.
“귀한 분들이 오셨군요.”
고아한 음성과 함께 한 여인이 나타났다.
손님이 들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서둘러 나온 한서로였다.
그녀는 곧장 이레에게 다가갔다.
이레가 가문의 여인들과 함께 수월을 방문했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한서로는 놀람을 감출 수 없었다.
대관절 무슨 일일까.
미리 약조하지 않은 일이라 궁금증과 호기심이 일었다.
하지만 한서로는 미처 이레의 앞에 다다르기 전에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네 상전은 어디에 있느냐?”
이 씨가 미심쩍은 눈으로 한서로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소녀, 한서로라 합니다. 상전은 아니 계시니, 궁금한 것이 있다면 저에게 하문하시지요.”
스스로를 밝힌 한서로가 차분한 눈길로 대답을 기다렸다.
이 씨는 거만하게 턱을 치켜들었다.
“우리는 안국동 홍 대감 집안의 사람들이니라.”
다른 며느리들이 이 씨의 등 뒤에 병풍처럼 늘어섰다.
조선의 팔도를 호령하는 세도가의 며느리들답게 등을 꼿꼿하게 세운 모습이 도도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레를 밀치듯 앞으로 나선 이 씨와 그녀의 병풍을 자처하고 나선 여인들.
그리고 조용히 그들의 언행을 지켜보고 있는 이레.
굳이 입 밖으로 상황을 설명하지 않아도 그림이 그려졌다.
이레를 향한 한서로의 미소가 짙어졌다.
“아! 안국동의 귀빈들이시군요. 이렇게 뵈옵자니, 일생의 광영입니다.”
“흥, 이제야 제대로 된 대접을 할 모양이군.”
“귀한 분들을 맞이하는데 미흡하였다면, 용서하십시오. 하온데 귀한 마님께서 수월엔 무슨 용무이신지요.”
“입점에 볼일이 옷감을 보고 옷을 짓는 것 외에, 또 뭐가 있겠느냐?”
“그렇지요. 당연하신 말씀입니다.”
“한데, 너 말고 다른 사람은 없느냐?”
이 씨는 시선을 옮겨 주위를 훑었다.
그녀는 한서로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정확하게는 한서로의 나이가 문제였다.
한눈에 보아도 어린 태를 벗지 못하였으니.
필시 심부름이나 하는 시비(侍婢)리라.
‘감히 내가 행차했는데 약관도 되지 않은 어린 것을 내보내? 틀림없이 날 우습게 여긴 것이렷다.’
한서로는 고개를 저었다.
“유감스럽게도 다른 분은 아니 계십니다.”
수월에 한서로보다 지위가 높은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이 씨는 그녀의 말을 책임자의 부재 정도로 받아들였다.
“아쉽게 되었군. 하는 수 없지. 자리를 비운 네 상전께 홍 대감의 작은 며느리가 왔었노라 꼭 아뢰거라.”
“명심하겠습니다. 하면, 지금은 어찌 안내하오리까?”
한서로가 물었다.
이 씨는 불편한 표정으로 이레를 눈짓했다.
“저 사람, 옷 한 벌 지으러 왔느니.”
“그러시군요. 피부가 희고 고우시니, 어떤 색의 옷이든 잘 어울리실 것 같습니다.”
“흥.”
이레를 칭찬하는 한서로의 말에 이 씨는 불쾌한 감정을 서슴없이 드러냈다.
“공연한 말치레는 되었다. 안내나 해라.”
“따르겠습니다. 그전에 수월의 옷은 최고의 장인들이 만든 세상에 단 하나뿐인 명품이라는 건 알고 계시온지요.”
“어찌 그걸 모를까.”
한서로의 눈빛이 영리하게 반짝거렸다.
“다행입니다. 종종 사정을 모르시는 마님들께서 일이 끝난 후에 곤란한 심정을 토로하는 경우가 있답니다.”
한서로의 자분자분한 이야기엔 ‘옷의 가격이 상당한데, 감당할 수 있겠느냐’는 뜻이 함축되어 있었다.
은근히 자존심을 건드는 말인지라.
이 씨는 한서로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네가 감히 우리 가문을 어찌 보고 그런 소릴 입에 담는 것이냐. 내가 이깟 옷 하나 감당하지 못할 사람으로 보이느냐?”
한서로는 방긋 웃었다.
“제가 또 실수하고 말았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수월을 안내하겠습니다. 모쪼록 귀하신 분들께서 실망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하늘 정점에 떠올랐던 태양이 서편 하늘로 미끄러졌다.
이레는 수월의 안쪽에 마련된 내실에 앉아 있었다.
한서로가 홍씨 집안의 여인들을 안내하는 동안 그녀는 이곳에서 차례를 기다렸다.
차를 마시고, 서책을 읽으니 어느덧 두 시진 넘는 시간이 훌쩍 지났다.
“오래 기다리셨습니까?”
마침내 한서로가 내실로 들어왔다.
이레는 그녀를 반갑게 맞이하였다.
“아닙니다. 너무 번거롭게 한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한서로는 손사래를 치며 해사한 웃음을 지었다.
“번거롭다니요. 덕분에 참으로 흥미로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어찌들 하고 있습니까?”
이레의 질문에 한서로는 잔웃음으로 대답했다.
“처음에는 다들 실망하시는 눈치였으나, 곧 넋을 잃고 즐기셨지요.”
이레는 이 씨를 비롯한 여인들의 반응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처음엔 다소 휑한 수월의 모습에 실망하였을 것이다.
화려한 장신구는커녕 그 흔한 비단 한 조각 보이지 않았으니.
하지만 그 삭막한 풍경 속으로 몇 걸음만 더 들어가면, 상상도 하지 못한 진풍경이 펼쳐졌다.
좌우로 늘어선 전각마다 서로 다른 개성과 아름다움을 뽐내는 장신구들과 형형색색의 옷들이 그들을 반겼다.
그야말로 꿈에서도 만난 적 없는 신세계를 마주한 심정이었으리라.
특히, 말로만 듣던 사계노인의 작품들을 경험한 순간, 여인들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을 것이다.
정갈함과 고귀한 기품을 자아내는 치마와 저고리.
눈부신 자태와 영롱한 빛깔의 당혜와 노리개.
“놀라지는 않던가요?”
“조금 놀란 모양입니다.”
담담한 한서로의 표현과 달리 이 씨를 비롯한 며느리들의 놀라움은 조금 정도가 아니었다.
저릿한 감각에 전신을 관통당한 느낌이었다.
어찌 놀라지 않을 수 있을까.
고작 엄지손톱만 한 머리 장신구 하나에 어지간한 시골 기와집 한 채가 오가는 것을.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수월의 바깥쪽부터 안쪽까지 줄을 잇듯 길게 늘어진 여러 전각.
각각의 전각마다 서로 다른 장인들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안쪽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가격은 이전의 전각보다 곱절 이상 높아졌다.
급기야 현실감마저 상실케 하는 명품들의 가치는 마지막 사계노인의 작품에서 정점을 찍었다.
가히 상상을 초월한 가격.
“다들 곤란해했겠군요.”
“무척 당황해하는 표정들이었습니다.”
상상 이상의 가격에 며느리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은 곤란함과 원망의 눈빛을 이 씨에게 쏟아냈다.
하지만 이 씨는 꼿꼿하게 세운 등줄기를 굽히지 않았다.
아니, 되려 그녀는 수월의 내면에 감춰진 진면목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작은댁 며느님은 아무래도 흠뻑 빠지신 모양입니다.”
“빠져요?”
“처음에는 얼핏 가격에 놀라는 눈치였으나, 곧 진귀한 물건에 마음을 빼앗기신 것 같았습니다. 세손빈 마마의 옷을 고르고, 내친김에 본인이 입을 옷도 한 벌 지어 달라 하시더군요.”
“본인의 옷도 짓자 하였다고요?”
“네. 수월에 들어오기 어디 쉬운 일이냐며, 이것저것 노리개며 가락지며, 눈에 보이는 대로 챙기셨습니다.”
“워낙에 자존심 강한 분이시니. 이제 와 못하겠다 할 수 없었던 것일 테지요. 그렇지만…….”
자존심만으로 감당하기엔 엄청난 값이었다.
거기에 이레의 옷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것도 짓겠다?
작금, 홍씨 집안의 가세가 풍요롭다곤 하지만 그리 호호탕탕 원하는 대로 물건을 살 수 있는 형편은 아니었다.
더구나 모든 살림의 출입을 큰 할머님께서 통제하고 있었던 터라.
사치를 부릴 형편이 못되었다.
대체 어떻게 값을 치르려는 것일까?
궁금해하는 이레를 보며 한서로가 입 귀퉁이를 슬쩍 들어 올렸다.
“그분, 장리(長利)를 변통해달라 하시더군요.”
“장리라면…… 고리채가 아닙니까?”
놀란 이레에게 한서로의 음성이 들려왔다.
“처음엔 아니 된다 하였지만, 워낙에 기세 엄엄하게 말씀하시니. 변통해드릴 밖에요.”
“…….”
이레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더니.
그야말로 훗날을 생각하지 않는 행동이었다.
“그 뒷감당을 어찌하려고.”
“감당하지 못하겠지요.”
걱정하는 이레에게 한서로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하지만 갚게 할 생각입니다.”
이레는 눈빛을 빛내는 여인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이 대단한 여장부를 적으로 두지 않아 다행이다.
“참, 제 옷을 지을 옷감은 어느 장인의 비단입니까?”
“사계노인의 비단으로 선택하셨습니다.”
“네?”
사계노인의 비단은 수월에서도 가장 값비싼 비단이었다.
갑자기 이 씨가 이레에게 호의를 품어 그런 것을 선물할 리 없을 테고…….
이레의 속내를 들여다본 듯 한서로가 설명을 덧붙였다.
“감당할 만큼 적당한 가격으로 불렀으니까요. 사계노인의 작품이라는 설명도 하지 않았습니다. 마침 이번 작품은 수수한 편이라, 다들 이름 없는 어느 장인의 옷 정도로 생각하는 눈치였습니다.”
“다른 분도 아닌 사계노인의 작품을 저렴하게 부르다니. 어찌 그러셨습니까?”
“세손빈 마마께서 입으실 옷이니까요.”
“하지만…….”
“애초에 그 옷은 사계노인이 세손빈 마마께 선물하고자 만든 옷이랍니다. 오히려 적당한 가격을 받았으니, 이득이라 할 수 있겠지요.”
“사계노인의 선물이라고요?”
의아함에 이레는 갸우뚱 고개를 기울였다.
사계노인과는 선물을 주고받을 만큼 친밀한 관계가 아니었다.
애초에 단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의 선물이라니.
“그럴 일이 있답니다.”
한서로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떠올렸다.
“대체 무슨 사연입니까?”
거듭 이유를 물었지만, 한서로는 나중에 알게 될 거라며 답을 미루었다.
“어쨌든 오늘 사건으로 당분간은 집안의 감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군요.”
“그렇겠지요.”
한서로의 음성이 조심스럽게 변했다.
“십학사의 움직임은 어떻습니까?”
“근래 별다른 움직임은 없는 것 같습니다. 모이라는 연통도 달리 없고요.”
“조심해야 할 시기로군요.”
거센 폭풍이 몰려오기 직전이 가장 고요한 법이었다.
한서로의 의견에 이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일로 몇 가지 의논할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이야기인지요?”
한서로는 귀를 기울였다.
이레는 십학사와 관련한 앞으로의 일을 그녀와 논의했다.
“맙소사, 어찌 그런 생각을 다 하셨습니까?”
이레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한서로는 여러 번 감탄하고 놀랐다.
또 경우에 따라선 자신의 의견을 첨가하며 집중하였다.
그렇게 두 여인이 고개를 맞대고 열중하다 보니 어느덧 사위가 어두워졌다.
시비(侍婢)가 유등에 불을 올리러 들어오는 모습에 이레는 땅거미가 졌음을 깨달았다.
“이런, 시간이 이리 흘렀는지 몰랐습니다.”
“제가 빈궁마마를 너무 오래 붙들고 있었군요.”
“아닙니다. 덕분에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럼 나는 저하께서 기다리실 것 같으니,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서둘러 자리를 털고 일어난 이레는 한서로의 배웅을 받으며 수월을 나섰다.
아니, 나서려 할 때였다.
“이제 나오시오?”
막 수월의 대문을 나서는 그녀를 반기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심코 고개를 돌린 이레는 두 눈이 동그랗게 떴다.
“저하?”
붉은 노을을 두 어깨에 짊어진 사내가 그녀를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보였다.
형운이었다.
***
높은 기와가 빼곡하게 들어찬 북촌의 골목을 한 쌍의 남녀가 나란히 걷고 있었다.
형운과 이레였다.
“언제부터 기다리고 계셨습니까?”
“여느 날보다 일찍 집으로 돌아갔는데, 당신이 없질 않겠소. 걱정되어 여기저기 물어보니, 안채 사람들과 함께 나갔다 하더군.”
“그래서 찾으러 오신 겁니까?”
“다른 사람은 다 돌아왔는데, 정작 내 사람만은 오지 않으니…….”
형운은 걸음을 멈추고 이레와 시선을 맞췄다.
“찾으러 나서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소?”
담담한 눈동자 속엔 그녀를 향한 깊은 마음이 가득 담겨 있었다.
이레는 고개를 돌리며 쓰개치마를 깊숙하게 눌러썼다.
“어딜 보는 것이오?”
“노을이 참으로 고와서요.”
그녀의 대답에 형운은 소리 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괜스레 먼 허공을 바라보는 이레의 모습이 마냥 사랑스러웠다.
딴에는 태연한 척하지만, 수줍어하는 그녀의 속내를 어찌 모를까.
틀림없이 붉어진 두 뺨을 숨기려는 것일 테지.
“그렇구려. 참으로 어여쁜 노을이오.”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며 형운은 걸음을 옮겼다.
사각, 사각.
치맛자락 끌리는 소리가 그의 발자국과 나란히 들려왔다.
그렇게 말없이 얼마나 걸었을까?
문득 형운의 뇌리로 옛 기억이 떠올랐다.
“예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던 것 같소.”
“언제 말입니까?”
“그대와 처음으로 은자원 밖으로 나왔을 때.”
“단옷날 말씀이군요.”
“그때도 이렇게 말없이 걸었었지.”
“지금처럼 나란히 걷지 않았습니다. 전 뒤에서 조용히 따르고 있었지요.”
“하하, 맞소. 그랬었소.”
그때만 해도 한 사람은 앞에서, 또 한 사람은 뒤에서 따라 걸었다.
“그때는 말없이 걷던 길이 참으로 멀게만 느껴졌었는데 말이오.”
“지금은 아닙니까?”
“당연히 아니오.”
과거의 침묵이 어색함이었다면, 지금의 고요엔 서로를 향한 믿음이 깃들어 있었다.
“오늘 별일 없었소?”
뒤늦게 형운은 이레에 관한 걱정을 풀어놓았다.
그가 직접 수월까지 찾아온 이유, 그녀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다.
워낙에 현명한 여인이기에 그 어떤 위기 앞에서도 지혜롭게 대처할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지만.
마음 한구석에서 자리한 걱정과 염려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언제나 그랬듯, 이레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몇 가지 사소한 사건이 있긴 했지만, 지금은 말끔히 해결되었다.
오히려 뜻하지 않은 선물까지 받게 되었으니.
그야말로 전화위복의 날이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무언가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는 모양이오.”
“대수롭지 않은 일입니다. 일일이 설명하기엔 길고 구차한 얘기이기도 하고요.”
“다행히 밤은 길고, 그대와 함께 있는 시간이 난 조금도 아깝지 않소.”
“여인들 간의 일이라. 장부가 귀에 담을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대의 일이오. 그 어떤 이야기라도 내겐 궁금하고 흥미로울 뿐이오.”
“좋습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각오하십시오. 날이 새도록 주무시지 못할 것입니다.”
이레의 엄포에 형운이 너스레를 떨었다.
“이런, 갑자기 괜한 소리를 한 느낌이군.”
“이제 와 물리실 수 없답니다.”
“그렇소? 하하하.”
두 사람의 웃음이 골목을 울렸다.
그 사이 날이 저물었다.
어둠이 몰려오자, 형운은 이레의 소맷자락 안으로 손을 넣었다.
슬그머니 손등을 쓸어오는 그의 손길을 이레는 거부하지 않았다.
형운과 이레는 그렇게 손을 맞잡은 채 어두워지는 골목을 걸었다.
달콤한 골목 여정의 끝.
익숙한 별채로 가는 길목 어귀로 두 사람의 그림자가 들어섰다.
바로 그때였다.
멀리서 험한 목소리들이 들려왔다.
형운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누군가 잘못을 단단히 한 모양이오.”
“그러게 말입니다.”
“보아하니 집안에서 들려오는 듯한데. 본채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보오.”
“…….”
“저리도 험한 욕을 하는 걸 보면, 틀림없이 심각한 사태가 벌어진 듯한데. 대체 무슨 일인지 모르겠소.”
큰 할머님의 노한 음성과 맏며느리 한 씨의 앓는 소리.
쉬지 않고 들려오는 욕지거리의 주인은 홍인한 대감이었다.
그렇다면…….
짚이는 구석이 있었다.
아마도 오늘 수월에서 벌어진 일이 집안에 전해진 것이 틀림없었다.
이레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시침을 뗐다.
“그러게요. 무슨 일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