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택-왕들의 향연-138화 (138/215)

#138. 돌처럼 딱딱

후두둑, 툭, 툭.

먹장구름 가득 머금었던 새벽하늘이 기어이 굵은 빗방울을 흩뿌렸다.

“어이쿠, 비가 내리네.”

“하필이면 이리 궂은 날, 사람을 부르신답니까.”

“새벽부터 어인 난리람.”

홍인한의 대문 앞에 한 무리의 젊은 여인들이 모여 있었다.

곱게 치장한 여인들의 정체는 홍씨 집안의 며느리들이었다.

어젯밤, 홍인한의 며느리 이 씨의 호출이 있었던 까닭이었다.

날도 궂으니, 어지간한 사람이면 못 들은 척 외면하고 말 것을.

하필이면 삼화당 이 씨의 부름이었다.

근자에 들어 홍씨 집안의 위세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으니.

그중에서도 이 씨의 시부(媤父)인 홍인한의 권세가 유독 대단하였다.

행여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가 유난히 뒤끝 긴 이 씨에게 미운털이라도 박힐까 싶어 꾸역꾸역 모여들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새벽부터 떨어진 비로 어깨는 젖고, 치마 끝은 더러워졌다.

불평불만이 절로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삼화당’이란 현판이 붙은 작은 안채 앞에 다다르자, 언제 그랬냐는 듯 모두 입꼬리를 길게 늘였다.

“삼화당 형님, 저희 왔습니다.”

집안의 막내며느리인 정 씨가 고했다.

“들어들 오시게.”

문이 열리고 병풍 앞에 앉은 이 씨의 모습이 보였다.

“무슨 일 있으셔요?”

막내 정 씨의 걱정하는 말을 셋째 며느리 유 씨가 받았다.

“얼굴색이 안 좋으십니다.”

그들의 말처럼 오늘따라 이 씨의 안색이 창백하였다.

“일은 무슨.”

대답은 그리하지만, 사실 이 씨는 요 며칠 숙면을 취하지 못하였다.

며칠 전, 시아버지 홍인한에게 한바탕 꾸지람을 들었던 까닭이다.

‘고작 그깟 일 하나를 제대로 처리 못 하여 이리 난감한 상황을 만드는 것이냐!’

사방에서 튀어나온 저주 인형으로 인해 모든 계획이 뒤틀리고 말았다며 홍인한은 이 씨를 몰아세웠다.

이 씨는 그 모든 상황이 억울하고 당황스러웠다.

‘그 인형들이 어디서 나온 거지?’

그녀는 홍인한의 지시로 아랫사람들을 부려 은밀하게 형운의 처소에 저주 인형을 숨겨두었다.

예정대로였다면 그 인형으로 인해 형운과 이레는 다시는 빠져나오지 못할 나락으로 떨어져야 했다.

그러나 상황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왕의 침소 인근과 형운의 처소, 단 두 곳에서만 나와야 할 인형이 사방에서 쏟아져나오고, 설상가상 그 인형의 배에서 형운을 뜻하는 글자까지 나왔다.

이 사건으로 인해 본디 모함을 받고 몰락했어야 할 형운이 외려 주목받고 보호받아야 할 존재가 되고 말았다.

이젠 호위까지 두게 되었으니.

시아버지 홍인한은 실패의 책임을 며느리 이 씨에게 돌렸다.

그녀는 변변치 못한 며느리로 단단히 낙인찍히고 말았다.

이 억울함을 어찌할까.

이 분통함을 뉘에게 풀까.

고심하던 이 씨가 이레를 떠올린 건 어젯밤의 일이었다.

가슴에 쌓인 성화에 도통 잠을 이루지 못한 이 씨는 제가 받은 것만큼, 아니 더 많은 화를 이레에게 풀 작심을 하였다.

생각해 보니, 별채에 그 계집이 든 이후로 자꾸만 일이 꼬이고 있었다.

집안에 사람이 잘못 들어온 것이리라.

그러니 일이 자꾸 어그러지는 것이지.

이참에 혹독한 시집살이가 무엇인지 알게 해 주리라.

결심하는 이 씨의 귓가에 막내 정 씨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나저나 형님, 그 소문은 사실입니까?”

“무슨 소문 말인가?”

“주상 전하의 병환이 사뭇 깊다는 소문이 자자합니다.”

셋째 유 씨가 맞장구쳤다.

“그 이야기라면 나도 들었네.”

유 씨가 이 씨를 돌아보았다.

“제례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어쩐답니까?”

이 씨를 대신하여 정 씨가 대답했다.

“아유, 형님도. 어쩌긴, 어째요. 적당한 사람을 뽑아야지요. 안 그렇습니까?”

확인하는 듯한 정 씨의 물음에 이 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렴. 순리대로 합당한 사람이 왕세자가 되어 임금을 대신하여 제례를 치르게 되겠지.”

이 씨의 말에 여인들은 은근한 눈길을 주고받았다.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막내의 물음에 사촌 며느리가 끼어들었다.

“우리 사랑채에선 하엽생의 이름이 자주 거론되던데요.”

“하엽생이라면…….”

“세상에, 그분이 계셨네요.”

뒤늦게 생각난 듯 정 씨가 손뼉을 마주쳤다.

“그러고 보니 그분이 딱입니다.”

“그럼, 그럼. 그분 말고 더 적합한 분이 또 어디 있겠는가?”

“아무렴요, 호호.”

“그렇다면 앞으로의 정국은…….”

정 씨가 이 씨를 보며 말끝을 흐렸다.

“글쎄, 그리 어렵고 복잡한 것을 내가 어찌 알겠는가?”

이 씨의 입가에 피식, 웃음이 맺혔다.

단순한 웃음이었지만, 그 웃음 속에 서린 자신만만한 기색을 눈치 못 챌 사람은 없었다.

‘하엽생이로구나.’

하엽생이 왕세자가 되면, 가뜩이나 반석처럼 견고한 홍인한의 권세가 더욱 단단하고 강건해질 것이니.

또한, 홍인한의 며느리인 이 씨의 권세 또한 지금보다 커질 것이 분명했다.

이 씨의 등줄기가 한껏 꼿꼿해졌다.

그때, 눈치 없는 유 씨가 끼어들었다.

“그러면 별채의 폐세손은 어찌 되는 것이어요?”

유 씨를 바라보는 이 씨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어찌 될 것 같은가?”

“…….”

“역적의 아들로 궁 밖으로 쫓겨났으니, 언감생심 제례는 꿈도 못 꿀 처지일세.”

“그래도 곧 복위된다는 소문도 있고…….”

“어림도 없네. 그런 일은 터무니없는 소문일 뿐.”

찌르는 듯한 눈빛에 유 씨는 죄지은 사람처럼 어깨를 움츠렸다.

그런 유 씨를 쏘아보던 이 씨가 불현듯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이왕 생각이 났으니 한 번 보러 가세.”

“어딜 말입니까?”

모두가 이 씨를 올려다보았다.

“별채 새사람 말일세.”

“지금 그이를 보러 간다고요?”

“그동안 내가 너무 무심했던 것 같네. 이렇게 모인 김에 모두 함께 찾아가 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어찌 생각하시는가?”

의견을 묻는 말이 아니었다.

비로소 여인들은 오늘 이 씨가 자신들을 부른 연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는 게 좋겠습니다.”

“지금이라도 신경을 써야지요.”

그녀들의 입가에도 슬금슬금 심술궂은 미소가 맺혔다.

이 씨의 입가에 서린 것을 쏙 빼다 닮은 미소였다.

***

잠시 후.

“안에 있소?”

안국동 홍 대감의 별채로 집안의 여인들이 찾아왔다.

이레가 형운을 막 배웅한 직후였다.

“어쩐 일이십니까?”

뜻밖의 방문에 이레는 어리둥절한 빛을 감추지 못했다.

정안당에서의 일 이후엔 사람을 만나도 못 본 척 척하더니,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어 찾아왔는지 모를 일이었다.

“서운한 물음이군. 우리가 어디 남이라도 되는가? 잘 지내는지 궁금하여 찾아왔네.”

이 씨가 말하니, 막내며느리가 슬그머니 나섰다.

“언제까지 사람을 세워놓을게요? 손님이 왔으면 자리부터 권하는 것이 법도 아니오?”

이레는 대답 대신 막내며느리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겁니까?”

아직 날도 밝지 않았건만.

갑작스러운 방문에 이레가 다시 물었다.

“불쑥 용무부터 묻는 것은 못 배운 상것들이나 하는 짓이거늘……쯧.”

혼잣말인지, 이레에게 건네는 말인지.

의미 불분명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이 씨는 기어코 말끝을 붙였다.

“이리 객을 홀대하는 것이 그쪽 가풍이오? 아니면 없는 것들의 풍속인가?”

그쪽이라 칭하는 것은 이레의 친정이었다.

없는 것들은 아마도 지난번 찾았던 홍국영의 집안과 이레의 집안을 묶어서 하는 말이 분명했다.

“……안으로 드시지요.”

이레는 이 씨를 비롯한 며느리들을 별채 안으로 들였다.

자리를 만들고, 금정을 시켜 차와 다기를 준비했다.

찻잔에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차를 따르는 모습에 기품이 넘쳤다.

그 모습을 이 씨는 시기 어린 눈으로 노려보았다.

문득, 정안당에서 홍국영에게 망신당한 일이 떠올랐다.

망신도 그런 망신이 없었지.

‘따지고 보면 그때 정안당을 찾았던 것도 저 백여우 같은 계집 때문이 아니었던가?’

되짚어 생각하니 그때의 망신도 모두 이레 탓인 것 같았다.

‘그래, 내가 저 백여우로 인해 이래저래 만신창이가 되었구나.’

원망의 대상이 정해지자, 이 일도 이레 탓, 저 일도 이레 탓이 되었다.

“드시지요.”

이레가 다과와 차를 손님들 앞에 내왔다.

여인들은 정갈하게 내온 차와 음식에 싸늘한 평가부터 남겼다.

“그쪽 친정어머니의 병치레로 집안의 살림살이 변변치 않다더니. 어머니께선 여식에게 예법이나 법도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셨는가 보오. 손님 대접이 이리 부실해서야, 원.”

이 씨의 말에 가시가 가득했다.

이레의 눈빛이 잠시 깊어졌다.

하지만 그런 변화는 잠시에 불과했다.

이내 차분한 신색으로 돌아온 이레는 차를 권하였다.

“대접이 소홀하다 하시니, 송구합니다. 차는 어떠신지요.”

“권하기에 마시기는 하나. 내 워낙 차 맛에 예민한 사람인지라. 변변찮은 맛으로 아침부터 입맛을 버릴까 걱정되오.”

“형님, 언제부터 그리 차 맛에 예민하셨…….”

물색 모르는 셋째 며느리의 말에 이 씨는 눈초리를 사납게 치떴다.

이내 고개를 돌린 이 씨는 이레와 찻잔을 번갈아 보았다.

“모름지기 차는 준비한 정성과 우려낸 마음이라 하였는데, 이곳의 주인이 어떤 마음으로 끓였는지 한번 봅시다.”

이 씨는 찻잔을 기울였다.

혀끝에 닿는 맛을 음미하던 그녀가 와락 미간을 찡그렸다.

“내 이럴 줄 알았소. 쓰고 떫기가 덜 익은 감보다 더하니. 어디 이런 하찮은 것을 손님음식이라고 내어놓는단 말이오?”

이 씨는 입안에 머금은 차를 요란스레 내뱉었다.

그럼에도 혀끝에 맛이 남아있는지 연신 물로 입안을 헹구며 요란을 떨었다.

“이리 입맛에 안 맞을 줄 몰랐습니다.”

미안하고 무안하여 이레는 서둘러 하얀 명주 수건을 이 씨에게 건넸다.

명주 수건으로 입가를 닦던 이 씨가 불현듯 눈가를 가늘게 여몄다.

“나를 얕잡아 보아 이런 싸구려를 대접하는 거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게 아니라면…….”

야살스럽게 입술을 비틀며 이 씨가 말을 이었다.

“겨우 이 정도 안목밖에는 안 되는 사람이었던가. 그러니 저런 몹쓸 차를 고른 것이겠지.”

“…….”

공연한 시비임이 분명함에도 이레는 그 흔한 싫은 기색 한 번 보이지 않았다.

그저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을 뿐이었다.

그 담담함이 이 씨의 심기를 더 비틀어놓았다.

“형편없군, 형편없어. 궁에서 쫓겨나 딱한 사정이 된 사람을 집안으로 들여 별채까지 내어주며 정성을 다하였거늘. 호의를 베풀어도 당연하게만 생각하고, 간단한 대접조차 이리 허술하게 하니.”

막내며느리도 슬며시 끼어들었다.

“다과는 또 어떻고요. 약과는 찰기가 없고, 돌처럼 딱딱하니. 이걸 사람이 먹으라고 내놓은 건지. 어디서 지나가는 개에게 줘도 안 먹을 음식을 구해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쯧쯧 혀를 찬 이 씨가 오만한 표정으로 물었다.

“별채에 갇혀 지내다시피 하는 사람이니, 직접 차를 구했을 리는 없고. 대체 저 형편없는 물건은 어디서 온 것이오? 친정에서 보낸 것이려나?”

묻는 것이 아니라, 확인하려는 질문이었다.

이레와 그 친정을 함께 낮잡아 보려는 셈속.

그런 이 씨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레는 평온하고 단조로운 어조로 짧게 대답했다.

“영빈 마마이십니다.”

***

“그렇군. 영빈이었군. 영빈…….”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던 이 씨가 돌연 행동을 멈췄다.

“지금…… 누구라 하였는가?”

물어보는 이 씨의 말끝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곁에 앉은 막내 정 씨가 더듬거리며 재차 물었다.

“설마, 영빈…… 마마가 궁에 계시는 그 영빈 마마시오?”

“네, 그분이십니다.”

이 씨는 내팽개치다시피 내려놓은 찻잔을 내려다보았다가 다시 이레를 보았다.

‘이 차를 영빈께서?’

창백한 이 씨의 물음에 이레는 부드러운 미소로 화답했다.

‘네, 그분께서.’

이 씨와 며느리들의 낯빛이 노랗게 변했다.

영빈이 누구인가.

비록 왕의 후궁이라 하지만 왕세자의 생모이자 왕세손의 친할머니로 임금의 곁을 가장 오래 지킨 여인이 아닌가.

끔찍한 사건으로 세자를 잃었지만, 엄연히 나라의 큰 어른이었다.

그런 영빈이 직접 내린 차를 싸구려라느니, 형편없다 비하했으니.

만약, 이 이야기가 그분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였다간 미운 살이 단단히 박힐 것이 분명하였다.

아니나 다를까.

내내 담담한 표정을 짓던 이레의 얼굴에 슬픈 기색이 떠올랐다.

“차 맛이 그렇게 형편없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영빈 마마께서 주신 차에 무슨 잘못이 있겠습니까. 모두 차를 잘못 우려낸 저의 탓이겠지요. 일간 영빈 마마를 찾아뵈옵고 오늘의 일을 고하며 가르침을 받겠습니다.”

“고하다니. 설마, 우리끼리 속없이 한 말을 고스란히 전할 생각은 아니겠지요?”

“그럴 리가요.”

이레가 대답했다.

꽉 막혔던 숨통에 겨우 바람구멍이 생겼다.

누렇던 이 씨와 다른 며느리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래도 별채 새사람이 눈치는 있구나.

“다만, 영빈 마마께서도 조금이나마 사정은 아셔야 하니 그저 형편없다, 몹쓸…… 정도만.”

이 씨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그 정도면 다 말하는 셈이 아닌가.

“아! 싸구려라는 말도 하셨군요. 잊지 말고 전해야지. 싸구려, 싸구려…….”

심지어 잊을까 암기까지 해?

그렇게 주변 사람들의 반응과는 무관하게 열심히 노력하던 이레가 다시 한 번 땅이 꺼지라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고 보니 이 다과는 큰 할머님께서 주신 것이었군요. 큰 할머님의 선물에 이상이 없을 리 없으니. 이 또한 미흡한 저의 잘못이겠지요.”

“노, 노마님?”

“저 다과, 큰 할머님께서 내어주신 거란 말이오?”

이번엔 막내며느리를 비롯한 다른 여인들의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

그들의 뇌리로 엄한 표정의 노파가 떠올랐다.

맙소사.

큰 할머님이시라니.

차라리 영빈은 먼 곳에 계시기나 하지.

행여 미운 살이 박힌다 하여도 그분과는 마주칠 일이 드무니, 조심하며 살면 그만이다.

하지만 노마님은 달랐다.

아침마다 얼굴 뵙는 분이고, 가문의 안살림을 도맡아 처리하는 분이시니.

이 집안의 여인치고, 노마님께 호된 경험을 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런 노마님의 눈 밖에 났다간 그야말로 지옥의 가시덤불은 아무것도 아닌 시집살이를 경험하게 될 터였다.

“이, 이보게. 설마, 큰 할머님께도 모든 사정을 전하는 건 아니겠지?”

이 씨가 물었다.

이레가 순진한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이 모두가 제 부족함 때문에 벌어진 일이니, 마땅히 사실을 전하고 가르침을 구해야겠지요.”

“그, 그건 말일세…….”

“찰기가 없고, 돌처럼 딱딱하다. 돌처럼 딱딱, 돌처럼 딱딱. 잊지 말아야지. 노마님께서 주신 약과는 돌처럼 딱딱.”

이레의 혼잣말이 이어질수록 이 씨를 비롯한 며느리들의 눈 밑이 움푹 깊어졌다.

뒤늦게야 그들은 깨달았다.

함정에 빠졌다는 것을.

적당히 면박이나 주고 기세를 꺾으려 벌인 일로 오히려 제대로 약점을 잡힌 셈이었다.

이 일을 어찌하나.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그때였다.

“아무래도 안 되겠습니다.”

이레가 몸을 일으켰다.

“아, 안 되겠다니? 무얼 하려고 그러오?”

“제 부족한 정성으로 영빈 마마와 노마님을 욕되게 하였으니, 잠시도 머뭇거릴 여유가 없습니다. 당장 두 분을 찾아뵙고 사정을 소상히 아뢰고 벌을 청해야겠습니다.”

이 씨는 다급하게 이레의 두 손을 잡았다.

“이런, 성미 급한 사람을 보았나.”

그녀는 애써 다정한 목소리로 이레를 어르고 달랬다.

“고작 이런 일로 수고롭게 직접 행차하려 그러시오.”

“그럴 수 없습니다.”

“좀전의 말은 내 친해지자는 의미로 한 소소한 말장난일 뿐이니, 마음에 담아두지 마시오. 다들 안 그런가?”

이 씨의 어색한 물음에 며느리들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믄요.”

“당연히 그렇지요. 장난입니다, 장난.”

하지만 이레는 좀처럼 마음을 꺾지 않았다.

“다들 다정한 분들이시군요. 하지만 여러분의 말씀은 부족한 저를 위로하려 하는 말임을 제가 어이 모르겠습니까.”

당장 눈물이라도 뿌릴 듯 글썽거리던 이레가 뛰쳐나가려 하였다.

이 씨는 사력을 다해 그 앞을 가로막았다.

“못 가오. 아니, 못 보내오.”

“왜 그러십니까? 비켜 주시지요.”

“그런 것이 아니라……. 그러고 보니 나도 마침 밖으로 나갈 일이 있었으니. 함께 가는 것이 어떻소?”

“볼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집안에 새사람이 들었는데, 여태 아무것도 해준 것이 없었으니. 이참에 내가 선물이라도 하고 싶은데. 무에 갖고 싶은 것은 없소?”

“그런 것 없습니다.”

“욕심도 없으시오. 그럼 옷은 어떻소? 계절이 바뀌면 입성도 바뀌는 것이 당연하니. 내, 가을옷이라도 장만해 주고 싶은데, 어떻소? 아니, 생각난 김에 지금 당장 걸음 하는 것이 좋겠소.”

“아닙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덕분에 나도 옷감 구경도 하고…….”

이 씨가 간곡하게 청하자, 고집을 부리던 이레도 못 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정히 그렇다고 하신다면.”

찰나의 순간.

이 씨는 보고 말았다.

고개를 끄덕이는 이레의 얼굴, 그녀의 두 눈에 가득했던 슬픈 기색이 씻은 듯이 사라지는 모습을…….

뒤늦은 깨달음에 이 씨는 아차 하였다.

‘이제 보니 이 여우가…….’

당했다.

별채의 새사람은 순진한 것도, 어리숙한 여인도 아니었다.

말귀를 못 알아먹는 고집불통은 더더욱 아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연기하고 있었을 뿐이다.

뒤늦게 이레의 본색을 알아차린 이 씨는 당황했다.

그런 이 씨에게 이레는 잠시의 쉴 틈도 주지 않았다.

그녀는 대못을 박듯 쐐기를 박았다.

“가을옷을 선물하신다고 하셨지요?”

“그, 그게…….”

“설마, 마음에도 없는 약조를 하신 것인지요?”

“그럴 리가 있겠소.”

당연히 선물해 줄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그저 영빈과 노마님에게 당장 달려나갈 듯한 이레를 막기 위해 횡설수설하던 중에 내뱉은 허튼소리에 불과하였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 말을 들은 사람이 너무 많았다.

체면을 떠올린 이 씨는 어색한 표정으로 마지못해 대답했다.

“내 어찌 공연한 소릴 입에 올리겠소. 집안의 새사람에게 그깟 옷 한 벌 못 해주겠소, 호호호.”

이 씨는 웃음을 터트렸다.

영혼 없는 웃음.

그 허탈하고 공허한 미소에 이레는 해맑게 웃었다.

“어떤 옷을 사주실지, 참으로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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