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 대체 무얼 가르치신 겁니까?
바람이 푸릇한 새벽을 끌고 날아왔다.
서탁을 갈무리한 이레는 뒤늦게 자리에 누웠다.
유난히 길고 다난했던 하루였던지라.
몸이 천근 만 근 무거웠다.
자리에 누우면 당장에라도 깊고 곤한 잠의 나락으로 빠져들 줄 알았다.
하지만 너무 피곤했던 탓일까?
도무지 잠이 오지 않는다.
자야 하는데, 자고 싶은데…….
뻑뻑한 눈을 감고 억지 잠을 청하러 산양 수를 헤아려보았다.
삼백하고도 서른여섯 마리를 세다 기어이 자리를 떨치고 일어났다.
다시 뜬 그녀의 눈에 검푸른 문풍지가 들어왔다.
제법 시간이 흘렀거니 생각했건만, 여전히 새벽 언저리였다.
날이 밝으려면 아직 한참이나 남았구나.
목 밑까지 차오른 한숨을 뱉으며 이레는 턱을 괬다.
모든 일이 다 끝난 건 아니지만, 당장 해결해야 할 일들은 순순 무난하게 매듭지었다.
형운을 음해하려던 자들의 계략일랑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막을 수 있었다.
어디 막기만 하였을까?
되려 역이용하여 상황을 형운에게 유리하게 만들었으니.
반갑고도 기쁜 일이었다.
그러나 마음 끝이 여전히 무겁다.
아무래도…….
이레는 지푸라기 인형 속에 넣은 형운의 이름을 떠올린다.
잠시였고,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해도.
그를 향한 미안함과 죄책감이 가슴에 자잘한 매듭을 지었다.
이레는 가만 창문을 열어 불 꺼진 사랑을 바라보았다.
툇마루보다 한 뼘 낮은 디딤돌은 텅 비어 있었다.
늘 가지런하게 놓였던 형운의 신이 보이지 않았다.
아직 아니 돌아오신 모양이다.
이레는 궁이 있는 허공으로 시선을 돌렸다.
아마도 은자원, 그 낡고 허름한 곳에서 뒷일을 계획하고 계실 터이지.
궁금증과 걱정이 함께 그녀의 작은 뇌리를 뒤덮었다.
형운을 떠올리니, 정신은 얼음물로 씻고 나온 듯 더욱 말똥거렸다.
작은 방안에서 전전긍긍하려니, 시름이 더 쌓이는 듯하였다.
이레는 매무시를 다듬었다.
빠꼼, 문을 열고 나와 소리 없이 툇마루를 딛고 섰다.
디딤돌에 놓인 신을 신고 마당으로 내려설 때까지 작은 숨결 한 번 토하지 않았다.
깊은 잠에 빠진 세상은 더없이 고요했다.
적막한 마당을 가로질러 대문을 열었다.
삐이이익.
유난히 크게 들리는 대문 소리에 이레는 화들짝 놀랐다. 행여 잠귀 밝은 누군가 깼을까, 그녀는 서둘러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어디서도 인기척은 들리지 않았다.
살금살금 집을 나온 이레는 버릇처럼 대문 앞을 서성거렸다.
궁에서 나와 이곳, 안국동으로 왔지만.
형운과 이레의 생활은 궁에서보다 더 갑갑하였다.
늘 누군가 몰래 지켜보는 시선이 있었던 터라, 겉으론 자유로워도 실상 자유롭지 않았다.
하지만 문지기의 거짓 고변 이후, 형운을 음해하려던 자들의 기세가 눈에 띄게 낮아졌다.
여기저기서 느껴지던 기척도 오늘은 말끔하였다.
저지른 죄가 있으니 한동안은 꼬리를 말고 있으리라.
그러니 당분간은 자유롭다.
이리 이른 새벽에 그녀가 형운을 기다린다 하여도 누구의 귀에도 들어가지 않을 것이며, 형운이 밤새 돌아오지 않았다고 하여도 아무도 알지 못하리라.
다만…….
언제쯤이면 돌아오시려나.
늘 정해진 시간, 같은 장소에 있던 형운이 아니 보이니.
마음이 헛헛하였다.
지금껏 헛꿈을 꾼 것처럼 불안한 심정마저 들었다.
이레는 왕옥에서 나올 때 그와 깍지 꼈던 손을 펼쳤다.
그의 온기.
자신을 바라보던 그의 다정한 눈빛.
귓등을 파고들던 그 사람의 자상한 음성.
그립다 생각하면 더더욱 그리워진다 하였던가.
그의 따듯함이, 다정함이, 자상함이 지금 당장 아쉽고 그리웠다.
어미를 기다리는 아이처럼 마음이 조급해졌다.
서성대는 걸음이 종종거린다.
그러는 동안에도 형운은 나타나지 않았다.
좀처럼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설마, 오늘 아니 들어오시려나?
먼 산 너머로 붉은 태양이 수줍은 정수리를 내보였다.
어느 집에선가 새벽 닭이 홰를 쳤다.
덩달아 마을 개들이 컹컹 차례로 짖어댔다.
고요하던 새벽이 조금씩 분주해지고 있었다.
“집안사람들 깨기 전에 오셔야 할 텐데…….”
조바심에 목이 절로 길어질 찰나.
“……!”
기다리고 기다리던 형운의 긴 그림자가 골목으로 들어섰다.
***
이레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안개처럼 내걸렸다.
“은백…….”
형운을 부르는 이레의 목소리에 옅은 습기가 어렸다.
늘 부르는 이름이었건만.
이상스레 아릿하고 가슴 벅차 목이 메었다.
숨 끝이 자잘하게 흔들렸다.
마음을 누르며 밭은 숨을 한껏 삼키는 동안, 형운은 성큼성큼 거침없이 이레의 앞으로 다가왔다.
“여기서 뭐하오?”
지척까지 다가온 형운이 물었다.
이레에게도 긴 하루였지만, 형운에겐 더더욱 길고 고된 하루였으리라.
그녀를 내려다보는 그의 낯빛이 꺼칠했다.
“날 기다렸소?”
다시 묻는 그에게 이레는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언제 올 줄 알고.”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이레의 대답에 형운은 그녀의 발밑으로 시선을 내렸다.
얼마나 서성거렸는지, 그녀의 발치에 반들반들 윤기가 흘렀다.
“이제는 거짓도 곧잘 하오.”
“…….”
순식간에 들통 난 진실에 무색하여 이레는 속눈썹을 아래로 내렸다.
“곤하거늘, 쉬질 않고서.”
허리를 굽힌 형운이 이레의 안색을 살폈다.
“무에, 걱정되는 것이라도 있소?”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나와 눈을 맞추지 않는 것이오? 내게 서운한 것이라도 있소?”
“없습니다.”
“그럼 내 얼굴 좀 보시오.”
“보고 있습니다.”
말과는 달리 이레의 눈길은 먼 허공에 닿아 있었다.
여전히 고개를 돌리지 못하는 그녀를 그가 갸웃한 눈길로 응시했다.
“왜 나를 아니 보는 것이오? 아니, 못 보는 것이오. 혹시…….”
문득 형운의 말끄트머리가 흐려진다.
“생각해보니 나는 그대에게 서운한 것이 있소.”
느닷없는 태세 전환에 이레는 내내 외면하던 눈길을 그에게로 돌렸다.
“무어가요?”
형운을 올려다보며 그녀가 물었다.
금세 상황을 역전시킨 그가 굽혔던 허리를 천천히 폈다.
팔짱을 낀 형운이 이레를 내려다보았다.
그러곤 입을 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서운하고 또 서운했었다오.”
“…….”
역시나!
이레의 생각이 딱 멈췄다.
아무리 급박한 상황이라고 하나, 저주 인형에 그의 이름을 새겨 넣었으니. 서운하겠지. 괘씸하겠지. 마음 상하였겠지.
하지만 그때는 그 방도 외에는 생각나지 않았다.
아니, 아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하더라도 다른 방도를 생각해 냈어야 옳았다.
아니, 아니다.
그 방법 외엔 없었다.
작은 마음에 연신 갈등이 일었다.
이리저리 홀로 갈대처럼 휘청대는 그를 형운이 물끄러미 응시했다.
반짝, 그의 눈에 장난기 가득한 이채가 떠올랐다.
이레의 표정에 고스란히 묻어나는 속내가 안쓰러우면서도 귀여웠다.
서둘러 마음 달래주고 싶다가도 걱정하는 저 표정을 좀 더 보고 싶다는 짓궂은 마음이 솟구쳤다.
“어찌하면 이 마음을 풀 수 있을까?”
이레는 고개만 숙였다.
“그 마음, 풀릴 길이 있다면 뭐든 하겠습니다.”
“진심이오?”
“말씀만 하세요. 저하께서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 들어 드리겠습니다.”
“그럼…….”
형운이 이레의 양 손목을 잡았다.
“내가 원하는 건…….”
“…….”
“이것이오.”
말과 함께 그는 그녀를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은백…… 뭐 하시는 겁니까?”
한순간 형운의 너른 품속에 갇힌 이레가 할 수 있는 최대한 상체를 뒤로 젖히며 물었다.
“서운했던 마음을 푸는 중이오.”
“서운했던 마음이 무엇이기에……?”
“아무리 생각해도 왕옥에서 나올 때 이리해야 했는데. 이리하고 싶었건만.”
형운은 이레의 이마와 콧방울, 그리고 그녀의 입술에 입맞춤했다.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 오직 형운의 눈에만 보이는 인장(印章).
무색무형의 낙인은 촘촘하게, 그리고 집요하게 찍혔다.
푸릇한 봄과 눅진한 여름을 한껏 머금은 과실처럼 형운의 입술 끝에 닿는 이레는 새콤하고도 달콤하였다.
그 누구에게도 내어주지 않겠다는 듯.
그 누구와도 나누지 못하겠다는 듯.
형운은 제 품속의 이레를 더욱 단단히 죄어 안았다.
한 줌밖에 되지 않는 여린 여인을 향한 갈증과 기갈에 그의 머릿속이 아득했다.
그녀의 아릿한 손길이 닿을 때마다 벼락을 맞은 듯 등줄기가 저릿저릿해졌다.
이레가 내뱉는 날숨을 제 들숨으로 들이마실 땐 물속을 유영하는 부유감이 느껴졌다.
찬란하고도 신비로운 세계.
작은 여인이 품은 작은 우주에 그는 연신 감탄하고 감복한다.
그러기에 기꺼이 고개를 숙였다.
세상 가장 높은 곳에 군림한다 하여도 오직 이 여인에게만은 이길 수 없으리라.
너와 나의 경계가 무너졌다.
그가 그녀였고, 그녀가 곧 그가 되었다.
형운이 느낀 감정이 그대로 이레에게 전이되었다.
이레가 겪는 환희가 형운을 기쁘게 하였다.
담벼락에 아침 새 한 쌍이 앉아 두 사람을 훔쳐보았다.
작은 미물의 시선일랑 아랑곳하지 않은 채 두 연인은 서로에게 몰두하였다.
황금빛 태양이 담벼락을 노랗게 물들인 후에야 형운은 이레를 놓아주었다.
한바탕 드잡이라도 한 듯 길게 숨을 토하며 이레가 묻는다.
“서운하셨다는 것이…… 이것이었습니까?”
“그럼 무엇이겠소?”
“저는…… 저는…….”
“무에 다른 것이 있소?”
되묻는 형운의 눈동자에 진심이 가득했다.
한참을 그 눈빛을 응시하던 이레는 풀썩 웃음을 흘렸다.
내내 긴장하고 걱정하던 마음이 맥없이 허물어졌다.
괜찮다, 괜찮다.
겉으로만 그런 줄 알았는데.
저주 인형 같은 건 형운의 머릿속에선 말끔하게 사라진 모양이다.
다행이다, 안도하는 이레의 손목을 형운이 잡아당긴다.
“왜 그러십니까?”
“아까 약조하지 않았소. 원하는 건 다 들어주겠다고.”
“그래서…….”
이레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지금까지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녀의 말에 형운이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아직 멀었소. 내 서운함을 풀기엔, 어림없소.”
집 안으로 들어가려는 그를 이레가 잡았다.
“그래서 무얼 하시려고요?”
“연모하는 여인과 사내가 만나면 무얼 할 것 같소?”
조금은 뻔뻔한 대답에 이레는 저도 모르게 볼이 붉어졌다.
“날이 밝았습니다.”
“아직 새벽이슬은 채 마르지 않았소.”
“곧 사람들이 깨어날 겁니다.”
“다른 사람이 무슨 상관이오. 난 오늘 유난히 피곤하니, 오랜만에 늑장이라는 것을 부려보고 싶소.”
“…….”
이레는 어이없다는 눈빛으로 형운을 응시했다.
“많이 달라지셨습니다.”
“그간 배움이 달라졌으니, 언행이 달라지는 것도 당연하지.”
“배움이라 하시면…… 설마, 서탁에서 이런 것도 배우신 겁니까?”
제왕학만 배우시는 것이 아니었나요?
“이보다 더한 것도 배웠소.”
“더한 것이라면…….”
불쑥, 형운이 이레의 코밑으로 얼굴을 들이댔다.
그러곤 작은 음성으로 속삭였다.
“은랑이 상상하는 그 이상의 것도.”
“…….”
“원한다면 죄다 보여줄 수 있소.”
“……!”
놀라 동그래진 눈으로 이레는 형운을 올려다보았다.
할아버지들, 대체 이분께 무얼 가르치신 겁니까?
***
노곤한 바람이 불어왔다.
사방이 훤히 뚫린 정자에 앉아 아침을 맞이하는 정후겸의 곁으로 어린 계집종이 다가왔다.
“그분께서 다녀가셨습니다.”
정후겸의 앞에 화려한 수가 놓인 잿빛 도포가 놓였다.
서늘해지는 계절이라, 그에 맞춤한 겉옷이다.
금방이라도 여문 과일즙을 뱉어낼 듯 생생한 포도송이가 자수 놓인 화려한 도포.
정후겸은 느른한 눈빛으로 도포를 응시했다.
무릎걸음으로 정자에서 물러가는 어린 계집종과 엇갈리며 형형색색 화사하게 치장한 기녀가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힐끗, 곁눈질로 도포를 훑는 여인은 다름 아닌 사슴이었다.
“생모께서 다녀가신 모양이네요.”
단박에 도포를 지은 이를 알아차린 사슴은 간단하게 차린 다과상을 정후겸의 앞에 내려놓았다.
생모(生母)라는 말에도 정후겸의 얼굴에는 작은 변화도 없었다.
자신에게 살과 뼈와 피를 나눠준 목숨의 본질.
하지만 땅 위에 살아가는 목숨붙이가 어찌 저 하나뿐일까.
오직 하루만 살고 죽을 하루살이도 목숨붙이고, 길가에 나부끼는 들꽃도 목숨을 부지하는 것은 마찬가지니.
사람의 모양새로 태어났으니 운이 좋았다고 해야 하나, 비천한 어부의 아들로 태어났으니 운이 나쁘다고 해야 하나.
하늘과 땅이 열린 이래.
높고 낮음과 천함과 귀함을 구분하지 않는 곳이 어디 있을까.
특히 사람의 세상에 그 경계가 뚜렷하니.
본디 생명을 나눠준 어미와 아비의 아들로 자랐다면, 언감생심 정후겸은 이런 옷일랑 만져볼 수도 없으리라.
어느 바닷가에서 염전 밭이나 일구고 있을 테지.
그것도 아니면 고기 잡는 그물망을 손질하고 있으려나.
그 어린 나이에도 소금처럼 하얗게 부서져 버리고 싶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기에 멀고 먼 일가붙이.
촌수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할 집안의 양자, 그것도 청상이 된 옹주의 양자가 될 기회가 생겼다기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본디 집안에서는 그의 사촌 형을 옹주의 아들로 보내려 하였다.
정후겸은 사촌 형이 먹는 음식에 배앓이 약초를 슬쩍 흘렸다.
유난히 위장 약했던 형은 그 정도 탈에도 자리 보전한 채 일어나지 못했다.
“제가 가겠습니다.”
어리지만, 눈치 빠르고 재주 비상했던 정후겸이 제 발로 나섰을 때 집안에선 두말 없니 보내주었다.
결국, 그는 비루한 바닷가를 뒤로 한 채 도성으로 향했다.
처음 찾은 도성.
그중에서도 옹주가 사는 대궐은 그야말로 신선들의 세상이었다.
그간 동리를 드나드는 보부상에게 귀동냥으로 들은 가락으로 어림짐작하였건만.
궁궐은 그가 상상하고 짐작했던 것 이상으로 대단하였다.
또한, 무서운 곳이기도 하였다.
자신을 향한 배척과 사나운 눈길.
옹주의 양자이지만, 그의 타고난 본질은 어부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고 난 뒤 은근히 멸시하던 사람들.
정후겸은 외톨이었고, 이방인이었다.
감히 이곳에 어울릴 수 없는 천한 것.
그러나 정후겸은 어리석지 않았다.
그는 오직 옹주의 마음을 사로잡는 방도에만 몰두하였다.
화완은 정후겸의 양모(養母)였고, 삶의 목표였으며 방식이었다.
그는 먹는 것, 입는 것, 자고, 생각하고, 말하는 것.
하다못해 사소한 습관까지도 화완옹주의 기호에 맞췄다.
웃으라면 웃고, 울라면 우는 아이.
양어미가 좋아하는 걸음걸이와 생김새로 꾸몄고, 상투를 틀고 갓을 쓰는 방식은 물론이고 세조대, 깃과 앞섶의 날렵한 모양까지도 세심하게 신경 썼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고 어느 사이 그는 도성의 사대부들은 물론이고 조정 대신들 위에 앉아 인사를 받게 되었다.
얼마 전까지 기세 사나운 왕세자로 인해 귀찮은 일이 생기곤 하였으나.
그마저도 이제는 정리되었으니.
더는 그의 앞을 막아설 자는 없었다.
이제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이 잘 풀릴 일만 남아 있었다.
그런데…….
툭.
정후겸은 시슴이 우려낸 말끔한 찻물을 음미했다.
“곧 가을이 오려나 봅니다.”
그의 곁에 앉은 사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녹아(鹿娥).
사슴의 다른 이름.
그러나 녹아의 진짜 이름은 아무도 모른다.
그녀의 이름처럼 녹아의 진짜 모습을 아는 이도 아무도 없었다.
그저 정후겸에게 녹아는 녹아일 뿐이다.
어느 날은 십학사의 사슴으로.
또 어느 땐 궁의 궁녀나 상궁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또 다른 어느 날은 음전한 반가의 규수가 되기도 하였고, 오늘처럼 규모 단단한 기루의 주인 노릇을 할 때도 있었다.
서로 온전한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다.
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건 정후겸 역시 마찬가지라.
정후겸도 녹아도 서로에게 무얼 묻거나, 궁금해하지 않았다.
늘 그렇듯 그들은 그저 마주 앉아 하염없이 시간만 보낼 뿐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되었을까.
정후겸은 느른하게 턱을 괸 채 바람에 흔들리는 들꽃을 바라보았다.
“어찌 사람에겐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꽃만 바라보십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저 꽃으로 태어날 걸 그랬습니다.”
그의 빈 찻잔에 차를 따르며 녹아가 말했다.
커다란 가체에 붉은 산호와 호박, 굵은 진주로 한껏 치장한 녹아의 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꽃보다 그대가 더 어여쁜 것을.”
“어여쁘면 무얼 합니까. 보아주는 이가 없는 걸요.”
“원하면 그 어떤 사람의 마음이라도 취하는 그대이니. 보아주는 이가 없는 것이 아니라, 보여주고 싶은 이가 없었겠지.”
“그랬던가요?”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듯 중얼거리던 녹아는 정후겸의 시선을 좇아 들꽃을 바라보았다.
“어제 폐세손이 왕옥을 나왔다고 하더이다.”
“따로 손을 쓰려 했건만. 한발 늦었지.”
“그분의 환심을 사려 하셨습니까?”
“적의 적은 동지가 될 수도 있으니까.”
“적의 적은 훗날 제거해야 할 적일 뿐입니다.”
“…….”
“그나저나 그분의 수완이 보통이 아닌 모양입니다, 보기와는 다르게.”
녹아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깃들었다.
힐끗, 곁눈으로 쓸어보던 정후겸은 찻잔을 내려놓았다.
“대단한 사람이지. 타고난 재능도 대단하건만, 거기에 노력까지 하니. 내가 질투하는 단 한 사람이지. 하지만 이번 일은……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의 수완일 지도 모른다는 느낌이야.”
“다른 사람이라 하시면……?”
녹아가 물었다.
정후겸은 대답 대신 찻잔을 기울였다.
더는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이리라.
눈치 빠른 여인은 서둘러 말머리를 돌렸다.
“앞으로 어찌 될까요?”
“글쎄. 이번에는 어찌어찌 상황을 모면하였다고 하지만. 그자들이 순순히 물러날 리 없겠지.”
후, 입안에 고인 술향기를 낮게 뱉으며 정후겸은 먼 곳을 바라보았다.
“싸움이 격해지겠지. 지금처럼 점잖지만은 않은. 사방에서 피가 흐르는 싸움이…….”
그의 말이 채 끝나기 전.
한 여인이 두 사람이 있는 정자로 다가왔다.
계단을 오른 여인이 녹아의 귀에 무언가를 속닥거렸다.
사슴, 녹아의 붉은 입술을 길게 늘였다.
“주상 전하께서 침소를 나오신 모양입니다.”
정후겸은 특유의 매력적인 웃음을 떠올렸다.
“이제야 좀 흥미로워지겠구나.”
***
“전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김상로의 비통한 목소리가 대전을 왕왕 울렸다.
“전하를 대신하여 제례를 주관할 자를 물색하라는 말씀, 소신은 받잡을 수 없나이다. 하오니, 전하. 부디 명을 거두어주시옵소서.”
피를 토하는 듯한 그의 외침이 신호라도 되는 듯 다른 신하들 역시 머리를 바닥으로 조아렸다.
“하명을 거두어주옵소서.”
“통촉하옵소서, 전하.”
왕은 등받이에 기댄 몸을 바로 폈다.
주름 가득한 왕의 얼굴에는 병색이 완연했다.
진득한 가래 붙은 숨결을 내뱉지만 갑갑한 듯 왕은 연신 가슴을 쳤다. 그래도 쉬이 답답증이 풀리지 않자 물을 한 모금 머금었다.
물조차도 겨우 넘긴 왕이 입을 열었다.
“경들은 내가 보이지 않는가?”
힘없는 음성이 대전 바닥에 길게 깔렸다.
“내 병이 하루가 다르게 깊어지고 있으니. 이렇게 앉아있는 것조차 힘이 드는구나. 그러니 서둘러 다음을 준비하는 것이……쿨럭.”
왕이 기침을 흘리는 그 찰나.
김상로가 다시 목청을 돋웠다.
“전하, 전하의 용안이 하루가 다르게 밝아지고 있사온데. 병색이 깊어진다는 것이 어인 말씀이신지요. 어의가 전하길, 전하의 병환이 어제보다 오늘이 좋으며, 오늘보다 내일 더 차도가 보일 것이니. 이번 종묘제례를 치르시기엔 아무 문제 없다 하였나이다. 하오니, 전하…….”
쾅!
말꼬리 잡듯 끝없이 이어지는 만류에 기어이 왕은 팔을 기댄 보료를 내리쳤다.
“내 병은 내가 아느니. 어의가 아무리 괜찮다고 하면 무얼 하겠느냐. 내가 견뎌내기 어렵다고 하질 않는가. 내가 죽겠다질 않아!”
임금의 버럭 역정에 대신에 고요가 감돌았다.
팽팽하게 가라앉은 침묵을 깬 것은 홍인한이었다.
“성심을 가라앉히시옵소서, 전하. 혹여 옥체 상하실까 저어되옵나이다.”
“그리 나를 생각한다면, 쿨럭쿨럭…….”
왕은 한참이나 기침을 토했다.
오랜 후에야 겨우 가래 섞인 기침을 멈춘 왕이 대신들을 응시했다.
“경들은 나를 대신하여 제례를 주관할 이를 잘 찾아보라.”
강경한 의지.
할 수 없다는 듯 김상로를 비롯한 삼정승은 물론 대전에 모인 이들이 안타까운 목소리를 냈다.
“명을 받잡겠나이다.”
“전하의 뜻에 따르겠나이다.”
하지만 대전의 바닥에 닿을 듯 조아린 몇몇 얼굴엔 의미심장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각기 원하는 바가 있는 터라.
닳을 대로 닳은 정치가들의 눈동자에 반들반들한 욕망이 서렸다.
원하는 답을 들은 왕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상선이 한걸음에 달려와 왕을 부축했다.
머리를 조아린 신하들을 지나쳐 대전을 나서던 왕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그는 신하들을 향해 묵직한 경고를 잊지 않았다.
“한 집안의 제사를 관장하는 일에도 많은 법도와 규율을 따르는 것이 마땅하니. 한 나라의 제례를 주관하는 이를 정하는 일이 어찌 쉬울까. 무엇보다 경들은 명분과 정통성을 잊어선 아니 된다. 그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야.”
명분과 정통성.
일순간 누군가는 웃었고, 누군가는 실망하였다.
그러나 종내에 누가 웃게 될지는 아무도 짐작할 수 없었다.
***
홍인한은 초조하게 수염을 쓸어내렸다.
대전에서 물러난 그는 쉬이 궁을 나서지 못했다.
왕의 마지막 목소리가 귓가를 쟁쟁하게 메아리치고 있었다.
명분과 정통성.
왕께선 여전히 폐세손을 염두에 두고 있음이렷다.
왕의 심중을 확인하니, 어제의 실패가 더욱 안타깝고 아쉬울 따름이다.
저주 인형으로 형운을 함정에 빠트린 절호의 기회였다.
아비의 길을 아들이 따르게 할 수 있었건만.
다 잡은 고기를 그대로 놓아주고 말았다.
아무래도 방법을 달리해야겠구나.
그는 왕의 침전으로 향했다.
“대감 아니십니까.”
왕의 침전 근처를 서성이자 곧 누군가가 그를 찾아왔다.
“주상께선 침소 드셨는가?”
“올리는 탕약을 드시고 잠시 조각 잠에 듭시었습니다.”
대답하는 이는 언제나 임금의 곁을 떠나지 않는 상선이었다.
그는 왕의 그림자 노릇을 자청하며 드나드는 이를 엄격히 따지고 가렸다.
왕에게 전할 말과 전하지 않아야 할 문서들을 가려 뽑았다.
화완옹주의 명을 받아 문안례를 올리는 형운을 가로막았고, 조정의 대신들과 결탁하여 폐세손과 왕 사이를 이간질하였다.
왕은 세상과 단절된 채 옹주와 상선의 이야기에만 귀 기울였다.
당연히 늘 할아버지를 찾아오는 세손의 존재 또한 알지 못하였다.
높고 단단한 성벽에 갇힌 채 왕은 홀로 죽어가고 있었다.
자신에게 감히 반기를 든 아들을 미워했고 또한 그리워했다.
자신을 찾지 않는 형운에게 죄책감을 느꼈고, 또한 서운하였다.
사랑과 증오, 애정과 미움의 감정이 왕을 뒤흔들었다.
그럴 때마다 상선은 왕의 감정을 한쪽으로 기울게 하였다.
사랑보다는 증오로.
애정보다는 미움으로 감정의 추가 기울도록 속살거렸다.
“조만간 하엽생을 입궁토록 할 것이니. 적당한 기회를 알려주시게.”
홍인한의 말에 상선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조만간 상선의 사가로 엄청난 재물이 들어갈 것이다.
“사람을 보내겠나이다. 그런데…… 그건 어찌 된 일입니까?”
상선은 어제의 사건을 입에 올렸다.
“쉽게 생각했는데. 마냥 쉽게 생각할 상대가 아닌가 보이.”
“허면, 앞으로 어찌하실 생각이시옵니까?”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지.”
홍인한의 눈동자에 붉은빛이 번뜩였다.
“제례가 멀지 않았으니. 폐세손은 필시 무언가 행동에 나설 터. 그쪽에서 움직임을 보일 때, 그때…….”
그는 섬뜩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두 번 다시 실수하지 않을 것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