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택-왕들의 향연-136화 (136/215)

#136. 신룡파미(神龍波尾)

“금부에서 나왔다. 당장 비켜라!”

문밖에서 기세 형형한 호통이 들려왔다.

의금부에서 나온 도사와 수사관들이었다.

금정이 그들의 앞을 막아섰다.

“대체 뭐하시는 분들인데, 이 야심한 밤에 남의 방을 함부로 들어가려 하는 겁니까?”

“어허, 금부에서 나왔다 하질 않았느냐.”

“금부건 은부건, 안 됩니다. 여기엔 한 발도 들일 수 없습니다.”

방문 밖에서 금정이 사력을 다해 사람들을 막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름 시간을 끌긴 했지만, 오래 버틸 순 없으리라.

작금의 상황을 벗어나긴 위해 서둘러 궁리를 마쳐야 했다.

그러나 정작 방안의 이레는 우뚝 굳어있었다.

형운이 기거하는 사랑에서 발견한 뜻밖의 물건 때문이었다.

제웅.

짚으로 만든 사람 모양의 인형.

허술하게 만들어진 지푸라기 인형은 붉은 부적으로 만들어진 옷을 입고 있었다.

주상 전하의 침소 근처에서 발견되어 궁 안팎을 발칵 뒤집어놓았다는 바로 그 인형이 분명했다.

‘음모다.’

불길한 예감.

이레의 콧잔등이 땀이 돋았다.

형운이 이런 졸렬한 일을 하였을 리 만무했다.

누군가 폐세손인 형운을 음해하기 위해 꾸민 흉계.

‘어찌한다?’

이 삿된 물건을 당장 없애야 했다.

하지만 집안을 수색하러 온 자들이 문밖에서 버티고 있었다.

“당장 비켜라!”

물러나지 않는 금정을 위협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장에라도 닫힌 문을 부수고 들어올 기세.

‘무언가 방도를 찾아야 해.’

숨길 수도, 없애버릴 수도 없는 재액(災厄).

그렇다면 어찌해야 할까.

그때, 이레의 눈에 서탁이 눈에 들어왔다.

그 위에 펼쳐진 눈처럼 하얀 종이.

그리고 붓과 먹, 벼루.

‘숨길 수도, 없앨 수도 없다면…….’

엉뚱한 생각이 그녀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것은 진정 말도 안 되는 도박과도 같은 일이었다.

하지만 망설일 여유가 없었다.

이레는 급히 서탁 앞에 앉았다.

흰 종이를 잘라 작게 만들고 급히 한 글자를 쓴다.

그러곤 그것을 접어 짚으로 만든 인형 속에 집어넣었다.

일련의 작업을 끝낸 이레는 인형을 본래의 자리에 되돌려 놓았다.

그녀는 아무 일도 없다는 낯빛으로 방문을 열었다.

“이 야밤에 무슨 소란이오?”

떨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의금부에서 나온 도사와 수사관들의 삼엄한 눈빛 속으로 이레는 당당하게 걸어 들어갔다.

*

-옳거니. 숨길 수도, 그렇다고 그 자리에서 없앨 수도 없으니, 차라리 뒷일을 도모한 것이로구나. 기가 막힌 묘책이로다.

-아이야. 힘들었겠구나. 무사하여 참으로 다행이다.

-상황이 위급하였을 터인데. 현명한 선택이었다.

상, 화, 악이 차례로 이레를 다독이고 칭찬했다.

그 급한 상황에서 이레의 대처는 분명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런데 말이다…….

껄껄 웃던 상이 뒤늦게 의문을 제기했다.

-한데, 왜 하필 그 녀석의 이름을 쓴 게냐? 기왕이면 다른 녀석의 이름을 쓰는 게 좋지 않았겠느냐?

-그 또한 도박이었습니다.

이레의 붓이 서탁 위로 미끄러졌다.

그녀는 기억은 다시 과거로 향했다.

캄캄한 왕옥.

조정 대신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형운의 거처에서 나온 지푸라기 인형을 헤집던 그 순간.

저주 인형의 몸속에서 ‘산(祘)’이라는 이름이 적힌 종이가 나온 바로 그때로…….

*

“이, 이럴 리 없다.”

당황한 홍인한의 목소리가 왕옥을 가로질렀다.

궁궐 곳곳에서 발견된 저주 인형에서 페세손의 이름이 적힌 종이가 나왔다.

분명 이럴 리 없는데.

이래선 안 되는 일인데.

그의 계획과는 사뭇 다른 상황이었다.

형운의 거처에서 발견된 저주 인형마저 '산'이라는 글이 쓰인 종이가 나왔던 까닭이다.

“이럴 리 없을 터인데…….”

임금이 머무는 곳과 상관없는 곳에서 인형이 발견되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만 하여도 홍인한은 수하들이 과잉 충성심으로 벌인 짓이라 생각했다.

도성 곳곳에서 수많은 인형이 발견되었다는 보고에도, 그 인형들의 몸에서 엉뚱한 이름이 나왔을 때만 해도 놀라기는 했어도 당황하지는 않았다.

필시 그의 계획을 눈치챈 누군가의 수작이리라.

다행히 홍인한은 이 상황을 다시 역전할 수단이 있었다.

형운의 거처에서 찾은 지푸라기 인형.

그 인형을 뒤져 아무것도 없음을 보이면, 이 혼란한 상황을 정리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홍인한의 예상과 달리 문제의 그 인형의 배 속에서도 ‘산’의 이름이 적힌 종이가 나오고 말았다.

도사와 수사관들이 별채로 들이닥쳤을 때, 이레가 급히 써넣은 바로 그 종이었다.

하지만 그런 속사정을 홍인한이 알 리 없었다.

황당함을 넘어 망연자실함이 그의 얼굴에 떠올랐다.

한편, 모든 저주 인형에서 똑같은 이름이 나온 것을 확인한 사람들은 불편한 헛기침을 연발하였다.

“허허. 인형들에서 폐세손의 이름이 나오다니.”

“지금까지 전혀 엉뚱한 분을 오해하고 있었구려.”

도성을 발칵 뒤집어놓은 저주 인형.

어사대와 의금부가 사력을 다해 저주 인형의 배후를 쫓은 이유는 그 저주의 대상이 주상 전하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 인형에게서 나온 것은 ‘산’이라는 엉뚱한 글자.

저주의 표적은 왕이 아닌 폐세손인 형운이었다.

일방적으로 형운을 몰아붙이던 김상로는 말할 것도 없고,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않던 다른 이들도 의외의 사태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건 무언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되었소.”

홍인한이 소리쳤다.

그의 계획대로라면, 형운의 처소에서 인형이 나온 시점에서 모든 일이 마무리되어야 했다.

눈엣가시 같던 형운은 돌이킬 수 없는 몰락의 구렁텅이로 떨어졌어야만 했다.

하지만 수렁에 빠진 건 형운이 아닌 자신이었다.

“이럴 리가. 이럴 리가 없는데…….”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리는 홍인한의 앞으로 이레가 성큼 다가섰다.

“무엇이 이럴 리 없다는 것인지요?”

뒤늦게 자신의 실언을 깨달은 홍인한은 급히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당혹감이 그대로 묻어나는 억지웃음이었다.

“다, 당연히 잘못되었다는 뜻으로 한 말이오. 다른 분도 아닌 폐세손이 주상 전하를 저주하였다니. 천부당만부당한 모함이 분명하오. 아니 그렇소이까? 허허허.”

사태를 수습하려 애썼지만, 홍인한을 보는 사람들의 눈길이 곱지 않았다.

“어쨌든 이로써 오해가 풀려 다행이오. 안 그렇소?”

홍인한은 김상로에게 도움의 눈길을 보냈다.

김상로는 수하들에게 화살을 돌렸다.

“멍청한 놈들. 지금까지 엉뚱한 곳을 뒤지고 다녔다는 말이 아닌가. 대체 일들을 어떻게 처리하는 게야!”

역정을 내던 김상로는 슬며시 왕옥을 빠져나갔다.

“어험.”

“일이 이렇게 된 것이었군.”

“대체 어떤 자들이 이런 발칙한 소행을 저질렀는지, 원.”

어색한 헛기침과 함께 조정의 대신들도 김상로의 뒤를 따라 도망치듯 물러갔다.

“송구합니다. 소인들이 큰 무례를 저질렀나이다.”

의금부도사와 수사관들이 형운과 이레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묵묵히 사태를 지켜보던 형운이 몸을 일으켰다.

“이제 돌아가도 되겠느냐?”

건조한 그의 물음에 의금부의 도사와 수사관들이 좌우로 물러서며 길을 비켜주었다.

성큼 문을 향해 걸음을 옮기던 형운이 이레를 돌아보았다.

“무얼 하고 있소?”

어쩐 일인지 이레는 그의 뒤를 따르지 않았다.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는 그녀를 향해 형운이 손을 내밀었다.

“갑시다.”

형운의 부름에도 이레는 치맛자락만 쥘 뿐, 좀처럼 발길을 옮기지 못했다.

아니, 상황이 모두 끝난 그 시점부터 그녀는 형운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미안함 때문이었다.

아무리 급박한 상황이라 하였지만, 삿된 일을 하였다.

저주 인형에 그의 이름을 넣었다.

질시와 증오, 역겨운 경멸과 천박한 악의로 가득한 인형에.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끔찍한 저주로 얼룩진 물건에.

순수하고도 올곧은 그의 이름을 자신의 손으로 새겨넣고 말았다.

이레의 가슴에 무거운 추가 매달렸다.

슬픔과 죄책감에 고개조차 들 수 없었다.

그때, 따스한 온기가 치맛자락을 잡은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감쌌다.

“이레야…….”

감미로운 목소리가 귓가를 적신다.

화들짝 놀란 이레가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다가온 형운이 따스한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만 가자꾸나.”

“저하.”

그 안온한 눈빛에 마음이 놓인 나머지 이레는 그렁그렁 눈물벽을 세우고 말았다.

“저하.”

“어찌 그러느냐.”

“저하, 저는…….”

형운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소리 없이 흘러내리는 이레의 눈물을 닦아준 그가 그녀의 두 손을 잡아끌듯 당겼다.

그러곤 어리고 여린 것을 달래듯 다정하게 속삭였다.

“날 혼자 가게 할 테냐?”

이레는 고개를 저었다.

절대, 홀로 가게 하지 않을 겁니다.

언젠가 저하께서 제게 약조하였듯.

저 또한 저하를 홀로 외롭게 하지 않겠습니다.

이레는 형운과 맞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서로의 손가락이 하나하나 차례로 맞물렸다.

마주한 다섯 손가락이 완벽한 쌍을 이뤄 깍지를 꼈다.

단단히 여며진 두 사람의 손엔 조금의 빈틈도 찾을 수 없었다.

*

-결국 그렇게 해결이 되었구나.

화의 글이 서탁 위에 펼쳐졌다.

비록 화할아버지의 표정을 직접 볼 수 없었지만,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음을 이레는 알 수 있었다.

예도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참으로 신묘한 방법이었다. 칭찬하지 않을 수 없구나.

-할아버지들께서 알려주신 대로 했을 뿐입니다.

겸손한 이레의 대답에 상은 껄껄 웃었다.

-아무렴, 누가 가르쳤는데. 그 정도는 해야지. 한데, 그 이후엔 어찌 되었느냐? 가만있자. 그러고 보니 불손이 짚 인형을 만들었다고 거짓을 고변한 놈이 있다 하였지? 그놈은 어찌 되었느냐?

-낌새를 눈치채고 도주한 모양입니다.

밀고자는 별채의 문앞을 지키던 게으른 문지기였다.

뒤늦게 의금부 도사와 수사관들이 문지기를 잡으러 나섰지만, 이미 그는 사라지고 없었다.

-어쩌면 영영 찾지 못할 수도 있겠구나.

-이런 일을 벌일 정도로 간 큰 자들이라면, 꼬리를 자르고도 남음이니.

악과 예는 문지기의 불행한 결말을 예측했다.

-그런데 말이다.

상이 다시 의문을 떠올렸다.

-왜 저주 인형에 하필 그 녀석의 이름을 넣었느냐?

-아! 아직 그 대답을 하지 않았군요.

-워낙에 뒷이야기가 흥미진진하여 잠자코 듣고 있었다만. 나는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는구나.

-아직도 눈치를 못 챘느냐?

-무어냐? 악. 넌 알고 있단 말이냐?

-당연히 알고 있지.

-무언데?

-머리가 있으니 생각이란 걸 해봐라. 그 인형에 은백의 이름을 적어 넣은 이후의 일이 어찌 될지.

-그걸 모르니까 하는 소리 아니냐.

-잘 생각해 봐.

-모른다는데, 뭘 자꾸 생각해 보라는 것이야? 설마, 악. 너도 모르면서 아는 척하는 건 아니겠지?

-답답하구나. 저주 인형에서 폐세손의 이름이 나왔다. 하나도 아니고, 도성 곳곳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면 어찌 되겠느냐?

악의 필체에 답답함이 가득했다.

-어떤 일이 벌어지는데? 뭔데? 대체 그 이유가 뭐냔 말이다. 그러지 말고 속 시원하게 한번 말해 봐.

상은 조급증을 보이며 재촉했지만, 악은 끝내 알려주지 않았다.

-찬찬히 생각해보면 알게 될 것이다. 그보다 나도 궁금한 것이 있단다.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상과 악의 다툼을 얼굴로 지켜보던 이레가 반문했다.

-악 할아버지, 무엇이 궁금하십니까?

-도성 곳곳에서 발견된 지푸라기 인형 말이다. 그건 어찌한 것이냐. 너 혼자서 그 많은 것을 다 만들어서 사방에 뿌렸을 리도 없을 테고.

-여러 사람의 힘을 빌렸습니다.

-짧은 시간 동안 그와 같은 일을 은밀히 해냈으니, 평범한 사람은 아니었겠구나.

“네. 결코, 평범한 분들이 아니었습니다.”

이레가 도움을 청한 사람은 만사여의 그리고 팽례들이었다.

*

집 안 곳곳을 수색한 금부의 수사관들이 물러간 후.

이레는 곧장 만사여의를 찾아갔다.

“이 밤이 무슨 일입니까?”

“부탁이 있습니다. 이처럼 생긴 짚 인형을 만들 수 있겠습니까?”

이레는 그림이 그려진 종이를 한서로에게 건넸다.

형운의 방에서 발견된 짚 인형을 그린 그림이었다.

한서로는 이유 같은 것은 묻지 않았다.

그저…….

“어느 정도 필요하십니까?”

이레를 따르는 것으로 자신의 신뢰를 증명했다.

“많을수록 좋습니다. 다만, 은밀히 진행되어야 합니다.”

“염려놓으세요.”

한서로는 곧장 사람들을 풀어 장인들을 수소문했다.

만사여의의 역량은 상계뿐만이 아니라 공방과 장인들에게까지 뻗어 있었다.

반 시진도 채 지나지 않아 손재주가 탁월한 장인들이 수월로 몰려들었다.

그들에 의해 형운의 거처에서 발견된 인형과 흡사한 짚 인형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만사여의에게 짚 인형의 제작을 부탁한 이레는 이번엔 남산골에 위치한 하월집으로 향했다.

보부상에게 유명한 하월집엔 사실 남들이 알지 못하는 비밀이 숨겨져 있었다.

그곳이 바로 조선 팔도 모든 팽례들을 단속하고 관리하는 팽례들의 집이라는 것이다.

이레와 인연이 깊은 팽례 강현보의 모친, 하월네.

시전의 노상에서 이것저것 파는 노파가 사실은 팽례들의 수장이었다.

“수월에서 만든 짚 인형들을 도성 곳곳에, 은밀히 뿌리고 싶습니다.”

하월네는 주름진 눈으로 물었다.

“은밀히라……. 아무도 모르게 해야 한단 말이로군요.”

“그렇습니다. 쉽지 않은 일인데, 가능하겠습니까?”

하월네는 대답 대신 곁에 앉은 외아들 강현보에게 물었다.

“어찌 생각하느냐?”

곧 강현보의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팽례가 못하면 세상 그 누구도 그 일을 해내지 못할 겁니다.”

*

-그렇게 여러 사람의 도움을 받아 인형들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이레의 설명에 화, 상은 탄성을 아끼지 않았다.

-허어. 상계와 팽례들의 도움을 받았다라…….

-만사 뭐시기는 짐작했지만, 팽례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곧이어 예의 글이 나타났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하였느니. 지극한 정성과 고귀한 인연이 너와 은백을 살렸구나.

“참으로 고마운 분들이지요.”

이레는 만사여의와 하월네, 강현보를 떠올리며 눈을 감았다.

그들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그녀의 계획은 절대 성공할 수 없었으리라.

참으로 귀하고 소중한 인연이었다.

-다 좋다. 그런데 그 망할 인형에 불손의 이름을 적은 이유는 언제 말해 줄 거냐? 그리고 이 좋은 날, 불손 그 녀석은 어딜 가서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거야?

상이 안달했다.

이레는 조곤조곤 달래듯 글을 썼다.

-그분께선 지금 소중한 분들을 만나고 계십니다.

-소중한 분들? 그게 누군데? 어떤 작자를 만나는데, 감히 우릴 제쳐놓는단 말이냐?

***

새벽이 머지않은 시각.

변변한 현판조차 없는 전각, 은자원으로 은밀한 그림자들이 속속 들어섰다.

하나둘 모인 그림자는 모두 다섯.

마지막 다섯 번째 그림자가 은자원으로 들어서자 앞서 도착한 자들의 고개가 일제히 바닥을 향했다.

“저하.”

눈물 섞인 사람들의 환대.

형운은 가슴이 뭉클하였다.

“그만 일어나라.”

사내들이 몸을 일으켰다.

형운은 일일이 그들의 손을 맞잡았다.

“그대들과 재회할 수 있게 되어 얼마나 반가운지 모른다.”

“저하를 제대로 모시지 못한 죄, 달게 받겠나이다.”

“그것이 어디 최 내관의 잘못이겠느냐.”

형운은 최 내관에 이어 최치성과 홍인모의 손을 잡았다.

“이전에는 원하면 언제나 너희를 볼 수 있었는데, 이젠 이렇게 은밀히 만날 수 밖에 없구나.”

형운의 목소리엔 슬픔이 가득 묻어있었다.

“앞으로는 그러실 필요 없으실 것이옵니다.”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번째 사내.

천장에 달린 창으로 스며든 달빛.

그 희뿌연 달빛에 고개를 내민 사내의 얼굴은 준수하였다.

홍국영이었다.

“은랑이 그러더군. 그대의 도움으로 왕옥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고.”

“미천한 잔재주였을 뿐이옵니다.”

홍국영의 어울리지 않는 겸손에 형운은 소리 내어 웃었다.

“허락 없이는 개미 한 마리 그곳을 드나들 수 없음을 내 어찌 모를까. 그런 곳에 사람을 몰래 들여보내는 수완이 미천하다면, 세상은 이미 사기꾼들의 것이 되었을 것이다. 이번 일은 그대의 도움이 컸다.”

“과찬이시옵니다.”

“그보다…….”

형운이 말을 이었다.

“좀 전의 이야기, 무슨 뜻이냐? 더는 그럴 필요가 없다니?”

“저주 인형으로 모든 이의 이목이 세손 저하께 집중되어 있었사옵니다. 그 와중에 진실이 밝혀졌으니…….”

저주 인형이 왕이 아닌 폐세손을 저주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물론, 형운을 구하기 위한 이레의 노력 덕분이었다.

그녀의 계획은 하나만 제외하면 완벽했다.

왕의 침소 근처에서 발견된 인형.

가장 처음 발견된 그 인형만큼은 아무런 조작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이후에 벌어진 사건이 워낙 대단하여, 그것에 관한 의문은 소리소문없이 묻혀버리고 말았다.

형운이 말했다.

“그 일로 날 주목하게 되었겠군.”

홍인한을 비롯한 조정의 대신들은 어떻게든 백성들에게 형운의 존재를 지우려 노력했다.

하지만 이번 사건으로 말미암아 형운의 존재가 명확하게 각인되었다.

뜻밖의 일로 아비를 잃고 궁에서 쫓겨난 비운의 왕세손.

그것으로도 모자라 왕세손을 위해하는 흉측한 저주.

이것은 형운에게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되었다.

이레가 노린 한 수.

지푸라기 인형 속에 형운의 이름을 넣은 것도 모두 이런 이유였다.

“그 인형들이 세손 저하를 지목하였으니, 그들은 내키지 않아도 세손 저하를 지키는 척이라도 해야 할 것이옵니다.”

“그래서?”

형운의 물음에 홍국영은 최치성과 홍인모에게 눈길을 주었다.

“기왕이면 편한 사람들이 곁에 있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형운의 입가가 길게 늘여졌다.

최치성과 홍인모.

그를 지키기 위해 그들이 돌아온다.

“잃어버린 칼들이 마침내 내 품으로 돌아오는구나.”

“저하!”

“참으로 기쁘옵니다.”

최치성과 홍인모의 얼굴은 이미 눈물로 가득한 지 오래였다.

형운은 그들의 등을 두드리며 이레를 떠올렸다.

지혜롭고 현명한 여인.

그녀 덕분에 헤어진 사람들을 곁으로 불러들일 수 있게 되었다.

“저하.”

재회의 여운을 음미하던 형운이 고개를 돌려 홍국영을 보았다.

형운을 부르는 홍국영의 음성에 은근한 기색이 서려 있었다.

“때가 되었습니다.”

“……!”

형운의 표정이 단단해졌다.

“시기가 결정되었는가?”

“그렇사옵니다.”

형운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마침내 기다리고 기다리던 때가 도래하였다.

이제 싸움이 시작되리라.

진짜 싸움.

물속에 숨어 있던 용이 꼬리를 보였으니.

날아오르리라.

제대로…….

누구도 범접하지 못하도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