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 산(祘)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이레의 목소리가 어두운 왕옥을 가득 메웠다.
주상 전하를 저주하는 지푸라기 인형.
그 삿된 물건이 형운의 거처에서 발견되었다.
모든 정황이 형운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왕옥에 나타난 이레는 그 모든 증좌와 정황을 단호하게 부정했다.
확신에 찬 그녀의 당당함에 조정 대신들은 잠시간 어리둥절하였다.
그다음엔 침묵했다.
그 누구도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지독한 침묵을 깨트린 것은 홍인한이었다.
“허허허.”
마른 웃음을 흘리던 홍인한이 측은한 눈으로 이레를 보았다.
“우리 손부(孫婦)의 마음이 아주 급했는가 보오.”
없는 말을 지어내는 것을 보니.
굳이 입 밖으로 끄집어내지 않아도 뒷말을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어조였다. 많은 사람이 무심코 고개를 끄덕였다.
증명해 보이겠다는 이레의 이야기가 구석에 몰린 사람의 억지처럼 느껴졌던 까닭이다.
사람들의 부정적인 반응에도 이레는 흔들리지 않았다.
“이번 일과 저하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아니, 외려 저분께선 피해자입니다.”
모두의 시선이 이레에게로 집중되었다.
“더는 못 봐주겠소이다.”
좌의정 김상로가 격노한 얼굴로 끼어들었다.
그가 주위를 둘러보며 목청을 돋웠다.
“언제까지 이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듣고 있을 셈이오?”
“억지가 아닙니다. 저는 진실을 알리려…….”
“주상전하의 침전 담벼락에서 저주 인형이 발견되었소. 똑같은 인형이 폐세손의 거처에서도 나왔소. 이처럼 확실한 증좌가 있는데, 그런 말이 나올 수 있단 말이오?”
김상로의 질문은 칼끝처럼 서늘하였다.
이레는 그를 직시했다.
“그 저주 인형이 주상전하를 저주한 것이 분명합니까?”
“무어라?”
“그것을 폐세손께서 만들었다는 분명한 증좌가 있느냐 물었습니다.”
어이없다는 듯 김상로는 헛웃음을 뱉었다.
“허허, 한때는 이 나라의 세손빈이었던 분인지라. 그간의 정리(情理)를 보아 잠자코 있었으나, 가당치도 않은 억설을 계속하니 더는 참지 못하겠소이다. 계속 이리 억설을 부린다면 나도 더는 참지 못할 것이외다. 뭣들 하느냐! 저분을 당장 밖으로 모시지 않고.”
김상로의 호통에 군졸들이 움직였다.
그러나 이레는 여전히 물러서지 않았다.
두 사람의 팽팽한 기세 싸움 사이로 홍인한이 끼어들었다.
“좌의정 대감, 어찌 이러십니까? 지아비를 걱정하는 마음에 조금 실수를 한 것을 가지고.”
“도가 지나치니 하는 말이 아닙니까?”
“그러지 마시고, 너그럽게 생각해 주시지요.”
김상로를 말리는 시늉을 하던 홍인한은 이번엔 이레를 돌아보았다.
“세손을 걱정하는 마음, 내 충분히 알고도 남음이니. 이곳의 일은 우리에게 맡기고 손부는 그만 돌아가오.”
“그럴 수 없습니다.”
“내 생각에도 이쯤에서 그만두는 것이 옳은 듯합니다.”
이번에 나선 사람은 깐깐한 인상의 반백 노인이었다.
대사간 서명선.
노론 일색인 조정에 남은 몇 안 되는 소론에 속한 관료였다.
‘청렴결백’이라는 글자를 사람의 형상으로 빚어놓은 듯한 그는 평소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기로 유명하였다.
그런 서명선이 이 자리에 있는 이유는 하나였다.
왕을 저주하였다는 이번 사건의 진위를 밝히고, 폐위된 왕세손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그런 그가 보기에도 이레의 행동은 사건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 뿐이었다.
“이번 일은 엉클어진 실타래처럼 쉽게 해결할 수 없어 보입니다. 그러니 조급하게 생각하지 마시고, 그만 돌아가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모두가 퇴석을 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레는 물러날 수 없었다.
“조사가 진행 중이라 하셨습니까? 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한 사건이라 쉽게 결론에 이를 수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그럼 어찌하여 저분을 범인으로 단정하듯 말하는 건지요?”
이레의 말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김상로와 홍인한, 그 밖의 사람들 역시 형운을 두둔하는 이레의 말을 부정하였다.
다들 입 밖으로 대놓고 말하지 않았지만, 형운을 이번 사건의 배후로 단정 짓고 있었던 것이다.
홍인한이 어색한 분위기를 깨며 나섰다.
“답답한 마음, 내 모르는 바 아니나. 보다시피 정황이 정황인 만큼…….”
“그럼, 이것은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홍인한의 말을 칼 자르듯 자른 이레가 소매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지켜보던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건……!”
“이번에 전하의 침전 담벼락에서 발견된 제웅이 아니외까.”
놀랍게도 이레가 꺼낸 물건을 짚으로 만든 인형이었다.
형운의 처소에서 발견된 것과 한치도 다름없는 바로 그 저주 인형이었다.
***
“저것은 증좌로 발견된 인형이 아니오?”
“저 요사한 물건이 어찌…….”
왕옥이 술렁거렸다.
김상로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쳤다.
“증좌로 압수한 물품에까지 손을 댄 것이오? 이 죄가 얼마나 무거운지 알고는 있으시오?”
서슬푸른 노호에도 이레는 담담했다.
“훔친 것이 아닙니다.”
“그럼, 어찌하여 그 물건이 그곳에 있단 말이오?”
김상로의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등 뒤에서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좌의정 대감.”
김상로를 따라온 의금부도사였다.
그는 소반을 들고 있었는데, 그 소반 위에 지푸라기 인형이 놓여있었다. 형운의 처소에서 발견된 그 제웅이었다.
“증좌는 이곳에 있사옵니다.”
“무어라? 하면…….”
김상로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이레가 내려놓은 인형을 보았다.
“저것은 또 무어란 말이냐?”
이레는 의금부도사의 소반 위에 자신이 가져온 인형을 내려놓았다.
소반 위에 놓인 두 제웅.
두 제웅의 모양은 쌍둥이처럼 흡사하였다.
서명선이 물었다.
“이 망측한 물건을 어디에서 구하셨습니까?”
“안국동 별채 담장 아래에서 발견한 겁니다.”
형운과 이레가 머무는 별채 담장에서 또다시 발견된 지푸라기 인형.
사람들의 얼굴에 어리둥절한 표정이 떠올랐다.
폐세손의 거처 밖에서도 발견된 인형.
다들 이 사실을 무얼 의미하는지 몰라 당혹스러워했다.
그중 가장 당황한 사람은 홍인한이었다.
‘본가 별채 담장에서 저주 인형이 또 발견되었다고?’
폐세손의 거처에 적당히 숨겨두라 하였거늘.
아무래도 아랫것들이 일을 지나치게 열심히 한 모양이다.
금부의 도사들이 저주 인형을 발견하지 못할 상황을 대비하여 다른 곳에도 인형을 준비한 모양일 터.
‘과함은 모자람만 못한 것을.’
수하들의 실책에 그는 낮게 혀를 찼다.
그러나 그뿐이다.
제웅이 하나 더 발견되었다고 하나,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폐세손이 머무는 별채에서 제웅이 더 발견됨으로써 상황은 더욱더 어려워진 셈이다.
홍인한은 이레의 어리석음에 코웃음을 쳤다.
간택 과정에서 보인 총명함이 범상치 않다 다들 한목소리로 말하였는데. 지금 보니 모두 헛소문이로구나.
그는 유유자적한 표정으로 작금의 상황을 관망하였다.
아니나다를까.
김상로의 목소리가 엄해졌다.
“새로운 증좌 역시 같은 장소에서 발견되었으니, 이것으로 정황은 더욱 확실해진 셈이오.”
왕옥의 분위기가 차갑게 냉각되었다.
“그만 물러가는 게 좋을 것 같소.”
홍인한이 짐짓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레에게 말했다.
하지만 이레는 그 음성과 눈빛에 어린 웃음과 조롱을 읽을 수 있었다.
다른 이들의 눈초리 또한 매섭기 그지없었다.
그 눈길 하나하나가 칼로 전신을 후벼 파는 것만 같았다.
이레는 이를 악물었다.
아직 물러날 수 없다.
그녀의 계획은 이제 막 시작했을 뿐이다.
형운의 억울함을 풀고, 이 모든 상황을 반전시킬 계획.
“대체 언제까지 이리 버틸 것이오!”
김상로가 얼굴이 일그러졌다.
지금쯤이면 소식이 올 때가 되었는데…….
그녀는 왕옥의 입구를 연신 살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뭣들 하느냐? 저 여인을 당장 끌어내라.”
좌의정 김상로의 명에 군졸들이 이레의 양팔을 잡았다.
바로 그때였다.
왕옥의 계단을 오르는 요란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금부의 수사관이 어두운 왕옥으로 들어섰다.
“금오랑!”
조정 대신들에게 예를 취한 금부의 수사관이 의금부도사에게 다가가 작게 무언가를 속삭였다.
일순, 의금부도사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김상로가 그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냐?”
눈치를 살피던 의금부도사는 수하가 가져온 물건들을 소반 위로 올렸다.
짚으로 만든 인형이었다.
그런데 수사관이 가져온 인형은 하나가 아니었다.
하나, 둘, 셋, 넷…….
어느새 소반 위에 짚 인형이 수북하게 쌓였다.
문제는 짚 인형이 그것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옥사 안으로 의금부 수사관들의 발길이 이어졌고, 그때마다 저주 인형의 수는 점점 많아졌다.
처음엔 헛웃음만 흘리던 사람들의 얼굴이 점점 경악과 황망함으로 일그러졌다.
“이것들이 다 무엇이냐?”
“도성 곳곳에서 발견된 제웅들이옵니다.”
“무어라?”
지금까지 쌓인 것을 얼핏 세어도 서른 개가 넘었다.
옥사 안이 술렁였다.
지금까지 형운을 이번 사건의 용의자로 특정한 이유는 그의 거처에서 저주 인형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한데, 그 인형이 도성 곳곳에서 나왔다면.
형운을 배후로 지목한 추론 자체가 근간부터 흔들리게 되는 것이다.
“하아, 아무래도 세손의 아픔이 컸던 모양이오.”
사람들 사이로 홍인한이 나섰다.
그는 내심 수십 개나 쏟아져 나온 제웅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한 상태였다. 하지만 상황을 이대로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어떻게든 형운을 범인으로 몰아야 했다.
“아무리 상심하여도 그렇지. 주상 전하를 원망하는 인형을 어찌 이리 많이 만들었단 말인가?”
걱정하는 듯 말하고 있었지만, 이번에도 그는 형운을 범인으로 지목하고 있었다.
이레가 그에 맞섰다.
“이 인형이 주상 전하를 원망하는 마음으로 만들었다는 증거가 있습니까?”
“짚 인형이 옷처럼 덮고 있는 부적의 색이 붉은색이니. 당연히 주상 전하의 용포를 뜻하는 것이지요. 게다가 처음 발견된 곳도 주상 전하의 침소 근처이니. 주상 전하를 저주하려는 것이 틀림없소.”
이레가 홍인한의 말을 조목조목 반론했다.
“부적은 본디 붉은 안료로 그립니다. 그리고 인형이 발견된 곳은 주상 전하의 침소 담벼락만이 아닙니다.”
홍인한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럼, 이 인형들이 무슨 용도로 만들어졌단 말이오?”
이레는 대답 대신 형운을 돌아보았다.
그녀의 까만 눈동자에는 그를 향한 걱정으로 가득했다.
‘제가 저하의 허락을 받지 않고 일을 도모하였습니다. 괜찮겠습니까?’
‘괜찮다.’
형운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다.
그대가 무엇을 하였건.
무슨 일을 할 생각이든.
이레야, 널 믿는다.
무한한 신뢰가 담긴 형운의 눈빛에 안심한 이레는 다시 조정 대신들을 향해 돌아섰다.
그녀는 수북하게 쌓인 짚 인형 중 하나를 들어 속을 열었다.
놀랍게도 짚으로 만든 인형의 심장 부근에 한 장의 종이가 나왔다.
“중요한 증좌요. 이리 내주시오.”
김상로가 이레의 손에서 종이를 빼앗듯이 가져갔다.
새끼줄처럼 꼬깃꼬깃 꼬인 종이를 다급히 펼쳤다.
그는 종이에 쓰인 글씨를 살폈다.
산(祘).
폐세손인 형운을 뜻하는 글씨였다.
홍인한을 비롯한 조정 대신들이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글씨.
이레가 처연하게 말했다.
“무려 두 개의 짚 인형이 별채에서 발견되었지요. 이 짚 인형들이 진정 누군가를 저주하는 목적으로 만들어졌다면, 그 속에서 나온 이름은 무얼 뜻하는 것이겠습니까?”
짚 인형은 주상 전하가 아닌 형운을 저주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놀라운 사실에 사람들은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단 한 사람.
홍인한의 반응은 달랐다.
“이런 터무니 없는 일을 보았나.”
천만뜻밖의 상황에 당황한 홍인한은 다급히 다른 짚 인형들을 살폈다.
하나같이 ‘산’이라는 한 글자가 적힌 종이들이 나왔다.
“이럴 리가…… 이럴 리가 없다.”
이 짚 인형은 그가 형운을 치워버리기 위해 세운 계략이었다.
형운을 음해하고, 왕의 마지막 한 자락 미련마저 지워내기 위해 꾸민 기막힌 모략.
한데, 그 인형에서 엉뚱하게 폐세손의 이름이 나오다니.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무언가 잘못되었다. 이렇게 될 수는 없단 말이다.”
붉게 충혈된 눈을 희번덕거리던 그의 눈에 형운의 거처에서 발견된 짚 인형이 눈에 띄었다.
‘저것이다.’
그가 지시한 것은 왕의 침소 근처에 놓은 짚 인형과 형운의 거처에 놓은 짚 인형 두 개.
나머지 인형은 어떻게 된 연유인지 모른다.
홍인한은 이레를 노려보았다.
‘설마 저 요사한 계집이 꾸민 짓인가?’
시종일관 당당하였던 이레의 모습이 마음이 걸렸다.
“이건 누군가의 수작이 분명하오. 사건을 덮기 위해 누군가 뒤늦게 수작을 부린 것이 틀림없소.”
그는 이레의 소행으로 확신했다.
그때, 서명선이 나섰다.
“그렇다면 안국동 별채에서 발견된 인형을 살펴봄이 어떻겠습니까. 듣자하니 사건이 일어나고 바로 금부의 도사들이 그곳으로 갔다 하니. 무언가 수작을 부릴 여유가 없었을 것이 아니오?”
서명선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홍인한이 나서서 소반에 담긴 짚 인형을 헤집었다.
지금까지 폐세손의 안위를 걱정하고 염려하던 기색은 온데간데없었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연기하던 것을 까맣게 잊은 채 홍인한은 문제의 인형을 손에 들었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서명선의 말이 옳다.
무슨 수로 이 수많은 인형을 만들었는지 몰라도, 처음 발견한 이 인형만큼은 어떤 수작도 할 수 없었으리라.
그가 짚으로 만든 인형의 배를 열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그곳엔…….
‘산’.
형운을 뜻하는 글자가 적힌 종이가 나왔다.
***
-푸하하하하하하! 그놈들, 꼴사납게 되었구나.
상의 웃음이 서탁 위를 가로질렀다.
화와 예도 제 손녀의 일 마냥 흥겨워했다.
-네 이야기를 듣는 내내 조마조마하였는데, 아이야. 참으로 잘해냈구나.
-더없이 잘하였구나.
상이 물었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한 거냐? 이야기를 들어보니 분명 네가 한 일인 듯한데. 어떻게 그 인형에서 그런 글씨가 나올 수 있었던 것이냐? 아니, 애초에 다른 이름도 아닌, 하필이면 그 재수 없는 인형에 불손, 그 녀석의 이름을 적은 이유가 뭐냐?
화도 궁금히 여겼다.
-아이야. 나도 궁금하구나.
악이 슬며시 끼어들었다.
-난 도성 곳곳에서 발견된 짚 인형들이 더 궁금하다. 설마 네가 그 짧은 시간 동안 그 많은 짚 인형을 만들었을 리도 없고. 대체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던 것이냐?
이레가 미소를 지으며 붓을 들었다.
-그것이 어떻게 된 일이냐면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