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 제웅
푸른 계절이 지나갔다.
무더운 여름을 견뎌낸 나뭇잎들이 하나둘, 붉은색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녹음으로 가득했던 궁의 후원에 가을 야생화가 수줍은 얼굴을 드러냈다.
화완옹주는 아직 꽃잎을 펼치지 못한 여린 봉오리를 살며시 어루만졌다.
“참으로 신기하지 않소. 아무도 살피는 자가 없음에도 이리 장하게 피고 지길 반복하니…….”
혼잣말처럼 읊조린 화완이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뒤로 한 사내가 그림자처럼 따르고 있었다.
자신의 발자취를 따라 걷는 사내를 화완은 밝은 표정으로 응시했다.
“몸은 괜찮소?”
“…….”
“많이 상하였다고 들었는데. 며칠은 쉬어야 하지 않겠소?”
그간 참고 억눌렀던 물음들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말없이 옹주를 따르던 사내, 장무열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큰 상처는 아닙니다.”
확인이라도 하듯 화완은 장무열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몇 군데 생채기는 보였으나, 그의 말대로 큰 상처는 아니었다.
“다행이오.”
“염려해 주신 덕분입니다.”
“그대를 노린 자들이 누군지는 알아보았소?”
장무열은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
찾지 못하였단 의미였다.
화완의 눈매가 가늘게 여며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의 입가에 다시 미소가 떠올랐다.
“어떤 자들의 소행인지는 모르나 장 장령에게 걸렸으니, 머잖아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될 터이지요.”
장무열은 침묵했다.
그 서먹한 고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화완은 지그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침묵을 깬 것은 장무열이었다.
“저는 해야 할 일이 있어 그만 물러가겠습니다.”
작별을 고하는 그를 화완이 아쉬운 시선으로 응시했다.
“모처럼 만났거늘. 좋은 차를 준비하라 하였소.”
“다음에 좋은 기회가 있을 것이옵니다.”
끝내 거절하는 그를 붙잡을 명분이 없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요.”
옹주의 허락이 떨어지자, 장무열은 미련없이 그 자리를 벗어났다.
화완은 그의 뒷모습을 우두커니 지켜보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멀어지는 장무열에게서 여전히 시선을 떼지 못한 화완이 무심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겸아.”
근처를 서성이던 젊은 사내가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화완의 양자이며, 십학사의 해이기도 한 정후겸이었다.
“네, 옹주마마.”
“누가 감히 장 장령의 목숨을 노린 것인지 알아보아라.”
지시를 내리는 화완의 음성은 서릿발처럼 냉랭했다.
따스한 봄볕과 같았던 좀 전과는 사뭇 다른 표정과 말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반드시 배후를 밝혀내야 한다.”
“그리하겠습니다.”
“내 절대 놈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절대.”
“소자, 어떻게든 찾아내 어머니의 앞에 무릎 꿇리겠나이다.”
“반드시 그래야 할 것이다.”
화완은 다시 장무열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저 멀리 사라지는 그의 모습은 작디작은 점으로 변해 있었다.
그런 그녀를 묵묵히 지켜보던 정후겸이 입을 열었다.
“궁금한 것이 있나이다.”
“무엇이더냐?”
“무슨 이유로 장 장령을 십학사에 들이라 한 것이옵니까?”
화완이 정후겸을 돌아보았다.
옹주의 서늘한 시선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정후겸이 말을 이었다.
“그는 우리와 어울리지 않는 사내입니다. 언젠가 십학사를 찢어발길 그런 사나운 자입니다.”
“알고 있다. 분명 그는 십학사를 찢어 놓으려는 셈속으로 그곳에 들어갔겠지.”
“그런 것을 아시는 분께서 어찌…….”
말끝을 흐리는 정후겸을 향해 화완이 웃는 낯빛을 보였다.
“나는 그를 가둔 것이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십학사라는 불멸의 울타리. 그 안에 그를 가둬버린 것이다. 그는 이제 이 울타리 안에서 절대 벗어날 수 없을 게다. 또한, 영원히…….”
영원히 내게 종속되겠지.
뒷말을 입안으로 삼키는 화완의 눈빛이 그 어느 때보다 맑게 빛났다.
어미의 눈 속에 서린 집요함이 자신의 것과 흡사함을 정후겸이 모를 리 없었다.
그러기에 정후겸은 더는 묻지 않았다.
옹주가 끝내지 못한 뒷말을…….
그녀가 속으로 삭힌 진정한 의미를…….
대신 서둘러 말머리를 돌린다.
“폐세손에게 일이 생겼나이다.”
“일이라니?”
“주상 전하의 침전 담벼락에서 저주 인형이 발견되었사옵니다. 그리고 그와 똑같이 생긴 것이 폐세손의 거처에서도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피식, 옅은 헛웃음이 옹주의 입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 우직한 아이가 주상전하를 저주하는 인형을 만들었다? 그 사실은 어떻게 알게 되었다 하더냐?”
“안국동 홍 대감의 별채를 지키는 문지기가 발고했다 하옵니다.”
“문지기라…….”
화완 옹주는 눈가를 여미며 미소 지었다.
“참으로 하찮고 가소로운 계략이로구나.”
폐세손이 왕을 저주하는 인형을 만들었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이는 필시 폐세손을 모함하기 위한 누군가의 음모이리라.
“하지만 시기가 참으로 절묘하구나.”
얕고 저열한 수작이지만 시의적절한 계략이었다.
아들을 떠나보내고 실의에 빠진 왕의 마음을 흔들기엔 더없이 적합한 사건이었던 것이다.
아비에게 감히 역심을 품은 아들.
이제는 손자까지 할아버지를 저주하였다 하면…….
“폐세손이 이번 덫에서 빠져나오기 쉽지 않겠구나. 그래, 세손은 어찌하고 있다더냐?”
“침묵하고 계시다 하옵니다.”
“침묵?”
“네. 부정도, 그렇다고 긍정도 아니 하시니. 추국하는 자들이 곤욕을 치르고 있다 하옵니다.”
“항변해도 들어주지 않으니 그런 것이겠지.”
화완은 가볍게 혀를 찼다.
“제례가 멀지 않았거늘. 이번 일로 폐세손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될 터이니. 결국, 병환이 깊은 아바마마를 대신할 사람을 정하는 일로 한동안 궁 안팎에 떠들썩하겠구나.”
옹주가 정후겸을 응시했다.
“이번 폐세손의 일도 그렇고, 다른 자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구나. 겸아, 대책은 제대로 세워두었느냐?”
정후겸은 짧지만, 힘 있는 어조로 대꾸했다.
“심려하지 마옵소서.”
“그래, 널 믿으마.”
무심히 고개를 끄덕인 화완은 장무열이 사라진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눈동자에 이채가 떠오른다.
어미의 눈 속에 서린 작은 불빛을 발견한 정후겸이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대답했다.
“소자만 믿으시옵소서.”
***
어둠이 자욱하게 펼쳐진 늦은 시각.
홍인한의 사랑채로 은밀한 걸음들이 찾아왔다.
청한 손님이 모두 모이자 홍인한은 청지기를 불렀다.
“긴한 용무가 있으니, 사랑채 근처엔 아무도 얼씬하게 하여서는 아니 된다. 알겠느냐?”
주인의 엄명에 청지기는 코가 땅에 닿도록 머리를 조아렸다.
“염려 마십시오, 대감. 허락 없이 개미 한 마리도 드나들지 못하게 하겠나이다.”
청지기가 물러갔다.
홍인한은 헛기침을 하며 사랑채로 들어섰다.
세 명의 객(客)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았다.
두루마기와 너른 흑립을 쓴 세 사내.
그들은 각기 영지와 소나무, 대나무가 수 놓인 면사로 얼굴의 절반을 가리고 있었다.
십학사.
“오시느라 고생들 하였소. 자자, 이리 서 있을 것이 아니라 어서 앉으시오들. 차린 건 없지만 우선 듭시다.”
홍인한은 만면 가득 미소를 지으며 음식을 권했다.
“허허, 상다리가 휘어질 지경인데, 차린 게 없다니요.”
“겸손이 지나치십니다.”
홍인한을 한껏 추켜세운 학사들이 얼굴을 가린 면사를 벗었다.
그들은 오래전부터 한 배를 탄 운명인지라.
서로의 정체를 안 지 이미 오래였다.
홍인한의 우측에 앉은 영지(靈芝).
그는 꼬장꼬장한 인상의 반백 노인으로 내의원 소속의 의원이었다.
홍인한의 왼편에 앉은 소나무(松)는 잘 다듬은 수염의 청수한 인상의 중년인이었다.
마지막으로 홍인한의 맞은 편에 앉은 대나무(竹).
그는 세 명의 손님 중 가장 젊었다.
무인들이나 입을 법한 무복 차림의 대나무는 각진 턱과 다부진 체격, 부리부리한 눈썹으로 인해 무척 강한 인상을 풍겼다.
얼굴을 마음껏 드러낸 그들은 한동안 식사를 하며 웃고 떠들었다.
그렇게 시간이 무르익자, 대화는 자연스럽게 궁 안의 정세로 이어졌다.
“허허허, 참으로 일이 묘하게 되었소이다, 그려. 아무리 폐서인된 세손이라 하지만 제 혈육이거늘. 어쩌자고 주상을 저주한단 말이오.”
영지의 말에 소나무가 끌끌 혀를 찼다.
“폐세손의 거처에서도 왕을 저주하는 지푸라기 인형이 나왔다지요? 나라에 망조가 들었소. 그렇지 않고서야 아비가 아들을 죽이고, 손주가 할아비를 저주하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단 말이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소. 그러나…….”
호쾌하게 술잔을 비운 대나무가 굵은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이번 일로 폐세손이 몰락하게 되었으니, 우리에겐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동조하듯 다른 학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일로 그들이 추천하는 이는 하엽생에게 더욱 힘을 실을 수 있게 되었다.
아니, 어쩌면 이건 당연한 수순이리라.
세자는 죽었고, 왕세손은 폐위되어 궁 밖으로 쫓겨났다.
상황으로 보나 명분으로 보나, 죽은 왕세자에게 미움을 받고 쫓겨난 하엽생이 동궁의 새 주인이 되는 것이 마땅하였다.
그럼에도 왕이 일을 미룬 이유는 단 하나, 폐위된 세손을 향한 미련 때문이었다.
왕 역시 사람인지라.
혈육의 정을 끝내 끊어내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 사건으로 눈엣가시 같던 형운을 완전히 지워버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대감…….”
영지가 홍인한을 불렀다.
반쯤 풀린 눈동자.
영지는 불콰하게 취기 오른 얼굴로 홍인한에게 물었다.
“어찌 그런 생각을 하셨소이까?”
“무슨 생각 말이오?”
“저주 인형 말입니다. 어찌 그런 묘수를…….”
탁!
홍인한은 술잔을 거칠게 내려놓았다.
그리고 차가운 눈으로 영지에게 되물었다.
“그게 대체 무슨 말이오? 저주 인형이라니? 묘수라니? 설마, 이 사람이 폐세손에게 누명이라도 씌웠단 말이오?”
쏟아내는 물음에 날카로운 가시가 가득했다.
그 서슬에 영지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이런, 제가 큰 실언을 하였소이다. 용서하시오.”
“용서할 게 무에 있겠소. 애초에 술에 취해 실수한 것인데.”
“그렇지요. 아무래도 과음한 모양입니다.”
영지의 사과에도 홍인한은 싸늘한 코웃음과 흘릴 뿐이었다.
한동안 어색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눈치를 살피던 소나무가 넌지시 화제를 돌렸다.
“한데, 그 소식 들으셨습니까?”
영지가 서둘러 소나무의 말을 받았다.
“무슨 소식 말이오?”
“이번 조사 과정에서 폐세손의 거처에서 기이한 물건이 나왔다고 하오.”
“저주 인형 말고 또 다른 증거가 나왔단 말이오?”
“증거는 아니고…….”
“하면?”
“폐세손의 거처를 뒤지던 의금부도사가 수상한 책자를 발견했는데, 놀랍게도 그 책자에 담긴 내용이…….”
“내용이?”
학사들의 시선이 소나무의 입술에 집중되었다.
“손뜨개에 관한 것이었다 합니다.”
“손뜨개라면 어린아이들이 실로 하는 놀이를 말하는 것이오?”
“그렇습니다. 그 하찮은 모양을 일일이 적어두고 이름까지 붙여두었다 하오. 필적으로 보아 폐세손이 직접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하더이다.”
대나무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허허, 세손이 정녕 머리가 어찌 된 모양이구려.”
“아비의 광증이 기어이 아들에게로 이어졌군요. 궁에서 쫓겨나 언제 목이 떨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손뜨개라니.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그럴 수 있단 말이오?”
영지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을 이었다.
“광증에는 백약이 무효하지요.”
“하루라도 빨리 택군을 해야 할 것인데.”
대나무와 소나무도 거들었다.
그들의 대화를 들은 홍인한의 입가에 미소가 돌아왔다.
이미 며느리에게 전해 들어 알고 있었지만, 손뜨개 놀이를 하는 것이 사실일 줄이야.
세손이 미쳐도 제대로 미친 것이 틀림없었다.
왕이 폐세손의 안부를 묻는 일이 많아 걱정하였거늘.
이제 한시름 내려놓아도 되겠구나.
어쩌면 이번에 손을 쓰지 않았어도 스스로 자멸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소나무가 홍인한의 빈 잔에 술을 따르며 물었다.
“어떻소이까? 폐세손이 이번 사건을 무사히 넘길 수 있겠소이까?”
“힘들 것이외다. 아니, 불가능하외다.”
홍인한은 자신만만하였다.
“그의 거처에서 저주 인형이 나왔소. 이보다 분명하고 확실한 증좌가 세상에 또 어디 있겠소. 설사, 폐세손에게 하늘을 나는 재주가 있다 할지라도 무사히 빠져나갈 수 없을 것이외다. 하하하.”
홍인한은 술잔을 기울였다.
오늘따라 술이 무척 달았다.
***
어둠으로 가득한 왕옥(王獄).
그곳으로 한 사내가 들어섰다.
폐세손을 심문하기 위한 심문관이었다.
형운은 심문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왕옥 내부는 지극히 어두웠다.
하지만 어둠에 익숙해진 눈은 금세 상대의 용모를 파악했다.
내내 굳게 닫혀 있던 그의 입술이 열렸다.
“그대가 사라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런데 무사하였군.”
심문관, 장무열은 아무런 대답도 없이 형운의 맞은 편에 앉았다.
옛 동료와의 재회.
장무열의 얼굴은 시종일관 무표정했다.
형운이 다시 말을 걸었다.
“은랑이 그댈 무척 걱정하였다. 이런 곳에서 그대를 다시 만났다고 하면 그 사람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군.”
이레를 언급해서일까.
굳게 닫힌 장무열의 입이 열렸다.
“폐세손께서 그분의 얼굴을 다시 뵐 수 있을지, 그것부터 걱정하여야 할 겁니다.”
장무열은 가져온 서책을 펼쳤다.
곧 사건의 진상을 문초하고 기록하기 위한 관례적인 질문이 이어졌다.
“저주 인형이 폐세손의 거처에서 나왔습니다. 본인이 만든 것이 맞습니까?”
“…….”
“주상 전하를 저주하려는 의도가 있었음을 인정하십니까?”
“…….”
대답은 없었다.
그럼에도 장무열은 한참이나 질문을 이어나갔다.
형운 역시 모든 물음을 침묵으로 일관하였다.
형식적인 질문을 끝낸 장무열이 시선을 들어 형운을 보았다.
“정녕 이대로 아무 항변도 하지 않으실 겁니까?”
“그대라면 어찌하겠는가?”
이내 장무열은 고개를 끄덕였다.
형운이 어떤 대답을 하여도, 무어라 항변하여도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다.
증인과 증좌.
그 모두가 형운을 범인으로 지목하고 있었다.
무어라 하여도 구차한 변명 정도로 여겨질 뿐이다.
“……이곳에 갇혀 지내는 것이 힘들고 괴롭지 않으십니까?”
“난 본래 어둡고 음침한 곳을 좋아하니. 상관없다.”
물끄러미 형운을 바라보던 장무열은 기록하던 책자를 덮었다.
자신이 할 일은 끝났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돌아서 나가는 그를 형운이 불렀다.
“은호.”
장무열이 우뚝 멈춰 섰다.
그러나 그는 끝내 뒤돌아 보지 않았다.
“이제 은호는 없습니다.”
***
장무열이 떠나자 옥사는 다시 깊은 고요 속으로 가라앉았다.
무겁게 가라앉은 적막은 이내 외로움을 몰고 왔다.
“힘들고 괴롭지 않으냐고?”
장무열의 질문을 떠올린 형운은 씁쓸하게 웃었다.
그래, 힘들고 괴롭다.
아니, 외롭구나.
예전엔 혼자 있길 그리도 원하였는데.
이젠 혼자가 어색하구나.
“변하였구나.”
내가 예전과 달라졌음이라.
태어나 십수 년 동안 익숙해진 습성이 불과 몇 개월 만에 변한 것이다.
한 여인으로 인해.
“이레야…….”
이레.
그녀를 만난 이후로 모든 것이 변했다.
고독을 즐기고, 적막만을 바라던 내가 외로움을 느끼고 허전함에 가슴 쓰라린 것은.
이레, 내 여인이 있어서.
그녀와 함께한 시간이 너무도 행복하고 소중하였던 까닭이다.
그래, 그 사람 덕분이로구나.
그녀가 있기에 하늘 같았던 아비를 잃고 궁 밖으로 쫓겨난 처량한 신세가 되었어도 웃을 수 있었구나.
희망을…… 꿈을 잃지 않았구나.
세상의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아래로 떨어져서도 서탁을 맞잡고 앉아 이런저런 계획을 짜며 미래를 기약할 수 있었구나.
“많이 놀랐겠지?”
지금쯤 자신의 소식이 그녀에게 전해졌으리라.
부디 크게 상심하지 않아야 할 텐데.
‘그분의 얼굴을 다시 뵐 수 있을지, 그것부터 걱정하여야 할 겁니다.’
장무열의 목소리가 귓가에 아른거린다.
어쩌면 그의 말처럼 다시는…… 그녀를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음모.
치졸하면서도 치명적인 흉계.
하지만 할바마마와 자신의 미묘한 상황을 완벽하게 이용한 공략.
처음 의금부의 금오랑에 의해 이곳으로 끌려올 때만 해도 형운은 좌절하지 않았다.
저주 인형 따위로 엮으려 하다니.
오히려 이 기회를 역이용할 생각이었다.
자신의 사정을 전해 들으시면, 필시 할바마마께서 직접 찾아오시리라. 그토록 뵙고 싶었던 그분을 직접 만나 사정을 설명하고, 그간의 오해마저 풀리라.
하지만 음모를 꾸민 자들은 치밀하였다.
믿었던 세손마저 자신을 저주하였다는 말을 전해 들은 왕은 크게 상심하였고, 문밖으로 거동조차 하지 않는다는 소식이었다.
음모를 꾸민 자들의 수작이 있었음이 틀림없다.
이런 상황에서 그의 거처에서 저주 인형까지 발견되었으니.
이 역시도 음모를 꾸민 자들의 소행이겠지.
하지만 형운에게는 억울함을 증명할 방법도 없었다.
거미줄에 걸린 나비.
자신의 처지가 딱 그 모양새였다.
벗어나려 날갯짓을 하면 할수록 더더욱 얽혀들었다.
“이레야.”
그녀가 보고 싶다.
다시 볼 수 없다 생각하니, 더욱 그리워졌다.
한 번만.
단 한 번만 다시 그녀를 볼 수 있다면.
그녀의 얼굴을 마주 보며 웃고, 볼을 쓰다듬고, 품에 안을 수 있다면.
그럼 여한이 없으련만.
“……저하.”
어디선가 희미하게 들려온 목소리.
흡사 이레의 음성 같았다.
그리움이 사무쳐 이젠 환청마저 들리는구나.
헛웃음을 흘리는 찰나.
“저하.”
좀 전보다 또렷해진 부름이 형운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형운은 천천히 눈을 떴다.
“저하……괜찮으십니까?”
어둠 속에서 그녀가 묻는다.
그 커다란 눈동자에 걱정이 가득한 채로.
떨리는 입술을 열어 그녀가 그의 안부를 묻고 있었다.
“내가 꿈을 꾸고 있소?”
물음에 답이라도 하듯 이레가 와락 그의 품에 안겨 왔다.
***
“저하!”
이 온기.
이 그리운 향내.
품 안에서 느껴지는 절실한 떨림.
그녀가 분명했다.
“대체 이곳엔 어찌 온 것이오. 이곳이 어디라고!”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러나 성난 말과 달리 형운은 더욱 다부지게 그녀를 안았다.
마냥 무심하지 않은 하늘에 감사하며…….
두 번 다시 이 사람, 내어주지 않을 것처럼…….
이대로 함께 영원하길 염원하며…….
그렇게 이레를 안고 그녀의 온기에 얼굴을 묻었다.
“이곳은 어찌 들어온 것이오?”
“도와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레의 대답에 많은 얼굴들이 형운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대체 어떤 자가 이런 곳에 그대를 안내했단 말이오?”
“제가 간절히 부탁한 겁니다.”
“그래도 이곳이 어떤 곳이라고…….”
“저하께서 계신 곳이지요.”
이레의 대답에 형운은 물끄러미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어서 가시오.”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온기 한 조각마저도 놓아주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럴 수 없다.
이곳에 있는 것을 누군가에게 들키기라도 하면, 이레 또한 무사할 수 없을 것이다.
“저하와 헤어지느니, 차라리 이곳에 함께 갇히는 게 낫습니다.”
“이레야.”
“제가 저하 없이 어찌 살 수 있겠습니까.”
이레의 눈가로 기어이 눈물이 흘렀다.
“…….”
이 미련한 사람을 어이한다.
어이해야 하나.
형운은 더욱 깊게 끌어안았다.
이대로…….
이 시간이 영원히 계속되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의 바람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허허, 이게 대체 어찌 된 영문인지 모르겠구려.”
헛웃음 소리와 함께 사람들의 발소리가 왕옥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홍인한과 홍봉한, 그리고 삼정승을 비롯한 조정의 중신들이었다.
그들 중에는 세자를 지지했던 사람도 끼어 있었다.
대신들은 작금의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옥사에 갇힌 폐세손을 만나러 오는 길이었다.
“아니, 저분은…….”
“저분께서 어찌…….”
두런대던 음성이 일순 잠잠해졌다.
이레를 본 대신들은 놀란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좌의정 김상로가 흥분한 표정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이곳의 관리를 맡은 자를 당장 불러오라!”
형운은 이를 악물었다.
염려하던 최악의 상황이 벌어지고야 말았다.
그는 이레를 안은 두 팔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독기 어린 눈으로 사람들을 쏘아보았다.
이 사람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사람에겐 손끝 하나 대지 못하게 하리라.
측은한 표정으로 다가온 홍인한이 그를 구슬렸다.
“어떻게 된 사정인지는 모르나, 이곳에 저분이 계시면 상황만 복잡해질 뿐이오. 제가 사정을 잘 설명해 볼 터이니, 그분을 보내주시지요.”
형운은 이레를 놓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날카롭게 벼린 눈으로 홍인한을 쏘아보았다.
“허허, 이거 참 곤란한 일이로다.”
홍인한이 난처한 표정으로 물러났다.
그를 대신하듯 좌의정이 나섰다.
“뭣들 하느냐. 어서 저분을 밖으로 모시질 않고!”
왕옥 밖을 지키던 군졸들이 몰려왔다.
아무리 형운의 의지가 굳건해도 이레를 놓아줄 수밖에 없는 상황.
바로 그때였다.
두려움에 떨고 있어야 할 이레가 스스로 형운의 품을 벗어났다.
“……이레야.”
놀란 형운을 이레는 부드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 눈이 말하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는 괜찮습니다.
형운을 다독인 이레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사람들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형운을 바라볼 때완 사뭇 달랐다.
당차고 확고한 시선.
그녀가 어리둥절한 표정의 사람들을 향해 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음모입니다.”
홍인한이 침통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믿고 싶은 마음, 이해하오. 하지만 안국동의 별채에서 증좌가 발견되었소. 그 진실을 밝히기 위해 우리 모두 이곳에…….”
홍인한의 말이 끝나기 전.
이레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녀의 당찬 음성이 허공을 가로 질렀다.
“누군가 세손 저하를 저주하였습니다.”
“지금 세손이라 하였소? 주상 전하가 아니고…… 세손이라 하셨소?”
“네, 분명 세손 저하입니다.”
김상로가 협박하듯 말했다.
“뒷감당할 자신 있소?”
“…….”
“확실한 증좌도 없이 허튼소리를 하는 것이라면, 결코 무사하지 못할 것이오.”
“……하겠습니다.”
이레의 눈동자가 지혜롭게 반짝거렸다.
검은 동공에 맺힌 것은 당당함과 확신이었다.
“증명해 보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