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택-왕들의 향연-133화 (133/215)

#133. 답은 정해져 있다.

고아한 달빛이 창가를 푸르게 적셨다.

노르스름한 유등 아래.

먹을 머금은 붓이 서탁 위를 흘러갔다.

-할아버지들, 오늘도 잘 지내셨는지요?

이레의 안부 인사에 제일 먼저 화의 대답이 돌아왔다.

-아이로구나. 무탈하였단다.

예와 악의 글도 나타났다.

-오늘은 평소보다 일찍 왔구나.

-너도 별일 없었느냐?

예의 물음에 이레는 옅은 신음을 흘렸다.

“있었습니다. 참으로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뜻밖의 상황도 있었고, 위험한 순간도 있었다.

아니다. 괜한 걱정 끼쳐드리지 말자.

이레는 울적한 마음을 다스렸다.

마침, 상의 글이 서탁을 검게 물들였다.

-잘 지냈느냐? 한데, 오늘은 그 아이가 보이지 않는구나.

상은 형운부터 찾았다. 언제나 불퉁하게 대해도 묘하게 그와 죽이 잘 맞았다.

-그분께선 오늘 긴한 볼일이 있어 귀가가 늦으신다 하였습니다.

-그래? 앞뒤 꽉 막힌 그 녀석이 이 늦은 시각까지 귀가하지 않는다니. 별일이 다 있구나.

어리둥절해하는 상에 반해 다른 할아버지들은 형운이 늦는 이유를 짐작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날이 다가오는 모양이군.

-제례 일이 코앞이라 하였지. 준비에 소홀함이 없어야 할 것이다.

-살생부는 어찌되었느냐?

이레는 할아버지들의 혜안에 감탄했다.

실제로 형운의 늦은 귀가는 제례와 연관이 있었다.

지금쯤 그를 도와줄 사람들과 만나고 있을 터.

“대화가 잘되어야 할 텐데.”

틀림없이 잘될 거야.

그분은 누구보다 영민하신 분이시니.

그때, 상의 글이 불쑥 튀어나왔다.

-워낙 미숙한 녀석이라, 제대로 할지 모르겠네.

악이 그의 경솔함을 지적했다.

-상. 말 좀 가려서 하여라.

-내가 내 입으로 마음대로 말도 못 해?

-큰일을 앞둔 아이들에게 엉뚱한 소리나 하니 하는 말 아니냐?

-감히 누구에게 훈계야? 더는 못 참겠다. 어디냐? 네 사는 곳부터 말해봐라.

-왜? 또 무덤이라도 파헤치게.

상과 악의 대치가 팽팽하게 이어졌다.

이레는 험한 글이 난무하는 종이를 슬그머니 서탁 위에서 내려놓았다.

새로운 종이를 펼치자마자 화의 글이 나타났다.

-아이야, 무슨 일이냐? 네 글에서 근심이 느껴지는구나.

화의 인자한 물음에 이레는 괜스레 눈시울을 붉혔다.

남들 앞에서는 태연한 척, 아무 일도 없었던 척했지만, 위로받고 싶었던 모양이다.

화 할아버지는 구구절절, 별다른 이야기가 없음에도 이레의 기분을 알아차렸다.

처음 만난 그때처럼.

친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고 슬프고 우울한 나날을 보내던 이레에게 그날 밤 달과 함께 서탁으로 찾아와 상처 입은 마음을 다독여주셨었지.

시간을 공유한다는 것.

서로의 삶을 이해한다는 건 어쩌면 이런 것인지도 모른다.

-화 할아버지…….

예도 이레가 평소와 다름을 눈치챘다.

-십학사라는 자들과 좋지 않은 일이라도 있었느냐?

있었습니다.

천만뜻밖의 사람을 그곳에서 만났고, 원수에게 정체가 발각될 뻔한 일도 있었습니다.

화의 자상한 글이 이어졌다.

-슬프고 답답한데, 하소연할 곳도 없었느냐? 괜찮다. 말해 보아라. 할애비가 들어줄 터이니…….

-할아버지…….

흐려진 필체에 이레의 감정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이윽고 이레는 그간의 일들을 서탁 위에 풀어놓았다.

서로 말싸움을 이어가던 상과 악도 이레의 이야기에 귀 기울였다.

은호 장무열과의 예기치 못한 만남.

거북 박진봉에게 자칫 정체를 들킬 뻔하였던 일.

그리고 그와 목숨을 건 협상까지.

-그렇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이레의 이야기에 온점이 찍혔다.

그녀의 사연을 들은 할아버지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화를 시작으로 악과 예의 글이 차례로 나타났다.

-은호라면 은자원의 은자가 아니더냐?

-사헌부 소속의 대장부라 들었거늘. 그가 어찌 십학사 그 말종들의 무리에 있단 말이냐?

-참으로 기묘한 일이로다.

화가 물었다.

-필시 말 못 할 사연이 있을 터. 그에게 연유를 물어보았느냐?

이레가 답했다.

-아쉽게도 대화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어쩌면 도리어 잘된 일인지도 모르겠구나. 상대의 저의도 모른 채, 내 정체를 함부로 드러내선 안 되는 법이니 말이다.

할아버지들께선 박진봉에 대한 우려도 표현했다.

이번에도 화와 악, 예가 차례로 조언했다.

-그자는 인성을 잃은 살인귀다. 사악하고 비열한 작자이니 절대 빈틈을 보여선 아니 된다.

-그 악랄한 자와 담판을 짓다니. 참으로 가상한 일을 해냈구나. 하나, 다시는 무리하지 말거라.

-약조만 믿고 그를 신임해선 아니 된다. 그런 자의 생각과 행동은 상례를 벗어나기 마련이니. 언제나 신중 또 신중하여야 한다.

마지막으로 흥분을 가라앉힌 상이 합류했다.

-그런 미치광이는 나중에 반드시 귀찮아지기 마련이란다. 그러니 수단 방법 가리지 말고 해치워버려라. 그게 차라리 속 편해.

악이 그에게 물었다.

-상. 넌 예전에 불편하고 꺼림칙한 자일수록 오히려 곁에 두고 살피라 하지 않았느냐?

-상대가 사람이면 그렇지. 인두겁을 뒤집어쓴 승냥이를 곁에 두는 건 어리석은 일이야.

상이 단호한 글로 이레에게 말했다.

-세상엔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사람이 아닌 자들이 적지 않으니. 거북, 바로 그 작자가 그런 놈이다. 절대 놈을 믿지 마라.

-명심하겠습니다.

이레는 미소를 지었다.

이런 단란한 분위기.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것 같다.

요즘엔 언제나 형운과 함께 할아버지들과 대화했다.

교육이 목적이다 보니 분위기 또한 엄숙하고 경직되기 십상이었다.

그에 반해 오늘은 마치 오래전, 홀로 할아버지들과 대화하던 때로 돌아간 것마냥 분위기가 화기애애했다.

“그나저나 저하께서 많이 늦으시는구나.”

예정한 시간을 이미 훌쩍 넘겼다.

워낙 시간과 약속에 철두철미한 분이시라 은근히 걱정되었다.

그때였다.

툭툭툭.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워낙 작아서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소리였다.

“누구시오?”

불러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작은 짐승이라도 지나간 걸까?

이레는 문을 열어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대신 바닥에 서찰 하나가 놓여 있었다.

“대체 누가 이걸…….”

담벼락 근처에서 옷자락 날리는 소리가 들렸다.

한 사내가 날렵한 동작으로 담을 넘어가고 있었다.

그 뒷모습이 눈에 익었다.

“좌익위?”

뒷모습만 스치듯 본 것이라 확신할 수 없었지만, 형운의 좌익위였던 최치성 같았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이레는 서둘러 서찰을 열었다.

내용을 본 이레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세손 저하께서 귀가 중 의금부로 압송되었음.

***

의금부의 심처.

몇몇 선택된 자만이 드나들 수 있는 철옹성의 전각.

하지만 말이 전각일 뿐, 실제로는 귀한 신분의 죄인을 위한 옥사였다.

그 은밀한 옥사에 한 사내가 꼿꼿한 자세로 의자에 앉아 있었다.

눈을 감은 채 굳게 입을 다문 그의 모습은 죄를 지은 죄인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탁자를 사이에 두고 그를 문초하는 관원의 표정에 난감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렇게 어색한 정적이 얼마나 흘렀을까?

형운이 굳게 닫힌 입을 열었다.

“다시 말해보라.”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위엄이 그의 전신에서 흘러나왔다.

“내가 지은 죄가 무어라 하였느냐?”

금부의 동지사(同知事: 종2품)는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주, 주상 전하를 위해할 목적으로…….”

“폐서인되어 궁 밖으로 나간 이후로 용안조차 뵙지 못하였거늘. 내가 무슨 수로 그분을 해할 수 있단 말이냐?”

형운의 물음에 동지사는 감히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해 우물쭈물했다.

그때였다.

“그래서 간악한 잡술을 이용하지 않았소?”

벌컥 문이 열리고 붉은 관복의 사내가 들어왔다.

좌의정 김상로였다.

형운의 눈빛이 낮게 가라앉았다.

자신을 날카롭게 쏘아보는 시선에 노회한 정치가는 잠시 움찔하였다.

그러나 이내 턱을 당기고, 오만한 눈길로 형운을 응시했다.

지금은 저리 당당하겠지.

그러나 곧 제 아비의 운명을 따르게 될 존재였다.

“잡술이라니?”

형운의 물음에 김상로는 탁자 위에 무언가를 툭 내려놓았다.

어른 손바닥만 한 크기의 인형이었다.

붉은 안료로 그린 부적을 뒤집어쓴 해괴한 몰골의 인형.

“이것이 무엇이오?”

“누군가의 죽음을 바라는 저주 인형이오. 이 불길한 물건이 주상 전하의 침전 담벼락 아래에서 발견되었소.”

말을 끝낸 김상로가 형운을 빤히 바라보았다.

형운은 날카로운 그의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이오?”

“그대의 소행이라는 밀고가 있었다오. 순순히 진실을 고하는 것이 좋을 것이요.”

비록 폐위되었지만, 얼마 전까지 왕세손이었건만.

형운을 대하는 김상로의 표정에는 티끌만큼의 예의도 찾아볼 수 없었다.

김상로의 추궁에 형운은 눈살을 찌푸렸다.

“밀고?”

“그렇소. 아무도 모르게 몰래 하였겠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대의 소행을 또렷이 보고 그 사실을 세세하게 보고한 자가 있었소.”

“밀고한 자가 누구요? 내 앞으로 데려오시오. 도대체 어떤 자가 날 모함하였는지 알아야겠소.”

김상로가 입가를 뒤틀었다.

“밀고한 자를 협박하고 회유할 심산인 모양인데, 소용없소. 이미 도사와 금부의 나장들이 나섰으니, 곧 새로운 증좌가 발견될 것이오. 차라리 험한 경험하기 전에 이실직고하는 것이 어떻겠소?”

“어찌 남의 밀고는 그리 철석같이 믿으면서, 정작 내 말은 들으려 하지도 않는 게요? 내가 할바마마를 저주할 사람으로 보이오?”

“글쎄, 보통은 그런 생각을 하지 않겠지. 하지만 사정이 사정이다 보니…….”

“무슨 사정이 있단 말이오?”

“비명에 아비를 잃은 아들이 끔찍한 복수를 계획하는 일은 알고 보면 무척 흔한 일이라오.”

김상로의 야비한 웃음에 형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러나 그는 분노하지 않았다.

오히려 차분한 시선으로 나직하게 물었다.

“내 아버지 때도 이러했는가?”

“무슨 말이오?”

“그분도 이런 식으로 모함하였는가 물었다.”

“무어라?”

“그분께서도 누군가의 밀고로 누명을 쓰셨다 들었다. 목이 터져라 항변하고 밀고한 자와의 대면을 요구하였지만,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들었다.”

형운은 잔잔한 눈으로 김상로에게 물었다.

“바로 지금처럼.”

분노도, 울분도, 성화도 없었다.

그래서 되려 듣는 이의 등골을 오싹하게 하였다.

김상로는 척추를 타고 오르는 서늘함에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쾅!

“감히 지금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데, 그런 말을 입에 올린단 말인가? 그 일을 누구도 함부로 입에 올리지 말라 한 주상 전하의 엄명이 있었거늘!”

김상로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당장 죄를 자복하면 조용히 묻어주려 하였건만. 조사에 임하는 태도가 불경하여 그러지 못하겠다. 내 이번 사건을 공론화하여 철저하게 수사해야겠다.”

“어허, 대감. 어찌 그러시오?”

역정을 내는 김상로의 등 뒤로 또 다른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허겁지겁 달려온 듯 거친 숨을 내뱉는 이는 형운의 외종조부 홍인한이었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우선 흥분부터 가라앉히시오.”

“어허, 그렇게 대충 넘어갈 일이 아니외다.”

“자자, 그러지 말고 바깥바람이라도 잠시 쐬시오. 안색이 좋지 않소. 이러다 쓰러지지는 않을까 걱정이구려.”

김상로의 등을 떠밀어 밖으로 보낸 홍인한이 형운에게 다가갔다.

“세손. 괜찮으십니까? 이게 대체 어찌 된 일입니까?”

형운은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더라.

형운은 이곳으로 잡혀 오기 전의 상황을 잠시 떠올렸다.

*

저녁 늦은 시각.

평소라면 집으로 향할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는 집 대신 허름한 국밥집을 찾았다.

언제나 한산하던 국밥집은 그날따라 손님으로 가득했다.

빈자리가 없어 형운은 젊은 청년들과 합석했다.

구수한 국밥을 즐기며 함께 앉은 사람들과 한두 마디 섞다 보니 어느새 제법 친해졌다.

그들과 이런저런 대화를 하다 보니 시간이 제법 흘러갔다.

언젠가 다시 만나자 기약도 없는 약속을 나누고, 형운은 그들과 작별했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그저 스쳐 지나가는 인연 정도로 보일 법한 광경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만남은 우연이 아니었다.

식사를 함께한 인물만이 아니다.

국밥집에 있던 손님들.

하급 관료, 선비, 유생…….

옷차림도 나이도 모두 다른 다양한 사람들.

그들 모두가 한 가지 목적으로 국밥집을 찾은 것이었다.

형운.

바로 그를 만나기 위해.

철저한 계획과 약속 아래, 우연인 것처럼 접촉한 것이다.

그렇게 형운은 그를 지지하고 따르는 사람들과 은밀한 만남을 가졌다.

혼란한 이 나라를 바로잡기 위한 그와 이레의 준비는 계획대로 진행 중이었다.

적어도 국밥집을 나설 때까지는 그랬다.

그가 막 시전에 발을 들일 무렵.

예기치 못한 사태가 벌어졌다.

“멈추시오!”

한 줄기 호통과 함께 삼엄한 표정의 도사와 관졸들이 그를 둘러쌌다. 그렇게 그는 의금부로 끌려왔다.

왕의 죽음을 바라며 저주 인형을 만들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

“저주 인형이라…….”

홍인한은 탁자 위에 놓인 조잡한 붉은 인형을 흘끔 보았다.

짚으로 대충 만든 지푸라기 인형이었다.

그 지푸라기 인형의 몸에 섬뜩한 느낌을 풍기는 붉은 부적이 감겨 있었다. 그리고 십여 개의 나무꼬챙이가 지푸라기 인형의 이곳저곳에 박혀있었다.

“참으로 조잡하고 잡스러운 물건이로다.”

“제가 한 일이 아닙니다.”

형운의 말에 그의 외종조부인 홍인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암요. 알고 있습니다. 우리 세손께서 저리 허술한 인형 따위를 만들 리 없지요.”

“모함입니다. 절 밀고한 자를 조사해 주십시오. 틀림없이 배후가 있을 것입니다.”

“당연히 그래야겠지요. 아무렴. 철저히 조사해야 말고요.”

이번에도 홍인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매사에 건성으로 대꾸하는 모습에 형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갔다.

그러다 한 가지 생각이 그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설마…….”

“이번 사건에 관해 뭔가 짚이는 것이라도 있으십니까?”

형운은 홍인한을 뚫어지라 바라보았다.

“이번 일. 외종조부께서 꾸미신 일입니까?”

“제가요? 허허, 그럴 리 있겠습니까?”

홍인한은 너털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느닷없는 사태에 신경이 날카로워지신 모양입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다른 사람도 아닌 세손과 연루된 사건이니. 한 점 의혹도 남지 않게 철저하게 조사할 것입니다.”

“…….”

“듣자 하니 벌써 별채로 도사를 파견하였다 하더군요. 미리 알았다면 적당히 손을 썼을 터인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지만 조사한다 한들 별달리 나올 것이 있겠습니까? 오히려 결백을 증명할 절호의 기회라 할 수 있겠지요. 아니 그렇습니까? 세손.”

홍인한이 형운을 향해 부드러운 미소를 보였다.

하지만 정작 그의 미소를 본 형운의 얼굴은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그의 웃음에서 뚜렷한 악의를 느낀 탓이다.

음모.

형운은 자신이 함정에 빠졌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함정을 꾸민 자는 눈앞에서 인자한 미소를 짓는 사내.

홍인한이 분명했다.

“허허. 근심할 것 없습니다. 어차피 답은 이미 정해져 있지 않습니까?”

***

“이럴 수가.”

심한 현기증에 이레는 몸을 휘청였다.

형운이 의금부로 압송되었다는 소식에 그녀는 큰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슬픔과 좌절도 잠시.

그녀는 이내 냉정을 되찾았다.

형운이 잡혀간 일은 되돌릴 수 없다.

문제는 이유였다.

무슨 까닭으로 의금부에서 형운을 잡아간 것일까.

서찰에 간략하게 사정이 적혀 있었다.

‘세손께서 왕을 저주하였다 누군가 밀고하였다 했지.’

형운이 왕을 저주하다니.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모함이다.’

누군가 형운을 해치려 꾸민 함정이 분명했다.

이레는 당장 서탁으로 달려가 할아버지들의 의견을 구했다.

상은 벌컥 성을 했다.

-사악한 작자들. 이런 치졸한 함정을 꾸미다니!

다른 할아버지들 모두 음모라는데 의견을 같이했다.

화는 이레의 마음부터 헤아렸다.

-아이야. 급할수록 침착해야 한다.

악이 조언했다.

-세손을 모함하는 간 큰 짓을 벌인 작자들이다. 그런 자들의 함정이 밀고만으로 끝날 리 없다. 무언가 또 다른 수작을 준비하였을 것이다.

예가 말했다.

-우선 주변부터 살펴보거라.

이레는 서둘러 금정을 불렀다.

“금정아.”

얼마 후, 금정이 졸린 눈을 비비며 나타났다.

“무슨 일이어요?”

“오늘 별채에 이상한 일은 없었느냐?”

“딱히 별다른 일은…….”

“잘 생각해보아라. 오늘 하루 어떤 일이 있었느냐?”

금정이 눈동자를 또르르 굴렸다.

“여느 날처럼 찬모가 왔었고, 땔감 때문에 본채 행랑아범이 온 건 외엔…… 아참!”

무언가 생각난 듯 금정이 양손을 짝, 쳤다.

“오늘 별채 청소를 하러 어린 하녀 몇 명이 왔었습니다.”

“사랑방도 청소하였느냐?”

“그럼요. 여름 내내 습기 먹은 서책을 말리겠다고 서책을 꺼내는 걸 제가 기겁을 하고 말렸지요.”

이레는 서둘러 사랑으로 향했다.

어두운 방에 등잔을 밝히고, 구석구석 세심하게 살폈다.

여덟 자 병풍 뒤는 물론이고 문갑 속까지 샅샅이 뒤졌다.

언제든 글을 쓸 수 있도록 준비해 놓은 먹과 벼루. 서탁 아래까지.

작은 틈도 놓치지 않고 꼼꼼하게 살폈다.

그렇게 얼마나 헤맸을까?

두루마기를 넣어둔 자개함에서 기이한 것이 발견되었다.

붉게 칠해진 기괴한 지푸라기 인형이었다.

저주 인형을 발견한 이레는 전신의 피가 싸늘하게 식는 기분이었다.

“이것이었구나.”

밀고 다음으로 준비한 함정.

이 저주 인형이 분명했다.

누군가 청소를 핑계로 이 저주 인형을 이곳에 숨겨둔 것이다.

만약, 이 저주 인형을 조정에서 파견된 어사나 의금부의 도사가 발견하게 된다면…….

모든 죄를 형운이 뒤집어쓰게 된다.

“당장 없애야 해.”

아무도 찾지 못하는 곳에 버려야 한다. 아니, 아예 불태워버려야 한다.

바로 그때, 문밖에서 금정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체 뭐하시는 분들인데, 이 야심한 밤에 남의 방을 함부로 들어가려 하는 겁니까?”

“금부에서 나왔다. 비켜라!”

“금부건 은부건 안 됩니다. 여긴 아무나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곳입니다.”

이레는 입술을 깨물었다.

의금부의 도사와 나장들이 벌써 들이닥친 모양이다.

지푸라기 인형을 치워버릴 기회마저 사라졌다.

“이를 어찌한다?”

이레는 초조한 눈으로 주위를 살폈다.

무언가 방법이 없을까?

아무도 찾지 못할 은밀한 장소나 인형을 없애버릴 기발한 방법. 그도 아니면 전혀 다른 해결책.

그때, 그녀의 눈에 서탁이 잡혔다.

“……!”

이레의 눈이 빛을 발했다.

기발한 생각이 떠올랐다.

***

“비켜라!”

도사와 나장들이 금정을 밀쳐냈다.

이윽고 사랑방 앞까지 밀어닥친 그들이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문을 여시오.”

“…….”

“순순히 응하지 않으면 그 죄를 물을 것이니 속히 문을 여시오.”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안쪽에서 문이 열렸다.

이레였다.

흐트러짐 없는 모습으로 툇마루에 선 그녀가 담담한 눈으로 주위를 보았다.

“이 야밤에 무슨 소란이오?”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왔소.”

그녀 앞으로 한 사내가 나섰다.

뚜벅뚜벅 걷는 훤칠한 사내의 모습이 이레의 검은 망막에 시리게 맺혔다.

‘은호!’

이레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이 사람을 이곳에서 또 마주하게 될 줄이야.

그러나 정작 그녀를 바라보는 장무열의 표정엔 한점 흐트러짐도 보이지 않았다.

“지금 당장, 폐세손과 관련한 모든 장소를 조사하라는 명을 받았소.”

무심한 눈으로 이레를 바라본 장무열이 나장들에게 명했다.

“뭣들 하느냐? 어서 뒤지지 않고.”

장무열의 명이 끝나기 무섭게 나장들이 우르르 방안으로 밀려들었다.

그리고 얼마 후.

“찾았습니다!”

사랑방을 나온 나장의 손에는 이레가 그토록 숨기고 싶어 한 저주 인형이 들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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