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택-왕들의 향연-132화 (132/215)

#132. 약조하지

‘그분이다.’

범상한 사내들보다 머리 하나는 족히 더 큰 사내.

비록 얼굴을 절반을 면사로 가리고 있었지만, 이레는 한눈에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장무열.

그가 틀림없었다.

실종되었다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놀람과 긴장으로 이레는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입안에 마른침이 고였다.

고고한 학 한 마리가 수자놓인 하얀 면사를 쓴 사내.

이레는 그의 등장이 반갑고도 당혹스러웠다.

그가 무사하여 기뻤고, 그가 십학사가 되어 나타난 것이 놀라웠다.

대체…… 어쩌다 십학사가 되었습니까?

언제나 위풍당당하던 분이 어찌하여 흰 면사로 얼굴을 가린 겁니까.

그러나 이레의 혼란스러운 눈빛에도 장무열은 미미한 흔들림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서로 너울과 면사로 얼굴을 가렸으니.

그녀의 시선에 담긴 안타까움과 놀람이 그에게 전해질 리 없었다.

만약 장무열과의 재회가 이곳이 아니었다면…….

주위에 두 사람을 지켜보는 십학사만 없었다면 당장 너울을 벗고 그에게 묻고 싶었다.

은호, 그대가 왜 여기 있습니까?

지금까지 어디서 무얼 하고 있었습니까?

그러나 그런 의문을 풀기엔 상황이 좋지 않았다.

“이게 누구래유.”

이레 대신 박진봉이 학에게 말을 걸었다.

그의 목소리에 서걱한 역정이 가득했다.

뜻하지 않은 훼방꾼의 출현에 분노한 것이다.

하지만 상대가 학인 것을 알자 금세 태도가 돌변하였다.

자글자글한 주름과 함께 눙치는 미소가 눈가에 떠올랐다.

“대체 이게 뭔 일이래유? 좀 전에 죽었다고 소식을 들었는데, 이래 멀쩡하게 나타나다뉴. 무신 이런 낮도깨비 같은 일이 다 있대유.”

그의 이야기에 여러 곳에 흩어진 학사들이 고개를 돌렸다.

학사들 역시 학의 등장에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저 사람은 학 아닌가?”

“분명 죽었다 들었는데.”

주위의 시선이 모이자 박진봉은 싱글싱글 웃었다.

“보셨쥬? 다들 놀라잖유. 어디서 뭐하다 이제 왔대유. 하도 안 보여서 이승살이 심심해 염라전 구경 간 줄 알았잖아유. 그래도 멀쩡하게 잘 있으니 다행이네유. 그런데 말이쥬…….”

박진봉은 말꼬리를 길게 늘였다.

그가 학에게 잡힌 팔을 눈짓했다.

“이거 좀 놔주면 안 될까유? 나가 미친 개새끼처럼 지랄하는 병이 있슈. 갑갑한 걸 잠깐도 못 참는단 말이쥬. 이래 잡고 있다 발작이라도 하면 우리 학 학사님, 그 반반한 낯짝에 흉이라도 생길 텐데. 그럼 워쩐대유.”

거북의 음성에 살기가 배여 있었다.

어느 사이에 꺼내 든 것인지 잡혀있지 않은 손엔 시퍼런 낫 한 자루가 들려 있었다.

하지만 그의 날 선 위협에도 학은 잡은 손을 풀지 않았다.

“이거 참 곤란하네유.”

분위기가 차갑게 냉각되었다.

당장에라도 피바람이 불 듯 위태로웠다.

그때였다.

“이게 뭐하는 짓들이오?”

서늘한 음성이 학과 거북의 사이로 날아들었다.

해였다.

그가 회의장으로 돌아온 것이다.

“설마, 이 경건한 자리에 피 냄새를 풍기려는 것은 아니겠지?”

“아유, 그럴 리가 있겠슈. 나가 암만 무식혀도 학사님들이 계신 곳에서 그런 흉흉한 일은 안 하쥬.”

낫 든 손을 허리춤으로 돌리며 거북이 말했다.

해의 시선이 학에게로 향했다.

“학, 그대도 거북을 놓아주시오.”

“…….”

“학……!”

거북을 노려보던 학은 해의 거듭된 독촉에 천천히 손을 풀었다.

그제야 차갑게 가라앉은 해의 목소리가 평소처럼 느슨하게 풀렸다.

“학, 그대의 불행한 소식을 접하고 슬픔을 감추지 못하던 참이었소. 이렇게 무사히 다시 보게 되니 얼마나 반가운지 모르겠군. 대체 그동안 무얼 하느라 소식이 없었던 것이오?”

장무열은 대답 대신 소매에서 구겨진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종이엔 한 사람의 얼굴이 그려져 있었다.

이레는 그 초상이 장무열을 그린 것임을 알 수 있었다.

해가 장무열에게 물었다.

“이게 무엇이오?”

“내 목을 가져오면 포상하겠다는 작자들이 있었소.”

여기저기서 놀란 반응이 튀어나왔다.

해가 손을 들어 좌중을 진정시켰다.

“누군가 십학사를 노리고 있단 말이오?”

해의 물음에 학이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다.

“십학사가 아니라 날 노린 청부였소.”

“대체 누가 그대의 죽음을 청부했단 말이오?”

“모르겠소.”

고개를 흔든 장무열은 해를 빤히 응시했다.

“누군지는 몰라도 무척이나 내 죽음을 바란 모양이오.”

자신을 향한 장무열의 찌르는 듯한 눈빛에도 해는 태연했다.

“그대를 노린 자가 누구인지 몰라도, 감히 십학사를 노린 이상 우리 모두의 공적이 된 셈이오. 조직의 능력을 총동원하여 범인을 색출하여 적절한 조처를 하겠소.”

“꼭 그렇게 해주시오.”

“내 장담하겠소.”

장무열과 해 사이에 의미심장한 눈빛이 오고 갔다.

예의 느른한 모습의 해가 좌중을 둘러보았다.

“회의를 재개하겠소.”

***

오후 늦은 시각.

십학사의 모임이 끝났다.

물의 자리를 떠나는 이레는 머릿속이 복잡하였다.

그녀에게 오늘 십학사 모임은 충격의 연속이었다.

‘거북 박진봉이 내 정체를 의심하고 있다.’

박진봉은 집요한 작자였다.

그가 의심하기 시작하였으니 들키는 건 시간문제이리라.

한땀 한땀 공들여 쌓은 탑이 흔들리는 기분이었다.

‘앞으로 어찌한다.’

십학사로서의 삶은 아슬아슬한 외줄 타기와 같았다.

그 피 말리는 여정이 박진봉의 개입으로 크게 출렁거리게 되었다.

마음엔 걸리는 건 비단 박진봉만이 아니었다.

‘은호.’

십학사의 학, 장무열.

그의 숨겨진 정체를 알게 된 이레는 충격과 혼란에서 쉽게 빠져나올 수 없었다.

장무열은 어쩌다 십학사가 된 것일까?

언제부터 십학사였던 것일까?

설마 처음부터 모두를 속인 걸까?

혹여…… 세자 저하의 죽음에 그도 관여한 것일까?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이레는 고개를 저었다.

그간의 사건들을 되새김질하듯 찬찬히 짚어보아도 딱히 장무열을 의심할 만한 일은 없었다.

게다가 사슴이 말하지 않았던가.

공석이 된 학의 자리에 새 사람이 왔다고.

장무열이 십학사가 된 것은 최근에 벌어진 일이 틀림없었다.

그는 어쩌다 십학사가 된 걸까?

그리고…….

“정말 나를 알아보지 못한 걸까?”

회의가 모두 끝날 때까지 장무열은 이레에게 그 어떤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이레의 너울을 벗겨내려던 박진봉에게 맞섰던 그의 행동은 그저 십학사의 규율을 어긴 거북에 대한 반발이었던 듯했다.

그렇다면 정말 다행인데…….

섣불리 짐작하여 안심할 수 없었다.

방법은 하나, 직접 만나 그의 속내를 헤아려보는 수밖에.

이레는 멀어지는 장무열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 그녀는 멈춰 서고 말았다.

“잠시 얘기 좀 할 수 있겠소?”

난데없는 목소리가 그녀를 막아섰다.

늘 해와 대치하던 중년인.

언제나 물의 자리에 앉은 이레를 탐탁잖은 시선으로 응시하던 구름.

그가 평소와 사뭇 다른 모습으로 이레에게 다가왔다.

***

“내 그대와 꼭 한 번 따로 자리를 마련하고 싶었는데, 오늘에야 그 기회를 얻게 되었구려.”

너털웃음을 터트리는 구름을 보며 이레는 의구심을 감출 수 없었다.

“무슨 일이신지요?”

십학사에서 이레와 가장 접점이 적은 사람을 꼽으라면 그녀는 주저 없이 구름을 첫손에 꼽을 것이다.

그만큼 그녀와 구름의 관계는 껄끄러웠다.

이레가 십학사가 되는 것을 가장 반대한 사람도 구름이 아니던가.

그런 사람이 호의 가득한 표정으로 다가오니, 궁금증이 일었다.

“그리 경계할 것 없소.”

“…….”

“내, 그대를 십학사에 들이는 걸 반대했던 건 어디까지나 절차적 문제 때문이었지, 그대에게 자격이 없다 여긴 것은 아니었소. 아무렴 천하의 만사여의에게 자격이 없으면 세상 그 누가 물의 자리에 어울릴까.”

“과찬이십니다.”

이레는 건성으로 대꾸했다.

구름이 무슨 의도로 접근한 것인지는 모르나, 그녀에겐 다른 급한 용무가 있었던 까닭이다.

“송구하오나, 무슨 일인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허허, 무에 급한 일이라도 있는 모양이오.”

“…….”

긍정이 담긴 침묵.

하지만 구름은 쉬이 그녀를 보내줄 생각이 없었다.

“무슨 볼일인지 모르나, 장담컨대 내 용무보다 긴요한 일은 아닐 것이오.”

“긴요한 일이라 하심은……?”

“만사여의께선 지금의 십학사를 어찌 보시오?”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었다.

“무슨 말씀이신지요?”

“허허, 여러 차례 우리의 모임에 참석하였으니, 이제 대충은 십학사의 분위기를 파악하셨을 것이오. 알다시피…….”

구름의 음성이 낮아졌다.

“지금 십학사를 이끄는 해는 무능하기 짝이 없소. 학사들의 불만 또한 극에 달하였으니, 곧 커다란 변화가 있을 것이오.”

전부터 조짐을 보이던 해과 구름 사이의 균열이 마침내 표면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렇습니까.”

이레는 모르쇠로 일관하였다.

마냥 눈치 없는 사람처럼 행동하는 그녀의 대응에 구름의 인상이 일그러졌다.

그러나 불쾌한 감정은 떠올린 것은 찰나에 불과했다.

이내 평정을 되찾은 구름이 말을 이었다.

“그대도 알겠지만, 곧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오.”

“…….”

“작금의 왕이 죽고 우리가 선택한 왕이 보위를 잇는다면, 만사여의가 누릴 수 있는 흥복도 더욱 많아질 터.”

“천하를 거래하자는 십학사의 제안은 이미 받아들였습니다만.”

“어허, 어찌 못 알아듣는 척하는 것이오.”

“무슨 말씀입니까?”

“본디 힘이란 것이 한데 뭉치면 엄청난 괴력을 발산하여도, 열 조각으로 흩어지면 별 볼 일 없는 것이니.”

구름이 큰 인심이라도 쓰듯 말을 이었다.

“만사여의에게 우리와 함께할 기회를 주겠소이다.”

“……이런 기회를 저에게 주는 이유가 무엇인지요?”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거리에서 빌어먹는 거지라도 왕의 자리에 앉혀 놓으면 왕 노릇 하는 법이오.”

이레는 잠자코 구름의 말을 들었다.

“한데, 무릇 놀아본 자가 더 즐겁게 놀 줄 알고, 고기도 먹어본 자가 고기 맛을 즐길 줄 아는 것이니.”

“…….”

“내가 택한 어린 군주에게 베푸는 즐거움을 알려주고 싶소.”

빙빙 둘러 말하고 있으나, 결론은 하나였다.

만사여의가 가진 재물이 필요하다는 뜻이었다.

이레는 자분자분 고개를 숙였다.

“말씀 잘 들었습니다.”

“아직 끝나지 않았소. 그대가 협조하는 대가로 육의전을 비롯한 조선의 상권과 청국과의 무역을 독점할 권리를 넘기겠소.”

이미 모든 권력을 제 손아귀에 쥔 듯 구름이 약조했다.

이레는 침묵했다.

잠시 후.

정적을 깨며 그녀가 입을 열었다.

“사람의 말이란 것이 입 밖으로 흩어지고 나면 아무 소용 없는 것인지라. 지금의 말씀을 문서로 남겨 주실 수 있으신지요?”

“나를 의심하는 것이오?”

“구름 학사를 못 믿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장사치의 어쩔 수 없는 습성으로 생각해 주십시오. 문서를 보여 주시면 수인의 여부를 가늠해 보겠습니다.”

“무어라……?”

기어이 구름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수인하겠다는 것도 아니고, 수인의 여부를 가늠해 보겠다?

구름의 불같은 성화가 고스란히 느껴졌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그럼 저는 급히 만나볼 사람이 있어 먼저 물러가겠습니다.”

이레는 자분자분한 자세로 고개를 숙였다.

내내 자신을 낮추고 있었지만, 명백한 거절.

이런 식으로 휘말렸다간 끝없이 내어주기만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는 법이니.

아쉬운 건 자신이 아닌 저들이었다.

그리고 급히 만날 사람이 있다는 말은 그저 둘러대는 말이 아니었다.

지금 당장.

급하고도 은밀하게 만날 사람이 있었다.

***

“분명 이쪽으로 갔는데…….”

이레는 걸음을 재촉했다.

혹여 놓쳐버린 것은 아닐까.

구름으로 인해 시간을 허비한 이레는 서둘러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 모임 장소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원하는 상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멈추시오.”

이레의 부름에 터덜터덜 걷던 사내가 뒤를 돌아봤다.

“뭐여?”

이레를 본 사내의 눈이 커졌다.

그는 십학사의 거북, 박진봉이었다.

“이건 또 뭔 경우래유?”

박진봉은 이레를 보며 연신 고개를 갸웃했다.

“그 짝이 먼저 찾아올 줄은 나가 상상도 못 했슈.”

그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혼자 왔슈?”

“혼자 왔소.”

“저 짝 풀숲에 누가 숨어 있는 건 아니쥬?”

“궁금하면 직접 뒤져보던가.”

“그럴 필요는 없는 것 같긴 한디…….”

박진봉은 혼자라는 이레의 말을 좀처럼 믿으려 하지 않았다.

“뭘 그리 의심하는 것이오?”

“이상하잖유. 약점 잡힌 사람이 불쑥 찾아왔는데, 얼씨구나 잘 왔슈, 하는 사람이 어디 있대유. 당연히 입막음하러 온 줄 아는 거쥬.”

“그러고 싶어도 힘으로 그쪽을 감당할 자신이 없소.”

“그럼, 참말로 혼자 온 거예유?”

“그렇소.”

박진봉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미쳤슈?”

“…….”

“나가 지금꺼정 별의별 미친년 놈들을 숱하게 만나봤는디유, 그 짝처럼 머리 산발도 안 하고 미친년은 처음 봤네유.”

“내가 왜 미쳤다는 거요?”

“지 멱줄 끊으려고 안달 난 사람을지 발로 찾아가는 게 그럼 제정신으로 할 짓이유?”

“왜 날 죽이려고 하는 거요?”

“나가 말했잖유. 냄새 하나는 기가 막히게 맡는다고유. 설마, 죽일 놈 살릴 놈 구별도 못 하겠슈?”

“고작 냄새로…….”

“그럼 머리에 뒤집어쓴 거 벗어봐유.”

“…….”

“못 벗쥬?”

박진봉이 도발했다.

그의 말처럼 이레는 너울을 벗을 수 없었다.

“근디 단양에서도 느꼈지만 참말루 해괴망측한 사람이네유. 한양 물이 이상혀서 그런가. 암튼 잘 왔슈. 기왕 찾아왔으니 정성을 봐서 편히 보내드릴게유.”

박진봉은 낫을 뽑아 들고 건들건들 다가왔다.

“잠깐!”

“왜유? 죽을 생각하니 갑자기 무서워졌슈?”

박진봉의 살기에 이레의 말투도 거칠어졌다.

“넌 왜 날 못 죽여 안달이지?”

“몰라서 물어유? 그 짝이 나가 하는 일을 사사건건 방해하니께…….”

“애초에 난 오라버니를 찾으러 간 거였다. 네게 개인적인 원한은 없었다.”

“예전엔 없었을지 몰라도 지금은 있잖아유? 사람 사는 게 다 그래유. 누구는 날 때부터 친구 먹고, 원수 먹고 그러남유? 어깨 부대끼며 살다 보면 주먹질도 하고 칼침도 놓고 그러는 거쥬. 왜유? 이제 와 없던 일로 하자구유?”

“그러면 안 될까?”

이레의 반문에 박진봉은 일순 멍청한 표정이 되었다.

“푸하하. 인제 보니 사람 웃기는 재주도 있었네유.”

“목숨 걸고 남 웃기는 사람도 있는가?”

“……그럼, 진심으로 하는 소리란 말이쥬? 집어치슈. 십 년 묵은 원한이 어떻게 하루아침이 없던 일이 되겠슈.”

“그대가 이제 단양 관아의 호방이 아니듯, 나 또한 과거와 다르다.”

“십학사가 되었다 그거쥬? 같은 집안 방석 돌려가며 쓰게 됐으니, 이제부터 한 식구다, 이 말이쥬? 웃기지도 않네유. 어디서 뻔한 수작이래유. 누가 그 시커먼 속을 모를까 봐서유?”

박진봉은 어느새 이레의 코앞까지 이르렀다.

“유언은 다 읊은 거쥬?”

그가 시퍼렇게 벼려진 낫을 들었다.

이레는 어금니를 지그시 사려 물었다.

그러곤 말했다.

“결국, 너는 버려질 것이다.”

우뚝.

이레의 목을 향하던 박진봉의 낫이 우뚝 멈춰졌다.

“뭐여? 또 무슨 개수작이래유?”

“학사들 간의 분위기가 흉흉한 건 진즉 알고 있겠지. 곧 크게 충돌할 일이 벌어질 것이다.”

“해와 구름 말여유? 맘대로 하라 그래유. 어차피 높은 양반들의 땅 재먹기 같은 거 아니겠슈.”

“그럴 테지. 누가 십학사의 우두머리가 되건, 너와는 하등 상관없는 이야기일 테니. 그렇게 더러운 허드렛일에만 이용당하다 나중에 쓸모없어지면 버려질 테지.”

구름이 이레에게 결탁을 제안했을 때, 정작 그녀의 머릿속엔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십학사의 정점은 해와 구름이다.

두 사람 모두 조정의 정치 권력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그럼, 양반도 아니고 든든한 배경도 연줄도 없는 거북은 어떨까?

거북은 십학사 내에서도 이질적인 존재였다.

그 누구에게도 대우받지 못하는 천덕꾸러기.

비천한 출신과 거친 태도 탓이었다.

그리고 그런 상황은 설사 십학사의 세력 구도가 변한다 해도 바뀌지 않을 터였다.

그렇다면…….

이레는 승부를 걸어보려 마음먹었다.

어차피 거북이 수작을 걸면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면.

그런 이유로 이레는 과감하게 박진봉을 찾아간 것이다.

그녀의 도박은 놀랍게도 박진봉의 흥미를 이끌어냈다.

“말 한번 번지르르 하네유. 그럼, 그 짝과 결탁하면 뭐가 달라지는데유?”

“달리지는 건 없다.”

그녀의 능력으로는 박진봉의 신분이나 대우를 바꿔주는 건 불가능하다.

아니, 애초에 가능하다 해도 박진봉과 같은 살인귀를 돕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지금 장난해유? 사람이 말여유, 뭔가 협상을 하려면 적당히 이득을 노나먹을 생각도 하고, 그래야쥬. 안 그래유?”

박진봉은 아이 구슬리듯 말했다.

하지만 이레는 알 수 있었다.

그의 말이 진심이 아님을.

단순히 상대를 희롱하기 위한 수작.

그는 돈 따위 연연하여 십학사에 들어온 사람이 아니었다.

다행히 이레도 이 도박에 금전적인 이득을 걸 생각은 없었다.

“단 한 번.”

“뭐유?”

“쓸모없어진 그대가 버려질 때, 내가 그 사실을 미리 알려주지.”

박진봉은 피식 웃었다.

그는 이레의 하얀 목에 장난스럽게 낫을 흔들었다.

“구해주는 것도 아니고, 고작 알려주겠다? 보장도, 담보도 없이, 지킬지 안 지킬지 알 수도 없는 그깟 약속을 믿으란 말여유?”

이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너에게 제안할 수 있는 건 고작 그 약속뿐이다. 하지만 절체절명의 순간이 왔을 때, 어쩌면 그 사소한 약속이 네 생명을 지켜줄지도 모르지.”

“결국엔 약속 뿐이잖유. 어쩔까? 그냥 낫질 한 번 션하게 하고 끝내는 게 서로 깨끗하지 않겠슈?”

“…….”

박진봉의 협박에도 이레의 눈빛은 무뎌지지 않았다.

결국, 먼저 흔들린 쪽은 박진봉이었다.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벅벅 긁던 그가 이레에게 넌지시 물었다.

“……지킬 거유?”

이레는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약조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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