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 학(鶴)
이레는 물의 자리에 앉았다.
갑작스럽게 열린 십학사의 모임.
모임의 시간이 조금만 빨랐어도 참석하지 못할 뻔하였다.
표면적으로 드러난 이레의 일상은 낮 동안 정안당에서 바느질 품앗이를 하는 것이었다.
그러니 행여 늦은 시각이나, 너무 이른 새벽 모임에는 참석이 어려웠다.
생각지도 못한 문제.
애초에 십학사가 될 생각도 없었으니, 대책 마련도 쉽지 않았다.
한 고개 넘어섰더니 또 다른 산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다고 가던 걸음을 멈출 생각일랑 없었다.
걱정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니.
우선은 당장 직면한 문제부터 정리하리라.
바로 ‘정후겸’이라는 문제.
이레의 뇌리로 어제저녁의 일이 떠올랐다.
형운을 찾아온 정후겸의 정체가 십학사의 해라는 사실을 알고 얼마나 놀랐던가.
어릴 적부터 이레의 눈썰미는 남달랐다.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잊는 일이 드물었다.
그럼에도 정후겸을 해와 연결하지 못했던 것은 두 사람의 지위와 위치가 전혀 어울리지 않아던 까닭이다.
화완 옹주의 양자이자, 왕의 총애를 한몸에 받는 그가 대체 무엇이 아쉬워 십학사가 된단 말인가?
‘아니, 맛보면 맛볼수록 더욱 갈증이 이는 것이려나.’
권력.
더 큰 힘.
절대적인 지위를 원한다면, 십학사가 되지 못할 것도 없다.
다만…….
‘그렇다면 어제 한 말은 무슨 뜻일까.’
정후겸은 형운에게 말했다.
세손의 복위를 바란다고.
단순히 예의로 한 말이 아니었다.
형운을 보는 그의 눈빛에 진심이 담겨 있었다.
해를 보는 이레의 시선이 복잡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화완 옹주의 양자이면서 십학사의 해.
그런 그가 형운의 복위를 바라고 있다.
궁으로 돌아가 제 자리를 찾길 원한다.
십학사가 그간 저지른 숱한 악행과 탐욕을 아는 이레로서는 해의 발언이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녀와 달리 해는 태연하였다.
느른한 자세로 의자에 비스듬히 앉은 그는 열린 동창 밖을 바라보았다.
다른 학사들과 적당히 거리를 둔 채 이따금 찾아와 말을 거는 사람들에게 간단한 인사말만을 주고받을 뿐이다.
눈앞의 사내를 보면서도 이레는 실감 나지 않았다.
시전의 여장부 만사여의에게 십학사와의 공존을 권유했던 사내.
화완 옹주의 양아들.
그리고 십학사, 해.
이 모두가 한 사람이었다.
더더욱 놀라운 것은…….
정후겸은 굳이 자신의 정체를 숨기지 않았다.
“선택하셨나요?”
상념에 잠긴 이레에게 누군가 말을 걸었다.
매혹적인 눈웃음을 뿌리며 이레의 옆자리에 앉는 여인.
사슴이었다.
사슴은 이레를 향해 상체를 기울이며 친근함을 보였다.
“갑자기 무슨 일인지 모르겠어요. 만사여의께선 무에 귀띔받은 거라도 있으세요?”
“글쎄요.”
“구름 학사께서 보름의 제례와 관련하여 조정 대신들의 의견을 모으고 있다고 하던데. 그 일 때문일까요?”
“제례가 멀지 않았으니, 마음이 급해지셨나 봅니다.”
“만사여의께선 어느 쪽을 택하실 겁니까?”
“……?”
“구름 학사의 뜻하는 대로 어린 대군을 택하시겠어요? 그것이 아니면 다른 분을 내세우실 겁니까?”
“사슴께선 어찌하실 겁니까?”
“저는 언제나 그랬듯…….”
사슴의 얼굴에 영리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가 이레에게 속삭였다.
“이기는 쪽을 택할 겁니다.”
“이기는 쪽이라면……?”
사슴이 마주 앉은 구름과 해를 번갈아 응시했다.
이레 역시 두 사람에게 차례로 시선을 보냈다.
구름의 의중은 확실했다.
왕세자에게 버림받은 후궁의 아들.
아비에 대한 원망으로 똘똘 뭉쳐진 어린 대군으로 하여금 다음 보위를 잇게 할 작정이었다.
그렇다면…….
이레는 이번에는 해를 바라보았다.
일반적인 상식이라면 그 역시 구름의 의견대로 어린 대군을 선택하는 게 옳았다.
그것이 아니면 폐세손이 아닌 누군가를…….
그런데 이 예상을 깨고 정후겸은 형운을 찾아왔다.
폐세손의 복위를 바란다던 그의 말이 아직도 이레의 귓가에 선명했다.
그의 말은 진심일까?
만약 진심이라면 그의 속셈은 무얼까.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앞에서 이레의 생각이 깊어졌다.
촘촘한 너울 안쪽의 눈빛이 느껴진 듯 해가 고개를 돌려 이레를 빤히 응시했다.
그녀를 바라보던 그의 눈가가 초승달 모양으로 여며졌다.
속을 알 수 없는 흐릿한 미소.
이레는 고개를 돌려 그 미소를 외면했다.
이내 탕탕, 해가 가볍게 탁자를 내리쳐 주의를 끄는 소리가 들려왔다.
“모두 모인 듯하니, 지금부터 회의를 시작하겠소.”
기다렸다는 듯 구름의 목소리가 뒤따라 나왔다.
“모두 모인 건 아니지. 새로운 학의 모습은 이번에도 못 보는 것이오?”
구름의 추궁이 이어졌다.
“그자, 진정 십학사가 될 의지가 있는 것이오? 해, 그대가 천거한 사람이니. 어디 해명해 보시오.”
“마침 그 일에 대해 말하려던 참이었소.”
해가 깍지 낀 손등에 턱을 괬다.
모두가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레 역시 귀를 기울였다.
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벌어졌소. 얼마 전 새로 십학사의 학이 된 그 사람은…….”
***
“……사실이냐?”
형운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오늘도 어김없이 궁을 찾았다.
끝내 왕을 만나지 못하고 침전의 붉은 대문 앞에서 돌아서야 했다.
삭막한 표정으로 육조 거리를 걷는 그에게 홍국영이 은밀하게 접근했다.
얼마 후.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긴 형운이 홍국영에게 듣게 된 소식은 충격 그 자체였다.
“사헌부의 집의, 장무열이 정말로 죽었단 말이냐?”
믿을 수 없었다.
아니, 믿기지 않는 소식이었다.
사헌부의 집의, 장무열.
그가 죽다니…….
참람한 감정이 형운의 얼굴 위로 떠올랐다.
장무열의 비극은 그에게 남달랐다.
가까운 혈육조차 모르는 장무열의 또 다른 이름.
은자원의 은호.
은호의 죽음은 형운에게 남다른 의미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사옵니다. 오늘 새벽, 소식이 사헌부로 전해졌나이다. 이 일로 사헌부가 발칵 뒤집혔사옵니다.”
“어디서? 어떻게?”
“저하…….”
예상과 달리 형운의 반응은 격렬했다.
홍국영의 눈동자에 의구심이 떠올랐다.
장무열의 죽음이 궁 안팎의 권력 구조를 뒤흔들 큰 사건이라는 건 그 역시 인정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형운의 반응은 홍국영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대단했다.
“소식을 전해 듣기 무섭게 어사대를 파견하였으니, 곧 세세한 상황을 들 수 있을 것이옵니다.”
이어지는 홍국영의 보고에 형운은 성큼 그에게 다가섰다.
“시신은?”
“네?”
“장무열의 시신을 보았느냐?”
***
“아직 시신을 발견하지 못했으나, 안타깝게도 그의 죽음은…… 확실하오.”
해의 비통한 음성이 실내를 가득 채웠다.
“이런 애통한 일이.”
사슴의 안타까운 중얼거림을 신호로 십학사들 사이로 술렁임이 번져나갔다.
더러는 놀라고, 더러는 당황했으며, 또 몇몇은 의미심장한 눈빛을 교환했다.
이레는 가라앉은 눈으로 옆자리를 보았다.
텅 빈 학의 자리.
그녀가 십학사가 된 이후, 언제나 학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안타깝게도 죽음을 맞이했다니, 앞으로도 영영 볼 수 없으리라.
그와는 아무런 인연도 없건만, 이상하게도 마음이 쓰였다.
대체 어떤 사람이었을까?
어쩌다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을까?
“누구의 소행이오? 혹시 그가 우리 십학사의 일원이라는 걸 알고 누군가 벌인 일은 아니오?”
구름의 물음에 해는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아직 자세한 사연은 파악하지 못했소. 그의 죽음이 개인적인 원한인지, 아니면 우리 십학사를 노린 누군가의 소행인지.”
해는 비통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하게 약속하겠소. 그를 죽게 한 원인이 무엇이건, 감히 십학사를 능멸한 대가를 철저하게 치르게 되리라는 것을.”
십학사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두텁게 가라앉은 고요를 깬 것은 이번에도 구름이었다.
“참으로 애통한 일이 아닐 수 없소. 학에게 어쩌다 그런 불행을 마주한 것인지, 쯧쯧. 학의 죽음에 배후가 있다는 것이 밝혀진다면, 내 기꺼이 그의 복수를 위해 나설 것이오. 하나…….”
구름은 어울리지 않게 말끝을 길게 늘였다.
그는 이내 수염을 쓸어내리며 본색을 드러냈다.
“언제까지 학의 자리를 공석으로 둘 수도 없질 않겠소. 오늘 이리 모인 참에 새로 학의 자리를 메울 사람을 논의하는 것이 어떠하오?”
해와 가까운 자리에 앉은 바위가 언짢은 기색을 내비쳤다.
“험험, 눈물이 마르기도 전에 다음 사람을 논의하자 하시다니. 참으로 무심하시오. 마치 학이 죽길 기다린 사람 같소.”
“어허, 그런 막말이 어디 있소?”
“상황이 그렇지 않소. 당장 학의 자리를 채우지 않는다고 하여, 큰일이 벌어질 것도 아니거늘. 자리의 온기가 사라지기도 전에 다른 사람을 물색하지 하니. 혹여 구름 학사께선 이번 사달과 무슨 관련이라도 있소?”
“무어라? 지금 나를 의심하는 것이오?”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허허, 그렇다면 학의 자리를 공석으로 계속 두자는 말이오? 저 자리가 얼마나 오랫동안 비었는지 잊었소?”
“그래도 사람의 정이 있지 않겠소.”
바위의 말에 구름은 코웃음 쳤다.
“지금 사람의 정이라 하였소?”
“…….”
“정녕 학의 자리가 무얼 의미하는지 모르지는 않겠지요? 중차대한 일이 코앞으로 다가왔소이다. 학이 없으면 기강을 바로 세울 수 없소. 우리가 어디 사사로운 뜻으로 이 자리에 있는 것이오? 나라의 앞날을 염려하고, 바로 세우기 위해 모인 것이 아니오? 학의 죽음은 분명 안타까운 일일 것이나, 정리만을 앞세워 대의를 저버려선 아니 될 것이오.”
바위와 구름 사이로 사슴이 끼어들었다.
“분명, 구름의 말씀은 옳습니다. 하지만 이번 학의 죽음은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습니다.”
“사슴, 그대마저……쯧쯧.”
“또다시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 것이라 누가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그보다 저는 학의 죽음을 조사하자는 말을 자꾸만 막으려 하시는 구름 학사의 태도가 오히려 이상스레 보입니다.”
“사슴, 말조심하오!”
구름과 사슴의 분쟁이 이어졌다.
나머지 학사들의 의견 역시 양분되었다.
절반 가까운 자들은 구름을 지지했고, 나머지 절반은 사슴의 생각에 동조했다.
이레는 묘한 시선으로 사슴을 보았다.
영리함을 넘어서 종종 영악함을 보였던 사슴의 태도라고 보기 어려웠다.
어찌하여 구름과 맞서는 걸까?
의문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학의 돌연한 죽음이 구름과 연관이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의구심에 사슴은 부채질하고 있었다.
사슴의 저의를 파악하지 못한 구름이 내놓아서는 안 될 말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정녕 죽고 싶은 것이오?”
분을 참지 못한 구름의 말을 사슴이 되받아쳤다.
“저도, 죽게 되는 겁니까?”
잘게 물결치는 목소리.
나긋한 음성에 두려움이 깃들었다.
여기저기서 불편한 헛기침이 흘러나왔다.
뒤늦게 사슴의 의도를 파악한 구름이 성을 냈다.
“지금 보니 나를 궁지에 몰아넣고 있었군. 지금 무얼 하는 짓인가?”
찰나.
해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두 학사 모두 그만두시오.”
구름을 바라보던 해는 시선을 사슴에게로 옮겼다.
“사슴의 말이 지나쳤소.”
해의 지적에 사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구름에게 다소곳이 허리를 접었다.
“송구합니다. 아둔한 여인이 함부로 입을 열었습니다.”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라…….”
“마음 푸십시오.”
진심 어린 사슴의 사죄가 이어졌다.
이윽고 그녀는 고개를 돌려 주위의 학사들을 둘러보았다.
“학 학사의 돌연한 죽음으로 제가 조금 흥분하였습니다. 허락하신다면 잠시 밖으로 나가 바람을 쐬었으면 합니다.”
“그러는 것이 좋겠소.”
해가 허락했다.
학사들이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사슴이 서둘러 밖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사슴이 돌아올 때까지 잠시 쉬겠소.”
회의의 중단을 선언한 해가 자신의 상징이 그려진 휘장 뒤로 사라졌다.
구름의 분통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학사들은 크게 귀 기울이지 않았다.
이레는 저도 모르게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니께…….”
새삼 사슴에게 감탄하는 이레의 곁으로 반갑지 않은 기척이 불쑥 다가왔다.
“참말로 이상하지 않아유?”
굳이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존재.
“저 사슴 학사 말유, 냄새도 좋구, 행실도 앵간히 좋은디유, 근디 속은 얼매나 독한지 몰라유.”
일평생 땅만 보고 산 무지렁이.
박진봉의 말하는 모양새를 듣다 보면 누구나 그를 얕잡아 보게 된다.
하지만 이레는 알고 있었다.
그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박진봉의 섬뜩하고 음험함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자리가 잘못 됐슈. 저 처자는 껍데기만 사슴이유. 속은 백여시가 따로 없슈.”
그의 구수한 목소리엔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있었다.
이레는 등줄기를 꼿꼿하게 세우며, 냉랭하게 반문했다.
“그런 이야기를 내가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요?”
그 와중에도 혹시 그가 눈치챌까 싶어 목소리를 낮게 변조했다.
이 또한 만사여의로 탈바꿈하기 위한 준비 과정 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그녀의 거부 의사에도 불구하고 박진봉은 물러가지 않았다.
오히려 더 가까이 다가서며 능글맞게 웃었다.
“여자는 다 똑같은 게 아닌가 싶어서유.”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특별히 할 말이 없으면 그만…….”
껄끄러운 자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레는 몸을 돌렸다.
그때였다.
등 돌린 이레에게 박진봉이 웃음기 섞인 질문을 던졌다.
“누구래유?”
“……!”
***
“혹시…… 단양 간 적 없슈?”
박진봉의 물음에 이레는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발아래 똬리 튼 뱀이라도 본 것마냥 굳어 버렸다.
“나가 여기 오기 전에 단양에서 아전 노릇을 좀 했슈. 그때 묘한 기집을 만났단 말이쥬. 이건 겉은 사내모습을 했는데, 속은 영락없이 기집이지 뭐유. 근디 이 기집이 제 신세도 모르고, 사라진 제 오라비 찾겠다고 두 눈 벌게져서 돌아다니지 않겠시유? 가당치도 않은 짓거리를 해대서 언제 한번 제대로 손 봐주려고 벼르고 있었슈. 그런데 말이유…….”
독 오른 그의 목소리가 이레의 목덜미를 파고들었다.
“그 짝한테서 그 기집 냄새가 난단 말이쥬.”
“…….”
이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알아본 거야?
박진봉이 자신의 정체를 알아차린 건가?
눈앞이 캄캄해졌다.
무어라 변명해야 하나.
“왜 대답이 없대유. 요래 사람이 묻고 있잖유. 나가 하는 말을 무시하는 거여유? 아니면…….”
박진봉이 이레의 얼굴을 덮은 너울을 향해 돌연 손을 뻗었다.
짧은 순간, 많은 일이 그녀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형운과의 만남.
자신을 바라보던 그의 미소.
만약 내가 사라진다면, 그분께선 어찌하려나.
이 위험한 자들의 음모와 배신의 칼끝을 홀로 버티셔야 하나.
안 돼.
그리 홀로 싸우게 할 순 없어.
이레는 황급히 상체를 뒤로 물렸다.
턱!
다행히 박진봉의 갈퀴 같은 손은 이레의 얼굴을 가린 너울 한 치 앞을 스치고 지나갔다.
“뭐하는 짓이오?”
매서운 그녀의 음성에 사방으로 흩어졌던 학사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그러나 박진봉은 집요했다.
“뭐하는 짓이긴유. 얼굴 한번 보자는 짓이쥬.”
말과 함께 그가 다시 손을 뻗었다.
찰나.
“이곳에선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불문율인 줄 알았는데. 내가 잘못 알고 있었소?”
누군가 이레를 향한 박진봉의 무례한 손을 거둬냈다.
호통이 담긴 묵직한 음성.
언제부터였을까?
이레의 등 뒤에 사내 하나가 서 있었다.
재빨리 박진봉과 거리를 벌린 이레는 자신을 도와준 사내를 돌아보았다.
유난히 훤칠한 키.
너르고 반듯한 어깨.
얼굴의 절반을 가린 하얀 복면.
그리고 복면 위에 수자 놓인 학 한 마리.
“……학?”
“저 사람은 학 아니오?”
“학이라면, 죽었다 하지 않았소?”
“죽었다던 그가 어찌…….”
사내는 학이었다.
죽었다던 그가 갑자기 모습을 보인 것이다.
학사들의 놀란 탄성과 신음이 흘러나왔다.
이레 역시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가 놀란 이유는 학사들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은호.’
착각이 아니었다.
바닥에 깔리는 낮고 묵직한 그의 음성.
강하고 날카로운 기세가 서린 눈빛.
사헌부의 집의이자 은자원의 범(虎).
장무열이 틀림없었다.
사라졌던 그가 돌아왔다.
십학사의 학이라는 새로운 신분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