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택-왕들의 향연-130화 (130/215)

#130. 그쪽 바닥은 내가 전문가거든

“저하…….”

이레는 말없이 형운의 손을 그러잡았다.

맞잡은 손끝으로 그의 감정이 가감 없이 전해졌다.

분노.

무람없이 자신의 여인에게 손을 댄 정후겸을 향한 날카로운 기세.

“저하, 아무 일도 아닙니다.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이레의 작은 속삭임이 형운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그럼에도 형운은 여전히 성화를 거두지 않았다.

이레에게 집요하게 달라붙었던 사내를 무서운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아무래도 오해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정후겸이 뒤늦게 고개를 숙였다.

“세손 저하께 다시 인사 올리겠나이다. 소인, 정후겸이라 하옵니다.”

형운의 등 뒤에 서 있던 이레는 정후겸의 이름에 놀람을 감출 수 없었다.

정후겸.

낯설지 않은 이름이었다.

곧 형운의 날 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대가 누구인지 다시 언급할 필요 없다. 정후겸, 그대가 화완 고모님의 양자(養子)라는 건 알고 있으니.”

형운의 말에 이레의 심장이 무섭게 날뛰었다.

왜 이제야 기억해낸 것일까.

정후겸이란 이름 석 자.

슬하에 자식이 없는 화완 옹주가 뒤늦게 얻은 양자가 바로 정후겸이었다.

또한, 만사여의 행세를 하는 이레를 찾아와 천하를 논하자 했던 그 사내가 아니던가.

십학사의 은밀한 회합에서 그녀에게 학사가 되길 권했던 사내.

맙소사.

그녀를 십학사로 끌어들인 사람인 화완 옹주의 양자였다니.

이레는 형운의 어깨너머로 정후겸을 훔쳐보았다.

그는 만사여의를 찾아왔을 때와는 전혀 다른 표정, 다른 눈빛을 하고 있었다.

기묘하도록 나른하고 권태로운 눈빛을 짓던 그때와 달리 그는 유약하면서도 절대 꺾이지 않는 담담함을 품고 있었다.

우연이었을까.

정후겸이 시선을 돌려 이레와 눈을 마주쳤다.

그의 눈썹 끝이 부드럽게 여며지며 미소를 그렸다.

분명 미소임에도 불구하고 왠지 모를 섬뜩함이 느껴졌다.

이레는 저도 모르게 등을 꼿꼿하게 폈다.

그녀의 긴장이 전해진 것일까?

보호라도 하듯 형운이 한 발짝 성큼 앞으로 나섰다.

“네가 누구인지, 내겐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그럼, 무엇이 중요하나이까?”

“네가 감히 내 여인에게 무례를 저질렀다는 점.”

“아!”

짧은 탄성을 흘린 정후겸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반가의 여인을 희롱한 죄, 결코, 가볍지 않다는 건 알고 있을 터.”

“희롱이라뇨. 어찌 제가 감히 그런 짓을 저지를 수 있겠나이까. 다만, 빈궁마마의 자태에 제가 아는 분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추태를 보이고 말았사옵니다.”

“변명이 구차하구나.”

형운은 칼처럼 단호했다.

본디 귀하게 태어났다고 하나, 작금의 상황이 여의치 않음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게다가 상대는 정후겸이니.

정국의 형세나 궁내의 입지를 따져도 형운보다 정후겸의 상황이 훨씬 유리했다.

평소라면 냉정히 앞뒤의 상황과 전후의 사정을 파악했으리라.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좀처럼 흥분하는 일이 없던 형운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그는 날카롭게 날을 세운 채 정후겸을 노려보았다.

자신을 무시하는 것은 상관없었다.

그러나 이레에게 무례하게 구는 건 용납할 수 없었다.

상대가 제아무리 대단한 권세를 가진 자라 하여도 상관없었다.

그 성성한 기세에 언제나 소 닭 보듯 무시하던 문지기마저 화들짝 놀라 몸을 숨길 정도였다.

“소인, 무언가에 집중하면 좌우를 살피는 주변머리가 없사오니, 부디 용서하십시오.”

“용서를 빌려면 당사자에게 빌어야지.”

냉랭하게 굳은 형운의 표정은 좀처럼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정후겸이 이레를 향해 정중하게 머리를 조아렸다.

“용서하십시오. 큰 무례를 저질렀나이다.”

“그만하면 되었습니다.”

이레는 이쯤에서 사태를 마무리 짓고 싶었다.

이런 소란은 형운에게 전혀 이롭지 않았다.

형운은 고개를 돌려 이레와 시선을 맞췄다.

그가 눈으로 물었다.

‘이쯤에서 그만하오?’

‘네, 충분합니다.’

형운과 이레, 두 사람 사이에 소리 없는 대화가 오고 갔다.

굳이 입 밖으로 끄집어내지 않아도 전해지는 마음.

형형했던 형운의 안광이 조금은 눅진해졌다.

이레는 형운과 맞잡은 손에 은은하게 힘을 주었다.

곁에서 둘의 눈치를 살피던 정후겸이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세손께서 빈궁마마를 아끼시는 마음이 지극하다 들었는데…….”

정후겸의 시선이 깍지 낀 이레와 형운의 손을 향했다.

“이처럼 직접 보니 참으로 아름다운 광경이옵니다.”

노골적인 시선에 이레는 서둘러 형운과 잡은 손을 풀려 하였다.

그러나…….

어림없소.

형운은 더욱 단단히 그녀를 잡쥐었다.

“부부가 함께하는 것이 무에 별스러운 일일까. 다만, 이미 폐서인된 나를 아직 세손이라 부르고, 내 여인에겐 빈궁이라 하니 호칭이 별스럽구나.”

“형편이 변하였다고 어찌 타고난 천품마저 변할 수 있겠사옵니까. 하나, 앞으로 다른 사람 앞에서는 조심하겠나이다.”

고분고분한 정후겸의 대답에 형운이 고개를 저었다.

“조심할 필요가 무에 있겠느냐. 다시 만나지 않으면 그만인 것을.”

“비록 양자가 되어 맺은 인연이긴 하오나, 저하와 소인, 한 집안사람이 분명한데. 어찌 다시 만나지 말자 하시옵니까. 자주 안부 여쭙겠나이다.”

“자주 보겠다?”

형운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그가 한 걸음 정후겸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귓속말로 속삭였다.

“염탐하겠단 소리냐?”

“네?”

“이제 와 친분을 쌓겠다고 이러는 건 아닐 터.”

“무언가 오해를…….”

“어색한 미소 따위 집어치워라. 네 녀석의 눈 속에 시커먼 속셈이 꿈틀거리고 있으니.”

“…….”

“염탐이냐? 감상이냐? 목적부터 분명히 하거라.”

속마음을 들킨 정후겸이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그가 형운에게만 들리는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염탐이라 하면 어찌하실 것인지요?”

“팔다리를 부러뜨려야지.”

“제가 그리 당하면, 제 배후에 계신 분께서 가만두고 보시겠습니까?”

은근한 협박에도 형운은 코웃음을 쳤다.

“그 전에 너부터 온전하지 못할 것이다.”

“세손 저하. 풍문으로 들은 것과는 성품이 전혀 다르신 것 같사옵니다.”

“왜? 아니꼬우냐?”

“……불쾌하냐 물으신 것이라면…….”

정후겸의 얼굴에 표정이 돌아왔다.

하지만 그 표정은 언제나 짓던 미소가 아니었다.

나른하고 시큰둥했던…….

의욕을 잃은 힘없는 미소가 아닌, 최후의 결전을 앞둔 맹수의 그것을 닮은 과격한 미소였다.

“진심으로 기쁘옵니다. 세손 저하.”

“어인 이유로 네가 기쁠까?”

“진심을 밝히자면…….”

정후겸이 형운의 귓가에 속삭였다.

“저하께서 이대로 무기력하게 나가떨어지는 것은 아닐까, 심히 걱정이었사옵니다.”

형운은 차갑게 웃었다.

“걱정하지 마라. 내 아직 기력을 잃지 않았으니.”

“정말 다행이옵니다.”

정후겸이 크게 한발 물러섰다.

그리고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이미 언급하였듯 오늘은 저하와 빈궁마마께옵서 무탈하게 계신지 궁금하여 찾은 것이옵니다. 아무래도 오늘은 날이 아닌 듯하니, 다음에 다시 찾겠사옵니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는 그만 되었다. 앞으론 굳이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특히 내 여인에게 감히 먼저 다가서는 일은 절대 하지 마라.”

“명심하겠나이다. 다시는 아까와 같은 무례는 범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다시 찾지 말라는 무정한 말씀만은 마옵소서. 언제나 소인은 자나 깨나 저하 생각뿐이니. 부디, 소인의 진심을 알아주십시오.”

“왜 구태여 마음에도 없는 날 만나려 하느냐?”

형운의 물음에 정후겸이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세손 저하의 복위를 바라니까요.”

“무어라?”

“소인, 저하께서 궁으로 돌아오시길 간절히 바라고 있나이다.”

“…….”

형운은 말없이 정후겸을 응시했다.

깊은 바닷속에 빠진 듯 무겁고 어둑한 고요가 내려앉았다.

좀처럼 무게를 떨쳐낼 수 없는 묵직한 침묵을 찢고 정후겸은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하오면 다시 뵙는 그 날만을 간절히 고대하겠나이다.”

정후겸은 그렇게 사라졌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그만 들어갑시다.”

형운은 이레의 손을 잡고 몸을 돌렸다.

그를 따라 안으로 걸음을 옮기던 이레는 저녁노을만큼이나 멀어진 정후겸의 그림자를 돌아보았다.

저 사내의 저의가 궁금하였다.

대체 무슨 목적일까?

형운의 복위를 바란다는 말은 진심일까?

아니면 다른 의도가 숨어 있는 것일까?

형운이 자상한 목소리로 그녀를 다독였다.

“저자의 말을 깊이 생각할 필요 없소.”

“속을 알 수 없는 자입니다. 저하께 접근하는 저의가 분명 있을 겁니다.”

“알고 있소.”

“거리를 두어야 합니다. 경계해야 마땅합니다.”

문득 걸음을 멈춘 형운이 이레를 내려다보았다.

무릎을 굽혀 그녀와 시선을 마주한 형운이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걱정 마시오. 그대의 걱정. 내 이미 알고 있으니.”

단순한 대답에 불과했지만, 이레는 불안하던 마음이 이상할 정도로 가라앉았다.

걱정 마라.

내 이미 모두 알고 있으니.

그 말속에 정말로 모든 대책이 마련되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레는 형운을 말간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내내 둥지 안에서 웅크리고 있던 하늘새가 천천히 날개를 펼치기 시작했다.

날갯짓을 위해 차근차근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어찌 그리 보시오?”

“든든하여서요.”

“앞으론 더 단단한 바람막이가 되어주리다.”

“오라버니께서 들으시면 섭섭하시겠는걸요.”

늘 자신의 바람벽이 되어주겠노라, 버릇처럼 말하던 기대를 떠올렸다.

이레의 중얼거림에 형운이 불현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고 보니, 은마가 도통 아니 보이오.”

“오라버니 말씀이십니까?”

“그렇소. 아무 때나 불쑥불쑥 고개를 내밀던 그가 요즘은 도통 모습을 보이지 않는구려. 혹, 어디에 갔는지 아시오?”

“제가 오라버니께 사소한 부탁을 하였습니다. 아마 지금쯤 그 일을 해결하러 다니시고 계실 것입니다.”

“부탁? 무슨 부탁?”

“비밀입니다.”

이레는 먼 허공을 바라보았다.

오라버니, 별일 없으시려나?

부디 사소한 부탁이었어야 할 터인데.

어둠이 내려앉은 서산으로 하나둘 저녁별이 뜨기 시작했다.

***

쏴아아아아아!

억수 같은 장대비.

장무열은 무섭게 쏟아지는 빗줄기 너머를 쏘아보았다.

물에 떨어진 먹처럼, 자욱하게 번져가는 밤 그늘.

부옇게 차오른 물안개.

그 어둡고 부연 시야 너머에 복면을 뒤집어쓴 흑의인들이 장승처럼 서 있었다.

모두 다섯.

하나같이 시퍼런 흉기를 들고 있었다.

또 나타났군.

오늘만 세 번째인가?

아니, 네 번?

“용케 여기까지 도망쳤구나. 하지만 네놈의 발악도 오늘로 끝이다.”

흉험한 살인 예고에도 정작 장무열은 다른 생각을 떠올리고 있었다.

저들은 어째서 하나같이 저런 말을 하는 걸까.

실력에서 나오는 자신감?

아니면 월등하게 많은 수를 믿는 것일까?

그러고 보니 모두가 저런 식으로 나온 것은 아니었구나.

함정을 파거나 숨어서 몰래 기습하는 자들도 있었으니.

지금처럼 정면에서 당당히 맞서는 자들은 대개 제 실력을 믿어 의심치 않는 부류였다.

“왜 대답이 없느냐? 벌써 겁이라도 집어먹은 것이냐. 걱정 마라. 곧 염라대왕 앞에서 편하게 하소연하는 신세가 될 터이니.”

우두머리의 말에 다른 흑의인들이 낄낄 배를 잡고 웃었다.

장무열은 일일이 대답하기도 귀찮았다.

웃을 힘도 없는데, 저급한 도발에 일일이 반응할 여유가 어디 있을까.

그는 말 대신 손가락을 까딱였다.

‘잔소리 말고 덤벼라.’

“이놈이!”

흑의인의 눈이 일그러졌다.

“관을 봐야 정신을 차릴 놈이로군. 쳐라!”

“죽어라!”

“하앗!”

흑의인들이 빗줄기를 가르며 달려들었다.

눈앞으로 짓쳐들어오는 진득한 살기.

장무열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검이나 제대로 쥘 수 있으려나.

그의 우려와 달리 흑의인들의 살기에 몸이 먼저 반응했다.

서걱! 카각! 푹!

치열한 쇳소리와 절삭의 날카로운 소음이 연속적으로 들려왔다.

그때마다 귓전을 메우던 사내들의 거친 숨소리와 신음이 하나둘 발밑으로 꺼져버렸다.

그렇게 모든 숨소리가 가라앉았다.

쏴아아아!

잠시 망각했던 빗소리가 다시 돌아왔다.

장무열은 무릎을 꿇고 앉은 흑의인 앞에 섰다.

그를 비웃던 흑의인들의 우두머리였다.

복부에 치명상을 입은 그는 먼저 수하들처럼 죽음을 면치 못할 신세였다.

우두머리가 입가를 뒤틀며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짰다.

“참으로…… 대단하군.”

무심한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던 장무열이 물었다.

“누구의 명을 받은 것이냐?”

“흐흐.”

우두머리는 생기가 사라져 파랗게 질린 입술로 억지웃음을 흘렸다.

“알아서 뭐하게? 어차피 죽게 될 텐데. 그 누구도 하늘의 뜻, 천명을 거스를 수는 없으니…….”

말의 매듭은 지어지지 못했다.

답답한 숨소리와 함께 흑의인은 절명했다.

묵묵히 내려다보던 장무열은 자신의 검을 수습했다.

또 한 명이 저승의 문턱을 넘었다.

그럼에도 아무 느낌도 들지 않았다.

감정이 거세된 듯했다.

지난 며칠간 너무 많은 죽음을 보고 말았다.

“음.”

문득 전해지는 뜨거운 열기에 장무열은 왼쪽 팔로 고개를 돌렸다.

검붉은 핏물이 팔뚝에서 흐르고 있었다.

언제 당한 것일까?

장무열은 옷자락을 찢어내 상처에 대충 감았다.

그렇게 응급으로 처치한 상처가 왼팔 외에도 여러 곳이었다.

그나마 다리를 당하지 않아 다행이군.

다리에 상처를 입었다면 제대로 움직일 수도 없었을 테니까.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는지.”

저도 모르게 장무열은 긴 한숨을 토해냈다.

편하게 잠을 자본 게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았다.

지쳤다.

한계 이상으로 지쳐 버렸다.

더는 버티기 어려웠다.

길어야 하루.

어쩌면 반나절도 못 버티고 쓰러질지 모른다.

문득, 허무한 마음이 들었다.

아무리 발버둥 쳐봐야 어차피 죽을 것이라면.

차라리 이곳에서 마음 편하게 잠이나 푹 자는 편이 낫지 않을까?

자포자기하던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럴 순 없지.”

지금까지 버텨낸 것이 아까워서라도 순순히 당해줄 순 없다.

느슨해진 마음을 팽팽히 다잡은 그는 서둘러 자리를 떴다.

한곳에 오래 머물러 있다가 적의 포위에 갇히게 되면 끝장이다.

어서 빨리 먼 곳으로 이동해야 한다.

하지만 지친 몸은 그의 의지와 달리 터벅터벅 느리게 움직였다.

그렇게 반 시진 후.

장무열은 폭포가 내려다보이는 계곡 위에 피곤한 몸을 내려놓았다.

‘반나절은커녕, 반 시진 밖에 못 버티는군.’

그는 이곳이 이 긴긴 여로의 마지막 종착지가 될 것임을 알았다.

지금 당장 눈앞에서 칼이 들어와도 한 발자국도 옮길 수 없을 지경이었다.

‘쉬자, 잠시만 쉬자.’

그는 옹이진 나무에 고개를 기대었다.

잠깐 사이, 꿈을 꾸었다.

그 꿈속에서 한 여인과 한 사내를 만났다.

여인은 밤하늘을 담은 눈으로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고, 사내는 부채를 살랑이며 얄밉게 웃었다.

‘자네, 그곳에서 뭘 하는 건가? 설마, 벌써 지쳐서 나가떨어진 건 아니겠지? 어허! 이렇게 나약해서야. 어디 맘 편히 뒷일을 맡길 수 있겠는가?’

장무열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누구 맘대로 일을 맡겨. 네 일은 네가 직접 해결하란 말이다.”

“내가 언제 내 일을 자네에게 맡겼단 말인가?”

무심한 그 녀석의 대답인가?

하지만 꿈이라 여기기엔 너무도 생생한 목소리였다.

장무열은 간신히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흐릿한 시야 속에 한 사내가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다행히 아직 죽지 않은 모양이군.”

히죽 웃으며 말하는 모양새가 묘하게 낯익었다.

저 얄미운 면상, 어디에서 봤더라.

대체 어디서……?

혹시…….

“……김기대?”

“어허! 은마라니까.”

***

‘은마’라는 별호를 몇 번이나 강조하는 사내.

세손빈이 된 이레의 친 오라비인 김기대였다.

장무열은 잠시 김기대를 바라보았다.

꿈인지 현실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아니, 절대 이곳에 있을 수 없는 사람이 나타났기 때문이기도 했다.

“왜 그런 눈으로 사람을 보는 것인가? 미리 말하지만 난 남색 같은 취향은 없다네.”

“진짜 김기대냐?”

“은마라니까! 은마!”

“……이곳엔 무슨 일이냐?”

“누군가의 부탁으로 무얼 찾으러 가던 중이었네.”

“그러니까…… 지금 심부름 중이라고?”

“그렇다네.”

무심한 대답한 기대는 고개를 돌려 먼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에 장무열은 어이가 없었다.

심부름이라니.

핑계치고는 너무 허술했다.

“그럼 저기 보이는 광경들은 다 무어냐?”

장무열은 김기대의 어깨너머를 눈짓했다.

한바탕 혈전을 치른 흔적.

열 명도 넘는 흑의인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김기대는 대수롭지 않은 듯 툭툭, 제 신발을 털어냈다.

“아! 글쎄, 누군가의 부탁으로 ‘우연히’ 이곳을 지나고 있었는데, 시커먼 족속들이 잠든 누군가를 해치려 하는 모습을 ‘우연히’ 보게 되지 않았겠나. 내 어찌 불의를 용납할 수 있겠나. 어쩔 수 없이 악당들을 혼쭐을 내주고 위험에 처한 사람을 살펴보았더니. 이럴 수가! 바로 자네가 아닌가? 하하, 우연도 이런 우연이 다 있을까.”

김기대는 몇 번이나 ‘우연히’라는 말을 강조했다.

장무열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맺혔다 사라졌다.

꿈에서 만난 여인의 모습이 그의 뇌리를 가득 채웠다.

김기대의 말에 그녀가 떠오르는 것은 정말 우연일까?

“그런데 자네, 대체 어쩌다 이런 곳에서 이런 몰골로 잠이 든 겐가? 그러니 지나가는 도적놈들이 자넬 노리지.”

“……사연이 길다.”

“그럼, 한 가지만 묻겠네.”

“뭐냐?”

“대체 무슨 꿈을 꾸었는데, 그리 해죽거리며 웃었는가?”

“내가 웃어?”

“웃었네. 이렇게. 바보처럼.”

우스꽝스러운 표정까지 지어 보이는 기대의 말에 장무열의 굵은 눈썹이 휘어졌다.

꿈을 꾸며 바보처럼 웃었다고.

그 여인을 보았던 탓일까?

아니면 그 녀석.

설마, 그 녀석의 핀잔을 듣고 기뻐한 것은 아니겠지.

“무슨 잡생각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더는 시간이 없네. 대답은 나중에 듣기로 하고, 어서 이곳을 떠나세. 슬슬 또 다른 밤손님들이 몰려올 시간이거든.”

장무열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말도 마차도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간단 말이냐?”

“저기로 갈 걸세.”

장무열은 기대가 가리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계곡 아래.

깊어지는 어둠 속에서도 우렁찬 굉음을 터트리며 흘러가는 급류.

“강?”

“제대로 보았네.”

“……듣던 중 가장 황당한 농담이군.”

“내가 농담이나 할 사람으로 보이는가?”

“농담이 아니면? 저 흙탕물이 보이지도 않는 거냐.”

“보이네. 상당히 위험해 보이는군. 휩쓸리면 십중팔구 죽게 되겠지.”

“그런데도 저리로 가자고?”

기대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기에 떨어지면 죽는다. 그건 분명한 사실일세. 지겹도록 자네의 뒤를 쫓는 자들도 그렇게 생각할 걸세. 그러니 귀찮은 밤손님과 작별하려면 저곳이 바로 제격이지.”

“지금 나더러 죽으라는…….”

장무열의 말이 끝나기도 전.

“자자, 쓸데없는 수다는 그만두고. 어서 가세.”

기대가 그를 손바닥으로 툭 밀었다.

쏟아진 비로 바닥이 미끄러웠다.

장무열은 저항할 틈도 없이 절벽 아래로 미끄러지듯 떨어졌다.

“……!”

장무열은 경악한 눈으로 기대를 보았다.

추락하는 그를 향해 기대는 태연히 손까지 흔들고 있었다.

“하하하, 안심하게. 이래 봬도 그쪽 바닥은 내가 전문가거든. 한숨 푹 자고 일어나면 안전한 곳일 걸세. 그러니…… 어라? 벌써 휩쓸렸네.”

기대의 목소리는 거센 급류에 묻혀 더는 전해지지 않았다.

적어도 기대의 말 중에서 한 가지는 옳았다.

물에 떨어지기 무섭게 의식을 잃었으니까.

의식을 잃기 전, 흐릿하게 누군가의 모습이 떠올랐다.

쥘부채를 활짝 펼친 그 사내가 장무열을 향해 환하게 웃고 있었다.

‘비웃지 마. 구태여 네 녀석이 말하지 않아도…… 아직 그쪽으로 갈 생각은 없으니까.’

나중에.

네가 마무리하지 못한 일을 모두 정리하면.

그때…….

그때 널 만나러 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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