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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택-왕들의 향연-129화 (129/215)

#129. 개수작 부렸다간……

바람이 불 때마다 궐 안의 상수리나무가 무성한 잎사귀를 부딪쳤다.

왕의 낮 수라상이 화완 옹주의 전각으로 들었다.

이른 새벽부터 수라간에서 부지런한 준비한 수라건만.

딸깍.

왕은 두어 술 입에 넣는 둥 마는 둥 하다 다시 수저를 내려놓았다.

시중들던 화완 옹주가 근심 어린 표정으로 아비를 보았다.

“입맛이 없으시옵니까?”

“밥이 아니라 모래알을 삼키는 것 같구나.”

“하오면, 다른 것을 내오라 하올까요? 묵은김치 넣은 전은 어떠하시옵니까. 유달리 좋아하시어 시시때때로 찾으시지 않으셨습니까?”

“되었다.”

“하오면, 식혜라도 올리리까?”

“그것도 되었다.”

왕은 힘없는 목소리로 고개를 저었다.

“아바마마.”

화완은 당장 서글픈 울음을 터트렸다.

“속상하게 어찌 이러시옵니까. 이것도 싫다, 저것도 입에 아니 맞는다 하시며 매번 수라를 고스란히 물리시니. 이러다 쓰러지기라도 하면 이 화완은 어찌 살라 그러시옵니까.”

그녀의 울음에 문밖에서 당황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마, 무슨 일이온지요.”

“후겸이구나. 들어 오너라.”

왕의 허락이 떨어지자 곧 한 사내가 들어왔다.

자식이 없는 화완이 양아들로 들인 정후겸이었다.

“전하.”

정후겸이 공손히 절했다.

왕은 인자한 눈길로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입궐하였느냐?”

화완이 정후겸을 대신하여 말했다.

“이 아이, 언제나 전하 생각뿐인 모양입니다.”

“내 생각뿐이라?”

“외롭고 적적하실 전하 생각에 이따금 눈물을 흘리고, 전하께서 언제 부르실지 모른다며 새벽 별이 떠야 자리를 비우고, 동트기도 전에 입궐하니. 저 아이의 지극한 마음을 대체 어찌하여야 할지 모르겠사옵니다.”

“허허, 그러하였느냐? 네 진심이 정말 고맙구나.”

“당연한 일을 하였을 뿐이옵니다.”

“아니다. 항상 바라고 생각하며 그리워하는 것이 어찌 자연스럽고 당연하겠느냐. 정성으로 기른 피붙이조차 그러하질 못하니…….”

왕은 탄식과 함께 긴 한숨을 토해냈다.

세자에게 일어난 참혹하고 비극적인 사건은 정작 그러한 결정을 내린 왕에게도 씻을 수 없는 아픔과 회한을 남겼다.

정후겸은 지치고 노쇠한 왕의 아픔을 파고들었다.

“마음의 흐름을 어찌 가늠할 수 있겠사옵니까. 저 또한 제 마음을 모르옵니다. 제 발길이 궐로 향하고, 제 눈이 전하를 담으며, 제 마음이 전하로 가득하니. 저도 모르게 절로 그리되옵니다.”

“허허허.”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전하. 이런 증상은 비단 저만 그런 것이 아니옵니다.”

“누가 또 내 걱정을 그리하더냐?”

정후겸은 화완에게 눈길을 주었다.

“옹주가?”

화완의 뺨이 붉어졌다.

그녀는 손으로 달아오른 뺨을 숨겼다.

“저 아이, 괜한 소리를 합니다.”

“허허, 아니다. 옹주가 날 살피고 걱정함을 어찌 이 아비가 모를까.”

왕은 화완과 정후겸의 손을 각각 하나씩 잡았다.

“너희 두 사람이 아니었다면 이 늙은이, 슬프고 외로워 죽어도 한참 전에 죽었을 것이다.”

정후겸이 서둘러 왕의 말을 막았다.

“그런 말씀 마시옵소서. 전하가 계시옵기에 소손이 있는 것이옵니다. 그러니 강건하셔야 하옵니다, 할바마마.”

“오냐, 오냐, 내 그러마…… 쿨럭.”

다짐하는 말을 채 끝내지도 못했건만, 왕은 진득한 기침을 터트렸다.

정후겸이 서둘러 그의 등을 두드려 진득하게 달라붙은 가래를 내뱉도록 도왔다.

“전하, 괜찮으시옵니까?”

“괜찮…… 쿨럭, 쿨럭, 쿨럭.”

한번 터진 기침은 좀처럼 그치지 않았다.

중간중간 내쉬는 숨소리도 예사로 흘릴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도무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던 기침이 비로소 멈췄다.

고된 병증에 왕의 얼굴엔 식은땀이 가득했다.

정후겸은 세심한 손길로 왕의 얼굴에 맺힌 땀방울을 닦아 주었다.

“되었다, 되었어.”

말과 달리 숨통을 가득 메운 가래를 빼지 못한 왕의 숨소리는 여전히 그렁그렁하였다.

“참으로 걱정이구나. 이 꼴로 내달 보름의 제례를 어찌 치를 것인지.”

왕의 걱정에 정후겸이 부드럽게 대답했다.

“걱정 마시옵소서, 전하. 어제보다 오늘 더 좋아지셨사옵니다. 내일이면 더 좋아지실 것이옵고, 내달이면 이깟 기침은 훌훌 떨쳐내실 것이옵니다.”

“네 말대로 되었으면 좋겠구나.”

“제가 장담할 것이옵니다.”

“그래, 그래.”

안심된다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이던 왕의 눈빛이 돌연 침울해졌다.

“그런데 겸아…….”

“네, 전하.”

티 없이 맑은 정후겸을 왕이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잠시 머뭇거리던 왕이 입을 열었다.

“그 아이…… 어찌 지내고 있느냐?”

왕의 돌연한 물음에 일순 전각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 아이.

궁 밖으로 쫓겨난 폐세손을 묻는 것이었다.

왕께선 지난 일을 탄식하시며 화완 옹주를 찾으시지만, 때때로 폐세손의 근황을 묻곤 하였다.

정후겸은 태연히 대답했다.

“잘 지내고 있다 들었사옵니다. 한동안 방황하시는 듯도 하시었으나, 이제는 잘 적응하고 계시니. 심려 놓으소서.”

“잘 지낸다니 다행이로구나.”

왕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맴돌았다.

궁을 떠나서도 잘 지낸다니.

다행이다, 하면서도 마음 한 자락이 씁쓸하였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왕이 다시 물었다.

“그 아이, 나를 찾아오진 않았느냐?”

정후겸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답하였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전하. 아직 궁으로 걸음 하시진 않고 계시다 들었사옵니다.”

“그렇구나.”

왕의 눈빛이 흐려졌다.

이미 어제도 판내시부사에게 형운의 일을 물어보았다.

늙은 환관 역시 같은 대답을 들려주었다.

그럼에도 정후겸에 다시 물어본 것은 아직 남은 미련 탓이리라.

“분명 나를 원망하고 있음이렷다.”

자조하는 왕을 화완이 위로하였다.

“혈기왕성한 세손이시니. 미움도, 슬픔도 크고 단단할 것이옵니다. 하오나 아바마마, 언젠가는 세손도 아바마마의 진심을 알게 될 날이 있을 것이옵니다.”

옹주의 위로엔 병(病)과 약(藥)이 공존하였다.

“차라리 내게 원망이라도 하였으면 좋겠구나. 내 앞에서 울면 달래주기라도 하겠건만. 도통 나를 보려 하지 않으니. 필시 나를 미워하는 것이야. 미움이 증오가 된 것이 틀림없구나.”

“증오라니. 말도 안 됩니다. 어찌 세손이 아바마마께 그런 마음을 품으리까?”

“아들이 아비의 권력을 욕심내어 칼을 드는 판국에. 손자라고 앙심을 품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겠느냐?”

왕의 음성이 금세 카랑카랑해졌다.

자책은 어느 사이 원망으로 돌변하였다.

아끼고 총애했던 만큼 자신에게 등을 돌린 형운이 못내 아쉽고 섭섭하였다.

자신이 단단한 거짓의 울타리에 둘러싸여 있는 줄 모른 채 왕은 형운을 향한 오해의 불씨를 점점 키워가고 있었다.

“소손이 한번 찾아가 보리까? 찾아가 할바마마를 찾아와 달라고 청이라도…….”

정후겸의 제안에 왕은 눈초리를 세웠다.

“그만두어라. 날 보고 울고 절을 하여도, 진심이 없다면 그와 같은 일에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왕의 지청구에 정후겸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송구하옵니다.”

“네가 무슨 잘못이겠느냐.”

“짧은 소견으로 어떻게든 두 분 사이를 풀어보려 하였던 것인데.”

“되었다. 나와 세손의 사이를 걱정하는 네 마음을 내가 어찌 모를까. 내가 괜한 일로 성화를 부렸구나.”

왕은 다시 한 번 정후겸의 손을 맞잡았다.

“괜한 성을 네게 부렸구나.”

“아니옵니다.”

“곤하구나. 잠시 쉬어야겠다.”

왕은 보료에 비스듬히 기대 누웠다.

은근한 축객령에 정후겸은 뒷걸음질로 방을 나왔다.

힐끗, 그를 돌아보던 화완옹주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걸음을 옮기는 그녀에게 왕이 말했다.

“화완아…….”

돌연한 부름.

화완옹주가 고개를 돌렸다.

“네, 아바마마.”

“너는 나를 떠나지 마라.”

“이 화완이 아바마마를 어찌 떠나겠나이까.”

“너는 내게 등 돌려서는 아니 된다.”

“심려 놓으소서.”

밝게 대답하는 여식의 말에 왕은 안심한 듯 모란 병풍을 향해 돌아누웠다.

그런 왕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화완이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옹주의 전각 마당엔 정후겸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

“할바마마께서 무어라 하시었나이까.”

화완에게 묻는 정후겸의 얼굴에는 나른한 권태가 가득했다.

이른 새벽부터 입궐했던 터라.

눈 밑에 검은 그림자가 서려 있었다.

그의 물음에 답하는 대신 화완은 전각 후원으로 향했다.

기암으로 둘러싸인 전각 후원에는 짙은 보랏빛의 투구꽃이 만발하였다.

정후겸은 꽃을 감상하는 화완 옹주의 뒤를 묵묵히 따랐다.

“겸아.”

왕의 앞에선 나붓나붓 다정하였던 화완의 목소리는 온데간데없었다.

눈빛과 표정에 한겨울 매서운 바람이 가득했다.

두어 발짝 떨어져 화완의 뒤를 쫓던 정후겸이 다가왔다.

“소자, 여기 있나이다.”

“이 꽃, 참으로 참으로 장하지 않으냐?”

화완은 투구꽃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곧 시들고 낙화할 것을 뻔히 알면서도 어찌 이리 화사하게 꽃을 피우는 것인지.”

“그것이 운명이니까요.”

“타고난 운명, 운명이라…….”

혼잣말을 읊조리던 화완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어쩔 수 없이 타고난 운명, 비록 한 계절이겠지만, 그 시절만큼은 가장 아름답고 싶은 본능. 시들고 낙화하여 곧 땅으로 되돌아가는 것이 제 운명이라는 걸 알고 있기에, 더 찬란히 꽃을 피우고 싶은 서러운 욕심…….”

화완은 투구꽃을 향한 시선을 정후겸에게로 돌렸다.

“겸아, 왕세자였던 내 오라버니께선 늘상 내게 말씀하셨지. 아무것도 하지 마라. 아무것도 해선 아니 된다.”

“…….”

“이리 많은 것을 손에 쥐고 있거늘, 아무것도 하지 말라 하시더구나.”

“꽃이 만개하면 봄이 오기 마련이옵니다. 어찌 한 번 온 계절을 다시 돌릴 수 있겠사옵니까?”

정후겸의 대답에 화완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그렇겠지.”

깊게 가라앉았던 화완의 눈동자에 이채가 떠올랐다.

그녀가 정후겸과 시선을 마주했다.

“폐세손은 오늘도 문안례 왔더냐?”

“왔사옵니다.”

“핏줄은 어쩔 수 없는가 보구나. 오라버니의 고집을 고스란히 닮았어.”

“어찌 하올까요?”

“앞으론 궁으로 오지 못하게 해야겠지. 언제까지 전하를 내 전각에 잡아둘 수는 없으니.”

“네, 어머니.”

“그리고…….”

화완의 눈빛이 변했다.

시린 겨울처럼 차갑던 눈에 진심 어린 근심이 어려있었다.

“새로운 학에게서는 기별이 왔더냐?”

“……지난번 모임에도 불참하였나이다. 그렇지 않아도 학사들 사이에서 학에 대한 말이 많습니다.”

“그래?”

화완의 미간이 한데로 모였다.

“그 사람이 그럴 위인이 아닐진대.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진 모양이로구나.”

“…….”

“십학사의 연락망을 모두 움직여라. 그가 어디로 갔는데, 그리고 어찌하여 기별을 하지 않는 것인지, 찾아내야 한다.”

“그리하겠나이다.”

“잊지 마라. 반드시, 반드시 그를 찾아야 한다.”

“심려 놓으십시오.”

정후겸은 힘 있는 목소리로 화완에게 말했다.

아들의 확신에 찬 대답을 뒤로 한 채 옹주는 전각 후원을 떠났다.

그녀가 떠난 이후, 정후겸은 한동안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석상처럼 굳어 있던 정후겸의 얼굴에 흐릿한 표정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학, 그를 찾아라. 반드시 찾아라. 결국, 그에 관한 말씀만 하시는군요. 어머니.”

언제부터인가, 옹주의 관심은 오직 새로운 십학사, 학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정후겸은 자줏빛 투구꽃을 하나 꺾었다.

아름다운 꽃.

그러나 이 꽃의 뿌리가 치명적인 독초라는 것을 사람들은 알까?

“여기 계셨군요.”

그의 곁으로 잔잔한 목소리가 달라붙었다.

정후겸이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여인이 그에게 걸어왔다.

한눈에 들어오는 특별한 미인은 아니었지만, 하나하나 찬찬히 뜯어보면 눈매며 입매며 은은한 매력이 담긴 미인이었다.

그저 어린 궁녀라고 보기 아까운 인물.

궁녀가 입술을 길게 늘였다.

“그대였군.”

“이곳에서 무얼 하고 계시옵니까?”

“잠시 볼일이 있었다네. 그보다 무슨 일인가?”

“궐 안의 일이 궁금하여 찾아왔습니다.”

“별다른 일은 없네.”

“그러하옵니까? 하면…….”

고아하게 웃던 여인이 목소리를 낮췄다.

“학의 일은 어찌 되었습니까?”

정후겸은 눈살을 찌푸렸다.

“오늘 온종일 그에 관한 이야기만 듣게 되는군.”

여인이 놀란 표정으로 눈을 깜빡였다.

“저 말고 대감을 찾아온 십학사가 더 있었습니까?”

청순한 궁녀의 모습을 한 여인.

그녀는 십학사의 사슴이었다.

사슴은 언제나 다른 모습으로 정후겸을 찾아왔다.

때론 양반가의 규수로, 또 때로는 기녀의 모습으로, 어느 때는 이렇게 궁녀가 되어…….

하지만 정후겸은 그런 변화에도 놀라는 법이 없었다.

여느 때처럼 나른한 눈길로 그녀를 맞을 뿐이었다.

“궁 안의 모든 이가 그에게 관심이 있는 모양이네.”

“유명한 사람이니까요. 그래서 어찌 되었는지요?”

“글쎄……. 곧 소식이 오겠지.”

정후겸은 다시 한 송이의 투구꽃을 꺾었다.

그 모습을 빤해 바라보던 사슴이 물었다.

“결국, 그를 죽이실 생각이십니까?”

“질문이 잘못되었군.”

정후겸이 꺾은 투구꽃을 사슴에게 건네주며 말을 이었다.

“언제 죽일 것인가…… 이리 물었어야지.”

“……!”

감정 없는 그의 섬뜩한 말에 사슴의 전신에 소름이 오싹 돋았다.

그를 만날 때면 언제나 이랬다.

모든 일에 무관심하고 태연해 보이지만, 정작 그의 머릿속엔 치밀하고 무서운 계획들이 가득한 것만 같았다.

둥! 둥!

멀리서 유시를 알리는 북소리가 들렸다.

“시간이 벌써 이리되었군.”

“어디 가실 곳이라도 있으십니까?”

“오늘은 특별히 찾아갈 사람이 있다네.”

“누굴 말입니까?”

사슴의 물음에 정후겸은 특유의 넉넉한 웃음을 보였다.

“사람을 새로 들였으니, 이따금 관심을 두어야 하지 않겠는가?”

***

집요해진 바람이 옷깃을 파고들었다.

열매가 여물어지는 계절.

제법 기세를 부리는 햇발도 그늘에 들어서면 영 맥을 추지 못했다.

오후 해가 서산으로 기우뚱하는가 싶더니 금세 사위가 어두워졌다.

낮은 길이가 점점 짧아지고 밤이 길어졌다.

저녁 짓는 시간이 빨라졌다.

그러나 형운의 시간은 변함이 없었다.

늘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 모습을 드러내는 성실함은 여전했던 터라.

붉은 저녁과 함께 그를 기다리던 이레는 이젠 어둠과 동행했다.

발아래 조족등을 밝힌 그녀는 이제나저제나 형운을 기다렸다.

요 며칠, 참으로 평온한 나날이었다.

정안당에서 한바탕 물벼락을 받은 충격으로 홍인한의 며느리 이 씨가 앓아누웠다고 했다.

괜한 트집을 잡던 이가 사라지자 아침이 개운하였다.

게다가 어쩐 일인지, 십학사의 모임 소식도 들려오지 않았다.

궁을 떠난 이후 모처럼 몸도 마음도 느긋하였다.

사박사박.

발치에 쓸리는 치맛자락 소리에 귀 기울이길 얼마나 하였을까.

저 멀리 골목 끝으로 훤칠한 신형이 나타났다.

드디어!

한결같은 일상이었건만.

형운을 맞이하는 일은 언제나 설레었다.

이레의 얼굴에 박꽃 같은 웃음이 서서히 피어났다.

형운에게로 다가가는 그녀의 걸음이 빨라졌다.

어둠 저편, 저벅거리며 다가오는 발소리에 맞춰 심장이 맥동했다.

입가의 웃음도 점점 크고 선명해졌다.

그녀를 품어줄 따뜻한 그의 온기와 그의 커다란 손을 떠올리자 저도 모르게 두 뺨이 붉어진다.

저하, 저하, 저하…….

어머니를 부르는 아이처럼 힘껏 목청 돋워 그를 부르고 싶었다.

그러다 한순간.

이레의 얼굴에 가득했던 웃음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서서히 다가오는 사내의 모습.

멀리 떨어진 곳에서 보았을 땐 영락없이 형운인 줄 알았건만.

이레를 향해 걸어오는 걸음걸이, 흑립의 끝을 잡아당기는 손의 모양새가, 그리고 그녀를 향해 웃는 미소…….

아니다.

형운이 아니었다.

이레는 굳어진 표정으로 걸음을 세웠다.

잘못 보았구나, 실망하며 다시 되돌아가려 몸을 돌렸다.

찰나.

“말 좀 묻겠소.”

뒤통수에 와 닿는 음성.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오소소 전신에 소름이 일었다.

못 들은 척 걸음을 옮기려 하였다.

그러나 목소리의 주인은 집요하게 이레의 걸음을 붙잡았다.

“잠시 말 좀 묻겠소.”

어느 틈엔가 사내는 이레의 바로 등 뒤까지 다가왔다.

“…….”

이대로 외면하면 외려 의심을 살까 하여 이레는 그저 끄덕이는 고갯짓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사내가 이레에게 묻는다.

“궁을 나온 왕세손께서 이곳에서 지낸다 하던데. 맞소?”

묻는 것이 아니라 확인하는 말투.

이레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비스듬히 틀었다.

왜, 저자가 세손 저하를 만나러 온 것일까?

조족등으로 인해 희미했던 생김새가 점점 또렷해졌다.

큰 키에 유난히 하얀 얼굴.

미려함과 동시에 나른함이 공존하는 특이한 사내.

역시…… 그자다.

만사여의를 찾아온 사내.

천하를 거래하자던 수상한 사내.

그리고 끝내 그녀를 십학사로 인도한 사내.

이름이…….

‘정후겸이라 하였지.’

바로 그 사내가 틀림없었다.

이 사내가 여긴 왜?

짧은 순간 의문과 두려움이 뇌리를 교차했다.

“그분을 어인 용무로 찾으시는지요?”

“볼일이 있어 그분을 만나러 왔소. 한데…….”

성큼, 이레의 앞으로 다가온 사내가 무릎을 굽혀 그녀와 눈높이를 맞췄다.

그의 눈이 이레와 시선을 마주했다.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없소?”

“없습니다.”

“정녕?”

“규방의 아녀자가 낯선 사내와 어찌 만나겠습니까. 희롱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만 물러서십시오.”

단호한 답과 함께 이레는 몸을 돌려 별채로 향했다.

“이상하군. 그 눈빛, 분명 어디선가에서 본 것만 같은데…….”

목소리와 함께 무람없는 손길이 이레를 향했다.

그때였다.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커다란 손이 이레를 낚아채려 한 정후겸의 손을 사납게 쳐냈다.

“누구냐?”

“그러는 너야말로 무얼 하느냐?”

이글이글 타오르는 중저음의 목소리가 이레와 정후겸의 사이를 파고들었다.

형운이었다.

“저하!”

그를 발견한 이레가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형운은 강보로 갓난아기를 감싸듯 활짝 펼친 도포 소맷자락 안으로 이레를 감쌌다. 그리고 형형한 눈씨로 정후겸을 노려보았다.

정후겸 또한 물러서지 않고 그의 서늘한 기세를 받아내었다.

잠시 적막이 흘렀다.

이내 본래의 느긋하고 태연한 모습으로 되돌아간 사내가 형운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소인, 정후겸이라 하옵니다. 세손 저하를 뵙고 싶어…….”

“네가 누군지 알고 싶지 않다. 다만, 이거 하나만 기억하라.”

정후겸에게 성큼 다가선 형운이 분노를 삼키듯 말했다.

“이 이상 내 여인에게 개수작 부렸다간…….”

예상과 다른 험악한 말에 정후겸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섬뜩한 미소와 함께 이어진 형운의 속삭임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눈알을 파버릴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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