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 오로지 오라버니만 할 수 있는 일
어느덧 반 시진이 훌쩍 흘러가 버렸다.
“시간이 되었습니다. 그만 돌아가야 합니다.”
홍인모가 나직한 음성으로 아뢰었다.
“벌써 시간이 그리되었는가?”
홍국영이 형운과 이레에게 절을 하고 몸을 일으켰다.
문을 열고 나가려던 그가 뒤를 돌아봤다.
최치성이 여전히 무릎을 꿇은 채 제자리에서 미동도 하지 않았던 까닭이다.
심지어 가야 한다고 말한 홍인모 조차도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어허, 그만 가야 한다 하지 않았는가?”
홍국영의 채근에 최치성과 홍인모는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억지로 떼었다. 푹 숙인 고개와 축 늘어뜨린 어깨가 처량하기 이를 데 없었다.
형운과 헤어지기 싫어서였다.
때마침 형운이 홍국영에게 물었다.
“사헌부의 법도가 다른 곳보다 엄하다 하였는데, 이렇게 마음대로 돌아다녀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가?”
“걱정 마십시오, 저하. 적당히 피해 가는 방법이 있습니다. 게다가…….”
홍국영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근래 사헌부의 집의께서 등청을 안 하시니. 그간 엄격했던 사헌부의 분위기가 다소 느슨해졌습니다. 다들 기회는 이때다 싶어 놀기 바쁘니. 잠시 자릴 비웠다고 해서 시비를 걸 자는 없습니다.”
그들의 대화를 듣던 이레가 형운을 바라보았다.
사헌부의 집의라면, 장무열이었다.
“그분, 아직도 돌아오지 않은 겁니까?”
형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가 보오.”
“어찌 된 영문인지 아십니까?”
이레의 물음에 답한 것은 홍국영이었다.
“그분의 집무실에서 서찰이 발견되었습니다. 조사할 것이 있어 지방에 잠시 다녀온다는 내용이었지요. 급하게 가신 것이라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지 못한 모양입니다.”
“서찰이라…….”
서찰을 남겼다는 홍국영의 말에도 이레는 불안이 가시지 않았다.
“그분과 동행한 사람은 없습니까?”
“글쎄요. 딱히 데려간 자는 없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사헌부에선 이런 일이 잦습니까?”
“비밀 임무를 받고 떠나는 일이 종종 있긴 합니다만…….”
홍국영이 말끝을 흐렸다.
“혹여 소식 들려오면 바로 연락을 주겠습니까?”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럼 오늘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다음에 또 불러주십시오.”
홍국영은 성큼성큼 큰 걸음으로 사랑채를 나섰다.
최치성과 홍인모가 마지못해 그의 뒤를 따라갔다.
가는 동안 그들은 몇 번이고 형운을 돌아봤다.
형운은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자리를 지키고 서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나란히 선 채 먼 허공을 바라보던 형운이 돌연 이레의 작은 손을 맞잡았다.
그녀와 맞잡은 그의 손아귀의 힘이 여느 때와 달랐다.
“지금까지 이리 지냈소?”
이레는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응시했다.
형운은 여전히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형운의 손을 통해 그의 감정이…… 그의 슬픔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무슨 말씀입니까?”
“저들이…… 안채에서 그대를 이리 대했던 것이오?”
이 씨에게 당하던 이레의 모습이 형운의 가슴에 아프게 박혔다.
홍국영이 이 씨에게 물벼락을 내리지 않았더라면…….
쫓기듯 그들이 물러나지 않았더라면…….
스스로 무슨 짓을 하였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곤궁에 처한 이레를 보는 순간, 그의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저 여인만은 상처받지 않게 하려 했는데.
형운은 제 아랫입술을 거칠게 깨물었다.
“미안하오.”
“저하…….”
“내가 그대에게 못할 짓을 시킨 것 같소. 정말…… 미안하오.”
형운의 사과에 이레는 가만히 머리를 흔들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저는 괜찮습니다.”
“머리에서는 그대를 놓아 주는 것이 옳은 것이라 말하고 있소.”
형운의 말에 이레가 놀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여전히 이레와 시선을 마주하지 못한 그가 말을 덧붙였다.
“그런데 나는…….”
형운은 이레와 깍지 낀 손으로 시선을 내렸다.
“나는 이 손을 놓아줄 수 없소.”
“저하.”
“이 손을 놓으면 내가 살 수 없을 것 같소. 그래서 나는 끝까지 욕심을 내려 하오. 부디 이 못난 사내의 욕심을 이해해 주시오. 이런 내가…… 감히 그대를 연모하는 것을 용서하오.”
그의 진실한 고백.
이레의 눈가가 초승달 모양으로 휘어졌다.
습기 가득한 미소를 지은 그녀가 그에게 속삭였다.
“저하의 욕심을 이해합니다. 연모하는 저하의 마음을 기꺼이 용서하겠습니다.”
그제야 형운이 이레를 마주 보았다.
시선과 시선이 맞닿았다.
해사한 이레의 미소가 형운의 가슴에 화한 바람을 불어넣었다.
널뛰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그가 이레의 이마에 꾹, 인장을 찍듯 입술을 찍었다.
날렵하게 내려앉았다 날아오른 입맞춤.
그의 가슴에 매달려 있던 이레가 보답이라는 듯 그의 왼뺨에 제 입술을 가져갔다.
촉.
부드러운 감촉.
저릿한 감각이 휘몰아쳤다.
그러나 형운은 내심 태연한 듯 평온한 낯빛을 하였다.
물끄러미 그 모습을 올려다보던 이레의 눈가에 불현듯 이채가 떠올랐다.
이리하여도 동요하지 않을 겁니까?
도발하듯 이레가 형운의 오른뺨에 입술을 가져갔다.
순간, 형운이 고개를 돌렸다.
형운의 오른뺨으로 다가가던 이레의 입술이 그대로 그의 입술에 가로막혔다.
나른한 숨결이 그녀의 잇새를 파고들었다.
싱그러운 배꽃 향내가 이레의 입안에 가득 고인다.
아주 달콤한 것을 머금은 듯 턱 끝으로 와스스 소름이 돋았다.
그녀의 뒷목을 그러잡은 형운의 손끝이 단단해졌다.
가느다란 그녀의 몸피는 그의 팔 안에 진즉 갇혀버린 후였다.
눈이 시리도록 푸른 빛으로 지어진 형운의 도포 자락이 이레의 든든한 바람벽이 되어 주었다.
그 안에서 이레는 천천히 허물어졌다.
내내 긴장했던 마음을 풀고, 꼿꼿하게 세우던 등줄기도 모처럼 느른하게 휘었다.
형운의 가슴 속에 파묻힌 이레에겐 온통 푸른 빛뿐이었다.
청량한 푸른 도포 밖에선 늦여름 매미가 마지막 울음을 토해 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어떤 것도 두 사람을 방해하지 못했다.
바람마저도 조심조심 눈치를 보며 그들의 발치를 맴돌다 사라졌다.
***
하늘 저편에 걸렸던 구름이 어느 사이 머리 위로 자리를 옮겼다.
이마 위로 흘러나온 이레의 잔머리를 쓸어 넘기며 형운이 말했다.
“오늘도 고생 많았소.”
“아닙니다. 오늘 저하께서 오셔서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형운과 홍국영이 제때 나타나지 않았다면, 이 씨에게 온종일 시달렸을 것이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점은 당분간은 정안당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이라는 점이었다.
홍국영으로부터 호된 경험을 한 이 씨는 자존심 때문이라도 당분간은 나타나지 않으리라.
“참으로 다행이오. 앞으로 무슨 일이 있으면 잊지 말고 꼭 이야기해주어야 하오.”
“그리하겠습니다.”
“반드시 그래야 하오.”
“네.”
형운은 이레에게 몇 번이나 확답을 들은 후에야 비로소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한숨 돌린 형운이 불현듯 물었다.
“그를 어떻게 생각하오?”
홍국영에 관해 묻는 것이었다.
이레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야망이 큰 사람으로 보입니다. 특유의 승부사 기질 같은 것도 느껴지고. 사내답고 호방하나…….”
“거칠고 제멋대로인 성정도 보이더군.”
“그렇습니다.”
홍국영, 그는 도박을 하고 있었다.
가장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형운’이라는 패에 제 인생을 걸었다.
그런 그가 목적을 달성했을 때, 어떻게 될까?
순수한 충성심과 호감으로 다가온 사람과는 그 행보가 크게 다를 것이 틀림없었다.
“그를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예전 같으면 절대 가까이하지 않을 것이오.”
“지금은 다르게 생각하십니까?”
형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전, 상 할아버지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소. 음흉한 자를 대하는 법은 두 가지라고.”
“무어라 하셨습니까?”
“첫째, 후환이 남지 않게 치워버린다. 둘째, 가장 가까이에 두어라.”
이레도 어렴풋이 그에 관해 들은 기억이 있었다.
그때, 이레는 상 할아버지에게 물었다.
‘왜 가까이 두어야 하나요? 그것도 가장 가까이.’
이레의 질문에 상 할아버지께서 진지하게 말씀하시길…….
“내 곁에 두어야 일거수일투족을 살필 수 있지 않겠느냐고 대답하시었소.”
형운의 목소리가 상념에 빠진 이레를 깨웠다.
그녀가 기억하는 상 할아버지의 대답도 같은 것이었다.
“그는 어떤 사람입니까?”
“아직은 알 수 없소. 당분간 곁에 두고 세세히 살펴볼 생각이오. 혹, 딴마음을 품는 건 아닌지. 제 욕심만 채우려 하는 것은 아닌지.”
홍국영은 여우의 꾀를 가진 늑대였다.
또한, 그는 형운에게 꼭 필요한 몇 가지를 가지고 있었다.
“그가 변치 않는다면 나 또한 그를 신뢰할 것이오. 하나, 만약 그가 신의를 저버린다면…….”
형운의 입가가 부드럽게 펼쳐졌다.
“반드시 그에 합당한 대가를 받게 될 것이오.”
***
“해야 할 일이 있어 먼저 돌아가야겠구려. 집에서 봅시다.”
언제까지고 정안당에서 머무를 수 없었다.
형운은 이레에게 이별을 고하고 돌아갔다.
홀로 남은 이레는 정안당에 머무르며 바느질을 하였다.
유경이 작업한 바느질거리들을 살펴보고, 뒷갈망을 해놓으니 어느덧 날이 저물었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정안당을 나서던 이레는 때마침 돌아온 정안당의 안주인과 만났다.
이레를 본 노파가 친근한 미소를 건넸다.
“아침부터 새소리가 요란하더니, 큰 손님이 오려 그랬던 모양입니다. 소란스러운 일이 있는 것 같더니, 잘 해결되시었소?”
“다행히 잘 마무리 지었습니다.”
“내 요즘 신경 쓸 일이 많아 도와주러 오시는 분이 오셔도 제때 인사조차 못 한다오. 서운해도 이해해 주시오.”
“아닙니다.”
“우리 집 아들 녀석이 나이가 들었어도 아직 철이 없다오. 앞으로 실수하는 일이 있어도 날 보아 두어 번은 참고 넘겨주시오.”
“……알겠습니다.”
안주인의 넉넉한 배웅을 받으며 이레는 집으로 돌아가는 가마에 올랐다.
흔들흔들, 출렁이는 가마는 긴 담벼락을 지나 수양버들나무로 향했다.
“잠시만 가마를 세워 주세요.”
느닷없는 요청인지라.
밖에서 교꾼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그러십니까?”
“머리가 어지럽군요. 잠시만 쉬었다 가야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가마가 나무 아래에 섰다.
“잠시 혼자 있고 싶습니다.”
안에서 새어나오는 이레의 한 마디에 교꾼들은 가마 근처에서 물러났다.
사방이 조용해지자 가마 문을 열고 이레가 천천히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나무 그늘에 앉아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고요한 시간이 흘렀다.
서쪽 하늘 끝에 걸렸던 저녁노을이 금세 어둠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자연의 흐름을 묵묵히 지켜보던 이레가 불현듯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 그곳에 숨어 계실 것입니까?”
허공을 향한 이레의 질문.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바람에 수양 버들가지만 춤을 출 뿐이다.
“계속 그렇게 못 들은 척하시면, 앞으로 다시는 아는 척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전히 묵묵부답.
이레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어서 나오세요, 오라버니.”
***
협박이 통한 것일까?
나무 뒤에서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패랭이를 쓴 사내.
이레의 가마를 메던 교꾼 중 한 사람이었다.
패랭이 아래에 감춰져 있던 사내의 얼굴을 확인한 이레는 한숨을 쉬었다.
“역시 오라버니셨군요.”
교꾼은 기대였다.
이레의 오라버니이자, 은자원의 은마.
그리고 한때는 왕세자의 팽례였던 사내.
“내가 있는 줄 어떻게 알았느냐?”
“정안당 문밖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자꾸만 들려왔었지요.”
기대는 아차, 싶은 얼굴로 제 손바닥을 두드렸다.
“역시, 그때였구나. 못 들은 척 참고 있었어야 했는데. 그 앙칼진 여인이 하찮은 이유로 널 몰아치는 모습을 보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더구나.”
“며칠 전부터 가마의 움직임도 전과 달랐습니다.”
“딴에는 열심히 흉내 낸 것인데, 그렇게 다르더냐?”
“어디 가마뿐이겠습니까? 언젠가는 행인의 모습으로, 또 어느 때엔 난전 상인으로. 제가 가는 곳마다 오라버니가 계시더군요.”
기대는 머쓱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뭐야? 그럼 그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더냐? 하여간 네 그 눈썰미는 못 당하겠구나.”
“오라버니.”
날 선 이레의 음성에 기대가 냉큼 변명을 늘어놓았다.
“이유가 뭐냐고? 당연히 누이가 걱정되어 그랬단다.”
먼 곳을 보던 이레가 기대에게 시선을 돌렸다.
속내를 들여다보는 투명한 눈동자에 기대는 헛기침을 흘렸다.
“네게 들켜서 차라리 잘 되었다. 안 그래도 입이 근질근질해서 참기 힘들었는데, 앞으로는 대놓고 곁에 있어도 되겠구나.”
“절 지켜주시는 분들은 따로 계십니다.”
“천호, 백호 말이냐? 분명 실력은 좋은 사람들이지. 하지만 널 보호하기엔 역부족인 것 같구나. 봐라. 내가 이렇게 태연하게 섞였음에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지 않았느냐?”
기대는 억지를 부렸다.
“오라버니.”
“이레야.”
오누이는 서로를 마주 보았다.
먼저 입을 연 것은 기대였다.
“내가 네게 지금 하는 일을 그만두라 하면 너는 어찌할 테냐? 이 오라비의 말대로 따를 것이냐?”
의미심장한 물음.
기대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이레가 만사여의가 되어 시전을 오가는 것을.
어쩌면 그 이상을…….
“꼭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나 또한 그렇단다.”
이레는 형운을 지켜야 했다.
그리고 기대는 하나뿐인 누이를 지켜야 했다.
“…….”
“…….”
다시 팽팽한 침묵이 흘렀다.
기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레는 결국 한숨을 내놓았다.
“그런 표정을 지을 때의 오라버니는 아무도 못 말리지요.”
“알아주어 고맙구나.”
“대신 한 가지만 부탁하고 싶습니다.”
“부탁?”
“천하에서 오로지 오라버니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오로지’라는 말에 기대의 표정이 활짝 개었다.
“드디어 네가 이 오라버니를 인정하게 되었구나. 그래, 좋다. 이 오라비가 인심 쓰마. 무어냐? 무얼 해 주랴?”
“찾아주실 것이 있습니다.”
“대체 어떤 물건을 찾느냐?”
“그것이 말입니다…….”
이레는 기대의 귓가에 소곤거렸다.
기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무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