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 저하를 섬기고 싶사옵니다
“하필이면 저 불한당과 마주했으니…….”
“이제 어쩌오?”
여인들의 소곤대는 목소리가 이레의 귀에 들려왔다.
홍국영의 난데없는 출연엔 그녀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레 역시 눈을 동그랗게 뜨고 홍국영을 응시했다.
‘저 사람이 홍국영이라고?’
이레는 안채를 오가며 들었던 소문을 떠올렸다.
정안당의 장남.
이번에 혼례를 올릴 사내.
하지만 정작 그가 유명한 것은 다른 이유에서였다.
상대를 가리지 않는 무뢰한.
예의 없고 광포한 행동거지가 그야말로 개불상놈인지라.
맞대면하여 좋을 것이 하나 없는 홍씨 집안의 수치였다.
그와 관련된 좋지 않은 일화가 숱하게 여인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듣는 것조차 거북살스러운 흉흉한 소문도 적지 않았다.
무성한 소문의 당사자를 눈앞에 마주하자, 이레는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홍국영을 둘러싼 소문에는 그의 행동만큼이나 외모에 관한 것도 많았다.
어릴 적 앓았던 홍역으로 얼굴 전체에 얽은 자국이 가득한 곰보라는 둥, 우락부락한 얼굴과 귀 끝까지 쭉 찢어진 두 눈은 보는 사람의 간담을 서늘하게 할 만큼 매섭다는 둥.
그러나 직접 본 홍국영의 외모는 준수했다.
아니, 준수한 수준이 아니라, 어디에서나 눈에 확 뜨일만한 미려한 용모였다.
겉모습만 봐선 시정잡배들과 어울려 행인의 돈주머니를 빼앗고, 여인들을 희롱하며 입에 담지 못할 험한 말을 할 사람으론 도저히 보이지 않았다.
비단 이레의 눈에만 그렇게 보인 게 아닌 모양이었다.
놀란 눈으로 홍국영을 살핀 이 씨가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쪽이 정, 정말 정안당의 아들이 확실하오?”
“몇 번을 말해야 하오? 내가 그 홍국영 맞소. 그런데…….”
한 걸음 성큼 다가온 홍국영이 이 씨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키가 보통 남정네들보다 머리 하나 정도는 더 컸던 터라.
이 씨는 그를 올려다보기 위해 고개를 한껏 젖혀야 했다.
“남의 집을 제집처럼 차지하고 있는 그쪽부터 뉘인지 밝히는 게 도리가 아니겠소?”
“우린 안국동에서 왔소. 홍인한 대감께서 내 시부(媤父) 되시오. 이쪽에 계시는 분은 홍봉한 대감의 첫째 며느리고, 여기 있는 이 사람은…….”
이 씨가 자신을 비롯한 사람들을 소개하였다.
그 표정이 사뭇 기세등등했다.
‘안국동 홍 정승 댁 며느리’라고 하면 한양 땅에서 모르는 이가 없었다.
호랑이의 기세를 빌린 여우처럼, 가문의 위세를 믿은 것이다.
이럴 때 사람들은 보통 두 가지 반응을 보이곤 하였다.
호감을 보이거나, 주눅이 들거나.
둘 중 한 가지 반응을 기대한 이 씨가 홍국영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나…….
홍국영의 반응은 전혀 뜻밖의 것이었다.
“하하, 망 정승 집안사람들이군.”
“마, 망 정승?”
“난 또 무에 대단한 사람인 줄 알았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게요?”
“설마, 아직 모르고들 계셨소? 안국동 홍씨 집안이 나라를 말아먹으니. 안국동 홍정승이 아니라 망국동 망정승이라고 백성들 사이에 소문이 자자하다오. 저잣거리에 가서 아무나 붙들고 물어보시오. 망국동 망정승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외다.”
홍국영의 시원한 비웃음에 이 씨는 처음엔 어안이 벙벙했다.
어디에서도 이런 대우를 받아본 적 없었다.
그러다 이내 성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 작자가. 찢어진 입에서 나오는 말이라고 다 말인 줄 아느냐. 뉘 앞에서 망 정승 운운하는 것이냐?”
“그럼 망 정승을 망 정승이라 부르지. 달리 무어라 부르리까?”
“이 미친놈을 보았나. 죽고 싶어 환장하였느냐? 네놈이 오뉴월 개 맞듯 맞아봐야 정신을 차리겠느냐?”
이 씨가 불을 토하듯 으름장을 내질렀다.
껄껄 웃던 홍국영의 얼굴이 일순 무표정하게 돌변했다.
뒤늦게 그와 관련한 소문을 떠올린 이 씨는 가슴이 뜨끔하였다.
하지만 이미 저지른 일이었다.
여기서 물러설 수 없었다.
그녀는 소매를 걷어 올려 허리에 올린 채 꽤 날카로운 표정을 지었다.
제깟 놈이 아무리 간이 배 밖으로 나왔다 해도 날 어찌할 수 있을까?
“…….”
이 씨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홍국영은 우려와 달리 얌전히 부엌으로 물러갔다.
잠시나마 긴장했던 이 씨는 코웃음을 쳤다.
“흥, 그럼 그렇지. 저도 아차 싶은 것이겠지. 이 집안을 건드려 좋지 못한 것쯤은…….”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부엌에서 물동이를 들고 나온 홍국영이 이 씨에게 물을 부어버렸다.
촤악!
창졸간에 일어난 일에 이 씨는 어버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레 역시 놀란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볼 뿐이다.
***
시간이 멈춘 듯했다.
그 자리에서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주변의 여인들이 짧은 정적은 깨트렸다.
“아이쿠, 이 노릇을 어쩌누.”
여인들이 비명을 지르며 발을 동동 굴렀다.
이 씨가 목이 찢어지라고 호통을 내질렀다.
“이놈이! 이런 쳐 죽일 놈을 보았나! 네놈이 진정…….”
홍국영이 다시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는 이내 부엌 구석에 놓인 물동이를 들고 나왔다.
“도련님, 왜 그러신대요? 그건 걸레 빨려고 남겨둔 구정물이어요. 그걸 뿌리려고 그러시는 건 아니시죠? 안 돼요. 안 됩니다요.”
여종이 만류했지만, 소용없었다.
“집 안 구석구석 치워야 할 게 산더미구나. 이참에 청소나 하자.”
촤아악!
홍국영은 조금의 망설임 없이 이 씨에게 구정물을 부어버렸다.
연거푸 이어진 물벼락에 이 씨는 눈이 뒤집혀 악다구니를 썼다.
“네 이놈! 내가 누군지 알고도 이런 짓을 하느냐? 내 기필코 네놈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야! 내 손으로 아작을 낼 것이야. 내가 못할 줄 아느냐! 내 아버님께 말씀 올려 네놈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야. 이 집안의 씨를 말려…….”
“아직도 마당에서 구린내가 진동하는구나.”
홍국영은 마당 한구석에 세워둔 싸리비를 꺼내 들었다.
보다 못한 홍씨 집안의 막내며느리가 급히 달려들어 이 씨의 팔을 잡아당겼다.
“아유, 형님. 이러다 정말 큰일 나겠소. 그만하고 갑시다. 싸움도 상대를 가려가며 해야지요. 저런 사람 같지 않은 종자와 싸워 무얼 하겠다고. 망종과 상대했다간 형님만 손해라고요.”
홍국영의 눈치를 슬금슬금 살피던 막내는 이 씨의 등을 밖으로 떠밀었다.
겁에 질린 다른 여인들은 이미 사립문 밖으로 우르르 몰려나간 후였다.
“두고 봐라. 내 오늘의 일을 되갚아주고 말 테니. 앞으로 두고두고 이날을 후회하게 만들고 말 테다!”
못 이기는 척 도망가는 와중에도 이 씨는 저주의 말을 잊지 않았다.
홍국영은 손가락으로 귀를 후볐다.
“어디에서 미친개가 짖는구나. 날도 더운데 잡아서 몸보신이라도 해야겠다.”
중얼거리는 혼잣말이 낮은 담장을 넘어섰다.
담장 밖에서 기웃거리던 여인들이 기겁하며 달아났다.
“별 시답잖은 사람들이 여러 사람 귀찮게 하는군.”
먼지 털듯 손을 툭툭 턴 홍국영이 이레를 돌아보았다.
히죽.
그의 얼굴에 돌연 미소가 걸렸다.
그러곤 이레를 향해 허리를 반으로 접었다.
“저 귀찮은 사람들 상대하느라 많이 피곤하셨겠습니다.”
이 씨를 대할 때의 무례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예의 바르고 친근하게 변한 표정과 말투.
홍국영의 돌변한 태도에 이레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처음엔 얼음처럼 차갑다가 돌연 불처럼 타오르더니, 이번엔 봄 햇살처럼 따사롭다.
시시때때로 표정과 분위기가 변하니.
사람 보는 안목이 남다르다 자부하던 이레로서도 그를 속내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이 사내를 어찌 대해야 할까?
아니, 왜 갑자기 내게 친근하게 구는 걸까?
그녀가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이제 나오십시오. 다 정리되었습니다.”
홍국영은 이레가 아닌 사립문 밖을 향해 공손히 목청을 돋웠다.
일순, 이레는 문밖으로 경계심 가득한 시선을 돌렸다.
‘누군가 숨어서 지켜보고 있었구나.’
홍국영이라는 자에게 배후가 있음이 분명했다.
석연찮은 구석이 있음을 느낀 이레는 초조한 표정으로 사립문을 바라보았다.
얼마 후, 허름한 사립문 밖에서 누군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윽고 이레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전혀 예상치 못한 사람이 그곳에 있었던 까닭이다.
“이레야.”
다정하게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사내.
“저하?”
형운이었다.
***
형운과 이레 그리고 홍국영은 안채 뒤쪽의 사랑채로 자리를 옮겼다.
“저하.”
형운과 함께 상석에 앉은 이레의 얼굴에는 어리둥절한 기색이 여전하였다.
그녀의 낯빛을 살피던 형운이 물었다.
“혼란스러운 것이오?”
“사실 그렇습니다.”
홍국영에 이어 형운의 등장까지.
오늘 정안당에서 있었던 일의 궤를 맞추기 쉽지 않았다.
“잠시만 기다리시오. 곧 차근차근 설명할 터이니.”
자상한 눈빛으로 이레를 안심시킨 형운이 방문 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우선 밖에서 기다리는 자들부터 안으로 들여야겠소.”
“누가 또 있습니까?”
이레가 물었다.
형운은 밖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무얼 하고 있느냐? 왔으면 냉큼 들어올 것이지.”
“네.”
듬직한 대답과 함께 곧 두 사내가 방안으로 발을 들였다.
“저분들은…….”
이레는 저도 모르게 소리쳤다.
최치성과 홍인모.
형운의 좌우 익위사였던 사람들.
“이게 누구십니까?”
두 사람을 보는 이레의 눈에 놀라움과 함께 반가움이 들어찼다.
그런 감정은 익위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방으로 들어설 때부터 최치성의 얼굴은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
홍인모 역시 두 눈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두 사내가 큰 덩치를 구부려 형운과 이레에게 절했다.
이레가 안부를 물었다.
“잘 지냈소?”
홍인모와 최치성은 그저 고개만 열심히 끄덕였다.
목이 멘 탓에 제대로 말을 할 수 없었다.
짧은 대답이라도 하다간 와락 울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한참 만에야 홍인모가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짜며 용서를 구했다.
“송구하옵니다. 두 분을 끝까지 모시지 못한 불충을 용서하시옵소서.”
이레는 황급히 머리를 내저었다.
“그런 말 마시오. 두 분의 상황이 어떤지, 그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 있소. 그보다 이게 다 무슨 일인지요?”
이레는 두 사람과 형운, 그리고 홍국영에게로 차례차례 시선을 옮겼다.
“설마, 놀랄 일이 더 남았습니까?”
형운은 고개를 저어 보였다.
“아쉽지만 오늘은 이 정도만 준비하였소.”
그의 눈가에 장난기 섞인 눈웃음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사라졌다.
“대체 어찌 된 일입니까?”
“알고 보면 그리 놀랄 일은 아니오.”
형운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오늘 문안례를 마치고 궁에서 나오는 길에 한 사내를 만났소. 그 사내는 자신을 사헌부 감찰대 소속의 관원이라 하더군. 그의 직위가 귀에 익어 생각해다가 저들이 떠올랐소.”
형운의 시선이 최치성과 홍인모를 향했다.
“사헌부 감찰대에 들어간 익위사들이 근래 골치 아픈 상관을 만나 고생한다는 소식을 들었다오. 심술궂고 엉뚱하여 감당하기 힘든 사람으로 악명이 자자하다더군.”
폐위된 왕세손의 측근이었다는 이유로 고충을 겪는 수하들에 대한 염려와 미안함이 형운의 눈에 가득했다.
형운은 이윽고 홍국영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 악명높은 상관이 바로 저 사람이었지.”
자신에게 쏟아지는 따가운 눈총을 아는지 모르는지, 홍국영은 씩 웃음을 보였다.
형운의 말이 이어졌다.
“불쑥 나를 찾아온 저 사람이 내게 부탁하더군. 오래전부터 흠모하였다고, 그러니 부디 거두어달라 하였소.”
“대뜸 그런 청을 올렸단 말입니까?”
“그렇소. 심지어 그동안 내 주변을 떠돌며 다른 사람을 통해 주변을 살피고 있었노라 이실직고하더군.”
예전에 최치성을 돕던 의문의 인물로 인해 세손궁이 발칵 뒤집힌 일이 있었다.
최치성이 ‘은인’이라 부르던 사내.
오래전부터 최치성의 어려움을 도와주며 뒤를 살펴주고 있었다.
그때의 일을 홍국영이 낮은 목소리로 변명했다.
“최치성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었기에 그리하였던 겁니다. 다소 부족한 면은 있으나, 충성스러우니. 저하를 보필하는데 이만한 사람이 없다 판단되었지요.”
“치성이는 당연히 날 보필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다. 문제는 그 뒤에 엉뚱한 작자가 있다는 점이지.”
수상한 인물이라 당연히 형운은 촉각을 곤두세우고 조사를 명했다.
하지만 오랜 조사에도 결국 은인의 정체를 밝히는데 실패했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가까운 곳에 범인이 있었다.
묵묵히 경청하던 이레가 물었다.
“관심이 있었으면 차라리 당당히 밝히고 세손 저하의 사람이 되길 청하였으면 될 것을. 어찌하여 남을 내세웠습니까?”
홍국영이 깊이 가라앉은 눈으로 대답했다.
“당시의 저는 감히 세손 저하 앞에 떳떳하게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
“또한, 시기적으로도 좋지 않다 판단하였습니다.”
이레는 그가 사헌부 소속의 감찰관이라는 사실을 상기하였다.
또한, 그는 홍 씨였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궁 안의 정세는 복잡하게 뒤엉켜 있었다.
왕세자의 죽음 이전.
조정은 왕세자와 대신들 간의 충돌로 연일 심각한 일이 벌어지곤 하였다.
세자와 대립하던 노론이었으며, 사헌부 소속이었던 홍국영으로서는 자연 운신의 폭이 좁을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게 아니라면 앞날을 정확히 판단하였거나.’
홍국영은 처음부터 왕세자가 아닌 왕세손에게 관심을 보였다.
만약, 지금과 같은 상황이 벌어질 것을 홍국영이 미리 예견한 것이라면……?
‘홍국영. 이 사내, 단순한 무뢰배가 아니다.’
혹시 십학사의 존재를 알고 있는 걸까?
정체가 무엇이든, 한 가지는 분명했다.
홍국영, 그는 시대의 흐름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앞날을 내다보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이레는 형운에게 질문을 돌렸다.
“그래서 저하께선 어찌하셨습니까?”
갑자기 불쑥 나타나 수하가 되고 싶다 말하는 사내.
더구나 그는 오래전부터 형운의 주변을 떠돌고 있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형운이 어떻게 행동하였을지 궁금했다.
형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연히 거절하였소. 소문도 좋지 않고, 과거의 행적도 수상한 자를 어찌 신임할 수 있겠소. 저자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던 모양이오. 우선 작은 신뢰부터 쌓겠다며, 잠시만 자신을 따라와 달라고 하였소. 그렇게 터덜터덜 앞서가는 저자를 조용히 따라와 보았더니…….”
형운이 이레와 시선을 마주했다.
“바로 이곳으로 오게 되었소.”
“정안당, 이곳 말입니까?”
“그렇소. 그리고 알게 되었소.”
형운은 이레를 향해 아픈 눈빛을 보냈다.
본채의 여인들에게 고초를 당하는 그대의 모습을 말이오.
그의 눈빛이 묻고 있었다.
이런 일이 있었는데, 어찌 말하지 않았소?
이레는 가지런한 속눈썹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갑자기 벌어진 일입니다. 설사, 알았다 한들 여인들의 일을 어찌 저하께 고하겠습니까.
본디 양반의 법도란 안과 밖의 구분이 철저하였다.
여인들의 일에 사내가 쉽게 끼어들 수 없었다.
더구나 형운은 범상한 사람들과 다르니, 더더욱 관여할 수 없는 처지였다.
“그렇게 된 일이로군요.”
이제야 대강의 상황이 파악되었다.
본디 세손에게 관심이 많았던 홍국영.
이제나저제나 세손에게 다가갈 빌미를 엿보던 찰나.
정안당에서 벌어진 사건을 알게 된 것이리라.
이쯤 되니 이레는 홍국영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이곳의 상황은 어찌 아셨습니까?”
“종종 제게 볼일 있는 자들이 집까지 찾아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낯선 사람의 모습이 보이면 즉시 소식을 전하라 집안사람들에게 당부해두었습니다.”
이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문난 무뢰한이었으니.
집으로 항의하러 오는 사람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자나 깨나 세손 저하의 눈에 들고 싶어 안달하던 저인지라, 우연히 이번 일을 들었을 때, 하늘이 내린 기회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홍국영은 ‘우연히’라는 말을 강조했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형운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가 곤경에 처한 세손빈의 상황을 이용해 자신에게 접근하였다는 사실이 달갑지 않았다.
그럼에도 홍국영은 자신의 진심을 구태여 숨기려 하지 않았다.
자신만만한 솔직함.
이레가 다시 그에게 물었다.
“좀 전에 벌인 일의 뒷감당을 어찌할 생각입니까?”
“무슨 뒷감당을 말씀하시는지요.”
“정승댁 며느리에게 물벼락을 내리지 않았습니까? 후환이 만만치 않을 겁니다.”
홍국영은 뻔뻔한 표정으로 이레에게 대답했다.
“제가 감히 정승댁 며느님에게 물벼락이라뇨? 말도 안 됩니다. 전 다만 부엌의 구정물을 마당에 버린 것뿐인데. 혹, 그곳에 사람이라도 있었습니까?”
“……!”
이레는 생각이 깊어졌다.
‘참으로 복잡한 사내로구나.’
겉모습은 수려하고, 행동은 거칠고 괴팍하며, 목적을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판세를 읽는 눈은 뛰어나다.
이처럼 다양한 기질을 보이는 사람은 난생처음이었다.
마치 한 사람의 몸속에 각기 다른 성정을 가진 여러 인격이 들어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저하, 저하를 가까이에서 섬기고 싶사옵니다. 부디 허락해주시옵소서.”
홍국영이 무릎을 꿇고 엎드려 간청했다.
그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형운이 물었다.
“지금 나의 상황이 좋지 않음은 그대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구태여 날 선택한 이유가 무엇인가?”
홍국영은 씩 입가에 자신만만한 미소를 드리웠다.
“세손 저하의 상황이 좋지 않다 누가 판단하였습니까? 모두 어리석은 자들의 조잡한 분석일 뿐입니다. 험난한 여정일수록 승리하였을 때 얻을 수 있는 성취감 또한 뿌듯하지 않겠습니까? 소인, 세손 저하께서 반드시 승리하실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이 홍국영, 세손 저하와 빈궁마마께서 허락하신다면, 두 분을 평생 따르겠나이다.”
그의 단단한 맹세.
형운은 홍국영의 외침에 긍정의 대답도, 부정의 고갯짓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