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 매미가 허물을 벗듯(金蟬脫殼)
“지금 무어라 했느냐?”
판내시부사는 어이없다는 듯 김 내관을 쳐다보았다.
“다시 말해 봐라. 누가 자네를 때렸다고?”
“그것이…….”
우물쭈물하며 대답을 망설이는 김 내관을 보며 판내시부사는 미간을 찡그렸다.
어디에서 무슨 험악한 일을 당하였는지, 김 내관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관복은 흙먼지투성이에 여기저기 찢겨 있었고, 얼굴도 성한 구석을 찾기 어려울 정도였다.
심지어 한쪽 다리마저 절룩거리며 걸었다.
퍼렇게 멍이든 눈가를 문지르며 끙끙 앓는 모양새가 흡사 대역죄를 짓고 삼일 밤낮으로 문초를 당한 죄인처럼 보였다.
분명 퇴궐한다고 들었는데.
기다시피 하여 궁의 내반원으로 돌아온 김 내관의 모습에 판내시부사는 놀라고 말았다.
하던 일을 멈춘 그는 누가 김 내관을 이런 꼴로 만들었는지 묻는 참이었다.
그런데…….
돌아온 대답이 가관이었다.
김 내관이 범인으로 지목한 사람.
“폐, 폐위된 왕세손이었습니다.”
판내시부사는 귓가를 만지작거렸다.
“누구?”
“왕세손께서 저를 이 지경으로 만들었습니다.”
“자네가 말하는 그 왕세손이 내가 아는 그 왕세손이 맞는가?”
“아마도 그럴 것이옵니다.”
“반듯하길 자로 잰 듯하고, 진지하고 또 진지한 그분?”
“맞습니다. 바로 그분입니다.”
“아침부터 밤까지 단 한 치의 어긋남 없이 예의와 법도에 따르는 그분?”
“틀림없사옵니다. 그분이 저를 오뉴월 개 패듯 팼습니다.”
“…….”
“심지어 욕도 했습니다.”
“욕까지?”
판내시부사는 상체를 김 내관 쪽으로 기울이며 심각하게 물었다.
“무어라 하던가?”
“개잡놈이라고…….”
“개잡놈?”
“귀를 찢어지도록 당기고.”
“왜 그런다 하던가? 괴롭힌 이유가 대체 뭔가?”
“꼬나본다고.”
판내시부사의 눈이 커졌다.
“꼬나봐?”
“매가 부족하냐 묻고, 염라전 구경하고 싶은 것이냐고 협박까지…….”
“허허허허.”
판내시부사의 입에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이내 웃음을 딱 멈춘 판내시부사가 김 내관에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
“자네, 낮술 했는가?”
“아닙니다,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면!”
판내시부사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하면, 말해보게. 왕세손이 무슨 이유로 자넬 이 모양으로 만들었단 말인가?”
“아마도 최 내관과 몸싸움을 벌인 일로…….”
“고작 그런 이유로 그 고리타분한 왕세손이 자네에게 폭행에 욕지거리까지 하였다고? 폭행은 그렇다 치세. 그도 사람이니 가끔은 화도 나고, 말보다 주먹이 나갈 수도 있겠지. 하지만 욕설이라니. 애초에 배우지도 않은 욕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하, 하지만 진짜로 그러하였습니다.”
김 내관은 답답한 마음에 가슴을 두드리며 하소연했다.
하지만 판내시부사는 믿지 않았다.
이런 미친 자를 보았나!
다른 사람도 아닌 그 왕세손이…….
태어나 지금까지 길이 아니면 가지 않았고, 바른말이 아니면 입에 담지 않았던 왕세손이…….
그야말로 융통성이라곤 쥐꼬리만큼도 없는 그 외골수 왕세손이…….
무얼 어찌해?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김 내관의 부상이 심각해 보이지 않았다면, 당장 머리라도 한 대 후려갈기며 정신 차리라 호통쳤을 것이다.
“돌아가서 쉬게. 오늘 다친 일에 대한 자세한 보고는 다음에 다시 듣도록 하지.”
“하오나, 판부사 나리.”
“썩 사라지라 하지 않았는가.”
역정을 내며 판내시부사는 휘휘 손을 내저었다.
더 말해봐야 소용없음이라.
김 내관이 울상을 한 채 방을 나갔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던 판내시부사는 쯧쯧 혀를 찼다.
“시답잖은 놈 때문에 시간만 허비하였구나. 그나저나…….”
그는 작성하다 만 서찰을 내려다보았다.
“폐서인된 세손의 행적이 잠시 끊겼는데, 학사들께 뭐라고 보고를 올려야 한단 말인가.”
고민하던 판내시부사는 어제 적은 보고를 고스란히 옮겨적었다.
형운의 행적을 적기 시작한 날부터 단 한 번도 변하지 않은 내용이기도 했다.
“어제도 오늘 같고, 내일도 오늘 같은 한결같은 분이니. 보나 마나 어제와 같은 일을 반복하였을 터. 가만, 그러고 보니 구태여 그날그날 보고서를 따로 작성할 필요도 없겠구나.”
판내시부사는 같은 내용을 여러 장에 옮겨적었다.
“이로써 당분간은 학사들께 올릴 보고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
십학사들은 여전히 형운의 일상에 관심이 많았다.
사실, 관심이라기보단 조롱에 가까웠다.
“하하, 매일 왕에게 문안례를 드리러 가는데, 정작 인사를 받을 왕은 처음부터 그곳에 없었다? 기가 막힌 이야기요.”
“만약, 그 사실을 폐서인된 왕세손이 알게 되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구려. 그 낭패한 얼굴을 내 눈으로 직접 보아야 하는데.”
“얼마나 억울할까. 어쩌면 눈물을 펑펑 흘리며 대성통곡할지도 모르겠소.”
“이제라도 알려주는 게 좋지 않겠소? 나중에 진실을 알고 복장이 터져 죽기라도 하면 큰일 아니겠소?”
“소용없소. 알려줘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오.”
“하긴, 늘 예법에 따라 움직였던 왕세손이니. 설사, 진상을 알아도 고지식하게 법도에 따르겠구려. 미련하구나, 참으로 미련해.”
그러던 중에 구름과 가까운 곳에 앉았던 바위가 물었다.
“한데, 폐위된 왕세손이 아니면 누가 왕을 대신하여 제례를 한단 말이오?”
돌연 웃음소리가 사라졌다.
왕을 대신하여 제례를 주관하는 일.
중대하고도 민감한 사안이었다.
해와 구름을 중심으로 십학사들의 눈빛이 복잡하게 얽혔다.
침묵 속으로 긴장감이 내려앉았다.
이레는 실내에 감도는 묘한 신경전을 유심히 살폈다.
단박에 한 가지 사실을 파악하였다.
십학사의 주축이라 할 수 있는 해와 구름이 서로 다른 택군(擇君) 후보를 내세우고 있었다.
앞으로의 정국을 결정할 중차대한 문제라 학사들 사이의 눈치 싸움이 치열했다.
먼저 기선 제압에 나선 이는 구름이었다.
“그 일이라면 이미 적합한 이가 있지 않소이까.”
“그게 누구요?”
“하엽생(荷葉生)이 어떻소? 그라면 우리와 뜻을 함께하기에 부족하지 않은 사람이오.”
그의 말에 해의 측근으로 보이는 몇몇 학사가 반대의견을 내놓았다.
“하엽생이라면 죽은 왕세자, 선의 막내아들이 아니오?”
“죄인의 자식이 어찌 이 나라를 이을 수 있단 말이오? 왕세손이 폐서인된 까닭이 무엇이오? 구름께선 진정 폐왕 연산군의 비극을 잊었단 말이오.”
“훗날 선의 자식으로 인해 조정에 피바람이 불어닥칠 것이외다.”
“어허, 어찌 하엽생을 자질이 부족한 왕세손과 비교하시오. 몰락한 선의 피를 이었으나, 어린 시절부터 현명한 상궁들의 교육을 받았으니. 어질고 선하여 종묘사직을 잇기에 이보다 적합한 인물은 없을 것이오.”
형운의 일로 웃던 십학사들은 이번엔 하엽생이라는 인물을 두고 저마다 목소리를 높였다.
이레는 그들의 언쟁을 차분한 시선으로 응시했다.
이 나라 조선의 미래가 왕도, 조정의 대신들도 아닌 전혀 엉뚱한 자들의 손에 의해 결정되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실제로 그들의 결정이 크나큰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라는 점이었다.
열 명의 학사.
그들의 손에 나라 전체가 휘둘리고 있었다.
하지만 앞으로는 다를 것이다.
그들의 뜻대로 되지 않을 것이다.
‘고지식하고 미련한 왕세손이라고?’
저들은 모르고 있다.
세자 저하의 죽음 이후, 왕세손에게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서탁 앞에 엎드려 어떤 각오를 하였는지.
저 무도하고 거만한 자들이 그의 변화로 깜짝 놀라게 될 날이 머지않았다.
결의를 다지며 이레는 고개를 돌렸다.
이내 상석에 자리한 해의 모습이 보였다.
목에 핏대까지 세워가며 ‘하엽생’을 추천하는 구름.
그에 반해 해는 아무 대응도 하지 않았다.
해의 무대응에 오히려 측근들이 당황하는 모양새였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언뜻 보기엔 해는 권력 싸움에 무관심해 보였다.
하지만 이레는 보았다.
해의 두 눈에 가득 고인 탐욕과 욕망.
사슴의 말처럼 십학사 중에 가장 무서운 자는 해임이 분명했다.
그런 그가 구름에게 순순히 주도권을 내어주고 있었다.
‘다른 노림수가 있는 것이다.’
아쉽게도 지금은 그가 어떤 음모를 꾸미고 있는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그나저나…….’
이레는 텅 빈 옆자리로 시선을 돌렸다.
십학사 중 유일하게 모습을 보이지 않는 학사.
‘학은 왜 오지 않는 것일까?’
이상하게 학의 빈자리가 신경 쓰였다.
***
어느새 저녁이 되었다.
정해진 순서인 듯 궁을 거쳐 시전 거리까지 활보한 형운은 집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행보였지만, 오늘은 무슨 이유에선지 걸음이 유달리 가벼웠다.
그의 뒤를 최 내관이 초조한 표정으로 따랐다.
“저 때문에…… 송구하옵니다, 저하.”
최 내관이 당한 굴욕에 형운은 화를 참지 못했다.
결국, 김 내관이라는 자에게 지금껏 애써 억눌렀던 것들을 한 번에 쏟아내고 말았다.
계획과 다른 행보.
최 내관은 저를 위한 형운의 행동에 감격하였으면서도, 또 한 편으로는 걱정도 되었다.
형운은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런 말 마라. 오히려 후련하다.”
“하오나…….”
“걱정 마라. 어차피 곧 움직일 생각이었으니.”
“이렇게 빨리 말이옵니까?”
저도 모르게 큰 소리로 물은 최 내관은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인지하고 연신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별다른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형운이 그에게 물었다.
“궁의 사정은 어떠하냐?”
“평온하옵니다. 그러나 시국이 묘하게 흘러가고 있사옵니다.”
“묘해?”
“약방의 의녀들이 소곤대길, 아무래도 주상전하께서 내달 보름에 있을 제례에 나서지 못하실지도 모른다 하옵니다.”
“…….”
형운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할바마마의 건강이 많이 안 좋은 것이냐?”
최 내관은 말없이 고개를 조아렸다.
“여전히 그분의 곁으론 갈 수 없고?”
“송구하옵니다. 판내시부사를 비롯한 궁인들이 겹겹으로 둘러싸고 있어, 좀처럼 전하의 곁으로 다가갈 수 없나이다.”
“그들이 할바마마의 눈과 귀를 막고 있구나.”
“어떻게든 방도를 찾아내겠나이다.”
형운이 걸음을 멈추고 최 내관을 보았다.
그리고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무리하여서는 아니 된다.”
최 내관은 고개를 숙였다.
“명심하겠나이다.”
“인모와 치성이는 어찌 지낸다더냐? 새로운 자리엔 잘 적응하고 있느냐?”
폐서인된 이후, 형운은 홍인모와 최치성과도 결별해야 했다.
주군을 제대로 보필하지 못한 죄로 강등된 두 사람은 사헌부감찰 소속의 외방으로 배정되었다.
“두 익위사께선 이제야 조금 적응한 듯 보였사옵니다.”
“다행이구나.”
“하온데…….”
“한데?”
“얼마 전 새로운 상관이 왔는데, 별종 중의 별종 같은 자인지라, 한바탕 애를 먹고 있는 모양입니다.”
“어떤 별종인데 그러더냐?”
“말은 무례하고 행동은 거칠며, 법도마저 우습게 여기니. 천방지축이 따로 없다 합니다.”
“그런 자가 어찌 사헌부감찰이 될 수 있단 말이냐. 사헌부에선 그런 자를 어찌 보고만 있다더냐?”
“책임지고 있는 사헌부의 집의가 요즘 도통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고 하옵니다.”
“사헌부의 집의?”
현재의 사헌부 집의라면 장무열이 아니던가.
한때는 같은 지붕 아래 머물던 사람이라 절로 관심이 기울였다.
“무슨 특별한 사정이라도 있느냐?”
“사건을 살피러 지방으로 내려간다며 나선 이후로 소식이 끊겼다 합니다.”
“무턱대고 엉뚱한 짓을 할 사람이 아니다. 한 번 살펴보거라.”
“네, 저하.”
“좀 전부터 수상한 기척이 느껴지는구나. 오늘은 이만 헤어지는 것이 좋겠다.”
“알겠사옵니다.”
최 내관에게 짧은 눈인사를 건넨 형운은 갈림길로 들어섰다.
시국이 빠르고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다가올 종묘제례에 맞춰 큰 변화가 감지되었다.
이 모든 것이 서탁이 예견한 대로였다.
마치 미래를 내다보기라도 한 듯 서탁의 스승들은 적들의 움직임을 예측하고 조언했다.
덕분에 차근차근 대책을 마련할 수 있었다.
남은 것은 ‘살생부’를 완성하는 것뿐.
적아(敵我)를 구분하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어떤 자를 내 편으로 포섭해야 하는지.
그리고 나를 죽이려는 자가 누구인지.
숨겨진 실체를 찾아내는 과정에서 전혀 뜻밖의 내통자들을 발견하고 깜짝깜짝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언제나 나의 편이라 생각했던 사람들.
언제까지고 내 편일 수밖에 없다 생각했던 자들이…….
실은 웃으며 그의 등에 칼을 꽂으려 준비하는 자들이었다.
-되로 받았으면 말로 갚아야지. 그것이 올바른 군주의 셈법이다.
상의 가르침을 떠올렸다.
가르침대로 따르리라.
그들처럼 웃는 얼굴로…….
그간 한껏 몸을 웅크리며 기반을 닦았으니, 이제 서서히 몸을 일으키리라.
형운은 골목을 돌아 길게 늘어진 담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흐려진 풍경 너머에 그리운 모습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집이로구나.
묘한 감흥이 일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광경이 무척 낯설었는데.
궁에서 쫓겨날 때만 해도 죽어도 적응하지 못할 거로 생각했는데.
어느새 저 낯선 곳을 집이라 부르며 안도하고 있었다.
아니다, 아마도 적응하여 그런 건 아닐 것이다.
태어나 내내 자란 곳을 떠나 이곳으로 거처를 옮긴 지, 불과 반 달여.
그 짧은 기간 동안 벌써 마음이 변했을 리 없다.
그럼에도 안도하고 있다면 그건 아마도…….
“오셨습니까?”
문앞을 지키던 여인이 한달음에 달려왔다.
언제나 말간 웃음으로 날 기다리는 이 여인.
내가 이곳을 편히 여기는 건, 바로 그녀 덕분이리라.
“기다렸소?”
반기는 이레를 향해 형운이 활짝 미소를 지었다.
***
형운은 이레의 손을 맞잡고 깍지 꼈다.
스스럼없는 그의 행동에 이레가 주위를 살폈다.
“누가 봅니다.”
“보라 하오.”
수줍게 미소 짓던 그녀가 그에게 물었다.
“시장하시지요? 금정이가 장터에서 여름 나물을 사왔답니다.”
형운이 걸음을 멈추고 이레를 보았다.
“설마, 직접 무치셨소?”
당연하다는 듯 이레가 고개를 끄덕였다.
“금정이가 말리는 걸 제가 우겼지요.”
“…….”
“표정이 어찌하여 그렇습니까?”
“나물 맛이 기대되어 그렇소.”
“기대하신다는 분께서 미간은 왜 그리 찡그리시는 건지요?”
“정말 기대되어 그렇소.”
“……금정이가 곧 저녁상 올릴 겁니다.”
“천천히 준비해도 되거늘.”
“잠시만 기다리면 될 것입니다.”
두 사람은 별채 마당을 가로질렀다.
사랑의 누마루에는 시원한 오미자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시원하게 차를 마신 형운에게 이레가 물었다.
“오늘은 어떠셨습니까?”
“어제와 같았소.”
같지 않았다.
못된 내관을 바른길로 인도하느라 주먹을 아끼지 않았다.
덤으로 욕도 한 사발 얹어주었다.
하지만 앞으로는 일상이 되어야 할 일이었다.
서탁의 가르침대로.
잠자는 숲을 깨우고, 힘찬 날갯짓으로 빼앗긴 하늘을 되찾으리라.
“주상 전하께서는…… 강녕하시온지요?”
“……강녕하시다 하오.”
묻는 이레의 목소리에도, 그리고 대답하는 형운의 음성에도 씁쓸한 기색이 묻어났다.
“다른 분들은 어찌 지내십니까?”
“누구 말이오?”
“최 내관님은 잘 지내십니까?”
“여전하다오. 치성이와 인모도 여전하고. 그런데…….”
찻잔을 내려놓으며 형운이 말을 이었다.
“장무열, 그 사람이 요즘 통 보이지 않는다 하오.”
“은호께서요? 어쩐 일일까요? 그럴 분이 아니신데.”
“그러게 말이오. 그럴 자가 아닌데…….”
형운은 저녁별이 뜨기 시작한 밤하늘을 올려 보았다.
무언가 상서롭지 못한 예감이 그의 등줄기를 훑고 지나갔다.
***
검은 그림자가 깊은 숲을 내달렸다.
복잡하게 얽힌 바위와 나무 사이를 뛰어넘는 모습이 한 마리의 늑대처럼 날렵하였다.
산 아래를 향해 거침없이 내달리던 그림자는 어느 순간 발을 멈춰야 했다. 복면을 쓴 사내들이 그의 앞을 막아섰던 까닭이다.
“찾았다!”
“이놈. 이곳에 있었구나.”
“지긋지긋한 놈.”
복면인들은 검은 그림자를 향해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검은 그림자를 찾기 위해 인근 숲을 뒤지고 다닌 것이 여러 날이었다.
얼마나 고생이 심했던지, 입에서 단내가 날 지경이었다.
처음엔 순식간에 끝날 줄 알았건만.
혼자 힘으로 저항해봐야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그러나 오산이었다.
검은 그림자는 그들의 예상을 한참이나 벗어난 실력자였다.
“제법 여러 날을 버텼지만, 네놈의 발악도 오늘로 끝이다.”
복면인들은 웃음을 흘리며 칼을 뽑았다.
잘 벼려진 칼날에 시퍼런 살기가 일렁거렸다.
그들을 물끄러미 마주하던 검은 그림자도 칼자루에 손을 올렸다.
“죽어라!”
괴성을 지른 복면인들이 검은 그림자를 향해 달려들었다.
전후좌우.
사방을 포위한 채 다섯이 한꺼번에 덮쳐들었다.
기필코 죽이고 말겠다는 의지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짓쳐들어오는 살기에도 검은 그림자는 시종일관 차분했다.
호흡을 고르고, 검 자루를 꽉 움켜쥐었다.
그를 향해 누군가 조소를 날렸다.
“늦었다!”
양을 덮친 늑대무리처럼, 복면인들의 공격이 그의 전신을 갈기갈기 찢어놓을 것만 같았다.
바로 그 순간.
검은 그림자가 움직였다.
쓰르릉!
그의 몸 주위로 반딧불이 같은 푸른 섬광이 일렁거렸다.
스윽.
차가운 절삭음이 밤을 무겁게 두드렸다.
모든 것이 정적 아래로 떨어졌다.
멀리서 들려오던 짐승 울음도 흩어지고, 요란한 풀벌레 소리마저 사라졌다.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던 복면인들은 석상이라도 된 것처럼 우두커니 서 있었다.
검은 그림자를 덮쳐가던 그 모습 그대로…….
마치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광경.
그 기묘한 정적 속에서 유일하게 검은 그림자만이 홀로 움직였다.
스릉.
피를 마신 검이 검집으로 돌아갔다.
뒤늦게 복면인들이 밑동 잘린 짚단처럼 허물어졌다.
“하아, 하아.”
검은 그림자는 참았던 거친 숨결을 뱉었다.
구름에 가려진 달이 얼굴을 내밀었다.
달빛 아래 검은 그림자의 전신이 드러났다.
눈에 띄는 큰 키.
단정한 이목구비.
그리고 공들여 갖춘 입성.
사헌부의 새로운 집의, 장무열이었다.
집을 나설 때만 해도 말짱했건만.
지금 그의 모습은 눈뜨고 보기 어려울 만큼 엉망진창이었다.
여기저기 찢어지고, 군데군데 적과 그 자신이 흘린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달빛을 담은 장무열의 눈동자가 복면인들을 향했다.
“참으로 집요한 자들이다.”
그는 한양에서 제법 멀리 떨어진 야산에서 생사를 가르는 혈투를 이어가고 있었다.
모든 것은 나흘 전에 시작되었다.
새로이 몸담게 된 조직의 모임에 참가하기 위해서 길을 나선 참이었다.
조직은 은밀하고 치밀하였다.
장소가 노출되지 않도록 최종목적지가 몇 번이나 변경되었다.
서찰이 인도하는 곳을 따라 마지막으로 그가 당도한 곳은 깊은 산 속.
하지만 그곳에서 장무열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살기등등한 눈빛의 자객들이었다.
함정.
누군가 그를 죽이기 위해 수작을 부린 것이었다.
그 이후, 피 말리는 도주와 추격의 연속이었다.
이 처절한 추격전에 며칠이나 이어지리라고는 장무열과 추적자,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하였다.
“여긴 어디인가.”
장무열의 표정이 낮게 가라앉았다.
자객들은 그를 죽이지 못했다.
하지만 그 역시 그들의 추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칼과 적의를 막아내고 베어내며 달리다 보니 어느새 길을 잃고 말았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자객들은 무턱대고 움직이는 게 아니었다.
몰이 사냥을 하듯 그를 한 곳으로 몰고 있었다.
이대로 쫓기다 보면 안전한 곳에서 점점 더 멀어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지쳐 쓰러지게 되겠지.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그의 표정이 우울하게 변했다.
그때, 검 자루를 움켜쥔 소매에서 무언가가 떨어졌다.
무심코 내려다본 장무열의 눈이 커졌다.
작은 침통.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푸른색 수실이 달린 침통이었다.
그 보잘것없는 침통을 장무열은 귀한 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일순, 말간 얼굴로 침통을 건네던 여인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동시에 부채를 흔들며 호탕하게 웃던 사내도 떠오른다.
언제나 어둡던, 오래된 서책 냄새로 가득했던 한 장소.
음침한 구석, 희미한 유등 아래, 고개를 파묻은 채 무언가를 끄적이던 사내도 생각났다.
장무열은 침통을 힘있게 움켜쥐었다.
이런 곳에서 한심한 고민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그에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운명을 넘어 숙명이 된 과업(課業).
“나쁜 녀석, 마음대로 죽지도 못하게 만들다니. 처음부터 그런 곳엔 발 들이는 게 아니었는데.”
장무열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떠올랐다.
침통을 조심스럽게 갈무리한 그는 걸음을 옮겼다.
안전한 곳을 찾아.
또 다른 수실을 단 침통의 주인들과의 재회를 고대하며.
장무열은 다시 검은 그림자가 되어 이름 없는 야산을 치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