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 이런 개잡놈을 보았나
아침저녁으로 서늘한 바람이 불었다.
사나운 기세로 열기를 더해가던 여름도 가을의 비탈길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형운은 날이 밝기 전, 집을 나와 궁으로 향했다.
집을 나선 그는 일정한 보폭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제와 같은 시간, 같은 장소를 지나친다.
진시 초, 그는 육조거리를 지났다.
진시 중엽에는 궐의 외문과 내문을 통과하여 주상 전하의 침전 밖에 당도한다.
왕께 문안 인사를 올리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침전의 대문 안으로 들어가는 건 번번이 실패하였다.
왕께서 형운과의 만남을 거부하시니.
그저 전각의 대문 밖에서 왕의 안부를 묻다 정오쯤 궁을 나오곤 하였다.
그 이후의 일과도 오전처럼 정해져 있었다.
궁을 나와 특별히 하는 일 없이 시전의 세책방을 전전하다 신시 말쯤에 집으로 돌아간다.
한 치의 어긋남 없는 일과.
도성 사람이라면 이제 형운의 하루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누군가는 그의 성실함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또 다른 누군가는 융통성없는 인사라며 혀를 찼다.
자신을 쫓아다니는 소문과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형운은 오늘도 전과 다름없는 일과를 시작했다.
시전에 들어섰다.
‘이젠 이 길도 많이 익숙해졌구나.’
형운은 처음 이 길을 걷던 날이 떠올랐다.
폐서인된 왕세손의 모습이란 쉬이 볼 수 없는 구경거리였는지라.
소문을 듣고 하나둘 모여든 인파로 발걸음을 옮기는 것도 어려울 지경이었다.
사방에서 힐끔대는 시선이 날아들었다.
어느 곳을 가든 백성들의 쑥덕거림이 꼬리처럼 따라붙곤 하였다.
그 모든 낯섦을 묵묵히 견뎌내야 했다.
아버지를 잃은 슬픔과 고통마저 속으로 삭이고 숨긴 채, 평온한 얼굴로 이 길을 반복하여 오가야 했다.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단 하루도 빠트릴 수 없었다.
이젠 어느덧 모두 익숙해진 모양이다.
형운도, 그의 모습을 보는 백성들도.
왕께 문안 인사를 드리러 가는 폐세손.
그 모습은 더는 특별하지 않은 일상의 풍경이 되었다.
형운은 육조거리를 가로질러 궐로 들어섰다.
왕의 침전 앞에 다다르자 최 내관이 빠르게 뛰어 나와 그를 맞이하였다.
“납시었나이까.”
형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하라.”
그의 명에 최 내관이 목청을 돋웠다.
“왕세손 입시옵니다.”
혹시나 오늘은 안으로 들라 하지 않으실까…….
희망을 담은 눈길이 대문을 향한다.
그러나 오늘도 침전의 붉은 문은 열리지 않았다.
폐서인된 이후로 형운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문안 인사를 왔으나, 정작 무심한 붉은 문은 그를 단 한 번도 허락하지 않았다.
“송구하옵니다, 저하.”
이 모든 것이 제 탓인 듯 최 내관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는 서둘러 다시 고하였다.
“세손 저하 듭시었사옵니다.”
그의 간절한 외침에도 여전히 침묵만이 되돌아왔다.
최 내관이 다시 한번 호소하려는 찰나.
“이 어인 소란인가.”
침전의 솟을대문이 열리고, 최 내관과 비슷한 연배의 내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정 2품의 내관, 판내시부사였다.
최 내관과 형운을 번갈아 보는 판내시부사의 미간에 못마땅한 기색이 깊게 고여 있었다.
“판내시부사…….”
마지못해 허리를 굽히는 그에게 형운은 부드러운 미소를 건넸다.
“할바마마를 뵈러 왔네.”
“주상 전하께서 밀린 국정을 살피느라 짬이 없다 하시오니. 지금은 돌아가시옵고, 다음에 다시 오심이 어떠시온지요?”
매일 당하는 거절이었다.
형운은 노여운 기색도 없이 판내시부사를 응시했다.
“할바마마께선 평안하신가?”
그 험한 일 이후로 왕의 용안을 마주한 적 없었다.
그러나 형운의 걱정이 무색할 만큼 판내시부사는 단호했다.
“그 어느 때보다 강건하시오니, 근심 마시옵소서.”
“이맘때면 늘 기침이 잦으신데, 어떠하신가?”
“잔기침 한 번 없으시옵니다.”
“다행이군.”
“…….”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불편한 헛기침을 뱉은 판내시부사가 입을 열었다.
“다른 하실 말씀이 있으시온지요?”
주름진 얼굴에 귀찮은 속내가 빤히 드러났다.
돌아가시옵소서.
더는 궁으론 걸음 하지 마시옵소서.
노골적인 눈빛.
형운은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 말했다.
“내 정오까지는 대전 근처에 있을 것이니. 전하께서 귀띔하시거든 불러주게…….”
말이 채 끝나지 않았건만, 형운의 눈앞에서 붉은 대문이 닫혔다.
참으로 황망한 풍경이었다.
보다 못한 최 내관이 발끈 나섰다.
“참으로 너무 하십니다. 어찌 이리 박정하시오?”
최 내관은 냉정히 돌아서는 판내시부사의 소맷자락을 잡아챘다.
일순.
“어딜!”
무에 더러운 오물이라도 묻은 듯 판내시부사가 팔을 휘휘 내저었다.
“그만두십시오.”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대전의 내관들이 최 내관에게 우르르 달려들어 그를 판내시부사에게서 떼어놓았다.
매정하게 닫힌 붉은 대문 앞.
헛헛한 바람이 가득한 형운의 눈동자에 최 내관의 모습이 맺혔다.
대전 내관들의 험한 손길과 발길질에 최 내관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주름진 최 내관의 입가로 검붉은 핏물이 흘렀다.
“하지 마라…… 제발, 그만두란 말이다.”
형운의 안타까운 음성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습기를 머금은 공기가 햇살 속으로 사라질 때까지 소란은 계속 이어졌다.
***
같은 시각.
남산의 묵정동 인근의 ‘가시말골’이라는 마을로 은밀한 행차가 하나둘 이어졌다.
그들 가운데, 이레를 태운 가마도 있었다.
반 시진 전.
수월로 십학사의 모임을 의미하는 한 통의 서찰이 전달되었다.
시간과 장소.
그리고 물을 의미하는 수(水)의 인장이 찍힌 서찰.
이레는 서둘러 가마에 올랐다.
서찰을 따라 몇 번의 이동 끝에 마침내 도착한 곳은 가시말골 당산나무 아래에 자리한 네 칸짜리 초가였다.
십학사의 모임 장소라고 보이지 않을 만큼 작고 소박한 초가.
하지만 초라한 겉모습은 눈속임에 불과하였다.
네 칸의 방을 하나로 길게 연결한 긴 장방형의 실내는 화려하기 짝이 없었다.
방 한가운데 놓인 나무 탁자와 열 개의 의자.
의자의 등받이마다 십장생의 문양이 돋을새김 되어 있었고, 천장에서 아래로 펼쳐진 열 개의 휘장에도 자리의 주인을 상징하는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제 자리를 찾아 앉은 이레는 주위를 찬찬히 살폈다.
좌우로 긴 탁자의 양 끝은 해와 구름의 자리였다.
그 둘을 중심으로 편을 나누듯 돌, 물, 불로초, 소나무 등의 나머지 학사들의 자리가 배치되어 있었다.
이레는 우선 자신의 옆자리부터 확인했다.
오른편엔 비상하는 학, 그리고 왼쪽은 순한 눈망울을 한 사슴의 자리였다.
시간이 이른 것인지, 학과 사슴의 자리 모두 비어 있었다.
이레는 조심스럽게 맞은편을 살폈다.
그녀의 정면에는 대나무를 상징하는 표식이, 그리고 그 양옆으로 각기 거북과 달의 자리가 이어졌다.
절반쯤 자리한 십학사들의 면면을 조심스레 살피고 있자니, 불현듯 짙은 분내가 코끝으로 스며들었다.
이레의 왼쪽 자리에 누군가 앉았다.
사각거리는 붉은 치맛자락.
이레처럼 무릎까지 내려오는 검은 너울을 쓴 여인.
너울의 한가운데 수자 놓인 문양은 ‘사슴’이었다.
사슴은 인사도 없이 대뜸 이레에게 말을 걸어왔다.
“무척 인상적인 첫인사였습니다.”
“칭찬으로 하시는 말씀이신가요? 아니면…….”
“당연히 좋은 뜻으로 한 말입니다.”
사슴은 손을 들어 입가를 가리는 시늉을 하였다.
“지금까지 십학사가 되신 분을 적지 않게 보았지만, 그날처럼 대담한 첫인상은 처음이었습니다.”
“다른 분들은 어떠했습니까?”
“보통 둘 중 한 가지였답니다.”
사슴은 손가락을 하나씩 펼치며 설명했다.
“세상 거칠 것 없는 사람처럼 자신만만한 모습이거나, 아니면 낯선 분위기에 웅크려 떨거나. 한데, 거래라니.”
더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 사슴이 깔깔 소리 내어 웃었다.
요란한 웃음에 몇몇 학사들이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사슴의 행동을 크게 신경 쓰는 눈치는 아니었다.
이내 웃음을 매듭지은 사슴이 속삭였다.
“설마,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거래하는 사람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추천한 보람이 느껴져, 얼마나 뿌듯하였는지 모릅니다.”
사슴의 말에 이레는 놀라고 말았다.
“그대가 날 추천하셨습니까?”
“네. 제가 했습니다.”
이레는 사슴을 빤히 바라보았다.
짙은 너울로 얼굴을 가린 사슴.
이 순간만큼은 저 너울을 벗기고 사슴의 표정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녀는 왜 만사여의를 추천한 것일까?
이레가 아는 한, 십학사와 관련한 인물 중에 만사여의를 잘 아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추천한 연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궁금했으니까요.”
“궁금하였다고요?”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시전의 상가 3할을 차지한 여인. 하지만 정작 그 여인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요. 어떤가요? 이 정도면 호기심을 갖기 충분한 이유가 되지 않나요?”
“단지 궁금하다는 이유만으로 이런 자리에 추천하였단 말입니까?”
“겸사겸사라고 해두죠. 마침 상인의 자리가 비었고, 그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을 물색하던 중, 만사여의라는 신비한 여인이 나타났다는 소문을 접했지요.”
사슴은 이레를 보며 말을 이었다.
“마치, 운명처럼.”
의미심장한 말.
사슴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드리워진 것을 이레는 알 수 있었다.
짙은 너울을 쓰고 있음에도, 사슴의 표정이 은근한 목소리에 묻혀 확연하게 전해져왔다.
사슴이 고개를 내밀어 이레의 귓가에 속삭였다.
“조심하세요.”
“무슨 말씀이신지요?”
“우리 조직은 상당히 조심스럽고 집요하답니다. 들어오는 것만으로 안심하였다간 큰코다칩니다. 오히려 제대로 된 조사와 시험은 이제 시작이라고 할 수 있죠. 언제나, 누군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을 겁니다.”
“왜 제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는 건가요?”
“별다른 의미는 없습니다. 그저 긴장이 풀려 실수로라도 이곳의 비밀을 남에게 발설할까 걱정되어 한 말이지요.”
이레가 다시 그녀에게 물었다.
“혹시 당신도 아직 의심받고 있습니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지요.”
사슴은 상석에 앉아 있는 해를 턱짓했다.
“저 사람, 상당히 무서운 사람이거든요.”
이레는 사슴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의자에 느른하게 기대앉은 해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겉으론 게으르고 허술해 보이겠지만, 사실 십학사 중에서 저 사람만큼 무서운 사내가 없답니다.”
“그렇군요.”
“그다음으로 신경 써야 할 사람을 꼽으라면…….”
사슴은 십학사에 대해 설명해주는 게 즐거운 듯, 묻지도 않은 말을 술술 늘어놓았다.
“해의 맞은편에 앉은 구름이겠지요. 지난번에 봐서 알겠지만, 해와 구름의 관계는 그리 좋지 못합니다. 그냥 안 좋은 정도가 아니라, 그야말로 견원지간이지요.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 난 앙숙이랍니다.”
이레가 그녀에게 물었다.
“십학사엔 상하(上下)의 위계가 없습니까?”
“이 나라, 조선을 대표하는 열 가지 계통. 각자의 분야에서 최고라 불릴 수 있는 자만이 십학사가 될 자격을 얻을 수 있습니다. 바깥에서의 신분에 상관없이 이곳에서만큼은 모두가 공평해집니다.”
“공평이라고요?”
“귀천을 떠나 조선의 앞날을 위해 모두가 노력한다. 이 한 가지 가치를 위해 단합하기 위함이지요. 당연히 서로의 우열을 논할 이유가 없습니다만…….”
잔잔한 목소리로 설명을 잇던 사슴이 돌연 속살거렸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표면적인 이야기일 뿐. 실은 해와 구름, 두 사람의 세력으로 양분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어요.”
굳이 사슴의 설명이 없었다 해도 이레 역시 그런 양상을 읽을 수 있었다.
좌석의 묘한 배치.
그리고 삼삼오오 앉은 채 귓속말을 주고받는 학사들.
그들 간에 보이지 않는 묘한 균열과 벽이 느껴졌다.
그때 사슴의 한숨이 들려왔다.
“아아, 오늘도 저 작자가 빤히 쳐다보고 있군요. 어쩌면 저리도 저속한 인간이 있는지.”
“누구 말입니까?”
“저 사내 말이어요. 모임 때마다 사람을 얼마나 노골적으로 쳐다보는지. 오늘은 여느 때보다 더 심하군요.”
이레는 무심코 사슴이 손짓하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거북의 자리.
과연 봉두난발의 사내 하나가 두 여인이 앉아 있는 곳을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어쩐지 낯설지 않은 느낌.
잠시 기억을 더듬던 이레는 일순 휘둥그레 눈을 치떴다.
‘저 사내는……!’
그는 단양 관청에서 만난…….
‘호방.’
박진봉이었다.
***
‘저자를 이곳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이레는 사내의 정체를 단숨에 눈치챘다.
어찌 모를 수 있을까.
초점 없이 풀린 눈동자.
실없는 사람처럼 입가를 떠도는 바보 같은 웃음.
오라버니를 절벽으로 밀었으며, 자신과 형운을 해치려 한 사내.
그 이후로도 이런저런 사건 때마다 마주했던 지독한 악연.
지저분한 복면으로 얼굴을 가렸어도, 이레는 박진봉의 눈을 보자마자 오싹한 소름과 함께 그를 기억해냈다.
저자가 어떻게 십학사가 되었을까?
박진봉을 십학사의 모임에서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놀라는 이레의 귓가로 사슴의 음성이 스며들었다.
“거북이 자리에 앉은 불한당이지요. 신분은 물론이고, 하는 처신도 엉망이라 십학사 모두가 꺼리는 사람입니다. 만사여의께서도 조심하십시오.”
“저자를 꺼리는 이유가 뭡니까?”
“미치광이 살인마를 그 누가 이해할 수 있겠어요?”
사슴은 과장된 동작으로 몸을 떨었다.
이레는 그녀의 평가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잔인하고 악랄한 본성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때였다.
우연인지, 박진봉과 시선이 마주쳤다.
따분한 표정을 짓던 박진봉이 돌연 씩 미소를 지었다.
전신에 와스스 소름이 돋았다.
이레는 급히 시선을 피했다.
쿵쾅쿵쾅. 심장이 터질 듯 두근거렸다.
왜 웃은 걸까?
설마, 내 정체를 눈치챈 것은 아닐까?
사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 작자가 이번엔 만사여의에게 추파를 던지네요. 사내가 아니라면 누구든 상관없다는 것인지. 하여간 저런 한심한 작자를 왜 십학사에 들였는지 모르겠어요.”
사슴에 말에 이레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행이구나. 뭔가를 눈치채서 저러는 건 아닌 모양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한 번 불안해진 마음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시간이 되었소. 회의를 시작합시다.”
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학사들이 각기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모두가 자리에 앉았다.
열 명의 자리 중 단 한 자리만 비어 있었다.
이레의 오른편.
학의 자리였다.
지난 번에 이어 이번에도 학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분위기가 정돈되자 해가 입을 열었다.
“오늘은 내달 보름에 있을 종묘제례에 관해 의논하고자 하오.”
종묘제례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십학사들의 눈빛이 변했다.
묘하게 달아오르는 분위기.
‘종묘제례에 왜 이렇게 관심을 보이는 거지?’
종묘제례는 왕실에서 행하는 제사다.
대체 그 일과 십학사 간에 어떤 관계가 있단 말인가.
“다들 아시겠지만, 주상의 병증이 날이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소. 그러기에 어쩔 수 없이 곧 행해질 제례를 다른 누군가가 대신해야 할 것 같소.”
주상 대신 제례를 주관할 이.
이 부분에 이르자 모두의 관심이 끓어올랐다.
기다렸다는 듯 구름이 나섰다.
“주상의 지병이 하루 이틀 된 것도 아니고. 더러 잔기침을 참지 못한다는 소식은 있으나, 그렇다고 하여 제례를 다른 이에게 미루겠소?”
구름의 의견에 해가 고개를 저었다.
“곁에서 지켜본 자의 말에 따르면, 하루에도 몇 번씩 가래가 돋아 숨통을 막는다 하오. 가끔은 숨 쉬는 것조차 어려워 보이니. 아무리 주상이라 하여도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제를 주관하는 건 무리일 듯싶소.”
“허허, 그 말이 사실이라면, 진정 큰일이구려.”
구름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난색을 보였다.
다른 십학사들도 혀를 차거나 고개를 설레설레 저어 보였다.
겉모습만 보면 나라의 앞날을 진정으로 걱정하는 충신들 같았다.
하지만 탄식 너머엔 은은한 욕망이 숨어 있었다.
한편, 이레는 다른 의미로 충격을 받았다.
‘제례, 왕을 대신할 사람, 설마…….’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때마침 사슴이 그녀에게 귓속말을 속삭였다.
“왕을 대신하여 제례를 한다는 말은 곧 노쇠한 왕을 대신하여 장차 이 나라를 다스린다는 뜻이지요.”
우려했던 일이 현실이 되었다.
십학사.
충신을 가장한 그들은 노쇠한 왕을 걱정하는 게 아니었다.
왕위를 이을.
비참하게 지워진 세자를 대신할 누군가를 논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때 누군가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
“제례라는 소리를 들으니 문득 궁에서 쫓겨난 폐세손의 소식이 궁금해지는구려. 그는 요즘 어찌 지내고 있소?”
이내 사슴이 간드러진 음성으로 대답했다.
“매일 주상께 문안 인사하러 궁으로 걸음 한다 들었습니다.”
그녀의 답변에 구름이 코웃음을 쳤다.
“다 부질없는 짓거리지.”
“그래도 지성이면 감천이라 하였으니…….”
사슴의 말이 채 끝내기 전에 구름이 다시 끼어들었다.
“부단한 노력도 봐주는 사람이 있어야 성과를 보일 게 아니오?”
“그게 무슨 말입니까?”
“허허, 우리 폐세손께서 그리하시는 이유는 훤하지요. 문안 인사를 핑계 삼아 주상의 여린 마음을 흔들어보려는 수작 아니겠소? 하나, 정작 주상께선 처소가 아닌 다른 곳에 계시니. 그야말로 닭 쫓던 개처럼 지붕만 보는 신세가 아니겠소?”
사슴의 눈에 호기심이 반짝거렸다.
“주상께서 침전에 아니 계신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어요?”
“본디 외로움을 많이 타는 주상의 성정을 모두 아시지 않소. 최근에 벌어진 뒤숭숭한 일로 크게 상심한 주상을 위로하러 화완 옹주가 찾아간 일이 있는데, 주상께선 그 일이 무척 기쁘셨던 모양이오. 앞으로 아침 수라를 옹주전이라 들이라 하시더니, 다음날부터 그곳에서 오전 시간을 보내신다 하오.”
“세손이 매일같이 찾아온다는 사실을 알고도 왕이 그리한단 말입니까?”
“허허, 당연히 모르니 그러는 게 아니겠소.”
“어찌 모르신단 말이어요?”
“아무도 세손을 찾아왔다는 소식을 전하지 않는데, 왕이 어찌 알겠소?”
그제야 의문이 풀린 학사들이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이런이런, 가엾은 세손을 어찌하면 좋을꼬. 매일 텅 빈 전각에 대고 문안을 드리고 있었구먼.”
“주인 없는 전각 앞에서 목놓아 할바마마를 부르짖는 꼴을 생각하니, 정말이지 웃음을 참을 수 없소이다.”
구름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부전자전이라더니. 헛발길질하는 것은 아들이나 아비나, 틀리지 않소이다.”
학사들의 웃음소리가 높아졌다.
그러나 오직 한 사람.
이레만은 그들처럼 크게 웃지 않았다.
어찌 웃을 수 있을까.
다른 사람도 아닌 형운의 일인 것을.
하지만 그렇다고 딱히 화내거나 슬퍼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입가에 영문모를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할아버지들, 걱정하지 마시어요. 그분께선 할아버지들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잘하고 계십니다.’
***
어느덧 어스름한 저녁이 내려앉았다.
“김 상책, 나 좀 보겠는가?”
궐의 외문.
일과를 마치고 퇴궐하는 대전의 상책(尙冊), 김 내관에게 누군가 다가왔다.
“누구……?”
그의 발길을 붙잡은 이는 다름 아닌 최 내관이었다.
달갑지 않은 존재인지라.
김 내관은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냐?”
“자네, 잠시 나 좀 보게나.”
“무어라?”
김 내관은 최 내관을 향해 눈빛을 세웠다.
여전히 자신에게 하대하는 최 내관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얼마 전까진 왕세손의 가장 측근으로 김 내관보다 높은 관직의 최 내관이었지만, 지금은 강등되어 정사품의 자신보다 낮은 품계가 아니던가.
사정이 달라졌으면 그 처신도 달라져야 하거늘.
한심한 노인네 같으니라고.
“무어? 혹여 아침의 일로 날 원망하려느냐?”
최 내관의 얼굴은 엉망이었다.
대전 내관들의 매질에 입술이 부르트고 눈가에는 검붉은 피멍이 맺혔다.
여럿이 한 사람에게 퍼부었던 매질이지만, 그중 유난히 매서웠던 발길질의 주인인지라.
김 내관은 지레 가시를 세웠다.
최 내관은 그에게 풀썩 마른 미소를 보였다.
“원망이라니. 당치도 않으이. 자네를 만나고 싶어 하는 분이 계시니, 잠시 시간 좀 내주게.”
“허허, 이거 참.”
김 내관은 불편한 헛기침을 했다.
최 내관이 말하는 사람이 누군지 모를 리 없었다.
폐서인된 왕세손.
“잠시면 된다네.”
최 내관은 소맷자락에서 작은 은붙이 하나를 꺼냈다.
새끼손톱 반만 한 은덩이가 김 내관에게 건네졌다.
작금의 상황이 달갑지는 않지만, 손안에 들어온 은덩이를 도로 내놓긴 싫었던지라.
“바쁜 몸이다. 오래 짬을 내어 줄 순 없다.”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걸세.”
최 내관이 장담했다.
김 내관은 마지 못해 그가 가리킨 곳으로 몸을 돌렸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막다른 골목 끝.
예상대로 폐서인된 왕세손이 기다리고 있었다.
‘대체 무슨 엉뚱한 억지를 부리려고.’
무슨 소리를 하여도 들어주지 말아야지.
울고불고 사정해도 모른척해야지.
속으로 다짐한 김 내관이 형운에게 입을 열었다.
“무슨 일로 부르시었는지 모르나 소인은 용무가 바빠…….”
“네놈이 감히 내 사람에게 주먹질을 하였더냐?”
예상과 다른 반응에 김 내관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거칠고 사나운 물음.
그가 아는 형운이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말이며 태도였다.
“지, 지금 무어라고…….”
그의 물음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퍽!
호된 주먹질이 날아왔다.
“감히, 누구에게 주먹질을 하였느냐 물었다.”
불현듯 시작한 주먹질은 이내 소나기처럼 김 내관에게 퍼부어졌다.
그의 주먹질이 어찌나 드세고 매서웠던지 김 내관은 저항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신음만 흘려댔다.
그 와중에도 작금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게 무슨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일이란 말인가.
아니, 그보다 당황스러운 것은 형운의 돌변한 모습이었다.
그 유순하고 올바르던 사람이 다짜고짜 주먹질이라고?
언제나 바르고 단정하여 한시도 예의와 법도를 어기지 않던 그 세손이?
하지만 그러한 의문도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무섭게 꽂히는 주먹과 발길질에 그는 몸을 동그랗게 만 채 발버둥 쳐야 했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매질이 마침내 끝났다.
사지를 축 늘어뜨린 김 내관은 충격과 공포로 일그러진 눈으로 형운을 올려다보았다.
“그, 그대는 대체 누구인가?”
저리 흉악한 미소를 짓는 자가 세손일 리 없다.
절대 그럴 리 없다.
“그대?”
씨익.
마른 웃음을 지은 형운이 그에게 다가와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김 내관의 귀를 아프게 당기며 속삭였다.
“이런 개잡놈을 보았나. 뉘에게 감히 그대라고 하느냐?”
김 내관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들은 거란 말인가.
욕?
그 답답할 정도로 바른 세손이 욕지거리를 뱉었단 말인가?
그의 의문에 확신을 실어주듯, 형운의 미소 섞인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직도 날 꼬나보는구나. 매가 부족한 것이냐? 아니면 이참에 아예 염라전 구경이라도 하고 싶은 것이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