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택-왕들의 향연-123화 (123/215)

#123. 암어(暗語)

“이보시오.”

등 뒤에서 단단한 향내가 성큼 다가섰다.

긴장했던 터라.

이레는 저도 모르게 흠칫 놀라고 말았다.

낮은 목소리의 주인.

모르려야 모를 수 없는 사람.

매일같이 얼굴을 마주하는 단 한 사내.

멀리서 그림자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정인의 부름이었다.

얼핏 무뚝뚝한 그의 음성에 감히 거부하기 어려운 무언가가 숨겨진 모양이다.

자꾸만 뒤를 돌아보고 싶었다.

그의 부름에 무심코 대답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대답은커녕 고개도 돌릴 수 없다.

지금 이레는 형운의 아내가 아닌 시전의 여장부 ‘만사여의’였다.

화려한 화장과 귀한 치장 그리고 그녀를 향한 시선에 담긴 신분조차도.

그러니 물어도 대답할 수 없고, 불러도 바라볼 수 없었다.

아니, 그에게 절대 정체를 들켜선 아니 되었다.

그런 까닭에 이레는 형운의 부름에 대답도…… 그 어떤 반응도 하지 못한 채 우두커니 굳어 있어야 했다.

못 들은 척 외면해야 했다.

“한 가지 물어봐도 되겠소?”

뜻하지 않은 만남에 복잡한 이레와 달리 그는 자꾸만 서슴없이 다가왔다.

하지만 왜일까?

거침없이 다가오는 형운의 행동에 가슴이 뛰었다.

터질듯한 두근거림은 단순히 들킬까 조마조마한 불안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람들이 그대를 만사여의라고 하던데. 맞소?”

어느새 이레의 등 뒤에 장승처럼 선 형운이 물었다.

이레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왜 이런 질문을 하는 걸까?

혹시, 눈치챈 것이려나?

내가 만사여의 행세를 한다는 것을.

무릎 위까지 치렁치렁 내려온 너울로도 그의 날카로운 안목을 가릴 수 없었던 걸까?

머뭇거리는 그녀에게 그가 다시 물었다.

“만사여의가 맞소?”

“…….”

이레는 대답 대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혹여나 하는 생각에 작은 목소리 한 자락 뱉을 수 없었다.

한서로에게서 목소리 변조를 비롯한 이것저것 많은 것들을 배웠지만, 그 어느 것도 지금 상황에서는 쓸모없었다.

한서로가 오랜 기간 자신의 신분을 속인 채 살 수 있었던 이유.

그저 운이 좋았던 것이 아니었다.

본디 작은 장신구와 얼굴의 작은 점만으로도 인상이 크게 변하는 것이 사람이었다.

화장과 옷차림, 말투 그리고 걸음걸이는 물론 사소한 습관까지.

한서로는 눈에 띄는 큰 것에서부터 사소한 부분까지 모조리 바꾸고 연기했다.

그런 철저함 덕분에 그녀는 만사여의라는 정체를 숨길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경험으로 터득한 비결과 비법을 틈틈이 이레에게 알려주었다.

덕분에 시전의 상인들은 물론 십학사마저도 속일 수 있었다.

하지만 형운에게만큼은 통하지 않을 것 같았다.

단순히 수련의 기간이 짧은 것이 문제가 아니었다.

설사, 10년을 넘게 연습한다 하여도 그에게 들키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이레에게 형운은 그런 존재였다.

작은 숨소리 한 자락에도 그녀를 알아낼 수 있을 것만 같은 사람.

그러기에 이레는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그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대응이었다.

이내 형운의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소?”

긍정도 부정도 아닌 미묘한 반문.

문득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궁금하였다.

무심한 표정을 짓고 있을까?

아니면 칼처럼 곧게 뻗어 나간 눈썹을 불편하게 휘고 있을까?

호기심과 두려움으로 날뛰는 심장을 간신히 다독일 때였다.

“괜찮소?”

귓가로 떨어진 걱정 섞인 한마디.

짧은 물음이었건만, 이레는 다시 한번 벼락이라도 맞은 듯 뻣뻣해졌다.

모든 걸 아는 듯했다.

그녀의 걱정과 고심을 모두를 헤아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질문이었다.

그저 짧은 한마디였건만, 이레는 저도 모르게 눈가가 붉어졌다.

코끝이 알싸하게 달아올랐다.

이어지는 그의 말이 없었다면, 어쩌면 그녀는 몸을 돌려 형운의 품을 파고들었을지도 모른다.

너울을 벗고, 그의 가슴에 안겨 눈물을 보였을지도 모른다.

“만사여의…… 그녀는 괜찮은 것이오?”

“……!”

만사여의.

형운의 입에서 그 이름이 언급되는 순간, 이레는 무너지는 이성을 가까스로 되찾을 수 있었다.

그의 목소리가 그녀에게 닿았다.

“내 인연이 있어 개인적으로 그 사람을 만난 적이 있소.”

형운은 한서로를 알고 있었다.

세손궁의 좌익위 최치성이 그녀의 사촌 오라비였던 까닭이다.

그러기에 시전을 활보하는 만사여의가 진짜가 아니라는 것도 어렴풋이 눈치챌 수 있었다.

“다른 이를 내세워 그 행세를 하게 하는 것을 보니, 진짜 만사여의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닌가 걱정되는구려.”

그런 것이구나.

내가 누구인지 눈치챈 것이 아니라, 만사여의가 가짜인 것을 보고 접근한 것이었다.

다행이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이레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 보였다.

“별일 없다는 뜻이오?”

이레는 이번에도 형운의 물음에 대답 대신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무사하다니 안심이오. 앞으로도 무탈하라 전해주오.”

말을 끝낸 형운이 세책방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의 푸른 도포가 그녀의 소맷자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스르르.

서로의 옷자락이 슬며시 스치는 소리가 묘한 울림을 일으켰다.

그렇게 형운이 사라졌다.

내내 굳어있던 이레의 얼굴에 비로소 표정이 생겨났다.

하지만 녹아내린 표정과 달리 굳어버린 다리는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못 박힌 듯 그 자리에 오도카니 선 채 그녀는 형운이 사라진 곳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레는 형운의 옷자락이 닿은 소매를 손끝으로 어루만졌다.

이미 떠나고 없었지만, 그가 남긴 긴장과 설렘은 여전히 그곳에 남아 있었다.

***

“십학사를 만났다 하셨습니까?”

한서로의 목소리가 커졌다.

그렇지 않아도 커다란 눈이 쏟아질 듯 휘둥그레졌다.

세책방에서 형운과의 조마조마한 만남 이후, 이레는 곧장 수월로 돌아왔다.

그녀는 반갑게 맞이하는 한서로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전했다.

단순한 거래 정도를 예상하고 있었던 한서로는 예기치 못한 십학사의 만남에 놀람을 표하였다.

“호위 무사들에게서 그들과의 만남이 심상치 않았다고 전해 듣긴 했지만, 설마 십학사를 만나셨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괜찮으십니까? 어디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한서로는 이레의 안위부터 걱정했다.

“다행히 큰일은 없었습니다.”

한서로를 안심시킨 이레는 십학사와의 만남을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하였다.

검고 어두운 통로.

복면을 쓴 십학사들과의 만남.

삶과 죽음을 결정하는 시험.

이레의 이야기가 이어지는 동안 한서로는 몇 번이나 입술을 말아 물며 신음을 참았다.

“이번 일이 이렇게 심각해질 줄은 미처 예측하지 못했어요.”

죽고 싶지 않으면 사람들을 설득하라니.

그것도 경계심으로 똘똘 뭉친 낯선 사람들을 상대로…….

상상만으로도 아찔한 상황이었다.

“다행입니다. 무사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이레의 손을 맞잡은 한서로의 두 손이 긴장으로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이번엔 운이 좋았습니다. 문제는 앞으로의 일입니다.”

한서로는 심각해진 표정으로 물음을 이어나갔다.

“그들이 어떤 거래를 제안했습니까?”

“이번엔 별다른 요구를 하지 않았습니다.”

“다음번엔 분명 어떤 요구를 해 올 겁니다.”

이레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그들이 만사여의를 십학사로 끌어들인 이유, 단순하였다.

만사여의가 가진 막대한 재력.

그것도 절차도 무시하고 대뜸 십학사의 한 자리를 내어주었다는 것은 한 가지 사실을 의미했다.

“큰돈이 필요한 겁니다.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막대한 자금을 원하는 것이겠지요.”

“어쩌면 단순히 이용만 할 생각인지도 모릅니다.”

그럴듯한 보상을 미끼로 재물을 빼앗을 음모인지도 모른다.

회의에서 본 십학사들의 차갑고 비정한 모습으로 보아 그보다 더한 일도 가능할 터였다.

이레의 우려에 한서로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는 않을 거예요. 만약, 그럴 생각이었다면 구태여 그리 번거로운 방법을 쓸 필요가 없으니까요.”

목적이 재물뿐이라면, 납치하고 구금 하면 그만이었다.

“그럴 수 없었겠지요. 눈앞에 있는 사람이 진짜 만사여의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었으니까.”

“말씀 대로입니다. 더구나 그들은 만사여의를 위협한 전력도 있었죠. 물론, 빈궁마마 덕분에 실패로 돌아갔지만요.”

한서로는 이레를 보며 미소 지었다.

“그들은 꿈에도 모를 거예요. 만사여의로 나타난 사람이 지금까지 자신들이 해온 수작을 몇 번이나 방해한 인물이라는 것을요.”

“들킬까 봐 얼마나 가슴 졸였는지 모른답니다.”

“그래도 한고비 잘 넘겼습니다.”

활짝 미소 지은 한서로는 이내 진지한 눈빛을 했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건 지금부터예요.”

이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십학사가 됨으로써 계획의 시기를 크게 앞당길 수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그들의 실체를 하나하나 밝혀내는 것뿐.

“우선은 그들의 신뢰부터 얻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

“간단합니다, 빈궁마마. 우선 그들이 원하는 걸 줄 겁니다.”

“원하는 것이라면…….”

“당연히 재물이죠.”

한서로가 엄지와 검지로 전낭을 들어 보이는 시늉을 하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돈을 풀 거예요. 그들이 원하는 만큼. 아니, 그 이상의 자금을. 감히 거부할 마음조차 들지 않을 정도로 큰돈을 뿌릴 겁니다.”

한서로의 혼잣말에 이레는 잠시 몸을 떨었다.

이 작은 소녀의 말은 언뜻 허황된 허풍처럼 들렸다.

하지만 이레의 알 수 있었다.

한서로의 말은 진심이다.

또한, 곧 눈앞에 펼쳐질 현실이었다.

모든 일이 뜻하는 대로 풀린다 하여 ‘만사여의’로 불리는 여인.

한서로.

앞으로 그녀가 원하는 대로 모든 일이 펼쳐지리라.

만사여의가 그리 원했으니…….

그녀가 곧 만사여의였으니…….

***

노을과 함께 어스름한 저녁이 내려앉았다.

한서로와 앞으로의 일을 계획하다 보니 평소보다 귀가가 늦어지고 말았다.

이레는 허겁지겁 수월을 나섰다.

교꾼들에게 부탁하여 걸음을 서둘렀건만.

중도에 유경과 가마를 바꿔 타고 급히 집에 도착했을 땐, 이미 사위가 어둑어둑해 질 무렵이었다.

“저하께선 귀가하셨는가?”

이레의 물음에 문지기는 게으른 하품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아직 오지 않으셨습니다. 오늘은 어째 다들 늦으시네요.”

형운이 돌아오지 않았다는 대답에 이레는 안도하였다.

금정에게 저녁상을 부탁하고 이레는 별채 대문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온종일 자위처럼 신경을 곤두세웠던 탓인지.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반쯤은 넋이 나갔던 이레는 어두워지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초저녁 하늘에 별들이 하나둘 모습을 보였다.

“오늘은 어인 일로 이리 늦으실까.”

매일매일, 한 치도 다름이 없으신 분.

늘 정해진 시간, 정해진 장소에 모습을 보였던 터라.

오늘따라 늦는 형운이 걱정되었다.

이제나저제나.

그를 기다리며 대문 앞을 서성거리는 이레의 뇌리에 세책방에서의 만남이 아른거렸다.

그 무뚝뚝한 목소리.

심장을 덜컥 내려앉게 한 물음들.

아무 대답도 못 한 채 고갯짓만 했던 일이 마음에 걸렸다.

터벅터벅 멀어지던 그의 뒷모습도 자꾸만 떠올랐다.

“많이 늦으시네.”

이레의 근심이 깊어졌다.

혹시나…… 하는 걱정에 대문 앞을 맴도는 걸음이 점차 빨라졌다.

그때, 골목 저편에서 기다리고 기다렸던 형운이 나타났다.

어두웠던 이레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내걸렸다.

안갯속인 듯 흐릿했던 머릿속이 한순간 말끔해진 듯했다.

“저하…….”

반가이 부르며 형운을 향해 잰걸음을 옮기던 그녀가 문득 멈춰 섰다.

저분은 어찌하실까?

늘 자신을 기다리던 사람이 아니 보이면 어떤 표정을 지으실까?

궁금해진 이레는 별채의 담벼락 귀퉁이로 몸을 감췄다.

빼꼼, 고개만 살며시 내민 채로 그녀는 형운을 지켜보았다.

성큼성큼 너른 보폭으로 집 앞까지 다다른 그가 잠시 주위를 휘휘 두리번거린다.

아마도 이레를 찾는 듯했다.

쿡,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이레는 담벼락 뒤편으로 아예 몸을 옮겼다.

형운은 필시 당황하리라.

언제나 이곳에서 그를 기다리던 그녀였으니.

아마도 보이지 않는 이레를 찾아 집 둘레를 한 바퀴 돌아볼 것이 틀림없었다.

그럼 숨어 있다가 이 모퉁이를 돌아설 때 와락 나타나 놀라게 해야지.

‘세책방에서 절 놀라게 하셨으니, 이번엔 제 차례입니다.’

즐거운 상상에 이레의 잇새로 연신 웃음이 비죽비죽 새어 나왔다.

그러다 가까워지는 발소리에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행여 들킬세라, 그녀는 숨소리마저 죽였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한참 숨을 죽이고 기다렸건만, 형운이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지금쯤이면 집 둘레를 돌아보아도 두 번은 돌아보았을 시간인데.

궁금증을 이기지 못한 이레는 모퉁이 너머로 다시 고개를 내밀었다.

텅 비어버린 대문 앞 풍경이 보였다.

“응? 어디로 가셨지?”

지금쯤이면 대문 앞에서 이레를 찾느라 허둥대던가, 그것도 아니면 담벼락을 따라 둘레를 한 바퀴 돌고 계실 거로 생각했는데.

그녀의 예상과 달리 형운의 모습은 그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병든 닭처럼 조는 문지기 옆을 지나쳐 별채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형운은 그곳에 있었다.

사랑방 누마루 한가운데, 책상다리하고 앉아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었다.

“저하.”

상반된 감정들이 돋아났다.

제일 먼저 안도감이 밀려들었다.

무탈한 모습으로 자신의 자리에 있는 그를 보자 안심이 되었다.

저 사람이라면.

저 사내라면.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저 자리를 지키리라.

천 년을 살아온 노송처럼 늘, 한결같은 모습이리라.

동시에 서운함도 생겨났다.

이레는 자신을 찾아주지 않은 정인을 곱게 흘겨 보았다.

어찌 보면 무심하다 할 만큼 융통성없는 그의 반듯함이 오늘은 내심 서운했다.

“저하, 무얼 하십니까?”

이레가 곁으로 다가온 줄도 모른 채 형운은 무언가를 그리고 있었다.

자리에 앉은 그녀는 그가 그리는 그림을 내려다보았다.

“이게 무엇입니까?”

“그대였구려.”

뒤늦게 기척을 느낀 형운이 고개를 들고 반가운 미소를 지었다.

“미안하오. 내 신경 쓰이는 것이 있어 잠시 딴생각을 하고 말았구려.”

“대체 무언데 그리 몰두하고 계시옵니까?”

“오늘 장터에서 본 것인데, 한번 보시겠소?”

형운은 자신이 그린 그림을 이레에게 보여주었다.

“이게 무얼 뜻하는지 알겠소?”

종이 위엔 특이한 형태의 그림과 기호들이 그려져 있었다.

“이것들을 어디서 보셨습니까?”

“장터의 어린 소녀 둘이서 손장난을 하며 그리고 있더구려. 그 모양이 특이하고 흥미로워 유심히 살펴보았는데, 겉보기와 달리 무척 복잡하였다오. 마치 암어(暗語) 같았소.”

“암어요?”

“그렇소. 한 아이가 이리 쓱쓱 그리자, 다른 쪽 아이가 기다렸다는 듯 다시 이렇게 그렸소. 그럼 그 그림을 보고 다른 아이가 이리 그리는 것이었소.”

형운의 검은 눈동자가 호기심으로 반짝거렸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이레는 옅게 미소 지었다.

이것 때문이었구나.

이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림에 온통 정신이 팔려 나를 찾지 않으셨구나.

“대체 무얼까? 이게 무슨 뜻일까?”

그림에 골몰한 채 형운이 중얼거렸다.

“알려드릴까요?”

이레가 물었다.

형운의 눈동자가 반짝 빛을 발했다.

“이 암어의 뜻을 알고 있소?”

“네.”

이 그림의 정체를 진즉 알고 있었다.

하지만 순순히 말해 주기엔 무언가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알려드리면 무얼 해 주시렵니까?”

이레의 토라진 기색을 느낀 형운이 씩 보기 좋은 미소를 지었다.

“뭐든 주리다. 내가 줄 수 있는 것이라면 뭐든.”

“저하의 가장 소중한 것이라도요?”

“가장 소중한 것이라…….”

뜻밖이 요구였던 탓일까?

잠시 생각하던 형운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안 되겠소.”

이레는 단호한 그의 대답에 서운함보다 호기심이 먼저 일었다.

대체 이분께 가장 소중한 것이 무얼까.

무언데 이처럼 정색하며 아니 된다고 말씀하는 걸까?

지금까지 이렇게 거부하는 형운을 거의 본 적 없었던 이레였기에 궁금증은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그가 돌연 웃음을 터트렸다.

“이럴 때 보면 헛똑똑이군.”

“무슨 말씀입니까?”

“내게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이겠소?”

형운이 그녀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대요.”

“네?”

“내게 가장 소중한 사람.”

“그게…… 저라는 겁니까?”

“그렇소.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가장 소중하고 또 소중한 사람이니. 아무리 그대의 부탁이라 하나 어찌 함부로 내어 줄 수 있을까.”

“…….”

소중한 사람이 자신이라 하니, 기뻐 웃어야 할 일이건만.

정작 본인에게조차 내어주지 못한다시니, 울어야 할지 난감하였다.

아니, 그보다…….

이레는 잠시 형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왜…… 그런 눈으로 보오?”

“저하께선 많이 달라지신 듯합니다.”

“무어가?”

“그런 말씀을, 표정 하나 바꾸지 않으시고 하시니.”

“흠흠.”

형운은 먼 허공을 바라보았다.

괜한 헛기침을 연신 하는 걸 보니 겸연쩍고 어색한 것이 분명했다.

좀처럼 보기 어려운 반응인지라.

지켜보는 이레에겐 색다르고 즐거운 경험이었다.

“좋습니다. 그리 말씀을 해주시니, 저도 알려드리겠습니다.”

“과연 은자원의 여랑다운 대범함이오. 어서 알려주시오.”

형운이 상체를 이레에게 기울였다.

어지간히 궁금한 모양이다.

“이건…….”

“그건?”

잠시 뜸을 들인 이레가 입술을 움직였다.

***

“……실뜨기입니다.”

이레가 대답했다.

형운의 얼굴에 잠시간 어리둥절한 표정이 떠올랐다.

“실뜨기?”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별채, 자신의 처소로 들어간 이레가 잠시 후 누마루로 돌아왔다.

되돌아온 그녀의 손에는 여러 가지 색실을 엮어 만든 긴 실이 들려 있었다.

“백번 설명을 들어도 한 번 본 것보다 못하다 하였습니다. 직접 해보시면 금세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레는 긴 실의 끝을 한데 모아 묶었다.

이어진 실 테를 양손에 한 번 감아 걸고, 두 손의 약지로 감은 실을 교차하여 뜬다.

그런 다음 형운에게 내밀었다.

“이건 날틀이라고 합니다. 저하께서 처음에 그리신 그림이지요.”

“그럼 이 두 번째 그림은……?”

“네, 이 날틀의 양쪽을 이렇게…….”

이레의 설명이 이어졌다.

형운이 암어라 생각했던 그림들.

그것의 정체는 다름 아닌 아이들이 즐기던 ‘실뜨기’라는 놀이었다.

형운은 마치 걸음마를 배우는 아이처럼 이레에게 하나씩 하나씩 배워나갔다.

실로 날틀을 만들고 쟁반을 만든다.

쟁반은 젓가락 모양으로 바뀌고 그것은 이윽고 베틀 모양이 된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형운은 이내 손가락과 실이 만드는 복잡한 형태와 조화에 푹 빠져들었다.

“한낱 실과 손이 어우러져 때로는 별이 되고, 때로는 원이 되고, 절구, 장구, 눈도 되고, 물고기도 되니…… 천하가 모두 이 안에 담겨있는 것 같소. 참으로 신기하오.”

“저하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한낱 실뜨기 놀이가 특별하게 느껴집니다.”

“보시오.”

형운이 손가락을 뻗어 이레의 손에 얽혀 있는 실을 부드럽게 낚아챘다.

그의 손가락이 그녀의 손바닥을 스치고 깍지를 끼듯 손가락을 훑어 올라갔다.

그럴 때마다 이레는 전신을 타고 흐르는 간질간질한 감각을 간신히 참아야 했다.

그런 그녀의 속내를 알지 못한 듯, 형운은 새로이 터득한 놀이에 열을 올렸다.

“서로의 손과 손이 어우르며 합을 맞추고 조화를 이루어야 비로소 엉키지 않고 다음으로 나아가니. 이야말로 사람의 의미와 같지 않소? 그렇게 서로 협력하여 천지 간의 수많은 모양을 이루고 만드니, 이 어찌 신기하지 않겠소. 대체 이런 심오한 놀이를 어느 서책에서 배운 게요?”

이레가 웃으며 답했다.

“이런 놀이는 서책에서 배우는 게 아닙니다.”

“그럼?”

“어릴 적에 할아버지께서 가르쳐주셨습니다.”

지금은 돌아가시고 세상에 없는 할아버지.

그분께서 방안에서 혼자 놀 수 있다며 알려 주신 것 중 하나가 바로 이 실뜨기였다.

한동안은 이레도 형운처럼 혼자서 많은 모양을 만들며 즐거워했었더랬다.

“좋은 할아버지셨구려. 그러고 보니 말타기도 그분께 배웠다 하였지. 혹, 다른 것도 배웠소?”

“사방놀이도 했었고, 땅 재 먹기도 했습니다. 제기차기도 했고 팽이 돌리기도 했지요.”

이레의 말에 형운은 소리 내어 웃었다.

“듣기만 해도 즐겁소. 그런 놀이를 손녀에게 아낌없이 알려주셨으니, 그대의 조부는 참으로 훌륭하신 분이오.”

“제겐 참으로 고맙고 감사한 분이시지요. 한데, 저하께선 어릴 적 어떤 놀이를 하셨습니까?”

“놀이라…….”

형운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이내 그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가끔 투호를 하였소.”

“그리고요?”

“활을 쏘는 것도 배웠소.”

“또요?”

“…….”

더는 대답이 없었다.

공부라면 천하의 당할 자가 없을 만큼 공을 들였지만, 정작 또래 아이들과 함께 즐길 만한 놀이를 한 기억은 많지 않았다.

이레가 서둘러 이야기 머리를 돌렸다.

“요즘은 특별한 일 없었습니까?”

잠시 생각하던 형운이 툭 내뱉듯 말했다.

“특별한 일은 없으나, 흥미로운 일은 있소.”

“흥미로운 일요?”

“만사여의를 만났소.”

불쑥 튀어나온 말에 정곡을 찔린 이레는 속으로 뜨끔했다.

하지만 애써 속마음을 감추며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근래 시전에 만사여의가 오간다는 소문을 여러 차례 들었는데, 우연히 세책방에서 그녀를 만나게 되었구려. 한데…….”

형운은 턱을 쓰다듬으며 뒷말을 흐렸다.

이레가 그에게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아무 일도 없었소. 다만, 그녀는 내가 아는 만사여의가 아니더군.”

“만사여의는 본래 스스로를 드러내지 않는다 하지 않았습니까? 이번에도 대리인을 내세운 모양이군요.”

“아무래도 그런 모양이오. 그런데 애초에 대리인을 내세울 것이면 구태여 시전을 활보할 이유도 없었을 터인데.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오.”

말을 마친 형운은 이레를 바라보았다.

“만사여의에 관해 무슨 소리, 들은 건 없소?”

“규방에만 있는 아녀자가 무에 아는 것이 있겠습니까?”

“그렇겠지. 당신과 만사여의 간에 친분이 두터워 혹시 알까 싶어 물어본 것이라오. 그나저나…….”

형운이 시선을 내려 실뜨기를 하는 제 손을 바라보았다.

“규방에 갇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지만, 실뜨기만큼은 달통한 모양이오.”

이레가 길게 입술을 늘였다.

“이번에도 제가 이긴 듯합니다.”

형운은 한숨을 푹 쉬었다.

“인정하겠소. 더는 어찌해야 할지 알 수 없으니. 완패요.”

“처음 해보신 것이니. 이기지 못하는 게 당연합니다.”

“인정할 수 없소. 어디, 다시 해봅시다.”

형운은 다시 도전했다.

“아직은 어림도 없을 겁니다.”

“하하. 이 놀이는 참으로 심오하구려. 이대로 묵혀 놓는 건 참으로 아까운 것 같소.”

“그럼요?”

“기왕이면 우리 의미를 이 실뜨기에 의미를 부여해봅시다.”

“저하께선 모르시겠지만, 모든 모양엔 제각각의 이름이 있답니다.”

“그건 다른 사람들이 지은 것이잖소? 난 그대에게 배웠으니, 우리만의 이름을 따로 짓고 싶구려. 그래, 암어(暗語). 우리 이 실뜨기로 암어를 만듭시다.”

그의 말에 이레는 미소 지었다.

‘아십니까? 이 시간이 얼마나 행복한지. 저하와 함께하는 이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고 계십니까?’

그와 함께하는 모든 일이 이레에겐 너무도 소중했다.

‘그러니 지킬 것이옵니다.’

당신이 소중한 만큼.

이 앞에 어떤 어려움과 고난이 있다 할지라도.

반드시…….

“암어라니 정말 흥미로운 생각입니다.”

“좋아할 줄 알았소. 하하하.”

……지킬 것이옵니다.

***

깊은 밤.

형운은 거처로 돌아왔다.

방문을 열자 술 냄새가 진동하였다.

형운은 인상을 찌푸리며 실내를 살폈다.

곧 서탁 옆에 널브러진 낯선 그림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

형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잠시 불청객을 바라보던 형운이 방으로 들어섰다.

탁!

방문까지 굳게 닫은 그가 코까지 고는 객을 내려다보았다.

“주인 없는 방에 허락 없이 침입하여 잠까지 자다니.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군.”

“어이쿠. 이제 왔는가? 기다리다 지쳐 깜빡 졸았네. 그려.”

“술 냄새가 진동하는군.”

“하하. 요즘 이런저런 일로 술 먹을 일이 잦다네.”

형운은 자리에 앉았다.

“지켜보는 자들이 있었을 텐데?”

“글쎄, 몇몇 수상한 자들이 있긴 하던데. 다들 건성이더군. 그들도 사람이니 어찌 빈틈이 없겠는가?”

“확실한가?”

“내가 누구인지 잊었는가?”

불청객이 형운에게 고개를 내밀었다.

창밖에서 새어 들어오는 달빛이 그의 얼굴을 밝혔다.

장난기 가득한 눈빛.

부드러운 인상의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는 뺨의 상흔.

“은마.”

그는 은자원의 은마이자 이레의 오라비인 김기대였다.

“오랜만일세, 은백.”

히죽 웃던 기대가 돌연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은자원에 그대가 남긴 글을 보았네. 그래, 내 누이에 관해 부탁할 일이 대체 무언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