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 그녀의 목숨값
해의 담담한 음성이 이레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그대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둘 중 하나요.”
그는 손가락을 하나씩 펼치며 말을 이었다.
“첫째, 다른 십학사를 설득하여 물의 자리를 차지하거나. 두 번째, 죽거나. 그대가 마음 내키는 대로 선택해 보시오.”
별 대수롭지 않은 일상처럼 건네는 해의 제안.
그러나 정작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내용은 섬뜩하였다.
십학사가 되지 못한다면, 죽음 밖엔 다른 도리가 없었다.
턱밑으로 숨이 달라붙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물이 차오르는 밀폐된 공간 속에 갇힌 듯한 기분.
발목을 채운 물은 어느새 무릎과 허리를 지나 목 바로 아래까지 차올랐다.
문제는 해가 제시한 제안 중 이레가 원한 것은 단 한 가지도 없었다.
죽음과 십학사의 일원이 되는 것.
두 가지 모두 이레가 구상했던 그림과는 크게 동떨어졌다.
눈앞이 하얗게 바랬다.
일순, 어지럼증이 짙게 일었다.
어찌한다?
여기 오기 전까지 한서로와 함께 수많은 상황을 예상하고 논의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상상 밖의 것이었다.
대체 왜?
아니, 그보다 십학사들을 어떻게 설득하란 말인가.
이레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탁자에 둘러앉은 자들의 눈빛.
하나같이 경계와 불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저 시선을 어찌 어르고 달랠 수 있을까?
입안이 바짝바짝 마를 지경이었다.
그때, 어디선가 비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구름이 그려진 복면을 쓴 선비였다.
“허허, 이건 또 해괴한 장난인지 모르겠군.”
구름은 팔짱을 낀 채 못마땅한 기색을 노골적으로 내비쳤다.
해가 그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시오?”
“느닷없이 모임이 열려 의아하게 생각하였는데, 물의 자리에 앉힐 사람을 정한다? 사전에 아무런 상의도 없이?”
그의 말에 동조하듯 여러 학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구름의 음성이 높아졌다.
“우리도 황당하건만, 정작 물이 되겠다고 이 자리에 온 당사자도 자신이 지금 어떤 상황인지 모르는 눈치이니…….”
해를 지그시 바라보며 그가 물었다.
“이리 짓궂은 장난을 하는 연유가 무엇이오?”
비록 말은 하지 않았지만, 다른 십학사들도 그와 같은 생각을 품고 있었다.
분위기가 심각했건만.
정작 해는 눈치 없는 사람처럼 느른한 태도로 대응했다.
“장난이라. 이게 장난으로 보이시오?”
“장난이 아니면?”
쿵!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친 구름이 목청을 돋웠다.
“십학사의 일원을 들이는 중요한 자리에 영문도 모르는 자를 들인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모르면 알려주고, 가르치면 그만인 것을. 무지한 게 무에 큰 잘못이겠소.”
해의 태연한 답에 여기저기서 언짢은 헛기침이 흘러나왔다.
“적당한 인물을 골라 적당히 가르치고 말 일이면…… 우리가 지금까지 애쓴 노력은 대체 무어란 말인가? 공들여 탈을 쓰고 비밀 회합을 하는 까닭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구름은 학의 자리를 손가락질하며 말을 쏟아냈다.
“어제도 학의 자리에 천둥벌거숭이 같은 자를 천거하여 사람들을 당황하게 하더니. 논란 끝에 그대의 억지로 학이 된 자가 어떤 행태를 저지르는지 보시오. 오늘 분명 회의가 있다는 연통을 보냈음에도 아직 오지 않았소.”
열 사람이 앉을 수 있는 탁자에 빈자리가 두 곳 있었다.
하나는 물을 뜻하는 파도가 그려진 자리였고, 남은 한 자리엔 고고한 학이 그려져 있었다.
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학의 불참은 유감스러운 일이오. 오늘 중요한 논의가 있어 참석할 수 없다고 전하였소.”
“흥, 참으로 성실한 인재로군. 다른 사람은 한가하여 여기 있는 줄 아시오? 언제부터 이 모임이 개인의 사사로운 사정으로 불참할 수 있게 된 것이오? 우리 십학사란 이름이 어쩌다 이렇게 가벼워진 거냔 말이오?”
계속되는 그의 지적에 해는 눈살을 찌푸렸다.
“대체 뭐가 그리 불만이오?”
“불만? 허허허.”
실소를 흘리던 구름이 차가운 눈빛으로 해를 응시했다.
“아무래도 ‘해’, 그대는 ‘선’의 몰락 이후 긴장감이 사라진 모양이오. 정신 차리시오! 지금처럼 안일한 생각이 조직을 갉아 먹는 법이오. 이러다 우리가 지금껏 쌓아 올린 공든 탑이 무너질 수도 있소.”
구름은 다른 십학사들을 둘러보며 비장하게 소리쳤다.
“이번 일은 가볍게 넘길 사안이 아니외다. 해에게 무슨 의도가 있는지 모르나, 최근 그의 행보는 지켜야 할 선을 넘고 있소. 어제 일도 다른 학사들을 무시한 처사라 생각하였거늘. 급기야 오늘과 같은 일을 벌이고야 말았구려. 난 더는 못 보겠소. 이 자리가 어떤 자리요? 우리기 피땀으로 이룩한 자리요. 그런 자리가 투전판의 판돈 걸듯 가벼이 거래되는 이 상황을 더는 보고 싶지 않소.”
구름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난 바쁜 일이 있어 먼저 일어나리다. 다른 분들도 괜한 시간 낭비하지 않으시길 바라겠소.”
그의 선동에 몇 사람이 불편한 헛기침을 하며 엉덩이를 들썩였다.
기이한 것은 해의 반응이었다.
이쯤 되면 흥분한 사람들을 진정시키려 노력하는 척이라도 할 텐데, 정작 그는 팔짱을 끼고 앉아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다.
그저 혼잣말처럼 몇 마디 말을 중얼거리는 게 전부였다.
“답답한 양반 같으니.”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제대로 들을 수 없을 만큼 작은 중얼거림.
하지만 소란한 와중에도 이상할 정도로 귀에 콕 박혔다.
밖을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던 구름이 뒤를 돌아봤다.
“방금 무어라 했는가?”
“답답하다 하였소.”
“그대가 진정…….”
구름의 두 눈이 붉게 충혈되었다.
당장 길길이 날뛸 것 같은 그에게 해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자리에 합당하면 남기고, 맞지 않으면 치워버리면 그만 아니오?”
“……무어라? 치워 버려?”
해가 한편에 우두커니 서 있는 이레를 눈짓했다.
“저 사람이 우리가 원하는 사람이면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하면 될 터이고…….”
“…….”
“그게 아니라면 그때 치워도 될 것을.”
“합당한 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이제부터 여러 학사들이 납득할 수 있을 때까지 알아보면 되지 않겠소.”
“만약 맞지 않은 사람이라면. 그렇다면 어찌할 텐가?”
복면을 쓴 해의 눈에 미소가 그려졌다.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뭐가 있겠소? 죽이고 새로 다른 사람을 데려오면 그만인 것을.”
나직하게 이어진 그의 대답.
이레는 머리털이 쭈뼛 곤두섰다.
단순히 그의 발언이 과격하고 섬뜩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 근원적인 이유.
‘해’는 사람의 목숨을 하찮게 여기고 있었다.
마치 벌레를 죽이듯, 사람을 살리고 죽이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그런 느낌은 비단 이레만의 것이 아니었다.
소란스럽게 술렁이던 실내에 순간 침묵이 감돌았다.
심지어 누구보다 과민하게 반응했던 구름조차도 이 순간만큼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기괴한 적막이 흘렀다.
느른한 눈빛으로 돌아온 해가 구름에게 다시 물었다.
“이제 구름, 그대가 답해보시오. 과연 이 일이 그렇게 심각하게 반응할 사태요?”
“…….”
구름은 대답하지 못했다.
다른 십학사 역시 이견을 제기하지 못했다.
해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자리에 합당한 사람이 아니면 처분하고 다시 뽑으면 그만.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비밀이 새어나갈 염려도 없었다.
비로소 십학사들은 해의 속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자리에 만사여의를 부른 것은 다른 십학사들을 무시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시험받고 있는 이는 만사여의였다.
그녀를 강요하고 협박하는 자리였다.
이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어라.
그렇지 않으면 죽게 되리라.
상식적이지 않은 발상이었다.
기본적인 인성을 지닌 사람이라면 상상조차 하지 못할 위험한 발상.
하지만 필요한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할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이기도 하였다.
“큭큭큭큭.”
구석에서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거북이었다.
그는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무릎을 치며 연신 끅끅 웃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의 행동을 제지하지 못했다.
모두가 놀란 눈으로 해를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사람들의 눈빛을 아는지 모르는지, 해는 평소와 다름없는 나른한 시선으로 입을 열었다.
“그럼, 회의를 속행하겠소. 만사여의를 들이는 데 반대하는 분 계시오?”
한 명이 손을 들었다.
십학사의 유일한 여인.
사슴이었다.
또한, 그녀는 ‘물’의 자리에 만사여의를 추천한 사람이기도 하였다.
“반대하는 건 아니고,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군요.”
“물어보시오.”
해의 허락이 떨어지자, 사슴이 이레에게 눈길을 돌렸다.
“듣자 하니 만사여의는 행적이 은밀하고 성품이 무척 까다로운 사람이라 하더군요. 그래서 중요한 거래에도 매번 대리인을 내세웠다 하던데…….”
나긋나긋한 목소리를 이어가던 사슴이 이레에게 물었다.
“당신이 진짜 만사여의인지 어떻게 장담할 수 있나요?”
정곡을 찌르는 질문이었다.
***
시선과 시선이 맞부딪혔다.
이레는 침착하여 노력했다.
“그 질문엔 오히려 제가 묻고 싶군요. 그토록 의심스럽다면 제가 이 자리에 있는 연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당신이 이 자리에 있는 이유가 바로 진짜 만사여의라는 증거라는 뜻인가요?”
“대답은 제가 아닌 절 이곳으로 부른 분께서 하실 수 있겠지요.”
이레는 공을 해에게로 돌렸다.
해가 피식 헛웃음을 흘렸다.
“나조차도 그녀가 진짜 만사여의인지는 확신할 수 없소. 애초에 진짜 만사여의를 만난 사람이 없으니.”
“거북이 만났다 하지 않았던가요?”
“아쉽게도 내부자가 수작을 부려 직접 보지 못한 모양이오.”
“그럼, 해께서 저 여인을 이곳에 부른 이유는 무엇입니까?”
해가 이레를 힐끗, 곁눈질했다.
“만사여의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그녀가 범상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만은 분명히 알 수 있었소. 세상천지, 이런 여인이 여럿일 것 같진 않소.”
사슴이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해의 안목은 정평이 나 있지요.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믿겠습니다.”
“고맙소.”
이레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첫 번째 질문이 무사히 지나갔다.
해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다음 질문할 분 계시오?”
“잠깐, 제가 먼저 해도 될까요?”
이레가 다른 십학사들을 앞질러 입을 열었다.
해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곳은 그대가 질문을 받는 자리이지, 그대가 질문하는 자리가 아니오.”
“하지만 제 운명을 결정하는 자리이기도 하지요.”
“섣부른 행동이 그대의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소.”
“대신 여러분은 만사여의를 다신 만날 수 없게 되겠지요.”
“자신의 목숨으로 거래를 하시겠다?”
“상인에게 거래는 숙명이지요. 내가 가진 재물이 필요하신 게 아니었나요?”
해는 차가운 눈으로 이레를 응시했다.
이레 또한 지지 않고 그 시선을 받아넘겼다.
팽팽하게 날을 세운 숨 막히는 긴장감.
짧은 침묵을 깨고 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좋소. 질문을 허락하겠소. 무엇이 그리 궁금하시오?”
“내 목숨값.”
“목숨값?”
“내 목숨을 이곳에 걸어두면 내가 얻을 수 있는 게 무엇입니까?”
“……?”
이레의 물음에 십학사들은 다들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목숨을 대가로 무엇을 주겠냐니?
그때, 해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자신의 목숨줄을 쥔 염라대왕에게 오히려 거래를 요구한다? 과연 만사여의로군. 그 명성이 허투루 생긴 게 아니로다.”
한바탕 시원하게 웃던 해는 한층 부드러워진 눈길로 이레를 보았다.
“그 질문이라면 예전에 이미 대답한 것 같소만.”
“무어라 하셨는지 다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천하.”
해는 짧고 분명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대에게 천하를 주겠소.”
***
가마 하나가 비탈진 산길을 내려가고 있었다.
산길을 따라 자란 갈댓잎이 가마 바닥을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고르지 못한 산길을 내려오느라 교꾼은 연신 밭은 숨을 내뿜었다.
귓가를 메아리치던 폭포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머리 위를 떠돌던 산새 울음도 가마의 흔들림과 함께 희미해졌다.
그렇게 산이 멀어졌다.
숲의 소란을 떨쳐내자, 지금까지 들리지 않던 소리들이 들어왔다.
가마를 끄는 교꾼들의 거친 숨소리.
가마 곁에 바짝 붙어 걷는 천호와 백호의 발소리.
하지만 교꾼과 호위무사들의 소음도 얼마 가지 않았다.
파도 소리처럼 멀리서 웅성거리던 번화한 대로의 왁자함이 곧 가마 주위를 온통 휘저어놓았다.
이레는 가마 창문을 살포시 열었다.
좁은 틈새로 익숙한 풍경이 들어왔다.
산을 내려온 가마는 어느새 사람들로 물색 틈 없는 거리로 접어들고 있었다.
시전이 멀지 않은 골목.
저녁때가 멀지 않은 터라.
전을 굽는 기름내와 어물전의 짠 비린내가 한데 뒤섞여 콧속 냄새가 풍겼다.
찬거리를 준비하는 찬모와 반빗아치들의 행동이 재빨랐다.
흥정을 붙이고 셈을 치르는 왁자한 골목을 지나니 시전이 나왔다.
그중 몇 곳이 눈에 익었다.
새로 단장을 준비 중인 상가였다.
시전을 거닐 때면 이곳에 들러 내부를 살피는 시늉을 했다.
“잠시 쉬었다 가고 싶습니다.”
이레의 말에 가마가 근처의 상가로 이동했다.
곧 가마 문이 위로 열리고 천호가 얼굴을 내비쳤다.
“괜찮으십니까?”
천호의 얼굴에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레는 애써 태연한 표정으로 가마에서 내렸다.
“머리가 어지럽군요. 잠시 쉬고 싶습니다.”
“사람들을 물리겠습니다.”
천호는 이레를 위해 교꾼과 호위들을 물렸다.
혼자 된 이레는 비로소 참았던 숨을 한꺼번에 몰아쉬었다.
“하아…….”
내내 긴장하고 있던 몸이 일순간 와르르 무너지는 듯했다.
지난 세 시진의 일들이 모두 꿈인 듯 아득했다.
오늘 아침, 십학사의 서찰이 왔다는 천호의 전갈을 받았을 때만 하여도 이런 상황은 예측하지 못했다.
그저 가볍게 접촉하여 적당한 빌미를 만들어 은신처를 알아내려고만 하였다.
하지만…….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십학사가 되었다.
정신없이 쏟아지던 질문들.
빈틈을 노리는 날카로운 시선들.
어떤 질문이 오고, 어찌 대답했는지 자세히 기억나지 않았다.
다행히 그녀의 대응은 십학사들을 실망하게 하지 않은 모양이다.
이렇게 무사히 살아남은 것을 보면.
“이것으로 끝이 아니겠지.”
오늘은 무사히 넘겼지만, 시험은 계속될 것이다.
구름을 비롯한 몇몇 십학사들은 그녀를 보는 눈길이 곱지 않았다.
분명 감시의 눈길도 따라붙을 터.
힘없이 쫓겨난 세손빈을 감시하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세심하고 촘촘한 시선이 이레를 쫓아다닐 것이다.
아주 미미한 빈틈.
작은 실수만으로도 죽을 수 있었다.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리라.
그러나…….
물러날 수 없다.
두려움으로 인해 물러선다면 진짜 만사여의, 한서로에게 위험이 닥치리라.
마음이 부대꼈다.
어찌한다?
앞으로의 난관을 어찌 극복하면 좋을까?
가슴이 무거워졌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그림자가 그녀의 전신을 옥죄는 듯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답답함은 더욱 가중되었다.
이레는 밖으로 걸음했다.
그늘에서 쉬던 교꾼들이 화들짝 놀라 달려왔다.
“잠시 걷고 싶습니다.”
가마를 물린 이레는 시전을 걸었다.
호위무사들이 몇 발짝 떨어진 곳에서 그녀의 뒤를 조용히 따랐다.
어느새 깊어진 계절.
타는 듯한 태양 빛과 간간이 쏟아진 빗줄기로 여름날의 오후는 덥고도 습하였다.
만사여의의 출현에 몇몇 사람들이 관심을 보였다.
하지만 처음 시전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정돈된 반응이었다.
덕분에 이레는 어렵지 않게 시전을 걸을 수 있었다.
‘앞으로 어찌하면 좋을까?’
바깥바람을 쐬어도 뒤섞인 머릿속은 좀처럼 맑아지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화려한 입전들 사이에 자리한 허름한 세책방이 눈에 들어왔다.
바람결에 실려 온 오래된 서책 냄새와 묵향.
문득 그리움이 느껴졌다.
홀린 듯 그녀는 세책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 넓지 않은 공간을 가득 메운 책장과 서책들.
세책방의 낯설고도 익숙한 풍경 속에 이레는 제 그리움의 근원을 깨달았다.
은자원.
세월의 더께가 쌓인 낡은 전각.
어둡고 낮은 곳에 세상 곳곳을 살피던 은자들의 낙원.
비록 뻗어 나가는 방향은 다르나, 한 뿌리에서 나고 자란 나무처럼 은자원의 은자인 것을 잊지 말자 맹세했던 동료들이 있던 곳.
아득하여 더욱 그리운 그곳이 떠오른 것이다.
감상에 젖어 이레는 세책방을 천천히 살폈다.
유생으로 보이는 사내 몇이 그녀를 곁눈질했다.
호기심으로 가득한 시선들.
소리 없는 술렁임이 들불처럼 번져갔다.
그러나 한 사람만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서책에 빠져 있었다.
책장에 비스듬히 기댄 채 서책을 살피는 사내.
저분은……!
유난히 눈에 띄는 미려한 사내를 보는 순간, 이레는 꼴깍 마른침을 삼켰다.
‘저하.’
형운이었다.
그가 시전의 세책방에 자주 걸음 한다는 사실이 뒤늦게 떠올랐다.
잠깐의 방심 탓에 생긴 불찰.
행여 형운이 알아차릴세라, 이레는 서둘러 몸을 돌렸다.
찰나.
“이보시오.”
등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