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택-왕들의 향연-121화 (121/215)

#121. 먼 길을 갈 땐, 먼 곳을 보라

어느덧 날이 밝았다.

여느 때처럼 형운을 배웅한 이레는 평소처럼 만사여의가 되기 위해 집을 나섰다.

중도에 가마를 바꾸기 위해 유경과의 만남도 잊지 않았다.

“네가 나 때문에 고생이 많구나. 별일은 없느냐?”

“고생은요. 좋아서 하는 일인걸요. 아! 그런데 정안당 말입니다, 어지간히도 인심을 잃은 모양이어요.”

“왜?”

“형편이 넉넉하지는 않아도 나름 명성을 떨친 가문으로 알고 있는데, 정작 집안의 큰일에도 품앗이 오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번에 혼사를 치르는 아들의 평소 행실이 좋지 않다는 말이 있더구나.”

“나쁜 정도가 아닌 모양이어요. 혼례를 치르는 집에 이렇게 사람이 없는 경우는 처음 봤거든요. 얼마나 인심을 잃으면 이럴까요. 뭐, 덕분에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서 남에게 들킬 염려는 없지만요.”

“바쁘겠구나.”

“시일이 촉박해서 어쩌면 밤새 작업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혹, 그런 일이 벌어지면 미리 말씀드릴게요.”

“그래, 그리해다오. 절대 무리하진 말고.”

“네. 절대 무리 안 합니다.”

밝게 대답한 유경이 가마에 올랐다.

이레는 유경의 가마가 사라진 이후에야 수월로 향했다.

수월에선 뜻밖의 소식이 이레를 기다리고 있었다.

***

“지금 무어라 했습니까. 누구에게서 연락이 왔다고요?”

놀란 표정의 이레에게 한서로는 서찰을 건네주었다.

“십학사인 것 같습니다.”

이른 아침.

만사여의에게 전하라 하며 수월의 문지기에게 주고 간 서찰이라 하였다.

서찰의 내용은 길지 않았다.

천하.

진시 말. 대광통교 건너 상갓집에서 동(東). 칠백 보.

‘천하’라는 두 글자와 시간과 장소만이 적힌 서찰.

어찌 보면 누군가의 장난처럼 느껴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레는 서찰에 적힌 ‘천하’ 두 글자에 주목했다.

“이 서찰을 전한 사람의 인상착의가 어떻다고 합니까? 혹, 나른한 눈빛의 젊은 사내는 아니었습니까?”

한서로는 고개를 저었다.

“얼굴에 곰보 자국이 심한 중년 사내였다 합니다.”

“그래요?”

이레의 미간이 한데로 모였다.

삼오는 중년도 아니었거니와 얼굴에 곰보 자국도 없었다.

하지만 이 서찰은 삼오가 보낸 것이 분명했다.

아니, 정확하게는 그가 속한 조직에서 보낸 것이리라.

‘설마. 하루 만에 연락이 올 줄이야.’

적어도 며칠은 걸릴 줄 알았다.

서로의 가치와 성향을 견주는 탐색전.

하지만 십학사는 그녀의 예상을 뒤집고, 다짜고짜 만날 약속부터 정하였다.

기습이라도 당한 느낌.

한서로가 걱정 가득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런 식으로 접근하는 사람은 대개 성급하거나, 음흉한 심보를 가진 작자입니다.”

두 가지 모두 상대하지 말아야 할 부류였다.

“극히 드물지만,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도 이따금 이런 방식의 제안을 하기도 하지요.”

이 서찰을 보낸 무리는 세 번째 경우에 해당했다.

문득, 삼오란 사내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십학사 내에서 그의 지위는 어느 정도일까?

서두르지 않는 느긋한 태도.

만사 귀찮은 표정 속에 이따금 보이는 번뜩이는 눈빛.

필시 낮은 위치는 아닐 것이다.

“만사여의라면 어떻게 대응할까요?”

“보통의 경우는 무시합니다만. 이 경우엔…….”

한서로가 이레의 눈을 마주했다.

“조금이지만, 호기심이 생기는군요.”

응할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그만큼 서찰이 전해진 시기와 내용은 기묘하였다.

“물론, 안전이 확보된 상황이라는 전제하에 할 수 있는 선택입니다.”

십학사와의 만남.

안전을 장담할 수 없는 위험한 일이었다.

무릇 위험한 거래는 하는 것이 아니다.

“어찌하시겠습니까?”

한서로의 물음에 이레는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응해야겠습니다.”

예상했다는 듯 한서로는 고개를 끄덕였다.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서찰에서 정한 진시 말이 멀지 않았습니다. 서둘러 준비해야겠습니다.”

이윽고 닫혔던 내당의 문이 열리고 수모가 들어왔다.

화장을 하고 미리 준비된 옷과 장신구를 걸쳤다.

만사여의가 된 이레는 한서로와 앞으로의 일을 논의했다.

“무릇 거래는 허세가 절반, 협박이 절반인 셈입니다. 틀림없이 저들은 낮은 지위의 대리인을 내세워 황당무계한 요구를 해올 것입니다.”

“쉽게 응해선 안 되겠군요.”

“네. 허풍과 허세엔 무시가 제격이고, 협박과 으름장엔 자신만만한 배포로 응수하는 법이지요. 그들의 요구보다 내가 얻을 이득에 집중하면 됩니다. 그렇게 우선 작고 하찮은 거래부터 트는 것이 순서입니다.”

“명심하겠습니다.”

한서로는 이레의 손을 잡았다.

“이론과 현실은 언제나 다른 법입니다. 현장에서 실제로 맞닥뜨리게 되는 상황은 말로는 설명할 수 없을 만큼 험악하고 변화무쌍합니다.”

“그들의 제안을 어느 선까지 받아들여야 할까요?”

이레의 물음에 한서로는 서책 한 권을 넘겼다.

“우선 이것부터 보세요.”

서책의 두께가 제법 두꺼웠다.

책장을 넘기던 이레의 눈이 불현듯 휘둥그레졌다.

“이 서책은…….”

장부였다.

만사여의의 모든 것을 기록한 장부.

만사여의의 소유로 된 토지와 건물.

시전의 점포와 전국 팔도의 창고에 쌓인 곡식과 물류.

심지어 자금을 투자한 상단과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사람들의 인적사항은 물론 그들의 성향까지 낱낱이 기록되어 있었다.

당황함이 이레의 얼굴에 떠올랐다.

“이것을 왜 제게 주시는 겁니까?”

“큰 거래를 하려면 준비부터 제대로 해야 하니까요.”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장부를 넘겼다는 것은, 그 장부의 것은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뜻과 같았다.

즉, 한서로는 만사여의 그 자체를 이레에게 맡긴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제부터 상대할 자들이 어떤 무리인지 잊으셨습니까? 그들과 거래하려면 그 어떤 것도 어설프게 준비해선 안 됩니다.”

한서로의 설명에도 이레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다 해도 이건 과합니다. 제가 실수라도 하여 막대한 손해를 입게 되면 어찌하려고.”

이레의 우려에 한서로는 말간 미소를 보였다.

“그럴 리 없습니다.”

그녀는 확신하듯 대답을 이었다.

“빈궁마마께선 사람을 보는 특별한 눈을 가지고 계시니까요.”

***

가마를 탄 이레가 수월을 나섰다.

천호와 백호를 비롯한 십여 명의 호위무사들이 그녀를 수행했다.

대광통교에서 북으로 얼마쯤 가니, 상갓집이 나왔다.

통곡 소리 가득한 상갓집 대문에서 동쪽을 바라보니 좁은 골목이 나왔다.

그곳으로 정해진만큼 걸음을 옮기자, 텅 빈 공터가 보였다.

천진한 아이들이 뛰어노는 공터에 바람이 불었다.

그나마 우르르 다른 곳으로 아이들이 몰려간 이후엔 이레와 그 일행만이 덩그러니 그곳을 지킬 뿐이다.

“이곳이 확실합니까?”

“말씀하신 대로 정확히 왔습니다.”

이레는 미간을 찡그렸다.

서찰에 적힌 장소는 이곳이 분명했다.

그런데 어찌 아무도 없는 걸까?

설마, 삼오라는 자의 어쭙잖은 농간이었을까?

십학사와는 하등 상관없는 사람을 엉뚱하게 오해한 것은 아닐까?

생각이 깊어질 때였다.

천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린아이가 다가옵니다.”

이레는 가마의 창을 조금 열어 밖을 보았다.

아이들과 흙장난을 하던 소년 하나가 이레의 가마를 향해 쪼르르 달려오고 있었다.

“이걸 전해주라 했어요.”

“누가 말이냐?”

“몰라요.”

소년은 흙 묻은 서찰을 천호의 손에 쥐여주곤 날다람쥐처럼 뛰어갔다.

그 모양을 물끄러미 지켜보던 이레가 천호에게 물었다.

“무슨 내용입니까?”

“이번에도 가야 할 곳만 적혀있습니다.”

남(南). 실개천. 서(西)로 삼백 보.

남쪽으로 향하다 실개천을 만나면 서쪽으로 삼백 걸음 이동하란 말이었다.

“어찌할까요?”

천호의 물음에 이레는 호흡을 길게 들이마셨다.

당연히 가야 했다.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으니.

하지만 이 서찰을 받은 사람이 내가 아닌 만사여의라면 어찌할까?

결정은 어렵지 않았다.

“돌아갑시다.”

뜻밖의 명령이 가마 밖으로 흘러나왔다.

“네?”

천호는 당황했다.

당연히 서찰에 적힌 장소로 가자 할 줄 알았건만.

“정체도 모르는 수상한 자의 놀이에 귀한 시간을 낭비할 수 없지요.”

막대한 부를 거머쥔 만사여의라면 장난과 같은 이들의 호출에 한 번 정도는 어울려주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두 번은 그러지 않을 것이다.

가마는 왔던 길을 돌아갔다.

그렇게 반 식경 후.

가마가 대광통교를 건널 때였다.

또 한 통의 서찰이 이레에게 전해졌다.

대광통교 다리 아래서 빨래하던 아낙이 건넨 서찰이었다.

이번에도 어느 장소에서 얼마만큼 이동하라는 지시가 적혀 있었다.

이레는 이번에도 지시를 무시했다.

그날 하루 십학사에게서 온 것으로 여겨지는 서찰을 열 통 넘게 받았다.

하지만 이레는 단 한 번도 반응하지 않았다.

네 번째부터는 아예 펼쳐보지도 않았다.

무시하듯 평소처럼 시전 상가를 둘러보며 사람들을 만났다.

그렇게 하루가 지났다.

만사여의의 역할에 충실하던 이레가 다시 시전으로 돌아왔을 때, 그녀는 한서로로부터 한 가지 기묘한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조 행수라는 자가 의금부로 끌려갔다 합니다.”

“조 행수라면…… 시전 상인들의 대표가 아닙니까?”

이레의 물음에 한서로가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금난전권(禁亂廛權)이라 하여 난전을 관리하는 막대한 권한을 가진 자입니다.”

금난전권.

무분별한 난전을 막고, 시전의 질서를 유지한다는 명분으로 만들어진 법이었다.

하지만 처음 법이 만들어진 의도와 달리 금난전권은 시전 상인들의 권리와 이득을 지키고 난전을 핍박하는 도구로 전락한 지 오래였다.

그리고 시전의 난전을 관리하던 조 행수는 막대한 권한만큼 난전 상인들에겐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자였다.

그런 사람이 하루아침에 죄인이 되어 사라졌다.

“사정을 듣자 하니 난전 상인들에게 허가를 빌미로 터무니없는 자릿세를 요구하였던 모양입니다. 요구에 응하지 않으면 왈짜 패를 시켜 무력을 행사하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자의 뒷배가 만만치 않은 모양이군요.”

조 행수는 수완이 대단한 자였다.

뒤로는 온갖 악행을 저지르면서도, 모은 돈의 절반은 관아에 뇌물로 바쳤다.

그의 돈과 정성에 감복한 관리들은 그의 뒷배를 자처했다.

그로 인해 관아에 조 행수의 악행을 고발해도 처벌은커녕, 오히려 터무니없는 이유로 신고한 자를 끌고 가 매질하기 일쑤였다.

이런 일이 수차례 반복되니 더는 조 행수를 밀고하는 자가 없었다.

“그간 그자의 뒤를 살펴주었던 권세가가 어제저녁 돌연 낙향을 하였다고 합니다. 더불어 수많은 난전 상인들의 고발에도 꿈쩍도 않던 의금부가 돌연 조 행수의 집안을 뒤지고, 그간의 악행을 모조리 밝혀냈다고 합니다.”

사필귀정이라.

악인에게 내려진 마땅한 천벌이었다.

하지만 무언가 이야기의 뒷맛이 까끌까끌했다.

그저 가볍게 넘겨듣기엔 묘한 구석이 있었다.

난전을 관리하는 자가 끌려갔다.

막대한 이득을 얻을 수 있는 자리에 공백이 생겼으니, 온갖 탐욕스런 자들이 욕심을 내리라.

무언가 보이지 않는 손길에 의해 시전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이레의 예감을 입증이라도 하듯 반 시진 후, 다시 한 통의 서찰이 전해졌다.

진시 말. 대광통교 건너 상갓집에서 동(東). 칠백 보.

지금껏 전해졌던 서찰과 다를 것이 없었다.

다만, 서찰의 말미에 덧붙여진 네 글자.

상인이라면 누구나 관심을 보일 법한 짧은 글귀가 적혀 있었다.

금난전권.

***

“이곳입니다.”

천호의 목소리에 이레는 가마의 창문을 열었다.

시야를 가로막는 울창한 숲.

멀리서 들려오는 계곡 물소리.

깊은 산 속이었다.

십학사에서 보낸 서찰을 따라 움직이길 한 시진.

무려 일곱 번에 걸친 지시 끝에 도착한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정말 철두철미하구나.’

이레는 십학사들의 용의주도함에 혀를 내둘렀다.

아마도 오는 동안 수차례에 걸쳐 감시의 눈길이 있었을 것이다.

흔적을 남기지는 않는지.

따르는 사람은 없는지.

철두철미한 감시 끝에 아무런 이상이 없음을 확인하고 나서야 비로소 제대로 된 장소를 알려준 것이리라.

“이곳에서부터는 가마로 이동할 수 없소.”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곧 천호의 설명이 들려왔다.

“흑의를 입은 자들이 앞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가마로 갈 수 없는 이유가 무어라 합니까?”

천호가 이레의 물음을 그들에게 전했다.

“규칙이 그러하오. 이곳에서부턴 말과 가마 모두 두고 가야 하오.”

사정을 전해 들은 이레는 가마에서 내렸다.

천호와 백호를 이끌고 흑의인들이 버티고 선 길을 걸었다.

그런데 흑의인들은 다시 한번 앞을 막았다.

“갈 수 있는 건 한 명뿐이오.”

“무엇이?”

천호와 백호의 반응이 날카로워졌다.

그들이 검자루에 손을 얹었다.

흑의인들도 대뜸 칼을 뽑았다.

이레가 천호를 돌아보며 말했다.

“저 혼자 가겠습니다.”

“하지만…… 위험합니다.”

“규칙이라지 않습니까. 거래하러 왔으니 작은 불편은 감수해야겠지요.”

부드러운 어투와 달리 이레의 표정엔 확고한 의지가 담겨 있었다.

감히 거역할 수 없었기에 천호는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 있으면 부르십시오. 즉시 달려가겠습니다.”

“믿겠습니다.”

***

천호, 백호와 헤어진 이레는 다시 길을 걸었다.

한적한 산길을 반 식경 가령 걸으니, 계곡을 옆구리에 낀 기와집이 나왔다.

대문에 팻말이 걸려있었다.

들어오시오.

대문을 열고 들어서니, 사랑채로 이어진 중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이레는 주위를 돌아보았다.

제법 규모 있는 집이건만, 사람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다.

문지기는커녕 오가는 하인의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다.

을씨년스러운 느낌이 감도는 마당을 지나 사랑채로 들어섰다.

사방의 창이 모두 막혀 있는 실내는 그야말로 칠흑같이 어두웠다.

그때 그녀가 들어온 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화들짝 놀란 이레가 문고리를 잡고 흔들었다.

“이보시오. 이보시오.”

하지만 밖으로 잠긴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대신 문밖에서 낯선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 번 발을 들인 이상 돌아갈 수 없소. 그대로 맞은 편까지 쭉 가시오.”

“돌아갈 수 없다는 게 무슨 뜻이오. 이보시오. 무언가 오해가 있는 듯한데, 난 단지 거래를 하러 왔을 뿐이오.”

“맞은 편까지 쭉 가시오.”

“이렇게 어두운데 어떻게 간단 말이오? 일단 문부터 열고 내 말 좀 들어주시오. 이보시오, 이보시오!”

아무리 목청을 돋워도 더는 대답하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이레는 몸을 돌렸다.

길은 오직 하나였다.

어둠이 펼쳐진 칠흑 속을 향해 이레는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사랑채라 생각했던 장방형의 방.

그곳은 사실 긴 복도였다.

그리고 그 복도는 무척 길고 어두웠다.

***

심장이 터질 듯 두근거렸다.

어두운 통로 저편에 무엇이 있을지 두려웠다.

삼오라는 이름의 사내가 있을까?

어쩌면 굶주린 맹수나 피를 뒤집어쓴 살인마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당장 뒷걸음질로 도망치고 싶었다.

이레는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하지만 좀처럼 두려움이 가시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오래전의 일이 떠올랐다.

어린 시절.

홀로 자는 밤이 무서워 할아버지들께 방도를 물었을 때였다.

*

-아이야, 왜 이리 겁을 먹었느냐?

화의 인자한 물음에 어린 이레는 울먹이며 답을 했다.

-혼자 자는 밤이 무서워요. 악귀가 나타날 것 같아 잠을 잘 수가 없어요.

-깜깜한 어둠이 무서운 모양이구나.

-네. 눈을 감으면 당장 뭐가 튀어나와 절 잡아먹을 것만 같아요. 어떻게 하면 될까요?

-괜찮다. 모두 외로움과 상상이 불러온 망상일 뿐이니.

-하지만 밤이 되면 사방에서 무서운 소리가 들려와요. 창밖에서 뭔가가 기어들어 올 것만 같고, 어두운 벽 모서리에도 누군가 숨어 있는 것 같아요.

-생각을 달리해 보아라. 지금이 아니라 내일. 날이 밝으면 그들을 만나게 된다 생각해 보아라. 어떠냐?

-입가에 미소가 떠올라요. 즐거워요.

-옳다. 바로 그런 마음이다. 지금의 고생과 외로움보다 앞으로 맞을 즐거움을 떠올리는 게지. 인생은 먼 여정이니. 자고로 먼 길을 갈 때는 먼 곳을 보아야 한단다.

-화. 아직 어린아이에게 무슨 이상한 소리냐?

-상 할아버지!

-아이야. 화의 이야기 귀담아들을 필요 없다. 처음엔 그럴듯해 보여도 모두 쓸데없는 소리니까.

-쓸데없지 않아요. 정말 훌륭한 말씀이신걸요.

-선문답 같은 말이 무에 쓸모 있다고. 밤이 무섭다 했지? 밤이 내는 소란이 두렵고, 방구석에서 무언가가 튀어나올 것 같다고?

-네.

-그건 밤이 내는 소리가 아니다. 방구석에 숨은 건 무서운 게 아니라 개구쟁이 네 오라비다. 널 놀라게 하려고 숨어 있는 게야.

-정말요?

-쉿! 뒤돌아보지 마라. 모른척하려무나. 가까이 접근했을 때, 오히려 소릴 질러 깜짝 놀라게 하는 거야. 그러면 네 오라비가 얼마나 놀라겠느냐? 그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겁지 않으냐? 하하하. 고놈 참 고소하다.

-맞아요. 즐거울 것 같아요.

-그런 모습을 보려면 우선 모른 척해야겠지? 자는 척하는 것도 좋겠구나. 이불에 누워 눈을 감고 있으면, 네 오라비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을 게다.

-네. 그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밤은 말이다. 무서운 존재가 아니란다. 알고 보면 무척 게으른 검은 보자기에 불과하단다. 산자락 저편에서 어슬렁어슬렁 흘러와 서산 너머로 뒹굴뒹굴 굴러가지. 그래서 밤 보자기라고 부른단다.

-밤 보자기요?

-그래. 천하를 온통 다 덮을 만큼 큰 보자기. 밤이 소란스럽다 했더냐? 그게 다 게으른 보자기가 바닥을 끌며 지나가는 소리다. 왜 걸음을 옮길 때 치맛자락이 스치며 사락사락 소리를 내지 않더냐? 밤의 소란은 바로 밤 보자기가 지나가며 내는 소리다.

-새와 짐승이 우는 소리는요?

-녀석들은 밤 보자기를 느낄 수 있거든. 그래서 게으름 떨지 말고 빨리 지나가라며 그러는 거란다. 어떠냐? 밤 보자기의 진실을 알게 되니, 하나도 두렵지 않지?

-아니요. 움직이는 보자기라고 하니까, 오히려 무서운 것 같아요.

-바람 따라 이리저리 끌려다니기만 하는 보자기가 무에 무서울까. 바람이 불면 네 머리카락이 하늘거리고 소맷자락과 치마도 펄럭이지? 밤 보자기도 그렇단다.

-상. 무슨 말을 하나 싶었더니. 또 엉뚱한 소리로 아이를 홀리고 있구려.

-예 할아버지 오셨어요?

-오늘은 볼일이 있어 늦었구나. 아이야. 상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마라. 엉뚱하고 괴팍한 자이니. 근묵자흑(近墨者黑)이라. 네가 상을 닮아 엉뚱한 상상이나 할까 걱정이구나.

-무어라? 이 애늙은이 같은 녀석이 지금 어르신께 무어라 했느냐?

-철없다 하였소.

-예, 너 당장 나와! 아니지. 서탁 안에 숨은 놈이니. 불러낼 수도 없지. 네놈 묫자리가 어디냐?

-누가 할 소리!

*

“그날 상 할아버지와 예 할아버지께선 밤새 말다툼을 하셨지.”

그 두 분을 말리느라 외로움과 밤의 두려움은 까맣게 잊고 말았다.

그 후부터 지금처럼 어둡거나 외로운 마음이 들 때면 그때의 추억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미소 짓곤 하였다.

신기하다.

할아버지들을 직접 만난 적도 없고, 그분들의 목소리를 들어본 적도 없는데.

왜 그분들의 음성을 들은 것만 같을까.

머리를 다독이며 인자하게 웃는 모습을 본 것만 같을까?

“먼 길을 갈 땐, 먼 곳을 보라.”

화 할아버지의 말씀을 떠올린 이레는 어깨를 폈다.

어두운 통로도 끝이 있을 것이다.

그곳엔 십학사와 관련된 자들이 기다리고 있을 터.

그렇다면 지금 고민해야 할 것은 이 어두운 통로가 아니라, 통로 저편에서 접하게 될 사람들과의 일이겠지.

지금 느끼는 두려움의 정체는 바로 그들과의 만남, 그 이후의 사태이리라.

두렵지 않아.

그들은 맹수가 아니니까.

나와 같은 사람일 뿐이다.

아니, 차라리 오라버니 기대의 장난이라 여기자.

날 깜짝 놀라게 할 생각으로 오라버니가 꾸민 장난.

이 통로 너머에서 만나게 될 사람들도 모두 오라버니의 장난에 동참한 사람들이라고.

그런 생각을 하자 걸음이 가벼워졌다.

옛 추억을 떠올리며 걷다 보니, 어느새 막다른 곳에 다다랐다.

그곳에 문이 달려 있었다.

문틈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빛줄기.

이 문을 열면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이레는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끼익.

문을 열자 홍수처럼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온 빛이 동공을 아프게 찔러왔다.

이레는 눈을 지그시 감으며 통로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제법 넓은 실내.

사방에 불이 밝혀진 그곳엔 굉장히 너른 탁자가 놓여 있었다.

그곳에 여덟 명의 사람이 앉아 있었는데, 하나같이 탈과 복면 따위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이레를 보는 그들의 시선에서 호기심과 탐색의 기색이 역력히 느껴졌다.

그들 중 가장 상석에 앉은 자가 입을 열었다.

“이제 오셨소?”

불멸의 상징.

십장생 병풍을 배경 삼아 앉은 그가 이레를 보며 말을 이었다.

“다행히 무사히 도착하셨구려. 내 뒤늦게 그쪽 통로에 불을 밝히지 않았음을 깨닫고 당황하던 참이었소.”

진심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

하지만 정작 이레는 그의 말에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이곳은…… 아니, 저들은.

‘십학사!’

놀랍게도 어두운 통로 저편에서 기다리는 것은 십학사였다.

끄나풀이나 대리인 정도라 예상했는데.

십학사와의 예기치 못한 만남에 이레는 충격을 받았다.

호랑이를 잡기 위해선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 한다.

대호를 잡기 위해 작심을 하고 산을 올랐다.

그러나 무성한 수풀을 헤치며 나갔을 때, 그녀의 앞에 나타난 것은 호랑이굴이 아니라 아가리를 한껏 벌린 호랑이였다.

해(日)의 자리에 앉은 사내가 좌중을 돌아보았다.

“오늘 이렇게 모이시라 한 것은…….”

이번에는 이레에게 시선을 던졌다.

“만사여의를 물(水)의 자리에 받아들일지를 논의하기 위함이오.”

해의 느닷없는 선언.

이레는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십학사를 만난 것만으로 충격은 충분했다.

거기에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사태가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떨리는 마음을 애써 감추며 해를 향해 말했다.

“전 단지 거래를 트고 싶어 왔는데, 보아하니 상황이 몹시 복잡하군요. 이런 이야기라면 사전에 제게 상의라도 했어야 하지 않습니까?”

“아! 그런 거라면 걱정하지 마시오. 만사여의, 그대는 두 가지 중에 하나만 선택하면 될 터이니.”

해가 검지를 펼쳤다.

“첫째. 지금 당장 죽는다.”

“……!”

해가 중지를 펼쳤다.

“둘째. 다른 십학사들을 설득하여 물의 자리를 얻어낸다.”

펼쳤던 손가락을 다시 접은 해가 무감한 눈으로 이레에게 선택을 강요했다.

“이제 선택하시오. 그대는 둘 중 어느 것이 마음에 드시오?”

이레의 피가 싸늘하게 식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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