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 탁류(濁流)
둥근 탁자 위에 단정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딸깍.
만사여의는 따뜻한 물에 우려낸 차를 찻잔에 차분히 따랐다.
사내, 정후겸은 그 모습을 느른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무심하고 심지어 졸린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실상 그의 눈동자는 그녀의 움직임을 세심히 살피고 있었다.
차를 우리고 찻잔에 차를 담아 내오는 동작.
소매와 하얀 손끝이 그리는 크고 미세한 손짓 하나하나가 범상치 않았다.
시전의 3할을 차지한 여장부, 만사여의에겐 감히 함부로 하기 어려운 기품과 고아함이 존재했다.
‘평범한 여인이 아니로군.’
돈과 결부된 사람에게선 특유의 냄새가 있다.
탐욕과 욕심.
남의 것을 빼앗는 걸 즐기는 투전꾼들과 비슷한 승부사 기질.
하지만 만사여의에게선 그러한 기질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속세를 등진 학사에게서나 보일 법한 고아한 품위가 녹아있었다.
“……기이하군.”
“무어라 하시었는지요?”
“뜻 없이 중얼거린 말이니. 귀 기울일 것 없소.”
정후겸은 만사여의의 의아한 눈길을 담담한 미소로 흘려냈다.
그러곤 찻잔을 들었다.
코끝으로 고소하고 알싸한 향내가 스며들었다.
“올해 나온 새순으로 우려냈습니다.”
정후겸은 건성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천천히, 여유롭게.
그는 차를 즐겼다.
하염없이 시간이 흘렀다.
정후겸은 여전히 차를 마시고 있었다.
지켜보는 사람은 속이 터질 만큼 느리고, 느긋한 태도였다.
특히, 거래를 제안받는 입장에서는 코웃음이 절로 나올 법한 상황이었다.
열이면 아홉은 이미 오래전에 용무를 물었을 테고, 다른 하나는 버럭 화를 내거나 자리를 비웠을 터였다.
하지만 만사여의는 달랐다.
그녀는 말없이 기다렸다.
그 차분함 또한 정후겸이 지금껏 만났던 상인들과는 달랐다.
신기한 것은 그 이질적인 분위기가 싫지 않다는 점이었다.
딸깍.
마침내 그가 빈 잔을 내려놓았다.
“간만에 아주 훌륭한 차를 만났소.”
“좋으셨다니 다행입니다.”
검은 갑사 너울 너머로 만사여의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문득, 그녀의 얼굴을 가린 너울을 벗기고 얼굴을 보고 싶다는 충동이 느껴졌다.
저런 음성을 가진 사람은 어떻게 생겼을까.
틀림없이 엄청난 미인이리라.
“괜찮으시다면 존함을 여쭈어도 될는지요.”
“글쎄, 무어라 답하면 좋을까.”
만사여의의 질문에 정후겸은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했다.
얼핏 거만하고 교만한 모습인지라.
만사여의를 지키는 호위 무사들의 눈길이 사나워졌다.
특히, 만사여의의 뒤에 선 다부진 체격의 사내는 연신 주먹을 폈다 쥐었다 하며 애써 화를 참는 모습이었다.
만사여의의 허락만 떨어지면 당장 칼이라도 뽑을 분위기였다.
“삼오가 좋겠군. 삼오라 부르시오.”
정후겸은 본명 대신 ‘삼오’라는 가명을 말했다.
삼오(三五).
그의 이름 말미에 있는 겸(兼)이라는 말의 의미는 본디 겸손하다는 뜻이었다.
또한, 주역의 64괘에서 15번째를 의미하기도 하였다.
“삼오…….”
만사여의가 곱씹듯 그의 이름을 입안에서 굴렸다.
숨겨진 의미라도 찾아내려는 모양이지만, 소용없는 일이리라.
이번엔 정후겸이 물었다.
“내 이름은 말했고, 나는 그대를 어찌 부르면 좋으리까?”
이번엔 그대 차례요.
너울 뒤에서 소리 없는 웃음이 전해졌다.
“만사여의라 부르시면 충분할 듯합니다.”
정후겸은 인상을 찌푸렸다.
“만사여의는 진짜 이름이 아니지 않소?”
“삼오라는 이름 또한 진짜 이름은 아니겠지요. 그러니 만사여의로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하하. 셈이 그리되는 것이오?”
헛웃음을 흘린 정후겸이 슬며시 찻잔을 내밀었다.
“차 한 잔 더 부탁해도 되겠소?”
만사여의는 말없이 그의 빈 잔을 채워주었다.
“역시 좋은 차로군, 참으로 좋아. 이런 좁은 곳에서 나처럼 한가한 손님들에게만 대접하기 참으로 아까운 차요.”
“과찬입니다.”
“과찬이 아니라 진심으로 하는 말이외다. 어떻겠소. 이곳에서 몇몇 사람만 즐기기엔 아까운 물건이니, 더 넓은 곳으로 내어볼 생각은 없소?”
차를 빗댄 그의 은근한 제안에 만사여의가 되물었다.
“어느 곳에 팔면 될까요?”
의미심장한 만사여의의 질문.
정후겸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천하.”
만사여의는 잠시 말이 없었다.
짙은 너울 너머로 그녀의 날카로운 시선이 느껴졌다.
정후겸은 차를 마시며 모르는 척 딴청을 피웠다.
만사여의가 입을 열었다.
“천하라는 말을 정말 쉽게 입에 담으시는군요. 과연 선비님께 천하를 논할만한 배포가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겉보기보다 소심한 사람이라오.”
그야말로 동문서답.
정후겸의 엉뚱한 대답에 만사여의가 물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처음 본 여인에게 농을 건넬 정도로 대범하지 않단 뜻이오.”
“충분히 호방한 분으로 보입니다만.”
“그렇게 봐주면 고맙소만, 아쉽게도 난 속이 좁고 게으르기까지 한 사람이라오. 허풍을 떨고 뒷수습에 진땀을 빼는 부지런한 짓거리는 상상만으로도 싫소.”
“하오면…….”
“만사여의께서도 아시지 않소?”
“무엇을 말입니까?”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
만사여의의 호흡이 깊어졌다.
처음으로 보이는 감정 변화.
그러나 그녀는 이내 아무것도 모르는 척 무딘 시늉을 했다.
“미욱한 사람인지라. 선비님께서 말씀하시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짐작도 못 하겠습니다.”
“판단은 알아서 하시오. 나는 더 할 말이 없으니, 그만 가겠소.”
정후겸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미련을 털듯 신형을 돌린 그의 뒤에서 만사여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인의 몸으로 거친 상인의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늘 벼랑 끝을 걷는 듯하였지요. 매사 조심하는 것은 그런 이유입니다.”
“때로 신중함으로 기회를 놓치기도 한다오.”
등을 보인 채 그가 대꾸했다.
그가 막 점포 밖으로 발을 내디디려 할 때였다.
“선비님의 제안, 어찌하면 상세한 내용을 알 수 있겠습니까?”
정후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렸다.
그는 고개를 돌려 만사여의를 돌아보았다.
입가에 서린 미소는 말끔하게 지워버린 후였다.
“다음에 따로 기별하리다. 관심이 있으시면 그때 응하면 될 것이오. 그때, 제대로 된 물건을 볼 수 있을 것이오.”
기약 없는 약속을 만사여의에게 던진 후, 정후겸은 갓 끝을 잡고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만사여의 역시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나풀거리는 너울 사이로 희고 말간 턱선이 보였다.
궁금증이 일었지만, 더는 머뭇대지 않고 그는 수월을 나섰다.
공방 골목, 맨 끝자락에 위치한 수월을 벗어나 큰 대로로 접어들었다.
어느샌가 익숙한 그림자가 그의 곁을 나란히 걸었다.
“그분께서 불러 계시옵니다.”
“알겠다.”
정후겸은 재게 걸음을 옮겼다.
***
시전을 벗어난 사내, 정후겸이 다시 모습을 보인 곳은 궁궐 안이었다.
만사여의와의 만남.
그 은밀하면서도 위험한 거래를 누군가와 상의해야 했다.
궁으로 들어선 그는 거침없이 내궁으로 향했다.
왕세자가 세상을 떠난 지 벌써 여러 날이 흘렀음에도, 궁의 분위기는 여전히 침울하였다.
세상은 온통 밝은 청록의 기운이 가득함에도 궁 안은 한겨울처럼 을씨년스러웠다.
궁인들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웃음소리는커녕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궁은 고요하였다.
그 무거운 침묵을 가로질러 경계가 삼엄한 문을 여럿 지났다.
마침내 정후겸은 목적한 장소에 다다를 수 있었다.
화완옹주의 전각.
하지만 정작 그가 만나고 싶은 사람은 그곳에 없었다.
“옹주마마께선 조금 전 후원으로 나가셨나이다.”
옹주 전각의 어린 나인이 그에게 아뢰었다.
“서두른다 했음에도 내가 조금 늦은 모양이군. 그래, 옹주께선 홀로 나가신 것인가?”
정후겸을 힐끗 곁눈질하던 어린 궁녀가 얼굴을 붉혔다.
“아! 그러고 보니 우연히 사헌부의 집의 영감을 만나셨다 합니다.”
“……집의라 하였느냐?”
“그렇게 들었습니다.”
궁녀는 주위를 살피며, 작은 목소리로 뒷말을 덧붙였다.
“옹주께선 집의 영감과 긴히 할 말이 있으시다며, 궁녀와 내관들을 모두 물리셨다 합니다.”
“최근 장래가 기대되는 젊은 사내가 사헌부의 높은 관직에 올라 많은 이를 깜짝 놀라게 하였다던데. 혹, 집의란 분이 그분은 아니더냐?”
“맞습니다. 바로 그분입니다.”
“역시 그렇군.”
정후겸은 입가에 부드러운 웃음이 걸렸다.
화석 같은 미소를 얼굴 한가득 지은 채 그가 다시 궁녀에게 물었다.
“그래서 옹주께선 정확히 어디로 납시었느냐?”
***
내전 깊은 곳에 자리한 아늑한 후원.
뜨거운 여름 햇살과 나무 그늘이 한데 어우러진 고즈넉한 정원에 정후겸이 찾는 그 사람이 있었다.
한 송이 여름꽃처럼 청초하고 부드러운 자태.
힘주어 잡으면 툭 하고 꺾일 듯한 외로움과 이파리 사이사이에 숨겨진 가시처럼 섬뜩함을 동시에 간직한 신비로운 여인.
화완 옹주였다.
잠시 옹주의 선연한 모습을 감상하던 정후겸은 이내 입매를 단단하게 여미었다.
그의 검은 눈동자에 맺힌 것은 옹주 한 사람만이 아니었다.
화완의 곁에 서 있는 낯선 사내.
훤칠한 키에 서글서글한 눈매를 가진 사내는 굵고 분명한 선을 지녔다.
무사와 문사의 기질을 딱 절반씩 섞어 놓은 듯 묘한 매력을 지닌 사내를 보는 순간, 가슴 언저리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정후겸의 뇌리로 어린 궁녀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산책하러 가신 옹주께선 우연히 집의와 만났습니다.’
훤칠한 키에 서글서글한 눈매.
굵고 분명한 선을 가진 무척 사내다운 기질의 관인이었다.
정후겸은 낯선 그 사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사헌부의 장령으로 있으면서 혁혁한 공을 세워 끝내 젊은 나이에 집의의 자리에까지 오른 인물.
집의 장무열.
바로 그 사람이었다.
궁 안팎의 일에 관심이 많은 정후겸이기에 당연히 장무열에 관해서도 소상하게 알고 있었다.
소문대로.
아니, 소문 이상으로 헌헌하게 생긴 사내였다.
문제는 그 사내가 다른 사람도 아닌 화완 옹주와 함께 있다는 점이었다.
정후겸은 어린 궁녀의 말을 떠올렸다.
‘산책하러 가신 옹주께선 우연히 집의와 만났습니다.’
그녀의 말은 틀렸다.
옹주의 일과 중 우연은 존재하지 않는다.
겉보기엔 차분한 성품에 온종일 수자 놓기에만 열중하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녀는 무척 냉정하고 철두철미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런 그녀가 좀처럼 하지 않던 산책을 하였고, 도중에 누군가를 만났다면, 그 일은 우연히 벌어진 일이 아니다.
필연.
그녀가 계획하였거나 도모한 일이다.
즉, 화완 옹주는 처음부터 이곳에서 장무열을 만날 생각이었다.
하필 그 사람이 최근 궁을 떠들썩하게 만든 유명인이라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바로 그때, 화완과 장무열의 대화가 멈췄다.
장무열이 손을 들어 화완의 입을 막았던 까닭이다.
시선을 돌린 그는 정확하게 정후겸을 쳐다보고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절대 눈치채지 못할 먼 거리였다.
‘소문보다 대단한 건 생긴 것만이 아닌 모양이군.’
혀를 끌끌 찬 정후겸은 태연히 그들에게 다가갔다.
애초에 그는 자신의 등장을 숨길 생각도 없었다.
“이곳에 계셨군요.”
정후겸이 반가운 표정으로 다가가 인사하자, 화완 옹주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겸이가 아니더냐?”
“마마를 뵙고자 전각으로 가니, 마마께서 이곳에 계신다 하여 찾아왔사옵니다.”
화완 옹주는 가볍게 혀를 찼다.
“조용히 쉬고 싶다 하였거늘.”
“저런, 그런 속사정이 있으셨습니까? 저는 그런 줄도 모르고. 그만 결례를 범하고 말았군요.”
그에게 귓속말을 속닥여준 어린 궁녀는 오늘 밤 호된 경험을 치르게 되리라.
그런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정후겸은 입가에 드리운 미소를 거두지 않았다.
“그래. 무슨 일로 날 찾았느냐?”
“긴히 상의할 일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말을 마친 그는 장무열에게 넌지시 시선을 던졌다.
외인을 물려달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화완 옹주는 뜻밖의 대답을 했다.
“괜찮네.”
“하나, 이 일은 몹시 중요한 일이라…….”
“겸아.”
화완이 짧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조용한 그 부름에 정후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화완이 고개를 든 그를 보며 다시 말했다.
“내 이미 괜찮다 말하였다.”
“……알겠습니다.”
정후겸은 고개를 깊게 숙였다.
“그래, 무슨 일이냐?”
“오랫동안 공석으로 남은 두 자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 이야기였군. 안 그래도 마침 그 일로 너를 부를 참이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이어진 화완 옹주의 말에 정후겸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정작 그는 밝은 표정으로 옹주의 말을 반겼다.
만사여의를 만날 당시에 보인 무심하고 나른한 모습과는 전혀 상반된 모습이었다.
“옹주께서 생각해 둔 분이 계시다니. 정말 기대되는군요. 어떤 사람입니까?”
“바로 이 사람일세.”
화완 옹주는 장무열을 손짓했다.
예상대로였다.
화완이 그와 우연히 만났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그녀의 눈길이 그에게 머무는 모습을 보았을 때.
그에게 건네는 자상하고 고운 음성을 멀리서 들었을 때부터.
이미 화완의 대답을 들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아! 이분이…….”
“그렇지. 빈자리를 메우기에 더없이 적합한 사람이지. 네가 보기엔 어떠하냐?”
화완이 물어왔다.
정후겸은 속마음과 다른 대답을 내어놓았다.
“마마께오서 결정한 일이니, 잘못될 리가 없지요.”
“네 보기에도 그러하냐? 다행이구나.”
화완은 미소 지었다.
그가 본 중에 가장 밝고 환한 미소였다.
“그러고 보니 너도 오늘 누군가를 만나러 간다 하였지?”
“네. 그랬습니다.”
“그 사람은 어떻더냐?”
“그는…….”
본래 정후겸은 만사여의의 일을 화완에게 논의하려 했다.
만사여의는 그들에게 필요한 면모를 모두 갖추고 있었다.
아니, 그 이상의 능력이 있음이 분명했다.
바로 그 점이 정후겸은 마음에 걸렸다.
그녀는 아랫사람으로 부리기엔 지나치게 유능했고, 동료로 삼기엔 턱없이 신비로웠다.
하지만 화완과 장무열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본 순간.
또한, 장무열에 관한 그녀의 관심을 본 순간.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마침내 결심한 정후겸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말했다.
“그는…….”
***
“그들이 접근해왔습니다.”
여장부, 만사여의에서 다시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
이레는 입고 있던 화려한 의복과 장신구를 떼어내며 말했다.
그녀의 환복을 돕던 한서로의 눈이 커다랗게 변했다.
“십학사 말입니까?”
이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자들이었습니다? 그들과 어떻게 만났습니다? 아니…….”
한서로는 급한 시선으로 이레의 몸을 위아래로 살폈다.
“다치신 곳은 없습니까?”
애초 한서로와 함께 십학사와의 접촉하는 방법을 논의할 때, 우려한 일이 하나 있었다.
행여 십학사가 과격한 수단을 동원하여 만사여의를 없애려 들면 어쩌나 하는 것이었다.
만사여의로 인해 십학사의 주요 인물 중 하나가 몰락을 하게 되었으니.
분명 보복을 해오리라 짐작했던 것이다.
한서로는 처음부터 이 점을 걱정했었다.
그러나 이레의 생각은 달랐다.
십학사.
입수된 정보에 의하면 그들은 다양한 계층의 인물로 구성된 조직이었다.
그들에겐 의리나 신념보다 조직의 이익이 우선이었다.
함께 조직을 이끌어 가던 동료의 몰락.
어쩌면 그들에겐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닐지 모른다.
남은 십학사에겐 앞으로의 일이 더 중요하리라.
조직의 존폐.
십학사에게 지금 필요한 건 ‘의리’가 아니라 ‘황금’이었다.
그들에겐 몰락한 동료보다 엄청난 재력을 지닌 만사여의가 더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이레의 예측은 적중했다.
“별일 없었습니다.”
이레의 대답에 한서로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행입니다.”
“그들은 만사여의에게 거래를 제안하더군요.”
이레는 정후겸에게서 받은 제안을 설명했다.
“설마, 그런 식으로 접근하다니.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한서로는 미간을 한데로 모았다.
“어쩌면 그들은 제 생각보다 더 거만하고 과격한 자들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어떤 제안을 하던가요?”
“함께 천하를 도모하자더군요.”
“천하…… 라고요?”
주상 전하와 작금의 조정이 엄연히 존재함에도 천하를 운운하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수준 낮은 사기꾼이 아니면, 간이 배 밖으로 나온 허풍쟁이가 아닐까?
잠시간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한서로는 이레의 눈을 믿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그런 그녀가 사기꾼과 십학사를 구별하지 못할 리 없었다.
한서로는 마른침을 삼켰다.
“천하를 도모하자는 말은…….”
“네. 어쩌면 십학사의 실체를 만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담담한 이레의 대답에 한서로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좋지 않습니다. 이쯤에서 물러나야 할 것 같습니다.”
한서로의 본능이 경고하고 있었다.
위험하다.
십학사와 접촉.
그야말로 맨몸으로 호랑이 굴로 걸어 들어가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었다.
단순한 거래라면 모를까, 십학사와의 직접적인 대면은 피하는 것이 옳았다.
걱정하는 한서로에게 이레는 흐릿한 미소를 보였다.
“이미 물러날 곳이 없습니다.”
“그럼…….”
이레의 눈동자에 굳은 결의가 서렸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
같은 시각.
수월에서…….
그리고 화완 옹주의 후원에서…….
서로 성별이 다른 두 사람이 같은 대답을 내어놓았다.
“그들과 만날 생각입니다.”
“그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인재입니다.”
서로 다른 곳에서 시작한 개울물이 하나의 강에서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