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택-왕들의 향연-119화 (119/215)

#119. 특별한 제왕학 (下)

-이 젖비린내 나는 놈. 그 아가리 닥치지 못할까.

서탁 위.

흰 종이 위를 거침없이 질주하는 악의 글은 당혹스러울 정도로 험악하였다.

지금껏 듣도 보도 못한 욕설에 형운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저하.”

이레는 가라앉은 눈빛으로 형운을 응시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했다.

“하셔야 합니다.”

“……알겠소.”

여전히 마뜩잖은 표정.

하지만 형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의 망설임 끝에 그가 입을 열었다.

“젖비린내. 아가리. 다물라.”

간신히 입 밖으로 내뱉는 욕지거리.

아무런 감정이 담기지 않은 그것은 욕이라기보다는 경전을 읊는 것처럼 들렸다.

악이 물었다.

-어떠냐? 그럴듯하게 하느냐?

이레가 붓을 들었다.

-아직 많이 어색합니다.

-참으로 아둔하구나.

서탁 너머에서 악의 한숨이 들려오는 듯했다.

-이렇게 재능 없는 둔재는 내 평생 처음이로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이레가 형운을 두둔했다.

-워낙 생소하고 낯선 공부라, 적응하기 쉽지 않은 것일 테지요.

-아무리 낯설어도 그렇지.

-성실하신 분이니. 처음은 비록 느릴지 몰라도, 금세 따라잡으실 것입니다.

-하긴. 싫어도 내색하지 않고 피하지 않으니. 대가(大家)는 못 되어도 나중에 그럭저럭 쓸만한 정도는 되겠구나.

-은백께서 칭찬 감사하다 하십니다.

-자질이 부족하면 노력으로 메울 수밖에 없으니. 매일 매시간 정진 또 정진해야 한다. 잠시도 방심하여서는 아니 될 것이다.

-어느 정도 수준이 되어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누가 툭 건들면 ‘이런 빌어먹을 개 잡종 같은 놈을 보았나’ 정도는 자연스럽게 나갈 수 있어야 한다.

악의 글에 형운의 낯빛이 하얗게 질렸다.

-은백의 표정이 좋지 않습니다. 꼭 그리해야 하는지요. 그건 마치…….

이레가 차마 하지 못한 말을 예가 받았다.

-어허, 그래서야 시정잡배와 무엇이 다르겠다 하겠소?

여태 악의 가르침을 지켜보기만 하다가, 더는 참지 못하겠는지 불쑥 나선 것이다.

-무어라? 예, 그대에게 다른 좋은 방법이라도 있단 말인가?

-있소.

예의 한마디에 형운의 표정이 밝아졌다.

어쩌면 이 불편한 공부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모른다.

예가 어떤 식으로 도와주려나?

형운은 잔뜩 기대에 찬 눈으로 서탁을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이어진 예의 글에 그는 다시 침울해졌다.

-말이 거친데 표정마저 험악하면, 폭군과 다를 바 없소. 그러니 최소한 표정만이라도 남을 편하게 만드는 것이 어떻겠소?

-오호라. 생글생글 웃으면서 욕지거리를 내뱉으란 말이로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군.

반색하는 악을 보며 형운은 고개를 저었다.

좋지 않았다.

활짝 웃으며 쌍욕을 뱉으라니.

아무리 좋게 본다 하여도 비아냥,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형운의 생각과 달리 악과 예는 이미 타협을 보았다.

-훌륭한 의견이다. 은백, 앞으로 너는 웃으며 욕을 하도록 해라.

그것으로 악과 함께 한 제왕학이 끝났다.

“하아…….”

수업을 마친 이후.

형운은 비로소 긴 탄식을 터트렸다.

오늘도 간신히 마칠 수 있었다.

고작 몇 마디를 따라 하는 것일 뿐이거늘.

잠깐 사이에 온몸이 식은땀으로 가득했다.

고지식할 정도로 바르고 모범적인 생활을 하던 형운이 아니었던가.

험악한 말은 듣지도 보지도 않았다.

그런 그가 천하에 다시 없을 쌍욕을 입에 올리는 것은 그야말로 곤욕이었다.

“고생하셨습니다.”

이레가 그의 이마에 맺힌 땀을 훔쳐주었다.

그를 향한 그녀의 눈에 안쓰러움이 가득했다.

“괜찮소. 다 필요해서 하는 일이니. 한데 말이오…… 왜 욕을 배워야 하는지 아직 잘 모르겠구려.”

서탁의 할아버지들을 스승으로 섬긴 이후 형운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공부에 매진하였다.

할아버지들은 각자 하나씩, 자신의 비기를 형운에게 전수했다.

이미 할아버지들에게 맹세한 바 있는 터라, 형운은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가르침에 따랐다.

모두 범상치 않은 분들인지.

가르침 역시 예사롭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독특한 공부법은 바로 악 할아버지의 욕 공부였다.

“글쎄요.”

이레라고 그 깊은 심중을 알 턱이 없었다.

심지어 그녀는 악 할아버지의 입이 이토록 거칠다는 것도 이번에 처음 알았다.

하지만 할아버지들을 믿었다.

“그분들은 제가 아는 그 누구보다 현명하신 분들입니다. 지금은 그 깊은 뜻을 헤아릴 수 없지만, 언젠가 큰 도움이 될 겁니다.”

할아버지들을 향한 무한한 신뢰.

형운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러리라 생각하오.”

열린 동창 밖에서 젖은 흙내가 물씬 풍겼다.

후두둑,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레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비가 오는 모양입니다. 날이 궂으니 그만 쉬시지요.”

“내 배움의 정진이 참으로 더디고 형편없으니, 이런 실력으로 어찌 맘 편히 잠들 수 있겠소. 오늘 배운 것들을 복습해야겠소.”

“훌륭하시옵니다.”

“그럼, 다시 한 번 해보겠소.”

호흡을 가다듬은 형운은 진지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 호로 새끼들아!”

비 내리는 여름밤.

궁에서 쫓겨난 형운은 본디 나고 자란 곳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오늘도 필사적인 노력을 거듭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잡것들! 하하하, 하찮구나.”

***

깊은 밤, 숲은 짙은 안개로 한 치 앞을 분간할 수 없었다.

무더운 여름이었지만, 숲 깊은 곳에 자리한 계곡 물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가파른 산을 오르느라 지친 말이 계곡 물에 발을 담갔다.

갈증이 심했던 모양이다.

물을 삼키는 모양새가 급하기 이를 데 없었다.

마음 같아선 저도 같이 첨벙 물속에 들어가 한껏 물을 마시고 싶었건만.

그러나 사람에겐 체면이 있으니.

어찌 미물처럼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할까.

눈 아래를 검은 면사로 가린 사내는 말고삐를 당겼다.

사내의 얼굴을 가린 면사엔 ‘구름’ 문양이 수자 놓여 있었다.

이 조선을 움직이는 열 명의 학사.

십학사.

사내는 그런 십학사 중의 한 명이었다.

“아무렴, 어찌 사람이 제 마음 가는 대로 행동할 수 있을까. 높은 자리일수록 체면과 품위를 잃어선 아니 되는 법.”

그 당연한 법도를 망각한 자의 말로를 최근에 보았다.

왕세자 ‘선’.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오만하게 굴던 그는 끝내 끔찍한 결말을 맞고야 말았다.

“그러기에 얌전히 하라는 대로 따랐으면 얼마나 좋았을꼬. 그 말을 못하는 건가? ‘따르겠나이다.’ 어릴 적부터 그 말을 그리 가르쳤건만.”

될 성싶은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 하였던가.

타고난 반골(反骨) 성품은 아무리 가르쳐도 고쳐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쯧쯧, 낮게 혀를 찬 구름은 다시 말안장에 올랐다.

상수리나무 숲을 지나 도랑을 가로지르는 돌다리를 건넜다.

“지난번엔 음침한 지하라 영 마음에 들지 않더니. 이번에는 제법 풍광 좋은 곳을 잡았군.”

십학사의 모임은 매번 장소와 시간이 바뀌었다.

언제, 어디서 어떤 식으로 만나는 것인지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해일 테지.”

해.

아마도 그가 십학사의 모임을 주도하는 것일 터다.

해를 떠올린 구름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십학사는 평등하지 않다.

나름의 서열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서열의 정점엔 언제나 해가 있었다.

그 점이 구름은 불만이었다.

누군가 자신보다 높은 곳에 있다는 점이.

더구나 그자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는 점은 더더욱 마음에 들지 않았다.

구름은 고택의 정해진 길을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

고택으로 들어가는 열 개의 문.

십학사마다 각기 자신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다.

구름은 횃불이 밝혀진 문을 바라보았다.

열 개의 십장생 중, 일곱의 횃불이 켜져 있었다.

일곱 명의 학사들이 미리 안에 들어 있다는 뜻이었다.

자신까지 모두 여덟 명의 학사.

오늘은 그 여덟이 전부였다.

‘학’의 자리가 공석이 된 지는 꽤 오래되었고, ‘물’은 지난번 회의부터 참석하지 않았다.

“물이 몰락했다 하더니. 그 소문이 사실인 모양이군.”

구름을 혀를 끌끌 차며 회의실로 들어섰다.

그보다 먼저 온 학사들이 고개를 돌려 구름을 바라보았다.

가볍게 눈인사를 건네는 자도 있었고, 능글맞게 웃는 자도 있다.

그리고 무심한 시선을 잠시 건넸다 다시 돌리는 ‘해’의 모습도 보인다.

구름은 탐탁잖은 표정으로 자리에 앉았다.

“모두 모인 것 같으니, 회의를 시작하겠소.”

해의 음성이 조용한 실내를 가득 채웠다.

모두 해를 바라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알다시피 궁의 기류가 심상치 않게 흐르고 있소.”

구름이 물었다.

“무슨 뜻이오?”

“폐세자의 죽음 이후로 주상의 건강이 하루가 다르게 악화되고 있다 하오.”

구름은 허리를 둥글게 말았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원하는 상황이 아니오?”

“눈앞의 이익을 두고 본다면 그렇겠지. 하나…….”

팔짱을 낀 해는 의자 깊숙이 등을 기대앉았다.

“근래 들어 주상이 폐세자에 관해 말하는 일이 잦다 하오.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심지어 불쑥불쑥 폐세자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꺼낸다 하오.”

십학사들 사이에 작은 동요가 일었다.

구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주상의 변덕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 않소?”

“내 생각은 다르오.”

“단순한 변덕이 아니란 말이오?”

“왕세손이 하루가 멀다고 궁을 찾아가 문안을 올리니. 아무래도 그 영향이 아닐까 싶소.”

“영향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겠으나. 난 여전히 잠시의 변덕이라 보오. 시일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해가 구름의 말을 잘랐다.

“아무리 냉정한 사람도 천륜을 끊어내는 건 쉽지 않소. 일순간, 분노에 눈이 멀어 스스로 자식을 죽음의 길로 몰아넣었다는 죄책감이 왕의 마음에 깃드는 순간. 일이 귀찮게 될지도 모르오.”

“그래서 어떻게 하잔 말이오?”

해가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모름지기 일을 도모할 적엔 귀찮은 변수부터 제거해야 하는 법.”

“귀찮은 변수라면…….”

“왕세손, 그를 치워야 하오.”

해는 왕세자에 이어 왕세손마저 치워버리자 말하고 있었다.

좌중의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처럼 심각한 분위기 속에서 돌연 구름이 껄껄 대소를 터트렸다.

“난 또 무슨 말을 하는가 하였군. 허허, 왕세손 일이라면 조금도 걱정할 필요 없소이다.”

“걱정할 필요 없다니. 그게 무슨 말이오?”

해의 물음에 구름은 느긋한 눈길로 좌중을 쓸어보았다.

“듣자하니, 그자가 미친 듯하오.”

“미쳤다?”

“그 작자가 글쎄 밤마다 욕을 한다지 뭐요.”

욕이란 말에 십학사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욕이라니. 설마, 우리가 아는 왕세손이 그런단 말이오?”

“무언가 착오가 있는 게 아니외까?”

왕세손이 어떤 인물인지 아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구름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구름, 왕세손이 어떤 사람인 줄 알면서 그런 소릴 하는 것이오?”

“알다 뿐이오. 내 그자의 배꼽 옆의 점까지 훤히 알고 있소.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을 만큼 정해진 규칙과 법도를 한 번도 어긴 적 없는 자였소. 성현의 말씀에 한 번도 어긋남 없이 행동했고 말씨는 곱고 아름답기가 이를 데 없으니. 주상의 자랑이자 자부심이었지.”

“그런 자가 욕을 한다 하였소?”

재차 확인하는 해에게 구름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아는 그 세손이…… 시정잡배처럼 욕지거리를 입에 담는다?”

도무지 믿을 수 없는 현실에 해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확실하외다. 벌써 며칠 전부터 밤마다 염을 외듯 욕지거리를 내뱉는다 하오. 하하하, 아무래도 미친 것이 확실하오.”

“이런…….”

“아무래도 아비의 광증이 아들에게 전해진 모양이군.”

“안타까운 일이오.”

여기저기서 비웃음이 터져 나왔다.

한껏 긴장되었던 분위기가 다시 느슨해졌다.

“이쯤 되면 그 아비에 그 아들이 아니겠소.”

바위(岩)의 한마디에 대나무(竹)가 맞장구쳤다.

“기질이 같으니, 운명 또한 같겠구려.”

“그렇다면 구태여 잘라내지 않아도 되겠구려. 제 아비가 그랬던 것처럼 알아서 무너질 터이니.”

“이거 가엾다고 해야 할지, 허망하다 해야 할 것인지.”

상대가 너무 손쉬워 김이 샜다는 듯 누군가 중얼거렸다.

한껏 내려다보는 비웃음과 조롱이 실내를 가득 채웠다.

그때, 따랑.

해가 허공에 내려온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어수선하던 공기가 금세 가라앉았다.

“여러분의 의견이 그렇다면 왕세손의 일은 나중에 다시 논의하도록 합시다. 오늘 어렵게 이 자리를 마련한 것은 다른 일을 논하기 위함이었소.”

그는 공석이 된 자리에 시선을 던졌다.

“‘학’과 물(水)의 자리가 비었소.”

구름이 해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학의 자리를 채울 십학사에 대한 시험은 아직 진행 중이오?”

“그렇소.”

“이번엔 유달리 오래 걸리는 것 같소.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하오?”

“길면 한 달, 짧으면 보름 안에 결정할 수 있을 것 같소.”

해에게 이번엔 사슴의 물음이 날아들었다.

“물의 자리는 어떤 사람으로 들일 것이요?”

“물색 중이오.”

“그럼…….”

해와 구름, 그리고 거북을 비롯한 여섯 명의 십학사가 사슴을 응시했다.

그들의 시선을 하나하나 즐기던 사슴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한 사람 추천해도 되겠소이까?”

***

“청국에서 최근 유행하는 비단이 있습니다.”

사내는 비밀 이야기라도 하듯 은근하게 목소리를 낮췄다.

탁자의 맞은편, 화려한 조각이 새겨진 의자에는 만사여의가 된 이레가 앉아 있었다.

머리부터 내려쓴 너울에 가려 그녀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나붓나붓한 너울 사이로 얼핏 그녀의 자태가 보일 때면 사내는 저도 모르게 움츠러들었다.

무언가 말로 형언하기 어려운 기운이 그의 뒷덜미를 짓누르는 기분이었다.

힐끗힐끗, 연신 곁눈질하며 사내는 말을 이었다.

“아시다시피 좀처럼 구하기 힘든 물건인데 몰래 구해주겠다는 작자를 만났습지요. 그 물건, 워낙 화려하고 아름다워, 단 몇 필만 펼쳐두어도 한양의 모든 여인의 마음을 사로잡을 것입니다. 어떠십니까? 다시 없을 좋은 기회 아닙니까?”

입술이 유독 얇은 쥐상의 사내가 연신 손을 비비며 떠들었다.

그는 북쪽 땅을 오가며 무역하는 대상이라 자신을 소개했다.

우연히 시전의 상가 하나가 비었다는 소식을 듣고 좋은 기회를 나누자는 생각에 불원천리 달려왔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의 말은 제법 그럴듯했다.

거래하는 물건이 몰래 들인 물품만 아니라며.

한 마디로 밀수하자는 말이렷다.

“몰래 들여와야 하는 물건이면, 그 나라에서 특별히 관리하는 품목이란 말인데. 그런 물건을 어찌 주기적으로 공급할 수 있단 말이오?”

“당연히 제대로 구할 방도를 마련해 두었으니,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만사여의께서는 그저 이 사람만 믿고 맡겨만 주시면 됩니다.”

사내는 제 가슴을 두드리며 호언장담했다.

좁디좁은 가슴.

이레는 무심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참으로 좋은 제안이나, 아쉽게도 이곳은 이미 지전(紙廛)이 들어서기로 확정되었습니다.”

단호한 거절.

그러나 사내는 물러나지 않았다.

“종이 따위로 어찌 큰 이문을 남길 수 있단 말입니까? 이건 다시 없을 좋은 기회란 말입니다. 그러니…….”

쥐상의 사내는 끈질겼다.

보다 못한 듯 만사여의의 호위가 사내의 앞을 가로막았다.

천호였다.

“만사여의께서 하신 말씀 못 들으셨소? 그만하고 물러가시오.”

천호가 눈을 부라리자 쥐상의 사내도 더는 따지지 못하고 물러갔다.

“두 번 다시 없을 절호의 기회를 차버리다니. 만사여의에 관한 소문이 워낙 대단하여 한 가닥 기대를 품었더니. 역시 속 좁은 여인이었구나.”

쥐상의 사내는 물러가면서도 바닥에 침을 뱉으며 더러운 뒤끝을 남겼다.

이레의 앞을 지키고 섰던 천호가 눈매를 매섭게 치떴다.

“저 작자가…….”

당장 뛰어 나가려는 그를 이레가 말렸다.

“그냥 두세요.”

“하지만…….”

“한두 번 겪은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일일이 상대하다 보면 오히려 이쪽이 지칠 것입니다.”

만사여의가 된 지 오늘로 엿새째.

그동안 수많은 사람이 그녀를 찾아왔다.

찾는 이유는 실로 다양하였다.

단지 그녀가 정체가 궁금하여 찾아온 온 권세가의 아들.

만사여의에게 거래를 제안하러 온 상인들.

그들 중 거래를 원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금 전 사내처럼 사기꾼이었다.

심지어 훤한 백주에 무력을 쓰려 덤벼드는 자들도 있었다.

‘정말 쉽지 않은 일이로구나.’

짧은 기간이었지만, 이레는 상인이 되는 길이 얼마나 힘든지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한서로.

그 어린 여인이 만사여의가 되기까지 얼마나 힘든 고난을 겪었을까?

더불어 그녀의 능력이 얼마나 출중한지도 새삼 알게 되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정작 이레가 만나고자 하는 자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십학사.

아직 그들에게서 원했던 반응이 오지 않았다.

분명 접근해 올 거라고 생각했건만.

‘이러다 영영 그들을 만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을 잘못한 것이려나?’

시간이 흐를수록 이레의 초조함도 짙어졌다.

그때였다.

문밖을 지키던 백호가 안으로 들어왔다.

이레를 대신하여 천호가 용무를 물었다.

“무슨 일인가?”

“젊은 사내가 찾아와 만사여의를 뵙고 싶다 합니다.”

“어느 상단에서 왔다 하던가?”

“갓을 쓰고, 도포를 입은 모양이 상인 같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상인도 아닌 자가 무슨 용무로 만사여의를 만나고 싶다는 것이냐?”

“그건 저도 모르겠습니다. 단지 큰 제안을 하고 싶다는 말만 하는지라……. 어찌할까요?”

천호가 이레를 보았다.

“그만 만나시지요. 오늘만 세 명째 허탕이었습니다. 이번에도 분명 허황한 소리만 잔뜩 늘어놓는 허풍선일 것입니다.”

잠시 고민하던 이레는 곧 고개를 저어 보였다.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닙니다. 일단 만나 본 후에 판단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이레의 명에 백호가 밖으로 사라졌다.

잠시 후.

백호의 뒤로 젊은 선비가 따라 들어왔다.

느긋하게 점포 안을 살핀 그가 너울을 쓴 이레를 향해 미소를 보였다.

“그대가 그 유명한 만사여의로군.”

하얀 피부에 검은 두 눈동자.

날카로운 콧날에 입가에 맺힌 시원스러운 웃음까지.

참으로 수려한 용모의 사내였다.

누구도 권하지 않았음에도 사내는 만사여의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 태도가 지극히 당당했다.

능청스럽다기보다는 모든 것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모습.

“소문 속의 여장부, 만사여의를 만나보게 되어 영광이오.”

사내가 인사를 건넸다.

태연한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이레의 눈동자에 이채가 떠올랐다.

이 사내, 지금까지 만났던 허풍선들과는 본질부터 다르다.

만사여의를 찾아온 사기꾼들에겐 공통점이 있었다.

무언가에 쫓기는 듯 성급함과 조급증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마주하고 있는 이 사내는 달랐다.

그에겐 지금까지 만난 자들이 보인 성마른 모습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귀찮고 성가신 일을 억지로 하는 듯한 느낌이 절로 들었다.

무엇보다 이레의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사내의 눈빛이었다.

깊은 눈동자 속에 감춰진 나른함이란.

한 번도 보지 못한 독특한 분위기의 사내.

그래서인지 무척 인상적인 사내였다.

“저도 선비님을 뵙게 되어 기쁩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무슨 용무로 절 찾으셨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니고…….”

사내는 무심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혹, 천하를 경영하는 일에 관심 없소?”

“……!”

대수롭지 않은 일처럼 천하를 언급한 사내.

이레의 눈이 커졌다.

‘드디어…… 왔구나.’

십학사다.

등줄기로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순간, 이레는 직감했다.

해맑은 표정의 젊은 사내.

그가 십학사와 관련 있는 인물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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