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택-왕들의 향연-118화 (118/215)

#118. 특별한 제왕학 (上)

사내들의 전유물인양 거칠고 때론 칼부림마저 드물지 않던 세계.

그런 세상에 홀연히 나타난 여장부, 만사여의.

그녀가 처음 나타났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싸늘하였다.

여인이 무얼 하겠다고.

틀림없이 머잖아 무너지고 말 것이다.

모두가 그렇게 예측하고 단정 지었다.

그러나 비웃듯 만사여의는 승승장구하였고, 어느덧 시전 상가의 3할을 차지하게 이르렀다.

날마다 놀라운 행보를 이어가는 만사여의를 더욱 유명하게 만든 건 바로 그녀의 정체였다.

한양에서 그녀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또한, 그녀를 만난 사람 역시 아무도 없었다.

그동안 만사여의는 철저하게 자신의 정체와 신분을 감추었다.

큰 거래에도 그녀는 대리인을 내세우고 직접 나서는 경우가 결코 없었다.

그런 것이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더러는 만사여의가 천하에 다시 없을 미인이라 하였다.

또 다른 누군가는 흉측한 몰골이라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다 했다.

누군가는 만사여의가 여인이 아닌 사내인데, 그 사실을 숨기고 여인행세를 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만사여의에 관한 소문과 추측은 입에서 입을 거치며 부풀려졌다.

그녀는 구름 너머의 봉황이었다.

사막의 신기루처럼 보일 듯 보이지 않고, 잡힐 듯 잡히지 않던 존재.

그리 소문만 무성했던 만사여의가 모습을 드러냈다.

최근 매수한 점포를 살펴보러 직접 나선다고 하였다.

대체 어떤 사람일까?

정말 여인일까?

그간 어떤 연유로 자신의 정체를 숨긴 것이며, 돌연 모습을 드러낸 까닭은 무엇일까?

무슨 연유로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것일까?

의문과 의심.

호기심과 호의를 품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만사여의가 탄 남여를 쫓기 위해 분주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녀와 마주하게 되었을 때, 여기저기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인파를 감탄케 한 것은 만사여의의 미모가 아니었다.

사실, 검은 갑사 너울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던 터라.

만사여의가 미인인지 추녀인지 알 수 없었다.

사내인지 여인인지, 노파인지 소녀인지조차 알 수 없는 상황.

그럼에도 사람들이 연신 감탄하는 이유.

남여 의자에 앉은 만사여의의 자태 때문이었다.

‘기품’과 ‘우아’를 사람의 형태로 빚으면 꼭 저런 모습이리라.

만사여의에겐 상인 특유의 돈 냄새가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단정한 문인(文人)의 향기.

연꽃과 치자꽃 향이 짙어 금방 알아차릴 수 없었지만, 그녀의 바탕엔 오래된 묵향이 잔잔하게 배여 있었다.

상인, 그것도 여인에게서 느껴지는 이질적인 향내.

사람들은 처음엔 어리둥절하였고, 그다음엔 의아했으며, 마지막엔 근원을 알 수 없는 경외심을 품었다.

만사여의가 지닌 신비감에 경외감이 덧칠해지니.

하늘의 재신(財神)이 현세에 현현했다는 감탄사가 여기저기서 흘러나왔다.

그러나 정작 남여에 앉은 이레는 딴생각에 빠져 있었다.

조금 전, 수월에서 만난 진짜 만사여의에게서 들은 십학사에 관한 이야기였다.

*

“십학사라 불리는 말과 달리 그들 모두가 학사인 건 아닌 모양입니다. 오히려 학사라 부를 수 없는 신분인 자들이 더 많다는 소문입니다. 이 나라를 음지에서 조종하는 각양 각층의 열 사람, 그들이 십학사입니다.”

한서로는 지금껏 자신이 조사한 십학사에 관한 이야기를 이레에게 들려 주었다.

“제가 알 수 있었던 십학사의 정보는 이 정도가 고작이었어요. 십학사가 누구인지, 무엇을 하며, 어떤 짓을 꾸미는지. 조직의 규모와 구성원에 관한 건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습니다.”

한서로는 자신의 한계를 푸념했다.

그러나 이레는 놀란 낯빛을 감추지 못했다.

십학사.

그들은 철저히 어둠 속에 숨어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는 자들이었다.

암행어사였던 서강율조차도 그들의 실체를 밝히지 못했었다.

그런 사실을 알 리 없었던 듯 한서로는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마 이 정도라도 알 수 있었던 건, 최근 그들의 행보가 예전보다 과감해졌기 때문입니다.”

세자의 죽음 이후, 십학사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 높아졌다.

그들에겐 두려운 것이 없었다.

호랑이 없는 산에 여우가 왕 노릇을 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덕분에 도무지 무너질 것 같지 않았던 견고한 철벽에 실낱같은 빈틈이 생겼다.

큰 승리 뒤의 자만과 방심이 부른 허점이었다.

“십학사에 대해 많이 조사하였군요.”

“그들로 인해 호된 경험을 하였으니, 관심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지요.”

십학사들에게 죽임을 당할 뻔한 사건을 떠올리며 한서로는 이를 악물었다.

회임한 여인들의 납치사건.

그 기이한 실종을 조사하다 오히려 꼬리를 밟혀 목숨을 잃을 뻔하였다.

물론 수족처럼 부렸던 여울네의 배신이 크게 한몫하였다.

“여울네가 처음부터 배신하려 마음먹은 건 아니었습니다. 십학사들은 여울네가 거부하기 어려울 만큼 엄청난 제안을 했던 것 같아요.”

만사여의는 고집도 있고, 나름의 강단도 있었다.

그러한 뚝심이 있었기에 여인의 몸으로 시전 상가의 3할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여울네를 시작으로 뒷조사를 했습니다. 그런 일이 가능한 사람이 누구일까. 언제나 만사여의를 경계하고, 의심하는 사람. 더불어 물류를 살피는 제 움직임을 눈치채고, 의심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 이 넓은 조선에서 이와 같은 조건을 모두 충족시킬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명이었습니다.”

“상계에 있는 인물이로군요.”

상인.

그것도 만사여의가 사라지면 큰 이득을 얻을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

대상(大商).

“맞습니다. 시전에 많은 상가를 소유한 사람이었습니다.”

적을 확인한 만사여의는 즉시 행동에 나섰다.

그녀는 적대감을 드러내지 않았다.

오히려 적에게 손을 내밀며 다가가, 상인이라면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했다.

본디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남을 내세워 큰 거래를 성사하는 데 능숙했던 터라.

어려울 것은 없었다.

시간을 두고 다양한 방법과 거래를 통해 그녀의 제안이 상인에게로 흘러들어 갔다.

달콤하지만 치명적인 독처럼 거부하기 어려운 제안들.

그렇게 다섯 달.

철옹성 같았던 거상은 몰락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이미 되돌릴 수 없는 길을 걷고 있었던 것이다.

“어떤 묘수를 쓴 겁니까?”

상대는 닳을 대로 닳은 상인.

그런 자를 속이고, 몰락하게 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한서로의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전쟁터에서 죽음을 맞이한 제왕이 몇이나 될 것 같습니까?”

“글쎄요.”

“창칼에 죽은 강자는 얼마 없었습니다. 피와 죽음으로 가득한 전쟁터에서도 기어코 살아남은 그들이 죽은 이유, 전혀 다른 것이었어요.”

“…….”

“자만과 탐욕.”

이해된다는 듯 이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서로의 설명이 이어졌다.

“부자가 되면 욕심이 사라질 것 같지만, 오히려 반대랍니다.”

환경이 변하면 초심도 흔들리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한 번 흔들린 초심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한서로가 만사여의이면서도 수월의 문앞을 지키는 수고로움을 자처하는 이유 역시 바로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함이었다.

“하나를 갖게 되면 둘을 갖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욕심 많은 자가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될 거부가 될 방법을 알게 되면 어찌 될까요?”

욕심에 눈이 먼 상인의 결말은 하나뿐이다.

몰락.

무리한 사세 확장과 대규모 투자.

모든 자금을 끌어들이고, 모자란 돈을 채우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럼에도 그는 꿈에 부풀어 있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가면…….

고작 손가락 한 마디만큼만 더 나아가기만 하면, 염원하던 소망을 이룰 수 있다.

하지만…….

그 손가락 한 마디만큼의 간격은 영영 좁혀지지 않았고, 조선 최고의 거상이라는 그의 원대한 꿈은 끝내 이루지 못한 채 무너졌다.

그 꿈이 누군가가 쳐 놓은 덫이라는 사실은 까맣게 모른 채.

그 과정에서 한서로는 불법적인 수단은 단 한 가지도 사용하지 않았다.

그녀가 사용한 방법은 오직 하나.

악인의 탐욕과 허영을 부추기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대행수는 몰락했고, 만사여의는 복수에 성공했다.

그러나 이것은 이레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정작 그녀가 집중한 것은 대행수의 몰락, 그다음부터였다.

“예상대로 그는 십학사와 연관된 사람이었습니다.”

거대한 거미줄처럼 십학사의 손길은 궁궐 안팎은 물론이고 조정 신료, 그리고 지방 관아의 관리들과 한미한 아전들까지.

그들의 세력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런 거대한 조직을 움직이는 데 꼭 필요한 것, 바로 자금이었다.

그것도 막대한 거금.

그 자금의 출처가 대행수였다.

거상의 몰락은 십학사에게 적잖은 타격을 주었을 터.

강물이 마르면, 농작물이 시들고 인심도 흉험해지기 마련이다.

자금줄이 끊긴 십학사는 분명 대안을 찾으려 할 것이다.

때마침 나타난 만사여의.

‘십학사는 틀림없이 접근해 올 것이다.’

그들이 어떤 식으로 접근할지는 모른다.

어쩌면 무력을 행사할 수도 있고, 감언이설로 재산만을 가로채려 들지도 모른다.

그들이 어떤 방식을 취하건, 반드시 접근해 오리라.

그 짧은 찰나의 만남.

그것이 이레가 노리는 천금 같은 기회였다.

*

“도착하였습니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이레의 상념을 깨웠다.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덧 목적지에 도착한 다음이었다.

대행수가 마지막까지 놓지 못했던 점포라 하였다.

이레는 타고 있던 남여에서 내려와 한서로와 상의를 끝낸 만사여의의 일과를 시작하였다.

점포를 구석구석 살피고, 적절한 조치를 실행하라 명을 내렸다.

한서로의 언질을 받은 수족이 이레의 곁에서 하나하나 빠짐없이 기록하고 전달하였다.

그렇게 두어 군데 더 돌아보고 나자 어느덧 날이 기울었다.

저녁 놀이 서쪽 하늘 끝을 붉게 물들였다.

이레를 태운 남여는 수월로 돌아왔다.

수월의 정문에서 한서로가 이레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레는 다른 이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가벼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마움이 담긴 몸짓.

한서로는 이레를 위해 많은 결단을 내렸다.

바로 수월과 만사여의의 관계를 드러낸 것이다.

굳이 밝혀도 되지 않을 것을 밝힌 한서로에게 이레는 고마움과 미안함이 가득하였다.

그러나 한서로는 개의치 않았다.

변함없는 얼굴로 그녀는 이레와 함께 수월 안으로 들어섰다.

수월의 깊은 내실에서 이레는 만사여의의 모습을 벗어냈다.

쓰고 있던 너울을 벗고, 입고 걸쳤던 화려한 옷과 장신구를 떼어냈다.

짙은 화장을 지우고, 온몸을 감싸고 있던 짙은 향내도 말끔하게 털어냈다.

수수하지만 맑고 투명한 본연의 모습으로 되돌아온 이레는 연한 풀빛 치마와 은은한 광택이 감도는 잿빛 저고리를 입었다.

화려한 만사여의의 모습은 사라지고 단아한 여인이 될 시간.

시전의 여장부가 아닌 한 사내의 정인으로 되돌아갈 시간이었다.

***

저녁놀이 질 무렵.

이레를 태운 가마가 안국동 홍봉한의 사가 별채 대문 앞에 다다랐다.

대문 안으로 들어서던 이레는 문득 몸을 돌려 밖으로 다시 나왔다.

그녀는 목을 길게 빼고 골목 저편을 응시했다.

“어디까지 왔나, 수표교까지 왔다.”

어릴 적, 누군가를 기다릴 때면 늘 불렀던 노래였다.

오라버니를 기다릴 때.

오지 않을 어머니를 기다릴 때.

자신을 향해 따스한 품 열어줄 그 누군가를 기다릴 때 버릇처럼 부르던 노래.

“어디까지 왔나, 골목 어귀까지 왔다.”

자신의 노랫말처럼 형운이 골목 어귀에서 모습을 보일 것만 같았다.

“어디까지 왔나, 골목 모퉁이 돌았다.”

낮게 읊조리는 주문(呪文).

그러나 석양이 지는 길 끝은 텅 비어 있었다.

“어디까지 왔나, 작은 길로 들어섰다. 어디까지 왔나, 대문까지 왔다. 어디까지 왔나, 지척까지 왔다. 어디까지…….”

노랫소리가 잦아들었다.

저도 모르게 기대하고 있었다.

행여 형운이 올까 하여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도 지켜보는 사람 없었건만, 머쓱해진 이레는 풀썩 겸연쩍은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나도 참…….”

어리광부리는 아이 같은 자신의 모습이 어이없었다.

“정신 차려라.”

스스로에게 지청구를 건넨 이레는 대문을 향해 돌아섰다.

순간, 쿵.

크고 거대한 무언가가 이레의 앞을 막아섰다.

이레는 바닥으로 향했던 시선을 천천히 위로 올렸다.

짙푸른 도포 자락.

가슴 언저리에서 나풀거리는 흑립 매듭.

청수한 향내와 함께 전해지는 은은한 묵향.

아련하고도 낯익은 향기인지라.

이레는 고개를 들었다.

이윽고 자신을 내려다보는 형운과 시선이 마주 닿았다.

“언제부터…… 여기 계셨습니까?”

“골목 어귀부터.”

속삭이는 형운의 목소리에 이레의 얼굴이 붉어졌다.

엄지 끝으로 제 여인의 볼을 어루만지며 형운이 말했다.

“노을이 이곳에 내려앉았나 보오.”

놀리는 형운을 이레는 곱게 흘겨보았다.

“날이 갈수록 능청이 느십니다.”

“배우는 것이 그런 것이라.”

“아무래도 안 되겠습니다. 할아버지들께 이런 건 가르치지 마시라 한 말씀 올려야겠습니다.”

수줍고 부끄러운 마음에 괜히 쏘아붙이며 대문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찰나.

형운의 커다란 손이 이레의 작은 어깨를 잡아 자신의 쪽으로 끌어당겼다.

순식간에 그녀는 그의 너른 품에 갇혀버리고 말았다.

자신의 품에서 밭은 숨을 몰아쉬는 그녀에게 형운이 물었다.

“그럼 무얼 배우면 좋겠소?”

“그거야…….”

“이런 것이면 되겠소?”

형운이 이레의 희고 동그란 이마에 나붓한 입맞춤을 건넸다.

“이런 것은 또 어떻소?”

이마를 맴돌던 그의 입술이 파르르 떨리는 눈두덩을 어루만졌다.

보이지 않는 그의 낙인은 그녀의 볼과 입술 위, 그리고 길고 하얀 목덜미에도 찍혔다.

“사방에, 지켜보는 눈이 있습니다.”

“보라 하시오.”

“하지만…….”

“아참, 얼마 전에 이런 것도 배웠소.”

“대체 그분들께 무엇을 배우시기에…….”

이레의 말소리는 그대로 형운의 입속에 감금되었다.

올가미에 걸린 듯 이레는 파르르 몸을 떨었다.

당장에라도 저 대문 뒤에서 누군가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그것도 아니라면 별채 안에서 어머니가 나오시면 어쩌려고.

부엌에서 저녁 준비를 하던 찬모가 나온다면.

그리고 작은 곳간 창고에서 금정이가 이 광경을 본다면…….

이레의 걱정은 더는 이어지지 못했다.

점점 흐릿한 안개 저편으로 생각이 사라진다.

그녀를 안고 있는 그의 몸은 환(歡)의 사슬이었다.

발끝에 고인 짜릿한 감각이 천천히 등줄기를 타고 올랐다.

형운의 작은 손짓에도 저릿한 열기가 피어났다.

무언가 사술을 부린 듯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 버렸다.

제 입속을 장악한 형운의 불꽃이 피어났다 꺼지길 반복하였다.

그럴 때마다 심장이 오그라드는 기분이었다.

“다른 것도 배웠는데, 알고 싶소?”

형운은 꽉 막힌 목소리로 겨우 말했다.

이레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엔 진득한 갈망과 정염이 가득했다.

“저하…….”

그녀가 무어라 대답하기 전, 형운은 그녀의 얼굴은 제 품으로 힘껏 끌어당겼다.

쿵쿵, 쿵쿵.

그녀의 귓전으로 그의 심장 소리가 들려왔다.

“혹여 이 모든 것이 실재하지 않는 꿈일까 봐 두려웠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소.”

“…….”

“그러기에 확인하고 싶었소. 살아있음을. 내 여인의 존재를. 그리고 나를…… 너를…… 그리고 우리를…… 확인하고 싶었다.”

형운이 이레의 작은 머리 위에 자신의 턱을 가벼이 괴었다.

“이레야.”

다정한 부름.

“이 거침없는 마음을 어찌할까. 이 지독한 중독을 어찌하면 좋을까.”

걷잡을 수 없는 폭풍을 애써 잠재우려는 듯 형운의 목소리엔 숱한 인(忍)이 새겨져 있었다.

그의 품에서 이레가 속삭인다.

“알려주십시오.”

“……!”

돌연한 대답에 형운이 놀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 이레가 웅얼거렸다.

“저하께서 배운 것들, 제게도 알려 주십시오.”

…….

문득 그의 심장이 멎었다.

잠시 숨 쉬는 것도 잊어버린 듯했다.

멈춰버린 듯한 진공의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쾅쾅쾅쾅.

귓전에서 바투 치는 듯 거친 심장 소리가 이레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형운의 손이 이레의 손을 깍지 꼈다.

별채의 사랑방.

형운이 이레를 자신의 거처로 끌어당겼다.

그 뒤를 쫓는 이레의 심장이 단옷날의 그네처럼 하늘로 치솟았다.

두 사람의 등 뒤로 늦여름 매미 소리가 요란하였다.

짙푸른 녹음은 어둠 속으로 서서히 형체를 잃어갔다.

***

별의 파편인 듯 은하수가 밤하늘을 가로질렀다.

덜컹.

늦은 밤, 이레가 동창을 열었다.

“어떻소?”

형운의 물음에 이레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먹구름이 있으나 다행히 달빛이 환합니다.”

“다행이오.”

“준비되셨습니까?”

이레의 물음에 눈을 감고 호흡을 고르던 형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되었소.”

대답하는 그의 표정이 자못 비장하였다.

오늘은 할아버지들에게서 제왕학을 배우는 날이다.

무릇 제왕이라 함은 군주를 일컫는다.

하지만 할아버지들에게서 배우는 제왕학은 그런 일반적인 공부와는 전혀 달랐다.

이론이 아닌 철저하게 실전을 위한 제왕학.

세상에서 오직 서탁에서만 배울 수 있는 독특한 공부였다.

당연히 그 방법 또한 일반적이지 않았다.

이레가 붓을 들었다.

-악 할아버지. 시작하십시오.

오늘은 악 할아버지.

할아버지들은 다들 까다롭지만, 그중에서도 악 할아버지는 형운이 가장 어려워하는 공부를 가르쳤다.

곧 서탁 위로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아보기 힘든 악필이 굴러갔다.

악이었다.

-오늘은 무얼 할 차례라 하였지?

-수전노, 밴댕이, 몰상식을 하였고, 오늘은 옹고집을 할 차례입니다.

-다행히 오늘은 수월하겠구나.

수전노, 밴댕이, 몰상식, 옹고집.

제왕학과는 전혀 상관이 없을 것만 같은 단어들.

이레와 알 수 없는 필담을 주고받은 악은 곧 상상도 하지 못할 글을 풀어놓았다.

-이 젖비린내 나는 놈. 그 아가리 다물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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