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택-왕들의 향연-117화 (117/215)

#117. 은밀하고도 위험한……

“저는 정말로 괜찮습니다.”

“내가 괜찮지 않소. 그러니 그대로 누워 계시오.”

밤새 울음소리 들려오는 깊은 밤.

별채에선 때아닌 실랑이가 벌어지고 있었다.

고집을 부리는 사람은 형운이었다.

큰 할머님의 배려로 몰래 만사여의를 만나 앞으로의 일을 계획한 이레.

생각에 잠긴 채 별채로 돌아온 그녀에겐 또 하나의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형운이었다.

“괜찮소? 어디 다친 곳은 없으시오?”

별채로 가는 길목에서 만난 그는 몹시 흥분한 모습이었다.

일을 마치고 늦게 귀가한 그는 이레의 부재에 적지 않게 놀랐다.

뒤늦게 이레가 안채의 부름을 받았다는 소식을 접하고 부리나케 달려온 참이었다.

“무슨 일로 부른 것이오? 누가 해코지라도 한 건 아니오?”

묻는 형운의 목소리에 다급함이 가득했다.

이레의 코끝이 알싸하게 달아올랐다.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게 태어난 분이신데.

살면서 허튼일 한 번 해본 적 없으신 분이신데.

제 여인의 부재에 안절부절못하시고, 버선발로 뛰어나오시다니.

“아무래도 안 되겠소. 아무리 우리의 형편이 좋지 않게 되었기로서니, 마음의 상처도 추스르지 못한 사람을 불러 이 늦은 시간까지 잡아두다니. 내 할아버님께 청하여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해야겠소.”

“아닙니다. 정말로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이레는 당장 안채로 달려가려는 그를 말리느라 애를 먹었다.

당연히 헛간에 갇힌 일은 입도 뻥긋 못했다.

지금도 이런데, 그 일까지 알게 되면 틀림없이 집안이 발칵 뒤집힐 지경이었다.

“사실이오? 정말로 아무 일 없었소?”

“정말입니다.”

이레는 못 미더워하는 형운을 간신히 달래, 별채로 돌아왔다.

그것으로 사태가 일단락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이후의 상황은 이레가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별채로 돌아오자마자 형운은 다짜고짜 이부자리를 깔고 그녀를 눕혔다.

그리고 마치 도둑맞은 아기새를 간신히 되찾은 어미새 마냥 그녀를 보살폈다.

“이제 정말 괜찮아졌습니다. 그만 일어나도 되겠습니까?”

“아니 되오.”

이레의 조심스런 청에 형운의 단호한 대답이 돌아왔다.

“누워만 있었더니, 되려 불편합니다. 그러니 그만 일어나게 해 주십시오.”

“허튼소리 마시오. 아직 반 식경도 되지 않았으니, 꼼짝 말고 누워 있으시오.”

엄중한 음성에 이레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의 자상한 배려에 병자 노릇을 하는 중이라.

이레는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렇다고 속내를 밝힐 수도 없었다.

행여 앞으로의 계획을 털어놨다간 저 눈빛이 어찌 변할지 두려웠다.

단지 안채에서 늦게 돌아왔다는 것만으로도 이런 반응인데, 위험을 자초하겠다 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불 보듯 뻔했다.

그렇다고 이 극진한 대접을 마냥 받고 있기도 곤란하였다.

어찌할까?

궁리하는 찰나, 밖에서 금정의 기척이 들려왔다.

“무슨 일이냐?”

문풍지 위로 비치는 금정의 그림자를 향해 형운이 물었다.

공손히 머리를 조아리며 금정이 대답했다.

“말씀하신 것이 준비되었습니다.”

“고생 많았구나. 놓고 물러가거라.”

형운은 방문을 열고, 툇마루에 놓인 소반을 안으로 들였다.

“그게 무엇입니까?”

“놀란 마음을 안정시키고, 기를 보충해주는 환(丸)이오.”

그런 약이라면, 저보다 저하께서 드셔야 할 것 같습니다.

속말을 뜨거운 한숨과 함께 삭이는 이레에게 형운의 음성이 날아들었다.

“어서 삼키시오.”

강요 아닌 강요에 이레는 마지못해 환을 받아먹었다.

입만 빠끔 열어 환을 받아먹는 모양새가 영락없이 어린 짐승이었다.

어쩌다 이리되었을까.

이레는 한탄했고, 형운은 흐뭇했다.

“이것도 먹어야 하오.”

“이건 또 무엇입니까?”

“꿀이오.”

“꿀은 왜……?”

“환과 함께 마시면 온몸의 긴장이 풀린다 하오.”

거듭 사양해도 형운은 꿀이 든 종지를 물리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이레는 상체를 일으켰다.

“어허, 일어나지 말라 하였소.”

반쯤 일어난 이레를 형운이 제자리로 눕혔다.

“꿀을 먹으려면 일어나 앉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맑은 물이라면 어찌어찌 받아먹으리라.

혹여 마시다 흘린다 하여도 툭툭 털어내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진득한 꿀을 마시다 흘린다면, 뒷갈망이 여간 번거롭지 않을 것이다.

이레의 이유 있는 항거에 형운은 잠시 주춤했다.

그러나 이내 그의 입가에 영문 모를 미소가 떠올랐다.

“방법이 있소.”

“무슨 말씀입니까?”

“그대가 굳이 일어나지 않아도 꿀을 먹을 방법.”

“어찌 말입니까?”

대답하는 대신 형운은 종지 입구에 살짝 입술을 가져갔다.

“달구나.”

만족한 표정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그가 종지의 꿀을 한 모금 머금었다.

이윽고 그의 입술이 그녀를 향해 무람없이 다가왔다.

꿀벌이 벌집으로 돌아가 제 속에 품었던 꿀을 전하는 태초의 모습.

그는 마치 꿀벌이라도 된 듯 제 입속의 것을 아낌없이 이레에게 건네주었다.

아찔한 달콤함이 이레의 입속을 파고들었다.

“이건 더 달구나.”

속삭이는 그의 숨결에 감미로운 꽃향기가 가득했다.

입술과 입술이 닿는 곳마다…….

따뜻하고 말캉한 감촉이 뒤엉키는 곳곳에서…….

청아한 여름 들판이 펼쳐졌다.

나뭇잎에 맺힌 이슬의 달콤함이…….

야생화의 여린 감촉이…….

이레의 입속으로 우수수 별빛처럼 쏟아져 내렸다.

마디마디 막혔던 그녀의 혈관이 와르르 무너진다.

느른하고도 뜨거운 기운에 이레는 몸을 길게 늘였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잔잔했던 맥이 팔랑팔랑 들뛰었다.

움쑥움쑥 싹트는 뜨거운 갈망에 이레는 머릿속이 흐릿해졌다.

“무얼…… 하는 겁니까?”

“기미(氣味).”

“네?”

“음식과 약에 이상이 없는지, 미리 맛보고 품평하는 기미 말이오.”

“세상천지 어디에 이런 기미가 있단 말입니까? 그보다 굳이 누워서 이 고생을 할 필요는…….”

“처방이 끝나지 않았으니, 움직이지 마시오.”

엄중한 목소리.

낮게 속삭인 형운은 본디 그것이 자기 일인 양 기미를 이어갔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정성을 다해.

***

여름밤은 길고 달콤하였다.

형운이 준비한 꿀과 환의 효능은 실로 대단하니.

간밤의 소란이 거짓인 듯 몸이 가뿐하였다.

이레는 집을 나서는 형운을 맑은 얼굴로 배웅할 수 있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안채에서 전갈이 왔다.

논의할 일이 있으니 서둘러 건너오라는 소식이었다.

비록 홍 씨 집안의 며느리는 아니지만, 앞으로 이 집안에 의탁하여 살려면 어쩔 수 없이 따라야 하는 가풍이었다.

이레는 걸음을 서둘렀다.

하지만 바쁘게 움직인 그녀를 가장 먼저 반긴 것은 큰 며느리 한 씨의 매서운 지청구였다.

“어른들 기다리는데 어찌 이리 늦었는가?”

안채엔 이미 큰 할머님을 비롯한 집안의 여인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송구합니다.”

이레는 서둘러 고개를 조아렸다.

전갈을 받자마자 달려왔음에도 늦었다.

억울한 면이 없지 않았지만, 엄숙한 자리인지라 핑계 따위는 대지 않았다.

그럼에도 어느 구석에서 비아냥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늦었는가 했더니, 이제 보니 말대답 꼬박꼬박하던 별채 손님이셨구려. 어제부터 남달리 대범하다 생각하였는데, 오늘 집안 분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도 당당하게 늦는 걸 보니.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 모양이오.”

이 씨였다.

처음 만날 때부터 유달리 심술궂게 굴던 여인.

대관절 무슨 연유로 자신에게 이리 야박하게 구는지 모를 일이다.

속을 다스리며 이레는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올 사람은 모두 온 것 같으니. 하던 이야기, 마저 하자꾸나.”

다담상에 놓인 찻잔에 입술을 담그던 큰 할머님이 운을 뗐다.

노파가 이른 아침부터 집안의 여인들을 모이게 한 것은 한 가지 일을 논의하기 위함이었다.

노파는 곁에 앉은 한 씨에게 시선을 던졌다.

“엊그제 사대문 밖에 사는 정안당에서 기별이 왔구나. 내달 초 하루에 그 댁에 큰 경사가 생긴다는구나.”

노파의 말을 한 씨가 받았다.

“큰 경사라면…… 혼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그 댁 장남이 혼인하게 되어, 그 준비를 도와달라는구나.”

예부터 관혼상제와 같은 집안의 큰일엔 서로 일을 도와주는 품앗이가 당연하였다.

더구나 평생 한 번뿐인 혼사라면 응당 누군가 나서서 도와주는 것이 도리였다.

문제는 이번에 혼례를 치르는 사람의 됨됨이가 범상치 않다는 것이다.

“세상에. 정안당의 아들이라면, 그 망나니 말씀입니까.”

이 씨가 잠시를 못 참고 또 알은체를 했다.

“이보게.”

“그런 자도 혼인을 한단 말이어요? 누구 인생을 망치려고요? 어유, 뉘댁 규수인지 몰라도 참말 불쌍합니다.”

“어허, 이 사람. 어찌 이리 경거망동인가?”

한 씨가 서둘러 이 씨의 입을 막았지만, 소용없었다.

한 번 열린 입은 좀처럼 닫히지 않았다.

“아이, 형님도. 지난번에 형님도 그리 말씀하셨잖아요. 그 망나니 하나 때문에 우리 홍 씨 집안의 체면이 말이 아니라고요. 시정잡배들과 어울리길 밥 먹듯 하고 이 계곡, 저 마을로 흥청망청 놀러 다니니. 우리 집안에 어찌 저런 인물이 나왔는지 모르겠다고 한탄하지 않으셨어요.”

이 씨의 말에 한 씨는 크게 당황하였다.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단 말인가?”

“벌써 잊으셨어요? 지난번에…….”

조잘조잘 눈치 없이 떠드는 이 씨를 노파가 호통 한 번으로 끊어놓았다.

“시끄럽다!”

노파의 매서운 눈초리에 이 씨는 물론이고, 한 씨를 비롯한 모든 여인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다들 입이 어찌 그리 가볍더냐.”

노파의 눈이 한 씨를 향했다.

“쯧쯧, 집안 단속을 해야 할 사람이 어찌 아랫사람들과 어울려 함부로 남의 험담이나 집어삼켰는가? 조상들 보기 부끄럽지도 않은가?”

한 씨가 민망하여 얼굴을 붉혔다.

“송구합니다.”

길게 혀를 찬 노파가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어쨌든 그 댁에 품앗이 보낼 사람이 있어야 하니. 누굴 보내면 좋을지 말해봐라.”

“적당한 사람을 찾아야겠지요.”

한 씨가 이 씨에게 눈길을 주었다.

“자네가 가는 것은 어떠한가?”

“어유, 형님도. 거기가 어디라고. 사대문 밖에 있으니 오고 가고 반나절은 꼬박 걸릴 것인데. 매일같이 흔들리는 가마를 어찌 탄답니까. 어디 그뿐일까요, 괜히 망나니 아들과 마주쳐 곤욕이라도 치르면 어찌합니까? 저는 무서워 싫습니다.”

한 씨가 코웃음을 쳤다.

“무서운 것이 아니라 실속이 없는 것이겠지.”

“무슨 말씀을 그리하셔요?”

“열심히 해봤자 득 될 것 없는 집안이니, 안 가겠다는 것이 아닌가 해서 하는 말일세.”

정곡을 찍힌 이 씨는 눈동자를 굴리며 열심히 변명했다.

“아유, 아무래도 형님께서 단단히 오해하신 모양입니다. 제가 가는 게 무에 대수겠습니까? 다만, 다들 아시다시피 제 바느질 솜씨가 워낙 형편없지 않습니까? 괜히 엉뚱한 책망이나 듣지 않을까 걱정되어 그런 것이지요. 차라리 침모를 보내면 어떠할는지요?”

“집안의 큰일에 어찌 남의 손을 빌린단 말인가?”

한 씨의 책망에 이 씨는 볼멘소리를 냈다.

“남의 손을 빌릴 수 없는 일이 그것 하나만은 아니지요. 엊그제부터 장독 닦는 일을 시작하지 않았습니까? 그러잖아도 일손이 부족한 참입니다. 품앗이까지 챙길 여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 씨의 말에 많은 여인들이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에도 일리가 있는 터라, 한 씨는 곤란한 표정으로 노파를 힐끔거렸다.

“아무도 나서서 하지 않으니, 직접 정해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고목처럼 앉은 노파가 감은 눈을 떴다.

“장 담그고 관리하는 일은 실로 중요하니. 남의 손을 절대 탈 수 없는 일이다. 하나, 품앗이 또한 허투루 넘길 수 있는 일이 아니니. 그렇다면 차라리 아기 며느님에게 부탁하면 어떠하냐?”

노파가 지목한 사람은 이레였다.

당장 이 씨가 반색하며 반겼다.

“과연 그리하면 되겠군요. 홍 씨 집안의 며느리는 아니나, 딱히 외인이라 할 수도 없는 사람이고. 더구나 주상전하의 의복을 지었던 사람이니, 다른 규방에 품앗이를 보내어도 크게 흉잡힐 일은 없을 것입니다.”

몇 사람이 이 씨의 의견에 큰 목소리로 동조했다.

“그렇겠네요.”

“딱 제격입니다.”

결국, 노파의 결정이 내려졌다.

“그럼 아기 며느님, 한동안 수고해 주게나.”

여기저기서 낮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힘들고 불편한 일에 자신이 걸리지 않았다는 안도의 한숨.

그리고 제대로 미운털 박힌 이레를 불쌍히 여기는 듯한 탄식.

자신을 향한 한숨과 탄식을 들으며 이레는 시선을 위로 올렸다.

문득 노파와 눈이 마주치자 그녀는 흐릿하게 미소를 보였다.

노파의 주름진 입가에도 의미심장한 웃음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

그로부터 얼마 후.

별채 밖으로 낡고 허름한 이인교가 나왔다.

품앗이하러 가는 이레를 태운 가마였다.

서대문 밖을 향해 부지런히 이동하던 가마는 어느 순간, 인적이 뜸한 좁은 골목길로 들어섰다.

담벼락 높은 저택이 즐비한 북촌을 빠르게 가로지르는 지름길이었다.

그 지름길을 따라 구불구불 이동하니, 수양버들 늘어진 곳에 가마 하나가 서 있었다.

이레를 태운 가마가 그 앞에 멈춰 섰다.

“도착했습니다.”

교꾼이 문을 열어주었다.

그녀가 가마에서 내리자, 때마침 맞은편 가마의 주인도 하인의 부축을 받으며 모습을 드러냈다.

상대를 본 이레의 얼굴에 해맑은 미소가 피어올랐다.

맞은편 가마의 주인도 마찬가지였다.

전염이라도 된 듯, 이레를 향해 해사한 미소를 보였다.

“유경아.”

가마의 주인은 유경이었다.

재간택 시험을 함께하며 뜻을 모았던 소중한 인연.

그 유경이 수양버들 아래에서 이레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레가 입은 옷과 똑같은 옷을 입은 채.

“언니. 아니, 빈궁 마마.”

쪼르르 달려온 유경이 귀엽게 혀끝을 내밀었다.

“제가 이렇습니다. 아직도 언니라는 호칭이 먼저 나오질 뭡니까.”

“이젠 빈궁도 아니니, 무어라 부르든 무슨 상관이겠느냐. 그보다, 너에게 이런 일을 부탁하게 되어 미안하구나.”

“그런 말씀 마십시오. 저는…….”

힐끗, 주변을 살피던 유경이 이레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요즘은 정말 하루하루가 신이 납니다. 꿈에도 그리던 만사여의를 만나고, 또 이렇게 빈궁 마마를 도울 수 있게 되었으니.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이레는 당분간 만사여의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하지만 그 과정은 절대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어려운 것은 집 밖을 나설 방도였다.

혼례를 치른 사대부의 여인이란 보이지 않는 족쇄에 매여있는 것과 다름없었다.

오죽하면 반보기 라는 말이 있을까.

시어른의 허락하에 친정집과 며느리가 사는 곳의 중간 지점에서 친정 부모님을 만나는 일련의 행사.

그동안은 시아버지인 세자 저하의 무덤을 찾아뵙는다는 핑계로 이따금 바깥바람을 쐴 수 있었지만, 안채의 감시와 구속이 심해진 상황에선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때마침 진행된 정안당의 혼사는 그야말로 행운이었다.

큰할머님의 도움 아래, 이레는 품앗이를 핑계 삼아 집 밖을 나설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이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언제 어느 때 감시의 눈길이 따라붙을지 모를 일이었다.

이레를 대신할 사람이 절실했다.

유경은 그 일에 더없이 적합한 인물이었다.

그녀는 형조판서의 딸이라 예법에 익숙했고, 옷감을 다루는 데도 능했다.

“너에겐 항상 어려운 부탁만 하는 것 같구나.”

“그런 말씀 마시어요. 좋아서 하는 일인걸요.”

“그리 생각하니 정말 고맙구나. 그래도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

“염려 붙들어 매시어요. 그 집에 가면 방안에 콕 처박혀서 바깥으론 얼씬도 하지 않을 터이니. 가마 밖으로 나갈 때도 이렇게 쓰개치마를 뒤집어쓰면 제가 누구인지 아무도 모를 것입니다.”

“그래도 걱정되는구나. 괜한 일로 여러 사람 힘들게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

염려하는 이레의 손을 유경이 쓰다듬었다.

“그거 아시어요? 살면서 이렇게 설레었던 적이 없습니다. 늘 하루하루가 무상(無常)하였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살아 있는 것 같습니다. 매 순간 흥분되고 즐거워, 처음으로 제 삶이 의미 있게 느껴집니다.”

유경이 두 뺨을 붉혔다.

마치 엄청난 구경거리를 볼 생각에 흥분한 어린아이 같았다.

“그럼 시작해볼까?”

“네, 빈궁 마마.”

두 여인은 서로 타고 온 가마를 바꿔 탔다.

그렇게 두 여인의 행선지가 갈렸다.

유경을 태운 가마는 서대문 밖으로.

이레를 태운 가마는 공방 거리 끝자락에 위치한 ‘수월’로 향했다.

초조한 시간이 흘렀다.

살짝 열린 창문 밖으로 시전의 풍경들이 지나갔다.

왁자한 거리를 얼마나 걸었을까.

마침내 가마가 수월에 도착하였다.

이레는 준비한 너울을 쓰고 가마에서 내렸다.

그곳엔 또 한 명의 친근한 여인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수월을 대표하여 이곳의 진정한 주인이신 만사여의를 환영하옵니다.”

잔잔한 미소를 짓고 선 소녀.

진짜 만사여의, 한서로였다.

“연회를 베풀어야 마땅하오나, 시간이 넉넉하지 않으니 서두르시지요.”

한서로는 이레를 수월의 깊은 곳으로 인도하였다.

그곳엔 이레를 만사여의로 만들어줄 사람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은룡의 유지를 받들고, 형운을 지키기 위한.

이레의 은밀하고도 위험한 걸음이 시작되었다.

***

바람이 한낮의 태양 빛에 무기력하게 스러졌다.

후덥지근한 공기에 책장에 꽂힌 서책들마저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듯했다.

시전의 세책방을 둘러보는 형운의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맴맴, 매미 소리가 더운 날씨를 더욱 덥게 만들었다.

이 긴 여름이 언제쯤 끝이 나려나.

휘리릭, 넘어가는 책장의 바람에 다소나마 열기를 식히고 있을 때였다.

세책방 밖으로 웅성거리는 목소리들이 모였다.

신경 쓰지 않으려 했지만, 갈수록 커지는 소란에 형운도 마침내 고개를 들었다.

대체 무슨 일이려나?

궁금해진 형운은 열린 동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시전의 대로(大路) 양편으로 사람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형운은 가까운 곳에 선 소년에게 물었다.

“무슨 구경거리라도 생겼느냐?”

어린 소년이 잔뜩 흥분한 얼굴로 대답했다.

“저기요. 저 여인 구경하려고 다들 이리 모인 거랍니다.”

“여인?”

형운은 소년이 가리킨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수많은 사람의 시선을 받으며 남여(籃輿) 한 대가 느릿느릿 이동하고 있었다.

뚜껑이 없는 대신 의자가 있는 작은 가마, 남여.

그 남여의 의자에 검은 너울을 쓴 여인이 앉아 있었다.

시리도록 푸른 열 폭 치마가 검은 너울 사이사이로 어룽거렸다.

검은 너울에 은실로 수자 놓인 나비가 당장에라도 훨훨 하늘로 날아갈 듯 생생하니.

비록 너울에 가려 진면목은 볼 수 없으나, 여인에게서 느껴지는 기품과 위엄이 범상치 않았다.

“저 여인이 대체 뉘더냐?”

호기심을 자극하는 모습인지라.

형운이 소년에게 다시 물었다.

기다렸다는 듯 소년이 재게 대답했다.

“시전의 여주인입니다.”

“시전의 여주인?”

재차 묻는 형운이 답답한지 소년은 제 가슴을 팡팡 쳤다.

“만사여의 말입니다, 만사여의. 대체 어느 시골에서 오셨는데, 시전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풍문도 모르십니까?”

“만사여의?”

뜻밖의 대답이었다. 형운은 재차 여인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만사여의라면 그와 무관하지 않은 사람이다.

실제로 만나 본 적도 있었으니.

“허나, 저 사람은…….”

형운은 미간을 찌푸렸다.

얼굴을 볼 수 없어 확신할 수 없지만, 그가 아는 만사여의와는 다른 사람이 분명하였다.

하지만 왜일까?

저 여인의 뒤태가 눈에 밟히는 것은.

때마침 담벼락 아래에 웅크리고 있던 바람이 불어왔다.

여인의 길고 검은 너울이 들썩거렸다.

잠시 잠깐.

벌어진 너울의 좁은 틈새로 희고 하얀 귀와 턱이 드러났다.

빛살보다 강렬하게 눈을 찔러오는 붉은 입술.

그리고 그 윗입술 끝에 매달린 작은 점.

묘하게 사람의 눈길을 끌어당기는 여인이었다.

일순, 형운은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나 팔랑거리는 너울 탓에 진실을 엿볼 수는 없었다.

“만사여의라…….”

다시금 작게 중얼거리던 형운은 여인을 태운 가마에서 시선을 뗐다.

여인이 떠난 자리엔 화려한 향내가 진동하였다.

그 잔향이 모두 사라질 때까지 그는 그 자리를 떠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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