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택-왕들의 향연-116화 (116/215)

#116. 그들을 만나 볼 생각입니다

밤이 깊었다.

이레와 형운은 여전히 서탁 앞에 마주 앉아 대화를 이어갔다.

“시전에 새롭고 신기한 물건은 없었습니까?”

-궁의 분위기는 어떠한지요?

“글쎄다. 요즘은 별달리 신기한 것은 없구나.”

-여전히 뒤숭숭하더구나.

입으로 뱉는 말과 서탁으로 나누는 대화가 서로 달랐다.

감시하는 눈길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리라.

감시하는 자는 서탁 앞에 앉아 오랫동안 대화하는 두 사람을 분명 수상히 여길 것이다.

어쩌면 이 방에 들어온 종이의 숫자와 글도 꼼꼼하게 확인할지 모른다.

그런 점에서 보면 서탁의 신묘함은 참으로 천만다행이었다.

서탁에 쓴 글은 모두 사라져버리니.

제아무리 치밀하다 하여도 사라진 글씨를 살필 순 없으리라.

감시자의 눈을 피해 둘만의 은밀한 대화를 나누기에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었다.

하지만 꼭 장점만 있는 건 아니었다.

-안색이 좋지 않으십니다. 부디 무리하지 마십시오.

-여기저기 쏘다니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나 듣고 오는데, 고생이랄 것이 있겠느냐? 다만…….

형운이 이레의 손을 잡았다.

-네가 보고 싶어 힘들구나. 시도 때도 없이 떠오르는 네 생각에 당장에라도 집으로 돌아오고 싶은 마음, 한두 번이 아니었느니.

형운의 두 눈에 그리움과 열망이 씨실과 날실처럼 얽혔다.

마주한 이레의 볼이 저녁놀처럼 붉어졌다.

시선을 아래로 떨어트리는 이레를 향해 형운이 상체를 기울였다.

그의 숨결이 막 이레에게 닿으려 할 때였다.

-시도 때도 없이 생각나서?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서탁 위로 급하게 휘갈겨진 물음.

상이었다.

평소 상은 힘이 넘치고 과감한 서체를 즐겨 쓰곤 하였다.

하지만 지금 서탁 위에 떠오른 글씨에는 목마른 자가 우물을 찾듯 다급함만이 가득하였다.

-당장 돌아오고 싶었다면서? 그 사람이 지금 눈앞에 있질 않으냐? 어떻게 하고 싶으냐? 무언가 하고 싶은 것이 있지 않으냐.

상이 재촉하자, 기다렸다는 듯 악의 글도 떠올랐다.

-이 조급한 작자가 끝내 일을 망치는구나. 조금 기다리면 어련히 설명하지 않을까.

악에 이어 화도 존재를 드러냈다.

-전부터 느꼈지만, 상…… 저 백귀는 도통 눈치라곤 없으니. 젊은 아이들의 풋풋한 대화에 늙은이가 산통을 깨서야 쓰겠느냐.

오늘만큼은 예도 같은 마음이었다.

-고진감래(苦盡甘來)라 하였거늘.

한꺼번에 쏟아진 성토에 상은 어리둥절했다.

-무슨 소리야? 그럼, 너희는 뒤가 궁금하지 않은 거냐? 기다리면 뭐? 뭐가 나오는데?

아직 분위기 파악이 안 된 상의 모습에 악이 푸념했다.

-되었다. 하긴, 동뢰연의 밤마저 그리 덤덤하게 보낸 자에게 무얼 더 바랄까.

-여기서 그 이야기가 왜 나오는 건데?

상이 노발대발 흥분하자, 이레가 웃으며 나섰다.

-할아버지들, 안녕하셨습니까? 보고 계셨으면 말씀해 주시지 그랬습니까?

화의 답이 떠올랐다.

-너희 둘의 대화가 워낙 심각하고 심오하니. 우리가 어찌 끼어들 수 있겠느냐.

이레는 상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상 할아버지,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래, 한 달도 더 되었구나. 그간 바쁜 일이 있어 오지 못하였다. 그나저나 뭐가 심각하다는 게냐? 심오한 건 또 뭐고? 혹시, 온종일 몸이 달아오르는 신비한 연공이라도 익히는 게냐?

악이 물었다.

-무슨 엉뚱한 소리야? 너, 오늘 언제부터 아이들의 글을 보았느냐?

-낯선 녀석이 아이가 보고 싶어 몸이 후끈 달아오르더란 말을 할 때부터 보았다.

-어쩐지 딴소릴 하더라니. 아니지, 오늘 일만 모르는 게 아니겠구나. 한 달 만에 왔으니, 아이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전혀 모르겠군.

악의 알은체에 상이 버럭 성화를 냈다.

-무슨 일이 있었다는 게야? 그보다 저 녀석은 대체 누구야? 누군데 감히 아이에게 치근덕거려? 오호라, 네 이놈! 은백이라는 놈이렷다. 네 가문이 어디냐? 내 당장 네놈의 가문을 요절내고, 조상의 무덤까지 모조리…….

-허튼소리 그만하고, 이쪽으로 따라오너라. 내 크게 인심을 베풀어 사정 모르는 너에게 친히 가르침을 베풀어주마.

-따라오라고? 이 서탁 어디로 따라오라는 것이냐?

이레도 궁금했다.

함께 있는 것도 아닐 턴데, 어디로 따라오라는 것일까.

-이. 곳. 이. 다. 잔. 소. 리. 말. 고. 따. 라. 와.

악이 하얀 설원 위에 뚜렷하게 발자국을 새기듯, 서탁 위 종이에 글자 하나씩을 떨구었다.

서탁 중앙에서 시작한 문장이 마지막으로 도착한 곳은 서탁의 귀퉁이였다.

곧 그곳에 깨알처럼 작은 악의 글씨가 떠올랐다.

-여기다. 지금부터 상황 파악 안 되는 널 위해 아이들이 겪은 이야기를 전해주마.

-대체 무슨 일인데 이렇게 분위기를 잡아? 그보다 내가 왜 넓디넓은 곳을 놔두고 좁은 구석에서 갑갑하게 남의 눈치를 보며 작은 글로 대화를 나누어야 한단 말이냐?

-눈치가 없으면, 입이라도 다물어라. 지금부터 차근차근 설명할 터이니, 넌 얌전히 듣기만 해라.

-거참. 별거 아니면 가만 안 둘 줄 알아라.

***

악은 오랜만에 서탁 대화에 참여한 상을 위해 그간의 사정을 설명했다.

이레는 그 모습에 작게 미소 지었다.

악과 상의 관계는 지켜보면 볼수록 신기하였다.

칼처럼 서늘한 성정을 지닌 상은 괴팍하고 안하무인이었다.

악은 그런 상을 타박하길 주저하지 않았다.

묘한 것은 상이 매번 악의 말에 발끈하면서도 그와 제일 잘 어울리며 따른다는 점이었다.

악도 상을 답답하게 여기면서도 은근히 보살폈다.

그 관계가 꼭 사이 나쁜 부자(父子) 사이 같았다.

아니, 서로 고집을 굽히지 않으니.

아비와 아들보다는 고집불통 집안의 조손 같은 모습이었다.

그렇게 서탁 귀퉁이에서 악이 상에게 그간의 상황을 전하는 사이, 화가 이레와 형운에게 물었다.

-일은 어찌 흘러가느냐?

형운이 붓을 들고 공손히 답했다.

-말씀하신 대로 차근차근 진행하고 있습니다.

본디 형운은 서탁의 할아버지와 직접 대화할 수 없었다.

그러던 것이 이레와 함께 붓을 잡고 할아버지들과 만난 후부터 사정이 달라졌다.

그 역시 이레와 할아버지들 간의 대화에 낄 수 있게 된 것이다.

다만, 여전히 제약은 존재했다.

첫째, 형운의 서탁이 이레의 서탁과 가까이 있어야 한다는 것.

둘째는 이레가 서탁 앞에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이레 없이 형운 혼자서는 할아버지들과의 대화가 불가능했다.

그 이유를 형운은 이렇게 추론하였다.

‘은룡의 말에 의하면, 서탁은 본래 세 개가 있었소. 왕의 서탁, 왕이 여행 중에 쓰는 서탁. 그리고 왕세자의 서탁. 셋 다 같은 나무로 만들어졌으나, 만들어진 시기는 조금 달랐다 하오.’

왕의 서탁과 여행용 서탁이 함께 만들어지고, 왕세자의 서탁은 조금 나중에 만들어졌다.

형운은 제작된 시기가 달라서 서로 통하는 정도가 다르다 짐작했다.

‘아니면 서탁을 사용한 사람의 신분이 달라서 그런 것인지도 모르지.’

이레도 서탁의 진실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그녀와 형운의 서탁이 서로 통하는 사람이 다르다는 점이었다.

이레가 형운에게 서탁을 바꾸자 한 적도 있었다.

형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 서탁은 비록 스승님들과 이어지지 못하나, 대신 은룡과 통하오. 그러니 바꾸고 싶지 않구려.’

은룡을 향한 형운의 그리움.

그는 언젠가 은룡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접지 않았다.

그 와중에 형운은 이레를 통해 할아버지들을 만날 수 있었고, 그분들을 스승으로 섬겼다.

형운의 기구한 운명을 전해 들은 화와 악 그리고 예는 그의 처지를 동정했다.

그리고 그의 아비를 앗아간 무리를 향해 함께 분노했다.

아쉬운 것은 서탁의 변덕으로 자세한 사정을 전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특히, 세자의 죽음과 관련한 이야기는 대부분 전해지지 않았다.

하지만 드문드문 전해진 형운의 감정만으로도 아비 잃은 슬픔과 목숨마저 장담할 수 없는 위태로운 상황만큼은 충분히 짐작해 내었다.

할아버지들은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살생부(殺生簿)는 만들었느냐?

화의 물음에 형운이 대답했다.

-증좌가 남을 수 있어 따로 적어두지는 못하고, 대신 제 머릿속에 한 명 한 명 담아두었습니다. 하늘에 맹세코 그들의 얼굴과 이름을 영원히 잊지 않을 겁니다.

-잘하였다. 전쟁을 하려면 우선 적이 누구인지부터 분명히 하여야 한다.

예가 말했다.

-기다림이 곧 무기가 될 것이야. 그러니 버터야 하느니. 어떻게든 버터서 돌아가야지.

형운은 공손하게 대답했다.

-명심하겠습니다.

그때였다.

-뭐? 누가 누굴 죽여?

한 줄기 성난 분노가 서탁을 가로질렀다.

뒤늦게 악에게서 이레와 형운에게 벌어진 일을 들은 상이 흥분한 것이었다.

-무슨 놈의 집구석이 아비가 아들을 잡아? 아무리 서로의 생각이 다르고, 바라는 바가 다르다고 하지만. 어찌 천륜을 저버릴 수 있단 말이냐. 광증? 병이 깊으면 치료하여야지! 마음의 병이면 더더욱 신경을 써야지! 왜 잡느냔 말이다. 어떻게 죽었더냐? 설마, 사약 같은 것으로 마지막 가는 길마저 고통스럽게 한 것은 아닐 테지?

상의 분노에 이레는 가슴 한복판이 먹먹해졌다.

차라리 사약이라도 받았더라면…….

그분께선 사약을 마신 것보다 더한 고통 속에서 생을 마감하셨다.

그러나 자세한 사정은 악도 알지 못했다.

서탁이 전하지 않았던 까닭이다.

할아버지들이 아는 것은 단편적인 정보뿐이었다.

-자세한 사정은 모른다고? 답답하구나. 대체 무슨 일로 그런 비극이 일어날 수 있단 말이냐!

이레는 흥분한 상을 말리느라 한동안 진땀을 빼야 했다.

가까스로 화를 가라앉힌 상이 진심 어린 글로 이레에게 물었다.

-아이야. 네 인생이 참으로 기구하구나. 고난 끝에 세손빈이 되어 늦게나마 편안하길 바랐더니, 이 무슨 끔찍한 일이란 말이냐?

-저는 괜찮습니다.

-네가 언제 지치고 힘들다고 제대로 말한 적이 있었더냐?

상의 한숨이 귓가에 전해지는 듯했다.

그런 심정은 다른 할아버지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화가 인자하게 말을 전했다.

-아이야.

-네, 할아버지.

-한 가지만 약조해다오. 더는 위험한 일 하지 않겠다고.

악도 당부했다.

-무리한 일은 절대 하여서는 아니 된다.

예 역시 걱정을 보탰다.

-무슨 일이 있어도 너만을 생각하여야 한다. 꼭 그 한 가지만은 명심하여야 한다.

할아버지들의 진심 어린 걱정.

이레의 마음이 든든해졌다.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고개를 돌리니 형운의 얼굴이 지척에 있었다.

어느새 등 뒤로 다가온 그가 그녀를 위로하고 있었다.

그윽한 그의 눈빛.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미안하다, 사과하는 그의 진심을.

그녀를 곁으로 불러들이고, 평생 힘들게 하지 않겠다 맹세하였는데.

운명이라는 것의 방해로 그 약조 지키지 못함이 가슴 아픈 것이리라.

이레는 눈가를 여며 초승달 모양으로 미소를 보였다.

그의 무거운 시선을 위로하고, 괜찮다고…… 나는 정말 괜찮다고 보듬었다.

“이레야, 나는…….”

형운이 무어라 말하려 운을 뗐다.

순간, 이레는 그의 입에 제 입술을 맞추었다.

감미로운 향기를 주고받으며 이레는 서탁 위로 붓을 움직였다.

-네, 더는 무리하지 않겠습니다. 더는…… 위험한 일 하지 않겠습니다.

***

새벽이 농염해졌다.

요란한 풀벌레 소리마저 곤히 잠든 시각.

서탁의 대화는 오래전에 끝났음에도, 이레는 여전히 서탁 앞을 떠나지 못했다.

눈을 감은 채 이레는 고민에 휩싸였다.

‘할아버지들께선 참고 인내하며 때를 기다리라 하였지만…….’

더는 무리하지 않겠다.

위험한 일 하지 않겠다고 약조하였다.

그렇다고 마냥 손 놓고 있을 수 없었다.

물론 형운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발이 부르트도록 애를 쓰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였다.

지금까지 경험한 십학사들은 감히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용의주도한 자들이었다.

뱀처럼 교활하고 늑대처럼 집요하였다.

그처럼 악랄한 자들이 눈엣가시 같은 형운과 자신을 두고 보기만 할까?

틀림없이 다른 방법을 동원할 것이다.

만약 그들이 다시 움직인다면 또 다른 비극이 생기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오직 하나였다.

깊은 밤.

마침내 이레는 결심을 굳혔다.

***

아침이 밝아왔다.

형운은 언제나처럼 집을 나섰다.

새벽이 밝기 전, 궁을 찾아가 할아버지께 문안 여쭙고, 시전을 돌며 서책이나 뒤적이며 시간을 보낼 것이다.

감시하는 자들을 방심하게 하기 위한 느슨한 일과(日課).

물론, 단순히 시간만 보내다 오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할아버지들의 조언대로 복수를 위한 과정을 하나씩 밟고 있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도록…….

아주 은밀하게…….

한편, 집에 남은 이레도 평온한 시간을 보내고 있지는 않았다.

그녀는 금정을 시켜 한 사람을 불렀다.

유난히 키가 크고 몸피가 얇은 사내.

이레는 그에게 서찰 한 장을 건넸다.

부탁을 받은 사내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고개를 깊숙이 숙인 후 사라졌다.

그로부터 얼마 후.

본채에서 사람이 찾아왔다.

시외종조부인 홍인한의 며느리라고 하였다.

이레는 별채 마당으로 내려섰다.

자신을 이 씨라고 소개한 홍인한의 며느리는 마뜩잖은 표정으로 이레를 머리에서 발끝까지 훑었다.

그러곤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무에 대단한 줄 알았거늘, 별거 아니었구먼.”

사람의 면전에 대고 하는 조롱이었건만.

이레는 태연하였다.

‘홍인한의 며느리 이 씨.’

홍인한은 세자 저하를 죽음에 이르게 한 원흉 가운데 하나였다.

동요하지 않는 이레를 대신하여 금정이 발끈했다.

“무엄하십니다.”

“무엄?”

이 씨가 붉은 입술을 비틀었다.

“쯧쯧, 아직도 처지를 깨닫지 못하였구나. 그러니 이리 얼굴 두껍게 버티고 있는 것이겠지.”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이어요?”

금정의 말에 이 씨가 미간을 한껏 찌푸렸다.

“아랫것이 어디서 끼어드는 것이야?”

“그런 것이 아니오라…….”

“궁에서 나온 궁녀라기에, 법도에 밝은 줄 알았거늘. 그것도 아닌 모양이구나.”

“말씀이 지나치십…….”

금정이 다시 나서려는 순간.

“그만두어라.”

“하오나, 마마.”

이레가 손을 들어 금정의 입을 막았다.

그녀는 온화한 미소를 입가에 지은 채 이 씨를 응시했다.

“이른 아침부터 어인 연유이신지요?”

겸손히 묻는 말씨.

그러나 부드럽게만 보이는 그녀의 표정 속엔 위엄이 서려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서탁의 할아버지들께 엄격하게 교육받고, 자라서는 생사를 넘나드는 경험만 수차례.

그런 이레가 평범한 여염집 여인들과 같을 순 없었다.

저도 모르게 위축되어 이 씨는 어깨를 움찔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이레의 시선을 외면했다.

“큰 할머님께서 불러 계시오.”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이레가 묻자 이 씨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눈치가 없는 것이오? 그게 아니면 눈치 없는 척을 하는 거요?”

“…….”

“몰라 물으오? 이 댁에 의탁한 것이 벌써 한 달 하고도 사흘이나 지났소. 이쯤 되었으면 처지를 알고 처신해야 하거늘. 어쩌자고 이리 퍼져 있는 게요?”

“퍼지다니. 퍼지다니요!”

금정이 다시 나섰다.

내내 이레의 눈치를 살피던 이 씨가 옳다구나, 하고 눈에 쌍심지를 켰다.

“한 번만 더 나서보거라. 궁의 예법보다 무서운 것이 홍씨 가문의 법도임을 알려줄 것이니.”

소매를 걷어 올리는 이 씨의 앞을 이레가 막아섰다.

“아랫사람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제 불찰입니다. 무례를 용서하세요.”

“흥, 내 이번만은 참고 넘어가겠지만, 다음엔 용서하지 않을 것이오.”

한바탕 으름장을 놓은 이 씨는 팽, 몸을 돌려 본채로 사라졌다.

그 뒤에서 금정이 이를 아드득 갈았다.

“마마, 세자빈께 말씀 올리겠나이다. 세자빈께서 이 일을 아시면 필시…….”

“되었다.”

“하오나 마마…….”

“지금 어머니의 마음이 얼마나 불편하겠느냐. 안채로 갈 것이니, 채비하거라.”

단호한 이레의 명에 금정이 울상을 지었다.

마지못해 물러가는 그녀를 보며 이레는 길게 한숨을 내 쉬었다.

“유난히 긴 하루가 되겠구나.”

***

반 시진 후.

이레는 금정과 함께 안채로 향했다.

거대한 솟을대문을 넘어서니, 중년의 하인이 달려왔다.

그의 안내를 받으며 걸음을 옮겼다.

이레의 등장에 사방에서 사람들의 시선이 날아들었다.

때때로 호기심 섞인 눈빛이 보이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묘한 질시와 미움이 서린 시선들이었다.

그 기묘한 쑥덕거림을 뒤로하고 이레는 안채로 향했다.

사잇문을 모두 걷어 올린 긴 장방형의 다섯 칸 안채.

여인들이 서와 열에 맞춰 양쪽 가장자리에 마주 앉아 있었다.

그 깊은 안쪽.

열두 폭 백납병풍이 펼쳐진 곳.

백발의 노파가 보료에 앉아 주름진 눈으로 이레를 지켜보았다.

흡사 일국의 왕과 충신들인 양 절대적인 권위와 절대적인 복종으로 이뤄진 관계.

“이 늙은이가 어려운 사람을 불렀소.”

노파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안채를 가득 메웠다.

“집안의 가장 큰 어른이신 큰 할머님이시오.”

좀 전에 별채로 심부름을 왔던 이 씨가 설명을 덧붙였다.

이레는 차분하게 고개를 조아렸다.

“진즉 인사 올렸어야 했는데, 늦었습니다.”

노파가 고개를 저었다.

“물정 모르는 뒷방 늙은이라고 하지만, 집안에 일어난 비통한 일을 어찌 모를까. 아기 며느님의 경황없음을 내 잘 알고 있음이오.”

“아닙니다. 그보다 말씀 편히 하십시오.”

“아무리 그래도 어찌 귀한 분에게…….”

노파의 발치에 꼬리처럼 앉은 이 씨가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할머님도, 참. 궁에서 쫓겨난 지 한 달이 넘었습니다. 귀한 분은 무슨…….”

“어허!”

노파의 한마디에 쫑알대던 이 씨가 얼른 입을 닫았다.

마른 눈씨로 이 씨를 물린 노파가 이레에게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럼 내 말 편히 함세.”

“네, 할머님.”

“지내기엔 불편함이 없는가?”

“없습니다.”

“내 이 집안으로 시집온 것이 올해로 오십 년이 되었느니.”

노파의 건조한 음성이 이어졌다.

“궁에 따라야 할 법도가 있듯, 이 집안에도 지켜야 할 가풍이 있네.”

“알려주시면 따르겠나이다.”

“내일부턴 이 집안의 다른 여인들이 하는 일과에 따라 아기 며느님도 움직였으면 하네. 이 집안의 여인들은 아침에 일어나 사당에 인사를 드리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네.”

이 씨가 노파의 말을 받았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루 세끼에 집안 여인들의 손이 안 가는 곳이 없소. 다른 집안 여인들은 그저 앉아서 해주는 밥만 먹는다지만 이 집안에서 스스로 움직인 사람들만 먹을 자격이 있소.”

문득 그녀의 얼굴에 비웃음이 차올랐다.

“하나, 듣자 하니 나물 하나 제대로 무치질 못한다고 하던데. 무얼 제대로 할까.”

이레가 이 씨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 노골적인 시선에 이 씨가 당황하였다.

“왜? 사람을 어쩌자고 그리 빤히 보시오?”

“궁금하여서요.”

“뭐가 궁금하단 말이오?”

“제가 나물 못 무치는 걸 어찌 아십니까?”

“뭐…… 뭐요?”

“마치 제 뒤를 지켜보기라도 한 듯 말씀을 하시니.”

이 씨의 낯빛이 잘 익은 홍시처럼 붉어졌다.

“지, 지금 내가 몰래 지켜보기라도 했단 말이오?”

도둑이 제 발 저린 듯 이 씨가 목청을 높였다.

“제 부족한 소양을 손금보듯 자세히 알고 계신 것이 놀라워 물은 것입니다.”

“핫, 사람을 어찌 보고! 옛말 틀린 것이 하나 없다더니. 무릇 집안에 사람이 잘 들어야 그 집안이 흥하거늘.”

이 씨의 망언에 노파를 비롯한 방 안의 여인들이 놀란 눈을 하였다.

그러나 저 감정에 치우친 이 씨는 급기야 제 가슴까지 쳐대며 울먹였다.

“그때 끝까지 집안에서 말렸어야 했습니다. 우리 세손 저하의 곁에 엉뚱한 사람이 앉지 못하게 막았어야 했어요. 대제학의 따님이 이 집안에 들어왔다면, 어찌 지금과 같은 불화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어허, 어찌 말을 그리하시는가.”

보다 못한 듯 누군가 나섰다.

하지만 곧 이 씨를 두둔하는 말들이 여기저기에서 쏟아져 나왔다.

“아주 없는 말을 하는 건 아니질 않습니까?”

“그러게요. 삼화당 형님의 말씀이 틀린 건 없지요. 대제학의 집안과 혼인하였으면 이 사달이 왜 벌어졌겠습니까.”

“누가 아니랍니까. 그랬으면 궁에서 쫓겨나는 흉한 모양새는 면했을 겁니다.”

여인들의 수군거림이 이레의 가슴을 아프게 찔러왔다.

사람을 바로 앞에 두고도 그들은 말과 표정을 가리거나 숨기지 않았다.

이레의 손끝에 잔 경련이 일었다.

애써 감정을 억누르며 시선을 바닥으로 내렸다.

그러나 이어지는 이 씨의 비아냥만큼은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사람 하나 잘못 들이니, 집안에 망조가 들었습니다, 망조가 들었어요.”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이레의 매서운 한마디가 수런거리는 목소리들을 제압했다.

차가운 그녀의 눈빛에 찔끔 놀란 여인들은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내 어린 것에게 눌렸다는 사실에 여인들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집안의 큰 며느리인 한 씨가 이레에게 한마디 했다.

“어린 사람이 예의가 없소.”

“사람을 앞에 두고 할 말, 못할 말 가라지 않고 입에 올리시니. 이 집안의 가풍이라 생각했습니다. 제가 잘못 배웠습니까?”

“어허, 가족끼리 할 말, 못 할 말이 어디에 있겠소.”

한 씨의 말에 이 씨가 야살스러운 얼굴로 동조했다.

“제 말이 그 말입니다.”

이 씨는 눈매를 위로 치뜨며 이레를 노려보았다.

“가족끼리 이 정도 농(弄)도 못 한단 말이오? 그저 가벼이 한 농에 어찌 이리 죽어라 덤벼드는 것이오?”

“아프게 꽂히는 비수가 어찌 농이 될 수 있겠습니까. 듣는 사람이 상처받는 것이 지금 우스갯소리라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우리가 뉘요. 한 집안이 아니요. 허물없이 속내를 터놓을 수 있는 한 가문이 아니오.”

이 씨의 말도 안 되는 변명에 이레는 허탈하게 웃고 말았다.

잠시 숨을 들이마셔 마음을 가라앉힌 그녀는 천천히, 그러나 정확한 어조로 말했다.

“가족이라면 그 누구보다 아껴 주어야 하는 겁니다. 허물없이 아픈 상처를 헤집는 것보단 다독여주는 것이 가족이라 배웠습니다. 가족이라서 상처 입힐 수 있는 말을 거리낌 없이 할 수 있다면…… 차라리 가족으로 생각하지 말라 배웠습니다.”

바로 그때였다.

“맞는 말이다.”

큰 할머님의 음성이 방 안을 가로질렀다.

순식간에 공기가 얼어붙었다.

“송구합니다. 아직 어린 사람이 감히 어른 앞에서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이레가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큰 할머님이 손을 내저었다.

“아닐세. 아기 며느님 말씀대로 아직 어리질 않은가. 구태여 잘잘못을 가리자면 어린 사람 앞에서 가볍게 입을 놀린 어른들의 잘못이 더 클 테지.”

노파는 이레에게 시선을 맞췄다.

주름진 입가에 얼핏 미소가 떠올랐다.

“아기 며느님.”

인자하게 이레를 부른 노파가 말을 이었다.

“분명 어른들이 잘못은 하였으나, 아기 며느님도 도를 지나쳤네.”

“송구합니다, 할머님.”

“되었네.”

노파의 얼굴에 드리웠던 인자함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녀는 휘휘 왼손을 허공에 흔들었다.

“오냐오냐 돌아가신 분의 귀염을 받아서 그런가. 예(禮)와 범절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니. 훗날 가문과 집안에 크게 화가 되기 전에 단단히 버릇을 고쳐놔야겠구먼.”

이레를 외면하듯 옆으로 돌아앉으며 노파가 쐐기를 박았다.

“이참에 집안의 가풍을 제대로 배우시게.”

“……!”

***

밤이 깊었다.

바람이 짐승처럼 사납게 울었다.

안국동 홍봉한 대감댁 북쪽 후원의 버려진 창고 안.

감금된 이레는 어둠을 응시했다.

집안의 가풍을 배운다는 명분 아래 이레는 창고에 갇혔다.

고요가 안개처럼 밀려들었다.

빼꼼 열린 동창 너머로 바람에 휩쓸린 구름이 빠르게 흘러갔다.

견디기 힘든 적막이 이레를 잠식해 들어갔다.

달빛이 그려낸 나뭇잎이 문풍지 위로 기묘한 그림자를 만들었다.

휘잉.

바람 소리에 이레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구름에 잠시 자취를 감추었던 달빛이 그녀의 머리 위로 빛 가루를 흩뿌렸다.

끼이익.

오후 내내 굳게 닫힌 창고의 문이 밖에서 열렸다.

“괜찮으냐?”

나직한 물음.

칠십 넘은 노파가 굽은 허리를 이끌고 모습을 드러냈다.

이레를 창고에 가두라 명을 내린 큰 할머님이었다.

“괜찮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노파가 아련한 시선으로 이레를 바라보았다.

“너를 본 것이 까마득한 옛일이 되었구나. 다시 이리 인연이 되어 만나니 반갑기 그지없구나. 조금만 더 좋은 상황에서 만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꼬.”

“할머니께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이레가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노파는 이레의 조모와 친분이 있는 몇 안 되는 여인 중 하나였다.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이레는 노파에게 도움을 청했다.

다행히 노파는 이레를 기억하고 있었다.

“하도 부탁하기에 이리하긴 했으나. 대체 이게 무슨 낮도깨비같은 일이냐?”

노파는 품에서 서찰을 꺼냈다.

오늘 아침 이레가 팽례를 통해 노파에게 보낸 서찰이었다.

그 서찰에는 이레를 안채로 불러 달란 간곡한 청이 적혀 있었다.

적당한 이유를 들어 광에 가둬 달라는 부탁과 함께.

“송구합니다, 할머님.”

이레는 검버섯이 핀 노파의 손을 꼭 맞잡았다.

“조용히 만나야 할 사람이 있었습니다.”

“조용히 만날 사람? 대체 누굴 만나는데 이런 곳에 있어야 한단 말이냐?”

그때였다.

두 사람의 뒤편으로 한 인영이 천천히, 느릿한 걸음으로 안으로 들어왔다.

“아무래도 그 사람이 저인 모양입니다.”

언제 들어온 것일까.

서찰을 손에 든 여인이 달빛을 등진 채 서 있었다.

아직 여인이라고 불리기엔 앳된 얼굴의 어린 여인.

비밀스러운 입전 ‘수월’의 진짜 주인, 만사여의였다.

만사여의, 한서로가 이레에게 고개를 숙였다.

“빈궁마마를 뵙습니다.”

“이리 달려와 줘서 고맙습니다. 지켜보는 자들의 눈을 돌리려니 이 방도밖에 없었습니다.”

한서로는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빈궁마마께선 언제나 절 놀라게 하시는군요. 설마, 이런 식으로 빈궁마마를 다시 뵙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하였습니다.”

팽례를 통해 이레의 서찰을 받은 사람은 노파 한 사람만이 아니었다.

“저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답니다.”

“그러리라 생각했습니다.”

이레와 한서로는 서로를 마주 보며 미소를 나누었다.

두 사람을 가만 지켜보던 노파가 밖으로 몸을 움직였다.

“밖에 있을 것이니. 이 늙은이가 필요하면 언제든 부르거라.”

“감사합니다, 할머님.”

“이 늙은이가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구먼.”

톡톡, 이레를 토닥이던 노파가 창고 문밖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잠시 후.

만사여의와 단둘이 남게 되자, 이레가 물었다.

“부탁한 일은 어찌 되었습니까? 할 수 있겠습니까?”

한서로가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의 명이라고 감히 어기겠습니까.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겠습니다.”

“이번 일로 큰 손해를 보게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이미 마마께 목숨을 빚졌습니다. 세상에 목숨보다 귀한 것이 어딨겠습니까. 덤으로 사는 사람인지라, 아까울 것도 아낄 것도 없습니다. 더구나 그 작자는 제 납치를 사주했던 사람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받은 만큼 되돌려 주려 준비 중이었으니. 너무 마음 쓰지 마십시오.”

한서로의 대답에 울컥 뜨거운 것이 이레의 목구멍으로 치솟았다.

이레는 애써 입안의 것을 삼켰다.

그런 그녀를 향해 한서로가 입을 열었다.

“이제 말씀하여 주십시오. 그자를 노리는 이유가 무엇인지요.”

한서로의 물음에 이레가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 사람의 자리입니다.”

“네?”

한서로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레가 그런 그녀에게 맑은 미소를 보였다.

“한 가지 더 부탁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만사여의라는 이름, 한동안 제가 써도 되겠습니까?”

“대체 무슨 일을 하시려고 그러십니까?”

“십학사.”

이레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말했다.

“그들을 만나 볼 생각입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