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 죄인지자불가승통(罪人之子不可承統)
한양 사대문 밖의 거대한 저택.
평소엔 아무도 발길질하지 않던 저택으로 면사를 쓴 자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모두 열 명.
불로장생을 상징하는 십장생의 그림이 그려진 의자에 각각 한 사람씩 자리했다.
십학사의 모임이다.
학의 자리를 제외한 아홉 사람이 모이자, 가장 상석에 자리한 해(日)가 입을 열었다.
“마침내 선(愃)이 떨어졌소.”
해가 무심하게 운을 뗐다.
하지만 그 여파는 가볍지 않았다.
선은 세자를 뜻하고, 그가 떨어졌다 함은 곧 세자의 죽음을 의미했다.
한 나라의 왕세자가 죽었다.
그것도 역사상 전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참담하고 허무한 죽음.
왕이 왕세자를…….
아비가 아들에게 죽음을 명하였다.
그것도 좁디좁은 뒤주에 갇혀 죽었다.
무거운 침묵이 실내를 감돌았다.
하지만 그 침묵이 슬픔과 애도를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십학사들의 입가에 서린 것은 미소였다.
그들은 세자의 죽음을 기뻐했다.
심지어 너털웃음을 터트리는 자도 있었다.
구름(雲)이었다.
“허허, 한때는 잘못되지 않을까 걱정하였는데. 결국, 해의 뜻대로 되었구려.”
구름의 공치사에 해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다른 십학사들에게 공을 돌렸다.
“어찌 이처럼 큰 업적을 나 혼자만의 힘으로 달성할 수 있겠소? 여기 계신 모두가 애쓴 덕분이오.”
“그리 겸양 보일 필요 없소. 이 자리에 있는 사람 중 이번 일의 최대 공로자가 그대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으니. 한데…….”
호쾌하게 웃던 구름이 넌지시 물었다.
“대체 어떻게 한 것이오?”
“무슨 말이오?”
“세자 말이오. 그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이오?”
구름은 ‘세자’라는 단어를 내뱉는데 조금의 주저함이 없었다.
이미 죽은 세자는 그에게 두려움이 상대가 아니었다.
물끄러미 구름을 응시하던 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알다시피 그의 죽음은 스스로 불러온 비극이었소. 의대증(衣帶症)에 걸려 수시로 광증을 일으켰다는 소문은 그대도 익히 들어 알고 있지 않소.”
“소문이야 익히 들었소이다. 옷을 갖춰 입길 거부하였고, 한번 입은 옷은 두 번 입지 않으려 하니. 동궁전 궁인들은 하루가 멀다고 상의원에 아쉬운 소리를 했다 하더이다. 어디 그뿐일까. 환복을 돕던 궁녀를 칼로 베었다는 소문도 있고, 제 아이 가진 후궁을 때려죽였다는 소문도 파다하니. 한번 병증이 일면 광인도 그런 광인이 없었다지요.”
“그리 잘 알면서 어찌 묻는 것이오?”
구름은 두 눈을 가늘게 여몄다.
“이상하질 않소.”
“무어가 말이오?”
“세자는 본시 신체 강건하고 호방한 성정의 사람이었소. 그런 자가 갑자기 의대증이라니, 허허.”
“수년 전부터 극심한 두통과 심계(心悸: 심장 두근거림, 불안 증상)를 앓고 있다 하였소. 치료하지 않고 방치하여 병이 깊어진 것이 아니겠소?”
“그런 증상이 나타나기 전부터 수상한 탕약을 즐겨 먹었다 들었소만.”
집요한 구름의 물음에 해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오?”
“하하, 따로 할 말이 무어가 있겠소. 그저 세자의 죽음을 예견한 해의 혜안이 신기하여 호기심이 일었던 것뿐이오.”
“어찌 그것이 나의 예견이겠소. 그의 죽음은 우리 모두의 선택이 아니었소. 허고…… 그것이 그의 운명이었소.”
“그렇겠지요. 틀림없이 그러리라 믿소이다, 허허허.”
자신을 향한 해의 날카로운 눈빛에 구름이 머쓱하게 웃었다.
웃음은 그리 길지 않았다.
누군가 두 사람의 대화 사이로 끼어들었다.
“그런디유.”
하품을 간신히 참으며 쥐어짜듯 내는 목소리.
그를 보는 사람들의 눈빛이 고울 리 없었다.
구름이 인상을 찌푸렸다.
“거북, 할 말이라도 있느냐?”
길게 기지개를 켜며 거북이 말했다.
“아직 끝나지 않았잖유?”
“무슨 말이냐?”
“선인지 후인지, 그 사람은 갠신히 잡았쥬. 근디 세손인지 아들인지 하는 사람은 멀쩡히 남아 있잖유.”
거북의 걱정에 구름이 싸늘한 코웃음을 흘렸다.
“걱정도 많구나.”
“워째 걱정이 안 된대유? 아비를 죽였는데, 그 아들이 살아 있잖유. 나중에 뭔 사달이 일어날 줄 누가 안대유.”
“정말 몰라서 묻는 것이냐?”
“아유 참, 모르니께 묻지유. 그럼, 알면서 묻겠슈?”
“아비인 세자가 죄인이 되어 죽었다.”
“글츄.”
“죄인지자불가승통(罪人之子不可承統)이라. 국법이 엄격하니, 죄인의 아들은 절대 왕이 될 수 없느니.”
“뭐유, 그래도 핏줄인데, 임금님께서 그냥 나두겠슈.”
“만백성 위에 군림하는 존재가 바로 왕이다. 작은 흠도 있어선 아니 되지.”
“뭐가 그렇게 복잡하데유? 난 왕의 아들이고 손자면 다 왕이 되는 줄 알았쥬. 하여간 높은 양반들의 생각은 도통 짐작도 못 허겠네유. 그러니께 지금 세손이었던 양반이 왕이 되지 못한단 말이지유?”
“같은 말을 몇 번이나 해야 하느냐. 허고, 누가 세손이란 말이냐. 이미 폐서인되었거늘.”
“그럼, 앞으로 누가 왕이 된대유?”
거북의 물음.
순간, 숨 막히는 정적이 내려앉았다.
몇몇은 의미심장한 눈빛을 교환하고, 다른 몇은 옆에 앉은 자의 눈치를 살폈다.
거북의 자리에 앉은 박진봉이 씩 웃었다.
“뭐유. 인제 보니 다들 속이 시커멓네유. 양반들은 다를 줄 알았더니, 양반이나 상놈이나 시커멓기는 매한가지였네요.”
은근한 조소에 불편한 헛기침이 흘러나왔다.
그때, 누군가 물었다.
“그런데 세손은 그렇다 치고, 얼마 전 간택된 세손빈은 어찌 되었소이까?”
***
햇살에 실린 더위가 무거웠다.
이레는 쓸쓸한 표정으로 무덤 앞에 서 있었다.
생긴 지 얼마 안 된 봉분이었다.
이곳에 한 사람이 잠들어 있었다.
세자 저하.
그의 무덤이었다.
그의 열정은 여름의 열기만큼이나 여전히 뜨겁건만.
정작 지켜주는 이 하나 없는 그의 무덤은 쓸쓸함과 처연함만이 감돌고 있었다.
이레는 그의 무덤에 절을 올렸다.
세자가 죽은 지, 벌써 여러 날이 흘렀건만.
이레는 여전히 그를 떠올리며 눈물을 참지 못했다.
돌이켜보면, 참으로 행복한 한때였다.
“그때는 세자 저하께서 제게 얼마나 큰 그늘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세손빈이 된 그녀에게 궁은 낯설고 삭막한 곳이었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세손뿐.
하지만 그조차도 항상 그녀 곁에 붙어있을 수는 없었으니.
그런 이레에게 인자한 손길을 내밀어준 분이 바로 세자 저하였다.
세자의 배려와 도움 덕에 이레는 안심할 수 있었다.
“저하께선 언제나 부드럽게 미소 짓고 계셨지요. 불편한 일은 없는지, 힘들고 괴로운 일은 없느냐. 언제나 묻곤 하셨지요. 그 세심한 배려가 얼마나 든든하고 좋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몰랐다.
세자께서 깊은 병에 신음하고 계심을.
이따금 두통에 괴로워하고, 가슴이 답답하다 하셨지만.
이유를 물으면 언제나 가벼운 현기증이다, 대수롭지 않으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하셨으니.
그래서 세자 저하의 병을 알지 못했다.
그때, 더 마음 기울였어야 했다.
그랬다면…….
어쩌면 저하께 벌어진 끔찍한 결말을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그 참극은 봄의 끝을 알리는 폭우처럼 느닷없이 벌어졌다.
세자 저하의 광증이 심각하다는 소문이 들리고, 신하들의 상소가 빗발쳤다.
세손빈이었던 이레가 수상한 소문을 접하였을 때엔, 이미 사태는 걷잡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주상 전하께오서 진노하시었다는 뒤숭숭한 소식이 전해오고 얼마 후.
이레는 귀를 의심케 하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세자 저하의 죽음.
이레는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분께서 그리 돌아가실 줄은.
늠름하고 당당하였던 그분께서 좁고 갑갑한 곳에 갇혀 허무하게 생을 마감하게 될 줄은.
이레가 물었다.
“억울하지 않으십니까?”
그분께선 대답이 없으셨다.
이레는 소매에서 작은 침통을 꺼냈다.
하얀 수실이 달린 침통.
“전 저하에 대해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하께서 은룡이었다는 사실조차도 최근에야 알게 되었으니까요.”
며칠 전, 형운은 은룡과 관련된 비밀을 이레에게 알려주었다.
은룡은 아마도 젊을 적의 아바마마였던 듯하다며.
자신과 비슷한 나이일 적, 영롱하셨던 그 시절의 아바마마 같다 하였다.
세자 저하께서 돌아가시고, 슬픔으로 지새우던 어느 날 밤.
서탁은 마지막 불꽃을 태우듯, 그분께서 남긴 모든 이야기와 긴 시간의 그리움을 모두 전하고 끊어졌다.
은룡과 세자의 관계를 뒤늦게 알게 된 형운은 무척 슬퍼했다.
억울하게 그분을 잃게 된 후에야 깨닫게 되었다며, 자신의 무지를 탓하였다.
“그 후로 그분께선 밤만 되면 서탁 앞에 앉으십니다. 혹시나 은룡을 다시 만날 수 없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겠지요.”
하지만 형운의 바람과 달리 그 후로 은룡은 두 번 다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은자원의 징표라 생각하여 가져왔습니다. 보잘것없는 물건이지만, 받아주십시오.”
이레는 하얀 수실이 달린 침통을 세자의 무덤에 바쳤다.
바람이 불어왔다.
숲이 우는 소리에 이레는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참, 지난번에 거처를 옮겼다는 소식은 전하였지요?”
세자는 죄인이 되어 죽었다.
죄인의 아들인 형운은 세손의 위(位)를 잃고 외가로 쫓겨났다.
“궁 밖으로 나오게 되어 꼭 나쁜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렇게 세자 저하를 뵈러 나올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세손빈이었다면 이렇게 자유롭게 거동할 수 없었을 것이다.
수많은 법도와 규율에 잡히고 갇혀 옴짝달싹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분의 무덤 앞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덧 해가 기울었다.
이레는 몸을 일으켰다.
“또 오겠습니다. 쓸쓸하시면…… 언제든 찾아오십시오. 서탁에 앉아 오매불망 다시 뵙기를 고대하겠습니다.”
작별의 절을 올린 이레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억지로 옮겼다.
“이제 오셔요?”
산 아래에 금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금정은 세손빈에서 하루아침에 죄인의 며느리로 추락한 이레를 따라 궁에서 나온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오래 기다리게 했구나. 그만 가자꾸나.”
이레는 금정과 함께 걸음을 옮겼다.
그때, 그녀의 등 뒤에서 날카로운 물음이 들려왔다.
“정말 꼴좋게 됐구나.”
고개를 돌려보니 지팡이를 짚고 선 젊은 여인이 표독스러운 눈빛을 세우고 있었다.
금정이 이레의 앞을 가리듯 나섰다.
“감히, 이분이 누구인 줄 알고 막말을 하시오?”
“한때 세손빈이었던 여인이지.”
“그걸 알면서 함부로…….”
“너야말로 닥치거라. 천하를 호령하던 범도 늙고 다치면 꼬리를 사리거늘.”
“이 사람이 진짜! 몸이 불편해 보여서 참으려고 했더니, 아무래도 험악한 일을 당해봐야 정신을 차리려나.”
흥분한 금정이 소매를 걷어 올렸다.
소심하고 매사에 조심스러운 금정이었으나, 이레에 관한 일이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이레가 그런 금정을 말리며 앞으로 나섰다.
지팡이를 짚고 선 여인의 얼굴이 낯익었던 까닭이다.
“혹시, 그대는…… 대제학의 여식이 아니던가?”
“뭐야? 설마, 이제 알아본 건 아니겠지?”
표독스런 인상의 여인, 바로 명선이었다.
이레의 예사롭지 않은 눈썰미로도 단숨에 알아보지 못할 만큼 명선의 인상은 예전과 크게 달라졌다.
“모두 네 탓이다.”
명선이 이레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분수에 맞지 않는 계집이 격에 어울리지 않는 자리에 오르니, 모두가 불행해진 것이야!”
저주와 같은 명선의 비웃음에도 이레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저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명선의 행색을 찬찬히 살펴보기만 하였을 뿐이다.
명선의 행색은 엉망이었다.
얼굴은 땀으로 가득했고, 치마는 지저분한 얼룩으로 더럽혀졌으며, 신발에도 흙먼지가 가득했다.
대제학의 사가는 이곳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곳에서부터 걸어온 것이리라.
지팡이를 짚으며 절뚝절뚝, 불편한 몸을 이끌고 왔으리라.
간택에서 떨어진 명선은 철저하게 버려졌다.
집안의 싸늘한 외면 속에 가마조차 타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으리라.
“날 만나러 먼길 마다치 않고 온 모양인데, 경황이 없어 반가이 맞지 못할 것 같소. 살펴 가시오.”
“지금 네가 누굴 걱정하느냐? 설마, 궁에서 쫓겨난 정도로 끝날 거라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앞으로 더 큰 불행이 닥칠 거다.”
명선은 차분하게 걸음을 옮기는 이레의 등 뒤로 지팡이를 내던졌다.
그녀의 악다구니가 어둠이 내려앉는 숲에 길게 메아리쳤다.
***
이레는 금정과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낮아진 담.
부옇게 먼지 않은 서까래.
형운과 이레가 옮긴 거처는 안국동 홍봉한 대감의 별채였다.
이레에겐 친정으로 가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졌다.
그러나 이레는 형운과 함께하였다.
아니, 지금 그녀가 있을 곳은 바로 이곳뿐이었다.
‘다시 별채에 머물게 되었구나.’
간신히 별채를 벗어나 궁궐로 들어갔건만.
다시 별채라는 좁은 공간 속으로 되돌아왔다.
운명이라면 참으로 묘한 운명이었다.
그래도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었다.
함께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레는 형운을 떠올리며 서둘러 집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별채로 들어가는 대문 기둥에는 나이 든 문지기가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금정이 힐끗 그를 보며 험담했다.
“분명 조는 척하는 거여요. 지난번에 느낌이 이상해서 돌아보니 졸던 사람이 가자미눈을 뜨고 훔쳐보고 있더라고요.”
“피곤하여 그렇겠지. 온종일 문 앞을 지키고 있어야 하니, 얼마나 곤하겠느냐.”
변한 것은 사는 곳만이 아니었다.
이레를 대하는 주위 사람들의 반응 또한 예전과 크게 달라졌다.
예전엔 한 걸음만 옮기려 해도 내관이며 궁녀들이 달려와 소란을 떨었건만, 지금은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보고도 못 본 척 외면하기 일쑤였다.
무언가 부탁하면 귀찮은 내색이 역력하였다.
“에구머니나, 아직도 아무 준비도 안 하였네.”
하늘 끝으로 어둠이 밀려들었건만.
별채 부엌엔 작은 온기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침저녁으로 본채에서 나와 식사를 준비하던 하인들도 보이지 않는다.
금정이 종종걸음쳤다.
“빈궁마마, 조금만 기다리셔요. 서둘러 저녁 올리겠나이다.”
“아니다. 내가 하마.”
“어유, 그런 말씀 마시어요. 어찌 귀한 분께서 그런 일을 하시겠다고 하십니까.”
“매번 너만 애쓰니 그러질 않느냐. 이것저것 챙길 것도 많고 치울 것도 많은데. 너 혼자 일하는 모습, 지켜보는 것도 마음 편칠 않구나.”
“그래도…….”
“솜씨는 없지만, 열심히 해보마.”
“마마…….”
금정의 눈에 금세 눈물이 글썽거렸다.
그녀를 향해 이레가 미소를 지었다.
주인의 쓸쓸한 웃음에 금정이 서둘러 눈가를 훔쳤다.
“그럼 조금만 도와주십시오.”
“그래.”
“우선 쌀은 여기 있습니다. 매일 아침 본채에서 쌀과 찬거리를 마련해 줍니다.”
이레는 금정이 일러주는 목소리에 귀를 세웠다.
쌀을 씻어 밥을 안치고, 간단한 나물 반찬이라도 만들 요량으로 이리저리 동동거렸다.
***
하늘 끝으로 어둠이 밀려왔다.
이레는 대문 밖으로 향했다.
붉게 물든 담벼락을 따라 한 사내가 터덜터덜 걸어왔다.
형운이었다.
주위를 둘러보며 느긋하게 걷던 형운이 이레를 발견했다.
한달음에 달려온 그가 이레의 손을 잡았다.
“또 나왔소? 안에서 기다리고 있으라 하질 않았소.”
“기다린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형운은 조용히 이레의 손을 깍지 꼈다.
“오늘 저하께서 즐기시는 나물 반찬을 준비하였습니다.”
“설마, 은랑이 직접 한 것이오?”
“형편없는 솜씨라 간이나 맞을까 걱정입니다.”
“그대가 한 것인데, 맛이 없을 리 없지.”
“그리 장담하지 마십시오.”
“밥 이야기를 해서 그런가. 배 속이 요동치는군.”
“다행입니다, 시장이 반찬인데.”
형운과 이레는 서로를 마주 보며 환한 웃음을 지었다.
잠시 후.
밥상을 마주한 형운과 이레 사이에 어색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왜 그러십니까?”
자신이 만든 나물 반찬을 뱉지도, 그렇다고 삼키지도 못하는 형운을 보며 이레가 물었다.
“그리 맛이 이상합니까?”
“그것이 아니라…….”
“어젯밤에 열심히 서책을 살폈는데…….”
“요리를 서책으로 배웠단 말이오?”
“네.”
“그렇군.”
“분명 서책이 일러준 대로 재료를 넣었는데……. 정녕 이상합니까?”
“…….”
형운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레는 축 어깨를 늘어트렸다.
“괜찮소. 어찌 사람이 모든 것을 다 잘할 수 있겠소.”
금정의 위로에도 이레는 낯빛은 전혀 나아지질 않았다.
“늘 할멈이 해 주는 것만 먹다 보니, 내 손으로 직접 해본 적이 없습니다. 송구합니다.”
“그런 말 마시오. 그나저나 그대도 못 하는 것이 있다니. 나는 그게 제일 신기하오.”
형운의 말에 이레가 무언가 결심한 듯 몸을 일으켰다.
“안 되겠습니다. 다시 한번 해봐야겠습니다. 무언가 제가 실수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번에야말로 심기일전해 보겠습니다.”
형운이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되었소. 이것으로 충분하오.”
“아닙니다.”
나물 반찬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 사이에 작은 실랑이가 이어졌다.
문밖으로 새어나오는 지극히 평범한 이야기.
그러나 그 범상한 일상을 엿듣는 귀가 있었다.
늘 조는 모습을 보이던 늙은 문지기.
숨을 죽인 채 이레와 형운의 이야기를 엿듣던 문지기는 조용히 자취를 감추었다.
그가 다시 모습을 드러낸 곳은 홍봉한의 아우, 홍인한의 집이었다.
***
뒷문으로 몰래 들어간 문지기는 곧장 사랑채로 향했다.
“대감.”
“왔느냐? 그래, 오늘은 어떻더냐?”
“별일 없었습니다요.”
“자세히 말해보아라.”
문지기는 홍인한에게 형운의 일과를 고해올렸다.
“오전에는 방에 틀어박혀 서책을 읽고, 낮이 되면 소일 삼아 여기저기를 쏘다니다가 저녁이 되면 돌아옵니다요.”
“특별히 간 곳은?”
“제일 먼저 궁궐 초입까지 갔었고, 그다음엔 시전거리에 있는 세책방에 잠시 들렀습니다요.”
“경기관찰사의 여식과는? 관계는 어때 보이더냐?”
“평소와 다름 없었습니다요.”
문지기는 홍인한의 눈치를 흘끔 보며 말을 이었다.
“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아무 일도 겪지 않은 새신랑, 새신부로 착각할 지경입니다요.”
“네 말을 들으니, 정말 앞으로의 일은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구나. 하긴 아비에게 그런 일이 생겼으니, 무섭고 두려울 테지.”
홍인한은 문지기에게 엽전이 든 전낭을 던져주었다.
묵직한 무게에 문지기의 고개가 절로 공손해졌다.
“아이쿠, 소인이 무얼 하였다고.”
“앞으로도 예의 주시하고, 큰일이 생기면 냉큼 고해야 한다. 알겠느냐?”
“염려 붙들어 매십시오.”
***
같은 시각.
형운과 이레의 대화도 계속되고 있었다.
“오늘 신기한 소문을 들었소.”
“무슨 소문입니까?”
“의적이 나타났다 하오.”
“의적들이라면 지난번에 임부들을 납치한 죄로 모두 잡히지 않았습니까?”
“알고 보니 그놈들은 진짜 의적의 흉내를 낸 가짜였다고 하는구려.”
“하오면…….”
“진짜가 돌아온 모양이오.”
“진짜 의적이 돌아왔단 말입니까?”
“그렇소. 장안이 온통 돌아온 의적에 관한 소문으로 들썩이고 있소.”
얼핏 들으면, 복잡한 세상사에서 도망쳐 버린 사람들처럼 보였다.
하지만 정작 방 안에서 펼쳐지는 실상은 평온한 대화와는 전혀 달랐다.
-오늘도 감시하는 자가 있더냐?
서탁에 쓴 형운의 물음에 이레가 답했다.
-멀리서 지켜보는 자가 한둘 있었습니다.
-전보다 줄었구나.
-감시의 눈길이 한층 가벼워졌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안심할 때는 아닙니다.
-명심하마.
가벼운 대화와 달리 심각한 두 사람을 나누고 있는 두 사람.
-그분들의 조언. 내 눈을 감는 그 날까지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그날.
형운은 아버지를 잃고 스승들을 얻었다.
-이미 죽은 사람처럼, 날 숨길 것이다. 죽일 가치도 없어 보일 정도로. 무력한 모습을 보이리라. 그리하여 승리에 취한 뱀이 굴 밖으로 기어 나오게 되면…….
-언젠가 반드시 방심한 적이 실체를 드러내겠지요.
-그래. 그때가 되면 비로소…….
-길이 열릴 것이옵니다.
아비를 비명에 잃고, 세손의 지위마저 박탈된 형운.
그리고 그와 운명을 함께하기로 한 이레.
두 사람은 좌절도 포기도 하지 않았다.
때를 기다리는 잠룡처럼.
몸을 낮게 웅크린 채, 조용히 복수의 칼을 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