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 너, 욕 좀 할 줄 아느냐?
“이게 무엇이냐?”
파삭하게 조각난 목소리가 형운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는 곁을 지키는 상선을 노려보았다.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고 환궁한 길이었다.
한때 이 나라의 왕세자였던 아비는 간신들의 모함으로 페서인되어 죽음을 맞이하였다.
마지막 유품을 정리하기에 앞서 왕세자의 서고에 숨겨진 비밀을 확인하기 위해 뗀 걸음이었다.
비밀 서고의 가장 안쪽.
미닫이문 너머에 숨어 있던 아버지의 마음.
“세손 저하의 태몽을 꾸신 날 그린 그림이옵니다.”
“나의…… 태몽이라고?”
형운은 부릅뜬 눈으로 아버지가 그린 태몽을 주시하였다.
여의주를 쥔 채 승천하는 용.
천하를 내려다보며, 하늘마저 집어삼킬 듯한 거대한 포부 속에 아들에 대한 아비의 깊은 속내가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이 그림을 그린 이후, 여러 번 소인에게 자랑하시었나이다. 참으로 대단한 아이가 세상에 나올 것이라고. 부족한 아비를 대신하여 이 아이가 이 조선의 진정한 군주가 될 것이다. 그런 말씀을 몇 번이나 하시었나이다.”
“…….”
“그 말씀을 하실 때 세자저하의 표정을 소인은 잊을 수 없나이다.”
“그분…… 웃으셨느냐?”
“웃으셨나이다.”
“행복해하셨느냐?”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하셨나이다.”
형운의 무릎이 꺾였다.
갑자기 태양 아래로 나선 듯 눈앞이 온통 하얗게 바래졌다.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환한 빛 속이었건만.
정작 시야에 담기는 건 아무것도 없다.
지금 형운이 할 수 있는 건 버티는 것뿐.
이 무기력한 상실감을.
창자를 잘라내는 듯한 고통을.
버티고 참아내는 것 외엔 도리가 없었다.
감히 눈물을 흘릴 염치도 없어 형운은 바싹 메마른 눈으로 벽화를 응시하였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해가 떴는지 졌는지 가늠이 되질 않는다.
무언가를 생각하고 헤아리는 순간, 말라비틀어진 감정은 걷잡을 수 없게 무너지고 말리라.
삶이란 참으로 덧없구나.
그리 안간힘을 쓰던 아버지의 생이.
그토록 크고 용맹하였던 그분께서.
지병과 간신들의 모함에 끝내 허물어질 줄이야.
왕세자의 간절했던 인생은 잔인한 여름 태양 속으로 녹아내렸다.
그분의 인생과 꿈이, 그토록 갈망하였던 미래가 몇 번의 못질로 단절되었다.
형운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존귀한 왕세손의 손.
그러나 하나밖에 없는 아비조차 지켜내지 못한 쓸모없는 손.
만백성의 아비 되어 그들을 살피고 어루만지겠다 맹세하였다.
하나, 정작 내 혈육의 죽음조차 막지 못하였으니.
이런 내가 무얼 할 수 있다고.
이런 내가 누굴 살피겠다고.
허탈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허망하여 견딜 수 없었다.
들끓는 태양이 서서히 어둠에게 자리를 양보하였다.
깊어진 밤이 새벽이 되고 다시 아침을 맞았다.
그러나 형운은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아비의 그림 앞에 엎드려 그는 소리 없이 통곡하였다.
눈물 없는 울음이 그의 가슴을 짓이겼다.
숨조차 쉴 수 없는 격통에 끝내 혼절한 형운은 내관의 등에 업혀 간신히 세손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
갑자기 모든 것이 막연하였다.
늘 생활하던 공간마저도 낯설었다.
머리를 조아리는 궁인들도 어색했다.
존재하고 있으나 존재하고 싶지 않았다.
숨은 쉬어도 진정으로 살아 있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창밖이 어두워졌다.
어느새 날이 저문 모양이다.
참담한 그 날로부터 며칠이나 지났을까.
형운은 여전히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불도 밝히지 않은 어두운 방에 앉아 초점 잃은 눈으로 허망한 저편만을 바라보았다.
검게 물든 창이 푸르게 물들었다.
달이 뜬 모양이다.
차갑게 일어난 달빛이 그의 어깨와 머리를 적시고, 서탁을 향해 살며시 흘러갔다.
-거기 누구 있느냐?
서탁 위로 한 줄기 힘찬 글귀가 떠올랐다.
“은…… 룡?”
거침없이 써내려간 글.
은룡의 글씨이었다.
형운은 은룡의 글에서 그리움을 느꼈다.
은룡의 사내다운 패기가 돌아가신 그분을 떠올리게 하였다.
그는 붓을 들었다.
붓을 쥔 느낌이 낯설다.
대체 얼마 만에 붓을 든 것일까.
한참을 망설이다, 간신히 몇 마디를 적었다.
-나…… 여기 있다.
힘겹게 글을 마친 형운의 미간은 어지럽게 구겨져 있었다.
이번에도 그의 글은 사라지지 않았다.
글이 사라지지 않음은 상대에게 전해지지 않음을 뜻하니.
아니나 다를까.
은룡의 혼잣말이 이어졌다.
-이번에 금강산으로 유람을 가게 되었다. 당분간 그곳에 머무를 계획이다. 이번 기회에 넓은 세상을 보게 된다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거리는구나. 다만, 그동안 너희를 만나지 못할지도 모르니 참으로 애석하구나.
-난 아직 너희를 만나게 한 매개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은백, 널 처음 만난 날. 파도처럼 내 방으로 밀려 들어온 밤안개인지, 아니면 저 푸른 달빛의 조화인지. 그도 아니면 서탁의 장난인지.
-…….
-혹시나 하는 심경으로 작은 서탁을 챙겨간다.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이 서탁을 가져갈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이 서탁은 지나치게 크고 무겁구나. 머나먼 여행길이라 어쩔 수 없이 이 서탁과 같은 날 같은 나무로 만들었다는 작은 서탁을 대신 가져가기로 하였다. 만약, 너희를 만나게 한 신묘한 힘이 이 서탁에 깃들어 있다면, 그곳에서도 너희를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
-아! 지금 내가 쓰는 서탁은 아들에게 건네주기로 하였다. 나 없이 쓸쓸하게 혼자 있을 서탁이 걱정되었거든. 하하. 솔직히 말하마. 너희가 걱정되었다. 이 좁은 서탁에 갇혀 있으니, 얼마나 갑갑하겠느냐? 텅 빈 방에 홀로 두면 무척 심심할 것 같아, 말벗이라도 하라고 아들 녀석에게 넘긴 것이다.
은룡의 말에 형운은 마른 웃음을 내비쳤다.
“쓸데없는 걱정이다.”
형운은 제 마음을 서탁에 써내려갔다.
하지만 이번에도 은룡은 그의 글을 읽지 못했다.
출구도 입구도 찾을 수 없는 갑갑한 동굴에 갇혀 버린 것만 같았다.
답답한 마음에 형운은 서탁에게 버럭 화를 터트렸다.
“왜 이러는 것이냐? 대체 왜? 너마저 날 힘들고 어렵게 만드는 것이냔 말이다!”
끔찍한 현실에 이어 서탁마저 말썽이니.
성화가 치밀어 견딜 수 없었다.
그사이, 은룡의 혼잣말이 계속되고 있었다.
-내 아들 녀석에 대해 내가 말했던가. 이런 말 하면 팔불출이라 하겠지만, 어쩔 수 없다. 내 아들, 천하의 신동이니. 내내 울기만 하던 녀석이 두 살 때부터 글을 읽고 세상의 이치를 논했단다. 이젠 제법 글도 쓸 줄 알더구나. 하는 행실이 나보단 제 조부를 많이 닮아 조금 서운하지만, 이따금 내 어릴 적 하던 행동도 보이니, 참으로 신통방통한 녀석이다. 내 자식이라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대견한 녀석이다.
-할 수만 있다면 너희에게 보여주고 싶다.
자식 자랑을 마친 은룡은 잠시 후, 망설인 흔적이 역력한 글을 조심스럽게 내비쳤다.
-어쩌면…… 어쩌면 말이다.
-하늘의 돌보심으로 그 녀석이 서탁을 통해 너희와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만약, 그리된다면. 그런 기적이 일어난다면……. 은백. 그리고 은랑. 내 아이를 부탁한다.
-아들에게 내 서탁을 물려준 대신 내 방엔 다른 서탁을 준비해 두었다. 이 서탁은 아무래도 너무 많이 사용하여 귀기가 떨어진 모양이다. 영 신통치 않구나. 새 물건을 들이면 생생했던 시절처럼 너희와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창고를 뒤져보니 결이 같은 서탁이 하나 더 있더구나. 아마도 같은 나무로 만들어진 물건인 모양이다.
“서탁이 그렇게 소중하다면 자식에게 물려주지 말고 네가 가지고 있어야지.”
마른 웃음을 짓던 형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들에게 서탁을 물려줄 생각이라는 대목이 마음에 걸렸다.
그러고 보니 이 서탁이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더라.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것을 보니, 무척 어린 시절부터였으리라.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고풍스러운 서탁의 원주인이 아바마마시라는 점이었다.
-창고를 관리하는 노인에게서 한 가지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쓰던 서탁 말이다. 너희와 대화한 그 서탁. 그 물건이 이 나라가 처음 세워졌을 때 만들어진 물건이라 하는구나.
-왕의 서탁, 세자의 서탁, 그리고 여행 중에 쓸 가볍게 만든 서탁. 이렇게 세 개를 만든 모양이다.
-내 조부이신 숙종대왕까지. 대대로 왕과 왕세자들이 사용한 모양인데, 아바마마께오선 서탁을 사용하지 않으신 듯하구나. 이 나라의 찬란한 시절을 이끄셨던 위대한 왕들께서 내가 쓰던 서탁과 같은 서탁을 사용하였다 하니, 괜스레 가슴이 두근거리는구나.
“설마…….”
형운의 두 눈이 커졌다.
선왕들께서 사용하신 왕의 서탁.
이레의 할아버지들.
그 할아버지들에게 가르침을 받은 이레가 궁중 예법에 해박한 것이 과연 우연일까?
어쩌면…….
어쩌면 나와 이레처럼…….
서탁의 할아버지들도 백귀가 아니라, 살아 계신 것은 아닐까?
은룡과 나의 시간이 다르듯, 시공을 넘어, 서로 다른 시간을 사는 왕들이 아닐까?
충격과 전율이 형운을 덮쳤다.
그 사이, 은룡의 다음 글이 떠올랐다.
-은랑, 은백. 너희 잘 지내고 있느냐?
잠깐 사이 은룡은 적지 않은 시간을 보낸 모양이었다.
-아느냐? 세상은 참으로 넓구나. 조선 땅도 크고, 여러 종류의 다양한 사람으로 넘쳐난다 생각하였는데, 우물 안 개구리였다. 천하가 이토록 광대하며 세상 문물이 이처럼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니. 머리나 식히려는 심산으로 계획한 유람으로 큰 깨달음을 얻는구나.
-한편으론 근심도 되었다. 천하는 달리는 말처럼 빠르게 변하는데, 내 나라 내 조국은 법도와 예법, 사상과 원론에 묶여 뒷걸음질만 거듭하고 있으니.
-지금이라도 변화해야 한다. 차곡차곡 쌓인 눈이 언젠가 산사태가 되듯이, 조금씩 거듭된 변화의 물결이 언젠가 고요하게 잠든 내 나라를 삼키지는 않을까 걱정이구나. 유람을 마치고 궁으로 돌아가면, 진지하게 방법을 모색해야겠다.
-다만, 저희만의 욕심으로 꽉 막힌 신료들을 어찌 설득하여야 할지. 그리고 그분. 내게는 유난히 어렵고 두려운 그분께선……. 아아, 참으로 어렵고 힘들구나.
-그래도 해야겠지. 부딪히고 다치고 괴롭더라도 맞서고 설득해야겠지. 옛것에 잠식되어 시류의 거친 물살에 뒤처지는 내 나라, 내 백성을 모른 척할 수 없으니.
-오늘은 좋은 일이 많았다. 집채만 한 범을 잡았고, 마음 맞는 친우도 만났으니 말이다. 나이를 떠나 참으로 선한 사람이다. 거금도 선뜻 내주는 걸 보니, 속없이 좋은 사람임이 분명하다.
-그에게 우정의 증표로 내 서탁을 건네주었다. 여행용 서탁 말이다. 유람하는 동안에도 혹여나 너희와 만날 수 있을까 싶어 매번 챙겼는데, 아무래도 고장 난 모양이다. 한 번도 너희를 만나게 해주지 않는 걸 보니 말이다.
큰 포부로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던 세자는 어느새 한 아이의 아비가 되었다.
-참, 내 아이는 만나보았느냐? 그 녀석의 나이도 올해로 열 살이 되었구나. 혹, 만나보았으면 날 보아서라도 잘 대해 주려무나. 엄한 할아버지와 갑갑한 예법에 갇혀 제 마음대로 울지도 못하는 아이다. 지켜줄 아비도 늘 바깥을 떠돌고 있으니, 그 어리고 미숙한 녀석을 누가 지켜줄지 걱정이구나.
“열 살이라고?”
지난번 대화에서 아이가 아직 어리다는 말을 들었다.
그게 고작 몇 개월 전의 일이다.
한데, 그 사이 은룡의 시간은 몇 년이나 훌쩍 흘러간 것이다.
곰곰 생각하니, 예전에도 이런 경우가 있었다.
난 고작 며칠 만에 만나는 것임에도 정작 은룡은 적어도 몇 개월은 못 본 사람처럼 크게 반기곤 하였다.
때로는 엉뚱한 이야기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예전에 한 대화를 전혀 기억하지 못하거나 하는 일도 잦았다.
“아무래도 은룡의 시간은 뒤죽박죽 섞인 모양이구나.”
형운은 그 이유가 은룡이 창고에서 찾았다는 새로운 서탁 때문이 아닐까 짐작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의 짐작일 뿐.
정확한 연유는 알 길이 없었다.
-요즘 이런저런 일로 외유와 유람이 잦아 그 녀석을 한동안 보지 않았구나. 이러다 나중에 날 몰라보면 어쩌지? 여유가 되면, 너희가 그 아이의 말벗이라도 해주었으면 좋겠구나.
-오늘은 그 녀석의 험담이나 하련다. 요즘 그 녀석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지곤 한다. 이젠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마저 서먹하구나. 지나친 예법과 주위의 강요가 녀석의 얼굴에서 웃음을 앗아간 것만 같아 마음 아프다. 대체 아바마마께선 어린 세손에게 무엇을 바라시는 것인지. 이럴 땐 어찌해야 할까. 그 녀석에게 무어라 말을 붙여야 할지 알 수 없구나. 너희가 방도를 알려다오. 이럴 땐 어찌하면 좋을지.
“내게 물어본들 뾰족한 방도가 있겠느냐?”
변해가는 자식의 모습에 고민하는 은룡의 글에 형운은 가슴 한편이 시려 왔다.
그렇게 덧없이 흘러가던 은룡의 이야기.
-그런데 내가 이야기했던가? 내 아이 태어나던 날, 엄청난 꿈을 꾸었다는 이야기 말이다.
“대체 얼마나 대단한 태몽인데, 그리 너스레를 떠느냐?”
쓸쓸하게 웃던 형운은 이어진 은룡이 말에 돌처럼 굳어버리고 말았다.
-여의주를 쥔 용이 하늘도 승천하는 꿈이었다. 그 꿈이 얼마나 생생하였던지. 내 일어나기 무섭게 서고의 커다란 벽에 그림까지 그렸느니라.
용이 승천하는 꿈.
커다란 벽에 그린 그림.
내내 무심했던 형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설마…….
“아바마마?”
형운은 서탁 위에 떠오른 글씨를 살피고 또 살폈다.
그리고 확신하였다.
아바마마시다.
서탁 너머의 백귀.
형운을 놀리고 짓궂게 장난치던 은룡.
그의 정체, 다름 아닌 자신이 아버지였다.
은룡이 아바마마임을 확신한 형운은 다급하게 붓을 들었다.
-아바마마. 소자이옵니다. 세손이옵니다. 꼭 드릴 말씀이 있사옵니다.
막고 싶은 일이 있었다.
반드시 전해야 할 비극이 있었다.
당신의 미래, 서탁 너머 은룡이 앞으로 겪게 될 가슴 아픈 미래.
그러나 필사적으로 적은 형운의 글은 서탁 너머로 전해지지 않았다.
종이를 바꾸고, 먹을 새로 갈고, 붓을 교체해도.
그의 간절한 호소는 끝내 사라지지 않고,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제발, 제발…….”
서탁 위로 형운의 탄식과 절망이 방울져 떨어졌다.
그 좌절의 순간에도 서탁 너머 세자의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언젠가 내 아이가 다스릴 나라는 내가 다스리는 그런 나라와는 달랐으면 좋겠구나.
-내 아이가 진정한 왕이 되길.
-감히 신하가 제 사사로운 욕심을 위해 백성을 이용하지 못하는 나라를 만들고 싶다.
“아바마마!”
-은백, 네가 말했었지. 마음을 표현하지 않으면 알 수 없다고. 돌이켜보니 나는 한 번도 내 아버지에게 내 마음을 표현하지 못했다. 하지만 내 아이에겐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은룡은 멋쩍은 듯 잠시 멈추었다 글을 다시 썼다.
-이 아비가 너를 참으로 자랑스러워하노라고.
“아바마마…….”
-진실로 이 말을 전하고 싶구나. 허허허. 하지만 막상 그 녀석을 보면 엉뚱한 핀잔만 튀어나오니. 이 못된 심보를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구나.
아비의 진심을 서탁을 통해 받은 형운은 끝내 오열하고 말았다.
“제가 잘못하였습니다. 제가 감히 아바마마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였나이다. 그러니 아바마마,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제발…… 제발 제 이야길 들어주십시오.
형운은 서탁을 힘껏 끌어안았다.
이대로 놓아 버리면 영영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서탁 속, 과거의 시간을 사는 아버지.
그분에게 다가올 참극을 알려야 했다.
하지만…….
절실하게 써내려간 그의 글을 서탁은 단 한마디도 전하지 않았다.
어느새 달빛마저 흐려졌다.
더는 아버지의 글도 보이지 않았다.
울며 탄식하던 형운은 슬픔으로 얼룩진 얼굴로 몸을 일으켰다.
이대로 울고만 있을 순 없었다.
아버지의 뜻을 알았으니.
비명에 간 그분의 진심을 이제라도 알았으니.
무엇이라도 해야 했다.
결심을 굳힌 그는 세손궁 밖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
형운이 떠나고 얼마나 지났을까.
구름에 가려진 달이 잠시나마 얼굴을 비추었다.
형운이 적은 글로 빼곡한 종이 위로 은룡의 글이 떠올랐다.
-은백. 은랑. 잘 지내느냐? 요즘은 어찌 지내느냐? 혼인하였다니, 무탈하게 지내느냐? 설마, 싸우고 오해하여 남 보듯 하는 건 아니겠지? 그럴 리 없을 거라 믿는다. 너희 서로 만나 함께하기까지 참으로 많은 일이 있었으니. 백년해로하여도 부족할 만큼 절실하게 사모하였으니.
-만약, 그 시절이 기억나지 않는다면 언제든 내게 물어보아라. 너희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내가 날짜와 시간까지 모조리 기록해두었으니. 지금까지는 비밀로 하였다만, 기실 너희의 대화를 묵묵히 듣고만 있었던 때도 있었다. 하하. 억울하냐? 내가 몰래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에 약이 바짝 오르느냐? 그렇다면 시비라도 걸어봐라. 내 언제나처럼 뻔뻔하게 맞대응해주마.
-은백. 일전에 활쏘기 시합에 관해 말한 적이 있었지. 너와 마음이 맞은 몇 안 되는 이야기라 유난히 선명하게 기억되는구나. 먼저 미안하다는 말을 해야겠다. 당시엔 너의 생각이 옳다 여겼는데, 지금은 변하였다. 적당한 여유를 보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이끄는 사람이 모범이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모시는 사람의 처지에서 보면 작은 빈틈도 없는 완벽한 군주는 참으로 갑갑할 것만 같다.
-하하. 안다. 네 마음. 날 배신자라 욕하고 싶겠지? 나도 내 생각이 이렇게 바뀔 줄은 몰랐구나. 내 결심과 다짐은 영원히 변치 않을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세월은 이길 수 없는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그 일이 벌써 까마득한 옛일이로구나. 무척 오래전의 일이었어. 무척.
-오늘 유난히 큰비가 내리는구나. 덕분에 술 한잔하였다. 그래도 적적함이 가시지 않는구나. 무정한 녀석들. 어찌 그 긴 시간, 허튼소리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있느냐? 너희는 내가 그립지도 않으냐?
은룡의 글에서 아련한 그리움이 한껏 묻어나왔다.
-난…… 그립구나. 너희가 그립고 또 그립구나.
***
아침이 멀지 않은 시각.
빈궁의 처소엔 여전히 불이 꺼지지 않았다.
고운 문풍지 위로 이레의 그림자가 어려 있었다.
형운은 갑작스러운 세손의 등장에 놀라는 내관과 궁녀들을 뒤로 한 채, 이레의 처소로 뛰어들었다.
“저, 저하…….”
“그분들을, 그분들을 만나게 해주시오.”
“그분들이라니요?”
놀라는 이레에게 형운은 비장한 결심을 뽑았다.
“그대의 할아버지들…… 스스로를 왕이라 칭하던 그분들. 그분들께 간절히 청하고 싶은 말이 있소.”
간절한 소망이 형운의 음성을 타고 이레에게 전해졌다.
이레는 조용히 서탁 앞으로 형운을 안내했다.
그녀의 서탁을 본 형운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의 것보다 조금 작은 크기.
접을 수 있는 다리.
틀림없이 유람할 때마다 챙겨갔다는 여행용 서탁임이 분명하였다.
금강산.
그곳에서 범을 잡으며 만난 친우에게 징표로 주었다는 그 서탁.
금강산에서 떨어져 나간 아버지의 흔적이 먼 곳을 돌고 돌아 다시 궁으로 돌아왔다, 내 여인과 함께.
“준비되었습니다.”
이레는 정성 들여 먹을 갈고 가장 고운 붓끝에 먹을 묵혔다.
그러곤 붓을 형운에에게 건넸다.
형운은 거침없이 글을 써내려갔다.
-처음으로 인사드립니다. 은백이라 하옵니다.
비장한 마음으로 써 내려갔지만, 기이하게도 그의 글은 사라지지 않았다.
시간이 너무 늦은 것이려나?
아니면 자격이 없다 생각하는 걸까.
아무리 기다려도 서탁은 요지부동이었다.
형운의 가슴으로 헛헛한 바람이 메아리쳤다.
“아무래도 아니 되는 모양이다.”
낙심하여 붓을 놓는 그의 손을 이레가 가만히 그러잡았다.
“저와 함께하면 어떨는지요?”
“함께?”
“제가 저하를 돕겠습니다.”
이레는 열의를 잃은 세자의 손을 일으켜 다시 붓을 잡게 했다.
“무얼 쓰면 좋을지 모르겠구나.”
“무엇이든 괜찮습니다. 그분들께선 다 받아주실 것입니다.”
이레의 위로에 형운은 용기를 얻었다.
담담하게 풀어놓은 그의 사연은 이윽고 가슴 깊은 곳에 담아둔 비통하고 참담한 사정과 심정까지 한 점 남김없이 내비쳤다.
아비 잃은 아픔과 슬픔.
그럼에도 복수는 꿈도 꿀 수 없는 암담한 현실까지.
하지만 마지막 한 방울의 감정까지 모조리 쏟아부었음에도, 서탁에 새겨진 글들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아무리 기다려도 소식이 없자, 형운은 쓸쓸히 고개를 저었다.
“나는 자격이 없는 모양이다.”
“저하, 보십시오.”
이레가 서탁을 가리켰다.
스르르.
그가 써내려간 글들이 새벽 안개처럼 흩어졌다.
형운은 마른침을 삼키며 서탁을 지켜보았다.
마침내 전해졌다.
과연 그분들께서…….
이레의 할아버지들께서 어떤 말씀을 하실까?
철부지라 욕할까?
무능하다 혼내실까.
그도 아니면 엉뚱한 녀석의 출현에 당황할까.
드디어 서탁이 형운의 물음에 답을 내놓았다.
-너…….
휘갈겨 쓴 한마디.
악이었다.
곧이어 악의 엉뚱한 물음이 서탁 위에 떠올랐다.
-너, 욕 좀 할 줄 아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