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택-왕들의 향연-113화 (113/215)

#113. 보고 싶구나(思慕)

밤이 찾아왔다.

먹물을 끼얹은 듯, 검게 물든 밤하늘에 달과 별이 가득했다.

일과를 마친 이레는 서탁 앞에 앉았다.

‘오늘은 어느 분께서 계시려나.’

종이를 서탁 위에 펼치기 무섭게 검은 글씨들이 번져갔다.

-터무니없는 소리.

-나도 그리 생각한다.

경쟁이라도 하듯 대화를 이어나가는 두 필체.

은룡과 형운이었다.

그들은 이레가 오기 한참 전부터 대화를 시작한 모양이었다.

“두 분이 서로 맞장구치며 대화하다니. 신기한 일이네.”

은백과 은룡.

두 사람은 물과 기름 같았다.

걸핏하면 다투고 논쟁하길 즐기니.

절대 하나로 섞일 수 없는 관계였다.

한데, 오늘은 무슨 이유에선지 절친한 친우처럼 의기투합하였다.

-시합하였으면 당연히 최선을 다하여야지. 여유를 두어서야 온전한 시합이라 할 수 있을까?

흥분한 은룡의 글.

“낮에 있었던 활쏘기 시합 이야기로구나.”

세자 저하께서 불쑥 제안한 활쏘기 시합.

비록, 시합은 형운의 승리로 돌아갔지만, 세자의 탐탁지 않은 반응 탓에 뒷맛이 개운하지 못했다.

형운은 그 일을 은룡에게 의논했고, 소식을 접해 들은 은룡은 마치 제가 당한 일처럼 흥분하였다.

-아랫사람들을 위해 여유를 두어야 한다?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로군. 심지어 마지막 한 발은 방해까지 하였단 말이냐? 그거야말로 경쟁하는 사람을 농락하는 행위가 아닌가?

-나도 그리 생각한다.

-은백. 너와는 매번 생각이 서로 달라 충돌하고 맞섰지만, 이번만큼은 동의하지 않을 수 없구나.

-아무래도 그동안 널 오해한 모양이다.

-무슨 오해?

-한동안은 네가 아바마마와 같은 사람이 아닐까 생각하였지.

-푸하하.

은룡이 크게 웃었다.

-그렇다면 네가 내 아들이 되는 셈이냐? 오냐, 앞으로 날 아비라 부르거라.

-오해라 하였다.

-아쉽지만, 내게 너처럼 큰 아이는 없다. 내 진짜 아이는 아직 어리거든. 대체 어찌하면 그처럼 해괴한 생각을 할 수 있단 말이냐?

-네 말과 행동이…….

-내 말과 행동?

-아니다. 쓸데없는 오해였을 뿐이다.

형운은 뒷말을 얼버무렸지만, 세자와 은룡의 관계를 의심한 사람은 그 혼자만이 아니었다.

“은백께서도 그런 생각을 하셨구나.”

이레 역시 같은 생각을 품은 적이 있었다.

그처럼 생각한 이유는 은룡과 서탁에 관련한 몇 가지 기묘한 규칙 때문이었다.

본래 서탁을 통해 만날 수 있는 백귀에는 일정한 규칙이 있었다.

맑은 달밤엔 서탁을 통해 할아버지들을 만날 수 있었고, 흐리고 달무리 진 날엔 형운을 만날 수 있었다.

그와 같은 규칙이 서탁을 궁으로 옮기면 반대가 되었다.

맑은 날엔 형운을 만날 수 있었고, 흐린 날엔 할아버지들이 이레를 반겼다.

‘장소에 따라, 서탁을 통해 만날 수 있는 분의 조건이 달라진다.’

언뜻 무질서하게 보였지만 서탁에 나름의 규칙이 있음이 분명했다.

지금까지 이레가 파악한 규칙은 서탁의 위치와 그날의 날씨 등이었다.

그러한 조건으로 미뤄보건대, 은룡은 형운처럼 궁에서 생활하는 사람일 가능성이 농후했다.

은룡은 서탁이 성안에 있을 때. 그리고 맑은 달밤에만 만날 수 있었다.

특별히 세자 저하를 떠올린 것은 그의 글에서 느껴지는 화통하고 사내다운 기질 때문이었다.

강인하고 털털한 성품은 절로 세자 저하를 떠올리게 하였다.

은룡 스스로도 자신을 세자라 하였다.

‘하지만 그럴 리 없지.’

은룡은 세자 저하가 아니다.

이레는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은룡의 기질은 세자 저하와 몹시 비슷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었다.

연륜.

세자 저하께는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여유와 품격이 있다.

반면, 은룡에겐 그런 느긋함이 보이지 않았다.

언뜻언뜻 보이는 성급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언제나 태연자약한 세자 저하와는 확연히 달랐다.

자주 흥분하고, 때론 지나치게 차갑게 식는.

젊고 혈기왕성하며 서툰 젊은이 특유의 반응과 모습들.

그 모습은 마치…….

‘은백과 닮았다.’

비슷한 또래의 오라버니를 둔 이레이기에 확연하게 그 차이를 느낄 수 있었다.

은룡은 젊다.

아마도 은백과 나이 차이도 크지 않으리라.

‘그럼, 대체 은룡은 누구일까?’

은룡의 정체를 두고 이레가 고개를 갸웃할 때였다.

-사내대장부의 그릇이 어찌 그리 작을까?

-무어라? 이 일이 사내대장부의 그릇과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은룡과 은백의 거친 설전이 서탁을 가로질렀다.

뜨거운 의기를 나누던 그들은 어느새 예전처럼 치열하게 부딪히고 있었다.

-하면? 해야 할 일과가 있다고 은랑을 그곳에 방치하고 너 혼자 돌아온 것이 사내가 택할 선택이란 말이냐?

-반드시 해야 할 일과가 있다 하지 않았느냐?

-그래도 그런 경우엔 융통성을 발휘했어야지.

-그놈의 융통성. 그놈의 여유. 한 번이 두 번 되고, 두 번이 열 번 되며, 열 번이 일생이 되는 법이다.

-어째 네가 하는 말이 평소 내 아바마마께서 하시던 말과 같구나. 너 나이가 몇이라 했지?

-애늙은이라 놀리는 게냐?

두 사람의 분위기가 급격하게 달아올랐다.

더는 지켜볼 수 없었던 이레가 나섰다.

-그만들 하시지요.

은룡과 형운이 싸우다 말고 그녀를 반갑게 맞았다.

-은랑 왔느냐? 마침 잘 왔다. 안 그래도 지금 일밖에 모르는 무심하고 무정한 어떤 녀석을 엄히 꾸짖고 있었던 중이니라.

-은랑, 아무 일 없었느냐? 내가 떠난 후에 별일은 없었고?

-허허, 그리 걱정할 것이면 처음부터 떠나지 않았어야지.

-그만한 사정이 있었다.

-제 여인을 두고 떠날 만한 사정이란 것이 대체 무엇이냐.

-네가 무얼 안다고.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많이 알 것이다.

좀처럼 기세를 꺾지 않는 필전(筆戰)을 보며 이레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격의 없이, 허물없이 싸우는 모습.

어찌 보면 형제 같기도 하였고, 때론 친구 같기도 하였다.

또 다르게 보면 세자 저하와 세손을 닮은 부자(父子)처럼 보일 때도 있었다.

저리 싸움을 벌일 때는 두 번 다시 보지 않을 사이 같았다.

그러나 막상 다시 만날 때면 서로 꼬박꼬박 대꾸하니.

두 사내의 마음을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두 분, 그러다 미운 정, 고운 정 다 들겠습니다.

이레의 소감에 두 사내는 펄쩍 뛰었다.

-어림없다.

완강한 은룡의 거부.

지지 않으려는 형운의 글도 이어졌다.

-상상하기도 싫구나.

이레는 저도 모르게 풋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그런 사이 형운의 반듯한 글씨가 서책을 메웠다.

-미안하구나.

-네?

-오늘 너를 두고 홀로 와서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럼 말씀 마십시오. 그곳에서 무얼 보았는지 알게 되면 속상하실지도 모릅니다.

-무얼 보았는데?

-비밀입니다.

-비밀?

-그런 것이 있습니다.

-대체 무엇인데 말을 못 하느냐? 말해봐라, 무엇이냐.

형운의 추궁에 이레는 서둘러 화제를 전환했다.

-그나저나, 은룡께선 어찌 아무 말씀이 없으십니까?

-그러고 보니, 그 시끄러운 잡귀가 조용하구나.

이레는 자신과 형운의 대화만을 보여주는 서탁을 내려다보았다.

때마침 내내 침묵하던 은룡의 글이 떠올랐다.

-두 사람, 왜 아무 말이 없느냐?

은룡의 엉뚱한 글.

이레는 고개를 갸웃했다.

-은룡,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저희 여기 있습니다.

-어허, 답답하구나. 다들 어디 갔느냐?

-은룡, 제 글이 아니 보이십니까?

-이거 참, 딱한 노릇이다. 둘이 무슨 작당을 하기에 말이 없어?

한탄하는 은룡의 글이 서탁 위에 안개처럼 깔렸다.

-은룡!

이레는 은룡에게 글을 전하기 위해 다시 한번 정성을 들여 글씨를 썼다.

서탁은 그녀의 글을 빠른 속도로 빨아들였다.

그러나 정작 전해지지 않았다.

-연계야, 은랑. 너희 어디 갔느냐?

-아무래도 그는 이 글을 못 보는 것 같구나.

형운의 말에 이레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맑았던 하늘 끝으로 잿빛 밤안개가 몰려왔다.

-설마…….

저 밤안개 때문인가?

-은백께선 제 글이 보이십니까?

-잘 보이느니.

-그럼 은룡에게만 전해지지 않나 봅니다.

-그런가 보구나. 우리는 그 잡귀의 글을 볼 수 있으나, 그는 아무것도 안 보이는 모양이다.

-은룡께 작별 인사도 못 했는데, 아쉽습니다.

-오늘은 그만하고 다음을 기약하자꾸나.

멀리서 자시를 알리는 북소리가 들려왔다.

어느새 시간이 이리되다니.

아쉽지만 새날을 위해 이만 휴식을 취할 시간이었다.

-은백, 편히 주무십시오.

-너도 무탈한 밤 보내거라.

마지막 인사를 끝으로 이레는 서탁을 물렸다.

준비된 이불 속으로 파고드니 따뜻한 온기가 발끝으로 짜르르 전해졌다.

곤한 하루였는지 베개에 머리가 닿자마자 수마가 그녀를 잡아당겼다.

뒤척이던 움직임이 뜸해지고 고른 숨소리가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고요하던 서탁에 작은 변화가 일어났다.

바람도 없건만, 서탁 위의 종이가 파르르 나부꼈다.

잠시 후.

-요즘은 어찌 통 소식이 없느냐? 지난번 대화 이후로 몇 달이 흘렀는데도 통 이야기가 없구나.

서탁에 은룡의 안부 글이 떠올랐다.

그러나 이레와 은백, 두 사람은 깊은 잠에 빠져 답을 하지 못했다.

***

-오늘은 날이 꽤 춥구나.

“날이 춥다니?”

여름의 초입이라.

아침저녁으로 부는 바람결이 부쩍 훈훈하였다.

이레는 은룡의 글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거긴 어떤 계절입니까?

이레의 물음은 사라지지 않았다.

대신 은룡의 글이 다시 새겨졌다.

-찬바람에 병이라도 난 것이냐? 그런 것이 아니면, 정말 성불이라도 한 것이야? 요즘은 어찌 이리 조용하더냐?

-어찌하면 은룡이 제 글을 볼 수 있을까요.

답답함이 깊어졌다.

이레는 열심히 붓을 움직였다.

종이를 바꾸어도 보았다.

하지만 무심한 서탁은 여전히 은룡에게 통하는 길을 내어주지 않았다.

***

-나뭇가지마다 파릇한 기운이 솟구치는구나.

되돌아오는 답이 없음에도 은룡은 꾸준히 자신이 일상을 전했다.

그는 기다리는 것이리라.

서탁 속의 친구들을…….

이레는 미안하고 안타까운 눈길로 서탁을 바라보았다.

-연계야, 내 사과하마. 앞으로 널 연계라고 부르지 않으마. 그러니 점이라도 하나 찍어다오.

-그깟 점, 백이든 천이든 얼마든지 찍어주마.

형운의 글이 떠올랐다.

하지만 이번에도 그의 글은 은룡에게 전해지지 않았다.

-어째 대답이 없느냐?

은룡의 글에 기어이 성화가 깃들었다.

-연계야, 이 치사한 녀석. 사내의 속이 좁쌀만 하니, 어디다 쓰겠느냐. 사과한 거 취소다.

이레는 한숨을 흘렸다.

-은백. 아무래도 은룡은 오늘도 우리의 글을 보지 못하는 모양입니다.

-그런가 보구나.

-왜 그런 걸까요?

-모르겠구나. 어찌하여 서탁이 이러는지…….

전하지 못한 진심이 서탁 위에 고여 작은 웅덩이를 만들었다.

형운과 이레는 서탁 저편에서 전해오는 은룡의 긴 한숨과 탄식을 지켜보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

-요즘 하루하루가 더디게 흐르는구나. 너희와 만나지 못한 것이 어느덧 몇 년이 지났구나. 그사이 그 여자아이도 많이 자란 것 같더구나. 삐뚤빼뚤, 제멋대로이던 글씨도 제법 귀한 태를 갖추니. 보는 내가 다 흐뭇하다. 다만, 그쪽 이야기에 끼어들지 못해 안타깝구나.

***

-그거 아느냐? 하나둘, 늘어가던 서탁 속 늙은 백귀의 수가 어느덧 넷이 되었단다.

“서탁 속 늙은 백귀라면…….”

은룡께서도 할아버지들을 아는가 보다.

반가운 마음에 이레는 입가에 미소 지었다.

-서탁이 보여주는 세상이 참으로 재밌구나. 그동안 아이도 많이 자랐다. 게다가 어린 시절부터 노옹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인 덕에 그 지혜로움이 남다르니. 필시 특별한 운명을 살아갈 듯하구나.

이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은룡의 짐작대로 그녀는 특별한 삶을 살기 시작했다.

-매번 글이 사라지는 것을 보니, 누군가 읽는 것이 분명한데. 은백, 은랑. 너희, 거기 있는 것이 맞느냐? 너희를 기다리느라 서탁을 보고 있노라니, 그 아이 자라는 것도 빠짐없이 지켜보게 되었구나. 그 덕에 노옹들의 가르침도 얻게 되었으니.

이레는 숨죽여 은룡의 다음 글을 기다렸다.

-어쩌면 나는 내가 만든 세상 속에 갇혀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구나. 내가 만든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나를 발견하였다. 지금의 세상을 깨지 못하면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지 못하거늘. 하지만 나는 여전히 어렵구나.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는 것이, 나와 다른 뜻을 지닌 사람과 마주하는 것이.

-저도 그렇습니다, 은룡.

전해지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다.

그래도 이레는 은룡과의 대화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거 아느냐? 내게 가장 어려운 것은 내 아버지다. 나는 그분 앞에만 서면 늘 작아지고, 한심해지며, 초라해지니. 나는 그분께 늘 자랑스러운 아들이 되고 싶구나.

***

-은랑, 은백. 오늘 참으로 재미있는 광경을 보았느니.

무슨 까닭인지, 은룡은 상당히 흥분한 모습이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느냐? 그래 봤자 별것 아니겠지.

은룡과의 대화를 포기하지 않은 사람은 이레만이 아니었다.

형운 역시도 틈틈이 은룡의 이야기에 대꾸했다.

비록 내색하지 않았지만, 이레는 알고 있었다.

형운이 은룡과 투닥거리던 시간을 그리워하고 있음을…….

언젠가 다시 은룡과 닿게 되길 형운도 염원하고 있었다.

-서탁에 또 다른 백귀가 나타났다. 그 아이가 백귀에게 별칭을 붙여주었는데, 그게 무엇인 줄 아느냐? 불손이다, 불손. 푸하하하.

“이건…….”

이레는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은백, 보셨습니까?

-나도 보았다.

-은룡께서 하는 얘기 속의 두 사람, 우리 아닙니까?

-그런 것 같구나. 그런데 무언가 이상하다. 저 말이 사실이라면…….

-네. 은룡의 시간은 지금 우리가 사는 시간과 다른 흐름으로 흐르는 듯합니다.

두 사람의 대화가 사이사이 은룡의 글이 끼어들었다.

-오늘 불손이라는 백귀와 그 아이가 만나기로 약조하였다. 참으로 흥미진진하지 않으냐. 백귀와의 만남을 약조하다니. 어찌 그리 순진한 생각을 하는 것인지.

-…….

-아니, 아니다. 서탁의 백귀 모두가 하나같이 살아 있음을 주장하니. 어쩌면 실제로 존재하는 누군가는 아닐까. 나처럼…….

-저희 모두 살아 있습니다, 은룡.

이레의 대답이 허무하게 부서졌다.

-그래,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지만…… 서탁 속 아이가 말하는 한양은 내가 사는 이곳과는 미묘하게 다르구나. 혹여 그 아이가 내가 사는 세상이 아닌 다른 세상을 사는 것은 아닐까. 혹여 내가 살날을 미리 살아가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 그 아이는 어떤 시간을 살아가는 것일까?

***

-가끔은 그런 생각도 한단다. 너희가 백귀가 아니고 어느 먼 곳에 사는 것은 아닐까 하고 말이다. 그랬으면 좋겠구나. 만일 그렇다면 언제라고 기약할 수는 없어도 만날 수 있을 거란 막연한 희망 정도는 품을 수 있을 테니. 우리 서로 만나면 어떠할까? 신분도 나이도 성별도 다르지만, 이곳에서처럼 허물없이 대화할 수 있을까?

-그럴 것입니다.

이레가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글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읽기라도 한 듯 은룡이 대답했다.

-그래. 그럴 테지. 그깟 지위와 나이가 무에 대수일까. 이곳에서처럼 그저 은룡으로 은백, 은랑으로 대하면 그만인 것을. 그날이 왔으면 좋겠다. 그날이 꼭 왔으면 좋겠구나…….

그리움이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안타까운 미련이 좀처럼 서탁을 떠나지 못했다.

마지막인 듯 은룡의 글이 점점이 맺혔다.

-보고 싶다.

이레는 물끄러미 서탁에 시선을 고정하였다.

-은백, 은랑…….

읊조리는 듯 은룡의 글이 이어졌다.

-너희가 보고 싶구나.

***

임오년, 여름.

왕세자 이선(李宣)이 졸(卒)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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