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 대견하구나
“아바마마.”
봄바람을 가르며 빠른 걸음으로 다가온 형운은 세자에게 예를 올렸다.
그러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이레의 눈가에 맺힌 습윤한 물기를 본 까닭이다.
무슨 일일까?
어떤 연유로 이레의 두 눈이 빨갛게 달아오른 것일까?
아바마마께서 무어라 하셨기에 저 사람의 표정이 저리 아픈 것이려나.
그의 시선은 온통 이레에게 향해 있었다.
세자가 형운의 상념을 깨트리며 물었다.
“세손이 이곳엔 무슨 일인가?”
“근처를 지나던 중이었나이다. 우연히 아바마마께서 빈궁과 함께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반가운 마음에 달려왔나이다.”
뻔한 핑계.
세자의 입꼬리가 실룩거렸다.
“반가워서 달려온 녀석의 표정이 어이 그리 심각한 게냐?”
형운은 세자의 물음에 답하는 대신 이레을 낯빛을 살피며 질문을 던졌다.
“눈이 붉구려. 무슨 일이라도 있었소?”
그는 세자와 이레의 사이로 파고들었다.
아버지의 범 같은 시선에서 제 여인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세손의 엉뚱한 오해.
눈치 빠른 이레가 그 속마음을 놓칠 리 없었다.
“아닙니다. 이것은…….”
오해를 풀기 위해 그녀는 설명을 덧붙였다.
슬프고 억울해서 운 게 아니라, 기쁘고 고마워서…….
세자 저하께서 자신의 진심을 헤아려주고, 알아주어 기뻐 울었다 말해주어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말을 끝맺음할 수 없었다.
세자가 불쑥 다른 이야기를 꺼냈었다.
“오랜만에 네 얼굴을 보는구나. 어떠냐? 날도 좋으니 활쏘기 시합이나 하자꾸나.”
“…….”
형운은 쉬이 대답하지 않았다.
잔뜩 구겨진 그의 미간이 불편한 심기를 대변하는 듯했다.
그러나 세자는 세손의 아버지였다.
고집 센 아들을 어찌 대해야 할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네가 이긴다면 당분간은 세손빈을 울리지 않으마.”
세자가 드리운 미끼를 형운이 덥석 물었다.
“따르겠나이다.”
형운은 너른 보폭으로 앞장서는 세자의 뒤를 쫓았다.
둘의 뒷모습을 이레가 불안한 눈빛으로 응시했다.
***
세자는 이레와 형운을 이끌고 후원 깊은 곳으로 향했다.
좁은 언덕길을 오르자 울창한 수풀에 둘러싸인 작은 정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능허정’이라는 현판이 걸린 정자.
언젠가 이레와 세자가 처음 얼굴을 마주했던 그곳이었다.
“활쏘기하자 하시며 어찌 이곳으로 오십니까?”
형운의 따지는 듯한 물음에 세자가 답했다.
“평범한 시합은 따분하지 않으냐? 오늘은 색다르게 즐겨보자꾸나.”
세자는 호위 무관에게 활을 가져오라 명했다.
잠시 후.
정자에 앉은 이레가 지켜보는 가운데, 세자와 세손의 시합이 시작되었다.
표적은 120보 밖의 소나무에 걸어둔 두 개의 나무판자.
과녁이 워낙 작은 데다 풀과 나무가 시야를 방해하였다.
평소의 시합보다 훨씬 까다롭고 어려웠다.
“한 발을 쏘면 반드시 다섯 걸음을 걸어야 한다.”
말과 함께 세자가 먼저 활을 들었다.
부릅뜬 눈으로 과녁을 노려보던 세자는 걸음을 옮기며 벼락처럼 열 발의 화살을 쏘았다.
무섭도록 빠른 연사(燕射).
세자가 쏜 열 발의 화살 중 여덟 발이 과녁의 중앙에 명중하였고, 나머지 두 발은 빗나갔다.
세손의 차례가 되었다.
형운은 세자보다 신중하기 활을 쏘았다.
느리게 걸으며 한 발 한 발 정성을 다하여 과녁을 조준했다.
세자처럼 빠르지는 않았지만, 대신 실수는 전혀 없었다.
아홉 발의 화살을 쏘는 동안 단 한 발도 어긋남이 없었다.
마지막 열 번째 화살을 시위에 메기고, 호흡을 가다듬을 때였다.
“적당히 하고 놔주어라. 화살 몇 대 쏘는데 해가 저물겠구나.”
세자의 지청구가 날아들었다.
마침 화살을 쏘기 직전이라.
그만 과녁을 조준하던 집중이 틀어지고 말았다.
결국, 형운의 화살은 과녁을 크게 벗어나고 말았다.
내관이 세자의 과녁과 형운의 과녁을 가져왔다.
세자는 여덟 발, 세손인 형운은 아홉 발의 화살이 나무 방패에 꽂혀 있었다.
이로써 세자는 여덟 발, 형운은 아홉 발을 명중하였다.
활쏘기 시합은 형운의 승리로 끝이 났다.
그러나 형운은 표정은 밝지 않았다.
어찌 저러실까?
힐끗, 세손의 얼굴을 살피던 이레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내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내관이 가져온 두 개의 과녁.
하나는 세자의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세손의 것이다.
그중 세자의 과녁.
‘첫발부터 여덟 발째까지는 정확히 과녁의 중앙에 꽂혔다.’
세자가 쏜 여덟 발의 화살은 고작 손바닥 정도 되는 공간에 빼곡하게 모여 있었다.
눈으로 직접 보면서도 믿기지 않을 실력.
그런데…….
이런 실력을 갖춘 분이 나머지 두 발을 전혀 엉뚱한 곳으로 쏘시다니.
‘부러 맞추지 않으셨구나.’
세자가 맞추려 마음만 먹으면 열 발이 아니라 백 발이라도 모두 명중하였을 것이다.
이레가 짐작한 것을 형운 역시 알고 있었다.
형운이 세자에게 물었다.
“어찌하여 두 발의 화살을 허술하게 놓아주신 겁니까?”
“바람이 도와주지 않더구나. 덕분에 네가 이기지 않았느냐?”
“하오면 제 마지막 화살은 무슨 연유로 방해하신 것이옵니까?”
잠시 침묵하던 세자가 입을 열었다.
“뭐든 적당한 선이라는 게 있는 법이다. 지나치게 완벽하면 아랫사람들이 고된 법. 적당히 틈을 보여야 따르는 사람들도 숨을 쉴 게 아니냐.”
아버지의 설명에도 형운의 굳은 얼굴은 좀처럼 펴지지 않았다.
세손이 배운 군주의 도리와 세자께서 말씀하신 군주의 길은 애초 본질이 전혀 달랐다.
군주란 무릇, 완전하고 빈틈이 없어야 한다.
검소하고 공평하며, 도리와 위엄을 갖추어 덕(德)으로 정치하여야 한다.
할바마마인 주상전하의 가르침이 그러했고, 스승들의 조언 역시 그러하였다.
그에 반해 아바마마는 언제나 여유와 넉넉함과 배려를 말씀하시니.
심지어 조금 전처럼 일부러 그의 성취를 훼방하는 일도 서슴없이 하셨다.
“네 표정이 참으로 가관이구나. 내가 공연히 억지를 부리는 것 같으냐?”
“소자의 깨달음이 얕으니. 아바마마의 깊으신 뜻을 이해하지 못함이겠지요.”
“표정은 불만 가득한데, 정작 입 밖으로 뱉는 말은 그렇지 않구나. 아비를 이기고도 뭐가 그리 불만인지 모르겠구나. 아무튼, 그 이야기는 그만 됐다. 오랜만에 모였으니, 차나 한잔하자꾸나.”
“송구하오나 소자, 석강 시간이 되어 그만 물러갈까 하옵니다.”
“무어라?”
처음으로 세자의 눈빛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렇게 모이기가 좀처럼 쉽지 않으니. 오늘 하루 석강을 취소하는 건 어떠하냐?”
“마땅히 하여야 할 일과이거늘. 어찌 미룰 수 있겠나이까?”
“쯧쯧, 하루쯤 놓는다고 하여 누가 뭐라 할까?”
아버지의 지청구에도 형운은 뜻을 꺾지 않았다.
아쉬운 마음에 입맛을 다시던 세자는 결국 손을 흔들었다.
“고지식한 녀석, 그만 물러가거라.”
형운은 세자의 윤허에 허리를 숙였다.
그러곤 정자에 있는 이레에게 넌지시 물었다.
“빈궁, 빈궁도 해야 할 일이 있지 않소?”
뒷짐을 지고 돌아선 세자가 능허정 앞을 가로막았다.
“세손빈은 나와 더 할 일이 있다.”
“하오나…….”
세자가 형운을 돌아보았다.
“왜? 내가 또 저 아이를 울리기라도 할까 봐 걱정되느냐?”
“…….”
형운의 고집스러운 모습에 세자는 피식 헛웃음을 흘렸다.
“이젠 아니라 부정하지도 않는구나. 걱정 마라. 승부에 졌으니, 약속대로 울리지 않으마.”
세자의 약조에도 형운은 미덥지 못한 눈빛이다.
그는 이레에게 눈빛으로 물었다.
‘괜찮겠소?’
이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 걱정은 마십시오.’
‘오늘 잠시나마 그대를 만나 기뻤소. 내일 또 봅시다.’
‘살펴가시옵소서.’
그렇게 형운은 한 자락 미련을 남기고 능허정을 떠났다.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이레의 귓가에 세자의 혼잣말이 들려왔다.
“저 녀석은 아직 멀었구나. 어찌 저리 융통성이 없을꼬.”
못마땅한 표정으로 혀를 끌끌 차면서도 세자의 눈은 아들의 그림자를 좇고 있었다.
그 눈동자에 깃든 헛헛함을 이레는 놓치지 않았다.
***
형운이 떠났다.
흥이 식어버린 세자는 이레와 함께 능허정을 나섰다.
“다른 곳으로 잠시 가자꾸나.”
후원의 산길을 지나 개울 위에 놓인 돌다리를 건넜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두 사람 앞에 갈림길이 나타났다.
하나는 궁으로 향하는 길이었고, 다른 하나는 숲 그늘 짙은 곳으로 이어진 오솔길이었다.
세자는 궁녀들과 내관들을 돌아보았다.
“너희는 예서 기다려라.”
따르는 궁인들을 뒤로 물린 그는 이레와 함께 오솔길을 따라 걸었다.
세자와 함께 낯선 길을 얼마간 걸으니 곧 아담한 전각이 나타났다.
그늘진 오솔길 끝에 자리한 전각은 햇살을 가득 품고 있었다.
숲과 어우러진 전각의 아늑하고 눈부신 자태가 반가웠다.
“이곳은 어디입니까?”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서고이니라.”
이레가 안으로 들어설 수 있게 세자는 한쪽 옆으로 비켜섰다.
전각 안으로 들어서자 짙은 대숲의 향이 물씬 풍겨왔다.
청아한 향기에 눅진하게 가라앉았던 이레의 기분이 뽀송뽀송해졌다.
동시에 눈앞에 펼쳐진 전각의 풍경에 그녀는 넋을 잃고 말았다.
세 칸 전각의 첫 번째 방엔 서책이 가득했다.
‘이곳은 오로원 같구나.’
서책이 산더미처럼 가득 쌓인 전각의 내부는 형운의 안가(安家)인 오로원(吾老園)을 떠올리게 하였다.
붉은 천일홍이 바람에 나부꼈던 비밀의 서원.
이만 권의 서책을 품은 형운의 서고.
이레는 입가를 길게 늘였다.
세자와 세손.
만날 때마다 맞서고 충돌하였지만, 기실 두 사람은 같은 게 아닐까?
이레는 차분한 눈길로 서책을 훑어보았다.
그저 이름만 들어왔던 진귀한 서책들로 가득한 곳이라.
털썩 주저앉아 무턱대고 읽고 싶었다.
세자는 희미한 미소로 그녀를 지켜보았다.
마치 이레의 이런 모습을 예견이라도 한 듯한 표정이었다.
흐뭇하게 응시하던 세자가 그녀를 두 번째 방으로 안내했다.
감탄과 놀라움이 이레의 얼굴에 떠올랐다.
그러다 어느 순간.
넋을 잃고 서책들을 살피던 이레의 낯빛이 돌연 시무룩하게 변했다.
세자가 의아하여 물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라도 있느냐?”
“아닙니다. 다만, 세손 저하도 함께하였으면 참으로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세손 이야기에 세자는 고개부터 저었다.
“아서라. 그 융통성 없는 녀석이 이런 곳을 알았다간, 법도에 어긋난 일이라며 한숨부터 쉬었을 테지.”
“워낙에 서책을 좋아하시는 분이시니. 오히려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였을 겁니다.”
“허허, 세손에 대한 세손빈의 평가가 참으로 후하구나.”
“후한 것이 아니라 그저 사실을 아뢴 것뿐입니다. 제가 아는 세손 저하는 그 어떤 분보다 훌륭하고 강건하신 분이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연계처럼 어리숙하여 내내 걱정하였는데. 조금이라도 나아진 모양이구나.”
혼잣말인 듯 낮게 읊조리는 세자의 말 중 귀에 익은 단어가 있었다.
“저하, 방금 무어라 하셨습니까?”
“아니다. 그만 다음 방으로 가자꾸나. 네게 꼭 보여주고 싶은 게 그곳에 있단다.”
세자는 이레를 전각의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한 마지막 방으로 인도하였다.
서책으로 가득한 두 방과 달리 마지막 방은 텅 비어 있었다.
“이곳은…….”
예상했던 것과 다른 방의 모습에 이레는 의아함과 동시에 호기심이 일었다.
세자는 대답 대신 방 한쪽에 굳게 닫힌 미닫이문을 좌우로 활짝 열었다.
열린 문 너머엔 거대한 벽이 숨겨져 있었다.
거대한 용 한 마리가 그려진 벽.
구불구불 꿈틀대며 산과 구름을 감싼 거대한 동체(胴體).
그 몸을 감싼 거칠지만, 생동감 넘치는 비늘.
여의주를 쥐고, 산봉우리를 할퀴며 구름을 밟고 선 용맹한 발톱.
우뚝 솟은 뿔은 근엄하였고, 삼라만상을 꿰뚫어보는 눈은 선인을 닮았다.
당장에라도 승천할 듯 용트림하는 용의 모습은 웅장함이 가득하였다.
이레는 용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이 순간만큼은 지나온 방에서 본 진귀한 서책들조차도 떠오르지 않았다.
“세손이 태어나던 밤, 꿈을 꾸었다.”
세자의 담담한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폭포를 타고 오른 용이 산자락을 밀어내고 구름을 헤치더니, 끝내 해를 삼키고 달마저 집어삼키던 꿈이었다. 푸른 하늘이 놈의 뿔에 잠기고, 밤하늘의 무수한 별마저 놈의 비늘을 수놓더구나. 그처럼 하늘을 모조리 먹어치운 놈이 갑자기 내 품으로 떨어지듯 덮쳐왔다.”
이레가 눈동자를 빛내며 물었다.
“저 그림이 그 용입니까?”
세자가 넉넉한 미소로 답했다.
“잠을 깨자마자 이곳으로 달려와 저 그림을 그렸다.”
햇살 가득한 곳에 숨겨둔 세자의 용 그림은 세손인 형운의 태몽이었다.
“세손 저하께서도 이 그림을 아십니까?”
“모른다. 보여주지 않았으니.”
“어찌하여 보여주지 않으십니까?”
“그 까다로운 녀석에게? 아서라. 쓸데없는 짓으로 멀쩡한 벽을 못 쓰게 하였다며 투덜거리겠지.”
“틀림없이 기뻐할 것이옵니다.”
이레가 확신하듯 말했지만 세자는 고개만 저을 뿐이었다.
“남에게 보여줄 만한 그림이 아니다.”
“그럼 어째서…….”
제겐 보여주신 것입니까?
뒷말을 삼키며 이레는 세자와 시선을 마주했다.
“글쎄다.”
물끄러미 이레를 내려다보던 세자가 용 그림으로 고개를 돌렸다.
“왜 그랬을꼬.”
아들에게도 보여주지 못한 그림을 왜 이레에게 보여주게 된 것일까.
자랑하고 싶어서?
절대 아니다.
그처럼 대단하다 생각하였으면, 이렇게 꽁꽁 감춰두지도 않았으리라.
그럼 단순한 변덕이려나?
그렇다면 왜 다른 사람도 아닌 이레에게 보여준 것일까.
“아마도 그 녀석이 걱정되어 그런 모양이다.”
그 녀석.
이 용이 상징하는 한 사람.
세자의 아들이자 세손인 형운을 뜻함이다.
“그 녀석…… 본디 쓸쓸하고 외로움을 많이 느끼는 아이다. 지나친 규율과 법도에 짓눌려 힘겹게 살아왔느니. 그런 것을 뻔히 알면서도 못난 아비는 제 일에 바빠 그저 견디라고만 하였구나. 아마도 내게 서운한 것이 많을 게야. 그러니 나 대신 빈궁이 세손의 손을 잡아주었으면 좋겠구나.”
“세손께선 굳건하시옵니다.”
“겉으로야 그렇게 보일 테지. 하나, 세손의 성정은 융통성이 없으니. 완벽을 추구하는 탓에 곁을 지키는 자들의 고충이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지나치게 깨끗한 물에선 외려 물고기가 살 수 없으니. 훗날 홀로 외로울까 그것이 걱정이구나.”
“그 마음을 어찌 표현하지 않으십니까?”
“무슨 말이냐?”
“세손 저하께 알려 주십시오. 내가 너를 이리 아끼고 걱정하고 있다. 직접 말씀하시면 아니 되겠습니까.”
이레의 말에 세자는 껄껄 웃었다.
“사내가 어찌 그런 낯간지러운 말을 입에 올릴 수 있단 말이냐. 객쩍은 소리 그만하거라.”
***
붉은 노을이 산자락을 휘감았다.
이레도 떠나고, 전각에 홀로 남은 세자는 물끄러미 용 그림을 바라보았다.
이레에게 털어놓은 속마음.
어쩌자고 그 아이에게 가감 없이 속내를 드러내고 말았을까?
스스로 생각해도 모를 일이었다.
서편 하늘을 지피던 노을이 어느새 꺼지고, 밤이 시작되었다.
스산한 바람과 함께 산 위에서 안개가 몰려왔다.
“저하, 날이 춥습니다. 그만 돌아가시지요.”
세자를 찾아온 상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걱정 섞인 눈빛에 떠밀려 세자는 몸을 일으켰다.
찰나.
“하…….”
심한 현기증에 세자는 몸을 휘청거렸다.
심장이 쪼개지는 듯하고, 호흡마저 가빠졌다.
“저하, 어찌 이러시옵니까?”
놀란 상선이 세자를 부축하였다.
“소란 떨 것 없다.”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지만, 세자의 얼굴엔 식은땀이 가득했다.
상선의 부축을 받으며 간신히 산에서 내려왔다.
동궁전에 도착하였을 땐, 이미 사위가 어둑해진 뒤였다.
상선이 부랴부랴 달여온 탕약을 먹은 후에야 겨우 통증이 가라앉았다.
“날로 두통이 심해지는 것 같구나.”
통증을 동반한 어지럼증이 점차 잦아졌다.
이따금 의식을 잃는 일도 있었다.
“어서 나아야 할 터인데.”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괴성을 지른 일도 있다 하니, 스스로도 걱정이 되었다.
갑갑한 마음에 닫힌 창을 활짝 열었다.
열렬했던 노을이 무색하게, 밤하늘은 희뿌연 구름으로 가득했다.
산 중턱에서 만난 밤안개가 그를 따라 동궁전까지 꾸역꾸역 밀려오고 있었다.
“화창한 날 밤이 어찌 이리 흐리멍덩하단 말이냐?”
봄.
오락가락하는 기온만큼이나 하늘 또한 변덕이 심했다.
달무리와 어울린 부연 달빛이 서탁을 아스라이 비추었다.
달빛과 밤안개가 함께하니 그 분위기가 신비롭기 그지없었다.
“그러고 보니 처음 그들을 만날 때도 이런 날이었지.”
그리운 마음에 세자는 선뜻 서탁 앞에 앉았다.
-다들 잘 지내느냐?
흰 종이를 가득 메운 그의 글이 인사를 전했다.
그러나 세자가 쓴 글은 사라지지 않았다.
세자는 달빛에게 서운한 눈길을 돌렸다.
“오늘도 허락하지 않는 것이냐? 참으로 무심하구나.”
예전엔 허락하지 않아도 함부로 찾아와 제멋대로 남과 어울리게 하더니…….
정작 원하고 그리워하니 만남도, 훔쳐봄도 허락하지 않는다.
달빛의 무정함을 탓하던 세자는 이내 유쾌하게 웃었다.
“너는 무심하고 나는 괴팍하니. 따지고 보면 제법 잘 어울리는 사이로구나.”
털털한 웃음으로 서운한 감정을 털어낸 세자는 서탁의 모서리를 쓰다듬었다.
“언젠가 마음 풀리거든, 한 번만 기회를 다오. 서탁의 친우들에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한마디만 하게 해다오.”
잘 자랐구나.
소심하고 어렸던 네가 어느새 혼인하여 당당해졌구나.
빼뚤빼뚤, 힘겹게 글 쓰던 아이가 어느새 현명한 여인이 되었구나.
고맙다.
잘 자라주어서.
지난한 역경 잘 견디고, 마침내 함께하게 되었구나.
대견하구나.
참으로…… 대견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