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택-왕들의 향연-111화 (111/215)

#111. 고맙다

새벽에 이슬비가 내렸다.

아침 해가 뜨자 땅이 시린 입김을 뿜었다.

장무열은 궐 안을 걷고 있었다.

무심한 표정, 날 선 눈빛.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

그러나 머릿속은 여느 때와 달리 복잡한 상념으로 가득했다.

입궐하던 길에 화완 옹주와 마주쳤던 까닭이다.

옹주는 궁녀와 내관들을 이끌고 산책 중이었다.

의도치 않은 만남이라.

장무열은 그녀를 위해 길을 비켜주었다.

사락사락.

바닥을 끄는 옷자락 소리가 그의 곁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렇게 그녀와의 우연한 만남은 평소처럼 무의미하게 끝났어야 했다.

하지만…….

비단 치맛자락 소리가 그의 발아래에서 더는 멀어지지 않았다.

“장 장령.”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순간, 장무열은 그녀와의 만남이 우연히 벌어진 사건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는 고개를 들고 그녀를 보았다.

화완은 하얀 얼굴 위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사헌부의 집의로 장 장령이 거론된다 들었소.”

김익현의 죽음 이후, 공석(空席)이 된 집의 자리를 두고 여러 인재의 이름이 오르내리고 있었다.

그중에 장무열의 이름도 있었다.

“제가 어찌 그와 같은 막중한 일을 맡을 수 있겠습니까. 자격이 없습니다.”

“장 장령이 자격이 없다니요?”

화완은 소매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유능하고 성실하기로 소문이 자자한 장 장령이 자격이 없다면 누가 그 자리에 어울릴 수 있겠소?”

장무열은 시선을 내렸다.

“전 그저 제 할 일에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제 본분에 충실한 만큼 어렵고 또 바람직한 일도 없지요.”

봄바람도 아니 부는데, 자목련 수자 놓인 그녀의 치마가 살랑살랑 물결쳤다.

“그나저나 지난번의 부탁 말인데…….”

귓불을 타고 흘러내린 화완의 목소리가 진주 알갱이처럼 목덜미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장무열의 몸이 뻣뻣하게 경직되었다.

화완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내가 그대의 부탁을 들어주면……. 그대는 내게 무얼 줄 수 있소?”

무거운 침묵 끝에 장무열이 되물었다.

“……무엇을 원하십니까?”

“글쎄, 무엇을 말하여야 할까.”

그녀의 음성에 설렘이 가득했다.

“그대.”

장무열이 의아한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화완은 입을 가리며 낮게 웃었다.

“그리 심각한 표정 마오. 농이었으니.”

눈꼬리를 길게 늘인 화완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슬며시 흘린 그녀의 목소리가 귓가를 희롱했다.

“무엇을 부탁할지 고심해보리다. 장 집의.”

화완은 의미심장한 미소 한 조각을 남기고 그에게서 멀어졌다.

고작 몇 마디 대화에 불과했지만, 그녀의 말은 장무열을 송두리째 뒤흔들어놓았다.

그 후의 기억은 흐릿하기만 하였다.

그저 멍한 채로 걸음을 옮겼을 뿐.

‘내가 그대의 부탁을 들어주면…….’

화완의 목소리만이 귓전을 맴돌 뿐이었다.

정처 없이 걷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낡은 문 앞에 서 있었다.

은자원이었다.

잡생각에 사로잡혀 무의식적으로 이곳으로 오게 된 모양이다.

장무열은 무겁게 내려앉은 시선으로 은자원의 낡은 문을 바라보았다.

왜 이곳으로 왔을까.

이곳에 드나든 기간은 고작해야 두세 달 남짓.

습관처럼 걸음을 옮겼다면, 이곳보다 사헌부로 향했어야 옳다.

그곳이 은자원보다 훨씬 오래 적을 둔 곳이니.

왜 하필 이곳에 온 것일까?

장무열은 불굴 대천의 원수라도 마주한 듯 낡은 대문을 노려보았다.

세상 그 무엇에도 거칠 것 없던 그가 고작 낡은 문앞에서 머뭇거렸다.

들어가야 하나, 그만 돌아갈까.

오랜 고심 끝.

‘거리낄 게 무엇이랴.’

이곳에서 가져가야 할 물품들도 있으니.

스스로를 설득할 적당한 핑곗거리도 떠올랐다.

삐거억.

낡은 소리를 밀치고 들어서자, 은자원 내부를 꽉 채운 온갖 그리운 것들이 그에게 달려들었다.

나무와 종이, 그리고 묵향의 향연.

덧창이 모두 열린 덕에 은자원은 어둡지 않았다.

열린 창으로 아침 햇살이 비스듬히 새어 들어왔다.

한가롭게 부유하는 먼지.

삼면을 가득 채운 책장과 그 책장에 빽빽하게 꽂힌 서책.

주인 없이 방치된 책상들.

그 위에 쌓인 두루마리들.

저 두루마리들엔 궁 안팎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을 것이다.

누군가의 억울한 사연, 증오와 분노가 담긴 사건들, 그리고 남에게 절대 들키고 싶지 않은 치부까지.

전향사 아래의 이름도 없는 하찮은 이곳에 저 많은 정보가 모이는 걸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은자원을 쓸어보던 장무열의 시선이 한곳에 묶였다.

여러 개의 의자를 나란히 붙여놓은 책상.

언제나 저곳에 도둑잠 청하던 사내.

버릇처럼 쥘부채를 팔랑거리며, 버릇처럼 개구진 표정을 짓던 사내.

늘 게으른 얼굴로 등을 보인 채 잠이 들었던 사내.

아득한 기억이 안개처럼 펼쳐졌다.

끝없는 아쉬움에 장무열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한순간.

그는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비어있어야 마땅할 자리에 사람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잘못 보았나?

의심하며 눈가를 가늘게 여몄다.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지저분하게 어질러진 책상 너머.

길게 이어붙인 의자 위에 도포를 뒤집어쓰고 누운 사내의 뒷모습이 보였다.

낮게 코를 골며 자는 너른 등.

그 익숙한 광경에 장무열의 눈이 커졌다.

장무열은 저도 모르게 사내를 향해 다가섰다.

“너…….”

사내를 부르는 음성이 잘게 흔들리고 있었다.

***

장무열의 부름에 곤히 잠든 사내가 깨어났다.

“잠시 눈만 붙일 생각이었는데 그만 잠이 든 모양이군.”

눈가를 비비며 게으른 하품을 하는 모양이 영락없는 그였다.

“너냐?”

장무열의 목소리에 작은 희망이 아른거렸다.

“누가 왔나?”

인기척을 느낀 사내가 고개를 돌렸다.

일순, 장무열의 피가 싸늘하게 식었다.

그가…… 아니다.

헛된 희망은 이내 타오르는 분노로 변했다.

성큼성큼 걸어간 장무열은 대뜸 낯선 사내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누가 그 자리를 허락하였느냐?”

장무열의 눈빛은 사나웠다.

허락도 없이 은협의 자리를 차지한 이 낯선 사내를 용서할 수 없었다.

누구 마음대로.

왜 하필 이 자리를.

“허락?”

장무열의 우악스런 위협에도 사내는 나른했다.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내 자리를 다른 사람이 차지하고 말았지 뭔가. 하는 수 없이 다른 자리로 옮길 수밖에. 그나저나 다짜고짜 멱살잡이부터 하는 자네야말로 누구인가?”

“나는…….”

무어라 해야 하나.

장무열은 대답을 망설였다.

“사헌부의 장령, 장무열이다.”

“아! 은호가 바로 자네였군.”

사내는 가늘게 뜬 눈으로 장무열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소문은 익히 들었네.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새로 은자가 된 사람이라지?”

곧 사내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불합격!”

뜬금없는 평가에 장무열의 미간이 더욱더 구겨졌다.

상황이 험악하거늘.

이 무슨 참신한 헛소리란 말인가.

그의 불편한 마음에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사내의 신랄한 평가가 이어졌다.

“키는 멀대같이 크고, 표정은 사납고, 두 눈엔 불만이 가득하군. 처음 보는 사람에게 다짜고짜 멱살잡이부터 하는 걸 보니, 인성은 말할 것도 없겠지.”

“그거 설마, 나한테 하는 말인가?”

“여기, 자네 말고 다른 사람 더 있는가?”

물음에 물음으로 응수한 사내가 못마땅한 듯 중얼거렸다.

“말귀도 어둡고 눈치는 더더욱 없으니. 은자원의 은자로서 적합하지 않군. 이런 형편없는 사람을 무얼 보고 은자원에 들였는지 알다가도 모르겠군.”

장무열의 미간이 불편하게 기울어졌다.

뒤늦게 사내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넌 누구냐?”

누군데 은자원과 은자를 아는 걸까.

“은마(隱馬)라는 사람이다.”

“은마?”

“은마가 무슨 뜻이냐하면…….”

사내가 멱살을 움켜쥔 장무열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슬쩍 비틀어 올렸다.

“은자원에서 가장 빠른 사람이 바로 나다.”

사내의 몸이 미꾸라지처럼 움직였다.

“어허, 이런 낭패가 있나. 누이가 바느질해 준 몇 안 되는 귀한 옷인데. 그만 망가지고 말았군.”

신묘한 움직임으로 장무열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사내가 구겨진 옷자락을 털어내며 울상을 지었다.

반면, 장무열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저 사내가 어떻게 제 손아귀에서 빠져나갔는지 알 수가 없었다.

“너…… 대체 누구냐?”

“은마, 은마일세. 기억력도 안 좋은 모양이군.”

다시 한 번 제 이름을 말한 사내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실은 은뢰(隱雷)나 은영(隱影) 같은 그럴듯한 이름으로 하고 싶었는데, 누이가 반대하여 어쩔 수 없이 은마가 되었지. 아아, 이레야. 대체 은마가 뭐란 말이냐. 하나뿐인 오라비에게 어이하여 색마와 비슷한 이름을 지어준단 말이냐.”

쓸데없는 혼잣말 중에 장무열의 귀에 쏙 들어오는 이름 하나가 있었다.

김이레.

“세손빈 마마의 오라비?”

“잘 알고 있군. 내가 바로 그 대단한 분의 오라비 되는 사람일세.”

“실종되었다고 들었다.”

“당연히 기사회생하였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사내가 말했다.

장무열은 새삼스러운 눈길로 김기대를 응시했다.

제일 먼저 여느 사대부와는 다른 그의 행색이 들어왔다.

상투를 틀지 않은 머리카락이 얼굴의 반을 가리고 있었다.

흔들리는 머리카락 틈새로 흉터가 보였다.

평범한 삶을 산 건 아니로군.

그러나 다른 자의 것처럼 험상궂거나 거부감이 드는 상처는 아니었다.

무언가 속을 품을 듯한 검은 눈동자와 날렵한 콧날, 그리고 부드러운 턱선에서 느껴지는 여린 인상이 얼굴의 흉터 덕에 희석되었다.

얼핏 이레와 닮은 구석이 보였다.

그러나 입을 여는 순간…….

“닮지 않았군.”

김기대가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불행하게도 그렇다네. 만약 내 누이가 내 미모의 절반만 닮았어도 간택에서 그리 고생할 일은 없었을 걸세.”

“…….”

김기대의 너스레에 장무열은 미련 없이 고개를 돌렸다.

이레가 실종된 오라비를 얼마나 간절히 바랐는지 알고 있다.

늦게라도 무사히 돌아왔으니 잘된 일이다.

하지만 그뿐.

더는 그와 상대하고 싶지 않았다.

한순간이나마 다른 이와 착각한 게 후회될 지경이다.

좀 전엔 왜 그리 흥분했을까.

그깟 빈자리에 무슨 의미가 있다고.

하지만 그는 볼일이 끝났을지 몰라도 상대는 아니었다.

“잠깐.”

김기대가 돌아서는 장무열의 어깨를 잡았다.

“무어냐?”

김기대가 자신의 구겨진 옷자락을 가리켰다.

“책임지게.”

“책임?”

“남의 옷을 엉망으로 망쳐놨으면 당연히 책임을 져야지.”

장무열의 얼굴에 귀찮은 기색이 떠올랐다.

은자들 중에 평범한 사람은 없었다.

은마라는 이 작자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얼마면 되겠느냐?”

옷값을 변상하고 끝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의 생각만큼 김기대는 호락호락한 자가 아니었다.

“어찌 세상사를 돈으로만 해결하려 하는가?”

“싫으면 관둬라.”

“이 사람, 성급하군. 누가 싫다고 했는가?”

“그럼?”

턱을 쓰다듬으며 장무열을 가늠해본 김기대가 말했다.

“이 옷이 보기엔 평범해 보여도 내겐 무척 특별한 물건이라. 본래는 수만금을 주어도 부족할 테지만, 같은 은자끼리 그리 박하게 굴 순 없고. 밥 한 번 제대로 사게. 자네의 정성을 보고 타협해줄지 말지 고민해보겠네.”

타협을 하는 것도 아니고, 타협할지 말지 고민하겠다고 한다.

김기대의 은근한 수작질이 빤히 보였다.

장무열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은자의 정리(情理)라면 신경 쓸 필요 없다. 난 오늘부로 더는 은자가 아니니까.”

“그게 무슨 말인가? 은자가 아니라니. 설마, 은자를 관둔다는 소린가?”

장무열은 묵묵히 제 물건을 챙기는 행동으로 답을 대신했다.

“어허, 이 친구 정말 큰일 날 친구로군. 누구 마음대로 은자를 관둔단 말인가?”

좀 전까진 은자로 인정할 수 없다던, 김기대는 순식간에 태세를 전환했다.

그 뻔뻔한 변심에 장무열은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마음대로 관둘 수도 없단 말이냐?”

“아무렴. 은자가 되기도 어렵지만, 은자를 관두는 건 더욱 어려운 법이지. 자네는 신입이라 잘 모르겠지만, 은자원을 그만두려면 반드시 따라야 하는 절차라는 게 있네. 만약, 그 절차를 제대로 이행하지 않으면 삼대(三代)가 거지꼴을…….”

“그 절차가 대체 뭐냐?”

“그건…….”

김기대의 눈동자가 데굴데굴 빠르게 굴렀다.

“상다리가 휘어질 정도로 푸짐한 음식상 서른 번?”

장무열의 이마에 분노가 서렸다.

저 시끄럽고 귀찮은 작자를 한 번도 아니고 무려 서른 번이나 만나야 한다고?

서슬 퍼런 눈빛에 김기대는 급히 제안을 수정하였다.

“그럼, 스무 번. 정 사정이 안 좋으면 열다섯……. 아니, 열 번! 나도 더는 양보할 수 없네. 눈 딱 감고 열 번 만 상다리 휘어지게 대접하면 자네의 앞을 더는 막지 않겠네.”

“일 없다.”

“어허. 내 말을 헛된 공갈쯤으로 치부하는 모양인데, 맹세하건대 후회하게 될 걸세. 이래 봬도 내가 사람 귀찮게 하는데 일가견이 있거든.”

김기대가 장담했다.

그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장무열은 은자원에 온 것을 이미 후회하고 있었다.

세상에 이런 작자가 서강율 말고 더 있을 줄이야.

장무열의 복잡한 속내에도 불구하고 김기대는 제 누이까지 들먹이며 협박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허허. 세손빈 마마께서 이 소식을 들으면 얼마나 통탄할까. 공들여 은자 만들어놨더니 허락도 아니 받고, 제 마음대로 나간다 하니. 더구나 하나뿐인 제 소중한 오라버니까지 무시하고 괄시하지 않는가?”

“…….”

“아아! 괴롭고 슬프도다. 피는 서로 통한다 하였으니, 지금쯤 세손빈 마마께서도 내 울적한 마음을 눈치채고 가슴 아파하실 것이야.”

“태어나 처음 듣는 헛소리군.”

“우리 남매는 어릴 적부터 그러했지. 하나가 아프면 덩달아 다른 하나도 아프곤 하였지. 그나저나 내 마음이 이리 찢어질 듯 아프니. 우리 빈궁마마, 지금쯤 영문 모를 고통에 슬피 울고 계실지도 모르지. 암, 틀림없이 그럴 게야.”

***

“하하하, 그게 정말이더냐?”

김기대가 누이를 떠올리며 탄식하던 그 시각.

이레의 웃음소리가 세손빈 전각에 활짝 피어났다.

“저도 처음엔 뜬 소문인 줄 알았죠. 나중에 사실인 걸 알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참으로 놀랍구나.”

모처럼 무거운 격식을 벗어던진 이레는 마음 편히 웃고 있었다. 그녀의 맞은편엔 형조판서의 여식인 유경이 자리했다.

궁에서의 생활이 어느 정도 안정되자 이레는 유경을 초대하였다.

근황과 신변잡기로 운을 뗀 이레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화상은 어떠하냐?”

재간택 시험을 치르는 도중, 유경은 이레를 감싸다 다리에 화상을 입었더랬다.

내내 그 일이 마음에 걸렸다.

유경의 얼굴에 태연한 표정이 떠올랐다.

“이젠 거의 나았어요. 자세히 보지 않으면 화상을 입었는지도 모를 지경이랍니다.”

이내 그녀는 아쉬운 듯 뒷말을 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아무 일 없는 척할 걸 그랬어요.”

“그럼, 없던 일로 하고 다시 시험을 치르자 할까?”

이레의 물음에 유경은 질색하였다.

“그 시험을 다시 치르자고요? 싫어요. 그 고생은 제 인생에 한 번으로 족합니다. 더구나 언니…… 아니, 빈궁마마를 상대로는 더욱 자신 없습니다.”

“유경아.”

이레는 손사래를 치는 유경의 손을 잡았다.

제법 큰 상처였는데, 어찌 흉이 남지 않았을까.

이 모든 것이 자신을 위한 배려이리라.

“고맙다. 네가 아니었으면…….”

“무슨 말씀이세요. 순리대로 되었을 뿐입니다. 전 처음부터 빈궁마마께서 간택되실 거라 믿었으니까요.”

“그래도…….”

“그보다 마마, 그 소식 들으셨어요?”

유경이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무슨 소식?”

“김명선, 그 여인 말이어요.”

대제학의 여식, 김명선.

이레와 함께 간택의 마지막까지 남았던 간택인이었다.

“그 사람이 왜?”

“기어이 한쪽 다리를 못 쓰게 되었답니다.”

“저런…….”

“치료만 서둘러 했어도 그리 상처가 곪지 않았을 텐데. 오래 숨기고 내버려둔 바람에 손을 쓸 수 없게 되었대요.”

“그런 일이 있었구나.”

“한때는 원망했던 사람이지만, 그 소식을 듣고 마음이 썩 좋지 않아 한 번 찾아간 적이 있었습니다.”

“잘했구나.”

“잘하긴요. 갔다가 물벼락만 받고 돌아왔는걸요.”

“물벼락?”

“그간 잘도 그 성질 죽이고 있었던지. 간택에 떨어지고 몸마저 망친 이후엔 독기만 남은 모양이에요. 툭하면 아랫것들에게 패악을 부린다는 나쁜 소문이 무성합니다.”

“어쩌다 그리…….”

“분한 것이겠지요. 빼앗긴 느낌이겠지요. 처음부터 빈궁전은 자신의 것이라 자신만만하였으니까요.”

이어, 유경은 문 소원에 관한 소식도 전했다.

“문 소원의 오라비가 운종가의 고리대금업자에게 돈을 빌렸대요. 소원께서 아들만 낳으면 왕실의 금고가 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큰소리 땅땅 쳤으니. 한양의 돈놀음 하는 자들이 앞다퉈 소원의 오라비에게 돈을 빌려주었다지 뭐여요. 덕분에 소원의 오라비는 물론이고 오라비의 처가까지 온갖 사치를 누렸다지 뭡니까.”

“세상에…….”

“청국의 귀한 비단은 둘째치고, 희귀한 보석이며 패물, 양반들만 타는 가마며……. 안 사들인 게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찌 되었느냐?”

“왕자 대신 옹주를 낳았으니, 이후의 상황은 불 보듯 뻔한 것이지요. 소문을 접한 고리대금업자들은 당연히 돈주머니를 닫아버렸고, 졸지에 빚더미에 앉게 되었지요. 빚을 갚으려 가산을 다 팔고 여기저기 손을 내밀었지만, 이자는 고사하고 원금도 갚지 못하였다 합니다.”

“그 정도란 말이냐?”

“네. 견디다 못해 야반도주하였다지요. 그런데 그마저도 한양을 벗어나기 전에 잡혔대요. 그 이후론 왈짜들이 제집 삼아 그 집에서 기숙하고 있다고 합니다.”

“문 소원의 근심이 이만저만이 아니겠구나.”

“세상의 부귀와 영화를 한껏 누리던 사람이 다시 나락으로 떨어져 버렸으니. 얼마나 불편하고 불안하겠어요. 여러 곳에 손을 내밀고 부탁도 해보는 모양인데, 정작 도와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모양입니다.”

문 소원에 관한 소식은 이레 역시도 주위 사람들을 통해 전해 들은 적이 있었다.

다들 아들을 낳지 못해 그리된 것이라 하였다.

하지만 과연 그녀의 몰락이 아들을 낳지 못해서일까?

아니리라.

과욕.

권력과 부귀에 대한 지독한 집착이 그녀를 그리 만들었다.

지나친 욕심이 부른 불행한 결말이었다.

“그 와중에 어린 옹주께 화풀이를 하다 주상 전하께 들켰다지요. 덕분에 궁에서 유배 아닌 유배 중이라 들었는데. 맞습니까?”

“자세한 사정은 나도 모른단다.”

“빈궁마마, 어찌 남의 일에 관심이 없습니까. 이러시면 안 됩니다. 궁이 얼마나 섬뜩한 곳인지 모르십니까? 넋 놓고 있다 보면 큰코다치는 곳입니다.”

“괜찮다. 지금처럼 네가 이리 전해주면 되질 않으냐.”

“그렇긴 하지만…….”

빠꼼, 귀엽게 혀를 내밀던 유경은 그 후로도 궐 안팎의 소문과 주변의 근황을 쉼 없이 전해주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유경아.”

대화가 한산해질 무렵, 이레가 그녀를 불렀다.

“네가 혼인을 하지 않겠다 하였다는 말이 있던데…….”

오늘 유경을 궁으로 부른 이유였다.

그녀의 근황도 궁금하였지만, 유경과 관련한 소문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좋은 혼사 자리가 있었음에도 유경의 반대로 무산되었다는 소문이 이레의 귀에 들어왔다.

“네. 그렇게 하고 싶다 하였습니다.”

“왜 그런 결정을 하였느냐? 혹시…….”

이레의 시선이 자연스레 유경의 허벅지로 향했다.

유경은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이 일은 제 몸에 있는 흉터와는 관계없어요.”

“그럼?”

“빈궁마마를 보며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수십 번은 절망하였을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마마의 모습에 저 자신이 얼마나 한심하게 느껴졌는지 몰라요. 그래서 제 몸에 난 작은 흠을 핑계로 억지를 부렸답니다.”

유경은 시선을 들어 이레를 마주 보았다.

“언니. 아니, 빈궁마마. 전 만사여의를 찾고 싶어요.”

“만사여의?”

유경이 만사여의를 동경하는 것은 이레도 잘 알고 있었다.

“네. 그분을 찾아 묻고 싶어요. 어떻게 만사여의가 될 수 있었는지. 나도 될 수 있는지. 나도 만사여의 같은 사람이 될 수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제 꿈을 말하는 유경의 눈빛이 물에 부서지는 달빛처럼 반짝거렸다.

굳은 결의로 가득한 눈동자.

마침 만사여의에 대해 이레가 알고 있으니.

어쩌면 유경에게 작은 도움을 줄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전에 만사여의의 생각도 들어봐야 하겠지만.

***

“빈궁마마, 또 뵙길 소망하겠습니다.”

미시초(未時初).

유경은 다음을 약조하며 빈궁전을 떠났다.

전각을 나서는 유경의 뒷모습은 예전보다 당당하였다.

나아갈 방향을 정확히 알고 떼는 발걸음은 거침이 없어 보였다.

그녀와의 만남은 이레에게 많은 생각을 남겼다.

미시말(未時末).

뜻밖의 손님이 이레를 찾아왔다.

세자의 곁에서 그림자 노릇을 하던 상선이 이레에게 주군의 전언을 전했다.

“무료하면 잠시 산책하지 않겠느냐 물으시었사옵니다.”

세자 저하의 뜻을 어찌 따르지 않을 수 있을까.

이레는 서둘러 빈궁전을 나섰다.

상선이 그녀를 안내한 곳은 궁의 후원 입구였다.

붉은 당의 곱게 차려입고 다가오는 이레를 세자는 넉넉한 웃음으로 반겼다.

“잠시 세손빈과 둘만 있고 싶다.”

세자의 명에 환관과 궁녀들이 물러났다.

“걷자꾸나.”

세자는 말 없이 걸었다.

그 곁을 이레는 조용히 따랐다.

선선한 봄바람을 밟던 세자가 먼 곳을 바라보며 운을 뗐다.

“오늘 느닷없이 함께 산책하자 하여 많이 놀랐겠구나. 편하진 않겠지. 그걸 알면서도 굳이 널 부른 것은…… 꼭 해야 할 말이 있기 때문이다.”

꼭 할 말이 무엇일까.

이레는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 이리 따로이 불러내신 걸까.

훈계일까?

아니면 가르침?

어쩌면 세손 저하와의 관계나 복잡하게 얽힌 권력 구조에 관해 언급하실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작 이어진 세자의 말은 이레가 상상한 그 어떤 내용과도 달랐다.

“고맙다.”

이레는 걸음을 멈추었다.

단 세 글자.

짧디짧은 그 말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세자는 인자한 눈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네가 팽례를 내게 보내었다 들었다.”

“……저하.”

“정신없이 하루하루를 보내다 보니, 네게 여태 고맙다는 말 한마디 하지 못하였구나. 참으로 무심하였어.”

“저하.”

“고맙다. 오늘 내가 맘 편히 웃을 수 있는 것은 네 덕분이다.”

담담한 세자의 말은 이레의 가슴에 크게 공명 되었다.

이레는 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저하. 제가 보낸 서찰은…….”

세자 저하께선 무언가 크게 오해하고 계신다.

그녀가 팽례 강현보에게 부탁한 서찰엔 납치된 여인들이 감금된 것으로 보이는 장소에 관한 소견만이 적혀 있을 뿐이었다.

“칭찬은 오히려 서찰을 전한 팽례가 받아야 마땅하옵니다.”

강현보는 이레의 서찰을 전하기 위해 머나먼 길을 마다치 않았다.

이레의 겸손한 말에 세자는 호탕하게 웃었다.

“강현보라 하였던가? 그 팽례 또한 상을 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그를 움직인 것은 결국 너였으니. 동궁전에 서찰을 전하기만 하면 될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먼 북방까지 나를 찾아 말을 달렸다. 그에게 이유를 물었더니 뭐라 답했는지 아느냐?”

“모르옵니다.”

강현보가 뭐라 답하였을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마음씨 고운 어느 아가씨께 목숨값을 빚졌을 때 맹세한 게 있다 하더구나. 그분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마다치 않겠노라고. 얼어붙은 북방이 아니라 지옥 끝이라 해도 반드시 달려가 전해야겠다고. 오히려 제 손으로 임무를 마치지 못함이 송구하여 고개조차 들 수 없노라 대답하더구나.”

세자를 통해 듣는 강현보의 진심.

이레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들었다.

“그를 움직인 건 결국 네 진심이었다. 어디 그뿐이랴. 만사여의를 구하고, 임부들이 갇힌 곳을 찾아낸 사람도 너였으며, 전염병으로 시간을 벌어준 것도 너였다. 그러니…….”

세자가 이레를 내려다보며 진실 된 마음을 전했다.

“날 구한 건 너였느니라.”

“저하.”

“돌이켜보면 너희 오누이에겐 그동안 참으로 못할 짓을 하였구나. 네가 날 위해 여러 번 애쓴 줄 몰랐구나. 네 오라비가 그렇게 목숨 걸고 험한 길 마다치 않은 줄 까맣게 몰랐다. 미안하다. 그리고…… 참으로 고맙다.”

“……저하.”

세자의 큰 울림이 끝내 이레를 울리고 말았다.

위태롭게 맺혀 있던 눈물이 기어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허허, 역시 난 이런 일에 서툰 모양이다. 고맙다 하였는데, 울리고 있으니 말이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이레는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흔들었지만, 세자는 씁쓸하게 웃을 뿐이었다.

그가 봄기운이 완연한 후원을 둘러보며 추억을 되새겼다.

“우리가 처음 만난 날을 기억하느냐?”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너무 오래전 일이라 난 벌써 기억이 가물가물하는구나.”

세자가 인자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날 어떠했는지 말해주겠느냐?”

이레가 공손히 대답했다.

“밤늦은 시각으로 기억합니다. 오라비의 동패를 돌려주어야겠다는 마음으로 궁을 찾았지요. 환관의 뒤를 따르니, 호젓한 정자가 나왔습니다. 능허정, 그곳에서 처음 저하를 뵈었습니다.”

그때 일이 지금도 생생하였다.

어두운 밤.

으슥한 숲.

멀리서 들려오는 밤새 소리.

범이라도 튀어나올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정작 그곳에서 나온 사람은 호랑이보다 무섭고 두려운 사람이었다.

성큼성큼 능허정에 오르는 세자의 발걸음 소리에 기절할 것처럼 긴장되었더랬다.

“그래, 그때 처음 만났지.”

담담히 대꾸하는 세자의 음성에 왠지 모를 외로움이 깃들어 있었다.

뜻 모를 아련함에 이레는 저도 모르게 세자를 보았다.

그때가 아니었습니까?

저하와 제가 처음 만난 때가.

그보다 오래전…….

혹여, 더 오랜 과거에 제가 저하를 뵈었습니까?

아쉽게도 세자의 눈동자는 이레를 향해 있지 않았다.

“보아라. 그곳에서 만났던 또 한 사람이 널 찾아왔구나.”

세자의 시선 끝.

푸른 용포를 휘날리며 큰 걸음으로 다가오는 한 사람의 모습이 걸려 있었다.

왕세손, 형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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