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 봄밤 (春夜)
깊은 밤.
형운은 서탁 앞에 앉았다.
달빛 고운 날이라.
그리운 사람과의 만남을 기대하였다.
-달빛 곱고 구름이 운치를 더하니. 참으로 풍요로운 밤이다.
서탁은 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곳의 달빛도 곱습니까? 제가 보는 하늘의 달도 참으로 곱습니다.
사박사박.
눈 위를 걷듯 조심스럽게 새겨진 검은 자취.
이레의 글이었다.
-달을 보면 언제나 한 사람이 떠오르곤 한단다. 오늘 달빛이 유난히 아름답게 느껴지는 건 아마도 그 사람이 그립고 또 보고파서 그런 모양이다.
-은백께서도 그러셨습니까?
-너 또한 그렇더냐.
이레도 달을 보며 그리움에 젖었다 하니, 절로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부부의 연으로 맺어졌다곤 하나 왕실의 엄격한 율법과 법도 탓에 함께할 수 없었다.
형운은 궁의 동쪽에 있는 세손궁에서, 이레는 서쪽의 빈궁 전각에서 각자 따로 생활했다.
그것이 늘 안타깝고 아쉬웠다.
문안례를 위해 보는 것 이외에도 이런저런 핑계로 만나러 가지만, 서로의 일과가 바빠 긴 시간 함께하기 쉽지 않았다.
그나마 서탁이 있어 외로움을 달랠 수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하지만 서탁은 그리운 사람과 함께 달갑지 않은 불청객 또한 함께 불러들였다.
-아아, 밤새 소리 호젓하여 모처럼 야경을 즐기고 있건만. 서탁 위는 어찌 이리 뜨겁단 말이냐.
힘 있게 쓰인 탄식.
형운은 눈매를 찌푸렸다.
은룡.
아니, 스스로 은룡이라 자처하는 백귀였다.
“이 몹쓸 잡귀가 또 귀한 시간을 방해하는구나.”
형운은 불편한 심기를 붓끝에 실었다.
-긴한 이야기 중이다. 잡귀는 썩 꺼져라.
은룡이 들을 리 만무했다.
-이곳에 너희 말고 다른 잡귀도 있었느냐?
-너 말이다, 너.
-어떤 잡귀인지 몰라도 연계가 저리 성내는 걸 보니, 썩 물러나는 게 좋겠구나.
-모르는 척 시치미 그만 떼고 물러가거라. 아무리 백귀라 하나 체면과 염치는 있을 터. 어찌 남의 대화에 함부로…….
형운의 글은 곧이어 이어진 은룡의 굵은 글씨에 묻혀버렸다.
-그나저나 요즘은 백귀들도 살만한가 보구나. 백귀는 다들 억울한 사연이 있는 불쌍한 원귀인 줄로만 알았는데, 서탁의 백귀는 한가하게 달 타령이라니.
“또 이렇게 나온단 말이지. 오냐, 이번엔 나도 호락호락 당하진 않을 것이다.”
이럴 때를 대비하여 굵은 붓을 다양하게 준비해 두었다.
형운은 들고 있던 작은 붓을 내려놓고 굵은 붓으로 교체했다.
-옛말 틀린 거 하나 없다. 내가 아는 백귀는 시도 때도 없이 끼어들고 참견하니, 죽기 전에 참견하지 못해 죽은 귀신이 분명하다.
붓의 초가리가 무려 어른 손바닥 반 만한 크기의 특대형 붓으로 쓴 글이라.
은룡의 글씨는 이내 형운이 새로 쓴 글에 묻혀버렸다.
“어떠냐? 내 글이 더 크지?”
형운은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그러나 그의 웃음은 이내 사라졌다.
은룡이 그가 쓴 글보다 한 배 반 정도 더 굵은 글을 선보였기 때문이었다.
-그게 누군데?
얼마나 큰 붓인지 고작 몇 글자에 너른 종이가 꽉 차버렸다.
형운의 입가에 작은 경련이 일었다.
그는 흔들리는 눈으로 서탁 위에 일렬로 정리한 붓들을 바라보았다.
깨알처럼 작은 글씨를 쓸 수 있는 세필부터 조금 전에 쓴 특수주문한 붓까지.
무려 열다섯 자루의 붓이 크기순으로 차례로 나열되어 있었다.
처음엔 사소하게 시작된 경쟁이 어느새 자존심 싸움으로 확대되었다.
형운의 눈동자에 비장한 각오가 새겨졌다.
“기어이 저 물건을 꺼내야 한단 말인가.”
처소 한 곳에 비스듬히 세워놓은 어린아이 몸통만 한 크기의 붓.
만약을 위해 대비하여 장만한 붓이었다.
너무나 커서 한 손으로 들 수도 없을 만큼 거대했다.
좁은 서탁 위에 쓴다면 간신히 한 글자 정도만을 욱여넣을 수 있겠지.
잠시 잠깐, 백귀를 상대로 이런 일까지 해야 하는가 하는 자괴감도 들었다.
하지만 사내가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베야 하는 법.
더군다나 다른 사람도 아닌 이레 앞이 아니던가.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결심의 굳힌 형운이 최후의 붓을 뽑으려 몸을 일으켰을 때였다.
형운과 은룡의 대화로 새카맣게 얼룩진 종이 한 귀퉁이.
작은 여백에 개미가 기어가듯 자그마한 글씨가 쓰였다.
이레의 글이었다.
-두 분께서 품으신 뜻이 너무도 크고 광활하니. 아녀자인 저로서는 따르기 어렵습니다. 더는 대화가 힘들 듯하니,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형운은 냉큼 큰 붓을 던져버렸다.
서탁 위의 글이 사라지길 기다렸다 급히 글을 써내려갔다.
그의 손에 들린 붓은 평소에 쓰던 적당한 크기의 붓이었다.
-떠날 것 없다. 내 잠시 백귀에게 홀려 엉뚱한 다툼을 하고 말았구나. 내가 그만두마. 아무렴, 백귀와 다퉈 무얼 하겠느냐?
동시에 은룡의 글도 나타났다.
-잡귀의 집념이 범상치 않아, 천지가 광활함을 알려주려 한 것이다. 은랑이 불편하다면 더는 하지 않겠다. 하긴, 하찮은 잡귀와 경쟁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이레의 글이 나타났다.
필체가 파도치듯 위아래로 출렁였다.
배를 잡고 웃는 듯한 모양새가 글씨에 나타났다.
-두 분은 참으로 재미있습니다. 다른 할아버지들께서도 이따금 다투시지만, 두 분처럼 잘 어울리시는 경우는 보지 못했습니다.
“어울려?”
이레의 평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형운의 이마에 깊은 주름이 새겨졌다.
비단 마음에 들지 않는 건 형운만이 아닌 듯했다.
은룡 역시 불만 가득한 속내를 드러냈다.
-은랑. 그대의 식견에 언제나 감탄하였으나, 이번만큼은 동의하기 어렵겠구나. 어찌 나와 연계가 비교될 수 있겠는가.
-무엇이?
발끈한 형운이 반박하니, 자연스럽게 또 한 번 필전(筆戰)이 벌어졌다.
그 사이 이레는 시간이 늦었다며 사라졌다.
-백귀. 너 때문에 은랑이 떠나지 않았느냐?
-그게 어디 나만의 잘못일까?
은룡은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형운의 불평을 되받아쳤다.
그래도 일말의 양심은 있었던 걸까?
-좋다, 은계야. 정히 불편하였다면, 내 언제고 기회가 닿는 대로 오늘 손해 본 것을 만회해 주마.
형운의 잇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나도 할 수 없는 일을 백귀인 네가 어찌할 수 있겠느냐?”
이레가 서탁을 떠나버린 일을 마냥 은룡의 탓이라고만 할 수도 없었다.
애초에 백귀의 도발에 발끈하여 넘어간 자신에게도 원인이 있었다.
이레가 없다 생각하자 갑자기 피로감이 밀려들었다.
형운은 그만 작별을 고하려 하였다.
그러나 은룡의 글이 그를 붙잡고 놔주지 않았다.
-한데, 이 서탁에 머무는 백귀는 대체 몇이냐?
-그건 왜 물어보는 것이냐?
-최근 다른 백귀들을 보았다.
“다른 백귀?”
형운은 호기심을 보였다.
-어떤 백귀들이냐?
-글씨가 삐뚤빼뚤한 어린 소녀와 노인들인 것 같은데. 기이하게도 너희와 달리 그들의 대화를 볼 수는 있어도, 거기에 낄 수는 없더구나.
어린 소녀와 노인이라면…….
형운의 뇌리로 한 가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혹시…….”
형운은 즉시 제 생각을 종이에 적었다.
-그 소녀의 이름이 무엇이더냐? 아! 이름은 전할 수 없었지. 하면, 노인들이 그 소녀를 무어라 부르더냐?
글을 다 쓰고 대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은룡의 대답은 없었다.
애초에 그가 쓴 마지막 질문 자체가 사라지지 않고 종이 위에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형운은 급히 몸을 일으켜 동창을 열었다.
청명하던 밤하늘이 칠흑같이 어두워져 있었다.
어디선가 몰려온 먹장구름이 달을 삼켜버렸다.
“하필이면 이런 때에…….”
형운은 서탁으로 되돌아왔다.
그사이, 은룡이 새로 남긴 글이 서탁 위로 떠올랐다.
-그들의 대화가 신기하고 흥미로워 참여하고 싶은데, 좀처럼 할 수 없더구나. 뭔가 백귀들만 아는 비법이라도 있느냐?
형운은 다시 붓을 들었다.
-내 말이 전해지지 않는다. 그쪽 하늘은 어떤가? 달이 떠 있는가?
이번에도 형운의 물음은 전해지지 않았다.
-대답이 없군. 가버린 것인가? 누가 백귀 아니랄까 봐. 제멋대로인 데다 속은 깨알처럼 좁고 무심하기까지 하구나.
어딘지 모르게 은룡의 글에서 쓸쓸함이 느껴졌다.
-제멋대로면 어떻고 무심하면 또 어떤가. 그래도 이따금 말상대라도 할 수 있어 즐거우니. 그것으로 충분하다. 다음에 또 보자꾸나, 은백.
***
날이 밝았다.
평소처럼 이른 시각에 일어난 형운은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쏟아지는 피로를 물리치려 애썼다.
지난밤 늦게까지 은룡과 서탁을 생각하다 선잠을 잔 까닭이다.
“저하.”
최 내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 분 익위 입시옵니다.”
“들라 하라.”
곧 좌익위 최치성과 우익위 홍인모가 들어왔다.
“저하를 뵈옵니다.”
믿음직한 두 사람의 모습에 형운은 피곤한 가운데에서도 입가에 한 줄기 미소를 띄웠다.
“그래, 그간 별일은 없었느냐?”
“저하께서 염려해주신 덕에 무탈하였나이다.”
“다행이구나.”
형운의 눈치를 살피던 홍인모가 물었다.
“안색이 편치 않아 보이시옵니다.”
“잡념에 빠져 그런 것이니. 괘의치 마라. 그보다 일은 어찌 되었느냐?”
형운의 물음에 최치성이 보고를 올렸다.
“납치되었다 구출된 임부들은 단 한 명도 예외 없이 집으로 무사히 돌아갔사옵니다.”
“집안의 괄시나 오해는 없었느냐?”
“문제 없도록 조치하였습니다.”
“증언을 위해 귀향도 미룬 대견한 여인들이다. 처우에 소홀함이 없어야 할 것이다.”
“저간의 사정을 충분히 전하였사옵니다. 세자 저하께서도 각별한 신경을 기울이시고 있으니, 근심하지 않으셔도 될 듯하옵니다.”
“그래야지.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일은 어찌 되었느냐?”
최치성의 고개가 낮아졌다.
“아쉽게도 끝내 명백한 증좌가 발견되지 않은 모양이옵니다.”
임부 납치 사건은 해결되었지만, 아쉽게도 그 배후를 캐는 데는 실패하였다는 보고였다.
보고를 받는 형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참으로 상대하기 쉽지 않은 자들이로다. 하나, 이번 사건으로 그 실체가 조금이나마 드러났으니. 언젠가 놈들의 전모가 만천하에 드러날 것이다.”
최치성에 이어 홍인모의 보고가 따라붙었다.
그는 궁 안의 정세를 조사하고 돌아왔다.
“지난번 사건 이후, 신료들의 움직임에 별다른 변화가 감지되진 않았사옵니다.”
“수상한 동향은 없더냐?”
아바마마의 외유를 틈타 온갖 음해를 일삼은 무리다.
유생들을 동원하여 주상 전하까지 움직이게 하였으니, 그들의 계획이 얼마나 치밀하고 음흉하였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이번 일로 호된 깨달음을 얻었을 것이옵니다. 주상 전하께서도 두 눈으로 직접 무고함을 목도 하셨으니. 그들의 감언을 귀담아듣지 않으실 것이옵니다.”
형운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바마마와 신료들의 대립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상황이 이처럼 심각할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최근 벌어진 몇 건의 사건.
그 사건들이 가져올 파장을 생각하면 섬뜩한 느낌마저 지울 수 없었다.
운 좋게 사전에 막아내긴 하였지만, 자칫 잘못하였으면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참담한 광경을 마주하게 되었으리라.
‘언제 또 이런 사건이 벌어질지 모른다.’
폭풍전야.
지금의 평온한 기류가 어쩌면 감당하기 어려운 재난 전의 고요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을 일망타진하기 전까진 결코 방심해선 안 된다.’
십학사.
모든 사건의 배후에 십학사라는 비밀조직이 있었다.
윤곽조차 흐릿한 그들이 왕실을 위협했다.
“저하.”
최 내관의 목소리가 형운의 상념을 방해하였다.
“무슨 일인가?”
문을 열고 들어온 최 내관이 형운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은자원에?”
“그렇사옵니다.”
최 내관이 딱딱하게 경직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지금 즉시 행하라 하셨나이다.”
***
전향사 아래의 이름없는 전각 앞에 한 사내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헐렁한 하급 관복을 입은 사내의 미태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탄을 금치 못할 정도로 뛰어났다.
하지만 정작 은자원 앞에 선 그의 표정은 그리 밝지 못했다.
사내의 이름은 이형운.
세자의 명으로 은자원으로 가게 된 왕세손이었다.
“대체 아바마마께선 무슨 생각이신지 모르겠구나.”
형운의 입에서 한숨이 절로 나왔다.
다시 은자원에 오게 될 줄이야.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다.
“하긴, 예전에도 이런 심정이긴 하였지.”
왕세손이 그가 은자원을 오가게 된 이유.
모두 대리청정하시는 아바마마의 명 때문이었다.
세손궁에 틀어박혀 서책만 읽지 말고 밖으로 나가 더 넓은 세상을 접하란 의미에서였다.
당시엔 부당한 처사라 생각하였지만, 은자원을 오가며 형운이 얻은 것은 적지 않았다.
정치의 어두운 이면을 알았고, 성현의 글로만 접한 치국(治國)과 평천하(平天下)가 백성들의 삶과 얼마나 다른지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김이레, 그녀를 이곳에서 만났으니.
은자원은 그에게 행운의 장소였다.
하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이곳엔 이제 아무도 없었다.
김기대는 물론 서강율도 없었다.
그리고 이레도 없으니.
예전엔 사람이 없길 기원한 적도 있었다.
기대는 성가셨고, 이레는 어려웠으며, 서강율은 불편하였다.
하지만 지금은…….
이젠 다르다.
텅 비어 있을 은자원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마음이 무거워졌다.
아무도 없는 이곳에 오는 것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덧창이 모두 내려져 있군.”
은자원의 덧창이 모조리 내려져 있었다.
예전엔 자신이 이렇게 했었다.
첫째는 세손이라는 신분을 들키지 않기 위함이었고, 둘째로는 어둠이 주는 고요와 아늑함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그가 없는데도 덧창이 내려져 있었다.
“지난번에 왔다 갈 때, 덧창 다시 올리는 걸 깜빡 잊은 모양이군.”
형운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은자원의 문을 열었다.
끼이익.
낡은 소리를 내며 열린 문.
문틈으로 새어 들어온 빛에 은자원 내부를 가득 채운 어둠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음?”
무심한 눈으로 실내를 쓸어보던 형운의 눈에 예상치 못한 것이 잡혔다.
은자원은 어둡지 않았다.
아니, 덧창이 내려져 있어 분명히 어두웠다.
하지만 칠흑 같은 어둠은 아니었다.
흐릿하게 불을 밝힌 유등 덕분이었다.
그리고 그 유등 아래, 한 사람의 그림자가 불빛을 따라 일렁거렸다.
낯선 사람의 출입도 알지 못한 채, 펼쳐놓은 두루마리의 내용을 확인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형운은 조용히 은자원의 문을 닫았다.
철컥.
걸쇠마저 걸어 문을 잠갔다.
은자원은 다시 본연의 어둠으로 물들었다.
그 어둠 속으로 스며들 듯 형운은 발끝으로 걸어 들어갔다.
은자들의 낙원이라 불리는 낡고 허름한 전각.
그곳에…… 그녀가 있었다.
마치 태어날 때부터 그곳이 제 자리인 듯.
책상에 앉아 문서를 살피는 여인의 모습은 낯설지 않았다.
예전엔 언제나 볼 수 있던 모습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제 다시는 볼 수 없으리라 생각한 모습.
‘이레야.’
형운은 입 밖으로 새어나오려 하는 이름을 가까스로 삼켰다.
대신 뒷짐을 지고 조용히 다가가 그녀의 모습을 몰래 훔쳐보았다.
세심하게 서책을 살피는 그녀의 검은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반짝거렸다.
문서의 중요한 부분에 방점을 찍고 주석을 다는 자세는 사뭇 경건하기까지 하였다.
한 가지 일에 몰두하는 여인의 모습이 이토록 아름다운 줄 미처 몰랐다.
아니, 이레이기에 아름다운 것이리라.
내 여인이기에 이토록 눈부신 것이겠지.
워낙에 집중하고 있었던 탓에 형운이 바로 옆으로 다가갈 때까지도 이레는 그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두루마리에 파고 들어갈 듯 몰두하는 모습에 작은 질투심마저 느꼈다.
살며시 다가간 형운이 그녀의 귓가에 부드러운 입김을 불어넣었다.
“무얼 그리 열심히 보고 있소?”
“아!”
화들짝 놀란 이레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러다 그만 의자에 걸려 뒤로 휘청 넘어졌다.
“조심하시오.”
형운이 그녀를 부축하듯 받아주었다.
“누구…… 은백?”
뒤늦게 형운을 확인한 이레의 얼굴에 놀람과 안도의 기색이 번갈아 스쳐 지나갔다.
“정녕 은백이십니까?”
“그렇소. 대체 무엇에 그리 집중하고 있었기에 사람이 오는 것도 모른단 말이오?”
아니, 진짜 묻고 싶었던 것은 다른 것이었다.
어찌 이곳에 있는 것이냐?
빈궁전에 있어야 할 세손빈이 아니던가.
그런 그녀가 은자원에 있다니.
예전 그대로의 모습으로.
그가 그리던 바로 그 모습으로.
그녀의 존재가 반갑고도 어리둥절했다.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일?”
“네.”
“누가 감히 그대에게…….”
형운의 머릿속으로 한 사람이 스치고 지나갔다.
“설마…….”
이레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은백이 떠올리고 계신 그분이 맞을 겁니다.”
형운의 표정이 단단해졌다.
“아무래도 안 되겠소. 내 그분께 이 일을 단단히 따져봐야겠소.”
세자를 만나기 위해 돌아서는 형운을 이레가 잡았다.
“그러실 것 없습니다. 오늘 하루만 특별히 부탁한다 하셨으니까요.”
“그게 정말이오?”
“네. 그리고…….”
이레는 형운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덕분에 이렇게 은백을 만날 수 있었지 않습니까? 그러니 저는 아무 불만 없습니다.”
이레의 달콤한 말에 형운은 저도 모르게 이레를 안았다.
단단한 그의 품에 이레도 고개를 기댔다.
“이곳에 내가 있을 것을 알았소?”
“몰랐습니다.”
“하면, 영문도 모른 채 이곳으로 몰래 온 것이오?”
“그분께서 시켜서 온 것만은 아닙니다. 그저 이곳이 그리웠습니다.”
형운은 그립다는 이레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만 같았다.
그도 그리웠다.
은자원이.
아니다.
그가 정녕 그리웠던 건 은자원이 아니라, 이곳에 오면 만날 수 있는 이 사람이었을 터다.
그 사실을 이레를 본 다음에야 깨달을 수 있었다.
문득, 지난밤 은룡이 한 말이 떠올랐다.
-내 언제고 기회 닿는 대로 오늘 손해 본 것을 만회하마.
설마, 아니겠지.
그래. 그저 단순한 우연일 뿐이다.
“큰일이오. 이토록 무모하니, 장차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소.”
“저는 그렇게 무모하지 않습니다.”
“무어라?”
무모하지 않다고?
세손빈이 은밀히 빈궁을 떠나 은자원에 숨어들었는데, 그게 무모하지 않단 말이냐?
뿌루퉁한 표정으로 올려다보는 이레를 향해 형운이 고개를 숙였다.
범나비처럼 빠르고 무람없이 다가선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머금었다.
마치 벌을 내리듯.
다신 이런 무모한 일 해선 아니 된다는 듯.
그는 조금은 매섭게 이레의 입술을 탐닉하였다.
잠시 주춤하였지만, 그녀 역시 선선히 형운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불길처럼 일어난 기갈은 좀처럼 채워지지 않았다.
홀로 여름을 만난 사람처럼 형운은 자꾸만 열기가 차올랐다.
느닷없이 마주한 이 행복과 졸음처럼 밀려든 연모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동요해선 아니 되고, 낯빛에 마음을 드러내선 아니 된다 배웠건만.
그간의 모든 교육이 무소용이었다.
이레 앞에선 저도 모르게 속내를 드러내게 되었고, 아이처럼 아무것도 아닌 일로 흔들렸다.
형운은 머금고 있는 이레의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아…….”
옅은 신음과 함께 그녀의 붉은 입술이 잘 익은 석류처럼 벌어졌다.
그 찰나의 틈새를 놓치지 않는다.
무방비로 열린 그녀의 입속으로 범람하는 강물처럼 스며든다.
죽음을 각오한 전장의 장수인 듯 형운은 치열한 전투를 멈추지 않는다.
집요한 그의 입맞춤에 이레의 몸이 느른해졌다.
봄을 만난 아기곰처럼 한없이 보드랍고 나붓했다.
그러다 한순간.
까물까물 아득한 듯 몸을 휘청거렸다.
형운은 이레의 뒷머리를 한 손으로 단단히 지탱하고 다른 한 손으론 그녀의 허리를 한껏 휘어 감았다.
한 품에 폭 안기는 그녀의 작은 몸집.
내 여인의 따스한 체온.
들뛰던 맥동이 조금씩 제자리를 찾았다.
야생마의 투레질처럼 거칠던 숨소리도 자분자분 낮아졌다.
바로 그때였다.
삐그덕.
닫혀 있던 은자원의 대문을 크게 흔들렸다.
뜨거운 숨결을 주고받던 형운과 이레의 움직임이 멈칫 굳어버렸다.
쩌릿한 긴장감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은자원엔 달리 찾아올 사람도 없건만.
대체 누굴까?
들키면 큰일이라는 생각에 형운과 이레의 얼굴 위로 초조함이 물들었다.
그나마 형운이 들어오며 문을 걸어둔 것이 다행이랄까.
‘가만. 이런 상황이 전에도 있었던 것 같은데.’
급박한 상황임에도 형운은 왠지 모를 향수를 느꼈다.
덜컹덜컹.
닫힌 대문이 요란하게 흔들렸다.
“어허, 이것이 어찌 이리 닫혔을까?”
형운의 눈이 커졌다.
기억났다.
예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
그때, 문을 열었던 사람은 분명 지금은 떠나고 없는 그 사람이었다.
형운은 무심코 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레가 그를 잡았다.
그리고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아닙니다.”
“아니라고? 하지만…….”
저 가벼운 말투.
그 말고 또 누가 저런단 말인가?
이레는 붓을 들고 종이에 글을 썼다.
-제 오라비입니다.
-오라비라면 김기대, 실종된 그를 말함이오?
-그렇습니다.
형운의 표정이 짧은 순간 여러 번 바뀌었다.
김기대가 돌아오다니.
이레가 그의 귀환을 얼마나 간절히 기다렸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형운으로서는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럴 때가 아니다.
당장 문을 열고 그를 맞아야지.
그간의 사연을 듣고, 왜 그리 소식이 없었는지 따져 물어야겠다.
하지만 형운의 계획은 이번에도 실패했다.
이레가 그의 목을 두 팔로 감싸 안았던 까닭이다.
형운이 눈으로 물었다.
‘왜 이러는 것이오?’
이레는 대답 대신 그의 당황한 입술에 제 입술을 맞추었다.
‘잠시만. 이대로 잠시만 더…… 은백과 단둘이 있고 싶습니다.’
이레의 마음이 고스란히 형운에게로 전해졌다.
“거참, 아무도 없는 건가?”
덜컥덜컥, 기대는 포기하지 않고 은자원의 대문을 밀고 당겼다.
삐그덕 거리는 문소리에 형운과 이레의 심장도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후두둑.
갑작스러운 빗방울이 지붕을 두드렸다.
심장 뛰는 소리와 빗소리가 한데 어울려 감미롭게 번져나갔다.
빗소리에 갇힌 봄밤은…….
달콤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