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 상궁들의 비밀
궁궐의 내밀한 안쪽.
내내 주인 없었던 전각은 근래 새로운 주인 맞을 준비로 분주하였다.
세손빈을 위한 물건들이 속속 전각에 당도하였다.
조선 산하에 피어나는 계절 꽃이 수자 놓인 열두 폭 병풍과 남해의 장인이 만들었다는 나비장.
섬세한 손길로 한 땀 한 땀 공들인 휘장과 화사한 봄빛을 닮은 보료.
하나같이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었고, 새롭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런데 딱 하나.
이 방과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 있었다.
“저 물건은 대체 뭘까?”
빈궁을 정리하던 어린 궁녀 하나가 낡은 물건을 턱짓하며 물었다.
바닥을 닦던 궁녀가 반문하였다.
“서탁 말이야?”
“다른 물건은 모두 새것인데, 저 서탁만은 유독 낡아 보여서.”
그녀의 말처럼 서탁은 오래되고 낡아 보였다.
긴 세월을 견딘 탓에 처음의 광택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대신 사람의 손때를 두텁게 머금고 있었다.
“내가 듣기론 세손빈께서 사가에서 직접 챙겨오신 거라 하던걸?”
“세손빈께서?”
“몇 가지 물건을 가져오셨는데, 그중에서도 저 서탁을 유달리 아끼신다더라.”
“왜 하필 서탁이래? 세손빈께선 참으로 특이한 분인 모양이네. 그러고 보니 세손 저하께서도 서탁에 예민하시단 소문이 있던데?”
“말도 마라. 세손궁의 궁녀들도 함부로 건들지 못한다더라.”
“왜들 그리 서탁에 집착하시는 걸까?”
“난들 그 깊은 속을 어찌 알겠느냐. 아무튼, 두 분 모두 서탁을 그리 중하게 여기시는 걸 보면, 천생배필이신 모양이야.”
“그러게.”
서탁을 신기하게 살피던 궁녀 하나가 종이 한 장을 펼쳐놓았다.
“종이는 왜?”
“서탁이 허전해 보여서.”
“쓸데없는 짓 한다.”
“그래도 종이를 펼쳐놓으니, 저 낡은 서탁도 분위기가 그럭저럭 괜찮아 보이지 않느냐?”
궁녀들의 정리가 끝났다.
모든 준비가 마무리되자 상궁이 마지막 점검을 하였다.
“누가 종이를 펼쳤을꼬.”
서탁 위에 펼쳐진 종이를 본 상궁은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서탁과 흰 종이의 조합이 썩 괜찮아 보였던 까닭이다.
점검을 마친 상궁은 전각의 문을 닫고 나갔다.
이제 날이 밝고 세손빈께서 전각으로 들어오는 일만 남았다.
부산을 떨던 궁녀들이 떠난 방안은 어둡고 고요하였다.
어느덧 날이 저물고 밤이 되었다.
흐릿한 달빛이 동창에 스며들었다.
푸른 달빛이 서탁을 비추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서탁 위에 펼쳐진 종이에 톡, 검은 먹 자국 하나가 솟구쳤다.
물이 번지듯 존재감을 드러낸 검은 자취는 이내 수면 위를 미끄러지듯 하얀 공간을 지워나갔다.
그렇게 검게 이어진 점과 선은 어느 사이 글이 되었다.
-때가 무르익었는가.
단정한 글씨 속에 깃든 다정함.
화였다.
이내 흩어진 글씨 위로 급한 성정을 고스란히 담은 다른 이의 글이 떠올랐다. 상이었다.
-무슨 소리인가 했더니, 오늘이 바로 그날인 모양이군.
-아직 어린 것이 무얼 안다고, 혼인이란 말인가.
마치 친손녀가 혼인한 듯 아쉽고 섭섭해하는 화의 말을 상이 받아쳤다.
-어리긴, 뭐가 어려? 그 나이면 알 건 다 알아.
-그건 평범한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고.
-아이는 뭐가 달라?
-내내 별채에 갇혀 지내다시피 하지 않았느냐? 아직 어리고 순진하니, 혼인이니 동뢰연이니 하는 말이 얼마나 낯설고 생경하겠느냐?
-별채에 갇혀 지내? 언제적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구나. 걱정 마라. 내가 아는 한 그 아이만큼 사연 많고 경험 많은 백귀도 없을 터이니.
-그래도 아직 어린데.
-우리 눈에만 어려 보이는 게야.
-동뢰연의 절차도 복잡할 터인데.
-상궁들이 알아서 다 일러 줄 터인데 무슨 걱정이냐? 그저 하라는 대로 하고, 행하라는 대로 행하다 보면 밤이 후딱 지나있을 것이다.
화와 상의 대화에 예가 한 자락 끼어들었다.
-그리 잘 아는 걸 보니, 어디서 주워들은 가락은 있는 것 같소.
-주워듣긴 뭘 주워들어? 내가 직접 몸소 겪은 일이니, 아는 게 당연하지 않으냐.
버럭 화를 내는 상에게 악이 은근하게 물었다.
-그래서 너는 하라는 대로 다 했느냐?
-했지.
-하라는 대로만?
-당연하지.
-딱 거기까지만 했단 말이지?
악의 거듭된 물음에 상이 어리둥절하여 되물었다.
-거기까지만 하지. 뭘 더 하란 말이냐?
-쯧쯧, 역시 골샌님답군.
혀를 차는 악의 말에 호응하듯 화와 예의 답이 이어졌다.
-예상한 대로다.
-비상할 정도로 고지식하여, 혹여나 그러지 않을까 생각하였더니. 과연 그랬구려.
셋의 한결같은 반응에 상은 당황하였다.
-뭐야? 그럼 뭐가 더 있는데? 동뢰연에서 하라는 대로 해야지, 뭘 더해야 하는 건데? 밖에 사람이 딱 버티고 있는데 뭘 더 할 수 있단 말이냐.
악의 대답이 이어졌다.
-어린애는 몰라도 된다.
-뭐라? 어린애? 이것들이 이제 보니 무에 음흉한 수작을 기대한 모양인데. 후후, 역시 직접 겪어보지 못한 것이 이런 식으로 드러나는군.
호기롭게 웃은 상이 크고 거친 필체로 글을 이어나갔다.
-이 백귀들아, 왕실의 혼인이 어디 범상한 자들과 같은 줄 아느냐? 동뢰연을 치르는 침소 밖에 상궁들이 번을 서고 있느니라. 너희가 생각하는 그 어른들의 수작은 언감생심 감히 꿈도 꿀 수 없느니라.
상은 의기양양했지만, 다른 이들의 반응은 여전했다.
-후후후.
악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허허.
화의 글 속엔 안타까움이 고스란히 묻어있었다.
-꽃나무 아래 놓인 한 동이 술을(花間一壺酒) 마주할 벗 없이 홀로 마시네(獨酌無相親).
예의 뜻 모를 말에 상은 발끈했다.
-동뢰연과 취객의 풍류를 노래한 이백의 시가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정녕 모르시오?
-뭘?
-침소 밖을 지키고 선 상궁들의 비밀.
-상궁들에게 비밀이 있었어?
갈수록 더해가는 의문에 상은 혼란에 빠졌다.
화와 악, 예는 그를 제쳐 두었다.
-아이들이 상처럼 아둔하지 않아야 할 터인데.
화가 근심하니, 악이 다독였다.
-좀 전엔 아이에게 혼인은 아직 이르다 하더니. 걱정 마시오. 별 탈 없을 터이니. 은백이라는 아이, 첫인상과 달리 제법 사내다운 면이 있는 모양이더이다.
-총명한 아이들이니, 마냥 천진하지는 않을 것이오.
악과 예의 이야기에 상은 기어이 분통을 터트렸다.
-무슨 말이야? 이것들이 왜 알아듣지 못할 소리만 하는 것이냐?
고르지 못한 상의 글씨가 서탁 위를 질주했다.
그러나 그의 물음에 답하는 이는 없었다.
그저 화내는 상의 글만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할 뿐이다.
-학다리 분질러 거북이 뚜껑 열리도록 매질해도 분이 안 풀릴 백귀들아! 상궁들의 비밀이 뭐냐? 그 비밀이 대체 뭐냔 말이야?
***
한 올 한 올.
매듭을 짓듯 이레의 손가락을 제 손으로 결박하던 형운은 마침내 이레의 양팔을 빼앗았다.
형운에게 갇혀 나비잠 자는 아이가 된 이레는 작게 몸을 비틀었다.
그녀가 움직일 때마다 자리옷이 사각대는 소리를 자아냈다.
그 작은 사각거림마저도 외부로 전해질까 걱정되었다.
“밖에 사람들이 있습니다.”
행여 밖에 들릴세라, 한껏 조심하는 그녀에게 형운이 미소를 보였다.
“알고 있다.”
“그런데 어찌 이러십니까?”
“말하지 않았느냐, 아직 너에게 취할 나의 예가 남아 있다고.”
말과 함께 형운은 이레를 향해 고개를 내렸다.
일순, 이레는 다급히 형운을 불렀다.
“은백…….”
“왜 그러느냐?”
어리둥절한 얼굴로 형운이 물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아니, 해야 할 말입니다.”
“무어냐?”
“길일, 길일을 잡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길일?”
“네. 합방을 위한 길일을…….”
일순, 그의 표정이 흐려졌다.
“내가 조급하였느냐? 내 조바심이 싫은 것이냐?”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면…….”
잠시 생각하던 형운이 물음을 이었다.
“나의 무언가가 네 심기를 어지럽힌 것이냐?”
“그런 어리석은 말씀이 어디 있습니까.”
“그럼 무엇이냐? 어찌하여…….”
“저는, 전…… 어미의 생(生)을 훔친 아입니다.”
내내 마음에 품고 있던 이야기.
이레는 차마 보이지 못한 멍에를 형운에게 내보였다.
“저를 낳고 제 어머닌, 내내 자리보전하셨습니다.”
형운이 이레를 내려다보았다.
아무 말도 없는 그를 이레가 시선을 들어 응시했다.
“제겐 나쁜 기운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걱정됩니다.”
“…….”
“행여 은백께서 편찮으시진 않을까. 저로 인해 은백께 삿된 잡귀가 범접하진 않을까 두렵습니다. 게다가 오늘은 하늘이 흐려 양보다 음의 기운이 강하다고 하니…….”
내내 침묵하던 형운의 입가에 불현듯 긴 미소가 붙었다.
“늘 지혜롭기에 모든 것을 알고 있을 거로 생각하였다. 자신이 선택한 길은 거침없이 걷기에 무서울 것이 없다 생각하였거늘…….”
형운은 이레의 콧방울에 자신의 코를 콕, 가볍게 찍었다.
“이런 면도 있었구나. 그런 헛된 생각으로 제 마음을 갉아먹고 있구나.”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저는 정말로…….”
“이레야.”
조용한 부름.
형운은 불안하게 흔들리는 그녀의 눈동자를 내려다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괜찮다.”
“……저하.”
“너는 나쁘지 않다. 불행하지 않다. 너로 인해 누군가 불행해질 리 없다.”
“하지만 저하.”
형운은 따스한 눈길로 이레의 창백한 얼굴을 어루만졌다.
“내가 너를 만나 이처럼 변하였으니. 널 가슴에 품고 이토록 기뻐하였으니. 널 간절히 원하며 이렇게 행복하였으니. 그러니 괜한 걱정하지 마라. 불안해하지 마라.”
그의 속삭임이 이어졌다.
“난 이미 세상에서 가장 운 좋은 사람이다. 너와 이렇게 함께 있을 수 있게 되었으니. 이 깊은 밤 너의 눈의 바라볼 수 있게 되었으니…….”
형운이 이레를 보며 물었다.
“아직도 불안하냐?”
이레는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형운이 미소 지었다.
“그럼 그 불안과 불행 내가 모두 녹여 없애주마. 단 한 점 티끌 한 올 남기지 않고. 모조리 물어뜯고 삼켜 다시는 네 곁에 얼씬도 못 하게 하마.”
다부진 맹세와 함께 형운은 무람없이 그녀를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그의 입술이 이레의 입술을 더듬고 머금었다.
“음…….”
벌어진 잇새를 파고드는 몰캉한 감촉.
예리하게 날을 세운 연분홍빛 불꽃이 이레의 입속을 빈틈없이 더듬었다.
수줍어 안으로 달아나는 이레를 그가 기어코 잡았다.
일순, 나른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레의 매초롬한 탄성이 형운의 입속을 넘나들었다.
작게 바동거리는 이레의 몸짓에 형운이 포박이 잠시간 허술해졌다.
그 잠깐의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레가 달아났다.
그러나 쉽게 놓아줄 형운이 아니었다.
달아나고, 뒤쫓고.
풀어주고, 다시 잡히는 놀이.
너무 단순하여 금세 싫증 날 것 같았던 입맞춤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더욱 치열해졌다.
입안을 더듬는 감촉이, 잡고 놓아주지 않는 그의 집념이 거칠게 그녀를 몰아붙였다.
푸른 자두를 머금은 듯 연신 입안에 단침이 고였다.
아득하고 아찔한 꿈속인 듯 온몸이 나른하였다.
형운과 맞잡은 손가락 마디마디로 저릿한 전율이 흘렀다.
봄에 내린 눈처럼 가없이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그의 입술이 닿을 때마다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그런 속내를 알지 못하는 듯, 내내 이레의 입술을 맴돌던 형운의 입술이 그녀의 목덜미로 흘러내렸다.
놀란 듯 이레가 허리를 비틀었다.
“괜찮다, 놀라지 마라.”
형운은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 깍지 낀 손을 풀었다.
그리고 토닥토닥 어깨를 다독였다.
달래는 손짓은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이내 그의 긴 손가락이 동그랗고 봉긋한 하얀 언덕 위에 안착했다.
잠시 방심한 사이 일어난 느닷없는 기습.
이레의 가슴이 거칠게 들썩였다.
얇은 자리옷 위로 그의 손길이 느껴졌다.
목덜미를 더듬는 입술의 아릿한 촉감과 빙빙 가슴을 맴도는 손끝의 감각이 합쳐져 온몸을 간질였다.
보이지 않는 깃털로 전신을 쓸어내리는 것만 같았다.
혈관의 흐름이 빨라졌다.
심장의 박동이 거칠어졌다.
이레는 허공에 까치발을 세웠다.
흡사 벼랑 끝에 매달린 기분이라.
결박 풀린 손으로 형운의 목을 휘감았다.
그리고 속삭인다.
“나를…… 놓지 마십시오.”
“안 놔, 절대 놔 주지 않을 것이야.”
불덩이를 삼킨 듯한 음성이 이레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무사공평(無私公平).
어느 한 곳 치우침 없는 것이 군주의 미덕이라 배웠다.
하지만 형운의 마음 추는 이미 한곳으로 치우쳐 버렸다.
군주이기 전에 그도 사람이었고, 사내였다.
한 여인의 오롯한 정인이었다.
세상과 이 여인을 두고 저울질을 해야 한다 해도…….
한번 기울어진 저울의 추를 다시 제자리로 돌릴 순 없으리라.
아니, 세상과 이 여인.
둘 모두를 가질 것이다.
욕심이라도 하여도 상관없다.
지나친 탐욕이라 손가락질해도 신경 쓰지 않으리라.
형운의 눈동자에 확고한 의지가 깃들었다.
오직 한곳만을 보고 달리는 야생마인 듯 그는 이레를 향해 곧장 나아갔다.
그녀의 입술이, 그녀의 눈동자가, 코와 목덜미, 가슴과 자리옷 아래로 보이는 잘록한 허리, 그리고…….
형운은 이레의 모든 것을 눈에 담았다.
목덜미를 베어 물때마다 꽃송아리처럼 오므려지는 발끝.
생경한 경험이 전하는 야릇한 감각에 둥글게 휘어지는 등.
와스스 소름이 돋을 때마다 그의 어깨를 짓누르는 작고 하얀 손.
형운의 허리에 휘감긴 가늘고 긴 다리.
조급함이 담긴 목소리, 아릿한 탄성.
내뿜는 숨결에 담기 향기.
이 밤의 이레는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다웠다.
영원히 간직하고 싶을 만큼…….
박제하여 매번 꺼내 보고 싶을 만큼…….
형운의 마음이 급해졌다.
흐리던 하늘이 개이고 먼 곳에서 새벽닭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아침이 멀지 않았다.
***
“상궁 마마님! 현 상궁 마마님!”
눈앞에서 어린 궁녀가 손을 흔들었다.
까무룩 잠이 들었던 현 상궁은 화들짝 놀라며 눈을 떴다.
“이런, 잠시 눈만 붙인다 하였는데.”
그만 잠이 들고 만 모양이었다.
급히 눈가에 묻은 잠을 쫓아낸 노 상궁이 장막을 돌아보았다.
혹여 조각 잠이 든 사이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까.
세손과 빈께서 동뢰연을 치르는 밤이라.
현 상궁의 주위에는 동년배의 늙은 상궁들이 셋이나 더 자리하고 있었다.
끔뻑거리는 노파의 눈짓에 다른 노파들 역시 눈을 끔뻑거렸다.
칠십 평생을 함께한 벗들이라.
그저 주고받는 눈짓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장막 안은 밤사이 평온하였다는 것을.
현 상궁은 만족한 듯 쪼글쪼글한 입술을 길게 늘였다.
노파는 자신을 깨운 어린 궁녀에게 명을 내렸다.
“소세물 준비하라 일러라.”
“이미 준비해두었습니다.”
“대전의 장 상궁과 중궁전의 이 상궁에게 소세물 준비하라고 하거라.”
“네, 벌써 준비해두었다니까요.”
“어허, 이것이 어쩌자고 사람 말을 못 알아듣는 것이냐? 소세물 준비하라니까.”
버럭 소리를 지르는 현 상궁을 향해 어린 궁녀가 입술을 삐죽거렸다.
“어유, 노 상궁님들. 요즘 들어 귀가 더 안 들리는 거 같단 말이야.”
“뭐라고? 혼자 뭐라 중얼거리는 것이냐.”
“아닙니다.”
서둘러 고개를 저은 어린 궁녀가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소세물 준비하겠습니다.”
또박또박 입 모양을 만들며 말하자 그제야 알아들은 듯 현 상궁을 비롯한 나머지 노 상궁들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야 말귀를 알아듣는구나.”
흡족한 네 명의 상궁들이 장막을 향해 돌아섰다.
“세손 저하, 기침하실 시각이옵니다.”
그렇게 철저히 예법에 따른 동뢰연의 밤이 지나갔다.
***
세상이 연한 초록빛으로 뒤덮였다.
완연한 봄.
동뢰연을 치른 이레에겐 또 다른 궁의 절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중전을 비롯한 내명부의 웃어른을 차례로 찾아뵙는 조현례.
왕이 문무백관들을 참석시켜 하례를 받게 하고 회연을 개최하는 회례.
마지막으로 신랑 신부가 함께 조상을 모신 사당을 배알하는 묘현례.
왕세손의 빈으로, 왕실의 여인으로 그리고 며느리로 인정받는 지난한 과정은 열흘에 걸쳐 치러졌다.
그사이 봄비가 내렸다.
담 귀퉁이 구석진 곳에 자리한 겨울의 마지막 자취마저 맥없이 씻겨 나갔다.
먼 과거, 유난히 일을 즐기고 악필이었던 어느 임금께서 궁궐에 심은 뽕나무에 푸른 오디 열매가 맺혔다.
누에 벌레는 하루가 다르게 몸을 부풀렸다.
계절이 무르익고 있었다.
할아버지들의 염려에도 불구하고 이레는 큰 탈 없이 세손빈의 자리에 적응하였다.
별궁에서의 교육도 도움이 되었지만, 어린 시절부터 할아버지들께 배운 궁중예법이 가장 도움이 되었다.
웃전들 앞에서도 시종일관 차분함을 잊지 않는 그녀의 모습에 주상 전하는 하늘이 점지한 세손빈이 아니냐며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여러 날이 흘렀다.
세손빈의 반복되는 일과에 적응하였을 무렵.
한 사람이 빈궁전을 찾아왔다.
“화완 옹주 마마께서?”
예정에 없던 손님의 방문에 이레는 두 눈을 크게 떴다.
화완 옹주라면…….
세자저하의 누이이자 왕세손의 고모가 아니시던가.
삼간택과 조현례 때 스치듯 그녀를 만난 적이 있었다.
유달리 고아한 분위기를 풍기던 여인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진즉 찾아왔어야 하였거늘…….”
처소로 발을 들인 화완 옹주는 하얀 얼굴 가득 미소를 지었다.
이레는 금정을 시켜 서둘러 다과상을 마련하고, 능숙한 솜씨로 차를 우려내었다.
그 우아하고 기품있는 행동에 화완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그러나 이내 아무 일 없다는 듯 그녀는 웃음을 보였다.
“궁의 생활이 불편하진 않으십니까? 모후이신 영빈 마마께서 내내 찾아가 보라 하시었는데. 이제야 찾아왔습니다.”
“워낙 살뜰히 보살펴 주신 터라. 불편한 것은 전혀 없습니다.”
“참으로 다행입니다.”
화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레는 처음으로 옹주를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다.
유난히 하얀 얼굴이었다.
지나치게 희고 고아서 창백해 보이기까지 했다.
가늘게 휘어진 눈썹과 흑백이 분명한 눈동자는 잔물결에 담긴 붉은 황혼처럼 반짝였고, 반듯하게 선 콧날은 버선코처럼 부드럽게 여며져 있었다.
창백한 낯빛과 대비되는 그녀의 입술은 눈 위에 떨어진 한 송이 꽃잎처럼 붉고 선명하였다.
이레는 화완 옹주에게서 말로는 표현 못 할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수면에 인 파문처럼, 웅장한 종소리처럼, 진동하고 공명하였다.
마치 바람에 숲이 흔들리고, 바다가 호응하는 것 같았다.
화완의 사소한 움직임, 가벼운 웃음 하나하나에 이레는 솜털이 곤두설 만큼 예민해지고 긴장하였다.
처음 겪는 생소함에 이레는 당황했다.
지금까지 그 누구를 만나도 이런 느낌을 받은 적이 없었다.
오늘따라 왜 이리 예민해진 것인지.
그러다 문득 알게 되었다.
화완 옹주 역시 자신을 살피고 있음을.
차를 마시고, 궁궐의 엄격한 예법을 언급하며, 화완은 끊임없이 이레를 탐색하였다.
처음엔 호기심으로 시작했으나, 종내에 이르러서는 노골적인 시선이 되었다.
이레는 가볍게 헛기침을 하였다.
“이런, 미안합니다. 나도 모르게 결례를 범했습니다.”
불편한 기색을 눈치챈 화완이 황급히 사과했다.
“기분 나빴다면 용서하세요. 참으로 고운 분이라, 그만 넋을 놓고 말았군요.”
“과분한 말씀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이리 미려한 분을 빈궁으로 맞이하시다니. 우리 세손의 복이자 우리 왕실의 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레에게 몇 마디 덕담을 건넨 화완이 뒤늦게 찾아온 용건을 꺼냈다.
화완의 눈짓에 옹주와 함께 온 상궁이 커다란 자개함을 내려놓았다.
“이것이 다 무엇입니까?”
“영빈 마마의 선물입니다. 세손빈께서 입궐하였는데, 변변한 선물도 하지 못하였다고 한 걱정이셨답니다.”
자개함에는 어린아이 주먹만 한 진주가 박힌 비녀와 황금으로 만든 첩지, 산호 노리개를 비롯한 휘황찬란한 패물이 한가득 들어있었다.
“그리고 이건 이 화완의 선물입니다.”
화완 옹주의 소맷자락에서 소박한 비단 주머니가 나왔다.
연분홍 패랭이꽃이 수자 놓인 향낭이었다.
“옹주께서 직접 수자를 놓으신 겁니까?”
“영 손재주가 없는 터라. 애를 쓴다고 했는데도 이렇답니다.”
“감히 제가 이걸 받아도 되겠습니까?”
“제가 즐겨 쓰는 향인데.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습니다. 싫은 것이 아니라면 받아 주겠습니까?”
“감히 어느 분의 선물이라고 제가 거절하겠나이까.”
이레는 감사한 마음으로 화완의 선물을 갈무리하였다.
기쁜 표정으로 지켜보던 옹주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알고 있겠지만, 이 화완은 스물이 되던 해에 청상이 된 박복한 여인이랍니다. 주상 전하의 은덕으로 궁에서 생활하게 되었으나, 어찌 이곳이 진정한 안식처가 될 수 있겠습니까.”
신세를 털어놓는 화완의 얼굴에 잠시 쓸쓸함이 감돌았다.
“정붙일 자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마음 건넬 동무도 없으니. 헛헛하여 늘 외로웠답니다. 그러다 세손빈의 모습을 보니, 어쩌면 앞으로 궁에도 내 마음 알아줄 이 하나 생기는 건 아닐까 하는 희망이 보이더군요.”
화완옹주는 이레의 손을 잡았다.
“제 전각의 문은 늘 열려 있답니다.”
“곱게 보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안부나 물어볼 요량으로 잠시 들린 것인데, 그만 말이 길어지고 말았습니다.”
옹주가 서둘러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러다 문득 이레의 서탁에 놓인 사소한 물건 하나에 눈길이 꽂혔다.
“저것은…….”
침통이었다.
한데, 묘하게 그 생김이 눈에 익었다.
“보아하니 침통인 듯한데, 어디 불편한 곳이라도 있습니까?”
“아닙니다.”
“하면 어째서 침통을…….”
“추억이 깃든 물건이라 간직하고 있답니다.”
이레의 입가에 그리운 미소가 피어올랐다.
저 침통을 볼 때면 여러 추억이 떠오르곤 하였다.
단옷날 기대와 형운, 그리고 서강율과의 만남.
수월과 장무열.
그립고도 아득한 기억들.
“세손빈께…… 무척 중요한 물건인가 봅니다.”
“네, 그렇습니다.”
“……그렇군요.”
침통과 이레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던 화완옹주의 입가에 예의 고아한 미소가 걸렸다.
처음 전각을 찾을 때 지었던 그 미소였다.
이레는 빈궁전 입구까지 화완을 배웅하였다.
“그럼…… 기다리겠습니다.”
다음을 기약하며 화완이 떠났다.
이레는 그녀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분명 다정한 분이신데…….”
자상한 표정과 말투.
유난히 깊은 눈빛.
외롭지만 살가운 분이신 건 확실하였다.
하지만…….
무슨 이유일까?
돌아서는 화완 옹주에게서 싸늘한 냉기가 느껴졌다.
이레의 무의식이 속삭였다.
가면 같은 다정함 너머에 도사린 속내를 경계하라고.
그 차가움이 날카로운 비수가 될 수 있음을 경고했다.
멍하니 화완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고 있자니, 긴 그림자가 다가왔다.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시오?”
고개를 돌려보니, 미려한 아름다움을 지닌 사내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형운이었다.
굳었던 이레의 표정이 화사하게 되살아났다.
“저하, 언제 오셨습니까?”
“오늘 햇살이 유난히 좋다오. 지금부터 잠시 산책가려 하는데, 괜찮으면 함께 가지 않으시겠소?”
***
형운과 이레는 봄 햇살 아래를 거닐었다.
선선한 바람이 나무그늘과 어우러지니, 봄 향기가 물씬하였다.
“낯설고 새로운 일이 많아 힘들지 않소?”
이레에게 묻는 형운의 나직한 음성엔 기품이 가득했다.
“모두 자상하고 세심하게 살펴주시어 큰 불편함이 없습니다.”
형운이 이레의 손을 잡았다.
“뭐든 내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 말하오.”
이레는 얼굴을 붉히며 슬그머니 형운에게 잡힌 제 손을 거두었다.
그녀의 거절에 형운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실수라도 하였소?”
“아닙니다. 다만…….”
이레는 뒤를 눈짓했다.
무심코 그녀를 따라 고개를 돌린 형운은 크게 웃었다.
세손과 세손빈의 산책이었다.
당연히 그들을 따르는 궁녀와 환관들이 길게 줄을 지어 뒤따르고 있었다.
지켜보는 사람이 한둘이 아닌지라.
형운의 스스럼 없는 행동들이 수줍었던 모양이다.
“아무래도 별궁에서의 교육이 시원찮았던가 보오.”
“무슨 말씀이십니까?”
눈을 깜빡이며 묻는 이레의 손을 형운이 다시 잡았다.
이레는 반사적으로 손을 거두려 하였지만, 이번엔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형운이 굳게 잡고 놓아주지 않았던 까닭이다.
놓아주기는커녕 오히려 강하게 당겼다.
거센 악력에 이레는 쓰러지듯 그의 너른 품으로 떨어졌다.
“저, 저하.”
놀란 이레는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빈궁은 항상 생각이 많아 탈이오.”
“제가 무엇을 오해하였습니까?”
“지켜보는 눈이 많을수록…….”
형운이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기대에 부응하려 노력해야 한다오.”
“네?”
놀라는 이레의 입술에 형운의 입술이 봄나비처럼 내려앉았다.
순간, 툭.
모든 것이 정지되었다.
돌연한 상황에 환관들과 궁인들은 물론 이레 역시도 돌처럼 굳어졌다.
어디선가 날아든 노랑 나비떼가 이레와 형운의 머리 위를 맴돌았다.
초록의 봄날은 그렇게 짙어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