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 존비(尊卑)의 예(禮)
이레의 음성이 잘게 떨렸다.
“진정…… 오라버니십니까?”
자주 이런 꿈을 꾸었다.
고단한 꿈길 끝자락엔 언제나 오라버니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꿈에서 깨어나면 사라져버리는 허망한 신기루.
행여 그런 것은 아닐까 두려웠다.
하지만…….
이레를 향해 두 팔을 활짝 벌리는 기대의 모습은 정녕코 꿈이 아니었다.
밤안개가 몰고 온 기적이었다.
“그럼, 내가 누구로 보이느냐?”
연신 눈가를 비비는 이레에게 기대가 말했다.
오라버니는 여전하였다.
입가를 길게 늘이며 짓는 미소도.
초승달 모양으로 휘어지는 눈매도.
모든 것이 떠나기 전과 다름이 없었다.
“오라버니로 보입니다.”
이레의 눈동자에 먹먹한 눈물 벽이 세워졌다.
반가움과 그리움, 그리고 오래도록 눌러왔던 설움이 와스스 무너지며 흘러내렸다.
기대는 말없이 누이의 눈가를 닦아 주었다.
눈물과 웃음이 뒤섞인 얼굴을 보며 그가 말했다.
“많이 기다렸느냐?”
오라버니의 자상한 물음에 이레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많이 기다렸습니다. 어찌 기다리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사흘 후에 돌아온다 하신 분께서 수개월이 지나도록 오시지 않았으니.”
이레는 곱게 눈을 흘기며 질문을 쏟아냈다.
“얼굴의 그 상처는 어찌 된 것입니까? 이렇게 멀쩡히 살아 계셨으면서 그동안 왜 소식이 없으셨던 것입니까? 기다리는 사람들의 찢어지는 마음을 모르십니까? 어찌 그리 무정하십니까?”
“미안하구나. 어쩌다 보니 그리되었다.”
그는 사람 좋은 웃음으로 대답을 얼버무렸다.
하지만 그 웃음 속에 담긴 사정을 어찌 모를까.
답을 듣지 않아도 충분히 헤아릴 수 있었다.
“되었습니다. 이렇게 무사하시니,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기대가 실족하였다는 벼랑 끝.
그 끝을 직접 다녀왔더랬다.
그저 내려다보기에도 아찔한 천 길 낭떠러지였다.
그곳에서 떨어지고도 온전히 돌아왔으니.
그저 하늘에 감사할 따름이었다.
“그런데 이레야…….”
이번엔 기대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너는 어찌 이리된 것이냐?”
“무슨 말씀이십니까?”
반문하는 이레에게 기대가 굳은 표정을 지었다.
“내 누누이 말하지 않았느냐? 너의 배필은 내가 직접 골라주겠다고. 한데, 이게 무어냐? 잠시 다른 곳에 있다 돌아온 사이에 덜컥 세손빈이 되어버리다니. 정말 잠시도 눈을 뗄 수가 없구나.”
소매로 눈물을 닦은 이레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오라버니께서 선택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이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더냐?”
“오라버니의 길을 따라 걷다 보니 번번이 그분과 만나게 되었지요.”
“무어라? 너 설마…… 나 없이도 은자원에 갔던 것이냐?”
“은자원뿐이겠습니까? 단양까지 갔었습니다.”
기대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인석아, 그곳이 어디라고 가. 무슨 일이라도 생겼으면 어찌하려고.”
이번엔 이레가 대답 대신 미소를 지었다.
제 오라버니가 그러했듯,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렇게 해사한 미소만 보였다.
기대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이런 말썽꾼을 보았나. 잠시만 방심해도 이리 말썽이니, 마음 편히 죽을 수도 없겠구나.”
혀를 끌끌 차던 기대가 여전히 못마땅한 얼굴로 이레를 위아래로 훑었다.
“그보다 네 모습이 왜 이런 것이냐?”
이레가 팔을 가볍게 벌리며 치장을 살폈다.
“제 모습이 어떠해서요?”
오랜만에 마주한 이레의 모습은 예전에 그가 알던 모습이 아니었다.
친영례 예행연습 중인지라.
겹겹이 겹쳐 입은 대례복은 위엄 가득하였고, 곱게 화장한 얼굴은 하늘 항아보다 더 곱고 아름다웠다.
“그럭저럭 봐줄 만은 하구나.”
불퉁한 목소리와 달리 기대는 자꾸만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간신히 끌어내리고 있었다.
곱고 어여뻤다.
별채에 갇힌 듯 살던 가여운 누이.
힘들고 외로워도 언제나 해맑게 웃기만 하던 그 누이가 청초하고 아름답게 꽃을 피웠다.
어금니를 물고 참지 않았다면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말았으리라.
“어디 이상한 곳이라도 있습니까?”
“당연히 이상하지.”
기대는 가늘게 여민 눈으로 누이의 머리에 꽂힌 낡은 머리꽂이를 보았다.
“화려하고 어여쁜 치장에 이 낡은 머리꽂이가 어울린다 생각하였느냐?”
원행 떠나기 전, 기대가 이레에게 사 준 머리꽂이였다.
세손빈이 된 지금까지도 누이는 제 머리에서 그 보잘것없는 선물을 떼어놓지 않고 있었다.
그것이 가슴 부듯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마음 아팠다.
소리 내어 말하지 못한 그리움의 표현이라.
더욱 애틋하였다.
“이 미련한 녀석을 보았느냐. 다른 방면에서는 영특하기 이를 데 없는 녀석이 어찌 이럴 때는 융통성이 없는 것인지.”
괜한 지청구와 함께 기대는 이레의 머리에 꽂힌 머리꽂이를 빼려 하였다.
“안 됩니다.”
이레가 오라비의 손길을 피하며 완강히 거절했다.
“더 곱고, 더 아름다운 것이 많거늘. 하필이면 이 못난 것을 고집하느냐?”
“제겐 그 어떤 것보다 소중하고 아름답습니다.”
“이제 새 둥지를 찾았으니, 마땅히 새 단장을 하여야지.”
“이미 품은 것을 어찌 함부로 버릴 수 있단 말입니까. 그리 내치고 들이는 것을 쉬이 할 수 있다면 소중한 것이 아닐 테지요.”
“고집불통. 내 말도 안 듣고 제 마음대로 배필을 고르더니, 이젠 사소한 장신구 하나도 고집을 부리는구나.”
“먼저 약조를 지키지 않으신 건 오라버니셨습니다.”
“만약 내가 세손빈 되는 걸 반대한다면 어찌하겠느냐?”
이레는 서글픈 눈빛을 보냈다.
“송구합니다, 오라버니. 다른 일은 모두 양보할 수 있어도 그 일만은 할 수 없습니다.”
누이를 지그시 바라보던 기대가 투덜거렸다.
“이래서 누이동생 아무리 예뻐해도 소용없다 하였구나. 결국은 낯선 놈에게 도둑질당하고 마는 것을.”
“오라버니.”
“알았다. 더는 억지 부리지 않으마. 다만, 특별히 허락해 주는 조건으로 한 가지만 약조해다오.”
“어떤 약조가 필요하십니까?”
기대는 이레와 시선을 마주했다.
“……행복하여야 한다.”
“……!”
“무슨 일이 있어도. 서글픈 눈물일랑 절대 흘려선 아니 된다. 네가 눈물 흘리면 내 눈엔 피눈물이 흐를 터이니. 네 곁을 잠시나마 지키지 못한 일이 떠올라 이 오라비 괴로워 견딜 수 없을 터이니.”
기대는 이레에게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언제나, 어디서나, 누구의 곁에서든 행복하겠다고. 나와 약조해다오.”
침묵이 흘렀다.
묵묵히 오라비와 그가 내민 손가락을 번갈아 보아보던 이레는 기꺼이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조하였다.
“행복하겠습니다. 늘, 언제나, 어디서든 행복할 겁니다. 그리 살겠다고 약조하겠습니다.”
이레의 얼굴에 수줍은 기쁨이 솟아났다.
그녀의 머리를 쓸어주며 기대 역시 미소 지었다.
***
아침이 밝고 밤이 찾아왔다.
달이 사라지면 어김없이 환한 낮의 밝음이 돌아왔다.
시간은 바람처럼 흘러갔다.
왕께서 경기 감찰사의 여식을 세손빈으로 맞으려 한다는 교서를 반포하였다.
남자의 집에서 혼인을 허락하는 예를 행하였다.
이어 여인의 집에서 혼인을 허락하는 납채의 의식이 진행되었다.
사흘 후, 왕실의 정친(定親) 예물이 경기관찰사의 집으로 향했다.
왕실의 폐백과 선물 그리고 편지가 빈씨가에 전해졌다.
납징의 예가 끝나자 마침내 혼례일이 정해졌다.
별궁에서 세손빈 책봉이 거행되니, 조선의 세손빈이라는 지고한 자리의 주인이 정해졌다.
이로써 무한한 하늘 아래, 끝없이 넓은 대지 위를 살아가는 아득히 많은 사람 중에 간신히 만난 두 사람이 하나가 되기로 하였다.
새날이 밝았다.
친영례와 동뢰례를 치르는 날 아침.
뽀얀 햇살이 궁궐 곳곳에 내려앉았다.
날이 많이 풀렸다곤 하지만, 그늘 밑의 바람은 여전히 서늘하였다.
철없는 노랑나비 한 마리가 세손궁의 처마 밑을 파닥거리다 결국 왕세손이 탈 연(輦)에 내려앉았다.
“봄 나비입니다, 저하.”
최 내관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형운을 돌아보았다.
“빈께서 궁으로 들어오시는 날이라, 봄 나비가 다 날아들었사옵니다.”
형운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연에 올랐다.
좌익위 최치성과 우익위 홍인모가 그를 거들었다.
‘나비인가.’
팔락팔락 날갯짓하는 나비의 움직임에 자꾸만 누군가가 떠올랐다.
당장에라도 이레에게 달려가고 싶은 마음.
그녀의 손을 잡고, 얼굴을 마주하고 싶은 기갈에 입안이 바싹 말랐다.
별궁으로 향하는 행렬의 움직임이 유난히도 느리게 느껴졌다.
하나, 그의 갈증은 이레가 있는 별궁에 도착하고도 해소되지 않았다.
그녀와 마주하였으나, 지켜보는 많은 눈길과 무거운 격식 탓에 서로를 앞에 두고도 마주 볼 수 없었다.
그저 서로 발끝만 보며 설레는 마음을 다스릴 수밖에.
가슴이 갑갑하였다.
격식의 구애 없이 사랑하고 싶었다.
허물없이 감정을 드러낼 수 있는 미물이고 싶었다.
친영의 예가 시작되었다.
예법에 따라 형운과 이레는 청하고, 나아가고, 읍하고, 답하였다.
긴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지켜보는 시선을 뒤로하고 별궁을 떠날 수 있었다.
갈 때와 달리 환궁하는 형운의 입가엔 흐릿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의 연 뒤로 이레를 태운 연이 뒤따르고 있었던 까닭이다.
유난히 길었던 하루가 저물었다.
궁에 어둑한 어둠이 내려앉았다.
신랑과 신부가 술과 음식을 나눠 먹는 공뢰의 의식을 마치고 드디어 몸을 합쳐 존비(尊卑)가 같아지는 예만이 남았다.
면복을 벗고 가벼운 옷차림을 한 왕세손이 세손빈이 있는 악차(幄次)로 들어갔다.
***
장막 안에는 겹자리가 깔려 있었다.
그 위에 두 개의 이불과 베개가 나란히 마련되어 있으니.
하나는 형운의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이레의 자리였다.
형운이 악차 안으로 들어서자 이레가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온종일 어깨를 짓누르던 무거운 머리 장식과 대례복은 진즉 상궁의 도움으로 갈아입었다.
한결 가뿐해진 터라, 표정도 가벼울 줄 알았건만.
어쩐 일인지 이레의 낯빛이 창백했다.
형운은 이내 그녀가 불편한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장막 밖에서 사람들의 인기척이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니다.
비단 지켜보는 자들이 있어 불안해하는 것만이 아니리라.
낯설고 생경한 경험을 앞두고 있으니.
저도 모르게 긴장한 것이리라.
그녀를 어찌 위로한다.
근심하는 그의 귓가에 늙은 상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세손께선 자리에 앉으시옵소서. 빈께선 세손을 맞이하시옵소서.”
존비의 예가 시작되었다.
형운이 마련된 자리에 앉자 그 앞에 이레가 마주 앉았다.
“세손께서 빈의 비녀를 뽑아 주시옵소서.”
목소리가 이르는 대로 형운은 이레의 비녀를 뽑았다.
칠보 옥으로 치장한 비녀를 뽑자 타래 머리가 흘러내렸다.
일순, 향긋한 향내가 형운의 코끝을 파고들었다.
손끝을 스치고 지나가는 머릿결의 보드라운 감촉.
저도 모르게 입안 가득 단침이 고였다.
흠, 괜한 헛기침을 흘리며 형운은 애써 냉정을 유지했다.
그러나 뒤이어 들려오는 음성에 손끝이 흔들리고 말았다.
“세손께선 빈의 옷고름을 풀어주시옵소서.”
“……!”
내내 바닥을 향했던 이레가 놀란 눈으로 형운을 응시했다.
어린 산짐승처럼 깊고 까만 눈동자.
그 선연한 검은 연못에 형운이 맺혔다.
“이런…….”
예상은 했지만, 막상 상황과 마주하니.
이레는 놀라고, 형운은 당황하였다.
두 사람 사이로 서먹한 공기가 흘렀다.
둘의 사정에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밖에서는 연신 채근하였다.
“세손 저하, 어서 빈의 옷고름을 풀어주시옵소서.”
재촉에 밀려 형운은 이레의 붉은색 옷고름을 당겼다.
단단히 매듭지어 있던 옷고름은 단숨에 스르륵 풀렸다.
“저고리를 벗겨주시옵소서.”
감정이 담기지 않은 목소리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장막 밖에서 일러주는 대로 행하노라니, 어느덧 이레와 형운은 각자의 이부자리 속에 몸을 뉘이고 있었다.
“불을 끄옵소서. 오늘은 바람이 불고 밤하늘이 흐려 양의 기운보다 음의 기운이 왕성하니. 세손께선 빈의 오른쪽에 누우시옵소서. 빈께선 세손 저하의 왼쪽에 누우십시오.”
자리에 누운 형운과 이레에게 노 상궁이 마지막으로 아뢰었다.
“이제 침수 듭실 시각이옵니다.”
“…….”
“밖에서 기다리고 있겠사옵니다. 행여 필요하시면 언제든 부르시옵소서.”
한쪽 벽면에 각기 한 명씩.
사각의 장막 밖을 지키는 네 명의 늙은 상궁들의 그림자가 어룽거렸다.
단단한 엄호 속에서 얼마나 지났을까?
형운은 감았던 눈을 떴다.
속눈썹 움직이는 소리까지 들릴 만큼 실내는 조용하였다.
잠시 밖의 기척을 살피던 형운은 이레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자느냐?”
내뱉는 숨결과 함께 물었다.
“…….”
답이 없었다.
“자는 것이야?”
다시 물었다.
고르게 들썩이던 숨소리.
형운은 이불을 걷어 올리고 한 뼘 간격을 둔 채 누워있는 이레에게 상체를 구부렸다.
그리고 속삭였다.
“영영 이대로 자는 척할 것이냐?”
“…….”
“정히 그렇다면…….”
형운은 고개를 숙여 이레의 이마에 입술을 가져갔다.
매끄러운 이마에 부드러운 감촉이 닿는 순간.
꼴깍.
이레가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둠에 익숙해진 형운의 눈에 움찔하는 그녀의 표정이 보였다.
예법으로 정해놓지 않은 형운의 돌연한 행동에 크게 당황한 듯했다.
행여 밖에서 들릴세라,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이레가 물었다.
“연습한 것은 모두 끝냈습니다. 혹여 아직 못한 것이 있습니까?”
쉿.
입가에 검지를 세운 형운이 이레의 귓가에 바싹 입술을 붙이고 속삭였다.
“진짜 예는 지금부터 시작이다.”
법도에서 정한 예는 분명 이것으로 끝맺음하였다.
그 이상의 절차도 없고, 그 이상의 무언가를 하여도 아니 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절차와 법도의 이야기일 뿐.
철저한 남남으로 오늘 처음 만나 눈인사를 건네는 것조차 어색하고 서먹한 사이를 위한 단계이자 걸음일 뿐이다.
형운과 이레.
두 사람은 그런 절차에 어울리지 않았다.
어색하고 서먹하기엔 두 사람 사이에 쌓인 인연의 강은 넓고도 깊었다.
“예법의 절차는 마쳤으나, 내 절차는 아직 끝나지 않았구나.”
형운은 본능이 이끄는 대로 그만의 예(禮)를 행했다.
***
하나.
이레의 엄지손가락을 따라 형운의 검지가 곡선을 그린다.
어린 날, 서탁과 함께 마주한 어린 소녀의 투정을 떠올렸다.
그 슬픔과 외로움, 일상의 소소함을 훔쳐볼 때마다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위로하듯, 다독거리던 그의 간질임은 이레의 검지로 향한다.
둘.
밤안개와 시작된 첫 만남.
매번 곁눈질하던 그녀의 일상 속으로 그가 들어갔다.
비록 불손이라는 백귀로 오해받았지만, 그래도 즐거웠다.
내내 서탁에 깃든 백귀라 생각했던 그녀가 살아있음을 알았을 땐 놀라기도 하였다.
저와 같은 사람이고 따뜻한 체온을 지닌 여인이라는 사실에 주춤 한 걸음 물러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저도 모르게 걱정되었다.
그러기에 할아버지의 제향일에 산사를 찾은 그녀가 사라졌을 때, 스스로 잠행을 나선 것이겠지.
처음으로 궁의 틀 안에서 벗어났던 날이었다.
정도(正道)에서 벗어나지 않던 그가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한 날이기도 하였다.
셋.
형운의 오른쪽 검지가 누워 있는 이레의 왼손 가운뎃손가락을 쓸어내린다.
보드라운 촉감 위로 파르르 떨리는 감각이 느껴졌다.
긴장한 듯 이레는 연신 숨을 참고 있다.
“숨 쉬어라.”
작고 조용한 종용.
그러나 그것의 위력은 생각보다 대단했다.
내내 참고 참았던 탓에 후우, 길게 내뿜는 이레의 숨 자락이 거칠었다.
그녀의 가슴이 위아래로 크게 들썩였다.
하늘 구름으로 지은 듯 얇은 속적삼.
그 아래로 박동 거리는 심장의 전율이 형운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형운의 손끝이 이레의 손가락 사이를 스칠 때마다 그녀의 몸이 움찔거렸다.
넷, 이레의 약지 위로 형운의 검지가 타고 오른다.
물방울이 구르듯 또르륵 맴을 돌던 그의 손끝은 간질간질 손가락을 간질였다.
그 간질임 사이로 오라버니를 찾겠다며 초간택에 참여했던 이레의 얼굴이 떠올랐다.
늦은 밤.
은밀히 은자원을 찾은 여인은 실로 용감하였다.
동시에 탐이 났다.
저 커다란 검은 눈동자에 맺히는 사내가 오롯이 자신이길 원했다.
저 붉은 입술 새로 나오는 걱정과 한숨이 온전히 저에게 향하길 바랐다.
나를 바라봐달라고, 내가 여기 있노라 고함치고 싶었다.
내 곁에 와 달라고, 이곳에서 기다리겠으니 한 걸음 한 걸음 내게로 다가오라 조르고 싶었다.
연모에 빠진 어리보기인 듯 빙빙 맴돌고 에둘러 속내를 말하였다.
현명한 여인은 잘도 그 속뜻을 알아차렸다.
그러곤 자분자분 어긋남 없이 자신에게로 다가왔다.
다섯.
마지막 새끼손가락을 어루만진다.
하나하나 훑고 짚은 손가락이 이윽고 온전히 마주하였다.
내 봄에 날아든 노랑나비 한 마리.
내 품에 내려앉은 그 고운 날갯짓에 생(生)은 비로소 의미를 지니니.
이제야 봄은 노랗고, 여름은 푸르렀다. 가을은 붉게 찬란하였고, 순백의 설원은 눈이 부시었다.
그대와 내가 이리 함께 있으니.
오늘은 다정하고, 내일은 설레리라.
내 봄과 여름은…….
가을과 겨울은 찬란한 색채로 가득하리라.
“너를 그 누구와도 나누고 싶지 않다.”
형운은 가감 없이 욕심에 훗, 작은 웃음이 이레의 입술을 비집고 새어나왔다.
어린아이 같은 투정이라 생각한 모양이다.
“사람을 어찌 나눌 수 있겠습니까?”
속삭이듯 이레가 물었다.
“사람은 나눌 수 없지만, 마음은 때로 쪼개지고 나누어지지 않느냐?”
나른하게 벌어진 이레의 다섯 손가락.
그 위를 살금살금 더듬던 형운의 손가락들이 미끄러지듯 이레의 손가락 틈새로 흘러내려 갔다.
“나누고 싶지 않다. 빼앗기고 싶지 않다. 아니…….”
이레의 손가락 틈 사이로 흘러들어 간 형운의 손가락들이 그녀의 손을 빈틈없이 깍지꼈다.
“아무에게도 빼앗기지 않을 터.”
깍지 낀 이레의 손을 그녀의 머리 위로 올리며 형운이 속삭였다.
그의 나른한 입바람이 이레의 귓불을 스치고 지나갔다.
오소소 소름이 돋아 이레는 어깨를 떨었다.
“빼앗기고 싶어도 빼앗길 수 없나이다.”
“무슨 의미더냐?”
“그것은…….”
포박당하지 않은 이레의 오른손이 형운의 왼손 엄지를 쓸어내렸다.
이레가 형운의 손가락을 하나씩 훑는다.
“밤에는 불손으로, 낮에는 은백으로. 밝을 때도 어두울 때도 언제나 함께 계시지 않습니까?”
아득하도록 달콤한 대답이었다.
형운은 소리 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과연, 그렇구나.”
캄캄한 고요 속.
마음과 마음이 하나가 되니.
존비(尊卑), 신랑과 신부가 몸을 합치는 신성하고도 진실한 의식이 시작되었다.
감히 밀어낼 수도, 거역할 수도 없는 환의 몸짓이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