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택-왕들의 향연-107화 (107/215)

#107. 또 길을 잃었느냐?

“다음은…….”

명쾌한 목소리가 동궁전 밖으로 새어나왔다.

동궁의 아침은 궁궐의 다른 전각보다 한결 빨랐다.

이른 새벽 열린 조강에 조정 대신들 전원을 참석시키라는 왕세자의 명이 떨어졌던 까닭이다.

궁궐 문이 열리게 무섭게 입궐한 대신들의 눈에는 졸음이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대신들의 사정일랑 아랑곳하지 않은 채 세자는 눈앞에 쌓인 상소를 읽어내려갔다.

“다음은 전라 감영에서 올라온 장계로군. 전라도 각 지방에 화적떼가 출몰하여 상인들의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닌 모양이오. 길목을 막고 통행세를 받는 무뢰배들까지 나타나 백성들의 고충이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라 하니.”

세자는 단상 아래에 앉은 대신들을 내려다보았다.

“이를 어찌 처리하면 좋겠소?”

세자의 물음에 늙은 신료 하나가 입을 열었다.

“마땅히 군사를 풀어 그들의 죄를 단죄하여야 할 것이옵니다. 이번에 본보기를 보여 국법의 지엄함을 보여주시옵소서.”

“보여주시옵소서.”

한목소리를 내는 신료들을 보며 세자는 다음 상소문을 펼쳤다.

“다음은 강원도 영월에서 올라온 상소로군. 봄 가뭄이 심하여 어린 자식을 내다 팔고, 더러는 버리는 일을 서슴지 않으며. 또한, 노부모를 깊은 산에 데려가 두고 오는 일이 잦아졌다 하오. 마땅히 구휼미를 풀어 백성들의 주린 배를 채우는 것이 급선무일 터. 경들의 생각은 어떠하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비축한 구휼미의 여유가 많지 않사옵니다. 구휼미를 풀기에 앞서 자세한 상황부터 살핀 후에…….”

“자세한 상황부터 살피자?”

세자의 목소리가 차갑게 변했다.

“조사를 위해 관료를 파견하는 데 적어도 사흘. 파견한 관료가 실패를 파악하고 그 기록을 낱낱이 기록하는 데 적어도 닷새. 다시 궁으로 돌아와 보고하고, 그 자료를 검토하여 최종적으로 구휼미를 푸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이 다시 적어도 십 수일.”

세자가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경은 당장 하루도 견디기 힘든 굶주린 백성들에게 한 달이나 버티라 말하는 것이오?”

“마, 마땅히 구휼미를 풀어 백성들의 주린 배를 채우는 것이 급선무일 것이옵니다. 다만, 구휼미가 온전히 전해지는지 감시 또한 소홀히 해서는 아니 될 것이옵니다.”

“경의 의견이 옳소. 다음은…….”

왕세자는 다음 상소를 펼쳤다.

그렇게 수북하게 쌓인 상소문이 하나둘 사라져 갔다.

마침내 상소가 바닥나고 간신히 한시름 돌릴 찰나.

“상선, 다음 것을 들여라.”

왕세자의 명을 받은 상선이 환관들과 소반을 들고 다시 나타났다.

소반 위엔 상소가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그 엄청난 양에 대신들은 기겁했다.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저하. 오늘 저 많은 상소에 비답을 내리실 것이온지요?”

“왜? 아니 되오?”

“그런 것이 아니오라…….”

대신이 주위에 앉은 다른 신료들을 돌아보았다.

보다 못한 듯 홍인한이 나섰다.

“저하, 홍역의 발병으로 한동안 궁궐이 들썩였사옵니다. 조정의 대신들은 낮과 밤의 구분 없이 역병의 창궐을 잡기 위해 동분서주하였습니다.”

“어찌 모르겠소. 그대들의 노고 덕에 역병이 꼬리 내렸음을 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니. 곧 연회를 베풀어 치하할 것이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인 일을, 치하라 하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오나…….”

“하오나?”

유난히 긴 말꼬리에 세자의 한쪽 눈썹이 위로 치켜 올라갔다.

“아뢰옵기 망극하오나, 저하. 지난 며칠 동안 이른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조강(朝講)은 물론이고 석강(夕講)까지 하루도 빠짐이 없으시니. 행여 귀하신 옥체 상하실까 걱정되어…….”

“허허, 그런 걱정은 넣어두시오. 그대들이 나를 염려하는 마음을 내 어찌 모를까.”

세자의 얼굴에 피식, 조소가 떠올랐다.

입가에 그려지는 웃음을 애써 참으며 세자는 말을 이었다.

“내 한동안 운신을 자제하며 몸을 보하였더니, 기운이 펄펄 나는군.”

왕세자는 홍인한을 비롯한 대신들을 둘러보았다.

“그러니 그대들은 그런 걱정은 전혀 할 필요 없소. 이참에 그간 소홀히 한 것을 집중하여 모두 마칠 것이니, 그리 아시오.”

세자의 완고한 태도에 신료들 사이에서 술렁임이 일었다.

저 많은 상소문을 모두 살피려면 이틀 밤을 꼬박 새워도 불가능할 것이다.

더구나 몇몇 사안은 격론이 불가피하니, 퇴청은 더더욱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어찌 그리 못마땅한 기색이오? 그대들이 원한 것이 이것이 아니었소?”

“…….”

세자는 홍인한을 비롯한 홍계희, 그리고 홍준해에게 차례로 시선을 던졌다.

“아무래도 그간 내가 그대들을 오해한 모양이오. 민감한 사안이 있을 때마다 나와 의견이 서로 달라 대치하고 맞서며 조금도 타협하지 않으니. 그대들이 나와 대면하기 싫어하는 줄 알았다오. 한데, 이번에 주상 전하께 나와의 입대를 간곡히 청하기까지 하였다지? 내 그 말을 듣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오. 그러니 오늘 실컷 해 보겠소. 아무렴, 죽은 사람 소원도 풀어준다는데, 산 사람 소원을 못 풀어줄까.”

창칼처럼 매섭게 찔러오는 눈빛에 홍인한은 물론 나머지 그의 일당들은 차마 숨소리조차 크게 내지 못했다.

세자는 상선에게 고개를 돌렸다.

“나머지 상소문도 모두 들여라.”

“명 받잡나이다.”

이윽고 열 명의 환관들이 동궁전으로 상소문이 담긴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동궁전에 모인 대신들의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

“괜찮으시옵니까?”

동궁전의 강연은 늦은 밤까지 이어졌다.

대신들이 넋이 나간 표정으로 동궁전을 나간 뒤, 상선은 서둘러 세자의 곁으로 다가갔다.

왕세자는 느긋한 눈빛으로 상선을 바라보았다.

“고되다. 하나, 이런 것쯤은 궁으로 돌아오던 밤의 고충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상선이 미소를 숨기며 물었다.

“저하께서 그리 말씀하시는 것을 보니, 그날 무척 힘드셨나 보옵니다.”

세자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말도 마라. 밝은 날, 조심조심 걸어도 위험한 길이거늘. 말을 타고 전력으로 질주하게 될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느냐?”

“그 정도였나이까?”

“대호(大虎)가 한 치 앞에서 달려들어도 눈 한번 깜빡하지 않았던 나였다. 앞으로 그보다 더한 일이 있어도 마다치 않을 것이다. 하지만 팽례의 길만은 사양이다.”

문득 세자의 얼굴에 씁쓸한 표정이 떠올랐다.

“내 팽례가 그런 길을 쉴 새 없이 다녔다고 생각하니, 참으로 못 할 짓을 시킨 것 같구나.”

“그날은 워낙 상황이 급박하니. 사정을 돌볼 수 없어 선택한 길이었을 겁니다. 매번 그러한 위험을 감수하지는 않을 것이옵니다.”

묵묵히 고개를 끄덕인 세자가 물었다.

“그보다 세손빈을 모셔오는 친영 날은 잡혔느냐?”

“관상감에서 길일을 잡는 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하옵니다.”

“서두르라 하라.”

“네, 저하.”

“경주에선 아직 소식이 없느냐?”

“곧 도착할 것이옵니다.”

“암암리에 상인들을 움직여 매점매석(買點賈惜)한 자가 관아의 사또라지? 지키고 단속해야 할 자가 앞장서서 악행을 저지르다니, 참으로 기가 막히는구나. 아무래도 안 되겠다. 엮인 줄기가 무성할 듯하니. 자세히 조사해야겠다. 이런 일엔 그 녀석이 적격이지.”

아직 끝내지 못한 문서를 다시 들여다보며 세자는 버릇처럼 말을 이었다.

“율이에게 연통을 넣어라. 해야 할 일이 있으니, 서둘러 내 처소로 들라 하라.”

“…….”

상선의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문서에 주석을 달던 세자가 고개를 들어 늙은 환관을 응시했다.

“뭣 하느냐, 연통 넣으라는 말 못 들었느냐? 어서 율이에게…….”

재촉하던 세자는 말끝을 흐렸다.

“이런…….”

그의 입가에 쓸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내가 정신이 이렇구나. 그새 또 잊고 말았어.”

서강율.

그 무심한 녀석이 먼 길 떠난 것을.

평소에도 엉뚱한 짓만 골라 하더니, 끝까지 제멋대로구나.

감히…… 내 허락도 없이 떠나?

감히…….

무언가 뜨거운 것이 목구멍으로 올라왔다.

“버릇없는 녀석.”

세자는 입안에 그득하게 차오른 뜨거운 기운을 삼켰다.

그러다 불현듯 미간을 찡그린다.

“왜 그러시옵니까, 저하.”

상선이 불안하게 제 주군을 응시했다.

“괜찮다.”

말과 달리 세자의 얼굴은 금세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쥐어짜듯 가슴을 움켜쥔 손등에 푸른 혈관이 툭툭 불거져 나왔다.

“저하, 내의를 부르겠나이다.”

“아니, 아니다. 괜찮다, 괜찮으니, 소란 피우지 마라.”

“하오나…….”

세자가 손을 휘휘 내저었다.

어느 놈들 좋아하라고, 이런 꼴 보일까.

행여 이런 모습 보인다고 뉘가 걱정할까.

그저 기회는 이때구나 하고 달려들어 갈기갈기 찢어놓겠지.

그러니 절대 약한 모습 보일 순 없었다.

“근래 들어 어지럼증이 잦구나.”

“너무 무리하였나이다. 서둘러 탕약을 올리겠나이다.”

잠시 후, 밖으로 사라졌던 상선이 탕약과 함께 다시 돌아왔다.

탕약을 마시자 통증이 사라졌다.

세자가 탕약 그릇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 약을 먹으면 통증과 어지럼증은 가시나, 대신 집중을 잃고 정신이 부유하니. 참으로 불쾌하구나.”

아닌 게 아니라.

탕약을 마신 이후로 몸이 나른하게 늘어졌다.

좀처럼 일에 집중할 수 없었다.

세자는 동궁전을 나와 후원의 능허정으로 걸음을 옮겼다.

조용한 시간을 즐기고 싶을 때 찾는 곳이라.

밤새 소리를 벗 삼아 호젓한 정자에 앉아 홀로 술잔을 기울였다.

별도 없는 밤하늘엔 달만 홀로 외로이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서늘한 달빛이 유달리 서러웠다.

“네가 없으니, 함께 술잔을 나눌 벗 하나 없구나.”

늘 속없이 웃던 사내가 떠올랐다.

장난기 가득 담긴 그 눈빛.

너, 정말 영영 돌아오지 않는 것이냐?

너 이렇게 나를 홀로 두고 걸음이 떨어지더냐?

율아, 강율아.

이 좋은 날.

대체 어디 간 것이냐?

하늘을 유영하는 저 달도 예전과 다름없는데.

작별인사도 없이 너 어디 가서 날 외롭게 하느냐.

이제 난 누구와 천하를 논한단 말이냐.

누구와 태평성대를 꿈꾼단 말이냐.

가슴에 스며든 헛헛한 바람을 잠재울 수 없었다.

서운하였다.

울적하다 못해 이젠 괘씸하기까지 하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곁을 지키겠다 하더니. 결국, 짓궂은 농이었구나. 나쁜 녀석.”

“설마, 그 나쁜 녀석이 저는 아니겠지요.”

투정부리듯 중얼거리는 세자의 곁으로 나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세자의 텅 빈 눈동자 속으로 방립을 쓴 사내가 들어왔다.

방립 사내를 본 세자가 털털하게 웃었다.

“네놈도 내 말을 듣지 않고 몇 달이나 잠적하였으니, 괘씸하고 나쁘긴 매한가지 아니더냐?”

“보신을 위한 불가피한 일이었습니다.”

“일 없다. 최소한 무사하다는 연락이라도 했어야지.”

세자가 손을 들어 사내의 입을 막았다.

“허튼 핑계라면 그만 되었다. 이리 와 내 잔이나 받아라.”

“금주령이 내렸다 들었습니다.”

“그래서? 내 술 받기 싫으냐.”

“몰래 마시는 술이 원래 더 달다 하더군요.”

***

능허정에 고요가 내려앉았다.

쓸쓸한 적막 사이로 이따금 술 따르는 소리만이 이어질 뿐이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정적을 깬 것은 세자였다.

“통 말이 없구나. 꼭 널 처음 만난 때로 돌아간 것 같다.”

“오늘까지만 이리하겠습니다.”

“웬 고집인지 모르겠구나. 입을 꾹 다문 네 모습을 그 녀석이 보았다면 무어라 했을까?”

“시답잖은 짓 그만두라 하였겠지요.”

“하하, 그렇겠지.”

필시 그렇게 말하였을 테지.

사내의 풍류가 어쩌고 하며 엉뚱한 시 한 구절 읊고, 부채를 펼쳐 덩실덩실 우스꽝스러운 춤을 추었을 테지.

어쩌다 눈이 마주치면 기다렸다는 듯이 슬그머니 미소 짓고, 허튼소리에도 시원스럽게 맞장구치며, 감히 세자 본인 앞에서 남의 말 하듯 험담을 늘어놓았을 테지.

세자의 얼굴에 흐린 미소가 그려졌다.

술잔을 단숨에 털어 넣고 술병을 들었다.

단출한 술상에 세 개의 술잔이 놓여 있었다.

하나는 세자의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방립 사내의 것이었다. 그리고 남은 하나…….

지금은 먼 곳으로 간 사내의 것이었다.

세자는 빈자리의 술잔을 채웠다.

부족하지 않게.

그렇다고 넘치지도 않게.

조심조심 그 사람의 잔에 술을 따르고, 그 후에 기대의 잔을 채웠다.

“이 녀석은 너의 스승이나 다름없으니, 너보다 먼저 술을 주었다고 섭섭해하지 마라.”

“섭섭하지 않습니다. 세자 저하의 심한 편애야, 널리 알려진 사실이니까요.”

“무어라? 네 녀석이 내게 쌓인 게 많았던 모양이구나. 괘씸한지고. 내 심기 불편하게 하였으니, 석 잔의 벌주를 받아라.”

세자는 기대에게 연거푸 술 석 잔을 내렸다.

그러곤 자신도 석 잔을 따라 마셨다.

“나도 무심하였으니, 벌을 받아야지.”

호탕하게 잔을 비우고 무심코 고개를 돌리니, 그 녀석의 잔은 여전히 술이 담겨 있었다.

“괘씸한 녀석. 이젠 마시라 강요도 못 하겠구나.”

방립 사내가 세자의 빈 잔에 술을 채웠다.

“원래 술보다 사람을 즐기던 친구였습니다.”

“하긴, 고작 술 한 잔 마시고 양동이째 마신 나보다도 말이 많던 녀석이었지.”

세자와 방립 사내는 먼저 간 사람을 추억하며 술잔을 기울였다.

주인 잃은 술잔에 달빛이 고였다.

어디선가에서 날아온 노란 꽃잎이 술잔 속으로 떨어져 달빛과 어우러졌다.

불콰하게 취기가 오른 세자가 방립 사내에게 물었다.

“넌 언제쯤 완전히 돌아올 셈이냐?”

“곧 돌아가겠습니다.”

“왜 지금 당장은 아니 된다 하느냐?”

술잔에 떠오른 달을 내려다보며 방립 사내가 미소 지었다.

“꼭……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

별궁에 봄꽃이 만발하였다.

화사한 꽃소식과 함께 친영례의 길일이 잡혔다.

빈씨의 처소가 있는 내당으로 노파들의 잰걸음이 이어졌다.

자릿조반을 마치고 단장을 하던 이레는 여느 때보다 빠른 별궁 삼파의 방문에 어리둥절했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가?”

“친영례 날이 정해졌사옵니다.”

정 상궁의 목소리에 긴장감이 깃들어 있었다.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니, 곧장 교육을 재개해야 합니다.”

홍역으로 보름 가까이 교육이 지체되었다.

길일은 하늘이 내리고, 땅의 기운이 어우러져 비로소 정해진다.

자연의 이치가 매양 그렇듯 길일 또한 사람의 사정은 아랑곳하지 않으니.

늦어진 일정을 소화하려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낮에는 친영례를 위한 예행연습이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저녁엔 현녀구법(玄女九法)을 비롯한 무병장수를 위한 특별한 비법을 익히게 되실 것이옵니다.”

“현녀구법?”

“왕실 서고에 비장된 서책입니다. 오직 왕실의 여인들만이 볼 수 있는 비법으로 장수를 위한 현묘한 비기가 담겨 있는 서책입니다.”

이레의 눈동자가 호기심으로 반짝거렸다.

무병장수를 위한 특별한 비법이라니.

대체 무슨 내용이기에 왕실 서고에 꽁꽁 감춰두고, 소수의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공개되는 걸까.

하지만 아무리 물어도 별궁 삼파는 대답해주지 않았다.

그저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밤이 되면 자연히 아시게 될 거라는 대답만을 할 뿐이었다.

밥상을 물리기 무섭게 본격적인 교육이 시작되었다.

“왕실의 사자가 빈궁마마를 별궁에서 태평관으로 안내할 것이옵니다.”

정 상궁의 설명에 맞춰 사자 역할을 맡은 의녀가 이레에게 예를 갖췄다.

“태평관에 도착하여 미리 마련된 방으로 들어가 전모의 부름을 기다립니다. 전모의 부름이 있으면 방에서 나오셔서 서벽의 욕위(褥位) 남쪽 끝에 서십시오.”

이어 빈궁을 맞이하는 세손의 예에 따라 의식을 연습하였다.

모든 의식이 끝나고 상궁의 인도를 받아 연을 탄다.

환궁하는 세손의 연을 따라 입궐하면 친영의 의식은 끝이 난다.

이 일련의 과정들을 예행하는데 반나절이 훌쩍 지났다.

잠시도 쉬지 않고 이어진 연습에 지치고 곤할 만했다.

“고되시지요?”

정 상궁의 물음에 이레는 고개를 저었다.

“아닐세.”

문무백관들 앞에서 실수를 범하는 것보다 미리 열 번, 백번 더 연습하는 것이 나으리라.

“한숨 돌렸으니 다시 시작하세.”

그렇게 재개된 연습은 밤늦도록 이어졌다.

이레는 그저 총명하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끈기 또한 대단하였다.

이레의 지치지 않는 열정과 노력에 엄하기로 유명한 별궁 삼파가 도리어 지쳐 쓰러질 지경이었다.

“밤이 늦었습니다. 그만 쉬시지요.”

“아직 더 할 수 있네.”

“내일도 생각하셔야지요. 이러다가 기력이 다하여 쓰러지실까 걱정입니다. 오늘은 그만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삼파의 만류로 이레는 어쩔 수 없이 거처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억지로 이부자리에 누웠지만, 도통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이제 곧 별궁을 떠나 다시 낯선 곳에 새로 적응해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일까.

아니면 세손인 형운과 재회한다는 기쁨 때문일까.

고된 일정에 몸은 피곤하였건만 마음이 번잡하여 쉴 수 없었다.

‘산책이나 해야겠다.’

복잡한 머릿속을 털어버리는데 걷는 것만큼 좋은 것도 없었다.

이레는 무거운 몸을 이끌고 후원으로 향했다.

“밤안개가 짙구나.”

산에서 시작된 희뿌연 안개가 눈사태처럼 쏟아져 급기야 별궁까지 온통 하얗게 뒤덮었다.

유독 추위를 타는 금정을 돌려보내고, 홀로 후원을 거닐었다.

구름 낀 하늘은 달무리 은은하였고, 어두운 후원은 안개로 신비하였다.

눈 벽을 헤치듯, 앞을 가로막은 안갯속을 거닐었다.

마치 물속을 유영하는 것처럼 몽혼하였다.

잡념에 잠겨 멍하니 걷노라니, 문득 이곳이 어디인지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피안의 땅.

어쩌면 이승과 저승의 경계라는 삼도천 기슭이 이러하지 않을까.

밤안개가 전해준 신비에 잠시 넋을 빼앗겼다.

“어찌 그 음침한 곳에 우두커니 서 있느냐?”

안개 저 너머에서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직한 부름에 이레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농 섞인 무심한 이 목소리.

그 속에 담긴 걱정과 깊은 정.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저도 모르게 입안이 바싹바싹 마르고, 두 손이 파르르 떨려왔다.

꿈일 거야.

피곤한 나머지 환청을 들은 것이겠지.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이니.

기대하지 말자.

이레는 주먹을 말아쥐었다.

“설마…….”

예의 그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또 길을 잃었느냐?”

“……!”

이레는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몸을 떨었다.

더는 견딜 수 없었다.

설사 이것이 꿈일지라도.

밤안개가 부린 조화나 환청일지라도.

고개를 돌리지 않고선 견딜 수 없었다.

그녀가 몸을 돌렸다.

밤안개가 맴을 돌듯 그녀의 전신을 휘감았다.

뿌연 안개 너머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따뜻한 눈길.

부드러운 콧날.

입가에 매달린 자상한 미소.

환영처럼 선 사내의 모습에 이레의 두 눈에서 소리 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오라버니.”

신음 같은 부름에 사내가 인상을 찌푸렸다.

성큼성큼 다가온 그가 이레의 턱에 고인 눈물을 자상하게 닦아주었다.

“또 우느냐? 하여간 너는 예나 지금이나 내가 없으면 항상 울기만 하는구나.”

“오라버니. 정말, 진정…… 오라버니십니까?”

“쉿!”

그가 입술 위에 손가락을 세웠다.

“이곳에 몰래 숨어들어오느라 애먹었단다. 들키면 곤란하니 조용히 말하거라.”

소곤소곤 말한 그가 특유의 장난기 가득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잘 지냈느냐?”

오라버니의 목소리가 귓전에서 부서졌다.

그제야 비로소 실감할 수 있었다.

“오라버니.”

오라버니가 돌아왔다.

새벽 안개 너머로 자취를 감춘 그 날처럼…….

밤안개를 가르고…….

김기대.

나의 오라버니가 다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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