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택-왕들의 향연-106화 (106/215)

#106. 운명(運命)과 하늘의 뜻(天命)

이른 아침.

사헌부 대장청으로 장령과 지평 그리고 감찰들이 모여들었다.

매달 초하루에 열리는 사헌부 전체 회의에 참석하기 위함이었다.

평소라면 빈자리 없이 가득 찼을 회의장이 오늘은 이 빠진 그릇처럼 군데군데 비어 있었다.

분위기도 평소와는 사뭇 달랐다.

사헌부 특유의 팽팽한 긴장감 대신 무거운 침통함이 회의장을 메우고 있었다.

둘 또는 세 명씩 머리를 맞대고 앉은 사람들은 작은 목소리로 수군거렸다.

평소 권위와 질서정연함으로 무장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는 어수선함이었다.

허상익은 초췌한 낯빛으로 자리를 지켰다.

집의 김익현의 사건으로 사헌부가 발칵 뒤집혔다.

실종된 여인들이 발견된 기루에서 김익현은 장무열을 기습했고, 장무열의 반격으로 결국 죽음을 맞이하였다.

사건을 접한 세자께선 크게 노하시었다.

터럭만큼의 의심도 남지 않도록 엄중하고도 철저한 조사를 하라는 명이 내려왔다.

연일 강도 높은 조사와 문초가 진행되었다.

허상익은 그날 밤의 진실을 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다.

정의감.

투철한 사명감.

그런 것 때문이 아니었다.

장무열과 암행대의 어사, 서강율에 대한 경의(敬意) 때문이었다.

처음엔 사헌부의 그 누구도 허상익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사헌부의 집의와 어사대가 이 나라와 임금이 아닌 사사로운 조직을 위해 움직였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다행히 구출된 여인들의 증언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여인들은 별궁 근처에 마련된 임시 거처에 머물며 사건의 정황을 상세하게 전하려 애썼다.

심지어 조사가 끝났으니 집으로 돌아가라 하여도 마지막 증언을 위해 남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여인들은 납치범들의 악랄함을 비난했다.

자신들을 위해 마지막 순간까지 노력한 의인을 칭송하였고, 김익현의 배반을 한 목소리로 증언하였다.

피해자들의 일관된 진술.

그리고 세자의 집념으로 본격적인 조사가 시작되었다.

‘아쉽게도 김익현이 이번 납치사건에 관여하였다는 증좌는 발견하지 못하였지.’

김익현의 죄상이 드러나야 십학사의 뒤를 밟을 수 있었다.

하지만 대대적인 조사와 수색에도 끝내 그와 관련한 증거는 찾지 못하였다.

관련자들의 증언 역시 마찬가지였다.

김익현을 도왔던 어사 중 살아남은 세 명의 어사들은 압송과 조사 과정에서 원인불명의 이유로 피를 토하며 사망하였다.

‘대체 이 사건 뒤에 얼마나 대단한 자들이 있단 말인가.’

허상익은 실체를 보이지 않는 적의 거대함과 치밀함에 혀를 내둘렀다.

적들의 마수가 궁궐은 물론이고 조선 곳곳에 미치고 있음이 분명했다.

‘김익현은 납치사건의 주동자가 분명하다.’

허상익은 확신했다.

모든 정황이 김익현을 진범으로 지목하고 있었다.

평소 친분이 깊었던 김익현과 문 소원.

문 소원이 왕의 아이를 잉태하였다.

풍문으로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그녀가 만약 아들을 낳으면, 나라의 근본이 크게 흔들릴 것이라 하였다.

어디 그뿐일까.

문 소원이 옹주를 낳던 그 날, 호산청 대문 앞에서 산모와 갓 태어난 사내아기가 발견되었다.

그들이 발견된 궤짝을 궁으로 들였던 사람은 공교롭게도 문 소원의 오라비인 문성국.

전체적인 상황이 임부들의 실종과 문 소원, 김익현의 연관을 말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명확한 증좌가 없다.

당장 문 소원 쪽에서도 강하게 반발했다.

문성국 역시도 사헌부의 문초에서 호산청에 필요한 물품이라 하여 들이려 하였을 뿐, 궤짝 안에 임부와 아이가 있는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하였다고 발뺌하였다.

내의들과 의녀들이 호산청을 둘러싸듯 지키고 있는데 어떻게 아이를 바꿀 수 있겠느냐, 만약 바꾸려 작정하였다면 고작 한 명만 궁 안으로 들이려 하였겠느냐며, 오히려 자신들을 음해하려는 음모라 주장했다.

그렇게 보름이 흘렀다.

증언은 숱하게 많아도, 임부 납치 사건과 김익현을 연결할 결정적인 것은 발견되지 않았다.

마무리 단계로 접어든 수사의 결론도 장무열을 투기한 김익현의 우발적인 범행 정도로 정리되는 모양새였다.

허상익은 반개(半開)한 눈으로 장내를 훑어보았다.

‘저들 중에도 분명 김익현과 관련 있는 자들이 있겠지?’

김익현이 사헌부의 집의 자리를 차지하고 강산이 한 번 변했다.

사헌부 곳곳에 그의 영향력이 뻗어 있을 터였다.

이제 누굴 믿고, 누굴 의심해야 한단 말인가?

“어험.”

그때 불편한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사헌지평 권문이었다.

“다들 이 어인 소란인가. 아무리 큰 변괴가 발생하였다곤 하지만, 예가 어디인가. 사헌부의 대장청이 아닌가. 어찌 격에 맞지 않게 호들갑을 떠는 것들인가.”

권문은 짧은 수염을 쓸며 한껏 거드름을 피웠다.

“불안해하는 마음, 충분히 이해할 수 있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야 하지 않겠는가?”

이어 권문은 어사들을 한 명씩 지목하여 다른 사건들에 관해 물었다.

수상한 무리가 투전판을 운영한다는 제보와 시전에 나타난 왈짜들에 관한 소식.

좀도적에 관한 관아의 보고 등이 거론되었다.

“지평 나리!”

보다 못한 허상익이 항의했다.

“지금 김익현이 일으킨 사건으로 사헌부의 명예가 흙바닥을 구르고 있습니다. 모든 전력을 쏟아 이번 사안을 조사하여도 부족할 판인데, 투전판이나 좀도적 같은 일에 신경 쓸 여력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권문이 심드렁한 눈으로 물었다.

“그 일이라면 보름이나 조사하였네. 그래서 무언가 나온 게 있는가?”

“성과가 없다 하여 그 일을 미루잔 말입니까?”

“경중을 나눠 적당히 분배하자는 말일세.”

“전력을 다해도 진상을 파악하지 못한 일입니다.”

“하면, 그 사건에 어사 모두가 몰두하여 민생을 방관하여도 된단 말인가?”

“하오나…….”

권문이 손을 들어 허상익의 입을 막았다.

“상명하복. 쓸데없는 어깃장이라면 더는 듣고 싶지 않군.”

호랑이 없는 곳에 여우가 날뛴다 하였다.

김익현이 있을 땐 감히 허리조차 제대로 펴지 못했던 권문이 어사들을 굽어보았다.

허상익은 한숨을 참지 못했다.

‘그분이라도 계시면 좋을 것을.’

장무열.

집의 김익현 사건 이후 급부상한 인물은 권문이 아니라 장령 장무열이었다.

이번 사건을 해결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대사헌의 아들이라는 막강한 배후를 지녔으니.

비어 있는 집의 자리는 그의 몫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하지만 정작 그는 근래 사헌부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대체 어디에 계신 겁니까?”

***

별궁 근처의 백 년 묵은 백오동 나무.

아름드리나무는 다섯 치 반쯤 곧게 자라다 동과 서, 양 갈래로 가지를 길게 뻗었다.

그 백오동 나무의 오른쪽 나뭇가지에 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장무열이었다.

그는 가벼운 발돋움으로 백오동 나무 위로 올랐다.

이내 굵은 가지에 비스듬히 걸터앉은 채 담 너머 저택 내부를 찬찬히 살폈다.

굴뚝에서 저녁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비질한 마당 한구석에선 호리호리한 체격의 사내가 장작을 패고 있었다.

장무열의 형인 장선제였다.

도끼질이 서툰 탓에 나무엔 도끼 자국만 찍힐 뿐, 쪼개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장선제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장작을 패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응애, 응애.”

멀지 않은 곳에서 갓난아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아이 울음소리에 장선제는 패다만 장작과 도끼를 던져두고 서둘러 집안으로 뛰어들어갔다.

곧 아이를 어르는 그의 목소리와 여인의 웃음이 들려왔다.

“우리 도련님, 무슨 일이냐? 어디 불편한 것이야?”

빠끔히 열린 동창 사이로 장선제의 얼굴이 보였다.

그는 우는 아기를 품에 안았다.

어린 아기가 전하는 한 줌의 체온에 녹아내리듯 아득해진 눈빛.

장선제의 얼굴을 가득 채운 거대한 희열.

“아가, 아비다. 아비가 왔으니 걱정 마라.”

혹여 세게 쥐었다가 부서질까 두려운 듯 장선제는 조심 또 조심하였다.

마치 그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아직 눈도 뜨지 못한 어린 것의 입가에 방긋 웃음이 걸렸다.

“어이쿠, 이 녀석. 아비 얼굴에 쉬를 하면 어찌하느냐? 지금 보니 이 짓을 하고 싶어 날 부른 모양이구나. 하하하.”

장선제는 함박웃음을 터트렸다.

그 따뜻함이 장무열이 있는 백오동 나무에까지 전해졌다.

문득 공기가 따뜻해졌다.

어느덧 봄이 지척까지 와 있었다.

하지만…….

장무열은 훌쩍 백오동 나무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의 계절은 아직 겨울이었다.

바람이 시리고 날카로운…….

한겨울이었다.

***

해가 서서히 기울었다.

세상이 검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장무열은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무덤 앞에 서 있었다.

실력 좋은 지관이 묫자리를 선택한 듯.

산을 병풍처럼 두르고 시야가 뻥 뚫린 양지쪽에 자리한 무덤은 바람도, 햇살도 적당하였다.

봉분도 높았고 치적을 기리는 비석도 눈부셨다.

그 어디에 비견하여도 모자람이 없었다.

“…….”

물끄러미 무덤을 바라보던 장무열이 비석 곁에 털썩 주저앉았다.

향 단지에 향내가 가득했다.

누군가 다녀간 모양이었다.

소중한 사람을 잃은 비통함으로 가득한 비석을 손끝으로 훑었다.

뒤늦게 그 흔한 술병 하나 들고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마음쓰지 않았다.

무덤의 주인도 크게 신경 쓰지 않을 테니까.

“왜 그랬나?”

툭, 뱉어내듯 장무열이 물었다.

그날 이후, 꽤 여러 날이 흘렀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는 답을 찾지 못했다.

“그때 왜 날 구했는가?”

집의의 검(劍)은 장무열을 노리고 있었다.

서강율이 뛰어들지 않았다면, 이곳에 묻힌 사람은 그가 아닌 자신이었으리라.

충분히 피할 수 있었을 텐데.

아니, 애초에 끼어들지 않았다면 이런 비참한 모습으로 누워 있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그래서 이해할 수 없었다.

서강율이 자신을 지킨 연유.

그는 서강율의 혈육도 아니고, 친우도 아니었다.

오히려 만나기만 하면 늘 신경전을 벌이던 앙숙이었다.

인연이라 말하기에도 턱없이 부족한 관계였다.

굳이 억지로라도 둘 사이를 연결 짓자면 은자원에 잠시 함께 있었던 정도.

그마저도 공식적인 절차가 아닌 장무열의 억지로 이뤄진 합류였을 뿐이다.

벗이라기보단 남에 가까운 사이.

그래서 궁금했다.

묻고 싶고, 알고 싶었다.

“왜냐? 왜 그런 짓을 하였느냐?”

허망한 물음은 바람에 쓸려 사라졌다.

어느덧 을씨년스러운 밤이 찾아왔다.

장무열은 무덤가에 피곤한 몸을 뉘었다.

세상이 어둠에 잠기자 하늘은 오히려 더욱 휘황찬란해졌다.

밤하늘을 가득 채운 별들을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그 녀석, 언제나 자고 있었지.

일에 몰두하고 있다 보면 서강율이 장난기 가득한 얼굴을 불쑥 내밀곤 했다.

쥘부채를 흔들며 얄미운 눈웃음을 치며.

지금도 그렇게 나타날 것만 같았다.

비석 뒤에 숨어 있다가 많이 놀랐느냐며 아무렇지도 않게 모습을 보일 것만 같다.

그러나…….

감은 눈을 떠도 서늘한 바람만 지나갈 뿐이다.

마지막까지도 남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작자로군.

멍하니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장무열이 문득 입을 열었다.

“……그간 나름 그들의 뒤를 조사해 보았다.”

십학사.

서강율을 잃은 후, 장무열은 미친 듯이 십학사의 뒤를 쫓았다.

여러 곳에서 십학사에 관한 소문을 접했다.

처음에는 괴담이나 뜬소문 같은 것이라 여겼다.

천하를 좌지우지하는 은둔 세력이라니.

시전 거리의 전기수나 할 법한 허황한 이야기가 아닌가.

그런데 아니었다.

십학사는 실존했다.

직접 그 실체를 보기까지 하였으니.

“하지만 그 어디에서도 놈들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었다.”

안갯속에 잠긴 듯, 무언가를 발견했다 싶으면 이내 신기루처럼 흩어지곤 하였다.

“그대가 그 오랜 세월을 들이고도 끝내 찾지 못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겠지.”

하지만 서강율 때와는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하나 있다.

그는 십학사의 실체를 분명 확인했고, 그들의 흔적을 찾을 수 없는 이유도 짐작하고 있었다.

“십학사의 그늘이 천하에 드리워져 있기 때문이겠지.”

장무열은 눈을 뜨고 일어섰다.

“오늘은 작별인사를 하러 왔다. 당분간은 바빠서 못 올 것 같다.”

담담한 작별인사를 끝으로 그는 산을 내려왔다.

말을 매어놓은 곳으로 향할 때였다.

지나가는 어떤 형제들의 대화가 장무열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형님, 왜 싸움을 하였소.”

“그럼 네가 맞고 왔는데 어떻게 모른 척을 해?”

“왜 안 하던 짓을 하오? 평소에는 날 그렇게 못 잡아먹어 안달하더니.”

“인마, 내가 괴롭히는 건 돼. 하지만 다른 녀석이 그렇게 하는 건 이야기가 다르단 말이야.”

“뭐가 다르오?”

형이 가슴을 두드리며 말했다.

“네가 어디 가서 맞고 다니면 내 체면이 뭐가 되겠느냐? 넌 나만 괴롭힐 수 있다. 알겠느냐?”

형이 앞니 빠진 미소를 보였다.

두 형제는 투닥거리며 장무열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그들을 지켜보던 장무열이 쓸쓸히 중얼거렸다.

“그랬던 거냐?”

너는 날 귀찮게 할 수 있어도, 다른 사람이 그러는 꼴은 용납할 수 없었던 거냐.

끝까지 엉뚱한 별종이로구나.

달갑지 않다.

원한 적도 없고, 바란 적도 없으니.

너의 그 황당한 집착과 독점욕은 더더욱 사양이다.

하지만…….

장무열의 표정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자랑은 아니다만 내가 좀 집요한 성격이라서 말이다.”

네가 강제로 지운 빚.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갚을 것이다.

반드시…….

기필코 갚아주마.

***

새벽에 눈이 내렸다.

봄기운 한창이던 세상이 하얗게 퇴색하였다.

화완 옹주는 후원을 거닐었다.

완벽했던 설원 위에 작은 발자국이 각인되었다.

사각사각.

발을 옮길 때마다 들려오는 눈가루 부서지는 소리가 좋았다.

깊은 정적 아래, 오롯이 내 발소리만 울리니.

또한, 그녀는 침묵을 좋아하였다.

정적과 함께 찾아오는 깊은 사색의 시간이 즐거웠다.

깊고 은밀하면서도 두터운.

잔물결 하나 일지 않는 호수의 투명함에 마음을 빼앗기고, 완벽한 둥근 달과 얼어붙은 들판에 매료되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겨울을 사모하였다.

봄은 경박하고, 여름은 무모하며, 가을은 과한 계절이다.

그들에 비해 차갑게 얼어붙은 겨울은 얼마나 고아한가.

하여, 봄이 무르익은 계절에 만난 눈이 유달리 반가웠다.

밤새 내린 눈이 많지 않아 아쉬울 따름이다.

선물처럼 찾아온 겨울의 마지막 자취.

한낮이 되면 초라해질 정취를 만끽하기 위해 화완옹주는 걷고 또 걸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어느 사이 눈 쌓인 후원의 자목련 나무가 있는 곳까지 다다랐다.

새하얀 세상에 핀 자줏빛 목련꽃은 어찌 보면 우아하였고, 또 어찌 보며 요사하리만큼 화려하였다.

목련의 아름다움은 기이하게도 화완옹주와 닮아 보였다.

“왔소?”

목련꽃을 바라보던 화완옹주가 고개를 돌렸다.

그녀가 후원을 홀로 산책한 또 다른 이유.

이곳에서 누군가와 만나기로 약조하였던 까닭이다.

장무열은 언제나처럼 가벼운 묵례로 인사를 대신했다.

그것이 그만의 인사였다.

무례할 법한 모습이건만, 화완은 오히려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먼저 만나자는 기별을 보내고. 좀처럼 없던 일이라, 조금 놀랐다오. 그래, 무슨 볼일이오?”

화완의 물음에 장무열은 대답 대신 소매에서 무언가를 꺼내 보였다.

나무로 만든 작은 패였다.

그 패에 학(鶴)이라는 한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김익현이 지니고 있던 십학사의 패.

“이게 무엇이오?”

화완이 무심한 시선으로 장무열을 응시했다.

“……십학사의 패입니다.”

“십학사? 십학사라면 장안에 떠도는 헛소문이 아니오. 이런 쓸데없는 일로 날 찾은 것이오?”

화완은 작은 실망을 흘리며 몸을 돌렸다.

“어찌하면…….”

싸늘하게 돌아선 그녀의 등으로 장무열의 묵직한 음성이 달라붙었다.

“십학사가 될 수 있습니까?”

화완옹주의 걸음이 우뚝 멈춰졌다.

그녀가 장무열을 돌아봤다.

단단한 그의 눈빛과 서늘한 그녀의 눈빛이 탐색하듯 얽혀들었다.

후원에 바람이 일었다.

설원 위에 핀 자목련이 소름 끼치게 아름다웠다.

***

한양 외곽의 버려진 기루.

그곳 지하에 긴 탁자가 놓여 있었다.

모두 열 명이 앉을 수 있는 좌석.

각각의 자리엔 장생(長生)과 불사(不死)를 뜻하는 물상(物象)들이 그려져 있었다.

십학사였다.

열 명의 우두머리를 뜻하는 자리엔 현재 아홉 사람이 자리를 메우고 있었다.

자리를 채운 사람들의 면면은 실로 다양하였다.

관복을 입은 사람, 선비로 보이는 사람, 상인과 승려.

심지어 여인도 있었다.

그들 모두 두건과 가면, 흑립과 면사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하지만 하나같이 심각한 표정이라는 것은 감추지 못했다.

“실패하고 말았구려.”

오랜 침묵 끝에 누군가가 운을 뗐다.

구름(雲)이었다.

“선(愃). 그가 운명의 사슬을 벗어나고 말았소.”

여기저기서 탄식하는 한숨이 새어 나왔다.

몇 개월 전.

십학사는 한자리에 모여 한 사람의 운명을 결정했다.

왕세자, 선의 죽음.

그 결정을 완성하기 위해 십학사는 각자의 역할을 정했고, 세자가 절대 빠져나올 수 없는 함정을 설계하였다.

인간인 이상 절대 헤쳐나갈 수 없기에, 그들은 스스로의 계략을 ‘운명’이라 칭했다.

한데, ‘선’은 절대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사슬을 털어내었다.

“선만 잘못된 것이 아니오. 우리가 도모한 다른 일들도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소.”

이번에 입을 연 자는 소나무(松)였다.

물(水)도 한마디 거들었다.

“우리가 계획한 일도 귀찮게 되었소.”

선의 운명과 더불어 십학사는 문 소원과 만사여의에 관한 일도 논의하였다.

한데, 그 모든 노력이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

십학사의 오랜 역사 중에 단 한 번도 없었던 사건.

거듭된 실패에 분위기에 좌중의 분위기는 실로 무거웠다.

십학사의 명실상부한 영수(領袖).

해(日)가 입을 열었다.

“이번에 뜻하지 않은 변수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오. 하지만 작은 실수에 불과하오.”

구름이 해의 말을 자르며 나섰다.

“실수. 지금 작은 실수라 하였소?”

싸늘하게 냉소한 구름의 말이 이어졌다.

“이번 일을 어찌 실수로 해석할 수 있단 말이오? 선이 살아남았소. 이 말을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설마 모르지는 않으시겠지요?”

항의하는 구름을 해는 무심히 응시했다.

그 무감한 눈빛에 구름이 격분했다.

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선과 함께 도모한 다른 일 또한 적들의 경계심만 키운 꼴이 되고 말았소. 얻은 것은 하나 없고, 큰 손실만 입었으니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오. 더구나…….”

“학을 잃은 것은 확실히 뼈아픈 실책이오.”

해의 느슨한 목소리가 구름의 말문을 막았다.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그리 태연하단 말이오?”

“당연히 태연할 수밖에.”

해가 탁자 위에 두 손을 올리고 천천히 깍지 꼈다.

가면 뒤에 숨은 해의 표정은 읽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일렁이는 눈동자.

감정이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해의 눈빛에 구름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해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왜 우리의 계획을 운명이라 하였는지 잊은 모양이오. 벗어나고 싶어도 벗어날 수 없고,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없기에 운명이라 한다오.”

조용한 말로 구름을 물리친 해가 나머지 학사들과 일일이 시선을 맞추었다.

“잊지 마시오. 우리가 운명(運命)이오. 우리의 뜻이 곧 하늘의 뜻(天命)임을, 모두 잊지 않길 바라겠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