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택-왕들의 향연-105화 (105/215)

#105. 저마다의 발자취

선연한 반월(半月)이 하늘 언저리를 유영했다.

이레는 가늘게 실눈을 뜨고 바람에 휩쓸리는 달을 가늠하였다.

달빛이 곰상스럽게 문풍지를 어루만졌다.

아직 밤이 깊지 않음이라.

시선을 사로잡는 달빛을 간신히 물리며 서탁 앞에 앉았다.

종이를 펼치고, 먹을 가는 일련의 행동들이 왠지 모르게 낯설었다.

이렇게 서탁 앞에 앉은 것이 얼마 만이던가.

차분하게 손가락을 꼽아보니 두 손을 가득 채우고도 남았다.

“보름이나 흘렀구나.”

별궁과 세손궁에 때아닌 전염병이 돈 지도 어느덧 보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간 이레는 내의들과 의녀들에게 둘러싸여 꼼짝달싹도 하지 못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서탁에 앉아 할아버지들과 필담을 나누는 일은 꿈도 꿀 수 없었다.

엄중한 감시의 눈이 별궁에서 물러간 것이 불과 두 시진 전.

빈씨께서 역귀를 물리치고 쾌차하였다는 진단이 떨어지고도 사흘이나 지난 후였다.

“네가 얼마나 그리웠는지…….”

이레는 다독이듯 서탁을 쓸었다.

손 내밀면 닿을 곳에 서탁이 있는데, 지켜보는 눈이 많아 만날 수 없으니.

손발이 꽁꽁 묶기고 입에 재갈마저 물린 것마냥 갑갑하였다.

그립고 또 보고 싶었다.

할아버지들이…….

은백이.

이레는 그리운 마음을 붓끝에 듬뿍 묻혔다.

-오늘따라 유난히 달빛이 곱습니다.

먹으로 그린 진심이 연기가 되어 흩어졌다.

곧 그녀의 마음을 받은 누군가의 대답이 돌아왔다.

-고운 눈으로 바라보는 보는 달빛이니, 고울 수밖에.

“아!”

이레는 저도 모르게 탄성을 흘렸다.

반듯하고 정갈한 필체.

-은백!

그의 글을 다시 보니 반가움을 금할 수 없었다.

-그래, 나다. 그간 잘 지냈느냐?

담담히 대답하고 안부를 물어오는 글씨엔 이레를 향한 그의 마음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잘 지냈습니다.

-불편한 곳은 없느냐?

-없습니다. 이젠 모든 것이 괜찮습니다.

-괜찮다 답하는 걸 보니, 믿을 수 없구나.

이레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진심입니다. 어찌해야 믿으시겠습니까? 그보다 은백이야말로 괜찮으십니까?

-괜찮다.

-정녕 그 말씀을 믿어도 되겠습니까?

서탁 저 너머로 형운의 웃음이 들려오는 듯했다.

그렇게 이레와 형운은 한동안 서로의 안부를 묻고 확인하였다.

-너의 소식을 듣고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느냐? 적당히 앓는 척하는 줄 알았더니, 정말로 홍역에 걸렸을 줄이야.

-저야말로 놀랐습니다. 옻나무로 인한 발진이 아니라 홍역에 걸리셨다 하여. 말이 씨가 된다고. 제가 공연한 소리를 하여 발병한 건 아닌지,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릅니다.

세자와 정인화를 구하기 위한 시간이 필요했다.

하여, 이레는 한 가지 계책을 생각해냈다.

역병이 창궐하였다고 소문을 내는 것이었다.

그것은 별궁에 갇힌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도였다.

하지만 홍역을 가장(假裝)하기 위해선 몇 가지를 준비해야 했다.

이레는 금정을 시켜 형운에게 서찰을 보냈다.

그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하고 의향을 물었다.

형운은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의 생각에 동참했다.

약방에서 몰래 빼돌린 옻나무를 이레와 함께 사용한 것이다.

-그런 생각은 어찌하였느냐?

-어린 시절 오라버니와 들에서 놀다 옻나무를 잘못 만진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일어난 붉은 반점이 서책에서 우연히 읽은 홍역의 증상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참으로 기발한 생각이었다.

이레의 생각은 적중하였다.

옻나무로 인한 발진을 본 의녀들은 혼비백산하였다.

붉은 발진이 홍역의 증상과 비슷하였던 까닭이다.

세손인 형운 또한 같은 증세를 보이자, 더는 의심하는 자도 없었다.

세손과 빈씨의 홍역에 궁은 발칵 뒤집혔다.

소식을 접한 임금께선 병의 확산을 막기 위한 모든 조처를 하였다.

궁궐의 모든 문이 굳게 닫히고, 오가는 사람과 짐의 단속을 철저히 하였다.

관학의 유생들과 세자의 입대를 지켜보는 자리도 뒤로 미뤄졌다.

모두의 이목이 집중되었던 호산청과 문소원의 출산도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하지만 우연의 일치였던 걸까.

단순히 흉내만 내려던 두 사람은 실제로 여러 날을 고열과 함께 심하게 앓았다.

-무리하여 몸살이 났던 모양이다. 아무튼, 네 계책 덕에 실종된 청상도 구할 수 있었고, 아바마마께서도 큰 화를 면할 수 있었구나. 참으로 고맙다.

-어디 저 하나의 노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었겠습니까? 모두가 애쓴 덕이지요.

돌이켜보면 아찔한 순간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박진봉의 함정에 걸렸을 때, 형운이 대책을 미리 준비하지 않았더라면.

팽례 강현보가 세자 저하의 뒤를 쫓아 북방으로 달려가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더라면.

도적에게 화를 입은 강현보를 대신하여 때마침 다른 팽례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역병을 떠올리고 의향을 물어보는 이레의 서신을 형운이 무시하였더라면.

영민한 형운이 이레의 계획에 즉각 동참하지 않았더라면.

이 중에서 단 한 가지만 어긋났어도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으리라.

모두가 애쓰고 노력한 덕이었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이레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왜일까.

분명 모든 일이 잘 풀리고 해결되었는데, 불현듯 서글픈 마음이 드는 것은.

그것은 아마도 먼 길 떠난 그리운 한 사람 때문일 것이다.

-왜 말이 없느냐?

은백이 물었다.

그 역시도 이레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혹, 울고 있는 건 아니더냐?

-아닙니다.

이번에도 형운을 속일 수 없었다.

-울고 싶을 땐, 마음껏 울어도 된다. 그리움이야말로 그 사람이 세상에 남긴 발자취가 아니겠느냐?

-은백…….

이레는 잠시 망설이다 말을 이었다.

-한 가지 무리한 청을 해도 되겠습니까?

-청이라. 무엇이든 말만 하여라. 네가 원하는 건 뭐든 들어줄 터이니.

-……은백을 그리워하지 않게 해주십시오.

짧고 간결한 바람.

하지만 그 속에 담긴 뜻은 결코 짧지도 가볍지도 않았다.

-그리워하지 않게 해달라…….

형운은 이레의 짧은 문장에 담긴 참뜻을 바르게 읽었다.

-참으로, 참으로 어려운 청이로구나.

난감한 기색을 보이던 것도 잠시.

-알겠다.

형운의 힘찬 다짐이 서탁을 가득 메웠다.

-약속하마. 내 무슨 일이 있어도 너를 외롭지 않게 하마.

-분명 약조하셨습니다. 반드시 지키셔야 합니다.

-믿어라. 지금까지 내 입으로 뱉은 말을 지키지 않은 적이 없다.

“믿겠습니다.”

슬픔으로 얼룩진 이레의 얼굴 위로 작은 감동이 너울처럼 번져갔다.

“단 한 번도 입 밖으로 내신 다짐, 어긴 적이 없으니.”

이레와 형운.

서로를 아끼고 살피는 연인의 필담은 밤늦도록 이어졌다.

***

늦은 밤.

사헌부의 작은 쪽문이 열리고 한 사내가 걸어 나왔다.

검붉은 핏자국으로 얼룩진 도포.

찌그러진 흑립.

화려한 비단과 값비싼 장신구에 어울리지 않게 사내의 행색은 낭패한 구석이 역력했다.

“무얼 하고 있소? 어서 나가지 않고서.”

대문 앞을 지키던 군졸이 사내의 등을 거칠게 떠밀었다.

“어이쿠.”

요란하게 넘어진 사내가 목에 핏대를 세웠다.

“네놈들! 내가 누군 줄 알고 감히 이러느냐?”

고리눈을 뜨며 따져 묻는 사내는 문 소원의 오라비인 문성국이었다.

무려 보름 동안이나 사헌부의 옥사에 갇혀 문초를 당하다 간신히 풀려나는 길이었다.

그간의 고초에 신경이 날카롭게 날을 세웠다.

그러던 참에 한낱 문지기가 괄시하니, 내내 억눌렀던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네 이놈! 내가 뉘인 줄 모르느냐?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어서 무릎을 꿇고 살려달라 빌면 내 너의 정성을 보아 목숨만은 남겨주마.”

“거참, 시끄럽네.”

문성국의 서슬 퍼런 협박에도 군졸은 두려워하기는커녕 콧방귀만 뀔 뿐이다.

“아, 걸리적거리게 하지 말고. 어서 가쇼.”

예전 같았으면 감히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할 군졸의 박대에 문성국은 어이가 없었다.

“이런 미친놈들을 보았나. 오냐, 두고 보아라. 네놈들의 소행을 내 기필코 주상전하께 고할 것이야. 내 소원 마마를 뵈오면…….”

문성국이 악을 쓰며 이를 갈고 있을 때였다.

“대체 이게 무슨 소란인가?”

소란을 들은 입직 승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를 본 문성국의 얼굴이 환해졌다.

“아이쿠, 이게 뉘시오? 한 승지가 아니오?”

낯이 익은 자였다.

문 소원이 회임한 이후 수많은 사람이 문성국의 대문을 드나들었다.

한 승지도 대문턱이 닳도록 드나든 자들 가운데 하나였다.

“한 승지, 나요.”

서둘러 한 승지의 소맷자락을 부여잡은 문성국이 군졸을 쏘아보았다.

“네 이놈, 지금이라도 용서를 구한다면 내 너른 아량으로…….”

의기양양해진 문성국이 군졸을 호통치려는 찰나.

“뉘냐?”

한 승지가 문성국의 손을 뿌리쳤다.

문성국은 크게 당황하였다.

“한 승지, 나 문성국이요.”

“문성국?”

마치 처음 보는 사람인 듯한 승지는 시침을 뚝 뗐다.

“사람 잘못 본 듯하군.”

멍하니 한 승지를 바라보던 문성국이 돌연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한 승지. 그대가 어떤 사람인지 내 잠시 잊고 있었소. 호탕하고 장난기가 많아 언제나 웃음이 그치지 않았지. 설마, 이런 상황에서도 그리 짓궂게 농을 할 줄은 몰랐소.”

문성국의 말에 한 승지가 혀를 찼다.

“쯧쯧, 말세로구나.”

“하, 한 승지.”

뒷짐을 진 한 승지가 당황한 문성국에게 눈을 부라렸다.

“천한 것이 감히 양반처럼 비단옷 입고 옥 관자 두른 것도 가관이거늘. 감히 양반의 소맷자락을 잡고 하대를 하다니. 세상이 어찌 되려고 이러는 것인지.”

툭툭, 더러운 것을 털어내듯 옷자락을 턴 한 승지가 사헌부 안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기다렸다는 듯이 군졸들의 냉대가 이어졌다.

“승지 나리의 말씀 들었느냐? 더는 소란 떨지 말고 썩 꺼지거라.”

관졸의 멸시에 문성국은 머릿속이 아득했다.

사람을 잘못 보았을 리 없다.

그는 한 승지가 분명하였다.

한 달 전쯤 찾아와 은근한 시선과 함께 선물을 건네주던 바로 그 한 승지가 분명하였다.

자신을 보면 오래전에 헤어진 친구 생각이 난다며, 유난히 반가워했었지.

그런 한 승지가 하루아침에 돌변하였다.

낯선 사람을 보는 듯한 그 눈빛.

아니, 옷자락을 터는 모습은 마치 사람이 아닌 더러운 벌레를 보는 듯했다.

‘그러고 보니 보름 동안 아무도 날 찾지 않았구나.’

그가 사헌부에 갇혀 있는 보름 동안, 그 누구 하나 찾아오지 않았다.

집안의 마름에게 도움을 청하라 안달을 부렸지만, 누구의 도움도 받을 수 없었다.

이럴 리 없는데.

이럴 순 없는 것인데.

“지금 이럴 때가 아니로구나.”

문성국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 한 승지 따위에게 마음 쓸 때가 아니었다.

누이인 문 소원이 출산하지 않았던가.

호산청 대문 앞에서 곧장 사헌부로 압송되어 오느라 누이동생이 어찌 되었는지도 알지 못했다.

“그래. 무언가 착오가 있음이 분명하다. 누이에게 찾아가 사정을 설명하면, 해결될 것이다.”

문성국은 반쯤 넋이 나간 얼굴로 누이의 전각으로 향했다.

늘 화려한 불빛으로 밤을 장식했던 전각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마마, 접니다. 오라비가 왔나이다.”

문성국은 서둘러 전각 안으로 들어서며 목청을 돋웠다.

때마침 자지러지는 듯한 아기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마마, 그간 잘 지냈습니까. 이 오라비는 죽을 뻔…….”

문성국의 말은 마지막 매듭을 미처 짓지 못했다.

차갑게 가라앉은 전각의 풍경에 그는 멈춰 서고 말았다.

***

“필요 없다, 다 치워라.”

신경질 가득한 음성이 문 소원의 전각을 가득 채웠다.

어미의 성화에 놀란 갓난쟁이가 자지러지는 울음을 터트렸다.

“응아, 응아, 으앙!”

“시끄럽다, 시끄러워!”

문 소원은 자신의 곁에 누워 울고 있는 아기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뭘 잘했다고 우는 것이냐? 나를 이 꼴로 만들고 뭘 잘했다고 울어? 다물어라, 다물어!”

급기야 갓난아기의 입을 틀어막는 문 소원을 어린 궁녀가 서둘러 말렸다.

“소원 마마, 이러시면 아니 되옵니다.”

짝!

궁녀의 얼굴에 문 소원의 손자국이 선명하게 찍혔다.

“네년이 감히 나를 무시하는 것이냐? 쓸모없는 옹주 따위나 낳은 후궁이란 말이지. 오호라, 지금 보니 네년이 내게 딸을 낳으라 고사를 지낸 것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딸을 낳을 이유가 없다.”

“소원 마마, 어찌 이러십니까?”

“시끄럽다. 내 눈앞에서 저 쓸모없는 것을 당장 치워버려라.”

문 소원의 명령에 궁녀들은 안절부절못하였다.

“뭐야? 이젠 내 명을 안 듣겠다는 것이냐? 좋다. 내 직접 치우겠다.”

바닥에 누운 아기를 번쩍 안아 든 문 소원은 처소를 나와 대청마루를 내려섰다.

저벅저벅, 전각의 뒤뜰로 향한 그녀가 우물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아니 되옵니다.”

기겁한 궁녀들이 문 소원의 허리춤에 매달렸다.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문성국이 달려들었다.

“소원 마마, 왜 이러십니까? 정신 차리세요!”

문성국의 절규에 문득 문 소원이 고개를 돌렸다.

“오라버니, 오셨습니까?”

“소원 마마.”

“그간 뭐하느라 소식이 뜸했던 것입니까.”

좀전의 소란 같은 건 애초에 없었다는 듯 그녀는 말간 얼굴로 문성국을 응시했다.

문득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문 소원이 문성국을 잡아끌었다.

“그런데 오라버니, 선물은 언제 온답니까?”

“선물? 무슨 선물 말이냐?”

오라비의 물음에 문 소원이 투덜대며 자신의 배를 쓸어내렸다.

“예정한 날이 다가오니 슬슬 걱정되지 뭡니까. 방비책을 세워 두어야겠습니다.”

문 소원이 목소리를 한껏 낮췄다.

“십학사의 선물은 언제쯤 당도한답니까?”

문성국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누이동생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었다.

“소원 마마. 정신 차리십시오. 저 아이는 소원 마마의 옹주가 아닙니까?”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보다 오라버니, 시끄러워 죽겠습니다. 저 아이 좀 어디로 치워버리세요.”

짜증을 내는 누이의 어깨를 문성국은 거칠게 잡쥐었다.

“정신 차려! 정신 차리란 말이다!”

오라비를 향해 문 소원이 눈빛을 세웠다.

“왜 갑자기 이러는 겁니까? 그러는 오라버니야말로 정신 차리세요. 십학사가 보내는 선물, 정신 똑바로 차리고 받으란 말입니다.”

“소원 마마…….”

“아시지요? 난 아들을 낳을 겁니다. 기필코 왕의 어미가 될 것이어요. 나는 왕의 어미가…….”

“마마.”

“기필코……. 왕의 어미가…….”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문 소원의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급기야 흐윽, 기어이 울음이 흘러나왔다.

그렇게 얼마나 흐느껴 울었을까.

얼굴에 얼룩진 눈물을 닦아내며 문 소원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왜 그러느냐? 어딜 가려고 그러는 것이냐?”

눈빛을 번뜩이며 문 소원은 흐트러진 매무시를 만졌다.

“이대로 당하고만 있을 순 없지요. 절대 여기서 무너질 수 없어요.”

***

문 소원의 발길이 향한 곳은 용화전, 화완옹주의 전각이었다.

늦은 밤까지 수를 놓던 화완옹주가 언제나처럼 밝은 미소로 문 소원을 맞이하였다.

“몸은 좀 괜찮소?”

“괜찮사옵니다.”

문 소원이 화완의 맞은편에 자리했다.

“걱정하였는데, 다행이오. 그나저나 얼마나 상심이 크오.”

화완의 위로에 문 소원은 고개를 저었다.

“전하께서 정정하시고, 소인 아직 젊고 건강하니. 왕실을 위해 다시 노력할 것이옵니다.”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문 소원이 말했다.

방안에 잠시 고요가 내려앉았다.

수틀에 바늘을 꽂으며 화완이 입을 열었다.

“무얼 잘못 생각하고 있구려.”

말을 하는 내내 화완옹주는 수자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처음 인사를 건네면 곁눈질한 것 외엔 문 소원에겐 눈길 한번 제대로 건넨 적이 없었다.

그 생경한 모습에 문 소원은 어깨가 서늘하였다.

불길한 예감.

증명이라도 하듯 화완옹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든 것이 시와 때가 있는 법이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런, 말귀 어두운 건 여전하오.”

그제야 수틀을 내려놓고 화완옹주는 문 소원을 응시한다.

옹주의 입가에 가느다란 미소가 그려졌다.

“아직도 어떤 입장인지 잘 모르시오? 소원에게 주어진 기회는 끝이라오.”

“그게 무슨……?”

“더는 애쓸 필요 없다는 뜻이오.”

문 소원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옹, 옹주마마…….”

“곤하여 그만 쉬어야겠소. 문 소원도 그만 돌아가 몸조리에 전념하는 게 좋겠소.”

화완 옹주의 입술 끝이 부드럽게 말려 올라갔다.

“옹주도 제 어미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게 아니오?”

말을 끝낸 화완옹주는 제 앞의 수틀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철저한 냉대와 무시.

문 소원은 등 떠밀려 용화전을 나서야 했다.

등 뒤에서 거대한 대문이 매몰차게 닫혔다.

매몰찬 괄시에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이럴 순 없다, 이럴 순…….”

문 소원은 텅 빈 얼굴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과실 가득한 나무를 손에 넣으려다 손에 쥐고 있던 과실마저 잃어버린 허탈감에 몸서리가 쳐졌다.

내가 어찌 오른 자리인데.

내가 어떻게 손에 넣은 것들인데…….

그러나 그 과정에서 너무 많은 적을 만들고 있었음을 문 소원은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갑자기 취한 권력의 달콤함에 취해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하였는지.

한때는 동료였던 사람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감히 어떤 자리를 탐했는지 깨달을 수 없었다.

그러기에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궁인들의 차가운 시선을…….

멸시와 조롱의 연유를…….

그러기에 질시하는 것이리라 생각하였다.

왕께서 나를 어여쁘게 여기시니.

사랑받지 못하는 자들이 나를 핍박하는 것이리라.

돌변한 자들과 달리 왕께선 여전히 변함없었다.

그분은 평소와 다름없는 시선으로 그녀와 그녀의 아기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것이 두려웠다.

그 공평함이…….

어느 한 곳 치우침 없는 왕이 너무나 무서웠다.

마음의 추가 자신에게로 기운 줄 알았건만.

아니었다.

차리리 욕심내지 않았더라면.

곁에 아무도 남지 않았다.

밤바람이 유난히 차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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