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택-왕들의 향연-104화 (104/215)

#104. 비명(非命)과 기성(期成)

처마 끝에 새벽이 걸렸다.

또다시 찾아온 아침에 궁은 기지개를 켜듯 그림자를 길게 늘였다.

오늘도 호산청은 분주하였다.

용마루 위를 걷는 들고양이들처럼 오가는 발걸음들이 조심스럽기 이를 데 없었다.

소원 문씨의 진통은 여전했다.

어제 이른 저녁부터 시작된 진통은 밤을 지나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도 끝나지 않았다.

문 소원의 창백해진 안색만큼 호산청을 드나드는 사람들의 얼굴에도 초조함이 묻어 있었다.

그런 사람 중엔 소원 문씨의 오라비인 문성국도 있었다.

호산청 담벼락 너머에서 서성이던 그는 도 상궁을 보자마자 한달음에 달려갔다.

“어떤가?”

“아직 소식이 없습니다.”

“그런가? 다행이군.”

아이가 나오지 않았다는 소식에 문성국은 되려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진(辰)시가 멀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가?”

“반 시진 정도 남았습니다. 하오나…….”

“왜? 무슨 일이라도 있는가?”

“소원 마마께서 무척 고통스러워하십니다. 이쯤 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도 상궁의 말이 채 끝나지도 않았다.

문성국은 정색하며 말허리를 잘랐다.

“아직 선물이 도착하지 않았네. 고작 반 시진만 더 기다리면 될 터인데, 그걸 못 참아 안달이라 하던가?”

“그렇지만…….”

“쯧쯧, 장차 이 나라의 큰일을 하실 귀한 분을 생산하는 일인데, 어찌 작은 고통을 참지 못해? 이번 일에 소원 마마는 물론이고 내 생사와 집안의 안위도 걸렸으니. 하늘이 무너져도 약조한 시한을 지켜야 한다 전하게. 나오는 아이의 머리를 눌러 다시 배 속으로 넣는 한이 있어도 이를 어겨서는 아니 될 걸세.”

“이미 양수(羊水)가 터져…….”

문성국이 눈에 핏대를 세웠다.

“내 말을 허투루 들은 모양이군. 진시일세. 더도 덜도 말고 꼭 진시에 낳아야 함을 자네도 알지 않는가.”

“……알겠습니다.”

도 상궁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는 도 상궁만 믿음세. 기억하시게. 아들이면 홍색 비단을 저 담벼락에 널어놓고, 여아면 흰색 비단을 널어놓으시게. 그 후의 일은 내가 알아서 할 것이니.”

문성국의 단단한 으름장에 등 떠밀린 도 상궁이 호산청의 중문 안으로 사라졌다.

“이제 머지않았다.”

문성국은 식은땀이 흥건하게 배인 주먹을 줬다 폈다 하였다.

오늘따라 어찌 시간이 더디 흐르는 것인지.

“반 시진이다. 고작 반 시진.”

곧 제 앞에 머리를 조아릴 양반네를 생각하며 문성국은 입가를 길게 늘였다.

***

이른 시각, 궐문이 열리기 무섭게 입궁한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종 2품의 관직) 홍인한은 뒷짐을 진 채 한가롭게 빈청 마당을 거닐었다.

“허허, 봄이 멀지 않았구나.”

오늘따라 유난히 날이 따사로웠다.

평평한 돌 바닥을 밟으며 말간 햇살을 즐기고 있자니, 중년의 관료 하나가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이번에 새로 산혜청 당상직으로 임명된 담와 홍계희였다.

“오셨는가?”

비록 관직은 홍인한보다 낮았으나, 연배가 한참이나 높았던 터라.

홍인한을 향한 홍계희의 눈빛과 말투는 공대도 하대도 아닌 어중간한 것이었다.

담와가 건네는 인사에 홍인한은 가벼운 눈인사로 대답했다.

이윽고 그는 질문을 던졌다.

“어찌 되었소이까?”

두서없는 물음.

그러나 홍계희는 지체하지 않고 대답했다.

“계획대로 되었으이.”

“하면, 주상 전하께서 동궁전으로 행차하신다 하시었소?”

“진시에 관학의 유생들과 함께 동궁전으로 걸음 하신다 들었네만.”

돌아온 대답에 흡족한 듯 홍인한은 미소를 지었다.

“그리 말씀하셨다니, 틀림없이 동궁전으로 행차하시겠소.”

주상 전하의 올곧은 성정이야, 말해 무얼 할까.

한번 입 밖으로 꺼낸 말은 기필코 지키는 분이시니.

그분의 입에서 말을 꺼내는 것이 어렵지, 뱉은 이후의 일은 그야말로 낭중취물(囊中取物).

내 주머니 속의 물건 꺼내는 일보다 쉬웠다.

“세자는?”

궐 안에서 함부로 세자를 호칭하는 것임에도, 홍인한의 얼굴에는 두려운 기색이 전혀 없었다.

신하 된 자가 감히 대리청정하는 세자를 시정잡배 부르듯 불렀다.

“길 떠난 지 무척 오래니, 어쩌면 아직 함경도에 있을지도 모르지.”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 모르시오?”

“워낙 눈치가 빠른 분이라 미행을 붙이기 까다롭더군.”

“하긴. 지금까지 여러 번 실패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었소. 중도에 수상한 기색을 느끼고 돌아오지는 않겠소?”

“그러한 불상사를 대비해 자객들을 넉넉하게 풀어두었다네. 북방에서 한양으로 돌아오는 모든 길목을 막아두었으니, 하늘을 나는 재주가 없는 한 제시간에 올 수 없을 것이야.”

“하늘을 나는 재주가 없는 한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저런, 귀한 분께서 낯선 곳에서 도적 떼에 흉험한 일이라도 당한 건 아닌지 걱정되는군.”

“사정이 어떻든 흉한 꼴은 면하기 어렵겠지.”

“하하, 그런 셈이오?”

지금 그들이 원하는 것은 하나였다.

주상 전하께서 동궁전으로 걸음 하였을 때, 세자가 자리에 없기만 하면 된다.

그리하여 가뜩이나 관계가 불편한 주상 전하와 세자의 사이에 불신의 골이 더욱 깊어지게 만드는 것.

“하필 밀행 가신 곳이 함경도라는 사실까지 아시게 되면, 틀림없이 진노하실 터.”

홍인한의 예측에 홍계희 역시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때마침 갖가지 의혹과 세자가 군권을 쥐려 하였다는 소문이 돌게 될 것이다.

평소 세자를 탐탁지 않게 여기시는 주상 전하의 귀에 이런 소문까지 들어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담와가 말했다.

“더러운 꼴 보지 않으려면 차라리 도적들에게 당하는 게 좋을 수도 있겠군.”

“그럴지도 모르겠소.”

홍인한은 잠시 멈췄던 걸음을 다시 옮겼다.

“참, 그러고 보니 그 일은 어찌 되었소?”

“무슨 일을 묻는 것인지…….”

“거사 이후, 이 나라를 지탱할 적통이 필요하지 않겠소?”

홍계희는 홍인한의 물음이 소원 문씨와 관련한 일임을 눈치챘다.

“소원 문씨를 위한 작은 선물이 이미 성문 안으로 들어왔다 들었으이. 진시를 알리는 북소리에 맞춰 틀림없이 전해질 것이야.”

“진시라. 같은 시간에 한곳에서 비명(非命)하고 다른 한 곳에선 기성(期成)하니, 참으로 기묘한 우연이 아니오.”

“추락과 비상은 본래 한순간에 이루어지는 법. 달리 천명(天命)이라 하겠는가.”

“천명이라. 하하, 과연 천명인 게로군.”

홍인한의 얼굴에 기분 좋은 웃음이 떠올랐다.

그는 유쾌하게 말을 이었다.

“알겠소. 공사다망할 터이니, 그만 돌아가 일 보시오.”

“잠시만 기다리면 곧 좋은 소식 접하게 될 것이네.”

확신하며 홍계희는 빈청 밖으로 사라졌다.

홀로 남게 된 홍인한은 느긋하게 빈청 마당을 거닐었다.

할 일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곧 벌어질 일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한껏 들떴다.

오랫동안 기다려온 노력이 마침내 결실을 보는 순간이었다.

“한데, 왜 이리 번잡한 것인가?”

고요하고 근엄해야 할 궁궐 안이 사람들의 바쁜 발걸음 소리로 어지러웠다.

무슨 이유에선지 내관들과 궁녀들이 분주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홍인한은 미간을 한데로 모았다.

“무슨 일이라도 있음인가? 이 좋은 날 저 무슨 경박한 걸음인지 모르겠군.”

***

낡은 수레 한 대가 외궁을 가로질러 내궁으로 들어섰다.

수레엔 커다란 궤짝과 잡곡과 약재가 든 부대, 그리고 여러 잡화가 잔뜩 쌓여 있었다.

“흐윽.”

면포가 들어 있는 궤짝 안에서 답답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수레를 밀고 끌던 사내 중 하나가 궤짝을 향해 서슬 퍼런 목소리로 윽박질렀다.

“시끄럽다. 신음 한 자락이라도 흘러나오는 날엔 너와 네 배 속의 아이 모두 무사하지 못할 것이다.”

아이를 두고 하는 겁박에 궤짝 안에 갇힌 여인은 터져 나오는 신음을 간신히 목구멍으로 삼켰다.

좁은 궤짝에 갇힌 여인, 다름 아닌 실종된 청상이었다.

남편과 사별하고 시댁과 친정 모두에 버림받은 비운의 여인.

장무열의 형인 장선제를 만나 간신히 잃어버렸던 자신의 삶을 찾았으나, 기구한 운명의 소용돌이에 휩쓸려 손발이 묶이고 입에 재갈까지 물린 채 다시 한번 생사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었다.

“쥐 죽은 듯 있어라. 다시 한번 소리를 내면, 당장 네년의 배를 갈라 자식부터 죽여주마.”

섬뜩한 협박에 청상은 몸을 웅크린 채 오들오들 떨었다.

‘아아, 천지신명이시여.’

그녀는 두 손으로 배를 감싸며 간절하게 빌었다.

태어나기도 전에 온갖 불행을 다 겪은 아이였다.

아비를 잃고, 무능한 어미로 인해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이젠 낯선 자들에게 잡혀 앞날을 장담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여인은 소리 없이 울었다.

이 무슨 가혹한 운명인가.

이 서러운 팔자를 어찌한단 말인가.

질끈 감은 눈가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 사람이 보고 싶었다.

늘 허허롭게 자신을 바라보던 사내.

짧은 시간이었으나 그녀의 든든한 지아비가 되었던 장선제를 떠올리며 인화는 입술을 말아 물었다.

그녀에게도 꽃처럼 어여쁜 시절이 있었더랬다.

누구누구의 아내가 아니고, 어떤 집안의 며느리가 아닌 정인화라는 고운 이름으로 불리던 때가 있었다.

어미의 금지옥엽이었고 할아버지의 귀염을 독차지했었더랬다.

오라버니들 어깨너머로 글도 깨쳤다.

어린 시절엔 세상이 온통 아름다웠다.

봄에 피는 봄꽃을 꺾어다 방을 장식했고, 여름엔 툇마루 끝에 걸터앉아 밤하늘을 올려다보곤 하였다.

가을은 아비의 눈을 피해 단풍 구경을 했었고, 겨울엔 마당에 소복한 눈으로 눈사람을 만들었다.

하루하루가 즐거웠고, 나날이 행복에 겨웠다.

하지만…….

혼인과 함께 모든 것이 아스라하게 멀어졌다.

인화라는 이름은 서서히 잊히었다.

혼롓날, 처음 얼굴을 보고 통성명하였던 남편은 미처 정을 붙이기도 전에 세상을 떠나 버렸다.

혼인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인화에겐 ‘청상’이라는 새로운 호칭이 붙고 말았다.

웃으면 안 되었다.

행복한 건 청상에겐 죄였다.

그런 그녀에게 장선제, 그 사내가 손을 내밀었다.

어린 시절, 어미를 따라간 산사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소년.

유난히 웃음이 맑았던 소년은 그날 이후 그녀를 연모하였다고 했다.

연모.

그 설레는 감정을 감히 내가 담아도 되려나.

내 배 속에 다른 사내의 아이를 품고도 이런 감정이 되어도 되나…….

고민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내가 감히 행복해도 되려나.

심장을 조여오는 죄책감에 불면의 밤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 사내가 말했다.

괜찮다고…….

세상의 손가락질, 사나운 눈길은 모두 자신이 감내하겠노라 하였다.

거친 바람을 대신 맞아주겠노라 맹세하였다.

친정에서마저 외면한 자신에게 선뜻 손 내민 사내.

그 마음이 고맙고, 사내의 눈빛이 간절하여 차마 내칠 수 없었다.

그래서는 안 되었다.

잘못이었다.

감히 사별한 남편의 아이를 가진 채, 낯선 사내의 품에 안겼으니.

천벌이리라.

언감생심, 꿈도 꾸지 말아야 할 복을 감히 받아들인 죄로 이리된 것이리라.

인화는 안쓰러운 손길로 배를 더듬었다.

아가, 미안하구나.

죄 많은 어미를 만나 네 처지마저 서럽게 되었구나.

하늘님.

부디 이 아이를 긍휼히 여기소서.

비나이다. 비나이다.

전생의 업보일랑, 어미인 제가 모두 감내할 겁니다.

잘못은 모두 이 몹쓸 어미에게 있으니.

비나이다, 비나이다.

하늘님께 비나이다.

천지신명께 소원하나이다.

이 아이, 세상 구경이라도 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비나이다, 비나이다.

그녀는 동아줄에 묶인 손목에서 피가 나도록 두 손을 비볐다.

하지만…….

하늘은 무심하였다.

간절히 기도하였건만, 그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흐윽…….”

기어이 서러운 울음이 새어나왔다.

인화는 묶인 손으로 재갈 물린 입 주변을 틀어막았다.

억눌린 울음이 새어나갈까 봐, 그녀는 어금니를 악물었다.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느닷없이 뜨거운 물줄기가 아랫배를 짓누르는 듯했다.

하늘에서 내려온 불기둥이 전신을 관통하는 것만 같았다.

뼈 마디마디를 날카로운 끌로 긁어내는 듯한 지독한 아픔.

머릿속이 아득해져 인화는 차마 소리조차 내지를 수 없었다.

진통이었다.

절로 아랫배에 힘이 들어갔다.

숨이 가빠졌다.

좁은 궤짝 안에 몸을 둥글게 말고 있는 터라, 발버둥도 칠 수 없었다.

“아윽, 흐윽!”

그만 신음이 새어나가고 말았다.

기다렸다는 듯 사내들의 성난 목소리가 돌아왔다.

“이것이 미친 것이냐? 정녕 배를 갈라놔야 정신을 차릴 테냐?”

사내들의 눈에 보일 리 없건만, 인화는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그 와중에도 신음이 튀어나왔다.

마음먹으면 참을 수 있는 고통이 아니었다.

“흐읍!”

“정말 쓴 맛을 봐야 정신을 차리려고…….”

“이봐, 혹시 아이가 나오려는 거 아니야?”

“뭐?”

“이 계집, 때가 임박했다던데?”

“젠장, 일이 더럽게 되었군.”

“서두르세. 이제 문 몇 개만 더 지나면 호산청일세.”

수레의 흔들림이 빨라졌다.

숨 가쁘게 밀려오는 진통을 간신히 참아내던 청상의 귀에 또 다른 음성이 들려왔다.

“멈춰라!”

엄한 목소리에 수레가 멈췄다.

좀 전까지 인화를 윽박지르던 사내가 비굴한 목소리를 냈다.

“무슨 일이십니까요?”

“무얼 하는 자들이냐?”

“호산청에 필요한 물품이 있다 하여 급히 전하러 가는 길입니다요.”

궁 안의 사람이라면 호산청에서 무슨 일이 있는지 모를 리 없었다.

그들은 지금까지 호산청의 일과 관련한 출입패만으로 숱한 관문을 수월하게 지나왔다.

하지만 어찌 된 것인지, 이번엔 사정이 달랐다.

“더는 통과할 수 없다.”

“대체 무슨 이유로 그러십니까요?”

“어명이다.”

“대체 무슨 어명이기에.”

“알 필요 없다. 어쨌든 이곳에서 더는 한 발자국도 안으로 들어갈 수 없으니, 그렇게 알아라.”

문 앞을 지키는 병졸들의 완강한 태도에 수레를 옮기던 사내들은 당황하였다.

먼 길을 걸어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끝날 일이었다.

고작 한 식경 정도면 충분한 거리.

그런데 그 짧은 거리를 가지 못하고 길이 막히고 만 것이었다.

사내들은 은밀한 시선을 주고받았다.

무력으로 치고 나가자니 뒷감당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되돌아갈 수도 없는 상황.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한 채 사내들은 우왕좌왕하였다.

어찌하여야 하나.

망설이자니 다행히도 안쪽에서 구원의 손길이 나타났다.

“이게 무슨 일인가?”

카랑카랑한 목소리와 함께 문성국이 모습을 드러냈다.

약조한 시간이 지났음에도 기다리던 선물이 도착하지 않자, 직접 찾으러 나온 길이었다.

문성국을 발견한 사내들은 반색하였다.

“나리.”

“왔으면 냉큼 들어올 것이지, 왜 이곳에 죽치고 있는 겐가?”

“저희라고 어찌 가고 싶지 않겠습니까. 다만, 저분들이 저리 버티고 계시니 어쩔 도리가 없었지요.”

“무어라?”

문성국이 병졸들을 향해 고리눈을 치켜떴다.

“이 자들이 지금 어떤 상황인지 알고 이런 짓거리를 하는 것인가? 문 소원 마마께서 귀한 아기씨를 낳기 직전일세. 급하게 필요한 물건이 있어 시켰는데, 감히 막아서는 것이냐?”

그의 기세등등한 모습에 병졸들의 얼굴에 난처함이 떠올랐다.

일개 문지기 출신이라 하지만, 누이가 왕의 총애를 받는 후궁이라.

문씨 남매의 권세는 정승판서 부럽지 않았다.

행여 잘못 보였다가 해코지라도 당할까 두려웠다.

“궐의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라는 어명이 있어서…….”

병졸의 변명에 문성국이 눈빛을 세웠다.

“호산청에서 요구하는 일에 전력을 다해 도우라 하신 어명은 잊었는가?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정녕 모른단 말인가.”

“저희는 그저 명대로 움직이는 터라…….”

“이런이런, 답답한 자들을 보았나. 알겠다. 이리 빡빡하게 나온다면 나도 다 생각이 있으니.”

“…….”

힐끗 병사들을 곁눈질하며 문성국은 말은 이었다.

“어쩔 수 없이 소원 마마께 오늘 일을 말씀 올려야겠군. 본디 아이 품은 시절의 서운함은 평소보다 곱절은 더하니. 이 다급한 때에 너희가 한 짓을 소원 마마께서 아시게 된다면 얼마나 서운해하실까. 주상 전하께서 아시는 것도 시간문제겠지. 너희에게 어떤 벌이 내려질지 내 장담할 수 없음이야.”

문성국은 노골적으로 병사들을 압박했다.

겁에 질린 병살들은 곧추세웠던 창을 서둘러 내렸다.

“아, 아닙니다. 당연히 협조해야지요. 어서 들어가시지요.”

“이제야 돌아가는 상황이 보이는 모양이군. 어험, 뭣들 하느냐? 어서 문을 열지 않고.”

문성국의 재촉에 병졸들은 급히 문을 열었다.

그는 수레와 차부(車夫)들을 이끌고 열린 궐문 안으로 들어갔다.

“망할, 이 중요한 때에 궐의 분위기가 어찌 이런 것이야? 궐문 앞의 경비는 왜 이리 험악한 것이고.”

궐의 뒤숭숭한 분위기가 못마땅한 듯 문성국이 투덜거렸다.

궐의 문이란 문은 죄다 굳게 닫히고, 험악한 병졸들이 그 앞을 단단히 지키고 섰다.

덕분에 한 식경도 걸리지 않을 거리를 이동하는데, 꽤나 애를 먹게 생겼다.

“뭔가 심상치 않은 일이 생긴 모양이군.”

그러나 상관없었다.

조금 늦긴 했지만, 십학사의 선물이 도착했다.

‘어미의 배에서 나오는 건 사내 아니면 계집이니. 적어도 둘 중 하나는 사내를 낳겠지.’

문성국은 굽은 어깨를 활짝 펼쳤다.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생각하니, 입가에 절로 미소가 어렸다.

아무렴.

이제 그를 막을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계획이 조금 늦은 것만 뺀다면,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

“방금 무어라 했소이까?”

홍인한이 부릅뜬 눈으로 되물었다.

다급한 일로 빈청으로 되돌아온 홍계희가 가쁜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마진(痲疹)이네.”

“마진? 그 무슨 말이오?”

쇠뭉치로 정수리를 맞은 듯한 충격에 홍인한은 일순간 멍해졌다.

“마진이라 하면 홍역(紅疫) 말이오?”

홍역은 고열과 발진을 동반하는 역병으로, 뚜렷한 예방책도 치료약도 없는 무서운 전염병이었다.

오죽하면 역귀(疫鬼)라 할까.

궁 안의 분위기가 심상찮다 생각하던 차였다.

궁의 경계를 서야 할 군졸들이 떼로 몰려다니고, 내관과 궁녀들의 걸음도 평소보다 급해 보였다.

무언가 일이 생긴 줄은 알았지만, 설마 역병일 줄이야.

“홍역이라니. 어디의 누가 그런 몹쓸 병에 걸렸단 말이오?”

“별궁이라네.”

주위의 눈치를 살핀 홍계희가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다들 쉬쉬하는 모양이지만, 아무래도 빈씨께 증상이 있는 듯하네.”

“빈씨가……?”

홍인한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별궁의 빈씨라면, 세손빈으로 간택된 경기관찰사의 여식이 아니던가.

십학사가 소원 문씨를 두고 도모한 계획을 엉망으로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였다.

하필이면 오랜 계획이 마무리되는 화룡점정(畵龍點睛)의 시기에 다시 한번 언급되었다.

우연이라고 보기엔 너무도 공교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정녕 홍역이 확실하오?”

전염성이 강한 역병의 창궐이라면, 상황이 복잡해질 수 있었다.

“며칠 더 두고 봐야 확실해지겠지만, 증상은 영락없는 마진이라 하네.”

“하필 이 중요한 때에 역병이라니. 한데, 그 병이 별궁에서 시작되었다면, 별궁만 막으면 될 터. 어찌하여 대궐의 문단속도 하고 있단 말이오?”

“마진에 걸린 분이 한 분 더 계시기 때문이라네.”

“한 분 더?”

“세손궁에서도 같은 증상이 나타난 모양일세.”

“설마…….”

홍계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짐작한 대로라네. 세손 저하께 삿된 병마가 깃든 모양이야.”

홍인한의 미간에 그려진 주름이 깊어졌다.

별궁과 세손궁.

왕래가 있을 수 없는 두 곳에서 동시에 홍역이라니.

조짐이 좋지 않았다.

홍계희의 설명이 이어졌다.

“소식을 접하신 주상 전하께서 궐 안팎의 문단속을 단단히 하고, 들어가지도 나가지도 못하게 하라 하명하시었네.”

전염병의 확산을 막기 위한 불가피한 조치였다.

문제는 그로 인해 그들의 계획에 크나큰 차질이 생겼다는 점이었다.

“주상 전하께서 세자 저하와 유생들의 입대(入對)를 친히 살핀다 하신 일은 어찌 되었소?”

“역병이 창궐하면 숱한 목숨이 죽어 나갈 수 있으니, 당연히 미뤄지지 않겠는가?”

“……큰일이오.”

결국,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하늘이 무너지고, 천지가 뒤집혀도 바뀌지 않을 거라 여긴 일이.

완벽한 계획이.

뜻하지 않는 곳에서 무너지고 말았다.

쿵!

먼 곳에서 궐문 닫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방의 문을 단단히 걸어잠그자, 그 안에 든 사람도 공기도 굳은 듯 정체되었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일순간 모든 게 잠든 것 같은 깊은 적막.

홍인한은 등골이 쭈뼛 곤두섰다.

“형님께선……. 우의정께선 어디에 계시오?”

“대전에서 신료들과 앞으로의 일을 논의하고 계시다네.”

“한가하게 대책이나 논의할 때가 아니지 않소. 당장 주상 전하께 가야 하오. 가서 동궁전으로 행차하시길 주청 드려야 하질 않겠소.”

“역병으로 뒤숭숭한 이때, 주상 전하께서 동궁전으로 걸음 하려 하시겠는가?”

“하게 하여야지요.”

홍인한의 표정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모든 일은 때가 있는 법. 오랫동안 준비한 계획이니, 무슨 일이 있어도 결실을 봐야 하오.”

***

황금빛 아침 햇살이 대궐 안을 굼실거렸다.

따사로운 기온과는 달리 궐 안의 분위기는 싸늘하였다.

신료들의 걸음은 곧장 대전으로 향했다.

“전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우의정 홍봉한과 한성부우윤 홍인한, 홍계희와 승지 홍준해를 비롯한 정승들과 신료들이 대전의 차가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엎드렸다.

비통하게 울부짖는 그들을 왕이 완고한 얼굴로 굽어보았다.

“정녕 이것이 경들의 생각인가?”

왕은 탄식을 흘렸다.

“홍역이 돌고 있다. 세손궁과 별궁, 다른 사람도 아닌 세손과 빈씨가 앓고 있다 들었다. 어쩌면 멀쩡해 보이는 자들 가운데서도 이미 전염된 사람이 있을지 모르는 일. 역귀가 창궐하여 사람이 얼마나 죽어 나갈지 가늠할 수 없을 지경인데, 한가롭게 세자나 만나잔 말이냐? 이 말이 가당키나 한 소리인가?”

홍인한이 피를 토하듯 소리쳤다.

“아뢰옵기 망극하오나, 도적은 재물을 빼앗고, 병은 삶을 빼앗지만, 그릇된 정치는 삶의 터전마저 빼앗는다 하였사옵니다. 예부터 정치가 부패하면 백성들이 도적 떼와 호환이 들끓는 곳도 마다치 않는다 하였으니, 정치야말로 만사의 근본이라 할 수 있을 것이옵니다.”

왕이 물었다.

“하여, 역귀를 등한시하고, 세자가 동궁전에 있는지 확인하잔 말이냐?”

“세자 저하께서 수개월째 진현조차 하지 않으시니, 정치는 사라지고, 관료들조차 제 할 일은 등한시한 채 제 이득만 채우기 급급해하나이다.”

홍인한이 고하는 소리에 왕은 신료들을 돌아보았다.

“그대들도 그리 생각하는가?”

대답은 없었다.

긍정의 침묵.

늙은 왕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경들의 의견이 정히 그러하다면…….”

왕이 마침내 자신의 의지를 굽혔다.

“알겠다. 동궁전으로 갈 것이다.”

***

잠시 후.

“왜 아니 된다는 것이냐?”

동궁전 앞에서 노한 일갈이 터져 나왔다.

왕께서 세자와 유생들의 입대를 살피려 행차하였다.

그러나 막상 노구를 이끌고 동궁전에 도착하니, 유생들은 동궁전에 들어가지도 못한 채 입구 근처에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이유인즉, 안으로 들 수 없다 하였다.

왕은 동궁전을 관리하는 내관을 불러 불같은 노염을 토하였다.

“어찌하여 입대하지 못한다 하는 것이냐? 세자와 신하들이 모여 경연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거늘. 어찌 동궁전에 들지도 못하게 한단 말이냐?”

“망극하옵니다, 전하. 다만…….”

서릿발 같은 왕의 질타에 늙은 내관은 감히 고개도 들지 못하였다.

급기야 왕이 고함을 내질렀다.

“이유를 묻고 있질 않은가? 어찌하여 동궁전에 들 수 없다 하느냐? 혹여…….”

왕의 눈빛이 칼날처럼 매섭게 벼려졌다.

“동궁전에 세자가 없느냐? 신료들의 말처럼 자리를 비우고 잠행이라도 나갔느냐?”

“…….”

“어찌 대답을 못 하는고. 동궁전의 문은 왜 닫아 잠근 것이냐? 궁에 역귀가 창궐하였거늘. 대리청정하는 왕세자는 어디 있기에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이냐. 정녕 다급한 나랏일은 등한시한 채, 허튼 짓거리에 빠져 있느냐?”

내관은 여전히 답하지 못하였다.

하얗게 서리가 내린 왕의 두 눈썹이 곤두섰다.

홍인한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역시 짐작한 대로였다.

세자는 입대를 거절하는 게 아니라, 입대를 할 수 없는 것이다.

함경도 땅으로 향했으니, 왕의 갑작스러운 행차에 응하고 싶어도 응할 수 없을 터.

세자의 부재를 알게 된 왕은 더는 세자를 신뢰할 수 없으리라.

느닷없는 역귀의 기습에 계획보다 한 시진 정도 늦어지긴 했지만, 결국엔 십학사의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왕의 거친 목소리가 동궁전의 내관을 다그쳤다.

“언제까지 조가비처럼 입만 다물고 있을 것이냐? 세자는 어디 있느냐고 묻고 있질 않으냐?”

“죽여주시옵소서.”

바닥에 납작 엎드리는 내관을 보며 홍인한은 자신이 나설 때가 되었음을 깨달았다.

왕의 불편한 심기를 부추겨 동궁전을 발칵 뒤집어 놓으면 그들의 큰 그림이 마침내 완성될 터였다.

홍인한은 낮게 헛기침을 흘렸다.

계획이 성공할 것임을 그는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적어도 소란스러운 좌중을 뚫고 한 줄기 중후한 목소리가 들려오기 전까지는…….

“찾으셨사옵니까?”

크지 않은 목소리.

그럼에도 그 음성엔 대숲에 인 바람처럼, 살대를 벗어난 화살처럼 사람의 이목을 이끄는 힘과 설렘이 담겨있었다.

왕과 내관.

대신과 유생들.

그리고 궁녀들까지.

미리 약조라도 한 듯 일제히 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검푸른 빛깔의 곤룡포를 입은 한 사람이 물길을 가르듯 인파를 뚫고 뚜벅뚜벅 걸어 마침내 왕의 앞에 이르렀다.

“어, 어떻게……!”

사내를 본 홍인한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이 자리에 결코 있을 수 없는,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이 눈앞에 있었다.

“왜 그리 놀라는가? 꼭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얼굴이군.”

홍인한에게 선 굵은 미소를 보인 사내가 왕에게 고개를 숙였다.

“소자, 늦었사옵니다. 아바마마.”

인파 사이를 헤치고 나타난 사내.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북쪽 땅 어딘가를 헤매고 있어야 할 사람.

다름 아닌 왕세자 이선이었다.

***

“멈춰라!”

힘찬 목소리가 희희낙락하여 수레를 인솔하는 문성국의 뒷덜미를 잡았다.

“미치겠네. 이번엔 또 어떤 놈이냐?”

부르는 소리에 문성국은 저도 모르게 버럭 짜증을 내었다.

벌써 몇 번째 경험하는 일인지 모른다.

고작 두 개의 중문을 지나는 동안, 이런저런 작자들이 열 번도 더 발길을 붙들었다.

덕분에 지척의 거리를 반 시진도 넘게 걷고 있었다.

‘망할 놈의 역병이 하필이면 이때 발병하다니.’

궐에 역병이 돌았다는 소식에 문성국은 이를 갈았다.

재수 옴 붙어도 제대로 붙었다.

무언가 불길한 예감이 등줄기를 훑었다.

서둘러 길을 재촉하던 차라.

또다시 발길을 잡는 음성에 문성국은 눈매를 사납게 여몄다.

‘어떤 녀석인지 몰라도 혼꾸멍을 내주마.’

누군지 몰라도 잘못 걸렸다.

얼굴을 기억해 두었다가, 나중에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괴롭혀주리라.

그러나 정작 성가신 훼방꾼을 확인한 문성국의 얼굴은 충격과 놀람으로 하얗게 질려버리고 말았다.

“당신은…….”

태연히 걸어와 문 앞을 턱 가로막는 훤칠한 사내.

사헌부의 장령, 장무열이었다.

장무열과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문성국은 학질 걸린 개처럼 손발을 벌벌 떨었다.

그에게 장무열은 저승사자나 다름없었다.

궁의 다른 이들에게 장무열은 잘생긴 외모와 치밀한 성격으로 유명했지만, 문성국은 그의 재능이 그뿐만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기루에서 앞을 가로막는 사내들을 풀 베듯 베어 넘기던 모습이 아른거렸다.

그런 문성국을 장무열이 무심한 눈으로 응시했다.

“날 아는가?”

“모, 모르오.”

“그런데 어찌 몸을 그리 떠는 것이냐?”

장무열의 추궁에 문성국이 서둘러 변명하였다.

“고뿔에 걸렸소이다. 그, 그보다 무슨 일로 앞을 가로막는 것이오?”

“어명을 듣지 못하였는가? 궐 안팎의 모든 문을 닫고, 누구도 드나들지 못하게 하라 하였다.”

“호산청과 관련한 일에 편의를 봐주라 한 어명도 있었소이다. 문 소원 마마께서 귀한 아기씨를 출산하는 데 꼭 필요한 물품이니, 한시바삐 가져오라 신신당부하였소. 만일 적시에 가져가지 못하면 큰 횡액을 면치 못할 것이오.”

“그건 역병이 창궐하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다.”

슬그머니 던진 위협과 협박에도 장무열은 눈썹도 꿈쩍하지 않았다.

“이, 이런 낭패가 있나.”

문성국의 마음이 급해졌다.

엎친 데 덮친 꼴이라.

호산청 담벼락 위에선 눈처럼 하얀 비단이 펄럭이고 있었다.

걸음이 지체된 사이 누이가 아이를 낳은 것이다.

한시바삐 호산청으로 선물을 들여야 했다.

하지만 장무열이 맹수처럼 눈빛을 번뜩이며 앞을 가로막고 있으니.

방도가 없었다.

“나, 나중에 두고 봅시다.”

문성국은 후일을 기약하며 수레와 함께 발길을 돌렸다.

다른 출입구를 찾아볼 생각이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의 상대는 지독하기로 소문난 장무열이었다.

“잠깐!”

장무열의 차가운 목소리가 다시 한번 문성국을 잡았다.

“왜 또 그러시는 게요?”

장무열은 말없이 수레로 다가왔다.

‘기루의 괴한들이 임부 한 명을 궁으로 보냈다 했다. 궁 내를 감히 가마를 타고 활보할 수는 없으니. 만약, 사람을 태워 옮기는 것이라면…….’

착 가라앉은 그의 눈빛이 궤짝에 고정되었다.

“이 궤짝은 무엇인가?”

그의 물음에 누구도 대답하지 못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챈 사내들이 서로 눈치를 보더니, 돌연 장무열을 향해 달려들었다.

빠른 판단이었지만, 유감스럽게도 상대를 잘못 택하였다.

스릉.

장무열의 허리춤에 걸린 검이 은빛 섬광을 뿜어냈다.

사내들은 별다른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쓰러졌다.

순식간에 사내들을 베어버린 장무열은 붉은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검으로 문성국을 겨누었다.

“이 궤짝 안에 든 것이 무엇이냐?”

물어보는 장무열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차가웠다.

대답은 들을 필요가 없었다.

궤짝 안에서 여인의 신음과 함께 갓난쟁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응아아앙.”

귓전을 파고드는 아이의 울음에 장무열은 지체하지 않고 궤짝 문을 뜯어냈다.

“망할……!”

다리에 힘이 풀린 문성국은 밑동 잘린 허수아비처럼 힘없이 주저앉고 말았다.

“한 발짝, 고작 한 발짝만 더 디디면 끝이었던 것을…….”

둥! 둥!

멀리서 사시(巳時)를 알리는 북소리가 울렸다.

약속한 진시보다 꼭 한 시진이 더 흐른 시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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