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택-왕들의 향연-103화 (103/215)

#103. 팽례의 길

“말도 안 됩니다!”

별궁의 빈씨 처소에 낮은 비명이 새어나왔다.

“쉿, 누가 듣겠다.”

정 상궁이 서둘러 금정의 입을 막았다.

동그래진 눈으로 정 상궁과 이레를 바라보던 금정이 두 손을 바동거렸다.

“절대 큰 소리 내어선 아니 된다. 알겠느냐?”

정 상궁의 다짐에 금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노파의 손에서 풀려난 그녀는 정 상궁과 함께 빈씨의 처소로 들어온 의녀를 이리저리 살폈다.

“정말 이분이 빈씨란 말입니까?”

재차 확인하는 금정에게 의녀 복색을 한 이레가 대답했다.

“그래, 내가 확실하다.”

낯익은 목소리.

금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무슨 일이십니까? 어쩌다 이리되셨습니까?”

금정이 이레에게 바싹 다가섰다.

무수리 복색으로 몰래 별궁을 빠져나간 빈씨가 의녀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그것만으로도 놀랄 일인데…….

“그 곱던 얼굴이 어쩌다 이리 망가지신 겁니까?”

“많은 일이 있었구나.”

이레는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았다.

하얀 명주 수건이 지나갈 때마다 햇볕에 까맣게 탄 얼굴색 대신 본래의 말간 낯빛이 떠올랐다.

잠시 후, 낯설었던 의녀는 사라지고 금정과 정 상궁이 익히 보아왔던 이레의 모습이 나타났다.

금정과 정 상궁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참으로 감쪽같습니다. 눈앞에서 보고 있으면서도 믿기지 않습니다.”

이레는 금정에게 미소를 보였다.

“세상에는 놀랄 만큼 대단한 재주를 지닌 사람이 있더구나.”

이번에는 정 상궁을 돌아보았다.

“내가 없는 동안 별궁엔 별일 없었소?”

정 상궁과 금정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행히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고생 많으셨소.”

대답과는 달리 두 사람의 얼굴을 하룻밤 사이 해쓱해져 있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레가 별궁을 비운 사이 마음고생이 얼마나 심하였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빈씨의 별궁 밖 출입은 엄격히 제한되어야 할 관례이자 율법이었다.

행여 허락받지 못한 외유를 들키는 날엔 관련된 모든 사람이 처벌을 면치 못하리라.

하물며 적극적으로 가담한 사람이라면, 그것이 다른 누구도 아닌 궁녀라면 죽어도 곱지 죽지 못할 상황이었다.

얼마나 심장을 졸였을까.

고작 하룻밤이라 하지만, 매 순간순간이 칼날 위를 걷는 듯 두렵고 아찔했을 것이다.

작은 헛기침 소리, 문 앞을 지나는 옷자락 소리에도 숨을 죽이고 몸을 떨었을 것이 뻔했다.

이레는 정 상궁과 금정의 손을 잡았다.

“고맙소. 이 은혜 내 잊지 않으리다.”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진심.

이들의 도움과 희생이 없었다면 별궁 밖으로 나가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오라버니의 누명을 벗기고, 실종된 여인들을 구하는 일은 더더욱 불가능했다.

“그런 말씀 마시어요. 무사히 돌아온 것만으로도 다행입니다.”

“어서 환복하시어요.”

이레가 없는 동안 이레를 대신하여 빈씨 행세를 하던 금정이 몸에 걸친 옷과 장신구를 서둘러 풀었다.

“이 갑갑한 것을 어찌 온종일 하고 계셨습니까?”

“힘들었던 모양이구나.”

“숨이 턱턱 막혀 죽을 노릇이었습니다. 이제야 제 자리를 찾게 되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이레는 해맑게 웃는 금정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러곤 정 상궁의 도움을 받아 다시 빈씨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아침에 문안드리겠습니다.”

처소의 주인이 제자리를 찾자 정 상궁과 금정은 안도의 한숨과 함께 물러갔다.

홀로 남은 이레는 금침 위에 쓰러지듯 누웠다.

팔다리가 물에 젖은 솜뭉치라도 된 듯 무거웠다.

눈꺼풀이 아래로 감겼다.

갑자기 긴장이 풀린 탓인지 잠깐 사이 까무룩 잠이 들었다.

그리고 꿈을 꾸었다.

밤사이 겪은 많은 일이 사나운 꿈이 되어 그녀의 잠자리를 어지럽혔다.

순박한 얼굴 속에 숨은 사악한 미소, 험악한 괴성, 사납게 부딪히는 칼날, 괴성을 토하는 사내들, 신음하는 여인들, 비명, 사방을 붉게 물들인 핏물…….

우후죽순처럼 불쑥불쑥 튀어나온 음모와 배신, 칼과 죽음이 붕괴되듯 차례로 사라졌다.

괴롭고, 무섭고, 두려운 사건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그 무엇도 한 사람을 잃은 슬픔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은협!”

이제는 떠나고 없는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이레는 잠에서 깨었다.

여전히 주위는 푸른 어둠에 잠겨 있었다.

아주 잠깐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은협.”

잡히지 않는 허상을 잡으려는 헛헛한 손짓.

뺨으로 눈물이 흘렀다.

언제고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짓던 사람.

언제나 곁을 맴돌 것 같았던 사람.

외롭고 힘들 땐 늘 곁에 지켜주었던 사람.

뜻하지 않은 선물 같았고, 한여름 뙤약볕 아래 나무 그늘 같으며, 황량한 벌판을 적시는 한 줄기 맑은 시냇물 같던 사람이었다.

예전엔 그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반갑고 신기하였는데, 이젠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서글픈 그리움을 참을 수 없었다.

마음에 허허로운 바람이 불었다.

다시는 그를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자, 허기 같은 공허가 밀려들었다.

이 모든 것이 그저 사나운 악몽이길 바랐다.

애석하게도 혼몽(昏懜)의 시간이 지나도 그의 마지막 모습만은 바래지지 않았다.

이레는 몸을 일으켰다.

자꾸만 마음이 불안해졌다.

은협.

먼길 떠난 서강율의 모습 위로 형운과 왕세자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은협,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하신 겁니까? 세자 저하와 은백이 걱정되어, 차마 발길을 옮길 수 없습니까?”

이레는 나직한 한숨을 쉬었다.

“저도 무언가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은협이 그러했듯 그분들께 도움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의 이레에겐 아무런 힘도 능력도 없었다.

갑갑한 마음에 창문을 열었다.

어느덧 밤이 지나고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다.

하지만 사위가 밝아와도 세자와 세손에게 드리운 어둠은 걷히지 않았다.

***

“세손 저하.”

형운이 세손궁 대문으로 들어서기 무섭게 최 내관이 달려왔다.

그는 형운의 소맷자락을 잡고 눈가를 훔쳤다.

“어인 소란인가?”

“내내 이 늙은이의 애간장을 태우시니. 소인, 정녕 명을 못 채우고 죽을 것 같습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라.”

죽음.

그것의 무게를 알게 되었음에 최 내관을 향한 형운의 음성은 그 어느 때보다 묵직했다.

눈치 빠른 최 내관이 알아차리지 못할 리 없었다.

밤사이, 우리 세손께 무슨 일이 생겼구나.

그러나 연유를 물어보기엔 형운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애써 의구심을 한쪽으로 눌러버린 최 내관이 형운에게 종알종알 아뢰었다.

“저하께서 아니 계신 동안 궁에도 일이 생겼사옵니다.”

“그러잖아도 물어볼 참이었다.”

환복을 마친 형운이 최 내관과 마주 앉았다.

“호산청의 사정은 어찌 되었느냐?”

“소원께서 예정보다 일찍 산통이 시작되어 어의를 비롯한 왕실의 의관들과 의녀들이 그곳으로 몰려갔나이다. 하오나 아직 귀한 아기씨께서 모습을 보이지 않아 다들 염려하고 있나이다.”

“할바마마께선 어찌하고 계시는지 알고 있느냐?”

“그러잖아도 대전으로 동궁전의 입직 승지를 부르셨나이다.”

“동궁전의 입직 승지는 어인 연유로 부르신 것이냐?”

“관학의 유생들이 심상찮은 행보를 시작하였나이다. 누군가 세자 저하께서 도성에 아니 계신다는 소문을 유생들에게 퍼트렸다고 하옵니다.”

“할바마마께선…….”

형운이 걸음을 멈추고 물음을 이었다.

“할바마마께선 무어라 하시었느냐?”

왕세자와 신료들 간의 반목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다.

그 일로 인해 주상 전하와 왕세자의 관계도 편하지 않았다.

주상 전하께서 왕세자에게 대리청정을 명하였지만, 여전히 왕세자를 믿지 못하고 정사에 참여하시니.

매번 왕세자의 명을 비판하고, 심지어 신하들 앞에서 꾸짖는 것은 물론이고 세자께서 이미 내린 명을 번복하라 종용하기도 하였다.

이런 일이 일상처럼 반복되니, 신하들은 왕세자를 하찮게 여기고, 여전히 주상 전하를 받들고 따랐다.

왕세자 또한 부러질지언정 꺾이지 않는 강단이 있어, 임금의 앞에서는 수긍해도 실제로는 제 뜻을 굽히지 않으니, 아비와 자식의 관계는 나날이 틀어지고 어긋났다.

이 모든 것이 주상 전하와 왕세자의 결이 달랐던 까닭이다.

주상 전하는 노송(老松)과 같았다.

천 년을 굽어보며 천기를 살피고 삶과 죽음을 깨닫고 세월의 덧없음을 아심이라.

다만, 뿌리가 깊어 고고하나 기암절벽 벗어나지 못하였다.

반면, 왕세자는 하늘을 나는 해동청(海東靑)과 닮아 있었다.

깃 세우고 바람 가르니, 들 너머 울창한 숲을 그리워함이라.

다만, 발목에 시치미 매여 먼 곳을 보고도 못 가나니.

이처럼 주상 전하와 왕세자께서 품은 뜻과 이상이 높은 것은 한결같았으나, 바라보고 향하는 바가 서로 달랐다.

하지만 그럼에도 혈육이었다.

제 욕심과 영달에 눈이 먼 신료들이 제아무리 간언하여도, 주상 전하께서 왕세자를 믿고 흔들리지 않으시면 불화는 있을지언정, 파국은 면하리라.

최 내관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주상전하께서 동궁전의 승지에게 하명하시길, 오늘 강연에 입대하여 관학의 유생들과 세자 저하께서 대면하는 것을 지켜보라 하시었다고 하옵니다. 전하께서도 걸음 할 것이니, 동궁전에 기별하여 강연에 꼭 모습을 보이라 하시었사옵니다.”

“무어라?”

최 내관을 돌아보는 형운의 눈에 경악이 서렸다.

왕세자를 직접 만나라 함은 결국 신료들의 간언(間言)에 흔들려 아들을 의심하신 것이 아닌가.

“주상 전하께선 끝까지 세자 저하께 상관치 않으려 하시었나이다.”

“한데, 어찌하여 그런 명을 내리셨단 말이냐?”

“오늘 새벽 이른 시간부터 관학의 유생들이 세자 저하의 미행을 문제 삼아 승정원을 소란케 하였사옵니다. 세자 저하와의 대면을 청하는 소리로 승정원이 시끄러우니. 끝내 주상 전하께서 세자궁의 입직 승지를 불러들인 것으로 알고 있나이다.”

“……!”

형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승정원은 주상 전하께서 계신 곳과 지척이라, 조금만 시끄러워도 주상 전하께서 알 수밖에 없었다.

“큰일이로구나.”

의심은 귀신을 부르고, 사소한 오해가 불신을 만드는 법이다.

주상 전하께서 왕세자의 밀행을 아시는 날엔 신료들의 뜻대로 정국이 기울어질 가능성이 농후했다.

“동궁전의 사정은 어떠하냐?”

형운의 물음에 최 내관이 난처한 기색을 보였다.

“동궁전에서 은밀히 잠행 나가신 세자 저하께 사람을 보낸 모양입니다. 그러나 워낙 먼 곳으로 떠나신 참이라, 제때 만나도 사흘 안에 돌아오기 어렵다 하옵니다. 그 일로 동궁전의 궁인들은 그저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 하옵니다.”

“아!”

형운은 저도 모르게 낮게 신음을 흘렸다.

날이 밝으면 유생들이 동궁전으로 몰려가 대면을 청할 것이다.

그곳에 할바마마께서도 자리할 터인데, 정작 아바마마께선 사흘 후나 되어야 돌아오신다고 하니.

“아니 되겠다.”

형운은 처소로 향하던 발길을 대전으로 돌렸다.

최 내관이 급히 그의 뒤를 따랐다.

“무얼 어찌하시려 그러시옵니까?”

“잠시라도 시간을 벌어야 하지 않겠느냐?”

“저하, 사흘이옵니다. 무슨 수로 사흘이라는 시간을 벌겠나이까.”

최 내관의 말이 옳았다.

한두 시진이라면 모를까.

무슨 핑계로 주상 전하의 노한 마음을 붙잡아 둘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고 이리 손 놓고 기다리고 있을 순 없지 않으냐.”

아바마마.

불길한 기운이 사방에 자욱한데, 대체 어느 하늘 아래를 헤매고 계시옵니까.

제발 서둘러 돌아오시옵소서.

형운은 불길한 눈길로 밝아오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

동녘이 터왔다.

어둠을 가로지르는 푸른 새벽빛이 작렬하는 검광처럼 소름 끼쳤다.

“참으로 피비린내 진동하는 아침이로다.”

단단하던 왕세자의 입에서 지친 한숨이 흘러나왔다.

세 차례.

한양으로 돌아가는 그의 앞을 가로막은 자들과 싸운 횟수였다.

그 수가 무려 오십은 족히 넘었다.

그 많은 적을 베고 쓰러트렸건만, 정작 싸움에서 이긴 왕세자의 얼굴엔 낙심한 기색이 완연했다.

“앞을 가로막는 자들은 모두 물리쳤으나, 그만 동이 트고 말았구나.”

싸움에선 이겼지만, 전쟁에선 패배한 형국이었다.

“괜찮으십니까?”

그를 부축한 방립 사내가 물었다.

세자가 피식 입꼬리를 들며 웃었다.

“오냐, 괜찮다. 네 덕분에 솜털 하나 다치지 않았구나.”

연이은 괴한들과의 처절한 싸움.

거칠 것 없이 적을 베어 가던 세자에겐 단 한 번 위험한 고비가 있었다.

마지막 세 번째 습격을 당할 때, 세자의 지병이 발병하였다.

찌를 듯한 두통과 극심한 현기증.

세자는 신음을 흘리며 비틀거렸다.

틈을 노린 괴한들이 일제히 세자에게 달려들었다.

위기일발의 상황.

방립 사내가 뛰어들었다.

수면 위로 뛰어오른 은빛 비어(飛魚)처럼 적진으로 뛰어든 그는 사방으로 암기를 쏟아 냈다.

소매를 휘두를 때마다 단도가 날았다.

발을 구르면 바닥의 돌이 흉기로 돌변하였다.

심지어 적의 손에 들린 칼조차도 그의 손길이 스치면 주인을 배반하고 허공을 날았다.

“남의 병기를 빼앗아 던지다니. 내 평생 포박술을 그렇게 쓰는 놈은 처음 보았다. 못 본 사이에 실력이 무척 늘었구나.”

“저하에 비하면 잔재주일 뿐입니다.”

“겸손도 지나치면 교만이니라.”

호탕한 웃음을 터트린 세자는 허리를 바로 폈다.

“이젠 되었다. 더는 부축하지 않아도 되느니라.”

“탕약을 준비하겠나이다.”

“아쉽게도 그럴 여유가 없구나.”

고개를 가로저은 세자가 말을 불렀다.

힘겹게 말 안장에 오르는 그를 방립 사내가 물끄러미 응시했다.

“저하, 계속 가시렵니까?”

“당연하지. 그럼 이대로 포기할 줄 알았더냐?”

태연한 대답과 달리 왕세자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이곳에서 최대한 빨리 가면 얼마나 걸리겠느냐?”

세자의 곁을 지키던 호위무사가 대답했다.

“쉬지 않고 말을 달리면 세 시진이면 충분할 것이옵니다.”

“한 시진으로도 부족할 판에 세 시진이라.”

머잖아 주상 전하께서 동궁전을 찾으실 것이다.

그리고 세자의 밀행을 눈치채고 노하실 테지.

“그래도 한 번 가보자꾸나.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야지.”

밝아오는 해를 바라보는 세자의 두 눈이 무섭게 타올랐다.

암담한 상황임에도 왕세자는 의지를 꺾지 않았다.

방립 사내가 무거운 입을 뗐다.

“저하.”

“무어냐? 설마, 날 말리기라도 할 생각이라면 그만두거라. 너의 부탁이니 어지간하면 들어주겠지만, 이번만큼은 불가한다.”

“시간을 단축할 방법이 있습니다.”

세자는 굵은 눈썹을 휘며 방립 사내를 돌아보았다.

“그게 대체 무슨 말이냐? 시간을 단축하다니. 네게 시간을 멈추는 능력이라도 있단 말이냐?”

“시간을 멈추는 능력은 없지만, 특별한 길은 알고 있습니다.”

“특별한 길?”

“팽례, 팽례들만이 이용하는 길이 있사옵니다.”

“그런 길이 있단 말이냐? 하면 어째서 진작 말하지 않았느냐?”

방립 사내가 고개를 들어 세자를 올려다보았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위험천만한 길이옵니다.”

“위험천만한 길이라…….”

방립 사내를 마주 보던 세자의 얼굴이 은은한 미소가 어렸다.

“내 매번 네게 고단한 명을 내렸다. 시일을 맞추기 어려운 불가능한 임무도 여럿 있었구나. 무슨 방도로 기일을 맞추나 신기하게 여겼는데, 지금 보니 그런 위험한 길을 마다치 않았구나.”

“…….”

세자가 잔잔한 목소리로 방립 사내의 이름을 불렀다.

“기대야.”

나의 팽례.

기린의 패를 지닌…….

세상 단 하나뿐인 특별한 나의 팽례야.

어찌하여 이제 돌아왔느냐.

무얼 하다 이제야 돌아왔느냐?

기쁘고도 슬프구나.

네 뺨의 상처가 내 심장을 도려내는 것만 같구나.

“어디 한 번 앞장서 보아라.”

세자는 가슴에 일렁이는 파도를 잠재우며 힘찬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너의 길. 한 번쯤 그 위험한 길을 함께 걷는 것도 나쁘진 않겠구나.”

***

어디선가에서 몰려온 먹구름이 새벽하늘을 가득 메웠다.

초조와 불안으로 내내 잠 못 이룬 이레는 서탁 앞에 앉았다.

-할아버지들.

그저 갑갑한 마음 한 자락을 털어낼 생각으로 쓴 글.

달조차 저문 시각이라 아무도 볼 리 없다 생각했다.

한데, 스르르…….

조심스럽게 쓴 그녀의 글이 연기처럼 사라졌다.

누군가 그녀의 글을 보았다는 뜻이었다.

“이 시간에도 보시는 분이 계셨어?”

그녀의 놀란 목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

질주하는 야생마처럼 힘찬 기상의 글이 종이 위를 달렸다.

상이었다.

-왜 불렀느냐?

뒤를 따르듯, 악의 글이 나타났다.

-오늘은 유독 늦은 시각이구나.

예와 화의 글도 나타났다.

-늦은 게 아니라 이르오.

-아이야, 벌써 일어난 게냐? 아니면 잠을 못 잔 것이야?

할아버지들의 글 속에 담긴 염려에 이레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솟았다.

애써 참았던 서글픔이 북받쳐 올랐다.

간신히 눈물을 삼킨 이레는 천천히 글을 써내려갔다.

-그간 잘 계셨습니까?

-우리야 늘 무사 강녕하니. 안부는 접어두거라. 그보다 무슨 일이냐? 아이야. 무슨 일이기에 글에 절망이 담겨 있느냐?

화의 물음에 이레가 답을 했다.

-슬프고 답답한 일이 있었습니다.

예가 나섰다.

-무람없이 말해보아라. 우리가 들어주마.

이레는 지금까지 경험한 일을 간략하게 전했다.

그러나 은협의 이야기는 전하지 못했다.

은협의 이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먹먹하여 차마 글로 쓸 수 없었다.

할아버지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아이야, 고생이 많았구나. 근심하지 마라. 괜찮다. 다 좋아질 거야.

-세손빈 되는 과정이 이토록 험하다니. 이런 소식이 전해지면 누가 간택에 임하겠느냐?

-험하고 흉한 일은 동무처럼 늘 함께한단다. 길하지 않을 때엔 매사에 조심해야 한다.

이레를 걱정한 화, 악, 예와 달리 상은 껄껄 웃었다.

-별궁을 몰래 빠져나갔다가 다시 들어갔다고? 하하, 간도 크구나.

이레가 다시 글을 썼다.

-상황이 복잡하고 어려우니.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모든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분께 작은 힘이라도 보태고 싶으나, 능력이 미천하여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어찌하면 좋을까요?

상이 딱 잘라 말했다.

-없다. 먼 곳에 있는 사람에게 무슨 수로 소식을 전한단 말이냐?

악과 예도 상과 같은 의견이었다.

-이번만큼은 방도가 없어 보이는구나. 네가 보낸 팽례가 잘해내길 기다릴 수밖에.

-하늘이 무심하지 않다면 길이 열릴 것이다.

이레가 다시 물었다.

-그럼 아직 찾지 못한 여인을 찾을 방도는 없을까요?

장무열의 형수 되는 여인을 아직 찾지 못했다.

상이 대뜸 물었다.

-또 나가려고? 아서라 한 번은 몰라도 두 번은 어려울 것이야. 설사 나간다 해도 넓은 한양 땅을 어찌 다 뒤진단 말이냐?

악도 동의했다.

-어쩌면 궁 안 어느 곳에 있을지 모르지. 하나, 그 일도 네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로구나.

“그렇겠지요.”

할아버지들의 말씀이 옳다.

별궁에 갇힌 신세로는 더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들키지 않고 무사히 돌아온 것만도 감지덕지할 일이다.

하지만 왜일까.

무언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쩌면 무언가 발버둥이라도 쳐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리라.

이대로면 세자 저하와 은백에게 큰 해가 닥치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별궁에 갇힌 자신이 무얼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때였다.

한탄으로 가득한 종이 위를 차분히 걸어가는 글이 있었다.

화였다.

-아이야, 바라보는 관점을 조금 달리하면 어떻겠느냐?

“관점을 달리하라?”

-어떻게 말입니까?

-지금 네겐 시간이 필요한 것이 아니냐. 사라진 여인을 찾을 시간, 그리고 잠시 자리를 비운 자가 다시 돌아올 시간. 맞느냐?

-맞습니다.

-그럼 시간을 멈추면 되겠구나.

이레는 고개를 갸웃했다.

화 할아버지의 말씀대로 결국 문제는 시간이었다.

세자 저하께선 궁으로 돌아올 시간이 부족하고, 문 소원과 청상 또한 시간이 문제였다.

하지만 신도 아닌 인간이 무슨 수로 시간을 마음대로 조절한단 말인가.

뒤이어 상의 글이 나타났다.

-허허, 별 해괴한 소리를 다 보겠군. 시간을 멈추라니. 한낱 백귀에게 그런 신묘한 재주가 있을 턱이 없지 않으냐?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차라리 사람들의 관심을 딴 곳으로 돌리는 것이라면 모를까.

투덜대는 상 할아버지의 글을 보는 순간, 이레의 뇌리로 번개가 쳤다.

“사람들의 관심을 딴 곳으로 돌려?”

……있다!

터무니없는 생각이었지만, 사람들의 관심을 딴 곳으로 돌리는 방도.

시간을 멈출 수는 없지만, 흐름을 잠시 막는 정도라면…….

이레는 서둘러 종이에 글을 썼다.

그리고 문밖을 지키고 있는 금정을 불러 서찰을 건넸다.

“제대로 쉬지도 못하였을 터인데, 거듭 부탁하여 미안하구나.”

“아닙니다. 안 계신 동안 내내 잠만 잤는걸요. 이 서찰을 누구에게 전하면 되겠나이까?”

이레는 금정에게 귓속말을 전했다.

잠시 후, 이레의 서찰을 든 금정이 별궁을 빠져나갔다.

환하게 아침이 밝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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