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시간의 추(錘)
헉헉헉.
비단옷을 입은 복면 사내가 정신없이 말을 달렸다.
누군가에게 쫓기기라도 한 듯, 사내는 말을 채근하면서도 연신 뒤를 돌아보았다.
공동묘지를 거쳐 휘어진 소나무 사이를 빠져나가자, 엉성한 나무다리가 놓인 개울이 나타났다.
졸졸 흐르는 시냇물을 보자 타는 듯한 갈증이 일었다.
말에서 뛰어 내린 사내는 시냇물에 입을 가져갔다.
그러다 이내 물에 비친 제 꼴을 보았다.
“이 망할 복면을 아직까지 쓰고 있었네.”
사내는 신경질적으로 복면을 내팽개쳤다.
도망치는데 바빠 복면을 벗는 것도 깜빡 잊은 것이었다.
그는 문성국이었다.
왕의 후궁인 소원 문씨의 오라버니가 바로 그였다.
“정말 큰일 날 뻔했구나.”
기루에서의 일을 떠올린 그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필 그곳에서 그자를 만나고 말다니.”
사헌부의 장령, 장무열.
유별날 정도로 집요한 성격과 더불어 뛰어난 실력을 지닌 자라 하였다.
어린 나이에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헌 집안의 자랑이라 하였다.
뿐만 아니라 무예 실력도 출중하고 인물 훤칠하여 장안의 젊은 처자들이 가슴앓이한다는 소문이 자자하였다.
문성국도 먼발치에서 그를 몇 번 본적이 있었다.
사내의 눈으로 보기에도 절로 감탄이 일만큼 대단한 외모였다.
대단한 집안에서 태어나 문무 겸비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인물까지 잘났으니.
삼신의 총애가 한 놈에게 몰린 것이라며 투덜거린 기억도 있었다.
그 장 장령을 하필 다른 곳도 아닌 기루에서 마주치게 될 줄이야.
기루엔 실종된 임부들이 있었다.
그와 누이의 뒷배를 봐주던 십학사들의 소행이었다.
문 소원이 사내아이를 낳지 못할 때를 대비한 방책이라 하였다.
권력에 눈이 먼 그조차도 화들짝 늘라지 않을 수 없었던 과감한 계획.
오랜 기간 망설인 끝에 그는 십학사들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거부하기엔 그들의 제안은 너무도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이젠 끝이다. 장 장령 놈에게 들켜버렸으니.”
장무열이 나타난 순간, 문성국은 너무 놀라 바닥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 이후의 일은 기억나지 않았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그는 기루를 빠져나와 말을 달리고 있었다.
“내가 누구인지 눈치챈 건 아니겠지? 젠장, 내 꼴이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군.”
모든 것이 욕심 때문이었다.
하지만 만인이 부러워할 목적지가 눈앞에 있는데, 그 누가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까.
“아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누이가 사내아이만 출산하면 된다.
그러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문성국은 다시 말에 올랐다.
***
“문을 열어라.”
궁궐의 북서쪽.
작은 쪽문 앞이 시끄러웠다.
꾸벅꾸벅 졸던 군졸은 길게 하품을 하며 밖으로 나왔다.
“궐문이 닫힌 이후엔 파루가 칠 때까진 궐내로 발걸음 할 수 없다는 걸 모르는가? 무슨 볼일인지 모르나 내일 날이 밝으면 다시 오게.”
휘휘, 손짓을 내젓는 군졸의 앞에 문성국이 호패를 내보였다.
“소원 마마가 내 누이일세.”
군졸의 눈이 반짝 뜨였다.
“소인이 몰라뵀습니다.”
자세를 바꾼 군졸에게 문성국은 미리 준비한 면포를 들어 보였다.
“소원 마마께서 호산청으로 드신 건 알고 있겠지?”
“궁에서 그걸 모르는 자가 어디겠습니까.”
“마마께 급히 필요한 물건이 있어 전하려는 것이니, 지체 말고 문을 열게나.”
문성국의 설명에도 군졸은 잠시 망설였다.
“이 밤에 드시는 걸 보니 급한 용무인 모양입니다?”
“아무렴, 내 행색을 보게. 누이가 찾는다는 긴급한 전갈에 허둥지둥 달려오느라 꼴이 말이 아니라네.”
과연 문성국의 행색은 엉망이었다.
군졸은 한옆으로 비켜섰다.
“들어오십시오.”
“고맙네. 내 소원 마마는 물론이고 주상 전하께도 자네 이야기를 꼭 전할 것이야.”
군졸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났다.
마주 보며 어색한 미소를 보인 문성국은 서둘러 호산청으로 달려갔다.
늦은 시각임에도 호산청은 사람들로 북적였다.
소원 문씨를 보필하는 궁녀들 외에도 내의원과 의녀들이 호산청 안팎을 분주히 오갔다.
문성국은 때가 임박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도 상궁을 불러주시게.”
마당에서 발을 묶인 문성국이 마침 지나가는 의녀를 불러 진주로 장식된 머리꽂이를 건네주었다.
호산청으로 사라진 의녀는 잠시 후, 도 상궁과 함께 나타났다.
“어디 계시다 이제야 오셨습니까?”
문성국을 발견한 도 상궁이 한달음에 달려왔다.
“내 긴한 일이 생겼다네. 그나저나 소원 마마께선 어찌하고 계시는가?”
“이쪽으로 오십시오.”
주위를 살핀 도 상궁이 문성국을 안내했다.
호산청 뒤편으로 돌아가자 산실로 드나드는 은밀한 출입구가 보였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출입구 앞에서 문성국을 기다리게 한 도 상궁은 산실로 먼저 들어섰다.
“소원 마마께서 마음이 번잡하여 혼자 있고 싶다 하십니다. 잠시 물러가십시오.”
한바탕 진통이 몰려왔다 물러간 뒤라.
문 소원은 물론이고 곁을 지키는 궁녀와 의녀들 역시 진땀을 빼고 있었다.
고르게 숨을 쉬는 문 소원을 지켜본 수의녀가 의녀들과 함께 산실을 나섰다.
주변이 정리되자 도 상궁은 문성국을 산실 안으로 들였다.
“밖에서 기다리겠습니다.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소리치십시오.”
문성국에게 낮게 속삭인 도 상궁이 밖으로 나갔다.
나가기 직전 그녀는 그의 소매에 무언가를 슬며시 넣었다.
“이게 뭔가?”
답은 들을 수 없었다.
이미 도 상궁은 문밖으로 사라진 후였다.
고개를 갸웃한 문성국이 소매를 뒤적였다.
작은 종이에 깨알 같은 한 글자가 적혀 있었다.
진(辰).
문성국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진은 수성(水星)을 의미하고, 십이간지의 다섯 번째이며, 늦은 봄을 나타내는 글자였다.
하지만 문성국에겐 오로지 한 가지 의미로만 보였다.
진시(辰時).
해 뜰 무렵.
그의 뇌리로 기루에서 들은 말이 떠올랐다.
예정보다 이른 문 소원의 출산에 맞춰, 비슷한 시기에 아이를 낳을 여인을 구했다고.
이미 그 여인을 궁으로 보냈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있었다.
진이라는 글자는 분명 그 일을 가리키는 것이리라.
굳어있던 문성국의 입가가 실룩거렸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
십학사의 계획은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그들의 안배는 실로 대단하여, 그 어떤 풍파에도 꿈쩍하지 않았다.
장무열의 기습이나 기루의 발각에도 유연한 강물처럼 도도하게 흐르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또 하나 문성국을 놀라게 한 것은 도 상궁이었다.
‘도 상궁도 십학사의 사람이었단 말인가?’
등줄기로 소름이 돋았다.
만약, 도 상궁마저 십학사와 관련이 있다면…….
도 상궁을 대하는 누이의 모습을 떠올리며 문성국은 이마를 찌푸렸다.
‘앞으론 도 상궁에게 함부로 손찌검하지 말라 일러야겠구나.’
생각을 정리한 문성국은 산실로 들어갔다.
산실 한가운데 사방 휘장이 내려져 있었다.
문 소원은 불투명한 휘장 안쪽에 누워 있었다.
그는 휘장 밖에 앉아 헛기침을 흘렸다.
앓듯이 신음하던 문 소원이 그의 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오라버니?”
“그래, 나다.”
“언제 오셨소?”
“지금 막 궁으로 돌아오는 참이다. 그런데 괜찮으냐?”
“이 꼴을 보시고도 그리 묻는 겝니까? 대체 어딜 다녀오십니까? 제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십니까?”
“급한 볼일이 있었구나.”
“오라버니, 허리 아래가 끊어질 것처럼 아프고 괴롭습니다.”
“조금만 힘내거라. 곧 건강한 아기씨를 볼 수 있을 테니.”
“물론입니다. 곧 건장한 사내아이를 보시게 될 것입니다.”
제 배를 쓸어내리던 문 소원이 문성국에게 물었다.
“오라버니, 그 일은 어찌 되었습니까?”
“그 일이라니?”
문 소원의 목소리가 한껏 낮아졌다.
“전 반드시 사내아이를 낳을 겁니다.”
누이의 말 속에 담긴 속내.
문성국의 눈동자가 빛났다.
이미 기루에서도 듣지 않았던가.
문 소원 역시 십학사의 계획에 동참하기로 하였다고.
“걱정 마라. 내일 해 뜰 시간이면 모든 준비가 끝날 터이니.”
“해 뜰 시각이란 말씀이시죠?”
“넌 네 몸과 귀한 아기씨를 출산하는 일만 걱정하여라.”
“오라버니께서도 제 아이가 가져올 부귀영화만 꿈꾸십시오.”
“아무렴. 시간문제 아니겠느냐?”
문 소원의 가쁜 숨소리가 들려왔다.
산실을 나서는 문성국의 얼굴엔 미소가 걸려있었다.
누이는 곧 아이를 출산할 것이고, 그 아이는 반드시 사내일 것이다.
누구도 감히 막을 수 없으리라.
그 누구도…….
***
밤안개 흩어진 길을 한 무리의 인마(人馬)가 바람처럼 달렸다.
안개가 사라졌다 해도 밤길은 여전히 어둡고 위험했다.
그럼에도 말을 달리는 사내들은 거침이 없었다.
특히 선두에 선 사내의 기세는 그야말로 군계일학이었다.
당당하게 벌어진 어깨와 짙은 눈썹은 백전노장의 그것처럼 정한하였고, 깊고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빛은 심해를 연상케 하였다.
굳이 왕세자라고 밝히지 않아도 그의 신분이 평범하지 않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북방으로 향하던 세자는 급히 말머리를 돌려 한양으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호산청의 사정과 함께 궁에 수상한 움직임이 일고 있다는 급한 전갈을 받은 까닭이었다.
“참으로 염치도 체면도 없는 상스러운 자들이로다.”
노여움으로 일그러진 세자의 두 눈에서 푸른 불꽃이 튀었다.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이런 수작질을 도모하다니.
필시, 그의 행보를 눈치챘기 때문이리라.
조정의 대신들 대부분이 왕세자의 행보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지금껏 자신들이 누리고 믿어온 신념과 전혀 다른 길로 나아가는 세자를 눈엣가시처럼 여겼다.
직감하고 있는 것이다.
왕세자가 진정한 힘을 얻으면 나라의 기반이 송두리째 뒤흔들 것임을.
“네가 소식을 전해주지 않았으면 큰일 날 뻔했구나.”
세자가 나란히 말을 달리는 사내에게 미소를 전했다.
검은 방립 쓴 사내가 고개를 숙였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을 뿐입니다. 치하하시려면 제 한 몸 아끼지 않고 달려오다 부상한 자에게 하심이 마땅한 줄 압니다.”
“그리 따지고 들자면 애초에 팽례에게 서찰을 전하라 부탁한 사람부터 치하해야겠구나.”
“마땅히 그래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무어라? 하하, 못 본 사이에 농이 많이 늘었구나.”
세자가 껄껄 호탕하게 웃었다.
방립 사내를 보는 그의 눈길은 봄날처럼 따뜻했다.
말고삐를 잡아채며 세자가 입을 열었다.
“잘 돌아왔다.”
“…….”
“그간 왜 소식이 없었느냐? 네가 사라지고 얼마나 불편하였는지 아느냐? 있던 발이 없어진 것 마냥 허전하고 아쉬웠다.”
방립 사내는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세자는 이해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이제라도 알게 되었으니, 다시는 내 곁을 떠나지 말거라.”
알고 있다, 방립 사내가 어떤 사내인지.
필시 큰일을 겪었으리라.
살아 있는 게 기적일 만큼, 이렇게 무사히 돌아온 것이 다행일 만큼.
그래도 어떻게든 간신히 살아나 다시 돌아온 것이리라.
“돌아와서 기쁘구나. 기분이다. 원하는 걸 말해 보라. 내 무엇이든 들어주마.”
“상(償)은 일을 무사히 마친 후에 주셔도 늦지 않습니다.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서두르셔야 하옵니다.”
“오냐, 제때 도착하지 못한다면 많은 사람의 수고로움이 허사가 될 것이니. 서두르마.”
세자는 발을 굴러 말을 재촉했다.
하지만 그들의 질주는 그리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이게 무슨 일이냐?”
왕세자와 그 일행이 달리던 길 한가운데 아름드리나무가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 너머.
검은 무복을 입은 수십 명의 괴한이 흉기를 들고 늘어서 있었다.
음험한 눈길과 짙은 살기. 한눈에 보기에도 평범한 도적 무리 같아 보이지 않았다.
“웬 놈들이냐?”
세자의 날 서린 물음에도 괴한들은 묵묵부답이었다.
왕세자는 굵은 눈썹을 불편하게 휘었다.
“아무래도 내 쪽에서만 사람을 보낸 게 아닌 모양이구나.”
그의 짐작은 틀리지 않았다.
어디선가에서 들려온 휘파람 소리와 함께 우두커니 선 괴한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이놈들!”
포효하듯 일갈한 세자가 검을 뽑아들었다.
말에서 뛰어내린 그는 거침없이 괴한들을 베어 넘겼다.
피를 본 흑의인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었지만, 아무도 세자의 검을 감당하지 못했다.
어느새 그의 주위는 적의 시신으로 가득했다.
물웅덩이처럼 고인 핏물 위에 선 채 거친 호흡을 가다듬자니, 어둡던 주위가 희붐하게 밝아왔다.
세자는 고개를 들어 동녘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의 입에서 짧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시간, 시간이 부족하구나.”
***
“시간이 없다. 서두르자.”
기루를 떠난 형운과 이레는 궁을 향해 말을 달렸다.
뻐꾹.
궁 문 앞에 막 접어들 무렵, 산새 소리가 들렸다.
“……이쪽이다.”
형운이 새소리가 들린 곳으로 방향을 틀었다.
육조거리와 인접한 으슥한 골목.
밤이슬을 맞고 선 최 내관이 두 사람을 맞았다.
“이제 오시나이까?”
“고생이 많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할 따름입니다.”
형운에게 고개를 숙여 보인 최 내관은 이레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미 언질을 받은 듯, 그녀를 보고도 별다른 기색이 없었다.
“별궁으로 안내할 사람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골목에서 중년의 상궁이 모습을 보였다.
“모시겠나이다.”
이레에게 인사를 건넨 상궁은 골목 안쪽으로 사라졌다.
주춤하는 이레의 등을 형운이 밀었다.
“따라가거라.”
이레는 서둘러 상궁이 사라진 집으로 향했다.
작은 초가 앞, 반가운 사람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빈씨를 뵙습니다.”
차분한 자태로 고개를 숙이는 여인, 다름 아닌 만사여의 한서로였다.
“그대가 이곳엔 어찌? 몸은 괜찮습니까?”
이레의 물음에 한서로는 배시시 웃음을 보였다.
“빈씨 덕분에 이리 멀쩡합니다.”
“다행입니다.”
“이 은혜, 두고두고 갚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빈씨께서 별궁에 무사히 들어가셔야 하겠지요.”
한서로는 이레를 초가 안으로 이끌었다.
방안엔 수월에서 일하는 세 명의 여인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게 다 무업니까?”
즐비하게 늘어진 화장대와 옷들을 보며 이레가 물었다.
한서로가 말갛게 웃었다.
“빈씨께서 별궁으로 들어가실 때 입을 옷입니다.”
“이 옷은 의녀복이 아닙니까?”
“네. 지난 오후부터 별궁의 빈씨께선 몸이 불편하시다 합니다. 밤이 되며 열이 크게 올라 급히 의녀를 불렀다 합니다.”
별궁 앞을 지키는 무사들에게 이레가 해야 할 대답이었다.
“그러다 누가 알아보기라도 하면 어찌합니까?”
이레의 걱정에 한서로가 담담히 고개를 저었다.
“걱정하지 마시어요.”
한서로가 수월의 여인들에게 눈짓을 보냈다.
이내 이레의 앞에 자리 잡은 여인들이 바쁘게 치장을 시작했다.
얼굴에 분을 바르고 눈썹을 그렸다.
머리를 다시 빗고 의녀복으로 갈아입는 것을 도왔다.
한동안 부산한 시간이 흘렀다.
한서로가 치장을 마친 이레 앞에 면경을 들어 보였다.
면경 속엔 전혀 낯선 얼굴의 의녀가 자리하고 있었다.
본인도 몰라볼 만큼 뛰어난 변장이었다.
어두운 곳에선 더더욱 알아보기 힘들 것이다.
“참으로 대단합니다.”
이레의 진심에서 우러나온 칭찬이었다.
“수월이 괜히 조선 최고라 불리는 게 아니랍니다.”
대답하는 한서로의 목소리엔 자부심이 가득했다.
“고맙습니다.”
“제가 받은 은혜에 비하면 보잘것없습니다. 여유가 없습니다. 서두르세요.”
이레는 한서로에게 떠밀려 방을 나섰다.
초가를 나서자 골목 저 끝을 서성대는 형운의 모습이 보였다.
“혹시…….”
잠시 생각하던 이레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의녀로 변신한 그녀가 점점 가까워짐에도 형운의 눈빛은 달라지지 않았다.
마치 낯선 사람을 보는 듯한 표정.
못 알아보시는 걸까?
스치듯 형운의 곁을 지나쳤다.
이 정도면 참으로 완벽한 변장이구나.
안심하는 찰나.
누군가 팔을 낚아챘다.
형운이었다. 그가 놀란 눈으로 이레를 살피고 있었다.
“정말 감쪽같구나. 하마터면 속을 만큼…….”
“끝내 속이지 못했습니다.”
“그야 당연한 것이 아니겠느냐.”
말과 함께 형운은 그녀를 끌어안았다.
“은백…….”
느닷없는 포옹.
단단한 결박 속에서 당황하는 이레에게 형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리 네가 다른 얼굴을 하고, 다른 옷을 입고 있어도 나는 너를 찾아낼 수 있다.”
“어찌 말입니까?”
“나만이 알고 있는 네 온기와 향내를 기억하고 있으니. 세상 사람 모두가 너를 몰라본다 하여도 나만은 너를 알아볼 수 있다.”
“혹여 다른 이도 알아보면 어찌합니까?”
“말하지 않았느냐, 나만이 알고 있다고. 그리고…….”
형운은 이레의 어깨에 얼굴을 기댔다.
“영원히 나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투정 부리는 아이 같은 그의 모습에 이레는 소리 없는 미소를 삼켰다.
“이제 가야 합니다.”
“알고 있다.”
“날이 밝기 시작하였습니다.”
“내 눈에도 보이느니.”
“시간이 없습니다.”
“이대로 시간이 멈추었으면 좋겠구나.”
형운은 이레의 이마에 아쉬움 가득한 입맞춤을 했다.
누군가에겐 더디 흐르는 시간.
누군가에겐 야속하리만큼 아쉬운 시간.
또 다른 누군가는 박제되길 바라는…….
밤 5경 2점(새벽 4시).
밤과 새벽의 경계가 흐릿해졌다.
시간의 추(錘)가 한쪽으로 기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