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간택-왕들의 향연-101화 (101/215)

#101. 거자필반(去者必返)

별빛이 자정을 넘어 새벽으로 흘렀다.

밤은 수렁처럼 깊고 짙었다.

기루 곳곳에 유등과 횃불이 밝혀졌다.

어둠에 잠겼던 기루의 풍경이 하나둘 들어왔다.

한때는 향긋한 분내와 흥겨운 가락과 농염한 웃음으로 가득했을 기루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코끝을 진동하는 피비린내와 바닥에 나동그라진 쇠붙이들, 진득한 피 웅덩이 속에 잠긴 죽음만이 보일 뿐이다.

눈앞에 드러난 처참한 광경에 모두 할 말을 잃었다.

특히 한 사람의 죽음에 이목이 집중되었다.

은자원의 은협, 서강율.

“나리.”

막 몸을 푼 어린 산모를 비롯하여 기루에 잡혀 온 여인들이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여인들의 눈가로 눈물이 흘렀다.

차라리 어둠이 나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어둠이었다면 이 처연한 슬픔은 감출 수 있었으리라.

“어찌 이리 가셨습니까.”

산파 노릇을 하던 중년의 임부가 안타까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비록, 짧은 만남이었지만, 그는 나락으로 떨어진 여인들에게 한 줄기 구원의 동아줄이었고, 믿을 수 있는 등불이었다.

어린 어미의 입에서 기어이 울음이 흘러나왔다.

“나리께서 주신 윤복이라는 이름, 그 이름대로 잘 키워보겠습니다. 나리가 얼마나 훌륭한 분이셨는지 아이에게 전하고, 닮게 하겠습니다. 나리의 말씀대로 자유롭게, 세상에 얽매이지 않고, 그리 바람처럼 구름처럼 살라 하겠습니다.”

어미가 울자, 품에 안긴 아기도 서럽게 울어댔다.

애통한 진혼의 곡성이 기루를 채웠다.

“그만 나가야 합니다.”

최치성과 허상익이 좀처럼 자리를 뜨지 못하는 여인들을 밖으로 인도했다.

기루 밖엔 말과 수레가 기다리고 있었다.

여인들은 절차에 따라 안전한 곳에서 간단한 조사를 받게 될 것이다. 그 후엔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리라.

“저들이 불편하지 않도록 부탁합니다.”

이레의 거듭된 당부에 허상익은 고개를 숙였다.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단단히 다짐한 허상익은 여인들과 함께 돌아가는 길을 재촉했다.

그들이 사라지자 번연했던 공기가 가라앉았다.

텅 빈 서강율의 곁으로 은자들이 다가왔다.

이레의 눈가로 소리 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은협.”

깨끗한 곳으로 옮긴 서강율은 마치 잠이라도 자는 듯했다.

도포를 이불처럼 머리 위까지 덮고 있는 모습일랑 은자원에서 게으름을 떨던 모습과 흡사했다.

당장이라도 하품을 하며 일어날 것만 같았다.

자신에게로 향한 이레의 시선에 부채를 펼치며 놀란 표정을 지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서강율은 일어나지 않았다.

모든 것이 꿈만 같았다.

그와의 만남.

단양 가는 나루터에서 반갑게 다가와 덥석 손을 맞잡던 모습.

언제나 짓던 해맑은 웃음.

개구쟁이 같은 표정과 엉뚱한 행동들.

이따금 보이는 영문 모를 고민과 진지함.

그의 사소한 행동과 농담 하나하나가 소중했음을 이제야 깨달았다.

이레에게 서강율은 세상을 이어주는 다리였다.

두려운 세상으로 첫발을 내디뎠을 때 선뜻 한 손을 내밀어 주었던 사람.

세상과 단절되려 할 때면, 언제나 찾아와 끊어진 길을 터주었다.

왜 좀 더 빨리 알지 못했을까.

그의 농담처럼 던진 진심과 미소의 의미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가슴을 헤집었다.

마음의 고통은 좁은 눈물샘을 비집고 쉼 없이 터져 나왔다.

흐르는 눈물이 멎질 않았다.

숨죽인 채 눈가를 훔치는 이레의 곁엔 형운이 서 있었다.

서강율을 내려다보는 그의 표정은 심각했다.

미간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고, 눈가엔 잔주름이 가득했으며, 입술도 굳게 닫혀 있었다.

화가 난 것 같기도 했고, 짜증이 난 것 같기도 하였으며, 혼란에 빠진 사람처럼 보였다.

지독한 상실감.

느닷없이 다가온 상실의 충격과 슬픔, 고통과 분노, 억울함과 허무함에 당황하고 있었다.

잃는다는 것.

누군가가 떠나는 이별의 고통은 이미 알고 있었다.

글에서, 전하는 말로, 스승들의 가르침을 통해.

보고, 듣고, 배웠다.

수백 번 넘게 정확히 이해하고 인지하였다 생각하였건만.

직접 경험한 상실감은 그가 상상한 그 무엇과도 달랐으며 또한 지독한 고통이었다.

‘참으로 무엄한 자로구나.’

평소 무례하게 굴어도 은자의 의리와 정(情)으로 참아 넘겼더니, 이젠 이리 제멋대로 떠나는구나.

‘일어나라. 일어나서 평소처럼 굴어라. 그래야 오래 기다린 복수를 할 수 있지 않겠느냐?’

형운은 무표정한 얼굴로 소리 없이 외쳤다.

그러나 서강율은 이번에도 그의 뜻대로 따르지 않았다.

빙긋빙긋, 장난기 가득한 웃음으로 사람의 속을 긁어대더니. 오늘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작정이라도 한 듯 눈을 감고 뜨지 않았다.

‘일어나라. 지금이라도 일어난다면 내 삭탈관직은 하지 않을 터이니, 일어나라.’

서강율을 잃은 상실감은 스스로를 향한 자책이 되었고, 후회와 미련으로 남았다.

조가비처럼 닫혀버린 형운의 입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

이레와 형운에게서 멀지 않은 곳.

장무열은 바닥에 쓰러진 자들을 살피고 있었다.

기루를 지키던 무인들.

그들의 옷을 뒤지고, 인상착의를 기록했다.

그 와중에 범인 중 한 사람이 사라졌음을 알게 되었다.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채 여인을 고르던 사내.

마지막 선택을 망설이던 사내.

그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필시 혼란을 틈타 도주하였으리라.

기루의 무인들에 이어 장무열은 사헌부의 어사들을 뒤졌다.

죽은 어사들에게선 특이한 점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집의 김익현의 품에서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었다.

학(鶴)이 그려진 동패.

장무열의 눈동자에 이채가 떠올랐다.

학은 십장생 중의 하나였다.

그리고 그것은 서강율이 말한 하나의 단체와 자연스럽게 연결되었다.

서강율이 평생을 바쳐 뒤쫓던 자들.

만나길 소원해도 좀처럼 만나지 못했던…….

“십학사.”

장무열은 둥근 패를 꽉 움켜쥐었다.

어금니를 악문 그의 얼굴이 집요한 빛으로 번뜩였다.

***

경계에 걸렸던 시간의 추가 새벽으로 향해 기울어졌다.

세 명의 은자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슬픔을 표현하고 있던 그때.

죽음으로 가득한 기루에 바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어이쿠, 이게 뭔 일이래유.”

순박한 충청도 사투리.

큰 키에 다부진 체격을 한 사내가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기루 안에 펼쳐진 참상에 사내는 눈가를 찌푸렸다.

그러나 놀라기는 했어도 무서워하거나 불쾌해하지는 않았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거한은 형운과 이레에게 성큼성큼 걸어왔다.

“누구냐?”

형운은 성큼 한 걸음 나서 이레의 앞을 가렸다.

거한은 이마가 땅에 닿도록 허리를 깊숙이 접었다.

“쇤네는 몽돌이라고 하는구먼유.”

“몽돌이?”

몽돌이 기루 밖을 가리켰다.

“저짝, 남촌 하월집에 사는 현보 아시쥬? 그놈이 쇤네하고 죽고는 못사는 사이쥬.”

“강현보라면…… 팽례 강현보 말인가?”

“네. 그 친구가 제게 두 분께 전할 서신을 전해달라고 했구먼유.”

몽돌이 소매에서 서신을 꺼냈다.

하지만 형운은 서신을 받지 않았다.

대신 몽돌에게 물었다.

“내가 이곳에 있는 줄 어찌 알았느냐?”

몽돌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팽례가 원래 사람 찾는 게 일이네유.”

티끌 하나 없는 순박한 웃음에도 형운의 표정은 쉬이 풀리지 않았다.

거한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실은 이짝으로 오기 전에 수월에 들렀네유.”

이레가 둘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강현보, 그 사람은 내 부탁으로 궁으로 간 것인데. 어찌 서찰만 보냈소?”

“찾는 분이 궁에 안 계셨던 모양이어유. 서찰은 전해야겠는데, 궁의 분위기가 흉해 봬니, 저한테 부탁 한 거쥬. 두 분께 꼭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든 모양이어유.”

“궁의 분위기?”

형운은 몽돌의 손에 들린 서찰을 받아 읽었다.

급히 휘갈겨 쓴 서찰.

그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지금 즉시 궁으로 돌아가야겠다.”

“당장 말입니까?”

이레의 말끝에 잔물결이 일었다.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아직 은협의 죽음조차 제대로 받아들이지 못하였건만.

무에 또 다른 변고라도 생겼단 말인가?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형운은 고개를 끄덕였다.

“궁에 상서롭지 못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듯하다.”

궁에 수상한 조짐이 일고 있었다.

그것은 왕실의 뿌리를 뒤흔들 만큼 강력한 것이었다.

서둘러 걸음을 옮기는 형운과 이레에게 몽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런데…….”

몽돌이 순박한 웃음을 얼굴 가득 띄웠다.

“혹시 서 선비님 보셨남유? 한양으로 심부름 간다니께 행수 기생 월향이가 을매나 부탁을 하던지유. 서 선비님께 자기 안부도 꼭 전해달라 했서유.”

몽돌이 송아지 같은 눈을 끔뻑거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우리 서 선비님, 어디 계신대유? 함께 계신 줄 알았는디…….”

***

천하가 깊은 잠에 빠진 시간.

북촌 안국동, 홍봉한의 집에선 은밀한 대화가 오갔다.

“오늘 주상전하를 알현하였다 들었습니다.”

홍봉한과 마주 앉았던 아우, 홍인한이 말머리를 꺼냈다.

“진휼미와 군작미 문제를 논의키 위해 이번에 새로 산혜청 당상직으로 임용된 담와(澹窩)와 함께 주상전하를 뵈었느니.”

형의 말에 홍인한이 미소 지었다.

“담와 대감이 예문관 제학이 되신지 고작 아흐레가 흘렀습니다. 다시 선혜청의 당상이 되었으니. 담와 대감을 향한 전하의 총애가 남다른 듯합니다.”

“어험, 험.”

홍봉한은 불편한 헛기침을 연발했다.

“그 총애를 믿은 탓인지. 감히 탑전에서 곤란한 이야기를 꺼내는 통에 내 진땀을 뺐구나.”

“곤란한 이야기라니요?”

“근래 들어 동궁께서 신료들의 구대(求對:만날 것을 요청함)를 번번이 거절하시니. 소저께 만남을 요청하기 전에 전하께 먼저 아뢰더구나.”

홍인한이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전하께선 무어라 하시던가요, 형님?”

“무어라 하시긴. 동궁과의 만남을 어찌 내게 허락을 구하는가, 하시며 역정을 내시니. 그 사이에서 나만 죽을 맛이었다.”

“세자께 직접 요청하라는 뜻이로군요.”

“그런 셈이지. 담와는 어쩌자고 그런 말을 꺼냈는지, 원.”

마땅찮은 듯 홍봉한은 마른 입맛을 다셨다.

슬쩍 형의 눈치를 살피던 홍인한이 지나가는 투로 무심히 말하였다.

“세자 저하의 밀행이 잦은 탓에 소문이 무성합니다. 지금도 도성에 아니 계시다는 소문이 횡행합니다.”

“그것이 오늘의 일과 무슨 상관이더냐?”

“구대를 번번이 요청하는 까닭을 전하께 아뢸 작정인 게지요.”

“뭐라?”

“소저께서 신하들과의 대면을 거절하는 이유가 실은 도성에 아니 계신 까닭인 걸 아시면, 전하께서 그 행방을 물으실 것이고. 그리되면 동궁께서 북방으로 걸음 하신 것을 자연스레 아실 것이 아닙니까.”

“허나, 짐작하건대 전하께서는 세자 전하의 기행(奇行)을 논하고 싶지 않으심이 틀림없다. 그러니 이번 일은 그만 접는 것이 어떠하겠느냐?”

홍봉한은 세자의 밀행을 왕에게 알리는 일을 기꺼워하지 않았다.

아무리 세자의 뜻이 자신이 몸담은 당파의 바람과 대치된다 하나, 상대는 여식의 지아비가 아니던가.

사위 자식도 자식이거늘, 어느 부모가 자식의 몰락에 앞장서고 싶겠는가.

그 속내를 들여다본 듯 홍인한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몰아치는 폭풍은 인정이 없으며, 범람하는 강물은 도리를 따지지 않는 법입니다. 이미 시류가 기울었습니다. 되돌리기엔 너무 늦었습니다.”

“그러나…….”

“형님. 세자께선 본분을 잊고 신하들을 적대하고 있습니다. 주상 전하의 생각과 맞지 않는 부분이 많습니다. 이 싸움은 어느 한쪽이 뿌리째 뽑혀나가기 전엔 끝나지 않을 겁니다. 기류가 어느 곳으로 기울었는지 형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세자는 이미 격류에 휘말렸습니다. 구하려다간 함께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연이은 설득에도 홍봉한은 좀처럼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결국, 홍인한은 전략을 바꾸었다.

“형님, 세손만이라도 살려야 하지 않겠습니다.”

왕세자와 왕세손, 두 사람을 저울대에 올려놓는 순간 홍봉한의 갈등도 끝이 났다.

홍봉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조정의 돌아가는 판세가 심상찮음은 그 역시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생존을 위해 사위를 쳐내야 한다는 것이 껄끄러웠다.

하나, 세손을 지키기 위함이라는 명분이 있다면 아교처럼 발을 잡는 거리낌을 훌훌 털어버릴 수 있으리라.

“날이 밝으면 승지 홍준해를 만나보겠다.”

“홍준해는 관학의 유생들과 친분이 두텁다지요? 유생들 사이에 소문이 돌면 결국 주상전하께서도 아시게 되겠군요.”

홍인한의 입아귀가 비틀어 올라갔다.

주상전하의 깐깐한 성정을 잘 아는 까닭이다.

소문을 접하면 당장 닫혀 있는 동궁전의 열고 사실을 알려 하실 터이고, 세자의 부제 또한 확인하게 될 터였다.

그 소란에 약간의 향미료가 더해지면…….

십학사.

나와 그들이 내린 결론대로 흐르게 되리라.

감히 그 누구도 이 흐름을 바꾸지 못하리라.

***

팽례 강현보는 말을 타고 좁은 산길을 정신없이 내달렸다.

비탈진 산길은 험하고 미끄럽기까지 하였다.

바싹 마른 나뭇가지가 회초리처럼 얼굴과 몸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한양에서 이곳까지, 두 시진 넘게 쉬지 않고 달려왔다.

타고 있는 말이 거품을 물었다.

그러나 강현보는 멈출 수 없었다.

그의 품속엔 한시라도 빨리 전해야 할 서신이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서신을 전해야 한다.

서찰을 받을 분이 먼 북방 길에 오른 시각이 미시(未時) 말.

달의 움직임으로 보아 지금은 자정이 넘은 시각.

대략 네 시진 정도 뒤처졌다.

따라잡기엔 암담한 간극이지만, 질러가면 귀인께서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에 일을 마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일이 가능한 이유는 강현보가 가는 길이 특별했기 때문이다.

팽례만이 사용할 수 있는 길.

서신을 전하는 팽례에겐 나름의 등급이 있었다.

단순히 모시는 주인의 문안 서신을 전하는 팽례는 그들 사이에서도 가장 급이 낮은 자들이었다.

팽례들 사이에서 최고로 꼽히는 선수들은 좁은 한양뿐만이 아니라 조선 팔도를 달렸다.

그러려면 빠른 발과 더불어 길눈도 밝아야 했다.

강현보는 조선에서도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뛰어난 팽례였다.

그러기에 무려 네 시진이나 앞서간 사람들을 따라잡으려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계획은 예기치 못한 난관에 마주쳤다.

비탈길을 벗어나 간신히 길이라 부를 수 있을 법한 곳에 다다랐을 때였다.

검은 무복을 입은 한 무리의 사내들이 어두운 밤을 말을 타고 질주했다.

사냥꾼은 아니고, 관군은 더더욱 아닌 무리들.

그들은 칼과 활로 무장한 무사들이었다.

늦은 시간, 전신에 무기를 지닌 흑의인들이 떼를 지어 말을 달리고 있었다.

열 명은 족히 넘는 사내들의 기세가 예사롭지 않았다.

강현보는 서둘러 말머리를 돌렸다.

저들과 어떤 식으로든 엮이고 싶지 않았다.

문제는 강현보가 미처 달아나기 전에 수상한 무리들이 그를 발견했다는 점이다.

그들은 즉시 강현보의 뒤를 쫓아왔다.

그러곤 그 흔한 경고의 말 한마디 없이 다짜고짜 화살을 날렸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단 하나였다.

지금 그들이 하는 일은 누구도 알아선 안 된다는 것.

그리고 비밀유지를 위해 낯선 곳에서 만난 강현보를 제거하려 하였다.

‘재수가 없구나.’

한시가 급한 상황에 하필 저런 무리와 맞닥뜨리다니.

그러다 문득 든 생각에 머리끝이 쭈뼛 솟구쳤다.

작금의 모든 상황이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서찰을 전하기 위해 귀인의 뒤를 쫓는 팽례.

그 여정에 마주친 수상한 무리들.

과연 이것이 우연일까?

어쩌면 저들도 강현보가 만나려는 사람에게 볼일이 있을지도 모른다.

잠시 들른 궁의 흉흉한 분위기.

확신이 더더욱 깊어졌다.

‘길에서 벗어나야 한다.’

팽례들만 다니는 길로 뛰어든다면, 저들도 따라오지 못하리라.

그러나 강현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다급한 나머지 타고 있는 말의 상태를 살피지 않았던 것이다.

그의 말은 이미 한계에 다다른 지 오래였다.

지친 투레질을 반복하며 휘청이더니 끝내는 젖은 낙엽 위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이런!’

강현보는 재빨리 몸을 날렸다.

간신히 말 아래로 깔리는 낭패는 면할 수 있었다.

급할수록 돌아가라 했거늘.

때늦은 후회가 밀려들었다.

하지만 잠시 후.

천둥처럼 밀려온 말발굽 소리와 함께 화살 비가 머리 위로 떨어졌다.

강현보는 서둘러 짐을 고쳐매고 날다람쥐처럼 숲으로 내달렸다.

말을 탄 무리를 따돌리기 위해 젖먹던 힘까지 짜내어 달리고 또 달렸다.

그러나 말을 탄 무리를 따돌리기엔 역부족이었다.

소낙비처럼 쏟아진 화살 중 한 대가 강현보의 허벅지에 들어와 박혔다.

“컥!”

벼락이 다리를 관통한 듯한 충격.

가파른 산길을 뛰어오르던 강현보는 균형을 잃고 아래로 추락했다.

사정없이 굴러떨어진 그의 주위를 말 탄 무리가 빙 둘러쌌다.

“무얼 하는 놈이냐?”

싸늘한 물음이 떨어졌다.

강현보는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내가 묻고 싶은 말이오. 죄 없는 행인에게 이 무슨 산도적 같은 짓이오?”

강현보의 항의에 대답하는 이는 없었다.

대신 저희끼리 주고받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하겠느냐?”

“내가 하리다.”

“저놈 다리에 꽂힌 화살이 보이지도 않느냐? 내가 명중시켰으니, 마무리도 내가 하지.”

“닭 모가지도 제대로 못 비트는 놈이 무얼 해?”

“아서라. 제대로 못 하면 여러 사람 피곤해진다.”

“너무 쉬워도 재미없지.”

유난히 각진 턱을 지닌 사내가 말에서 뛰어내렸다.

그의 손엔 투박한 칼 한 자루가 들려있었다.

“갈 길이 멀다. 다른 일행과 합류하려면 서둘러야 한다.”

“알겠소이다. 적당히 할 테니 걱정 마시오.”

말과 달리 사내는 손바닥에 퉤퉤 침까지 뱉어가며 의욕을 보였다.

살기를 번들거리며 다가오는 사내의 모습에 강현보는 네 발로 기듯이 주춤주춤 물러났다.

‘어쩐다. 서찰을 늦지 않게 전해야 하는데. 여기서 꾸물거릴 시간이 없는데…….’

죽음이 목전에 닿은 상황에도 강현보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서찰을 전하는 것.

하지만 하늘을 나는 재주라도 없는 한, 이 상황을 모면할 방법은 없었다.

하다못해 다리라도 멀쩡했으면 좋으련만.

강현보는 화살 꽂힌 다리와 사각 턱의 사내를 번갈아 응시했다.

“흐흐, 날 원망하지 마라. 네놈의 명줄이 여기까지인 걸 어쩌겠느냐.”

사내가 칼을 들어 올렸다.

더는 피할 곳도 없었다.

강현보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아가씨, 송구합니다. 아가씨께서 부탁하신 일, 끝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누구에게 비는 것이냐? 부처님이냐, 아니면 알량한 네놈의 조상이냐? 멍청한 놈, 차라리 내게 빌었어야지. 그럼 단숨에 모가지를 쳐줄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히죽거리며 놀리던 사내가 칼을 내리쳤다.

푹!

날카로운 쇠붙이가 살집을 헤집는 섬뜩한 소음이 울렸다.

뒤이어…….

“크억!”

찢어지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강현보는 천천히 실눈을 떴다.

비명은 그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의 앞에서 칼을 들고 설치던 사각턱 사내.

사내가 앓는 신음을 내며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두 손으로 감싼 그의 목에 날카로운 비수 한 자루가 박혀 있었다.

***

“누구냐!”

“어느 놈이 감히!”

강현보의 죽음을 기다리던 흑의인들은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곧게 자란 자작나무들 사이로 검은 방립을 쓴 사내가 잡티 하나 섞이지 않은 흑마를 끌고 걸어 나왔다.

무리 중 하나가 성난 목소리로 소리쳤다.

“웬 놈이냐?”

검은 방립 사내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무것도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는 듯 그는 태연하게 근처의 나무에 말고삐까지 묶는 여유를 보였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수많은 살기 따윈 안중에도 없다는 듯한 태도.

그의 느긋한 모습에 흑의인들은 어이가 없었다.

그럼에도 그들 중 누구도 선뜻 방립 사내에게 달려들지 못했다.

방립 사내가 자아내는 분위기가 범상치 않은 까닭이다.

“이놈, 대체 뭐 하는 놈이냐고 물었다.”

적당히 거리를 둔 채 흑의인이 다시 물었다.

방립 사내가 그제야 고개를 돌렸다.

“이상한 녀석들이군.”

“무어라?”

검은 방립 사내가 쓰러진 자를 턱짓했다.

“저 꼴을 보고도 미련하게 내 정체를 묻느냐? 피차 바쁘고 오래 볼 사이도 아니니, 잔말 말고 덤벼라.”

“이런 미친놈을 봤나.”

흑의인 중 셋이 발끈하며 말에서 뛰어내렸다.

그 순간, 방립 사내가 손을 허공으로 흩뿌렸다.

휘리릭!

손가락 길이의 비수(匕首) 세 자루가 허공을 갈랐다.

“하늘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는 저놈의 입을 당장 찢…… 컥!”

걸쭉한 욕지거리와 함께 말안장에 걸린 무기를 꺼내던 사내가 발작하듯 옆으로 쓰러졌다.

그의 이마 정중앙에 비수 한 자루가 꽂혀 있었다.

다른 두 흑의인 역시 방립 사내의 비수를 피하지 못했다.

하나는 뒤통수에, 다른 하나는 가슴 한복판에 비수가 꽂혔다.

힘없이 허물어지는 동료의 모습에 남은 흑의인들은 숨을 집어삼켰다.

“저, 저놈이…….”

“죽여라!”

뒤늦게 상대의 실력을 눈치챈 흑의인들이 서둘러 맞대응했다.

더러는 칼을 뽑아들었고, 또 몇은 활에 화살을 메겼다.

때맞춰 방립 사내가 몸을 움직였다.

가만히 선 채 여유를 부릴 땐 한없이 게으르더니, 일단 달리기 시작하자 세상 그 누구보다도 빠르고 날렵했다.

땅을 달릴 때는 가볍고 민첩한 것이 여우와 같고, 나무에 오르는 경쾌한 모습은 삵을 떠올리게 하였다.

허공을 박차고 떨어져 내릴 때는 참수리를 방불케 했다.

그의 빠른 몸짓에 흑의인들의 화살은 빈 허공으로 떨어졌다.

반대로 방립 사내의 비수는 그야말로 백발백중(百發百中), 빗나가는 일이 없었다.

휘리릭, 휘릭!

방립 사내가 소맷자락을 휘두를 때마다, 음산한 소리가 숲을 갈랐다.

세 번의 호흡.

그때마다 어김없이 비수가 날아가고, 흑의인이 쓰러졌다.

세 호흡마다 누군가는 반드시 죽는다.

하나둘 쓰러지는 동료의 모습에 흑의인들은 공포에 휩싸였다.

결국, 마지막 두 명만이 남게 되었을 때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도망을 택했다.

하지만 방립 사내는 그들을 놓아주지 않았다.

마지막 세 호흡째, 그는 두 자루의 비수를 동시에 뿌렸다.

둔탁하고 선뜩한 소음과 함께 도망치던 두 흑의인이 동시에 쓰러졌다.

“괜찮은가?”

순식간에 상황을 정리한 방립 사내가 강현보에게 걸어갔다.

아름드리나무에 등을 기대고 앉은 강현보가 놀란 눈으로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자두나무 큰손님 아니십니까?”

강현보가 방립 사내에게 알은체했다.

“이곳엔 어찌…….”

“우연히 지나던 길이었네.”

강현보의 얼굴에 마른 미소가 피어올랐다.

“정말 신기한 우연이 다 있네요.”

이 깊은 산 중에서의 만남이 우연일 리 없다.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아직 불편하네.”

“불편한 정도가 그렇습니까?”

그의 손에 쓰러진 흑의인들을 둘러보며 강현보는 혀를 내둘렀다.

팽례 중 가장 뛰어난 사람이라더니.

소문이라, 많이 부풀려진 줄 알았건만, 그것도 아닌 모양이다.

어쨌거나 다행이다.

“많이 불편하지 않으시다면, 부탁 하나 해도 되겠습니까?”

“하게.”

강현보는 품에서 서찰을 꺼냈다.

이레가 그에게 부탁한 서찰이었다.

“이 서찰을 저 대신 어느 분께 전해주십시오. 팽례라는 작자가 남에게 일을 미루는 건 부끄러운 일이나, 워낙 시급을 다투는 일인지라.”

다친 다리로 북방으로 향한 사람을 쫓는 건 무리였다.

“우리가 남인가? 팽례끼리 서로 돕고 사는 건 당연한 일이지.”

방립 사내가 서찰을 챙겼다.

“도움이 필요한가?”

강현보는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죽을 정도의 부상은 아닙니다. 인근에 마을도 있고, 마침 주인 잃은 말이 많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알겠네. 그럼, 곧 다시 보세.”

서찰을 챙긴 방립 사내가 말에 올랐다.

떠나는 그의 등에 대고 강현보가 크게 소리쳤다.

“중요한 서찰입니다. 늦기 전에 반드시 전해야 합니다.”

“걱정 말게. 내가 누구인지 잊었는가?”

“물론 알고 있습니다.”

강현보는 빠르게 멀어져가는 방립 사내를 보며 희미하게 웃었다.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팽례 아니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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