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은협, 서강율
“어?”
허상익의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그는 손으로 눈을 비볐다.
피곤한가?
헛것이 다 보이는군.
그러나 아무리 눈을 비벼도 눈앞에 펼쳐진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느닷없이 장무열을 향해 검을 내리친 집의 김익현.
그리고 그런 장무열을 구하기 위해 몸을 날린 서강율.
서걱!
섬뜩한 소음과 함께 서강율의 가슴에 긴 사선이 그려졌다.
검붉은 피가 샘처럼 솟구쳤다.
“어찌, 어찌 저런 일이…….”
허상익의 입이 떡 벌어졌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기루에 처음 들어설 때만 해도.
아니, 사헌부를 떠날 때만 해도 이런 광경을 보게 될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두 시진 전.
사헌부로 한 통의 전갈이 도착했다.
장무열이 보낸 것이었다.
납치범들의 소재가 파악되었으니, 지원군을 보내달라는 내용이었다.
공방거리에서 돌아온 허상익은 뒤늦게 장무열을 서신을 확인하고 코웃음을 쳤다.
수많은 어사와 군졸들이 필사적으로 뒤지고 수소문해도 해내지 못한 일을 어찌 혼자 힘으로 해결할 수 있단 말인가.
수사에서 제외된 일에 앙심을 품고 방해하려는 수작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집의 김익현은 허상익과 생각이 달랐다.
그는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장무열의 전갈을 자세히 살핀 김익현은 열 명의 어사를 급히 불러들였다.
그들 모두 김익현이 특별히 아끼는 어사들이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허상익에게도 동행 여부를 물었다.
“너도 함께 갈 테냐?”
김익현의 제안에 허상익은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집의와 사건 현장에 함께 가는 것이 이번이 두 번째.
자신을 특별히 챙기고 있음이 분명하였다.
허상익은 들뜬 마음을 애써 감추며 말을 달렸다.
어두운 산길을 미친 듯이 질주하여 마침내 도착한 현장.
그곳엔 엄청난 광경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방에 널브러진 무인들.
코를 찌르는 비릿한 혈향.
구석에서 떨고 있는 회임한 여인들.
장무열의 서신은 거짓이 아니었다.
그는 정말로 납치범들의 소굴을 발견한 것이었다.
그리고 힘없는 여인들을 지키기 위해 최악의 상황에서도 전력을 다해 싸웠다.
사헌부 전체가 달려들어도 하지 못한 일을 홀로 해냈다.
피에 젖은 검을 비껴들고 있는 장무열의 모습을 보는 순간, 허상익은 충격을 받았다.
또한, 전율했다.
하지만 놀라움도 잠시.
더더욱 눈을 의심케 하는 장면이 이어졌다.
김익현이 돌연 검을 휘두른 것이다.
허공을 가로지르는 섬뜩한 소음.
그리고 장무열 대신 피를 뿜으며 쓰러진 서강율.
허상익은 경악으로 일그러진 눈으로 그 모든 광경을 지켜봤다.
사헌부 집의가 같은 소속의 장령을 죽이려 했다.
대체 왜?
무슨 이유로?
***
“이게 무슨 짓이오?”
피를 쏟으며 쓰러지는 서강율을 가까스로 안아 든 장무열이 김익현에게 소리쳤다.
김익현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저 못마땅한 표정으로 가볍게 혀를 찰 뿐이다.
대답은 전혀 다른 곳에서 흘러나왔다.
“그래, 이제야 알겠어.”
장무열의 품에 안긴 서강율은 쿨럭, 피를 토하며 말을 이었다.
“이상하다 생각했지. 그간 참으로 이상했어.”
장무열은 손바닥으로 서강율의 가슴을 지혈했다.
그러나 어림없었다.
그의 손으로 막기엔 상처가 너무 컸다.
“말하지 마라.”
장무열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서강율은 다시 입을 열었다.
“천하가 좁다 하고 조선 팔도를 누볐으나, 정작 십학사의 그림자도 발견할 수 없었으니. 그나마 간신히 찾아도 언제나 한발 늦곤 하였지. 이제야 이해되는군. 애초에 내 손에 들어오는 정보가 잘못된 것이었어.”
암행대의 유일한 어사인 그는 팔도 곳곳에 사람을 심어두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적의 세력 역시 전국 곳곳에 있으니, 혼자 힘으로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사헌부에서 부족한 정보를 충당하곤 하였다.
“애초에 사헌부에서 작성한 자료가 조작된 것이었어. 교묘하게 조금씩 어긋나 있었던 거지. 그래서 언제나 늦었던 게야.”
집의 김익현.
사헌부의 어사들을 진두지휘하던 그가 십학사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것이다.
“아니, 협조하는 정도가 아닌가? 이런 일을 벌일 정도면 제법 한 자리 차지하고 있을 터.”
이번 납치 사건만 해도 그렇다.
이 정도까지 철두철미하게 숨기려면 적잖은 공을 들여야 한다.
일이 잘못되면 단순한 문책 정도로는 끝나지 않는다.
그런 위험에도 불구하고 이만한 일을 꾸미려면…….
“무엇이냐?”
서강율의 눈에 불꽃이 피어올랐다.
그는 집어삼킬 듯한 시선으로 김익현을 노려보았다.
“집의 김익현. 그대는 십학사 중 무엇이냐?”
서강율은 확신했다.
김익현은 필시 십학사 중 하나다.
그간 필사적으로 찾아 헤매던 십학사를 드디어 찾아낸 것이다.
서강율의 물음에도 김익현의 무심한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십학사? 헛소리를 잘도 그럴듯하게 하는구나.”
“이제 와 발뺌할 생각이냐?”
“수작질은 오히려 네놈들이 부리고 있는 게 아니더냐?”
김익현은 근엄한 표정으로 장무열과 서강율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너희는 납치범들과 한 패렷다!”
“기가 차는군. 이곳의 상황을 두 눈으로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느냐?”
“제 놈들끼리 이권 다툼이 있었겠지. 더 큰 이득을 갖고자 서로 충돌하였고, 급기야 이런 참극을 벌인 것이다.”
김익현의 억지에 장무열의 표정이 싸늘하게 식었다.
그의 꿍꿍이를 눈치챈 것이다.
집의는 서강율과 장무열, 두 사람을 범인으로 몰 생각이 분명했다.
김익현의 뻔뻔한 말이 이어졌다.
“범인이 아니라면 너희가 어떻게 이곳을 찾아올 수 있었겠느냐? 수많은 어사가 밤잠을 아껴가며 조사해도 찾지 못한 장소를 대체 무슨 수로 찾았느냔 말이다. 운이 좋아서? 흥, 차라리 적과 한통속이라는 말이 더 설득력 있을 것이다.”
서강율이 지지 않고 소리쳤다.
“증인들이 있다. 여인들이 증언할 것이다.”
“너희가 이미 협박하였겠지. 목에 칼을 대고 죽인다고 협박하는데, 누가 진실을 말하겠느냐? 여봐라. 이자들을 당장 포박해라. 내 직접 사헌부로 끌고 가 심문하겠다. 극악한 자들이니 저항하면 죽여도 좋다.”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어사들이 일제히 검을 뽑았다.
장무열도 검을 들고 서강율의 앞을 지키듯 섰다.
하지만 굳건한 의지와 달리 그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김익현은 조소했다.
“헛된 발악을 해보겠다?”
“…….”
“심문할 가치도 없는 놈들이로군. 쳐라!”
김익현의 입에서 최후통첩이 떨어졌다.
그와 동시에 기루 밖에서 매서운 일갈이 날아들었다.
“멈춰라!”
장무열에게 달려들려던 어사들이 때마침 들려온 소리에 발을 멈췄다.
곧 세 명의 사내와 한 여인이 기루 안으로 들어왔다.
“대체 어떤 놈들이…… 으음.”
불청객의 난입에 김익현은 미간을 찡그렸다.
그러다 이내 얼굴을 확인한 그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당신은…….”
형운과 이레, 그리고 좌익위 최치성과 우익위 홍인모였다.
***
한 시진 전.
형운과 이레는 공방 골목에서 박진봉과 대면하였다.
헙수룩한 겉모습과 달리 박진봉의 계획은 치밀하였다.
십학사의 계획에 방해되는 만사여의를 해치우려 했으며, 동시에 흉흉한 사건의 범인으로 김기대를 지목하여 이레와 형운을 끌어들였다.
거미가 거미집을 짓듯 치밀하게 설계된 음모.
그의 예측대로 형운과 이레는 그의 거미줄에 걸렸다.
하지만 이후의 상황은 그의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마치 예상이라도 한 듯 형운이 수월의 무사들을 준비해 두었기 때문이었다.
일촉즉발의 상황은 금세 역전되었다.
사건에 개입한 자들 대부분을 잡거나 쓰러트릴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박진봉을 비롯한 몇 명을 놓쳤으나, 이쪽에선 아무도 다치지 않고 상황을 정리할 수 있었다.
사건을 수습한 형운과 이레는 뒷일을 만사여의 한서로에게 맡겨두고 곧장 이곳으로 말을 달렸다.
적들의 본거지로 달려간 은자원의 은자들이 걱정되었던 까닭이다.
쉬지 않고 말을 달린 덕에 그들은 간신히 최악의 사태만은 막을 수 있었다.
“세손 저하?”
형운을 알아본 김익현은 놀람을 금치 못했다.
“이곳에서 세손 저하를 뵙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어찌 세손이 이곳에 있는 것일까?
그가 알고 있는 세손은 이곳에 있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매사 근면 성실한 세손은 내성적이며 소심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러기에 이른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왕의 엄격한 계획대로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생활한다고 알고 있었다.
그런 세손이 잠행에 나섰다.
그것도 여인과 함께.
“아무래도 세손 저하에 관한 소문은 크게 잘못된 모양입니다.”
“나도 그대가 배신자일 줄은 상상도 못 했구나.”
피투성이가 된 채 기식이 흐린 서강율과 그를 지키는 장무열.
그리고 그들과 대치한 어사들의 험악한 분위기.
굳이 설명을 듣지 않아도 지금 상황이 어찌 돌아가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서강율과 장무열.
형운의 마음에 꼭 들어차는 사람들은 아니지만, 어설픈 배신을 할 사람들도 아니었다.
저리 대치하는 상황을 보아하니, 잘못은 틀림없이 어사들이 하고 있으리라.
예상치 못한 상황에 형운은 생각이 깊어졌다.
‘귀찮게 되었군.’
김익현 역시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세손이 나타난 것은 의외의 상황이지만, 다행히 좌우익위 두 사람을 제외한 다른 호위는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이곳에서 모조리 죽이고 장무열에게 뒤집어씌우는 게 좋겠구나.’
세손의 죽음은 분명 심각한 사태였다.
하지만 그 세손이 몰래 궁을 빠져나온 것이라면…….
경솔하게 행동한 세손에게 불행한 사건이 없으리란 보장은 없다.
물론, 세손을 죽이는 일이니만큼 뒤처리를 깨끗하게 해야 한다.
관련된 자들의 입막음은 물론이고, 우연한 목격자도 없어야 하리라.
김익현은 기루 한구석에 몰려 있는 여인들을 응시했다.
불쌍한 여인들의 운명이 결정되는 순간이었다.
결심을 굳힌 김익현이 돌연 어사들에게 명을 내렸다.
“지금 보니 세손 저하 행세를 하는 가짜들이다. 역모를 꾸미는 자들이 분명하니, 모두 잡아들여라.”
어사들이 당황하는 건 당연했다.
어사들 모두 먼 발치에서나마 세손을 본 적이 있었다.
저 또렷한 이목구비와 미려한 자태는 멀리서도 눈에 띄었더랬다.
그러기에 쉬이 가짜를 내세울 수 없는 용모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하, 하오나…….”
눈앞의 사람은 세손이 분명했다.
그에게 칼을 겨눔은 곧 역모와 다름 없었다.
주저하는 어사들을 김익현이 재촉했다.
“아직도 모르겠느냐? 되돌리기엔 이미 늦었다.”
“……!”
그의 한마디에 어사들은 비로소 상황을 깨달았다.
사헌부의 수많은 어사들 가운데 김익현이 하필 그들을 고른 데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들은 크건 작건 간에 십학사와 관계가 있었다.
그런 거래가 외부에 알려지면, 끔찍한 최후만이 있을 뿐이다.
굳은 표정의 어사들은 하나둘 검을 뽑았다.
“감히!”
“네놈들이 지금 누구에게 검을 겨누는 것인지 알고 있느냐?”
최치성과 홍인모가 즉각 검을 뽑으며 매서운 한기를 뿜어냈다.
그러나 김익현과 어사들은 물러나지 않았다.
그들은 이미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넜다.
살길은 오직 하나.
몰살(沒殺).
그 누구도 이곳에서의 일을 알아선 안 된다.
김익현도 더는 어설픈 수작을 부리지 않았다.
“세손의 좌우익위가 제법 출중한 실력을 가졌다 들었다. 하나, 고작 두 사람뿐이니. 어사 열을 감당할 수는 없을 터.”
수도 압도적이고, 실력 또한 부족하다 않았다.
어사들은 문무 모두에 능했다.
어중이떠중이들이 모인 도적무리와는 비교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걸리는 것이라면, 배후의 장무열 정도.
“허 비방주, 장무열을 처리해라. 그는 역도들과 손을 잡고 천인공노할 음모를 꾸몄다. 그를 처리한다면, 장차 네 앞길은 내가 책임질 것이다. 그래, 주인이 없어진 장 장령의 자리는 이제 네것이다.”
김익현은 허상익의 욕심을 알고 있었다.
허영과 공명심에 불타는 허상익이라면 충분히 자신의 입맛에 맞춰 움직이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평소라면 허상익이 장무열을 당해내지 못할 테지만, 지금이라면…….
수많은 적을 상대하여 기진맥진한 상황이니 별 무리 없으리라.
“……싫습니다.”
허상익의 입에서 뜻밖의 대답이 흘러나왔다.
“뭐라?”
김익현의 눈꼬리가 꿈틀 경련을 일으켰다.
“따를 수 없다 하였습니다.”
“네가 미쳤구나. 다시 한번 기회를 주마. 내 말을 따르지 않으면 죽게 될 뿐이다.”
“아마도 그렇겠지요. 하나…….”
안다.
말도 안 되는 고집이라는 것을.
잠시 잠깐, 김익현의 제안에 귀가 솔깃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장령.
언제나 꿈꾸던 자리가 아니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허상익은 장무열에게 칼을 겨눌 수 없었다.
지금도 그는 이 기루에 들어선 순간을 잊을 수 없었다.
한 자루 검을 비껴든 채, 피 웅덩이 위에 서 있던 장무열의 당당한 모습.
그 의연한 모습이 그의 눈과 마음에 선명하게 새겨졌다.
그것은 어느새인가 권력의 노예로 전락한 그의 굳어버린 심장을 다시 뛰게 하였다.
사헌부의 어사가 되었을 때 느낀 희열과 포부를 일깨워주었다.
그러니 할 수 없었다.
자신이 꿈꾸던 사내에게 칼을 겨누는 짓은.
“……머저리 같은 놈!”
김익현은 화가 치밀어올랐다.
세손의 출현부터 허상익의 예기치 못한 저항까지.
오늘따라 일이 자꾸만 꼬이는 느낌이다.
“더는 망설일 필요 없다. 모조리 죽여라!”
어사들에게 명을 내린 김익현은 그 스스로도 검을 뽑았다.
‘우선 세손부터.’
그는 형운의 목을 노렸다.
그때였다.
“집의 김익현!”
누군가 그의 이름을 큰 소리로 불렀다.
장무열이었다.
성난 외침과 함께 장무열이 두 눈을 번뜩이며 달려들었다.
김익현은 어이가 없었다.
당장 기절해도 이상하지 않을 놈이 도망은커녕 도리어 달려든다?
“죽으려고 발악하는구나.”
제 죽는 줄도 모르고 불로 달려드는 부나방과 다를 바 없는 미친 짓거리.
“저희가 하겠습니다.”
김익현을 대신하여 어사 둘이 장무열을 맞으러 나섰다.
“잔챙이들은 잔챙이들끼리 놀아야지.”
허상익이 온몸을 던져 그들의 앞을 막아섰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모두가 주춤한 사이, 장무열이 허공으로 박차 올랐다.
절벽을 뛰어넘는 야수처럼 힘차게 날아오른 그가 위세에 눌린 김익현의 가슴에 검을 꽂았다.
김익현이 뒤늦게 대응하려 하였다.
하지만 그땐 이미 차가운 쇠붙이가 심장 어림을 가르고 지나간 이후였다.
“컥!”
김익현은 두 눈을 부릅떴다.
두 뺨과 턱에 잔 경련을 일으키며 장무열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이렇게 갈 수 없다는 듯, 이리 허망하게 죽을 수 없다는 듯.
그동안 들인 공과 노력이 얼마인데.
여기까지 오기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을 감수하였는데.
“이, 이, 이…….”
고작 한 발짝.
한 걸음만을 앞두고 이렇게 허망하게 죽을 순 없다.
하지만…….
그는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죽음뿐이었다.
사헌부의 집의, 김익현.
십학사의 학사이자, 문 소원을 이용하여 원대한 야망을 꿈꾸던 그의 최후는 그렇게 허망했다.
***
김익현의 죽음 이후, 사태는 빠르게 정리되었다.
어사들은 마지막까지 저항했지만, 우두머리를 잃은 들짐승 무리가 으레 그런 것처럼 얼마 버티지 못하고 무너졌다.
세손인 형운의 무예 실력도 승패에 크게 한몫했다.
책벌레로만 알려진 세손은 검을 손에 쥐자마자 흉포한 야수로 돌변하였다.
열 명의 어사 중 무려 넷이 그의 손에 쓰러졌다.
그렇게 다급했던 상황은 일단락됐다.
하지만 그 누구도 웃지 못했다.
쓰러진 은자가 있었던 까닭이다.
은협, 서강율.
그의 주위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스스로 흘린 핏물 위에 누운 그에게선 이미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고 있었다.
“은협!”
그의 참담한 모습에 이레는 입술을 말아 물었다.
형운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고, 비틀비틀 돌아온 장무열은 말없이 그의 곁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레는 치맛자락을 찢어 서강율의 상처를 열심히 감쌌다.
하지만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이가 느끼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소용없다는 것을.
그럼에도 이레는 서강율의 죽음을 조금이라도 뒤로 미루고자 안간힘을 썼다.
“우리 은랑, 참으로 곱소. 그간 은랑과 이런저런 이유로 승부하였는데, 아무래도 마지막 승자는 나인 것 같소. 날 보며 그리 안절부절못하는 걸 보면 말이오.”
“말하지 마십시오. 지금은 조금이라도 기력을 아껴야 합니다.”
서강율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말해야 할 것 같소. 지금이 아니면 한동안 못할 것 같으니.”
그는 형운에게 시선을 돌렸다.
“은백, 앞으로 우리 은랑 잘 부탁하오. 알고 보면 우리 은랑, 참으로 기구한 팔자라오. 그러니 더는 고생하지 않게 해주오. 부탁해도 되겠소?”
“……맹세하마.”
“이제 와 하는 말이지만, 은백이 세손 저하이심은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알고도 모른 척 능청을 떨었으니 능지처참당해야 마땅하나, 부디 은자원의 정리로 봐주십시오.”
“용서하지 못하겠다. 알고도 그리하였으니, 내 기필코 널 삭탈관직하여야겠다.”
“세손 저하께서 그리 말씀하시니, 진정 그리될까 두렵습니다. 부디 그 계획은 제 노후까지 미뤄주십시오.”
빙긋 미소를 보인 서강율은 장무열을 보았다.
장무열은 뒤돌아 앉은 채 그를 보려 하지 않았다.
장난스럽던 서강율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청상, 자네가 찾던 형수님이 여기 아니 계시네. 놈들의 대화로 미루어 보아 잡혀 온 여인 중 한 명이 궁으로 보내진 모양일세. 어쩌면 그 여인이 자네가 찾는 그 여인일지 모르겠군.”
장무열은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청상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이제야 이쪽을 봐주는군.”
“…….”
“미련하고 끈질기고 우직한 친구. 일전에 했던 말 기억하는가? 언젠가 우리 은랑이 했던 말이라네. 우리는 한 나무에서 난 가지처럼, 비록 가는 길은 달라도 근본은 하나인 것을.”
장무열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서강율의 말엔 뼈가 있었다.
마치 그의 속사정을 훤히 아는 듯 느껴졌다.
“잊지 말게. 자네가 어디에 있건 은자원의 은호인 것을. 어디에 있건…… 침통을…… 꼭…….”
서강율의 음성에서 급격하게 생(生)의 기운이 빠져나갔다.
“은협!”
이레가 다급하게 그의 손을 잡았다.
하지만 먼 곳으로 떠나는 그를 붙잡을 수는 없었다.
서강율이 한결 편해진 얼굴로 미소를 보였다.
“이젠…… 괜찮소. 아프지 않으니. 은랑, 언제나 그대 곁에 있겠다 하였는데, 그 약속 잠시 미뤄야겠소. 다음엔 꼭…… 아아! 김기대, 이 야속한 친구야.”
미련을 삼키던 그가 단말마처럼 소리쳤다.
“저하, 세자 저하! 그 큰 뜻, 반드시 이루소서!”
서글픈 외침을 끝으로 서강율의 숨이 끊어졌다.
툭, 이레와 잡고 있던 손에 힘이 빠졌다.
장난기 가득했던 미소도 사라지고 없었다.
은협, 서강율.
최후의 암행어사이자, 마지막까지 세자의 앞날을 걱정한 충신.
그는 동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안식의 땅으로 떠났다.
***
“이런…….”
바쁘게 말을 달리던 왕세자의 입에서 낭패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무슨 일이옵니까?”
앞서간 호위무사가 되돌아왔다.
“말 고삐가 끊어졌구나.”
언젠가 서강율이 남해에 다녀온 기념이라며 진상한 선물이었다.
기왕 선물하려면 안장과 함께해야지.
겨우 고삐가 뭐냐며 트집을 잡았더랬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부드럽게 질긴 맛이 남달라 말을 탈 때면 언제나 애용하였다. 한데, 그 말고삐가 예고도 없이 끊어진 것이다.
“어허, 어찌 이런 일이…….”
불길한 느낌에 세자는 말머리를 돌렸다.
밤새 먼 길을 달린 터라.
끝없이 펼쳐진 어둠 어디에서도 한양의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세자는 멍하니 지나온 길을 뒤돌아보았다.
형언할 수 없는 이 불안은 대체 무슨 연유란 말인가.
자꾸만 미련이 생겼다.
무언가 중요한 것을 저편 어딘가에 두고 온 것만 같았다.
“저하, 서두르셔야 하옵니다.”
호위무사가 끊어진 말고삐를 바꿔주었다.
새것임에도 왠지 어색하고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손에 익지 않아서인가? 아무래도 다음에 그 친구에게 하나 더 가져다 달라 해야겠군.”
세자는 다시 북방으로 말을 달렸다.
긴긴밤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